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76) 예수님을 모르고 살다가 죽은 이방인들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행17:22~31)_2022-12-06(화)

https://youtu.be/OrLpBBKwlP8 [혹은 https://tv.naver.com/v/31442110 

 

1.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도 일정한 순서가 있는가?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도 일정한 순서가 있을까? 있다. 그런데 개인적인 순서는 없어도 민족적으로는 그 순서가 있다. 그것은 먼저는 유대인이요 이방인이 나중이라는 것이다(롬1:16~1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맨 처음 창조한 아담이 범죄한 후에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여자의 씨(후손)에서 구원자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3:15). 그런데 이러한 여자의 씨(남자)는 반드시 남자의 혈통과 여자의 태를 통해서 나오게 되어 있다. 여자의 태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주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한 혈통만큼은 보존해 주셨다. 그 혈통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셋으로 이어졌고, 10대에 가서는 노아에게 그리고 20대에 가서는 아브라함으로 이어졌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다시 야곱을, 야곱은 12아들을 낳았는데, 메시야 혈통은 넷째 아들 유다로 이어졌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윗왕이 태어났다. 다윗왕은 아브라함의 13대손이다. 그런데 다윗왕의 손자 대에 가서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 이에 남유다(2개 지파)와 북이스라엘(10개 지파)로 나눠진 것이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멸망당하여 혼혈족이 되어 버렸지만, 남유다는 B.C.586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멸망당했어도 혈통적인 순수성을 지키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였다. 그리고 이어 다윗왕의 20대 후손까지는 왕 노릇을 했지만 이후 끊겼고 드디어 다윗왕의 29대 후손으로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마1: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을 먼저 생각하시고 그들을 먼저 구원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오셔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실 때에 맨 처음으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서 그들을 구원하라고 하셨다(마10:5~6). 그리고 사도 바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은 먼저는 유대인에게 주어질 것이며 이어서 나중에 이방인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다(롬1:16~17). 그러므로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는 대부분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이 주어진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2.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방인들은 전부 구원받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방인들은 하나도 구원받지 못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이렇다 혹은 저렇다고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나 복음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닌데, 이들이 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못 들어서 못 믿었던 것을 두고 이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부한 경우라면 그는 응당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류는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서 듣지를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 지옥에 떨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 계획이 따로 있지 않을까 한다.

 

3.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다른 심판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짐작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을 거부한 자들은 응당 심판받고 불못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자들에 대해서까지 "당신은 복음을 믿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자들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심판 계획이 있는 것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겠지만 몇 가지 말씀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적어도 두 번 이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이다. 첫째는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것은 행14:16~17에 나온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행14:16~17)"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길들을 가는 것을 그대로 묵인하셨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조주가 누군지를 그들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나오는데, 둘째는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할 때였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관대하게 보아주었으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0~31)" 그렇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관대하게 보아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선포된 이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우상을 숭배하고 살았던 죄를 회개하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과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과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자연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그가 믿었는가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인간의 양심에 기록된 도덕법들을 준수했는가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은 자연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게 하셨다고 언급하였다(롬1:19~20). 

롬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비록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무엇을 행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느 정도 도덕적 관념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롬2:14~15).

롬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러므로 자연만물의 계시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양심으로 인하여, 인간은 누구든지 어느 정도 만물의 창조주이며 그것들을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양심을 통해서 도덕률을 지키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믿고 지킨 자들은 그들에 대한 다른 심판 기준이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5.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는 이방인 중에서도 과연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인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정확히 모르고 살았지만, 자연만물의 계시와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어느 정도 도덕을 지키며 살아왔던 자들 중에 과연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러한 자들 중에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천지창조 이후부터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성경이 단정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세상의 기초)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렇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로 치자면, 한 분 하나님과 오실 메시야를 믿었던 유대인들 그리고 신약시대로 치자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서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만물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고 도덕을 지키며 살았던 자들 중에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을까 추측해 본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경우, 이순신 장군(A.D.1545~1598)이나 세종대왕(A.D.1387~1450) 그리고 서양 사람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나 플라톤(B.C.427~347) 그리고 소크라테스(A.D.470~399) 같은 분들은 분명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다 지옥에 갔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불신자들이 이들의 구원 문제를 물어오면, 그러한 시대에 살았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라.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으니, 이제 예수님을 믿어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사람이 꼭 되자고 전도하자. 

 

2022년 12월 06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64) 배려의 마음이 돋보인 야고보 장로의 결정(행15:12~12)_2022-11-08(화)

https://youtu.be/8VE2kVVyMu8  [혹은 https://tv.naver.com/v/30584032 ]

 

1. 예루살렘 총회는 무슨 문제로 소집하게 되었는가?

  A.D.49년경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기독교 총회가 열리게 된다. 그것은 유대교인 중에 믿는 이들이 이방 지역에 위치한 이방인 교회에까지 와서, 예수님만 믿어서는 구원받을 수가 없고, 예수님도 믿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여 혼란을 주었기 때문이다(행15:1). 그러자 사도 바울은 그들이 누가 보냈는지를 분명히 밝혀내고 또한 이 문제를 유대인들로 구성된 예루살렘교회가 결정지어 줌으로 유대인들 중의 믿는 이들이 더 이상 이방인의 구원에 혼란을 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2. 유대인들 중에 바리새파였다가 믿게 된 이들은 어떤 주장을 했는가?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와서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예루살렘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따뜻하게 영접을 받았다. 그러자 바울은 그동안에 있었던 이방인들의 선교 보고를 하였다. 그러자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이들이 일어나서 말했다. "[아무리 그랬어도] 이방인에게도 반드시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랬다. 바리새파 믿는 이들의 주장은 이방인이 곧바로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는 이방인이라도 구원받으려면 먼저 유대교로 개종한 후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게 과연 합당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3. 베드로는 어떤 의견을 제출했는가?

  이때였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형제들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찌기 자신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둘 다 동일하게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게 해 주셨으며,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성령을 받고 구원받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조상들도 능히 메지 못하는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일전에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온 무리가 잠잠해졌다. 그리고 무리들은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하여 이방인들 중에서 행하신 표적들과 기사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다. 

 

4. 야고보 장로가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때였다. 이번에는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격인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일어나서 말했다.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이방인의 구원 문제는 베드로가 이야기한 대로 일단락짓기로 하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다만 하나님께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하자는 것이었다.

  먼저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중에서 그분의 이름을 위하는 백성을 취하시기 위해 이방인들을 방문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시므온(시몬 베드로)을 통해서 들었으니 그것은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는 구약시대에 여러 선지자들도 이미 예언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늘에야 성취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로 야고보는 이제 이방인들 중에서 주를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율법의 멍에를 지워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우상의 더러운 것들(제물들)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도록(억제하도록) 편지하자고 하였다. 그것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총 4가지를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의 문제를 결정짓는 요소들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주님을 믿게 된 사람이라면 유대인들을 위해 그렇게 행동했으면 한다는 바램이었다. 왜냐하면 이방인 지역이라도 이미 곳곳마다 유대교 회당이 들어와서 매 안식일에 율법 말씀이 선포됨으로, 이방인들도 어느 정도 유대인들이 무엇을 지키고 있고 무엇을 혐오하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그리고 피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것들을 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배려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결정이 아닌가 한다.

 

5. 이방인들이 율법과 관련하여 주의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이방인의 구원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성령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율법의 멍에인 율법의 의식법들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4가지 것들은 좀 멀리해(피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과연 우상의 제물들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던 야고보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2가지 반응이 나온다. 하나는 이방인들은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으니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방인들이라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것은 꼭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앞의 유형은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믿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한 번 구원받았으니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자신의 구원에는 변함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 믿고도 점을 치고 운세를 보러 다녀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 믿었으면 조금 음행을 저질렀어도 구원받는 것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십계명(율법의 도덕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만약 자신이 지은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죽는다면 그는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계21:8).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의식법들(할례법, 안식일법, 절기법, 정결법, 음식법, 제사법)이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는 않지만 율법의 도덕법(십계명)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뒤의 유형은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안식교는 개신 교회의 한 분파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 그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자기들은 구원받겠지만 주일을 지키는 자는 사탄의 표시인 666표를 받은 것이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자기의 마음이 확정하면 되는 것이다(롬14:5). 그런데 자기들은 안식일을 지키니 더 의롭고, 다른 성도들은 주일을 지키니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며 덕을 세우지도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전10:23~24). 아무쪼록 우리는 바른 구원론 안에서 이 시대를 살아내서 죽을 때에는 꼭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22년 11월 08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62) 사람 특히 이방인의 경우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행15:1~11)_2022-11-03(목)

https://youtu.be/Nd6cLF1jpwo  [혹은 https://tv.naver.com/v/30582742 ]

 

1.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에 유대인들의 핍박이 아니라 새롭게 제기된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그동안에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한 핍박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에 관하여 문제를 삼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문제였다. 그런데 그 문제는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였다. 이방인들도 구원받으려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되며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유대의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온 믿는 이들로서,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인 믿는 이들이었다. 

 

2.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는가?

  처음에 바울은 이들과 충돌했고 그리고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와 그의 일행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이자 장로들에게 물어보기로 정한다. 어쩌면 그 문제에 대해 바울은 할례파 유대인 믿는 이들을 책망하거나 쫓아버리거나 혹은 성경적으로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었기에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일단락 짓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이 문제를 묻기로 한 것이다. 

 

3.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어떻게 토의했는가?

  예루살렘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로부터 이 문제에 관해 들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교회 안에서도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 어떤 믿는 이들이었다. 그러자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변론이 있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교회는 오직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교회였는데, 이 문제를 잘못 정리하게 되면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에 있어서 상당히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이방인들이라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구원을 얻는다고 정해 버린다면, 모든 이방인들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4.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베드로는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가?

  그때였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과거에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교회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게 문을 열어 주도록 그를 선택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을 전도하는 문제였다. 당시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이었던 이방인 고넬료 가정을 베드로가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세례를 받기도 전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나중에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때 베드로의 주장은 3가지였다.

  첫째, 이방인들이 과연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최종적인 판단은 성령을 받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8절). 그렇다. 한 사람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표시는 곧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할례를 받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다면 그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받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도 성령을 아직 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멍에일 뿐이라고 하였다(10절). 율법은 크게 의식법과 도덕법이 있는데, 베드로는 그중에서 의식법들은 유대인들에게도 무거운 멍에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의식법이란 행동으로 지켜야 하는 율법으로서 할례법, 안식일법, 절기법, 제사법, 정결법, 음식법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아무리 지킨다고 할지라도 이것으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 영생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의식법들은 다 지켰어도 그중에 한 가지라도 범하게 되면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다 지켰다고 할지라도 결국 모든 것이 무효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까지 유대인들이 지기 어려웠던 멍에를 메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셋째, 구원의 문제 있어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혈통적인 차별을 두지 않으신다고 하였다(9절).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다 믿음으로 깨끗함을 얻게 되는 것이지 율법의 의식법을 지켜서 깨끗함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아서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불리든,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이방인이라 불리든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그러한 요건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는 이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 베드로의 중재에 있어서 아쉬운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지금처럼 구원론이 확실히 정리된 상태에서 베드로의 의견을 들어 보면 조금만 더 제대로 언급을 해 주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첫째, 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회개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회개를 강조했었다. 회개를 해야 죄사함이 주어진다고 말이다(행2:38). 또한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때에도 회개를 강조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행11:18). 그러므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믿고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 율법에 대해 정리할 때에 율법의 도덕법과 의식법을 왜 구분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율법 중에서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은 멍에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척도이기 때문에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언급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의식법들은 폐지되었지만, 도덕법 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이것을 통해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된다는 것을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이러한 것들까지 자세하게 언급하기에는 다른 더 큰 문제가 있었고, 또한 이러한 것들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당시에는 이해되는 상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22년 11월 03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60)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아온 이방인들도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행14:8~18)_2022-10-26(수)

https://youtu.be/oATiGvHZ6Ds  [혹은 https://tv.naver.com/v/30434892 ]

 

1. 루가오니아 지방에서 내려오고 있는 전설은 무엇이었는가?

  남 갈라디아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루가오니아 지방에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라는 작은 도시들이 있다. 그런데 루가오니아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한 가지 '홍수 설화'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스의 신인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루스드라에 방문했으나 어떤 가난한 부부 외에 모든 주민들이 신들을 배척하자 신들이 그 부부 외에는 모든 사람들을 홍수로 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바나바와 바울이 루스드라에 도착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행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자, 그들은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이 되어 내려온 줄 알고는, 제우스의 제사장이 황소들과 꽃 화환들을 가져온 후에 바나바와 바울에게 제사를 하려고 하였다. 

 

2. 루스드라는 어떤 도시였는가?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동남쪽으로 약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서,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주로 사는 도시였다. 그러므로 이 도시는 소수의 엘리트 계층 이외에 대부분은 지적 수준이 낮고 미신적 성향이 강했다. 또한 이 도시 사람들은 범신론적 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유대인들의 회당도 하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3. 바나바와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어떤 기적을 행했는가?

  바나바와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에 도착했을 때였다. 발을 쓰지 못하는 어떤 하반신 장애인이 성문에 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열심히 듣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본 후에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큰 소리로 명하였다. "네 발로 똑바로 일어서라" 그러자 그 사람이 그만 용수철처럼 벌쩍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 그가 걸어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온 도시가 뒤집어졌다. 그렇다. 믿음은 역시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롬10:17). 그리고 기적과 치유의 은사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강화되고 증가된다는 것을 알 수있다.  

 

4. 자기들에게 제사하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바울은 어떤 메시지를 전해 주었는가?

  그때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기적을 본 제우스의 제사장이 살아 있는 바나바와 바울을 제사하려고 소와 화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의 겉옷을 찢고서는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행14:15~17[직역] 남자들이여, 당신은 어찌하여 이러한 일들을 행하느냐? 우리 자신들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이런 헛된 일들로부터 천지와 바다와 그것들 가운데 있는 만물을 만드셨던 바,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려 함이라. 16 이런 그분이 지나간 채 있는 세대 안에서는 모든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길들을 가는 것을 묵인하였다.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자기를 증언하지 않는 분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선한 일을 하고 계시면서.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주시면서, 그리고 열매맺는 시점들을 [주시면서], 음식과 흥겨움으로 여러분의 마음들을 만족하게 하시면서.

 

5.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온 옛날 이방 사람들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이전까지 전혀 복음과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던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가 누구신지를 증언했다. 그리고 헛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나간 세대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길을 가도록 묵인하셨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통하여 어렴풋하게나마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다고 했다. 그렇다. 구약 시대의 경우 이스라엘 사람 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던 이방 사람들은 과연 그때에 구원을 받았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모른다"가 답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자연 계시로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기 때문에 정확히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믿었는지를 판가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심판 기준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세대에 있어서는 다를 수 있다는 말씀을 남겨 놓았다. 

롬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신론적 사상에 빠져 있는 아덴(아테네)에 가서도 "알지 못하던 세대에는 하나님이 실로 간과하였거니와 이제는 어디서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전한 적이 있다(행17:30).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군지 정확히 성경 기록을 통해 알지 못했던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는 우리가 이렇다 혹은 저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오늘날처럼 복음을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어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야 구원받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계21:27). 그러므로 과거 조선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세종 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구원을 받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만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도 구원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2022년 10월 26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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