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7(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이삭이 받은 은사들과 그가 소유한 악한 영들은 어떤 것인가?(창22:9~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tWvhV-wBu4  [또는] https://tv.naver.com/v/31251972

 

1. 들어가며

  창세기에서 이삭의 삶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그의 아들 야곱에 비한다면 그리 특출한 편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삭 이야기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며, 아들 야곱의 이야기와 함께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이삭 이야기만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는 단 한 장으로서 창세기 26장 뿐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주인공이 되어서 나오는 부분은 아주 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천국에서 이삭은 아브라함과 야곱과 더불어 24장로의 한 사람으로서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삭의 생애 역시 주도면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삭의 생애 가운데 그가 받아누렸던 은사들과 그의 속에 들어있었던 악한 영들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표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도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이삭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태어났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99세 때에 아브라함에게 장차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1년 뒤에 정말 이삭이 태어났고, 그의 이름도 '웃음'이라는 뜻으로 '이삭'이 되었다. 이삭은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3~5살 때 즈음에 돌잔치를 하였다. 그리고 그의 중간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나의 25세 내지는 37세가 되었을 때로 껑충 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쳐졌던 때였다. 그리고 그 해에 자신의 어머니를 먼저 떠나 보낸다. 사라가 127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 뒤 이삭은 40세의 나이에 리브가와 결혼한다. 그리고 60세에 자식을 보게 되는데, 쌍둥이로서 에서와 야곱을 낳는다. 그리고 75세 때에 아버지 아브라함도 역시 하나님 품으로 떠나간다. 그리고 그의 나이 135세 때에 야곱(75세)를 외삼촌 라반의 집에 보낸 뒤에 20년 뒤인 155세에 다시 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0세에 자신도 하나님 품에 안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브엘라헤로이에 거주했다가(창25:11), 한 때는 블레셋의 그랄 땅에도 거주했으며(창26:1), 이어서 브엘세바에 거주했다가(창26:33), 그리고 헤브론에서 그의 일생을 마감한다(창36:27). 

 

3. 이삭이 받은 은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삭은 이 땅에 살 때에 어떤 은사들을 받고 살았을까? 그의 은사들에 대해서는 그의 일생이 성경에 짧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의 은사 전부를 열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의 생애 속에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바탕으로 그가 받은 은사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는 한 가지의 초자연적인 은사와 더불어 5가지의 일반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받은 한 가지 초자연적인 은사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은사'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보았고 또한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창26:2~5, 24).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보거나(물론 직접 본 것은 아니라 빛으로 보았을 것이다) 혹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사람은 많지 않다. 하나님을 보거나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보통의 영성 수준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자기 안에 악한 영들이 거의 없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우상숭배의 죄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고 그분을 뵈올 수도 있는 것이다. 구약의 인물 가운데 아브라함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본 사람은 없다. 이삭도 마찬가지다. 직접 본 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삭을 하나님을 보았고 또한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이삭은 일반 은사로서 최소 5가지 은사도 같이 받았다. 

 

4. 이삭이 받은 일반은사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삭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았을까? 그가 받은 은사들은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과 교통하는 은사 외에도 다음과 같은 일반은사들이 있다. 

  첫째, 그는 '헌신의 은사'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기꺼이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런 저항이나 거역함이 없이 자신을 기꺼이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는 '순종의 은사'를 받았다. 그는 헌신의 은사와 더불어 순종의 은사도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토달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는 은사를 받았다. 또한 아버지의 말씀에도 그대로 순종하는 은사를 받았다. 예를 들어, 이삭의 때에 기근이 찾아왔다. 그러자 그는 애굽 땅으로 이주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애굽 땅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머물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렀다(창26:1~6).

  셋째, 그는 '기도의 은사'를 받았다. 그에게 간구하는 은사가 있었으니, 그가 장가들어 20년간 자식이 없자, 어느날 하나님께 자식을 달라고 간구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자식을 주셨는데 그것도 쌍둥이를 주셨다(창25:21).

  넷째, 그는 '재물의 은사'를 받았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을 바친 이후 그는 그랄 땅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농사를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땅에서 매년 농사를 짓던 사람들보다 100배의 수확을 하게 되었으니 그에게 재물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창26:12). 또한 그를 하나님께서 창대하게 하셨으니, 그가 매우 크게 되어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으며, 자기 집에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으며, 종들도 심히 많게 되었다(창26:13~14).

  다섯째, 그는 '온유의 은사'를 받았다. 이삭은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이후 사실 부활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자신을 죽음에 넘겼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그후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어떤 사람에게도 온유함으로 대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메구거나 빼앗아가면 그는 그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다시 우물을 팠다. 그에게는 온유함의 은사가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온유함이 넘친 자에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다(마5:5).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아가자 다른 우물을 팠는데, 역시 파는 곳마다 우물이 나왔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찾아올 정도였다. 그는 정말로 온유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5. 이삭이 갖고 있었던 악한 영들은 무엇인가?

  그런데 하나님과 교통하고 지내던 이삭이라고 해서 악한 영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적어도 2가지 악한 영들이 역사하고 있었다. 하나는 본인 때문에 들어온 영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부모 때부터 역사했던 영이 자신에게도 들어와 역사한 영이다.

  첫째, 자신이 불러들인 영이 있으니 그것은 '고집의 영'이다. 그것은 장자를 에서로 단정하고 에서에게만 축복하려고 하는 고집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실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쌍둥이를 얻었다. 그런데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에 둘은 뱃 속에서부터 싸우고 있었다. 그러자 리브가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이럴 때에는 어찌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두 국민이 태 중에 있다고 하시면서, 두 민족이 복중에서부터 나누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할 것이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창25:23). 그런데 리브가의 기도의 응답에 대해 이삭이 못 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삭은 에서를 좋아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이삭은 장자인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삭도 자신의 고집을 그때서야 꺾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된다. 

  둘째, 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속이는 영' 곧 '거짓말하는 영'이 그에게 있었다. 즉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두 번이나 속이면서 속이는 영을 받아들였는데(창12:11~13, 20:5), 그 영이 아들에게도 내려간 것이다. 그래서 이삭도 역시 그랄왕 앞에서 자기의 아내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동생이라고 속인다(창16:7). 아버지에게서 있던 속이고 거짓말하는 영이 그대로 아들에게 전가되어 아들에게서 역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악한 영들은 회개함으로 자신의 대에서 끊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영이 자신의 아들과 손자에게로 내려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은 오직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6. 나오며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태어난 이삭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은 우상숭배의 영을 물려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삭 역시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믿었던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야곱도 역시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고 자신의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섬겼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다. 그러므로 이삭이나 야곱 역시 하나님과 교통하는 은사를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 이삭은 태어날 때에 이미 자신의 아버지는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심지어 하나님을 보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은 얼마나 더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삭은 어떤 어려움도 없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먼저 태어난 에서를 장자로 취급하려는 그의 고집이 있어서 조금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 흠이 있다면 아버지로부터 속이고 거짓말하는 영을 받아서 자신도 모르게 속이고 거짓말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삭 때에도 그것이 제거되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들 야곱 때에도 역시 속이고 거짓말하는 영이 역사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영이 3대까지 지속되지 않게 하려고 야곱에게서 그것을 철저히 뽑아내도록 이끌어가셨다. 그래서 20년의 세월을 통해 야곱은 속이고 거짓말하는 영을 뽑아내야 했다. 그렇다. 이 세상에는 온전한 사람은 없다.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와 허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회개함으로 자신의 후손에게 악한 영을 물려주지 아니하는 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악한 영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철저히 회개하여, 우리 후손들에게는 악한 영들을 물려주지 않도록 하자. 

 

 

2022년 11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이삭은 그가 젊었을 때에 하나님께 자신을 번제물로 바친 자다. 그런데 그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왔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던 것인가? 그리고 이삭의 경우와 우리의 경우는 어떻게 같으며 또한 어떻게 다른가?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중간에 생략된 영적인 원리들과 최종승리의 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흔들림없이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고 최종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2021-06-11(금) 금요기도회
제목: 창세기강해(119) 바쳐진 자의 삶에도 어려움은 있다(창26:12~2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1i4xvqzUmgI  [혹은  https://tv.naver.com/v/20709402 ]

 

1. 들어가며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 그러한 영적인 원리들을 캐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엄청난 보화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이러한 영적인 원리들을 가르쳐주지만 아무에게나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구하고 바라고 찾는 자들에게 열려지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이야기에는 영적 원리가 중간에 한 대목씩 생략되어 있기도 하며, 다른 것과 비교해 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늘 읽었던 말씀도 그러한 영적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다. 그것은 바쳐진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어려움이 왜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어려움에 부딪힐 때에는 우리는 과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한 자에게 주어지는 참된 축복은 대체 무엇인가? 

 

2. 바쳐진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은 무엇인가?

  창세기의 기자는 분명 하나님께 바쳐진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쳐진 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손대는 일마다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쳐진 자"란 이삭과 같은 자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삭은 그의 나이 약 30세(?)가 되었을 때에 모리아의 한 산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사람이었다(창22:1~19). 그는 그때 스스로 아버지의 손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맡겼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자신을 드리겠다고 하는 각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자신을 드리는 것(받침)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리고 그의 마음만을 받으시고 그를 죽게 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의 삶은 이미 예표론적으로 볼 때,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이후의 삶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바쳐진 자는 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는 복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 자기자신을 드린 자의 삶은 그때부터는 그 사람 자신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버린 이상 그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삭의 잘 됨과 그의 안 됨은 이제 더이상 그에게 있지 않게 된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 드려졌기에 그 사람을 소유하신 하나님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에게 자신을 바친 자를 돌보지 아니할 수 없으며, 복을 주지 아니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쳐진 자의 주인은 이제 본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0살 즈음에 하나님께 바쳐진 이삭의 생애는 잘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삭의 삶은 더이상 이삭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근을 피해 블레셋민족의 그랄 땅으로 이동하였지만 이삭의 삶은 형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해에 이삭이 지은 농사에서 나타난다. 사실 이삭은 농사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목축업이 주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랄 땅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곳의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삭도 그랄 땅에 머무는동안 농지를 개간하여 그곳에 농사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해 농사한 것을 거둬들여보니 무려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된 것이다. 어떻게 농사 한 번 제대로 지어보지 못했던 이삭이 농사에 풍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었다(창26:12) 왜냐하면 이삭이 짓는 농사는 이삭의 농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농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삭이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삭은 농사일에는 초보자였다. 그의 원래 직업이 목축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해에는 농사도 풍년이었고 목축업도 잘 되었다. 그리하여 이삭은 점점 창대하게 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기에 이른다. 그러니 그 집에는 양떼와 소떼가 가득하고, 종들도 심히 많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바쳐진 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들 중에도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전부 이삭처럼 복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는 분들도 더러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삭의 경우와 나의 경우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삭은 이미 자신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저주가 끊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가? 예수님만 믿으면 이미 저주가 끝났다고 믿고는 지은 죄를 회개하지도 않고 있고, 특히 조상들이 지은 죄들에 대해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리하여 조상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값으로 인해 3~4대 후손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사람은 앞길을 막는 저주 때문에, 하는 일마다 막히기도 하며, 물질이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삭의 경우는 이미 그러한 저주가 끝난 상태에 있었지만, 오늘 우리의 경우에는 저주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기도 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회개의 메카니즘을 아직 모르는 사람은 "나는 왜 남들처럼 복을 누리고 살지 못하지?"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빨리 조상들의 지었던 죄와 자신이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것도 낱낱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쳐진 자라도 항상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바쳐진 자의 삶에도 시기질투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대 대처해야 하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쳐진 자의 삶에도 어려움은 있다. 왜냐하면 바쳐진 자의 축복을 보고 시기질투하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적으로 볼 때, 블레셋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사탄의 나라를 상징한다. 그러니 블레셋 사람들은 악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얼마 후 이삭에게 와서는 아브라함이 파놓았고 이삭이 사용하고 있던 우물들을 흙으로 메워버렸다. 그리고 블레셋왕 아비멜렉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창26:16)" 그렇다. 바쳐진 자의 삶은 축복된 삶이요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받는 삶이 된다. 하지만 이것을 시기질투하는 세력에 의해 또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유없이 이러한 고통을 받게 되었을 때 사람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그것은 이삭처럼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예수님처럼 하면 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삭은 예수님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악한 자들을 대항했는가? 첫째,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따라와서는 계속해서 이삭을 힘들게 했다. 그런데 그때 이삭에게도 힘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때부터 길리운 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싸움을 걸어오면 그곳을 내주고 조용히 떠나갔기 때문이다. 둘째, 온유한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도 당신을 이유없이 비난하고 정죄하고 심지어 산헤드린공회에서는 거짓으로 모함하여 사형언도를 내렸어도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셨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일궈놓은 농토와 우물을 내주고 이삭은 그랄 골짜기까지 쫓겨나야 했다. 하지만 다시 이삭은 우물을 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후로도 이삭은 3번이나 옮겨가면서 우물을 팠는데 파는 곳마다 우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바쳐진 자의 삶은 어디를 가든지 형통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마귀는 직접 공격하면 자기들도 공격을 받으니까 꼭 사람을 이용하여 공격해온다. 블레셋사람들을 이용하여 이삭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삭은 그들을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그러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으며, "이곳이 아니라면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그 자리를 양보하고 떠났던 것이다. 그것을 무려 3번이나 했다. 그랬더니 세번째에 판 우물에 대해서는 더이상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번째 판 우물이 가장 좋았다. 셋째, 원수갚는 일을 자기가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도 원수갚는 일을 하셨지만 열두영 더 되는 천사들을 시켜 그들을 모조히 죽여 없애버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고 하셨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이삭도 자기 손으로 그들을 해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위탁하고는 그 자리를 물러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를 괜히 트집잡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보통 그를 저주하는 말을 해버리든지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 저주가 그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를 저주하면 아니 된다. 그도 언젠가 회개하게 된다면 그도 얼마든지 천국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4. 이삭이 시기질투하는 사탄의 시험을 잘 이겨내고 얻은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악한 사람을 대항하거나 저주하지 않는 것은 내가 힘이 없어서도 아니며, 내가 그를 저주할 몰라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다윗은 자기를 원수같이 여기고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 중에 최고로 그를 아끼고 사랑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들에 대하여 예수님처럼 살았던 이삭은 어떤 복을 받게 되었는가?  

  첫째, 원수들의 공격 이후에도 손 대는 모든 일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추방당해 다른 땅으로 이주해야 했지만 추방당한 그곳에서 우물을 팠는데, 팔 때마다 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남들은 일평생에 한 번 얻을까 말까 하는 우물을 이삭은 연거푸 게속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원수들의 공격에도 악을 악으로 대항치 않고 양보했더니 맨 나중에 차지하는 우물은 더 크고 더 좋은 우물을 얻을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맨 마지막에세 세번째 팠던 우물은 이삭이 추방당하면서 차례대로 팠던 첫번째 우물("에섹")과 두번째 우물("싯나")보다 더 크고 훨씬 더 좋은 우물("르호봇")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악한 자가 찾아와서는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우믈을 메워버렸고 블레셋왕이 찾아서 추방령을 내렸다. 이것이 그곳에서 이삭이 당한 경험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삭이 대항치 아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양보하고 참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얻게 하여 복을 받게 하셨다는 것을 듣게 된 아비멜렉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친구까지 데려와서 이삭과 더불어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사정사정했기 때문이다(창26:26~33).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창26:28),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9)" 그렇다. 악은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처럼 사는 자가 승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이삭의 생애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삶이라고 하겠다. 과거 하나님께 기꺼이 자신을 내어바친 이삭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린느 알아야 한다. 대적들이 배가 아프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사탄마귀가 우리를 대적할 때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버리면 된다. 그러니 사탄은 직접 대항하지 않고 꼭 사람을 써서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한다. 그러한 경우는 대적이 나를 공격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내치거나 사람에게 혈기를 부려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오히려 사탄의 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직 온유한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면서, 원수갚는 것도 하나님께 내어맡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최후승리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삭이 받은 축복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그가 가는 곳마다 우물을 얻었다는 것이며, 끝내는 원수들이 와서 직접 사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짜 맨 마지막에 가서는 블레셋과 가나안족속의 경계지점인 브엘세바를 이삭이 거주할 땅으로 인정받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로 정확했던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그렇다. 이것은 비단 이삭의 이야기뿐이겠는가? 그리고 비단 이 땅에서 일어날 이야기뿐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요, 하늘에서 준비된 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 말씀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6월 11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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