가룟유다, 그는 가장 불쌍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기려 한 것일까? 그리고 난 후에 그는 분명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는데, 왜 궁극적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인가? 그리고 그는 죽어서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지옥인가? 아니면 다른 곳인가? 성경이 들려주는 그의 최후의 운명은 과연 어디인가? 그리고 오늘날 자살하는 모든 사람은 다 지옥으로 가는 것인가? 여기 그 대답이 들어있다.

 

2022-06-12(주일) 주일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07) 가룟유다, 그는 지옥에 떨어졌을까?(가룟유다의 최후와 맛디아 선출)(행1:15~2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WSg0zLks3gk  [혹은 https://tv.naver.com/v/27323630 ]

 

1. 들어가며

  가룟유다는 죽어서 과연 어디로 갔을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12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기고 말았다. 나중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책하던 가룟 유다는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그럼,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곧바로 지옥으로 갔던 것일까? 성경에서는 "제 곳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행1:25), 제 곳으로 갔다는 말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이와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성도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어떤 노인이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것도 자살이라고 봐야 하는가? 오늘은 가룟 유다의 자살을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가 잘못 되었음을 본인이 직접 시인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 심히 아파했다. 뉘우쳤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죄를 왜 용서받지 못한 것일까? 한편 가룟유다 대신에 보선하여 들어온 '맛디아'라는 인물은 대체 누구이며, 베드로는 왜 궐이 난 가룟 유다의 자리 대신에 굳이 새로운 사람을 보선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인가? 원칙은 맞다. 왜냐하면 자살도 일종의 살인죄에 해당하는데, 자살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을 살인한 죄를 용서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죄들은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어도, 자살한 죄에 대해서만큼은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살한 자는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계21:8). 고로 자살에 대한 결과로서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분류한다면 가룟유다는 분명 지옥에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는 어떠한가?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어떤 노인이 잠깐 깨어나서 자기의 인공호흡기를 스스로 떼어버렸다고 치자. 그리고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고 치자. 이 노인은 자살한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그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노인은 자기가 자기를 죽인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가? 이럴 때에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운명이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보니 새로운 장소가 있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성밖(바깥 어두운데)'이라는 장소다(마25:10, 계22:15). 성도가 죽었을 때에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럼, 새 예루살렘 성밖은 지옥인가 천국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한 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래서 결론이 난 것은 성밖을 결코 '천국'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곳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마25:30). 실제로 주님께서도 결코 그곳에는 심방을 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형벌을 받기도 한다(마24:51). 그러므로 그곳을 '천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두고 무조건 그를 가리켜 "지옥에 떨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지옥'이라는 말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 곧 불못을 가리키는데, 믿는 이들 중에 죄를 해결하지 못해 성밖으로 가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막9:43). 그리고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보면, '불못'(계21:8)과 '성밖'(계22:15)은 분명 다른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살한 이들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람은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안 곧 천국에는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을 죽인 죄에 대해서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시켜 버림으로 자신이 지은 살인죄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한 자는 최소한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3. 가룟유다는 죽어서 어디로 갔는가?

  그렇다면 가룟유다는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2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그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마27:3~5, 행1:18~19). 그는 예수께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안 후에 스스로 뉘우쳐 자기가 예수님을 넘겨준 값으로 받은 은 30냥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갔다 주었다(마27:3). 그리고 말했다.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그가 당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다는 은 30을 성소 안으로 던져버린 후에 스스로 물러가서 목을 매어 죽음을 선택한다(마27:5).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서는 베드로가 이후에 되어진 일들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려준다. 그것은 그가 목을 매단 이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와서 죽었다는 것이다(행1:18). 아마도 그가 목을 매단 나무가 부러졌든지 아니면 끈이 떨어졌든지 그가 나무에서 떨어졌고 그때 받은 충격이나 어떤 요인으로 인해 배가 터졌으며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장기들이 쏟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고도 했다(행1:19).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성소에 던져버린 그 돈으로 밭을 샀는데, 그 밭의 이름을 "아켈다마(피밭)"라고 부르며,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는 것이다(행1:19). 

  둘째, 그가 자살한 후 자기의 직무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의 자리(장소) 안으로 가기 위하여 옆으로 걸어갔다는 것이다(행1:25).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자신이 이땅에 보내어질 때 그에게도 어떤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봉사의 직무와 사도의 직무였을 것이다(행1:25). 그리고 그가 그것을 성실히 감당했다면 그는 하늘에 이미 준비된 그의 보좌 자리를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직무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신이 선택한 자리(장소) 안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 '성밖'이요 더 나아가서는 '불못'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가룟유다는 후회만했는가 회개도 했는가?

  그렇다면 가룟유다는 자기의 스승을 판 죄에 대해서 어떻게 여겼는가? 제일 처음 그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자기의 스승을 그들에게 넘겨줄 테니까 얼마나 주겠는지 흥정을 하였다(마26:14~16).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은 30을 받고 주님을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은 30'이라는 돈은 노예 1명 값어치 수준 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가 돈이 탐이 나서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뜻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의 한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스승의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제자였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 정도 되면 로마에 대항하여 싸워서 얼마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자극시키고자 일부러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분연히 일어나 대제사장들과 또한 이들과 결탁한 로마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로 그리하여 새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고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순순히 붙잡혀 죽으러 가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죄에 대해 자책하게 되었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자기가 그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 다른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그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배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팔아넘겨야 하는데, 가룟유다가 그 일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을 넘겨서 죽게 한 것은 잘 한 일이요 상 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는 그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죄책에 시달리게 되었고 자신의 양심의 참소를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지옥에 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에 대한 구약 예언을 이룬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어떠한가? 그럴듯 해 보이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것은 거의 궤변수준이 아닌가 판단된다. 가룟유다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져지자 예수님을 자극해서라도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스승이 되도록 조종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스승을 팔아 넘긴 죄를 가룟유다가 회개를 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그가 자살하여 죽은 시점은 아직 예수님께서 죽지 않은 시점이었다. 예수께서 잡혀서 시위대 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라도 가룟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늦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라도 예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용서해주시기를 청했으면 그는 아마 용서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를 후회까지는 했지만, 회개는 안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라는 것은 첫째,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둘째, 그것에 대해 스스로 뉘우쳐 그 죄에 대해 아파하는 것이며, 셋째, 그 죄값에 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처우를 하나님께서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둘째 단계까지 행했지만 셋째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고로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안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살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의미없게 만들어버린 격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죄값을 담당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그 죄값을 예수님께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받으려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가룟유다는 자신이 처리하려고 했을 뿐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간 후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죄인 것이다. 고로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안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돌아온 탕자가 어떻게 되어서 자신이지은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살펴보자. 그는 첫째, 그는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리고 둘째,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잘못된 것을 뉘우쳤다. 그리고 셋째, 그리고 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각과 감정와 의지를 동원한 회개의 3요소가 다 들어있는 회개인 것이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처음 2가지 것들은 행했지만 마지막 세 번째 것은 행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성밖이나 혹은 불못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5. 왜 베드로는 죽은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를 보선해야 했는가?

  왜 베드로는 그 중요한 기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새 사도를 보선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지시를 전달받은 것이 있지 않았었나 추측이 된다. 왜냐하면 가룟유다가 궐이 나자 그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사도를 보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후에는 어떤 사도들이 죽더라도 사도회에서는 다른 이를 보선하지 않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들을 보선하려고 하였다. 다른 사도들을 보선하라는 지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천국의 12기초석 위에 새겨질 이름이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의 이름이 필요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천국은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성의 기초석은 12개로서 이 기초석 위에 어린양의 12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기 때문이다(계21:14).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가 되었으므로 그 이름 대신에 들어갈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왼다. 

 

6. 새 사도인 '맛디아'는 어떤 인물인가?

  그리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새로운 사도 한 명을 제비뽑아서 보선할 것을 제안한다(행1:21~22). 그리고 그 조건으로서 2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분이 승천하신 날까지 12사도들과 함께 해온 자들 가운데서 한 명을 선택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하의 증인이 될 자를 선택하자고 제안했으니, 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 곁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자들 중에 다른 새 사도를 선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두 명이 천거되었는데, 한 사람은 '요셉'이었고 또 한 사람은 '맛디아'였다. 그런데 요셉은 그 이름이 여러 개였다. 하나는 '바사바(바르사밧)'였다. 이는 '바르'라는 단어 '아들'과 '샤밧'이라는 단어 '안식일'이 서로 합쳐진 말로서, 히브리어로는 그 뜻이 '안식일의 아들'이다. 그리고 '유스도'도 그의 이름이었는데 이는 로마식(라틴어) 이름으로서 '의로운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히브리식의 이름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천거되었으니 그는 바로 '맛디아'였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맛디아에 대해서는 더 다른 자료들이 없다. 다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에디오피아로 가서 선교하였고 거기에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현재 천국에서 높은 지위의 보좌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천국복음 전파에 늦게 합류했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합류했든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나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나도 칭찬을 들을 수있는 성도가 되어있을 것이다. 

 

7. 나오며

  가룟유다의 죽음처럼 안타까운 죽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가룟유다가 자기 스승을 자기 나름대로 일깨우기 위해 어떤 작전을 벌인 것 같은데, 그만 그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자, 그는 자책감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직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에 그분 앞에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그분의 처분을 기다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아마도 사탄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의 죄만을 자책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죄를 짓고도 그냥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보다는 더 양심적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잘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 곧 그분이 자신의 목숨을 우리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한 것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기 따문에. 우리는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처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주님의 죽음이 의미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의 가치를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가룟유다는 죽었다. 그런데 그가 어디로 갔는지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그는 자기 자신의 자리 안으로 가기 위하여 옆으로 걸어갔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의 운명은 최소한 '성밖'으로 보이며, 더 크게 보면 '불못'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주장이 맞는 주장인지는 나중 새 예루살렘 성안(천국)과 성밖(지옥의 일부분) 그리고 지옥(완전지옥)으로 가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06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삼손은 과연 천국에 들어갔을까? 그는 정말 자살해 죽은 자에 해당하는가? 자살한 자는 100%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 사실인가? 그리고 과연 어떤 사람이 자살에 취약한가? 귀신들은 어떻게 사람에게 주로 공격하고 침투해 들어오는가? 귀신들이 침투해들어오는 경로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자살을 예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죽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해답이 여기 들어 있다.

2020-02-1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삼손은 과연 천국에 들어갔을까?(삿16:23~31)



1. 들어가며

  이스라엘의 12번째 마지막 사사였던 삼손은 과연 천국에 들어갔을까? 어떤 사람은 그가 자살해 죽었으니 지옥에 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말 그는 자살하여 지옥에 떨어진 것일까? 그리고 삼손을 잠깐 놔두고, 만약 누군가가 자살을 했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인가? 왜 자살한 사람은 100% 구원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삼손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갔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사람은 과연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으며, 왜 자살은 100% 지옥에 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삼손은 누군가?

  삼손은 구약성경 가운데 사사기서에 맨 마지막으로 나오는 사사다. 그는 사사기에 나오는 12명의 사사들(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가운데 맨 나중에 나오는 12번째 사사인 것이다. 여기서 "사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솨파트"라는 말로서, 우리말로는 "[재]판관"이라는 뜻이다. 즉 심판하고 재판하는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사사는 재판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여호수아 이후부터 사울이라는 초대왕이 출현하기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구원해내었던 인물을 가리킨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셨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보내 이스라엘을 주변의 민족들로부터 건져내게 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사사들은 사울왕이나 다윗왕처럼 베냐민지파 혹은 유다사람으로 국한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12지파들 중에서 고루 나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사들 중에서 삼손사사는 단지파에서 나온 사사로서, 블레셋족속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삼손은 좀 특이한 사사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나실인이었기 때문이다(삿13:5). 나실인으로 유명한 성경의 인물은 삼손 말고 사무엘이 있다. 여기서 "나실인"이란 원래는 어떤 직책을 수행할 자격이 없지만 자기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기간동안 거룩히 쓰임을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무엘도 역시 나실인이었는데, 그는 제사장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레위지파 사람이 아니라 에브라임지파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제사장이 되었고 나중에는 대제사장의 직무와 왕과 선지자의 삼중직을 수행했던 인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삼손이 나실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는 사사나 왕직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 구별되어 그 직분을 맡은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실인이 될 때에는 꼭 지켜야 할 규례들이 있었다. 그것으로는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했다(민6:3). 둘째, 구별하는 날동안 삭도를 대지 말아야 했다(민6:5). 머리카락을 잘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셋째, 자기 몸을 구별하는 날동안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되었다(민6:6). 그것은 자기의 부모나 형제자매가 죽을지라도 지켜야할 규례였다. 그런데 삼손도 날 때부터 그렇게 구별된 사람이었다(삿13:4~5).  

 그러나 사실 삼손은 음란한 사람이었다. 여자에 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결국 여자에 걸려넘어져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놀라운 장수같은 힘을 잃고 말았다. 그가 얼마나 힘이 세든지 사자를 염소새끼를 찢음같이 찢어서 죽일 수 있었고(삿14:6),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한꺼번에 죽일 때도 있었다(삿16:15). 그런데 여자에 약한 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만 여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다. 기도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사람이 정신 바짝 차리지 않고 있으면, 한 순간에 음란 미혹에 넘어가버릴 수가 있다. 삼손도 여자에게 약했다. 그에게는 적어도 3명의 여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그는 일종의 여성편력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첫번째의 여자는 딤나의 무명의 여인이었고(삿14:1~20), 두번째는 가사의 기생이었으며(삿16:1~3), 세번째는 소렉골짜기의 들릴라였다(삿16:4~22). 그런데 셋 다 블레셋 여자들이다.

 

3. 자살이란 무엇이며, 자살한 사람은 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삼손이 자살해서 죽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삼손은 정말 자살했을까? 이 대답을 하기 전에 우리는 "자살"이 무엇인지부터 잠깐 정리할 필요가 있다. '자살'이란 자기자신을 살해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에서 제6계명을 어기는 살인죄에 해당한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함부로 자기 멋대로 끊어버리는 중대한 범죄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살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전부 다 지옥에 떨어지는가? 그들 중에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도 더러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100% 지옥(불못)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우선 자살도 일종의 살인죄로서 십계명을 어긴 죄를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살은 남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살해한 것이다. 그런데 관건은 살해한 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이미 죽여놓았는데, 다시 자기 맘대로 살아날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기자신을 살해한 살인죄에 대해서는 용서받을 방법이 더이상 없다. 회개는 육체가 살아 있을 때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로, 자살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여 100%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지은 살인죄를 결코 회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살인죄는 불못에 떨어지는 죄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1:8, 22:15).

  우리는 성경에서 자살한 3명의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구약성경에 2명이 있다. 먼저는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있다(삼상31:5). 그는 자기 칼에 엎드려져 죽었다. 그리고 둘째는 다윗의 셋째아들로서 아버지께 반역했던 압살롬에게 붙어서 사사가 되었던 인물로서 "아히도벨"이 있다(삼하17:23). 그는 목매어 자살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도 1명이 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돈궤를 맡았던 "가룟유다"다. 가룟유다도 아히도벨처럼 목매어 자살해 죽었다(마27:3~5). 사도행전에 보면, 유다는 자기의 곳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행1:25). 이는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자실은 자신의 영혼을 더 큰 비극으로 인도할 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가룟유다의 자살이다. 그는 스승을 은30에 팔아넘긴 죄를 깊이 뉘우쳤다. 하지만 그러한 죄라도 예수님께 아뢰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속죄를 믿지 못했다. 자기의 죄를 자기가 감당한 것이다. 그런데 죄삯은 원래 무엇인가? 그것은 곧 사망이다(롬6:23). 그는 자기의 죄를 자기가 책임지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는 예수님의 속죄를 믿으면 자신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가룟유다가 하나님의 말씀 곧 은30에 자기의 목자를 팔 것이라는 스가랴서의 예언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이요 궤변이다. 왜냐하면 좀전에도 언급했지만 자기가 자기를 죽인 다음에는 회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살인한 것에 대한 죄값을 자기가 담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고로 가룟유다는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주로 어떤 사람이 자살하는가? 자살은 주로 우울증에 시달린 자들 중에 많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우울증이야말로 귀신이 잡아쓰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울증에 잘 걸리는 자는 주로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대체로 고집이 세고,자기주장이 매우 강하다. 그리고 자존심도 강하며,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잘 안 되면 절망하고 절망하다가 자기를 비하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면 살고 싶은 욕망이 그만 사라지고 만다. 그때에 귀신이 슬쩍 접근해온다. 귀신이 자살하라고 그 사람에게 생각을 불어넣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더욱 자기의 마음을 지키라고 잠언기자는 말했기 때문이다(잠4:23).

 

4. 삼손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는가? 그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과연 삼손은 천국에 들어갔을까? 우선 사사기를 읽어보면 그는 자살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를 갚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은 이방신인 다곤신을 섬기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40년동안이나 괴롭혔기 때문이다. 고로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해내기 위한 의로운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을 살기가 싫어서 자기의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나실인으로 세운 목적에 따라 살다갔던 인물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는 회개한 자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도한 내용을 보라. 그는 그동안 자기가 잘못 살아왔음을 회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한 번만이라도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힘을 준 것이다. 이스라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를 갚으라고 그에게 힘을 준 것이다. 그래서 블레셋신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무너뜨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죽기 전에 회개하고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성경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믿음으로 살다간 인물들이 나열된 히브리서 11장에 그의 이름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히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통하여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믿음으로 살다가 오직 메시야를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도성인 천국에 이른 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영광스런 사람들로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생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이 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자들로서, 하늘에 있는 더 좋은 것들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다(히11:39).

 

5. 나오며

  삼손은 자살한 것이라면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동료를 살리려고 뛰다가 죽은 자도 다 자살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적을 공격하다가 죽은 것은 자살이 아니다. 그리고 삼손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을 찾았고 회개했다. 그는 그가 사사로서, 나실인으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가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여자를 하나님보다 더 중하게 여겼던 것을 회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삿16:28). 그리고 그가 그때 죽인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보다 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죽기전에 회개하라. 이것이 구원의 최대의 관건인 것이다.

 

2020년 2월 16일(주일)

정병진목사

  지난 7월 6일, 한국 음식계를 발칵 뒤집는 뉴스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떡볶이와 떡국떡의 대명사로 알려진 송학식품에서 지난 2년동안 대장균이 검출된 떡볶이 떡을 포장지만 바꾸어 납품해서 무려 150억원어치나 시중에 유통시켰다는 기사였다. 더욱이 그 회사는 반품당한 불량제품을 불우이웃 기부품으로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8월에는 보관중인 쌀 2500포대에서 나방 애벌레가 대량 발생했지만 폐기 처분하지 않고 맹독성 살충제로 박멸한 뒤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곧 밝혀지겠지만 이미 일파만파로 퍼저버린 상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송학식품의 대표였던 성호정 장로가 그만 작년 5월에 세무조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했다는 기사였다. 그리고 투신하기 전 그는 가족들에게 '먼저 가서 미안하다. 천국에서 만나자'라는 문구를 남겼다고 한다. 지난 4월에 경남기업의 대표 성완종 장로가 자살한 것이 아직 잊혀지지도 않고 있는데 또 다시 장로가 투신자살했다는 기사는 참으로 안타까움을 갖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성호정 장로는 자수성가한 알려진 기업경영가로서 모범납세자였고 철탑산업훈장까지 받은 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평소에 얼마나 검소하게 생활해왔는지 그리고 그가 평소에 얼마나 어렵고 힘들어하는 자들에게 많은 기부를 해왔는지 아는 자는 그의 자살이 진짜였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오, 이제는 기업체의 CEO나 연예인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너무나 흔하게 듣게 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이것을 모방하여 젊은이들도 많이 자살해 죽는 시가개 되어버렸다. 이 일을 과연 어찌한다는 말인가? 정말 성호정 장로가 말한 것처럼  비록 자신이 자살했어도 그는 기독교인이었으니 우리가 훗날 그를 천국에서 다시 볼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런데 최근 들어 자살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기독교인이 유난히도 많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도 예외없이 자살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살기 힘들어지면 기독교인도 자살해도 되는 것인가? 과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자살에 대해서 의사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주장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우울증에 의한 희생양이라고 생각하는 의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이는 이 사회의 구조악이 자살을 생산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자살은 질병에 의한 희생물이며, 사회구조악의 희생물인 것인가? 오늘은 우리는 자살에 대해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그리고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자살하면 100%지옥에 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성경에 나와있는 자살자들에 대한 통계부터 보자. 신구약성경에는 총 6명의 자살자들이 나온다. 기드온의 아들이었던 아비멜렉(삿9:53~54),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삼상31:4), 그의 병기든 자(삼상31:5), 압살롬의 모사 아히도벨(삼하17:23), 북이스라엘의 시므리왕(왕상16:8)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유다(마27:5)가 그들이다. 구약성경에 5명이 나오고, 신약성경에 한 명 가룟유다가 나온다. 이들 중에서 아히도벨과 가룟유다는 목메어 자살했고, 사울이나 사울왕의 병기든 자나 아비멜렉은 칼로 자살했으며, 시므리는 불을 놓아 자살했다. 혹 어떤 이는 삼손이 자살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삼손은 자신의 음란과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감당치 못했음을 주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기도한 후에 신전이 원수들 위에 무너지게 한 후에 함께 죽은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것이다.

  '자살'이란 무엇일가? 자살이란 자기살인행위를 가리킨다. 즉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생명을 잃게 하는 일이 자살이다. 이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며, 자기자신의 자유의사 표시로서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자살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는가? 그 이유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영적으로 말하자면 사탄이 자살의 영으로 유혹할 때에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사탄이 보낸 자살의 영(귀신)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있는 자들의 생각을 사로잡아서 죽게 함으로서,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제 자살하면 그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자살하면 절대 안 된다. 왜냐하면 자살하면 그의 영혼이 100%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자살해서 죽는 이가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했는데, 어찌 그런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겠는가 하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먼저 그에게 왜 우울증이 임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저주가 그에게 찾아온 것임을 알라. 그가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죄를 짓고 살아왔던 탓에 귀신이 그의 생각에 침투하여 그에게 우울증을 안겨준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자살하면 그가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둘다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함부로 다루어서가 아니다. 그가 지옥에 떨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이 자살한 죄에 대해서 정작 자신이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죄를 회개치 못하여 가는 것이지 살인죄를 저질러서 가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짓지 아니한 자는 결단코 지옥에 떨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담 이후로 죄된 본성이 가득찬 인간은 죄를 짓지 아니하고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 아니하려면 반드시 죄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 스스로는 자신이 지은 죄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대신 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죄값을 대신 지불하시려고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마음 속에 주님으로 영접해야 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죽을 때에 대속의 회개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죽을 때에는 완전히 죄를 끝내고 천국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때에는 진짜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죽는 그 순간에 자신이 지은 죄를 다 회개하고 용서받은 상태에서 들어간다.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는 자기자신이 자기를 죽여버리기 때문에 자기를 죽인 살인죄에 대해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한다. 회개는 오직 육체가 살아있을 때 즉 목숨이 붙어있을 때에 한 것만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자는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코 자살하지 말라. 자살은 자기를 살인한 죄에 대해 회개할 기회가 없다.

  그렇다면, 자살을 꼬드기는 귀신의 영을 이기고 어떤 어려움에 처한다 하더라도 자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그때마다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자에게 계속 귀신이 붙어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하며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를 곤경에서 건져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라. 그리할 때 더이상 자살의 영이 힘을 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라. 그렇다. 어렵고 힘든 일이 발생할 때에, 사회를 탓하거나 자신을 탓하지 말라. 그 전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라. 그리고 눈물로 부르짖어 기도하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아니한다고 그들을 원망하지 말라. 지금 내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으며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그분 앞에 눈물을 쏟아놓으라.

  우리에게 아무리 아무리 힘든 일이 놓여있다 하더라도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받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 한 번 생각해보라. 지옥에 들어가서 힘든 것은 다만 거기서 받아야 할 고통 때문만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더이상 아무런 소망을 찾을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0.001%의 소망도 절대 가질 수가 없다. 완전히 캄캄한 어둠과 숨을 쉴 수 없는 공간에 쳐박혀 영원히 고통을 받되 언제까지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채 끝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더욱이 그러한 고통을 영원히 받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지옥에 있는 자는 더 힘들다. 한 번만 지옥이 아닌 다른 곳에 나가서 숨을 쉰 후에 들어오면 살 것 같은데, 그곳에 한 번 들어가면 더이상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한 번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그곳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지옥인 것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목숨이 붙어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우리의 기도를 지금도 들어주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더욱 소망이 있다. 사람 앞에 절말하지 말라. 우리 하나님 앞에 아뢰면 그분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이여, 절대 자살하지 말라. 결단코 목숨을 끊지 말라. 그것은 사람을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사탄의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다시 두 손에 힘을 쥐어보라. 어차피 우리가 이 세상으로 들어올 때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지 않았던가! 그러니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인생을 포기하지 말라.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없던 것에 일구어 새로운 것을 만들었으니, 지금의 것이 없어졌다면 다시 일구면 되지 않겠는가? 목숨이 붙어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을 끊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그분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분이 분명 응답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결코 자신을 죽이지 말라. 끝까지 살아남으라. 그래서 회개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래서 꼭 천국에 들어가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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