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5) 제7표적으로서 나사로의 부활기적이 주는 놀라운 영적인 의미(요11:1~4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Q9EGv0pmz4w [또는 https://tv.naver.com/v/32508737]

 

1. 들어가며

  요한복음에는 총 7개의 표적들과 7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있다. 그중에 7번째 표적과 5번째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요한복음 11장에 나온다.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적이면서 동시에 표적이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소생 기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기적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예수님에 관하여 어떤 자기 선언을 하셨는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님의 7번째 표적과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병들어 죽게 된 나사로에 대한 소식을 들었음에도, 왜 나흘이나 뒤에 나사로를 찾아가신 것일까? 그리고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부활인가 아니면 소생 기적인가? 그리고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왜 눈물을 흘리신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 기적과 관련하여 본문의 말씀이 들려주는 영적 의미 등을 찾아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 11장에는 어떤 표적과 어떤 자기 선언이 나오는가?

  요한복음 11장에서는 7번째 표적이 나온다. 이름하여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이 그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총 7가지의 표적들이 나온다. 그중에서 첫 번째는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다(요2장), 그리고 두 번째는 왕의 신하의 병든 아들을 고치신 사건이 나온다(요4장). 세 번째는 38년 된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이 나오고(요5장), 네 번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온다(요6장), 그리고 다섯 번째는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장면이 나온다(요6장), 그리고 여섯 번째는 나면서 시각 장애인이 된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 나온다(요9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이 나온다(요11장). 그런데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표적들은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것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증거들이 이 표적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곱 가지 표적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하여 예수께서 스스로 자기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요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선언하셨다(요6:35,48). 그리고 초막절 설교 후 나면서 시각 장애인이 된 자를 고치신 이후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9:5). 그리고 세 번째로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기 직전에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2:25~26). 그렇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은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위대한 표적이었던 것이다. 

 

3.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왜 예수께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약 5리(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다니에 나사로와 두 명의 누이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어 있어오다가 이제 곧 죽게 될 무렵 마르다와 마리아는 전갈을 보내, 예수께서 친구처럼 지내왔던 나사로가 병들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 병은 죽음을 향하여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요11:4 직역)"라고 했다. 왜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병든 것이 죽음을 향하여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는가? 실제로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시에 곧 죽었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실 일이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자기에게도 영광을 받게 할 그러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심으로 예수께서는 생명을 가지고 사망을 이기실 것임이 곧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는 왜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째 되는 날 나사로에게 가셨는가?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 나사로가 병들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베뢰아 지역에서 오히려 이틀을 더 머무셨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나 베다니의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왔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베다니의 나사로의 무덤에 오신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로부터 기별을 받은 후 4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사로의 소식을 기별하러 보내고 난 뒤 곧바로 나사로는 사망했다. 예수께서는 이틀이 지나자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이미 아셨다. 그러나 그가 잠들었다고 말했다. 제자들은 그것이 육체가 잠든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잠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자 단도직입적으로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가실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에 유대를 떠나 베레아로 도망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유대 땅으로 가자고 하자, 도마가 의협심을 가진 채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즉시 그에게 달려가 그를 살려내지 않으시고, 썩은 냄새가 나도록 나흘이나 기다리신 것인가?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인가? 예수께서는 늘 이처럼 몰인정한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며, 예수께서 몰인정한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의도와 목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나흘이나 늦게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다. 첫째는 거기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조문하러 온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가서 나사로를 살려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유대인들은 틀림없이 예수께서 기절한 나사로를 살려냈다고 조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시간이 지나기를 주님께서도 기다리신 것이다. 둘째, 나사로가 사람으로서는 완전히 죽어 도저히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었음에도 예수께서 그 사람을 살려낸 것을 통해 예수님만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전능자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곧 있으면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텐데, 그렇지만 3일 만에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로 하여금 받아들일 준비를 해놓기 위함이었다. 즉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일 사람을 만들기 위해,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인지하고 있는 그때에 나사로를 찾아간 것이다. 

 

5. 마르다가 가지고 있던 믿음과 예수께서 바라시는 믿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수께서 늦게 오시자 마르다는 설움에 복받친 깊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러자 주께서는 그녀의 오빠 나사로가 소생할 것을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신다. 그러자 그녀는 "주여, 그러하외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답변한다. 마르다는 종말에 있을 부활에 대해서는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오빠가 부활 때에는 살아날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있어질 일이요 먼 미래에 있을 일이므로,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예수께서 실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기 위해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시려고 한다. 그래서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한다. 하지만 마르다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난다면서 소용없는 일이라고 간접적으로 말씀드린다. 하지만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나사로를 큰 소리로 불러 살려내신다. 

 

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말씀하시고 증거하셨는가? 그것은 나사로를 살려내는 사건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다. 그것은 3가지다. 첫째,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함은 예수께서도 역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아들로 오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수여받았다(요5:26). 이 생명은 영에게 주시는 생명으로서 '조에'라고 부른다. 이 생명은 육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이 아니라, 사람의 영에게 생명을 공급한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아무도 볼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실 수 있다는 뜻이며, 죽은 후에는 그를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다시 살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부활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생명은 영원한 영의 생명이며, 이 생명을 가진 예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신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사코 자신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이 땅에 온 것이라고 증거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파송받은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통해,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분이자 아버지로부터 파송받은 자인 것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예수께서도 아버지처럼 전능하신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전능하신 분이셨던 것처럼 이 땅에서도 전능하신 분임을 드러내셨다. 그것은 여러 가지 것을 통해 증거하셨으니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통해서도 증거하셨고,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을 통해서도,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자를 고쳐 주심으로 증거하셨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는 죽어서 썩어 가고 있는 나사로를 다시 살려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와 한 분으로서 전능자였던 것이다. 

 

7.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부활 사건인가 소생 사건인가?

  나사로가 죽었다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은 과연 부활 사건인가 아니면 소생 사건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사실 부활 사건이 아니라 정확히 소생 사건이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영원히 죽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죽을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소생 사건은 장차 성도들의 부활 사건에 대한 예시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만일 사람이 죽어서 영원히 다시 사는 부활 사건은 어떤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성도의 부활의 몸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성도의 부활은 다음과 같은 7가지 면에서 육의 소생과 다른 특징을 지녔다고 말했다. 첫째는 썩을 것으로 심지만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둘째는 욕된(비천한) 것으로 심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셋째는 약한 것으로 심지만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넷째는 육의 몸으로 심지만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땅에 속한 것으로 심지만 하늘에 속한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심지만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일곱째, 썩을 것으로 심지만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고전15:42~54). 그러므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결코 부활 사건이 아닌, 소생 사건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소생 사건을 통해 장차 성도들에게 나타날 부활할 것을 미리 보게 하신 것이다. 

 

8.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마리아와 그녀를 따라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지켜보셨다. 그리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요11:33). 그리고 우셨다. 그런데 우리가 한글성경으로만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로 인해 슬퍼하고 있는 가족들과 조문객들을 지켜보면서, 예수께서도 같이 슬퍼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예수님의 눈물은 그러한 종류의 눈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요11:33의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기 때문이다. "그분은 영으로 격양되셨다(비통해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 자신을 요동치게 하셨다"(요11:33). 다시 말해, 예수께서 비통해 하신 것은 죽음이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쓸어 가 버린다는 것을 아시고 영으로 격분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에게 있어서 사망은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최대의 권세였던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이제 사망을 정복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슬픔과 불행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시고는 비통해 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망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번에 반드시 사망을 정복함으로서, 생명이 사망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 주시겠다고 굳은 결의를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사망의 권세로부터 빠져나오게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신 것이다. 그것을 눈물로 표현하신 것이다. 

 

9. 나오며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그분을 믿어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요20:31).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모든 장에서 그리고 요한복음에 들어 있는 모든 사건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요한복음을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도록 요한복음을 기록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요번의 제 7번째 나사로의 소생 기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표적으로 분명히 드러내셨다. 그것의 핵심은 예수님만이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만이 하나님으로서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거짓말이다. 만약 자신이 그렇게 주장하려면 그도 역시 예수님처럼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생명으로 사망을 정복할 수 있어야 한다. 죽어서 썩어 냄새나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자신이 전능한 자인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오직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다가 사람으로 나타나신 예수님만이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2023년 01월 18일(수요일)

정병진목사

2023-01-04(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4) 양의 문이자 목자이며 하나님과 한 분이신 하나님(요10:1~4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MVr-2CxIa4  [혹은 https://tv.naver.com/v/32159167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과연 어떤 책인가? 요한복음은 사실 기독론의 책이다.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것들이 풍성하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예수님의 7가지의 표적으로도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을 통해서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의 2가지 자기 선언이 나온다. 그것은 예수께서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께서 '선한 목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신 것일까? 그리고 수전절 때 설교하실 때에는 왜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2가지 자기 선언과 아울러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일체성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더불어 만세 전 예정론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가 과연 요한복음에 나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는 초막절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어떠한 자기 선언을 하셨는가?

  요한복음 10장은 요한복음 7장부터 시작된 초막절 설교의 마지막 부분과 그때로부터 2개월 뒤 수전절 기간에 있었던 예수님의 설교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그중 초막절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 가운데 세 번째와 네 번째 선언에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이전 유월절 때도 오병이어의 표적과 함께 첫 번째로 자기 선언을 하신 바 있다. 그때는 당신 자신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막절 중간 즈음에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나서 두 번째로 자기 선언을 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막절의 끝에 가서도, 나면서 맹인된 자를 고쳐 주신 후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시고나서(요10:1~6), 이와 관련하여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셨다. 하나는 "나는 양의 [출입]문이다(요10:7,9)"라고 하신 것이요, 또 하나는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14)"라고 하신 것이다. 

 

3.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자 선한 목자로 표현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자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신 것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진짜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래서 누가 진짜 양의 문이자, 진짜 양의 목자인지를 알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왜나하면 예수님을 흠잡아 그분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실상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 주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과연 누가 진짜 양의 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누가 진짜 양의 목자인지를 알려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것을 말씀하심은 훗날 곧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깨닫고 회개하여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도록 하시려고 그렇게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 친히 자신을 '양의 [출입]문'이라고 말씀하신다(요10:7,9). 그럼 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스스로 양의 문임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누가 진짜 양의 문인지를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아주 훌륭한 양의 문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즉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로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양떼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정식으로 출입문을 이용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고 있었다(1절). 다시 말해 그들은 본래 양의 목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양을 도둑질하고 해치는 절도(도둑)요 강도였던 것이다(1절, 8절). 왜 그런가?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천국문을 닫아버리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마23:13).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자기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마23:15).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천국문을 막는 주범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 중에 먼저, 사두개인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충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사에 쓰이는 제물을 판매하고 성전 세겔로 환전하는 자들이었는데, 그 일들을 통하여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남기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있는 성전을 향하여, 더 이상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었던 사람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율법해석자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백성들로부터 칭송과 흠숭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해석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성들이 과연 율법을 어겼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찾아가서 물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에게로 가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전까지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것이다. 이에 분이 치밀어 올라왔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아서 어찌하든지 그분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벌써 그렇게 보낸 시간이 3년이 되었으니 그들의 시기 질투심은 당시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6개월 후가 되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히 알려 주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은 결코 '양의 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양의 문이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양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할 수 있어야 한다(9~10절). 즉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자기들을 통하여 양들로 하여금 꼴(목초지)을 얻되 들고나오면서 풍성히 얻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9~10절). 이것은 양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풍성한 축복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은 과연 누가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친히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5.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목자를 자처했지만 그들은 아주 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매도하고 있었고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죽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자란 무엇인가? 목자란 기본적으로 양떼를 돌보고 양육하며 푸른 초장과 맑은 시내로 인도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양떼를 사나운 이리떼 곧 사탄 마귀로부터 지켜내고 보호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양떼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부려먹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양떼들의 돈을 뜯어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선한 목자상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셨다. 그것은 첫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자라야 참된 목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선한 목자는 이리떼가 오면 양들을 내버려두고 달아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떼로부터 그들을 건져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삯꾼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럼, 삯꾼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돈을 받고 고용된 품꾼들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실제로 목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양도 자기의 양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그들을 내버려두고 그냥 달아난다. 그리하면 이리가 와서 양떼를 낚아채 가고 또한 흩어버리게 한다. 여기서 '이리'란 양떼인 하나님의 성도들을 해치는 세력으로서 사탄 마귀와 귀신들을 가리키며, 이단 세력 등을 가리킨다. 선한 목자는 이러한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양떼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양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양떼들을 위해 내어놓으셨던 것이다(막10:45). 

 

6. 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아직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6절). 즉 그들이 주님께 속한 양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주님의 양이 될 수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이 주님의 음성듣기를 거절하며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7절). 또 하나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27절).

  그렇다면 주님께 속한 양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살면서 주님의 양으로 정해지는 것인가? 사실 이것은 매우 영적인 일로서 그 실상은 이렇다. 사람은 남녀가 만나 사랑함으로써 아내의 자궁 안에서 생명이 수정이 되고 그리고 배 속에서 약 10달을 자라서 출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육체의 출생만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은 언제 어떻게 생성되고 자라게 되는가? 그것은 이렇다. 우선 사람의 영혼은 이 땅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늘의 낙원에서 창조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아이가 엄마의 태중에서 약 2~3개월 정도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그 아기의 몸속에 집어넣어 준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은 하늘에서 온 것이며, 사람의 육체는 이 땅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영혼은 구별하여 주님의 양이 될 영혼으로 미리 정해 놓으시고, 어떤 영혼은 주님의 양이 되지 못하도록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일까? 그건 아니다. 누구든지 이 땅에서 태어나서 자신의 영이 왔던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주님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귀신들이다. 자기들은 절대 못 돌아갈 것을 알고 그렇게 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이 만세 전부터 정해졌고, 마귀의 자녀가 만세 전부터 정해졌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 땅에 태어나서 주님의 양으로 정해져 가기 때문이다.

 

7. 주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정한 사람에게만 영생을 주시며, 한 번 얻은 영생은 영원히 보전되는가?

  이제 정리해 보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만세 전부터 예정된 것인가 아니면 살면서 구원받을 사람 안으로 예정되어 가는 것인가? 만세 전 예정론자들은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태초 전에 이미 예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예정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반대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셨다고 그들은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을 사람으로 예정해 놓으시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히 멸망받을 사람으로 예정해 놓았다는 것이다(이것을 '이중 예정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은 합당하며, 성경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세전 예정론자들은 그걸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나온다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내세우는 성경 구절로서 요한복음 10:29절의 말씀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가 다루는 본문 안에 만세 전 예정론에 관한 확실한 근거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진짜 그러한지, 개역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부터 살펴보자. 

요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만세 전 예정론자들은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준 자들에게만 영생을 주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람만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예수님에게서 그 사람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말씀의 의미는 예정론자들이 해석하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을 보면, 첫째,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는 자는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 '그들' 곧 '양떼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27절에 나오는 바로 그 '양들'을 가리킨다. 그러면 이 양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27절에 보면, 주님의 양들로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고,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자들이다. 즉 이들은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고 있는 자들에게 주께서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둘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자는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 그것은 중성 단수명사로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이미 주신 채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글 개역성경은 헬라어 원문을 따라 번역하지 않고, 소문자 사본의 말씀을 가지고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글 개역성경은 대문자 사본을 대본으로 하여 대부분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 요10:29에서 만큼은 후대 사본인 소문자 사본에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그것은 아마도 처음 한글로 성경을 번역했던 자가 아마도 만세 전 예정론을 교리로 믿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이 든다. 그렇다면, 원래 성경 원본에 가까운 번역본인 대문자 사본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요10:29 내 아버지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채 있는 그것은 모든 것들보다 크다. 그러므로 아무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계속] 낚아채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렇다.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인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그렇게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것을 예수님에게 주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던 것들에는 능력, 지혜, 권세, 영광 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것을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으려고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예수께서도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자를 절대 사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 안으로 예정되어 가고 있어도 그가 나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절하고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도 결국 영생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으로 요10:28의 말씀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요10;28 그리고 내가 그것들(양들)에게 '시대의 생명'을 준다. 그러면 그것들(양들)은 '그 시대까지' 스스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양들)을 내 손으로부터 [장차] 낚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자신의 음성을 듣고 있고 자신을 따르고 있는 자에게 주시는 것은 '시대의 생명'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까지의 유효한 생명을 그분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은 자라도 '그 시대까지'까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가 이미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받아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도 우상숭배하고 간음을 저지르거나 거짓말하는 등 십계명을 어기고 살면, 그러다가 회개치 못한 채 죽게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죽을 때에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대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이 시대를 떠나 다른 시대로 들어갈 때 생명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멸망 안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러한 구원이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3:5에서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8. 예수께서는 정말 신성 모독죄를 지은 것인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말씀하신다(30절). 왜냐하면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24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하나였다. 고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있는 중에도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거하시고 있었으며, 아버지 안에 예수께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38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도리어 말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선한 일들을 해 왔는데, 어찌하여 돌로 치려 하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 그분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신성 모독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구약성경의 말씀을 들어 변호하신다. 즉 구약의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재판하는 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신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시82: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히 구별하여 이 땅에 아들로 내려보냈던 자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신성 모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만일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거든 예수께서 행하신 아버지의 일들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는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시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자 예수께서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시어 베레아 땅으로 피신하신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된 책이요,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말해 주는 표적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을 많이 접하게 된다. 다른 세 개의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요한복음을 통해서는 예수께서 주 하나님으로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여러 말씀과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로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목수였던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천한 선지자로서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행하신 일들로 말미암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곧 아버지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파송받은 이이신 것이다. 고로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한 분이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그분은 만물이 있기 전부터 먼저 계셨다. 그리고 만물을 창조하셨던 창조주이시다. 그렇지만 유대인들 중에는 그동안 종교지도자들로서 누려왔던 물질적인 풍요와 백성들로부터의 찬사를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대적자가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약 4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 나라 자체를 없애버리신다. 회개하지 않은 완악한 자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들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양들로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얻은 영생(시대의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죽은 바 된 후에도 계속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생명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요, 내가 죽을 때에 내 속에 이제까지 줄곧 있어 왔던 성령께서 나를 떠나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2023년 01월 04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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