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7(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1) 예수님의 두 번째 자기선언과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심(요8:1~5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7YBo2ZF3VhM   [혹은 https://tv.naver.com/v/31443488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들에 비해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과 또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점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 그룹인 산헤드린 공회원들과의 충돌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눈에 가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어찌하든지 책잡아 올무에 빠지게 한 뒤, 공의회에서 정죄하여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러한 상황은 더 심해졌다. 오늘 사건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기 6개월 전, 초막절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과 강화를 보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의 집요한 공격은 현장에서 붙잡힌 간음한 여인에 대한 추궁에서 더욱더 집요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과연 산헤드린 공회가 쳐놓은 그물을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었는가? 그리고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간의 충돌 속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그들에게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번 사건과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가장 충격적인 선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 요한복음 8장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가?

  요한복음은 8장은 요한복음 7장에서 시작하여 10장까지 이어지는 초막절 기사와 말씀의 초중반에 해당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다(요8:1~11). 그리고 오히려 그 여인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정죄하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실체를 정확하게 밝히 드러내신다(요8:12~59). 그리고 이때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와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누구시며 또한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소상하게 들려준다. 그리고 이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전통적으로 행하는 행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교를 통해서 들려주신다. 그 첫 번째 설교가 바로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 '생수의 강' 설교이며(요7:37~39), 이어지는 두 번째 설교가 바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세상의 빛' 설교다(요8:12). 이때 유대인들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과는 달리 자신의 죄를 감추고 예수님을 정죄하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맞지만 영적으로는 마귀의 자식인 것을 드러내신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자신 앞에 나타난 여호와께 공손하고 깍듯하게 대했지만 지금 유대인들은 자신 앞에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을 아주 무례하게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간음 중에 체포된 여인을 두고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시험했는가?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맨 마지막 해의 초막절에 예루살렘에는 조금 늦게 올라가셨다. 그리고 먼저는 생수의 강 설교를 행하셨다. 그리고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후에 다시 성전 안으로 들어오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오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때였다. 산헤드린 공회원 중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어떤 여인을 끌고 예수께로 왔다. 그리고 모세는 율법에서 이러한 여인들은 돌로 치라고 명령하셨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나이까하고 물었다. 이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고자 질문한 것이었다. 만약 이때 예수께서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면 그동안 예수께서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과는 다르게 말씀하신다면서 예수님을 이율배반적인 인물로 정죄할 것이고, 만약 그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파기하는 자로 매도할 것이 뻔하였다. 그러므로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는 질문을 예수께 던진 것이다. 그때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을 받으시고는 엎드려 땅에 글씨를 쓰셨다. 그리고 일어서신 후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중에 죄없는 자는 그녀 위에 돌을 던지라"(요8:7). 그리고 예수께서는 다시 엎드려 땅에 글씨를 쓰셨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장로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리고 오로지 그 여인과 예수님만 남겨지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녀를 정죄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보신 후, 그녀에게 "나도 당신을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죄를 짓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고자 예수님께 질문하던 모든 사람들은 떠나가고 말았다. 예수님의 아주 지혜로운 답변은 그들의 판단을 어리석게 만든 것이었다. 

 

4. 예수님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우기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어떻게 답변하셨는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돌아가자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설교하셨다. "나 자신은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고 있는 자는 결코 어둠 안에서 걸어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생명의 빛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요8:12)."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두 번째 선언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 처음으로 "나 자신은 생명의 떡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요6:35). 그리고 이번에 초막절 때에 두 번째로 당신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에게 빛을 비추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빛되신 예수께서는 세상 사람들 속에 감추어 있는 죄를 드러내신 후에 그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를 베풀어 주시고 생명을 주신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감추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드러내주셨다.

   그러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증언 곧 "나는 세상의 빛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으며 그것이 참되지 않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신의 증언이 참인지를 인정받으려면 율법 규정에 따라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홀로 자신이 누군지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신의 증언은 예수님 혼자 하는 증언이 아니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요, 예수님을 보내셨던 아버지께서 자신을 증언해 주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홀로 계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것이다. 

 

5.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누구라고 말씀하셨는가?

  사실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분을 책잡아 정죄하고 또한 그분을 죽이려고 계속해서 기회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이 가는 길과 예수께서 가는 길이 다르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향하여 가고 계시지만, 유대인들이 만약 그대로 간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가는 그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과 가는 길이 다르다는 의미를 잘못 알아듣고는 예수께서 자결하시려는가 하고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출생과 근본이 다르다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위에서부터 오신 분이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아래에서부터 존재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지만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누군지를 모르고 죽게 된다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죄들 안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시면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정확하게 그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나는 ~이다(혹은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헬라어로 말하면, "에고 에이미"라는 문장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이 말은 출애굽기 3장 14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는 문장이다. 이는 "나는 ~라고 하는 나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을 1인칭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에흐예'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을 3인칭의 입장에서 말하면, '여호와'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나는 ~이다" 라고 표현하신 것은 구약으로 치자면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에고 에이미'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스스로 계신 분이요, 전능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그렇게 알려주었음에도 잘 몰랐다. 

 

6. 예수님의 실체는 대체 어떠한 분이신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는 ~이다(혹은 나는 나다)"라고 소개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목숨처럼 믿고 따르는 여호와께서 이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 말씀이 미혹하게 하는 영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그분이 아들로 오신다는 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창세기 18장에 나온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자신의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나타나 장차 아들로 오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 18장을 읽어 보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후에 가셨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그의 아내인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오신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유대인들은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유대인들 중에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아들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시대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그리고 아들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러한 사실이 성경이 기록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하신 것에 대한 혜택을 지금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간에 이방인들이 사도 바울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속죄함을 받아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늘로 가신 후에 보내 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이다"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7. 나오며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아무리 그들에게 설명해 준다고 하여도 그들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를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이 비로소 인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아들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요8:28). 고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분이라는 것은 당시까지는 숨겨진 비밀 중에 비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아들로 오신다는 것은 더더욱 숨겨진 비밀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인류를 위한 죄없는 속죄제물을 준비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만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흠없는 제물이 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류의 최종적인 죄값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망'이다(롬6:2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망을 맛보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하나님께서 구원자로서 여자의 씨를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이자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를 구원자로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류를 죄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이분을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 천국에 올라가 보라. 누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지를 말이다. 지금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에는 예수께서 앉아 계신다(계3:21).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07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6)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삼상24:1~22)_2021-12-27(월)

https://youtu.be/s8eVEkVVBVY  [혹은 https://tv.naver.com/v/24313395 ]

 

1. 어느날 동굴 안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울에게 쫓겨 동굴 안쪽에 숨어 있을 때였다.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그 굴 약간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용변을 보기 위해 그는 자신의 왕복 겉옷을 한쪽에 벗어놓고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굴 안 쪽에서는 사울을 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윗과 다윗과 함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넘긴다고 하셨는데 지금이 그때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않았다. 벗어둔 겉옷자락을 살짝 베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인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가 됨이니라(삼상24:6)" 그리고는 다윗은 자기의 사람들에게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용변을 마친 사울은 왕복을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용변을 보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른 채 말이다. 

 

2. 다윗은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는가?

  다윗은 선으로 악을 상대하였다. 사울은 자기를 그렇게 악하게 대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그렇게 대하지 아니했다. 왜 그랬을까? 다윗이 그렇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다윗은 사울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최초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자로서 아직도 하나님의 권위가 그에게 있다는 것을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엘리 제사장이 비록 타락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권위가 그에게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울이 죽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권위가 그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그를 해하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여겼다. 둘째,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심판하는 심판주가 아니며 오직 그를 심판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 뿐이심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굴에서 나온 다윗은 사울왕에게 이렇게 외치며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습니다(삼상24:12)". 그랬다. 그는 자신이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자인 것이지 하나님처럼 사람을 심판하시는 이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셋째, 다윗 자신은 사울의 왕직을 탐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사울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반대로 자신의 왕직을 내려놓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다윗이 자신의 왕직을 넘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동굴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살려준 다윗을 통하여 비로소 그는 다윗이 왕직이 탐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3. 이때 사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는가?

  그런데 이때였다. 다윗이 하는 모든 말을 들은 사울은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첫째,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다윗은 죽어야 마땅한 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다윗이 도망치는 것에 협조하는 자는 공범자로까지 취급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다윗이 자기의 원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의 선대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확 돌아선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사울은 다윗더러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라고 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잘못하고 있었음을 시인하였다. 둘째, 소리 높여 울면서 자신이 이제까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었음을 고백하였다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다윗의 마음을 몰라보았던 것이 애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다윗이 자신을 선대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그러자 그는 다윗을 축복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사울은 다윗이 반드시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도 알고 있다고 언급하였고,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의 손에 의해 견고히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부탁하기를 부디 다윗이 왕이 되더라도 자기의 이름과 자신의 후손을 멸절시키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이고 판단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사울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사울을 선대한 것으로 인하여 사울의 마음이 바뀌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선으로 악을 이긴다(갚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때 사울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다윗을 향하여 자신의 악하고 다윗은 의롭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악하게 대하였지만 너는 나를 선으로 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24:17)". 이는 사울은 다윗이 베푼 선을 악한 것으로 갚으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악한 행위를 선으로 대하려 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과 '악'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선'과 '악'은 한 마디로 '용서'와 '미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볼 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과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선'이란 어찌하든지 상대방을 용서해주고 상대방을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악'은 어찌하든지 상대방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다윗은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를 살펴볼 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서 살리려는 사람이면 선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며, 그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죽이려 한다면 그가 바로 악한 사람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5.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자기의 원수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9~21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원수를 대하는 방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그렇다. 원수는 우리가 갚아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러면 다시 원수를 낳는 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맡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자기의 원수가 주리고 있을 때에 먹여주고, 목말라 하고 있을 때에 그로 하여금 마시게 하는 자가 되는 일이다(롬12:20).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악에게 지지 않는 것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2021년 12월 27일(월)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 함께했던 요셉은 왜 형통의 축복을 받은 것인가? 그도 하나님의 사람이고 나도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도 성실하게 살았던 것처럼 나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그는 형통의 축복을 받았지만 나는 그러한 축복이 뒤따라오지 않는가? 여기 2가지 다른 조건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 뿐만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성공과 실패의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2021-07-1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창세기강해(146) 이긴 자의 예표인 요셉의 삶에서 배우는 소중한 교훈(창39:1~6)
https://youtu.be/Rb_vli5nzdA  [혹은  https://tv.naver.com/v/21275980 ]

 

1. 들어가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야기를 읽을 때에 2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참으로 요셉은 좋겠다"고 하면서 그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즉 요셉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랑하셔서 그와 함께 계시고 그로 하여금 형통의 축복이 따라다니게 했는지 요셉은 참으로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는 이것의 반대적인 것으로서, 왜 하나님께서는 요셉과는 함께 해주시고 나와는 함께 안 해주셔서 내게는 요셉과 같은 형통한 축복이 따라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데서 오는 오해 중의 오해다. 왜냐하면 요셉은 그가 손대는 모든 일이 형통할 수밖에 없던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을 때에 요셉에게는 곧바로 어떤 결과물이 도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을 때에 왜 그에게 형통함의 축복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통전적으로 살펴보고, 또한 오늘 나도 요셉처럼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요셉이 누린 바 그러한 형통의 축복을 함께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하나님께서는 요셉만 편애하신 것인가?

  얼핏 보기에 하나님은 요셉만 편애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창세기 39:2~3의 말씀만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에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냉정을 찾고 성경을 보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잘못 오해하고 성경을 읽고 있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신약시대 이후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같은 사람에게만 함께 하시고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그것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시려 하자 걱정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떠나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줄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내 대신 와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성도들은 없다. 다 함께 하신다. 문제는 왜 요셉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을 때 형통함이 찾아왔는데,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데에도 우리에게서는 형통함의 축복이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3. 요셉이 형통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함께 했을 때에 그에게는 형통함의 축복이 나타났는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잘 나타나지 않는지 그 이유를 확실이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선 알 것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듯이, 심지 않았는데 거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요셉을 위해 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던 것은 요셉이 잘 해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그가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충성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한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다는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정말 요셉처럼 성실하고 충성된 성도가 많지만 형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도들 중에 성실히 살았지만 요셉처럼 모두가 다 형통함의 축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요셉 이전 세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하나님께서 누구누구와 함께 있을 것이다는 표현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는 장차 그에게 아들을 주겠다고도 하시고 땅을 주시겠다고도 몇 번 씩이고 말씀하셨지만 단 한 번도 아브라함과는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었던 이삭과 그리고 그의 손자였던 야곱에게는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처음부터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는 당신이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그것은 사실 알고 보면 쉽고 간단한데 모를 때에는 어렵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아직 저주가 남아 있었기에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가 회개하여 진정 저주로부터 벗어나자 하나님께서는 그 후손들부터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은 결코 하지 않으셨다. 그를 복이 되게 하시겠다고만 약속하셨고,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장차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장차 자손도 줄 것이고, 땅(기업)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너와 함께 할 것이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서 저주가 완전히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에게는 가문의 저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가문은 일찍 사람이 죽거나 임신을 못하는 저주가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조상들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할아버지도 일찍 죽었고 친 형도 일찍 죽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마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의 저주 가운데 놓여있었다. 그 집안이 우상숭배의 저주 가운데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역사는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비로소 할례언약을 받으면서 회개하자, 그에게서 저주는 완전히 떠나가게 된다. 불임이었던 아내 사라가 곧바로 임신을 하게 되었고 1년 뒤에 이삭을 출산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과 손자는 달랐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던 이삭이나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에게는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이삭과 야곱에게나 둘 다 이미 가문의 저주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나타나실 때부터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창26:2~3). 이는 이삭이 이미 저주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삭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삭에게는 곧바로 형통함의 축복이 뒤따라온 것이다. 다시 말해 저주를 벗어난 상태에서 이삭이 열심히 살았기에 그가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이 임한 것이다. 성경은 그때에 이삭이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었더니 100배의 소출을 거두게 되었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으며, 양과 소는 떼를 이루고 노비도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랄 목자들이 우물을 빼앗아 가면 그냥 넘겨주고 또 다시 우물을 팠는데 놀랍게도 판 곳마다 우물이 나왔던 것이다. 이삭은 이미 저주가 끝난 상태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또 어떠했는가? 야곱도 이삭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할아버지가 이미 저주를 끝낸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야곱도 그가 손대는 모든 일에 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랬다. 야곱이 외삼촌의 양떼를 돌보니 외삼촌의 양떼는 금새 불어나 번성하여 떼를 이루게 되었다(창30:30). 그리고 자신도 외삼촌과 재계약을 맺은 후부터는 양떼와 가족들을 두 떼를 이루어 귀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창32:10). 왜 그럴 수 있었는가? 이는 그의 할아버지였던 아브라함이 이미 회개하여 저주를 끝낸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셉도 그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요셉은 기본적으로 저주를 벗어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요셉도 역시 이삭과 야곱처럼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요셉이 형통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두번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요셉이 형통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 뿐이었을까? 아니었다.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은 항상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토록 어려운 시련과 고통과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그의 생애 가운데 단 한 번도 절망했다든지, 아니면 원망했다든지, 아니면 비관했다든지 하는 대목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가 붙든 것이다. 사실 요셉의 삶에 있어서 또 특별한 점 하나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이 한 번도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요셉의 시대에는 요셉에게 단 한 번도 나타나서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던 것이다. 다만 꿈으로 환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요셉에게 하나님은 그분이 보여준 것들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들려준 것을 항상 가슴에 새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신 꿈이요 비전(환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꿈을 붙잡으면서 일평생 고난을 이겨냈던 것이다. 역경을 돌파하며 간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형통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소는 그가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끝까지 붙들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가 여러가지 환경속에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이유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이 없어서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꿈과 비전 다른 말로 사명과 소명이 있는 자는 결코 중간에 좌절하거나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게 하실 줄로 믿기 때문이다. 요셉에게는 이렇듯 주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5. 요셉이 이긴 자로 보여주었던 5가지의 삶의 모범적인 모습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요셉이 형통함을 입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위에서 말한 2가지 뿐인가? 아니다. 요셉은 이긴 자의 전형적인 표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생애 가운데 그가 이긴 자로 살아갔던 것들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것들이 요셉이 형통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겠지만 이런 것들은 얼마나 요셉이 이긴 자로서 이 세상을 살았는지를 알게 해주고, 우리 또한 어떤 부분에서 이긴 자로서의 삶이 부족한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요셉이 이긴 자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모습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것은 약 5가지 정도가 있는데, 찬찬히 이것들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이긴 자들의 삶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 소개되는 5가지 것들은 나중에 한 편의 설교도 다시 등장할 수 있지만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렇다. 요셉이 이긴 자였다는 것은 첫째, 그가 항상 부모나 권위를 가진 자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들을 공경하였다는 것이다(창37:12~13). 그랬다. 아버지가 형들의 안부를 물으려고 세겜으로 보내고자 할 때  요셉이 하는 말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가 그랬다. 에베소 교회는 자기를 가르쳤던 사도들을 주님처럼 여기고 섬겼다. 먹을 것도 안 먹고 마실 것도 안 마시면서 사도들을 섬겼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가짜 사도가 찾아왔다. 그때부터 그들은 목회자를 대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못먹으면서도 사도들을 대접했던 이기는 자들에게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계2:2~4). 둘째, 요셉은 언제나 맡겨진 일에 충성했다는 것이다(창39:4, 21~22).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에서도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충성스러운 교회의 성도들로 묘사한다. 주님을 위해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요셉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음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이용하여 세상의 즐거움이나 향락에 취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에 주신 말씀을 보면, 이기는 자가 되려면 세상 향락에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넷째, 요셉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신들도 자기의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계2:13., 3:8). 언제 어디에 있든지 요셉은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이다. 다섯째, 자기를 죽이려고 했으며 결국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형들이었지만 그들의 죄를 다 용서해주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들의 가족들도 다 잘 돌보아주겠다고 위로하는 말을 하였다(창50:19~21). 

 

6. 나오며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를 돌아볼 차례가 되었다. 나는 과연 이긴 자의 예표였던 요셉처럼 살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긴 자였던 요셉의 삶의 조건들 7가지 가운데 과연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첫째, 나도 과연 조상의 저주를 끊어냈는가? 둘째, 나도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 그리고 소명을 붙들고 있는가? 셋째, 나의 부모나 권위를 가진 자를 공경하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고 있는가? 넷째,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 다섯째, 세상 즐거움과 향략을 즐기지 않고 있는가? 여섯째,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혹시 마음에 두고 있지 아니한가? 일곱째,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혔거나 힘들게 했던 사람마저 다 용서해주었는가? 그렇다. 믿음이란 자신의 삶에서 요셉처럼 이긴 자의 삶 중에서 내게 무엇이 부족했는지 그리고 내게는 무엇이 없었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아직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것부터 시작하라. 그 저주 때문에 축복의 첫 단추부터 꿰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주를 끊어낸 다음에 꿈과 비전과 소명을 붙잡고 낙심치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리고 웃어른을 공경하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며, 세상 즐거움과 향락을 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마저 용서해주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요셉처럼 형통의 축복으로 안내해 주실 것이다. 

 

2021년 07월 11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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