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속편(05)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의 중요성을 알았던 첫 번째 여자는 누구였는가?(창3:15)_2021-08-13(금)

https://youtu.be/Kdb4sye6F9Q  [혹은 https://tv.naver.com/v/21856125  ]

 

1. 사탄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탄마귀가 비록 아담과 하와를 자기의 수중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씨)이 장차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박살나게, 짓뭉게버리게)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었기에, 여자의 후손의 출현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마귀는 그때 이후로 '여자의 후손'의 출현을 막아보려고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늦춰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담 이후 72대손으로 결국 약속의 후손이 태어났으니 그분이 바로 인간으로 오신 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겼던 '이긴 자'의 모델(전형)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지금도 이기는 자들이 출현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2.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의 중요성을 안 여자는 누구였을까요?

  창세기에서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여인일 수 있지만 사실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 곧 '약속의 씨'는 남자 혼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자의 씨는 남자의 씨 곧 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 없이 '여자의 후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후손의 원래 단어는 '씨'이기 때문에, 여기서 '씨'는 남자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사내아이를 낳고 싶어해도 여자없이는 또한 그러한 아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필연코 여자의 후손을 얻기 위해서는, '여자의 후손'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여자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서 과연 이러한 '약속의 씨'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태를 통하여 그러한 씨를 낳기를 갈망했던 여인들은 누구일까요? 그 여인들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들의 족보책에 등장하고 있는데, 그녀들은 바로 "다말, 기생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곧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 1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도 나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 중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 다음으로 '사라'라라는 여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여인인 믿음의 조상들 중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그녀가 천국에서도 이긴 자가 되어 왕 노릇하는 레벨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3. 사라는 어떻게 되어서 여자이지만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가 선별 족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과 비교해보니,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나오는 이름들은 예수님의 조상들의 모든 이름이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하시야, 아달랴, 요아스, 아마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등 왕의 이름들이 빠져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이들이 메시야의 족보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실제로도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조상들의 족보에 5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은 딱 한 명입니다. 그녀는 '다말(타마르)'입니다. 그녀는 유다의 첫째 며느리로 들어온 가나안 여자였는데, 남편이 죽고 남편의 동생도 죽게 되어 더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창녀로 분장하여 시아버지인 유다를 끌어들여, 2명의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그중의 하나인 '베레스'가 결국 유다 가문의 대를 잇게 됩니다. 유다에게 있어서 '약속의 씨(여자의 후손)'는 '베레스'이며, '여자'는 '다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믿음의 조상들의 명단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했던 여인의 하나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믿음의 여인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녀의 믿음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것은 창세기만의 두드러진 기사를 통해 그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분명 믿음의 조상들의 명단에 여자로서 그 이름을 올려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사라는 어떤 믿음을 갖게 된 것인가요?

  사라는 일종의 여장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결정은 아브라함을 늘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6장에 보면, 사라가 자신의 태가 막혔다는 것을 알고 후사를 얻기 위해 결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들여서 아브라함의 후사를 얻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임신하자 여주인인 사라를 업신여깁니다. 그러자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녀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기를 원하노라(창16:6)"고 하면서 하갈을 통해 자신의 자식을 얻기를 소망했으나, 하갈이 착각하여 자기가 임신한 아이를 자기의 아이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녀를 내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학대를 못이겨 도망친 하갈이었지만 천사가 나타나 위로함에 따라 다시 돌아가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초미의 관심사는 과연 이스마엘이 약속의 씨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가 약속의 씨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방문하게 될 터인데, 그러면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아이가 약속의 씨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창17:15~16,19,21). 그러자 사라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태를 통해 태어난 아기가 약속의 씨가 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히브리서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히11:11~12). 그러니 사라를 통해 약속의 씨인 이삭이 태어난 후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게 되자, 즉시 사라는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녀의 아이를 내어쫓으라고 요구합니다. 즉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신의 약속의 아들인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준 약속의 씨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라는 일찍부터 경수(생리)가 끊겨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으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녀가 약속의 씨를 낳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고스란히 믿어서 결국 약속의 씨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있었어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아니하시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이 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죽은 자와 방불한 상태에 있었으나 아들을 낳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결국 사라의 신앙고백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

  결국 사라도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되니, 그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 가문에 드리워진 저주가 사라가 아들을 낳음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가문은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저주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일찍 죽는 저주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아내에게 있는 불임의 저주도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원인은 모두가 다 자기 조상들의 우상 숭배의 죄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끊기 위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도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지 못했고 불신앙의 모습으로 살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방문을 받아 그는 자신이 따라가고 있는 분이 전능하신 분임을 믿게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할례를 통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아내 사라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태어난 아이는 '약속의 씨'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나님을 못 하실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에게 웃음을 갖도록 이끄신 하나님 여호와를 전능자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라에게 임했던 불임의 저주도 끝이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저주(일찍 죽는 저주)와 사라의 저주(불임의 저주)가 끝이나게 된 것입니다. 

 

2021년 08월 13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99)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이 말해주는 영적인 비밀들(창21:8~21)_2021-05-18(화)

https://youtu.be/6PCk0ER0tn0  [혹은  https://tv.naver.com/v/20267514  ]

 

1. 어떻게 되어서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만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인가요?

  애굽여인 하갈은 여주인 사라의 몸종이었는데 아들을 얻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들어간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14년후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초자연적으로 사라를 통하여 아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이삭"입니다. 고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상속으로부터 탈락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17~18살 먹은 이스마엘이 이젯 4~5살 되는 이삭을 놀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동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후사의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했습니다. 

 

2. 이스마엘은 이삭을 어떻게 놀렸나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고 하는데, 히브리어 동사를 보면 "차하크"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 그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책을 보면, 그때 이스마엘이 이삭과 더불어 동성애를 하려고 시도했다는 것도 있고, 야살의 책에 따르면 활로 동생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사라의 눈에 이스마엘을 내보려는 시도였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본부인에게서 적자가 태어났으면 첩을 통해 태어난 서자는 당연히 떠나가야 했던 것이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 여종과 그녀의 아들을 내쫓으세요. 왜냐하면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창21:10)"라고 했던 것입니다. 

 

3. 사라의 말에 아브라하음 어떻게 반응했나요?

  예전 같으면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말에 즉시 어떤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에 사라의 말을 듣고 첩을 들여서 이스마엘을 낳았던 아브라함은 큰 홍역을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호되게 책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철저히 회개해야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아내의 말을 듣고 곧이곧대로 들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동일한 실수를 잘 안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 아이나 네 여종 때문에 근심하지 말거라. 사라가 네게 말했던 말을 다 들어주어라. 왜냐하면 이삭을 통하여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종의 아들도 너에게 속한 씨이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해줄 것이다(창21:12~13)"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보냈습니다. 

 

4.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떠한 영적인 교훈을 주나요?

  그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떠한 영적인 교훈을 가르쳐 주나요? 그것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것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일이 있습니다. 여종(하갈)과 자유하는 여자(사라)는 율법과 약속(복음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며, 여종의 아들(이스마엘)과 자유있는 여자의 아들(이삭)는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가리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 일정기간동안에는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할 수는 있지만 결국 여종과 그 아들이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나하면 여종의 아들이 자유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잇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오늘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은 새 사람이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육체를 따라 났던 옛사람을 우리에게서 제거해야 합니다. 이스마엘은 영적으로 볼 때 육체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예수닝을 믿어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는 육체에 속한 것들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떠나보아야 할 것으로는 죄된 본성도 있을 것이고 죄 때문에 우리 몸에 침투해 들어온 귀신들도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것들을 떠나보내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미 비록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나중에는 이것들에게 우리가 점령당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면, 이제부터는 하늘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육체에 속한 것들을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다른 영적인 비밀들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다른 영적인 비밀들도 알려줍니다. 그것은 내가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떠나갈 때는 떠나가는 사람에게 복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축복은 아닐지라도 육적인 축복은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게서 떠나게 되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결정이었기에, 이스마엘에게서 육적인 축복은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인 만큼 생육하고 번성하여 민족을 이루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창25:12~18). 이후 아브라함을 떠나간 이스마엘은 바란광야에서 활쏘는 자가 되었고, 12아들들을 낳아 12두령들(족장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한편 이 말씀을 거꾸로 뒤집어서 표현하면, 정말 영적인 복을 받을 수 없는 자는 언젠가는 결국 영적인 공동체로부터 떠나게 되어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평생에 신경써야 할 것은 우리가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적인 축복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있느냐? 그리고 약속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있느냐가 증요한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말씀과 예수님을 붙잡는 것은 우리가 육적인 축복과 아울러 영적인 축복까지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현상만을 보고 떠난다면 나중에 후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약속의 말씀과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붙들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2021년 05월 18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87) 이스마엘과 이삭,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약속을 따라 난 자의 차이(창17:15~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JISZxm6vQY  [혹은 https://tv.naver.com/v/19995894  ]

 

1. 아브라함이 초창기에 범한 2가지 실수는 무엇이었나요?

  아브라함은 처음 부름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하나님의 묻지도 않았고 지시하심도 없었는데 단독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기근을 피해 애굽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창12:10). 그러다보니 자기의 아내를 바로왕의 후궁으로 빼앗길 뻔 했습니다. 하마터면 약속의 씨가 단절될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그가 부름받은 약 10년정도 되었을 때에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의 몸종인 여종 애굽여인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창16:15~16). 얼핏 보기에 그것은 아내의 넓은 아량과 더불어 후손을 얻기 위해 아브라함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꾸중하셨습니다(창17:1).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두번째 실수입니다.

 

2. 아브라함의 두번째 실수는 무엇이었나요?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얻게 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알려주심으로 알게 되었습니다(창17:1). 그것은 첫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으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항상 불변의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회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자식을 낳은 것입니다. 그는 약 25년 하나님과 함께 있었어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엇던 것입니다. 둘째, 그는 씨를 얻는데 하나님의 방법과 절차를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씨를 얻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준 하나님의 길을 따라갔어야 했는데 또한 하나님의 지시하심도 없었는데, 세상적인 방법과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자식을 낳았던 것입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와 어긋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은 가문의 저주로부터 건져내어 새로운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려 시도했지만 자기자신만 저주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을 뿐 아내의 저주는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신의 아내는 이복누이동생으로써 자신의 아버지 데라의 딸이었기에 아버지로부터 직접적인 저주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그 일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행동이 불신앙적인 행동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을 가로막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과과 방법대로 하갈을 취하였고 그녀로부터 아들을 얻게 됩니다. 

 

3. 이스마엘과 이삭은 어떻게 불렸나요?

  이스마엘과 이삭은 둘 다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창16:16, 21:5). 그리고 둘 다 아브라함의 씨(후손)입니다(창21:3, 22:17~18). 그런데 이들을 부를 때에는 좀 달랐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하갈의 아들(종의 자녀 = 육체를 따라 난 자)"이라고 불리었고(창21:9), 이삭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점에서는 이스마엘과 똑같지만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자이자 "사라의 아들(주인의 자녀 = 약속을 따라 난 자)"이라고 불렸습니다(창21:7, 갈4:23). 

 

4. 종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종의 자녀였던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창21:8~13).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쫓겨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기업을 잇지 못함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두 가지 비유로서 설명했습니다. 이스마엘의 어머니이자 여종이었던 하갈은 "율법"을 상징하며, 여주인이자 이삭의 어머니였던 사라는 "복음"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종의 자녀였던 이스마엘은 결국 하늘나라의 유업을 얻지 못하게 되지만, 약속의 자녀였던 이삭은 하늘나라의 유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5. 이스마엘과 이삭의 삶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이스마엘과 이삭은 둘 다 똑같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씨에 해당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육체를 따라 여종을 통하여 태어났던 이스마엘은 결국 집에서 쫓겨나 아버지의 기업을 잇지 못했습니다. 오직 약속을 따라 여주인을 통하여 태어났던 이삭만이 아버지의 기업을 잇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이 행동한 모든 것들은 설령 그것이 최선을 다한 행동이었고 열심히 살았던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계산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이삭 둘은 아들로 인정해주셨던 것이 아니라, 오직 이삭만을 아들(독자)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창22:2,12,16). 이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육체를 따라 즉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만들고 있는 우리의 모든 작품들은 사실 사람의 눈에는 멋있게 보일른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쓸모없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계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과연 계산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 쓸모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2021년 05월 04일(화)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