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이 엎드려 경배할 유일한 대상은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영광을 가로채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사탄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로서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는 자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핍박하여 때로는 죽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시기가 곧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그들의 핍박에 대비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자들을 이기는 자들이 받게 될 보상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배 관련 말씀을 통해 왜 우리가 예수님만을 찬송하고 그분만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022-05-15(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5)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계5:6~14)_성도가 예배를 바칠 유일한 대상은 누군가?_2022-05-15(주일)

https://youtu.be/78PrmrpXy04 [혹은 https://tv.naver.com/v/26829855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들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그것의 핵심은 어린양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양에게도 주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상에서 예배하고 있는 존재들 곧 네 생물과 25장로들 그리고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천상의 피조물들은 현재 천국에서 어떻게 예배하고 있을까? 이들이 어린양에게 올려드리고 있는 찬송과 경배는 과연 어떤 것이며 또한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리고 현재 이 지상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누구에게 이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고 하는 새력들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체 누구이며, 무슨 이유 때문에 한 분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그 찬송과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 성도들도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환난의 때가 올 것인데 그때에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러한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경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하나님을 사칭하는 세력이 누군지를 살펴보고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성도들은 과연 누구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성도들은 천국에서 과연 누구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즉 천상의 예배에서 우리가 예배드릴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천상에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계7:11). 우리는 천상에 계신 하나님과 엎드려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비단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곧 피조물의 대표인 네 생물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24장로들 그리고 144,000명 되는 보좌에 앉은 이들과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들이 찬송과 경배를 드리며,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피조물까지 다 경배를 드린다. 이중에서 네 생물을 제외하고는 전부다 엎드려 경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에 대해 어떤 표현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총 4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첫째는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4:10). 이 보좌는 하나님 한 분의 보좌로서 통치의 보좌와 심판의 보좌이다. 둘째는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4:10). 하나님만이 항상 살아계시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14:7). 그분만이 창조주이시며 창조된 피조물을 다스리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어린양'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5:8,14). 어린양께서는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3. 예배와 관련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증거는 대체 무엇인가?

  예배와 관련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증거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송과 경배를 동일하게 받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약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오직 주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리가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 11~12을 보면, 모든 천사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천사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7가지의 흠숭을 드린다. 그것은 찬송과 영광, 지혜와 감사, 존귀와 권능(능력) 그리고 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천만만의 동일한 천사들이 어린양에게도 7가지 흠숭을 드리는 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그렇다. 순서만 바뀌었을뿐 하나님께 드리는 7가지 흠숭을 동일하게 어린양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린양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에서 예배드리는 존재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7가지 흠숭을 통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가 있다. 

 

4. 하나님께 바쳐야할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는 세력은 대체 누구인가?

  그런데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바쳐야할 흠숭 곧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는 세력들이 있음을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세력은 바로 용이다. 이 '용'은 타락한 천사장이었던 루시퍼로서, 옛 뱀이요 마귀와 사탄이요 온 천하를 꾀는 자다. 그런데 이 놈이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경배를 자신도 받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 놈은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예수님에게 내어드리고 예수님을 가둬놓으려했던 무저갱에 지금 자신이 갇혀 있다. 그는 [천국에서의] 천년왕국이 끝나는 어느 시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잠깐 내어보내는 시기가 올 때까지 무저갱에 갇혀 지낼 것이다(계20:2). 그렇지만 그놈은 자신이 찬송과 경배를 받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하여 2인자를 내보내서 그의 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 짐승'이다(계13:1~10). 이 짐승은 이 세상 제국의 왕들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는 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제국의 왕들이 이 짐승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으려하고 또한 경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세력을 사도요한은 여러 짐승을 가지고 알려주었는데, 그 짐승은 사자와 곰이요, 표범과 열뿔 가진 무서운 짐승이다(계13:1~3). 이러한 짐승은 사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짐승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다니엘 7장에서 짐승은 각각 '사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요, '곰'은 메대와 파사의 다리오와 고레스 왕이요, '표범'은 그리이스(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을 가리킨다. 그리고 무서운 열뿔 가진 짐승은 앞에서 출현했던 짐승들의 특징과 더불어 무서운 이빨을 지녔는데, 이는 로마제국의 왕들로서 당시에는 네로 황제나 도미시안 황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을 대신하여 바다에서 올라운 첫째 짐승(=적그리스도)이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난 때에 발생한다. 그때가 되면 땅에서 올라오는 두 뿔 가진 어린양같은 [둘째]짐승(=거짓선지자)이 용처럼 말을 하고 첫째 짐승의 권세를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미혹하여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첫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한 후 그 우상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첫째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 이든지 다 죽이는데, 이때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표(짐승의 표=666)를 준다. 그러므로 이 표를 받지 못한 자는 매매를 못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로마황제 시대에도 있었고 장차 앞의 어느 날에도 있을 것이다. 

 

5. 왜 성도들은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왜 [첫째]짐승과 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를 범하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1~2계명을 어기는 자를 죄가 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 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자손 3~4대가 그 죄값을 물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정도는 우상숭배의 죄는 큰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어떤 벌을 내리신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고난을 받게 되고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계14:9~11). 그렇다.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는 영원한 고통이라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존재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일곱대접심판이 내려지는 마지막 환난의 시기에 이 땅에 남겨지기 때문이다(계16장). 요한계시록에서는 말세(예수님의 승천이후 재림때까지)에 되어서 일어날 일을 일곱 가지 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마지막 일곱번째 인은 또다시 일곱 나팔 재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곱 나팔 재앙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든지 비그리스도이든지 상관없이 다 받는 것이지만, 일곱 나팔 재앙들 중에서 마지막 일곱번째 나팔 재앙인 일곱 개의 대접 재앙들을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되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누가 이 땅에 남겨지는가? 그것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남겨진다. 물론 이때 남겨지는 기간은 아주 짧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그때 남겨져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하려면 목숨 걸고 짐승과 그의 표를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만약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고 표를 받는 자는 일곱번째 나팔 재앙 곧 일곱가지 대접 재앙들을 고스란히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첫째 대접 재앙 때에 싸인으로서 짐승의 표를 받고 그것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재앙들은 일곱 대접 재앙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고 짐승을 경배하지 말아야 하고,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6. 우리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하는 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그러한 자들만이 천국의 유리바닷가에 서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계15:2~4). 다시 말해, 짐승과 짐승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러한 자들만이 일곱 대접 심판들을 받기 직전에 하늘에 휴거되어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계15:1~8). 셋째, 이러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면 왕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계20:4). 이러한 자들이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먼저 천국에 들어가서 거기서 천년동안(주님의 승천후 재림전까지 하늘에서의 시간) 왕노릇할 것이요, 만약 주님의 재림시에 부활체가 되어 주님을 맞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찬송과 경배를 올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사실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에 천국에 들어간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육신의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는 말이다. 그렇다고 악한 사탄 마귀가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자기들은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지만, 그러한 영광스러운 저 천국을 자기보다 능력이 적은 인간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냥 놔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시기질투의 화신들이다. 자기가 못 들어간다면 들어가는 이들이라도 잘 다독거려야 배려해 주는 작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정반대다. 자기가 못 들어가는 그곳을 다른 이가 들어가려는 것을 배 아파한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악한 영들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핍박을 우리 성도들은 인내로서 잘 이겨내야 한다(계13:7~10). 이들은 한사코 자기들의 경배를 받기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이들을 싫어한다. 그러나 공생애 기간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까지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들의 핍박을 너무 염려할 필요가 있다. 핍박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만 경배하고 그분에게만 찬송을 올려드리자. 이것이 천국백성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니까. 

 

2022년 05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예수께서는 왜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을까? 그러나 이 땅에는 선한 부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럼 하나님의 뜻에 맞는 부자들은 대체 어떠한 부자인가? 그리고 성도들이 살다가 만나게 되는 고난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무조건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 되는가? 아니면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할까? 우리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고난에 대해서 그 고난의 종류와 성격도 한 번 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난의 종류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도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야고보가 말해주는 성경적인 부자관과 아울러 고난을 대처하는 2가지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022-05-04(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6) 부한 자들에 대한 경고와 고난을 이기는 방법(약5:1~2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YTSLQNVBEM [혹은 https://tv.naver.com/v/26610514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각 장마다 부한 자들에 대하여 언급을 한다(약1:9~10, 2:1~7, 3:15, 4:3~4, 13~16). 왜 야고보는 짧은 편지 속에서 부한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많이 할애하여 언급하였던 것일까? 이는 우리가 서신서를 읽을 때에 그 편지의 배경이 되는 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편지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성경을 읽다보면 그 편지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A.D.49년어간에 로마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에게 보내었던 편지였다. 그런데 A.D.49년 경에 로마의 4대 황제 글라우디오(A.D.42~54)가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본인이 유대교를 믿든지 아니면 기독교를 믿든지 상관없이 로마에서 떠나야 했다. 그러므로 이 즈음이 바로 유난히도 경제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던 때다. 특히 유대인들은 B.C.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거의 대부분 전 세계에 흩어져서 살았는데 가는 곳마다 회당을 짓고 살았다. 또한 그들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는데,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은행업이었다. 고리대금업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 중에는 부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이들 부자들이 재물을 취득하는 데에도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재물을 사용하는 데에도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를 본론부의 마지막에 가서 최종적으로 강력 선포한다. 그리고 나서 이 편지의 마지막 주제인 고난의 문제를 언급한다. 성도들이 고난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언급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만나게 될 고난 대처법의 아주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2. 야고보서 5장은 어떤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가?

  야고보서 5장은 크게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하나는 야고보서 1장 19절부터 시작된 본론부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불의한 부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의 말씀이다(1~6절). 그리고 이어서 5:7~20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야고보서의 결론부로서 고난에 대한 성도의 바른 대처 방법을 언급한 것이다. 5:7~20의 결론부는 또 다시 2개로 나뉘어지는데, 7~11절에서는 고난당하고 있는 의인들을 향한 메시지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까지 주의 재림을 고대하며 인내하는 태도로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 12~20절에서는 고난에 대한 바른 대처 방법으로서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3. 왜 야고보는 부자들에 대하여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재물 자체가 악하거나 정죄받아야 마땅하다고 말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율법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물질적인 축복을 약속하셨다. 즉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신28:4-5)"라고 말씀하던 것이다. 또한 선한 부자의 사례도 성경에 나온다. 대표적인 경우를 들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을 들 수 있겠다. 그는 자기 밑에 집에서 길리우고 훈련받은 병사 318명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 식구는 적어도 1,000명 이상 될 것으로 추정한다. 사실 아브라함은 이미 가나안 땅에서 거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창14:14). 뿐만 아니라 동방사람 욥은 어떠했는가?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부자였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의 집에는 양과 낙타와 소와 암나귀와가 넘쳐났으며, 종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욥1:3). 그러므로 부자라고 해도 다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디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 살아가는 선한 부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야고보는 부자들에 대해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한 것인가? 그것은 당시 부자들이 재물을 취득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이 재물을 사용하는 것 역시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하고 있었고, 또한 그렇게 해서 모든 재물을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데 그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부자들이 품꾼들의 품삯을 주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하였다(4절). 이것은 약한 자를 억압하지 말고 착취하지 말며 품꾼들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두지 말라는 율법말씀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레19:13). 그리고 곤궁하고 가난한 품꾼을 학대하지 말고,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가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고도 말씀하셨다(신24:14~15). 만약 그렇지 않다가 품꾼들이 여호와께 호소라도 할 경우 그것이 죄가 된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 부자들은 율법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 추수한 품꾼들에게 주지 않은 삯이 소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만군의 귀에까지 들렸던 것이다(4절). 그러므로 야고보는 그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의 재물은 이미 썩어 있고, 그들의 겉옷은 좀먹었으며, 그들의 금과 은은 이미 녹이 슬어있다고 말이다(2~3절). 그러니 곧 그들에게 불어닥칠 심판의 날이 찾아오면 그들의 비참함인하여 울라고 경고하였다. 그런데 당시 부자들은 약한 자들의 재물을 착취하는 일에만 죄를 짓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재물을 쓰되 자기의 쾌락을 위해 그리고 사치하는 데에 쓰고 있었던 것이다(5절). 더욱이 그들은 의로운 자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까지 범하고 있었다(6절). 그러니 야고보는 어느날 그들이 불같이 살라지는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3절). 

 

4. 성도들이 고난에 대처하는 2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고난을 만났을 때에 성도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성도들이 고난을 만났을 때에 대처하는 방법 2가지를 소개하고 있다(7~20절). 하나는 그때에 인내하라는 것이다. 길이 참으라는 것이다(7~12절).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는 것이다(13~20절). 그것도 자기의 죄를 고하면서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고난을 만났을 인내하여야 하며, 어떤 고난을 만났을 때에 기도해야 하는가? 사실 성도들이 만나는 고난에는 여러 종류의 고난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핍박같은 고난이 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할 때에 가족이나 또는 불신자들에 의해 핍박을 당하는 고난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럴 때에는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이다(마5:10~12). 그러므로 이때에 성도들이 해야 할 대처는 그러한 고난을 참아내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핍박을 당할 때에 자기에게 고난을 주는 대상에게 대항하라는 말씀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핍박자들 위해 기도하라고만 나온다(마5:44). 그러므로 고난 중에서도 사탄이 사람을 통해 주는 고난은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잘 견뎌내야 한다. 이는 핍박자가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고난은 우리나 우리의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오는 고난이 있다. 그러한 고난에는 질병의 고난, 가난의 고난, 자녀의 불행의 고난 등이 있다.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는 무조건 참아내는 것이 온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고난이 왜 자기에게 주어졌는지를 파악하고 그 고난에 맞게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그러한 고난에 대해서는 죄를 회개하면서 대처해야 한다고 말씀하였다(16절). 다시 말해,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는 무조건 인내하고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인 죄들을 회개하여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5. 사탄이 주는 핍박과 같은 고난에 직면했을 때 성도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성도들은 사탄이 사람을 통해 주는 고난에 대해서는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 즉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을 대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를 저주하거나 그를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고 기도할 경우 하나님께서 그를 치실 수가 있는데, 그러면 그가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갈길이 영영 차단이 될 수도 있다. 스데반의 경우를 보라. 사실 성경 전체를 볼 때에 사탄이 성도들을 핍박할 때 대처하는 방법에는 2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도망치라는 것이다(마24:16~20).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의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길이 참으면서 핍박을 견뎌내야 한다고 했다. 길이 참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고난 대처법들이다. 그것은 마치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야 하듯이 참아내는 것이다(7절).

  그렇다면 왜 성도들은 핍박같은 고난이 오면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인가? 야고보는 그 이유를 3가지로 언급한다. 첫째는 주님의 강림이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8~9절). 곧 심판주가 오셔서 핍박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주가 곧 와서 그의 억울한 사정을 신원해 주실 것으므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럴 경우 결코 원망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둘째는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절). 왜냐하면 주의 이름으로 말했던 선지자들도 다 이와같이 고난을 견뎌내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인내하는 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복을 준비해놓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1절). 대표적인 경우로서 야고보는 욥의 인내를 든다.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인해 고난을 겪어야 했다. 제일 처음 그는 자신의 소유물을 다 잃었으며, 2차 때에는 7남 3녀의 자녀까지 잃었다. 그리고 3차 때에는 자신의 건강과 가정마저 잃게 되었다. 그런데 70인역에 의하면 그는 약 70년 동안을 악성종기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참아내었다. 기다린 것이다. 기도를 쉬지 않은 탓이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방문을 받게 되었고 진실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회개한 끝에 이전보다 2배나 더 큰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 기도하면서 참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언제가 해결해주실 날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는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붙여서 언급하였다(12절).

 

6. 자신이나 자기의 조상들의 죄에 관련된 고난을 겪게 되었을 때에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고난 중에서도 자신이나 자기의 조상들의 죄에 관련되어 고난을 겪게 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야고보는 고난에 대처하는 두번째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13절). 그런데 기도할 때에 2가지 조치를 취하라고 하였다. 하나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병낫기를 기도하라는 것이었다(14절). 왜냐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16절). 또 하나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죄를 서로에게 고백하라고 하였다(16절). 이것은 질병 치료에 관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다시 말해, 사람이 걸리는 질병이 바로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실 인류가 죄를 짓기 전에는 질병도 없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므로 질병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에는 먼저 자신의 죄를 처리해야 한다. 특히 남에게 억울한 일을 하게 만들어서 찾아오는 질병은 반드시 당사자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실제로 사람이 질병에 걸리게 되었을 경우 대부분은 그것이 영적인 이유와 맞물려 있다. 그 사람 안에 악한 영들이 들어와서 질병을 일으킨 것이다. 모든 질병이 귀신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죄를 지었을 때에 들어오는 귀신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더 실제적인 사실은 자기의 지은 죄로 인하여 생기는 질병보다는 자기 조상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들어온 악한 영들 때문에 질병이 생기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조상들에게 들어가 있던 악한 영들이 자기의 후손들에게 들어가서 질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때 질병으로 역사했던 악한 영이 후손에게 들어가면 그 후손에게 질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이 질병의 경우라면 가장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이어서 자기의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런 것이 없이 기도한다면, 비록 의인의 간구로 인하여 병이 나았다고 할지라도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사람이 질병에 걸렸을 경우에는 철저히 자기와 자기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의 대표적인 예로서 야고보는 엘리야의 기도를 언급한다(17~18절).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더니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그가 다시 비가 오기를 기도했더니 하늘이 문을 열고 비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 그 내부로 들어가서 보면,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 3년 6개월동안 기근이 찾아온 것이었으며, 우상숭배의 죄를 그치자 큰 비가 다시 내렸던 것이다(왕상17~18장). 그렇다.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고 그 죄에서 떠나야 한다. 그래야 나에게 불어닥친 고난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부록처럼 야고보는 형제들 중에 미혹을 받아 진리에서 떠난 자라도 돌이킬 수 있도록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그러면 그렇게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이며, 그의 지은 죄들을 덮을 수 있다고 말한다(19~20절)

 

7. 나오며

  말세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 것은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재물은 하나님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사용해야 하고(마6:19~20,33), 객과 고아와 과부 같은  약한 자를 돕고 구제하는 데에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하나님과 복음전파를 위해 물질을 사용했다면 그는 하늘에서 합당한 상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이 땅에서 약한 자들을 구제했다면 그와 그의 후손은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 재물 자체만으로 볼 때에 재물은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재물을 취득하는 과정이 부당하다거나 그 재물을 사치와 방탕에 쓴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물질을 취득할 때에는 언제나 합당하게 취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부자가 되었으면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거나 약한 자를 돕는 데 사용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오늘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직면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성도들을 마귀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도가 고난에 처했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2가지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고난이 핍박으로 주어지는 고난이라면 어떤 고난이든 그 고난을 끝까지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늘에서 큰 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죄로 인하여 우리의 삶에 주는 고난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고난에는 질병의 고난, 물질의 고난, 자녀의 앞길의 고난 등이 있는데, 이때에는 먼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한 다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일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도 찾아가서 그에게서도 죄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영적인 세력들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도록 권세를 주셨는데 이때에 귀신도 함께 쫓을 수 있는 권세를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질병은 귀신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치유를 받되 완전한 치유를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지은 죄를 특히 십계명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병이 들면 우선 병원부터 찾아간다. 그리고 의사부터 만나본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왜나하면 대부분의 질병은 죄를 지어서 우리 안에 악한 영이 역사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 앞에 먼저 나가 죄를 고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에게도 찾아가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완전한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응급처방과 땜질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평생 죄와 더불어, 질병과 더불어, 가난과 더불어 그리고 자녀걱정과 더불어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04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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