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9)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셨던 한 분 하나님이시다(1)(계1:4~7)_2022-05-20(금)

https://youtu.be/MkQ-uO2JXNk  [혹은 https://tv.naver.com/v/26940566 ]

 

1.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장의 서두의 인사말(계1:4~6)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소개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사실 계시의 책이자 묵시의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예언의 책이자 또한 편지의 책이다. 그러므로 형식으로 보면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은 바로 요한계시록 1:4~6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누가 누구에게 편지하는지를 밝힌다. 그것은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요한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서로서,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때 요한은 성자 예수님이 누구시며 또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계1:4~6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2.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사도 요한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언뜻 보기에는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편지들을 쓸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사도 바울의 편지들과 다르다. 다른 이유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 첫째로, 사도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원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사용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표현도 사실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둘째, 요한이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순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성령'하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도 편지에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지만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있기만을 기원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편지의 인사말에 바울의 편지 속에는 결코 성령 하나님이 들어 있지 않는 데에 비해, 사도 요한의 편지인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3.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를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3~4에서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분의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표현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 관한 표현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 얼핏 보기에는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 관한 표현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다고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처음에 표현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것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장차 오실 이'는 분명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근거가 바로 7절에 나온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 이 말씀에 나오는 '그'는 분명 그 앞 구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표현인 것이지 성부에 대한 소개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이라는 표현도 성령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이 표현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어린양의 일곱 눈들'을 가리키며(계5:6), 구약 시대로 치자면 이 표현은 땅에 두루 돌아다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곱 눈들'을 가리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슥4:10). 다시 말해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자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모든 것들을 감찰하는 분이 곧 하나님이신을 것을 드러내 주고 있다. 

 

4. 요한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가 아니라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서로 말씀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로 말하지 않고 있다. 성자와 성령의 순서가 앞뒤가 서로 바뀐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성자에 대한 소개가 너무나 길어질 것 같으니까 먼저 간단하게 성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인 이유가 될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의 실제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시고 나타내시어 일하시는 순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홀로 창조하셨다(사44:24). 그분은 성자와 성령과 협의하거나 회의하지 않으시고, 홀로 하늘을 펼쳤으며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이 홀로 땅을 펼치셨다. 그리고 당신의 영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다시 4,000년이 지난 후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나 이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다(요16:27~28).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이지 처음부터 따로 있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다. 단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고로 요한계시록 1장의 서두 인사말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는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는데 그분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5.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3가지 신분을 가진 자이자, 3가지 활동을 하시고 계시는 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첫째, 그분은 세 가지 신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참된 증인'이자, '죽은 자들의 먼저 나신 이(첫 열매, 원형)'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시다. 둘째, 그분은 세 가지 활동가로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분'이자, '우리를 그분의 피 안에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던 이'이시다. 그리고 더불어 그분은 '우리를 왕국으로, 하나님이신 그의 아버지에게 제사장들로 만드신 이'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일은 현재의 일이며, 그분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은 실은 과거의 일이며, 더불어 우리를 왕국과 제사장들로 만들고 있는 일은 과거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것이며 그 일은 아마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을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과거에 인간이셨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만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기에, 그분이 인성을 취하실 때에 신성이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로 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예수님을 인성을 배재한 분으로 소개할 수 없으며, 또한 그분을 신성만을 가진 분으로도 소개할 수는 없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자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20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03)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02)(계1:4~8)_2022-04-28(목)

https://youtu.be/0AtNjqrKXSs  [혹은 https://tv.naver.com/v/26519059 ]

 

1. 요한계시록에 1장 4절에서는 주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장 4절에는 주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소개되고 있는 분이 8절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전능한 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렇다. 주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시며,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전능한 자이신 것이다. 

 

2.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지상에 계실 때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계시된 예수님의 칭호 이상으로 소개되어 있다. 사실 지상에 계실 때에 그분에 대한 최고의 칭호는 그분이 그리스도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마16:16).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이상으로 소개된다. 다시 말해, 그분은 지상에 계실 때에 불려졌던 바로 그 칭호 외에도 한층 고양된 칭호가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인데, 주 하나님이신 그분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분은 "전능자이시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줄곧 '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그분이 '주 예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계22:20,21). 주 하나님이 곧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보좌에 앉으신 이 곧 주 하나님이라고 소개되어 있다(계21:5~6, 19:4). 그런데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 가면, 주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다"고 말씀하고 있다(계22:13).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참고로, 요한복음에서도 주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한층 더 고양된 형태로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의 하나였던 사도 도마의 신앙 고백에 나타나 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후에 그분에게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요20:28).

 

3.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를 성부 하나님에 대한 소개라고만 알고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그렇게 해석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다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칭호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바로 그 책에서만 표현되어 있는 독특한 하나님의 칭호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이다. 그런데 이 칭호는 구약 시대 때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에게서 들었던 하나님에 대한 칭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계시하셨다(출3:14). 그런데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아흐예 아쉐르 아흐예'로서, '나는 내가 ~라고 하는 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헬라어의 70인역에서는 '나는 지금 있는 이이다.'라고 번역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조금은 암시가 되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요한계시록에서 비로소 표현된 독특한 하나님의 칭호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4.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대체 누구신가?

  그렇다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대체 누구신가? 많은 주석학자들이 해설하고 있듯이 이 칭호는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인가? 아니면 다른 칭호이기도 하는가? 얼핏 보기에는 이 표현이 성부 하나님에 대한 표현처럼 보인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만 보아서는 아니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하나님 칭호는 성부 하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칭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는 요한계시록에서 딱 3번 나올 뿐이다. 요한계시록 1:4,8과 그리고 4:8이 그것이다. 1:4과 1:8에서는 동일한 표현으로 나오고, 4:8에서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하여서 첫째와 둘째가 순서가 뒤바뀌어서 나오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문구의 순서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뿐 다 동일한 표현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1장과 16장에서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칭호가 축소되어서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는 이'라고 나온다(계11:17, 16:5). 즉 '장차 오실 이'라는 부분이 삭제되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사도 요한이 모른 채 빠뜨리고 기록한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함부로 실수한 것을 기록해 놓은 책이 아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표현들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 왜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그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날 때다(계11:15). 이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께서 공중으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을 위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표현된 예수께서는 이제 두루마리를 사도 요한에게 넘겨주시고 재림하신 것이다. 즉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으로부터 큰 두루마리를 취했던 예수께서는 일곱 인들 중에서 여섯째 인까지 떼시고 또한 일곱째 인을 떼신 후에 여섯째 나팔까지 주관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재림하셔야 하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예언의 말씀인 두루마리(그래서 작은 두루마리가 됨)를 사도 요한에게 넘겨주신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10장에 막간 계시로서 나온다. 그렇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칭호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모두를 지칭하는 칭호였던 것이다. 정리한다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칭호인 것이다. 

 

5.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성경 전체의 기록을 통하여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지 성자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성자 하나님이시다'는 말과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만약 우리가 그분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그분은 더 이상 성부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며 성령 하나님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내용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신앙 고백으로 알려지고 있는 벨직 신앙고백에 고스란히 나온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100%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와 서로 구별되시기 때문이다), 100% 맞다고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라기보다는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 곧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세기와 이사야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의 놀라운 자기 선언이 나온다. 그분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무려 3번씩이나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8:24,28,58). 이는 예수께서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을 직접 자신에게 적용하신 사례이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유대인들이 그만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고 몰아붙이면서 네가 아브라함보다도 크냐고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대답하신다(요8:56). 그러자 유대인들은 "네 나이가 아직 50도 아니 되었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예수님은 "나는 ~이다"라고 하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심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제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주 하나님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실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진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탄생하실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협의를 하여 성자가 아들로 내려오셨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에만 나올 뿐 실제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성경에서는 단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당시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되었던 한 분 하나님께서 훗날 인간에게 다시 오실 때에는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만세 전부터 아들로 따로 있다가 아버지와 협의를 한 후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될 때에 비로소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분은 결코 아버지로부터 독립되어 따로 나타나 있다가 아들로 오신 것이 아닌 것이다(요16:27~28).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 곧 주 하나님의 체현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다가 드디어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한다(사9:6). 고로 만약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고 하셨던 예수님의 명령을 제자들이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행2:38, 8:16, 10:48, 19:5)" 바꾸어서 세례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도 되고, 아들의 이름도 되고 성령의 이름도 되는 것이지만 그분이 우리에게는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기에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을 아들의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세례를 줄 때 어느 누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일이 없고, 모두가 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로 세례를 주었다고 나온다. 이는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2022년 04월 28일(목)

정병진목사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이 누구

신지에 관한 말씀을 어찌 한 편의 설교로 정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성경66권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성령에 대해 경륜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령이 누군지에 대한 분명한 계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 한 분이신 영원하신 주 하나님,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전능한 이시여,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삼위일체로서 행하신 당신의 위대하심을 영원히 찬양하고 경배하나이다."

2020-05-22(금) 금요기도회
제목: 성령은 누구신가(07) 경륜의 영(05) 한 분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계1:4~8)
https://youtu.be/m04NDCcGxBs [혹은 https://tv.naver.com/v/13935084 ]

 

1. 들어가며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은 영으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성령을 알아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구원받는 모든 영역에 성령께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이는 그 어떤 영적인 것들도 깨달을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이 죄인인지도 잘 모르며, 왜 구원을 받아야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함께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므로 귀신이 성령을 가장하여 역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성경을 잘못 해석하도록 귀신이 성령을 가장하여 잘못 인도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전반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게 하려면, 반드시 성령을 알아야 한다. 특히 성령이 누구신지 그 인격성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성령이 누구신지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이 누구신지 알아보는 7번째 시간으로서 경륜의 영으로서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2.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이 누구신지에 관하여 우리는 그분의 인격성에 따라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분의 사역에 따라 정의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할 때에는 그분의 인격성에 따른 정의라고 말할 수 있, 성령을 "양자의 영", "성경의 영", "인치시는 영"이라고 할 때에는 그분의 사역에 따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분의 인격성에 따라서 성령을 정의하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6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그분은 "하나님의 영"이요, 둘째는 "여호와의 영"이시다. 그리고 셋째 그분은 "아버지의 영"이요, 넷째, 그분은 "아들의 영"이며, 다섯째, 그분은 "그리스도의 영"이자, 여섯째, "예수의 영"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이 누군지를 인격적으로 정의할 때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성령은 경륜적인 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는 만세전부터 하나님의 영이기는 하셨으나, 그의 인격적인 명칭이 시대에 따라 약간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륜에 따라 성령을 다른 명칭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구약시대에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자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오자 성령은 구약시대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렸지만,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 성령은 구약시대에는 전혀사사용되지 않은 명칭이 사용되었으니, 그것은 "아버지의 영", "아들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륜에 따라 불성령의 명칭이 달라졌음을 알고 뒤에 나오는 성령을 앞의 시대에 소급적용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 나오는 성령을 "아버지의 영"이라든지 "아들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아직 아들이 세상에 출현하지도 않았고 대속사역을 완수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은 성령의 명칭을 모든 명칭으로 다 불러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미 성령께서는 여러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성령이 되셨기 때문이다. 

 

3.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은 누구신가?

  그럼, 성령이 누구신지에 관한 가장 확실하고 최종적인 정의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성경의 결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성령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령을 어떤 분이라고 묘사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령을 5가지로 묘사하고 있는데,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요한계시록에만 나오는 명칭들이다. 다른 곳에도 나오는 성령의 명칭 한 가지는 "그 영'이라는 것이며, 나머지 네 개는 다 요한계시록에만 나오는 고유한 명칭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명칭으로는 "보좌앞의 일곱 영들(계1:4)", "보좌 앞에 켜져 있는 일곱 등불들(계4:5)", "하나님의 일곱 영들(계4:5)",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들(계5:6)", "어린양의 일곱눈들(계5:6)"이 있다. 참고로, 구약시대에 스가랴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들"을 "여호와의 눈들"이라고 예언한 바가 있기도 하다(슥4:10).

 

4. 요한계시록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에 대한 명칭이 알려주는 놀라운 비밀은 무엇인가?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에 대한 명칭은 정말 많은 영적인 비밀을 알려주는데, 그중에서도 한 분 하나님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의  비밀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럼, 이제부터 한 분 하나님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성령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성령에게 "일곱"이라는 숫자가가 붙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곱 영들", "일곱 등불들"이 그것이다. 왜 하나님의 영에게 "일곱"이라는 숫자가 붙어있을까?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묵시문학으로서 여기에 사용되는 모든 숫자들은 산술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영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일곱"과 "열둘"은 매우 중요한 숫자인데, "일곱"은 이 땅에서의 완전함를 가리키고, "열둘"은 하늘에서의 완전함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뿔들이 일곱이고, 어린양의 눈들이 일곱이며, 성령을 일곱 영들이자 일곱 등불들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는 순전히 이 땅에 있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늠해볼 수 있다.  사도요한이 성령더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일곱 등불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성령께서 얼마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관심갖고 있는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성령을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 곧 창조와 보존과 섭리에 관하여 계속해서 관여하시고 일하고 계심을 알려준다. 

  둘째, 성령이 꼭 "어린양"이나 "여호와"와 관련지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도요한이 성령을 "일곱 영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라고 말하며, 또한 "일곱 눈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어린양의 일곱 눈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신데, 편지의 맨 마지막에 가서는 꼭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다는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예수님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이며(계5:6), 여호와와도 불가분의 관련이 있음을 말해준다(슥4:10). 왜냐하면 성령은 독립적인 또 하나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의 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술은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특별히 성령을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어린양의 일곱눈들"이라고 했다는 것은 성령께서는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아 이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지켜보고 감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으로 형상화된 예수께서는 이 땅에 보내어진 성령을 통해서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지금도 다 감찰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5. 성령은 "하나님의 보좌 앞의 일곱 영들"인가, 하나님 자신의 영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이 누군지에 관하여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어떻게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께서 아들의 영도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성령께서 "아버지의 영"이라면 그 영은 결코 "아들의 영"이 될 수 없으며, 혹 성령이 "아들의 영"이라고 한다면 그 영은 결코 "아버지의 영"이 될 수 없는 것이 상식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면서 동시에 "아들의 영"이라고 성경이 명확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영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의 일곱영들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신의 영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볼 때, 성령은 하나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영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다른 표현으로서 한 분의 영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성령이 경륜의 영이시라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륜적으로 볼 때 성령은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자,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려졌지만, 신약시대에 들어와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면서 아들의 영이라고 불려졌기 때문이이다. 그러다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에는 성경은 단독적으로 말씀하시며, 명령하시는 부분이 나오기 때문이다(행8:29,10:19,11:12,13:2,딤전4:1,계14:13,22:17). 그러므로 성령은 첫째, 하나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영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의 일곱 영들(일곱 등불들)"이시다. 더불어 성령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서는 하나님 자신의 또 다른 영이시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면서 여호와의 영이자, 예수의 영이신 것이다. 

  

6.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렇다면 영은 영이나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령을 이해하려고 할 때, 여기서 "하나님"은 대체 누구신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명칭들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명칭들이 있지만, 성령의 최종계시인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최종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이 대한 고유한 명칭들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분은 "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계1:8,4:11). 둘째로 그분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다"이신 분이시다(계1:4,8,2:8,21:6, 22:13). 셋째로 그분은 "전능자"이시며(계1:8,4:8, 11:17), 넷째로, 그분은 "보좌[위]에 앉아계신 이"이시다(계4:7,5:1,7,13,6:16,7:15,21:5). 그리고 다섯째로,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이"이시다(계1:4,5,4:8).

  이러한 표현들 중에서 우리가 성령과 관련지어 살펴볼 명칭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이"라는 명칭이다. 엇필보기에 이 명칭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유한 명칭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요한이 소아시아교회의 일곱 사자에게 편지를 써 보낼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문안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성부는 "전에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고, 성령에게는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으며, 성자에게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이"라고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고 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틀린 해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라는 표현은 성부만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계1:4,8)"가 예수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신 이후(일곱번째 나팔이 울려퍼진 이후)에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일곱째나팔이 울려퍼진 이후에 주 하나님은 이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이"라고만 나오기 때문이다(계11:17, 16:5).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심판주로 오셨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을 성부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 표현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칭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장차 오실 이"가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라고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방식으로 "전에도 계셨고(이미 계셔왔고 아직도 계시는 이)"라는 표현은 성부에 대한 명칭으로 해석하고, "이제도 계시는 이"는 성령에 대한 명칭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산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영들"인 성령께서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다른 표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다른 동일한 표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동시에 세 가지 위격을 가지신 분이신 것이다.

 

7. 성령께서는 한 분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이상의 말씀들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독립적인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성령께서는 경륜적인 안배가 있다는 것을 꼭 알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위격을 사용학디 시작한 때는 오순절 성령강림이후부터라는 것이다. 이는 구약시대에나 예수님의 공생애시대에 성령께서는 한 번도 독립적으로 자신을 1인칭시점으로서 말씀하거나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신 적이 없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전부 다 3인칭시점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순절의 마가다락방의 성령강림 사건이후 성령께서는 이제 스스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신다. 자신을 1인칭 시점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사도행전13:2의 말씀이 그것이다. 이 말씀을 헬라어원문에 따라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그들이 주를 섬기고 있으면서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이미 부른 채 있는 바의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 '나에게'(나를 위하여) 구별하라"(행13:2). 그렇다. 여기서 성령께서는 "내가" 혹은 "나를 위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이것은 그분에게 독립적인 위격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고로 우리는 성령강림사건 이후부터는 성령에 대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분 스스로가 독립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께서는 "어린양의 일곱 눈들(계5:6)"이자 "여호와의 일곱 눈들(슥4:10)"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명칭상으로 볼 때에도 성령께서는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이자 "여호와의 영, 아버지의 영"이라는 표현하고 있기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8. 나오며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4세의 이단이었던 아리우스(A.D.250~336)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다가 그만 예수님을 피조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니케아종교회(A.D.325)와 콘스탄티노플종교회의(A.D.381)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식으로 표현하려다가 그만 하나님을 세 분처럼 표현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종교회의의 신앙고백 어디에도 "셋이 하나다"라는 조항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하나님에 대해서 표현할 때에는 세번째 위격만을 강조하다가 성령을 세번째 하나님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이야기하려다가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과 활동으로만 제한하려고 해도 아니될 것이다. 우리의 성령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홀로 한 분이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경륜적으로 당신을 나타내시고 일하셨던 것을 지켜보면서, 오직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오, 전능하신 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찬양과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2020년 05월 22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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