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53) 헤롯 아그립바 1세와 아리스도불로가 걸어갔던 서로 다른 길(행12:20~23,롬16:10)_2022-10-11(화)

https://youtu.be/a8jQoLV4CfA  [혹은 https://tv.naver.com/v/29823730 ]

 

1.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누구인가?

  헤롯 아그립바 1세(B.C.11~44, 재위 A.D.37~44)는 헤롯 대왕(B.C.37~4)의 손자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의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 4세(B.C.31~7)는 권력의 다툼에서 져서 헤롯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때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나이가 4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 헤롯 대왕은 손자들을 불쌍히 여겨 며느리(베레니케)와 함께 로마로 보내 그곳에서 살게 한다. 일종의 로마에 유학을 시켜준 셈이다. 그리하여 헤롯 아그립바 1세와 그의 형제들이었던 칼키스 그리고 아리스도불로(작은 아리스토불루스) 그리고 자매들이었던 미리암네 3세와 헤로디아(B.C.15~A.D.39)는 일찌감치 로마로 가서 살게 된다. 그런데 아그립바는 참으로 행운아였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자랄 때에 함께 공부하며 지냈던 두 명의 친구들인 '가이우스'와 '글라우디오'가 로마의 제3대 황제(재위 A.D.37~41)와 제4대 황제(재위 A.D.41~54)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로마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에 의해 A.D.37년, 공석으로 비어있는 삼촌 헤롯 빌립2세(재위 B.C.4~A.D.34, 이두래와 드라고닛 통치)의 땅을 받고 '유대인의 왕'이 된다. 그리고 A.D.39년에서는 자신의 삼촌 헤롯 안디바(재위 B.C.4~A.D.39)의 땅인 갈릴리와 베레아 땅까지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가이우스 황제가 A.D.41년 그만 암살되고 만다. 그런데 그때 로마에 가 있던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또 다시 자신의 동갑내기 친구였던 글라우디오를 황제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A.D.41년에 글라우디오가 황제가 되고,  아그립바는 글라우디오 황제로부터 삼촌 헤롯 아켈라오(재위 B.C.4~A.D.6)가 죽은 뒤에 총독이 다스리던 땅 곧 사마리아와 유대와 이두메아의 땅을 하사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명실공히 온 유대 땅을 통치하는 '유대인의 왕'이 된다. 

 

2.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성경에 어떤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는가?

  그런데 헤롯 아그립바 1세(B.C.11~44, 재위 A.D.37~44)는 교회사 가운데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바로 헤롯 왕이기 때문이다(행12:2, 20~23).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요한의 형제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으며(행12:2), 베드로도 죽이려고 옥에 가두어놓았으나 천사가 그를 탈출시켜주는 바람에 베드로까지 죽이는 데는 실패한다. 그후 그는 공관이 있는 가이사랴에 가서 지내게 되는데,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관계가 좋지 않았던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왕의 신하 블라스도를 섭외하여 화해를 모색하려고 시도한다. 마침 가이사랴에서 기념공연이 펼쳐졌는데, 그때 은색의 빛나는 옷을 입고 아그립바가 연설을 하게 되자,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주축으로 한 유대인들이 '이는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라는 외치게 된다. 그런데 그 일은 마땅히 돌아가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가 받으려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자 결국 천사가 와서 그를 타격하니, 복통으로 인해 연설단을 빠져나오게 된다. 하지만 5일만에 창자가 썩어 죽게 된다. 온 '유대인의 왕'이라는 좋은 명성과 권력, 부귀영화을 독차지한 자였지만 3년만에 그 모든 것을 다 내려 놓아야 했던 것이다. 어떤 역사가는 말한다. 만약 그가 그때 죽지 않았다고 한다면 유대나라는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죽고(A.D.44) 난 뒤 16년 만에 유대나라는 완전히 멸망당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권력과 명예, 부귀영화는 왜 그토록 짧았던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더 놓이려고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때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수님의 사도인 야고보를 죽이고 사도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추락하게 된 것이다. 비록 그가 사람을 잘 만나 유대인의 왕이라는 놀라운 지위까지 얻었지만, 사람을 잘못 죽이고 자신이 하나님인 척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3.  아리스도불로는 누구인가?

  아스리스도불로(작은 아리스토불루스, Aristobulus minor)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친동생이다(롬16:10). 그도 역시 헤롯대왕의 손자로서, 에돔족속과 나바테아인의 피와 유대 제사장 가문인 하스모니안의 피를 이어받은 자로서 혈통으로 볼 때 최고의 가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로마에서 자라고 있을 때에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은 바로 '글라우디오'(장차 로마 제4대 황제가 될 자)였다. 그런데 A.D.41년 글라우디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A.D.44년에는 갑자기 헤롯 아그립바1세가 죽는다. 그러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아리스도불로에게 '유대인의 왕'의 자리를 제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황제에게 평범한 로마의 시민으로 살아가겠노라고 결정했다고 한다.

 

4. 왜 아리스도불로는 유대인의 왕의 자리를 거절하였을까?

  아리스도불로는 로마 황제의 인맥으로 보나, 혈통적으로 보나 유대인의 왕이 되기에는 최고의 적격자였다. 그런데 그는 왜 그 자리를 거절한 것일까? 그것은 그의 가족사에서 먼저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딸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이오타파'(Iotapa)였다. 아리스도불로 왕자는 사실 시리아의 왕의 공주(이오타파2세)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딸(이오타파3세)은 그만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 딸을 고쳐보기 위해 그들 부부가 많이 애를 쓴 것 같다. 그러다가 부부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딸을 고쳤는지 고치지 못했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모녀는 신앙이 아주 좋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A.D.54~55년경에 로마서를 써서 로마교회에 보낼 때에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이라는 말은 의역이고,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아리스도불로에서부터(에크=from)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아마도 그의 아내와 딸을 지칭하는 것 같아 보인다. 혹 어떤 이들은 '그의 종들'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만약 정말 그것이 그의 종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전치사 '에크'를 쓰지 않고 '아포'라는 전치사를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롬16:10에서는 '에크'라는 전치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아리스도불로의 속에서부터 나온 어떤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도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의 가족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그의 아내와 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집의 종들까지 포함할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아리스도불로는 딸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은 로마교회의 형제자매들과 계속 함께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리를 버리고 로마교회의 평범한 식구로 남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왕위를 거절한 두 번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오직 한 분만을 주님(퀴리오스)로 섬기려고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만약 유대로 가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를 자신의 '주님(퀴리오스)'이라고 칭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주님이 있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오직 한 분으로만 섬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앞날이 보장된 자리였던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리를 기꺼이 내려놓게 된 것이다. 

 

5. 헤롯 아그립바 1세와 아리스도불로는 어떤 다른 길을 걸어갔는가?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권력을 잡는데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하나님의 뜻과 역행하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도인 '야고보'를 칼로 목베어 죽인 것이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인 척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아리스도불로는 처음에는 힘든 여정을 시작했을 것이다. 장애인인 딸을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 그의 가족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행복과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함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 권력을 기꺼이 버릴 수가 있었다. 일생을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길이 주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이요, 로마교회 성도들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그는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최고의 행복라 여겼던 것이다. 우리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것은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진정으로 천국을 아는 자가 아니라면, 결코 선택할 수 없는 길이 아닐까 한다. 

 

2022년 10월 11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동방박사들은 당시 파르티아인들인데 어떻게 메시야의 탄생을 알았을까?(마2:1~6)_2019-12-23(월)

https://youtu.be/qLsjQVRbDBY

 

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에 동방으로부터 예수께서 경배하러 왔던 박사들은 누구였나요?

  아기예수의 탄생을 알고 경배하러 왔던 동방의 박사들은 대체 누구였습니까? 그것은 오직 성경의 기록과 당시 세계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우선 첫째로, 그들은 "동방"으로부터 온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1절). 당시 "동방(동쪽)"은 예루살렘에서 보았을 때에 동쪽에 해당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박사들"이었다는 것입니다(1절). 여기서 '박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고이"인데, 이것은 이들이 점성술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샛째, 그들은 별을 연구하는 전문학자들 내지는 천문역학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2절).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께 경배하러 온 이유가 태어난 아기께 경배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별이 가르쳐준 정보는 세계를 변화시킬만한 위대한 왕이 탄생했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예수께서 태어날 당시(B.C.6~4년경)에 동방에서 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던 천문역학자들로서, 당시 파르티아제국의 왕궁자문위원이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입니다.

 

2.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께 경배하러 왔을 때, 그들이 알고 있었던 정보는 무엇이었나요?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께 경배하러 왔을 때 그들이 알고 왔던 사실은 딱 2가지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의 왕으로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2절).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최소한 유대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남의 나라의 사람이니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고 물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은 별의 움직임과 나타남을 통해서 길흉화복의 점을 치는 자들이었는데, "그의 별(유대인의 왕의 별)"을 보고 찾아왔다는 것은 어떤 별이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왕의 탄생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늘에 떠 있는 별이 어떤 개인의 별이 될려면 왠만한 정보를 가지고서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별"과 "유대인의 왕"을 하나로 결합시켰고 "그 특별한 별은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3. 동방박사들이 알지 못했던 메시야의 탄생에 관한 정보는 무엇이었나요?

  그들은 별의 출현(나타남과 움직임)을 통해서 인류역사에 영향을 미칠 위대한 인물의 탄생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건을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바 "유대인의 왕"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들이 들어서 알고 있던 정보가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식으로는 그 별의 출현과 연결지을 수 있는 정보는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대인들이 아니었거나 그들이 가진 정보가 미흡한 정보였다는 것은 그 뒤의 이야기를 통해서 더욱 밝혀집니다. 첫째, 그들은 메시야의 탄생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사건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다"고 그들이 말했는데, 여기에 "나셨다"라고 쓰인 단어는 아버지가 자식을 보았다는 뜻의 "겐나오"가 아니라, 어머니가 자식을 낳다는 뜻의 "틱토"라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서의 기자나 헤롯대왕은 태어나신 그분은 어머니가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식을 본 태어남 곧 "겐나오"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절,4절). 둘째,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탄생할지를 모르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곧장 베들레헴으로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으니 응당 왕국에 있겠다 싶어, 당시 유대인의 왕이었던 헤롯이 거주하던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4. 그들은 어떻게 되어서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러 위험한 도전을 감행한 것인가요?

  그들에게 "유대인의 왕"의 축하는 필연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자기나라의 왕자가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의 나라 그것도 2억만리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약소국 그것도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나라의 왕의 탄생을 축하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계산해보니, 파르티아의 수도였던 니사(Nisa)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3,200km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수개월에서 1년 이상 걸어서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면서 도적이나 강도의 위험, 독사나 맹수의 위험, 강의 위험, 풍토병의 위험이 없었겠습니까? 그때 당시에는 도적과 강도들이 자주 상인들을 습격하는 시기였는데, 그들이 살아서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란 보장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갔다가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자기들에게 주어진 천문역학자라는 직분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른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태어난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기 위해 위험한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직업보다도 소중한 일이며, 자기의 목숨보다도 귀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동방박사들을 어떻게 보셨나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감당할 수 없는 열정과 도전에 감동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메시야에 대한 미흡한 정보만을 갖고 이동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행하면서 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메시야가 탄생할 정확한 장소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고 헤롯대왕으로부터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분이 곧 "메시야(그리스도)"라는 사실도 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대강 짐작은 했겠지만 확실한 정보를 유대나라에 와서 들은 것입니다. 셋째, 그들이 그토록 하고 싶어했던 경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예수께서 이미 태어난 후였고, 요셉도 호적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내려온 것인데, 이제 볼 일이 다 끝났으니 자신이 살던 곳(나사렛)으로 가야 했지만, 가지 않고 어떤 집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2:11). 동방박사가 아기예수께서 경배하고자 황금과 유향과 몰약까지 준비하여 오고 있다는데,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그냥 가버리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지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동방박사들은 어떤 집에 있는 아기예수를 찾아 경배함으로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열정과 믿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의 도전을 귀히 보시고, 그들이 그 뜻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알게 해주시고 지시해주십니다.

 

2019년 12월 23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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