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홀로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들로서 직접 오신 것인가?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빛이시며 또한 사랑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의 체현으로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고도 말한다. 그럼 요한 사도는 왜 아들의 탄생을가리켜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라고 말하는가? 그 비밀을 이제 캐내어보자.
2021-12-15(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6)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요일4:7~5: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jJ9G5XwBFBw [ 혹은 https://tv.naver.com/v/24117952 ]

1. 들어가며

  요한일서의 내용과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사실 요한일서는 전체를 한 덩이로 읽거나 특정 구절을 통해서 은혜받기는 쉽지만 그 속에서 구조를 발견하기란 여간 힘든 구조다. 특히 요한일서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직선적 논리 순서를 따르지 않고 순환론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본다. 예를 들어서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은 분명히 요한일서 2장에서도 나오고 있지만(요일2:9~11), 또한 3장에서도 다시 나오며(요일3:14~16), 그리고 4장에서도 또 나오기 때문이다(요일4:20~21). 그렇더라도 요한일서의 주제를 살펴보면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1~2장에서는 생명을 가진 자들의 교제(코이노니아)의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삶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3~4장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성도들이 가진 신분과 거기에 따른 합당한 생활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장에 가서는 믿음을 통한 승리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펴 보게 될 요한일서 4:7~5:3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참 사랑에 근거한 계명 실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도 이번 시간의 핵심 키워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하여 '사랑'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고 '사랑'의 구체화된 역사적인 사건과 '사랑'이 어떻게 우리 믿는 이들에게까지 혜택을 베풀어 주는지 그 메카니즘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곧 계명에 순종하는 일이라는 것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2. 성도들의 사랑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7~12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은 사실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인 것을 천명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일4:8).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요일4:11).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두 번째 속성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요일4:8,16). 사실 사도 요한은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성도들과 성도들 사이에 있는 생명의 교제(코이노니아)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첫 번째 속성으로서 '빛'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요일1:5). 그런데 이제 형제 사랑의 실천을 교훈하면서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통해서 '사랑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말을 살펴보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더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곧 사랑은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지 모두가 다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제일 속성은 역시 사랑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은 어떻게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이며 이것을 우리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중에 '하나님(데오스)'이라는 단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데, '사랑(아가페)'이라는 단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우선 주의해야 한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정관사가 붙어 있는 명사는 주로 '주어'로 사용된다면,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는 명사는 주로 '서술어'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하나님에게는 무한한 요소들이 들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거꾸로 역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는 말은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에는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바 되셨던 예수님을 빼 놓고서 '사랑'을 운운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기원이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이 거기에 있다고 해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공동체나 개인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지 아니한가?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필리아' 사랑이든지 혹은 '에로스' 사랑이든지 그들도 역시 사랑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을 두고서 하나님이 거기에 있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랑만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으며, 또한 구원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려 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게 되는지를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해서 나타난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밖으로 표출되었고 그것의 실체가 나타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출현을 통해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분은 자신이 보낸 독생자를 통해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사람치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요일4:12, 요1:18). 아니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때 하나님께서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신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직접 밖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의 성육신'이다(요일4:9~10).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하신 아들을 이 세상에 화목 제물이자 그리고 구원자로 보내셨기 때문이다(요일4:10,14).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면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4.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라고 하는가?

  사람들 중에는 왜 서양 종교의 하나인 기독교를 믿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좋은 종교가 많이 있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좋은 종교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을 죄와 사망과 마귀로부터 건져 주는 그러한 종교는 없다. 그건 우리나라에도 없고 외국에도 없다.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주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분에게는 인류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하여 인류가 가진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요3:16). 그러나 이러한 일은 성경의 기록을 읽어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어디 하루 아침에 되어진 일은 결코 아니다. 맨 처음 창조되었던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롬5:12). 그리고 모든 인류는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창3:14). 그러므로 이러한 범죄에 예외는 없다. 모든 인류가 아담의 허리에 씨로 들어 있을 때에 같이 범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 가운데 이러한 문제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죄의 삯은 무엇인고 하면 사망이요(롬6:23),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가 일어난다(계2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기 전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죄값을 대신할 제물을 이 땅에 보낸 일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시다. 그 일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 예수께서 탄생하기 전 수천 년을 예언을 통해서 말씀하시다가 드디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그 일이 성취가 되기에 이른다. 그 사건이 바로 아들의 성육신 사건이었다.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화해시켜 준 것이다. 

 

5. 예수님의 오심은 과연 있던 아들의 오심인가 하나님 자신의 오심인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하신(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아들 곧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니까, 하늘에 이미 있어서 활동하고 계시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라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곧 시간 밖에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맞는 일이다. 하지만 태어나기 전에 아들이 이미 하늘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성육신될 때에 그때에 그분은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이 나오셔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품 속에서부터 나와서 성육신하신 것이다(요1:18).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아들은 없었는가? 아니다. 구약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경륜 속에 이미 그분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분은 하나님의 품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의 오심은 하나님 자신의 오심인 것이지 또 다른 아들의 오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삼위삼체가 될 수도 있다. 아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원래 한 분이셨다. 그러다가 우리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다고 하는 표현이 훨씬 더 성경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구약시대에 한 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신 것이고,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아들'로 오셔서 활동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므로,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늘에서 계시는 그분은 아버지라 불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아버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께서 아들로 오심으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6.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메카니즘으로 나에게까지 전달되고 있는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지금도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직 하나님께서 아들로 출현하기 전의 시대였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다만 약속의 말씀으로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고 죽어서 낙원으로 갔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눈에 볼 수 있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사도 요한도 역시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을 직접 만져볼 수 있었고 그분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분과 식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대화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없애고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약속한 바대로 구원자이심을 알려 주시고, 드디어 공개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원래부터 죄가 없는 분이시요,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이시므로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로 가셨다. 그리고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보혜사 성령 곧 그분의 영이신 사람 속에 내주하시는 영을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분이 보내신 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요일4:1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며 그리스도로 믿고 시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으로 함께 하신다. 이러한 자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약속으로 전달되거나 아들에게서 실현되었으며 지금은 보혜사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그것을 효과있게 하는 것이다. 

 

7.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인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 3가지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으로서 그분이 몸소 나타나셨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3가지 혜택이 주어진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자에게 베풀어지는 3가지 놀라운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요일4:16). 물론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으로 그분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요일4:13, 3:24). 고로 이러한 성령이 죽을 때에도 떠나가지 않는 자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둘째, 심판날에도 담대함을 가질 것이라고 하였다(요일4:17).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자신에 대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로 인하여 이미 인류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회개를 통해서 그것을 유효하게 할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인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분의 구속 사역과 우리의 회개를 통하여 그날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셋째,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는 항상 어둠에 있는 자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불안하다. 어둡다.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와 저주로부터 벗어난 자는 더 이상 두려움에 매여 있지 않는다. 믿음과 회개로 두려움은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받아본 일이 없거나 그 사랑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8.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연발로적인 증상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자연발로적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고 하였다(요일4:19).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신 자들은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의 사랑은 마지 못해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먼저 다가오시는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요일4:19).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라고 했다(요일4:20). 왜냐하면 보는 바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응당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새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5:2~3).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사랑의 드러남이요 실천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틀린 말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라고 말했어야 정확히 맞추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제일 속성은 뭐니뭐니해도 아가페의 '사랑'이다. 그분 안에는 처음부터 사랑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곧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밖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을 속죄 제물이자 화목 제물로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시고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미 만세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 것은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할 때다. 그러므로 아들의 오심은 곧 하나님 자신의 오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미 대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후 당신을 대신하여 성령을 보내 주신 이상 그분이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B.C.8세기경 남유다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그렇다.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그분은 기묘자인 모사(보혜사)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아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자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함께 사는 자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수시로 그분의 이름을 불러서 그분의 기름부음을 내 안에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을 때에는 이렇게 말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이 너무 길다고 느껴지면,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라. 

 

2021년 12월 15일(수)

정병진목사

 

 

요한일서, 대체 이 책은 무슨 책인가? 왜 이 책은 '공동서신(일반서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 책은 서신서임에도 불구하고, 왜 발신인과 수신인 그리고 인삿말도 없는 책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이 책의 주제는 대체 무엇인가? '생명의 교통'인가 '사랑의 실천'인가? 왜 이 책은 영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고 언급하는가? 대체 이들 수신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오늘은 요한서신(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강해의 첫 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메시지 전체가 흥미진진하다.

 

2021-11-03(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1) 요한일서 과연 어떤 책인가?(요일1: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HOQ55jldTk  [혹은  https://tv.naver.com/v/23368603  ]

 

1. 들어가며

  '요한서신'이란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요한서신은 과연 어떤 책인가? 누가 누구에게 쓴 책이며, 무슨 목적으로 쓴 책인가? 오늘은 요한서신의 첫 번째 책인 요한일서의 배경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요한서신은 요한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 편지다. 그런데 이 책은 크게 보면 서신서 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언제 이 편지를 쓴 것일까? 나이가 50대에 쓴 것인가 아니면 60대에 쓴 것인가? 그리고 이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어떤 일이 당시에 일어났던 것인가? 사실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나이 든 사도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리가 만무하다. 고로 요한서신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서신의 배경을 파악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서신서가 한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요한서신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편지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이며,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하여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쓰게 하실 때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과 의도가 있어서 편지를 쓰게 하셨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배경과 원인을 찾아본다면, 이 편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될 것이다. 자, 오늘은 첫 시간이니 만큼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이 책이 쓰이게 되었고 그 주제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요한서신은 신약성경 가운데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요한서신 곧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는 한 마디로 서신서에 속한다. 그런데 요한서신은 좀 더 크게 보면 공동서신(共同書信)에 속하고, 더 크게 보면 서신서에 속하며, 더 크게 보면 신약성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약성경은 크게 네 종류로 구분된다. 복음서와 역사서와 서신서 그리고 계시서(묵시서)가 있다. 복음서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있으며, 역사서에는 사도행전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서신서들이다. 서신서에는 또한 바울이 쓴 편지들만을 모아서 '바울서신'이라고 부르는데, 13권의 성경책이 있다. 로마서에서 디도서까지가 바울 서신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8권의 성경책들 곧 히브리서에서 시작하여,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까지를 우리는 공동서신 혹은 일반서신이라고 부른다(여기에서 '히브리서'는 바울서신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더러 있다). 공동서신(일반서신)이라고 하게 된 이유는 처음에는 단순히 바울서신 이외의 다른 편지들을 가리키는 말로 시작되었지만, 이 8권의 서신들의 특징이 하나같이 이단을 대적하고 또한 박해 중에서 능히 믿음을 굳건히 하라는 모든 교회의 공통된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교회 전체를 위한 서신(바울서신은 특정한 교회나 목회자를 위한 서신이었다), 곧 ‘공동서신’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나 요한일서 같은 경우에는 그 수신자와 발신자까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3. 요한서신은 신약성경에서 어떤 책으로 분류되며 누가 쓴 책인가?

  그럼 요한서신은 신약성경에서 어떤 책으로 분류되며, 누가  쓴 책인지를 살펴보자. 사실 요한서신은 요한일서와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통칭하는 표현으로서, 이 세 권의 책들은 누가 썼는지 이 편지만으로는 알 수 없다. 누가 썼다고 기록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편지들을 요한이 쓴 편지라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책의 제목들이 그렇게 알려진 것일까? 그것은 적어도 기독교 초기 교회의 전승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누가 최초로 이 책들을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라고 명명했고 이 책들을 사도 요한이 쓴 책이라고 명명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자 아폴로니우스(Apollonius)가 최초라고 한다. 그가 2세기 말에 처음으로 이 세 권의 책들을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초기 교부 오리겐((Ὀριγενες, 185년경~254년경) 이후에는 바울서신 외의 다른 모든 편지들을 '공동서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특정한 몇몇 서신만을 일컬어 '공동서신'이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히브리서를 제외한 7서신을 일컬어 '공동서신'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럼 누가 공동서신이라는 표현을 쓴 것인가? 그는 다름 아닌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 A.D. 263-339년경)다. 그리고 훗날에는 '히브리서'가 바울서신에서 점차 공동서신으로 분류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부분 신학자들은 히브리서부터 유다서까지 총 8권의 편지들을 '공동서신'이라고 부른다. 

 

4. 요한서신은 누구에게 보낸 책인가?

  그렇다면 요한서신들은 요한이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는 그 편지를 받는 대상이 나온다. 요한이서의 서두에 보면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라고 나오고(요이1:1), 요한삼서는 요한이 사랑하고 있던 장로 '가이오'라고 나온다(요삼1:1). 그런데 요한일서의 서두에는 수신인도 안 나오고 발신인도 안 나오고 문안 인사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요한일서는 누구에게 보내어진 편지란 말인가? 우리는 요한일서가 아주 독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일반적인 편지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편지들은 다 '나 누구누구는 아무개에게 편지하노니,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형식으로 쓰고 있는데, 요한일서는 서두에서나 말미에 수신자와 발신자 그리고 문안 인사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편지가 그렇게 쓰여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중에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일서의 수신자는 대체 누구인가? 감사하게도 총 다섯 장 분량의 요한일서를 잘 읽어 보면, 이 편지를 누구에게 썼는지 대강 짐작케 하는 단서들을 살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그들을 향하여 부른 호칭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보낸 것이다. 첫째로,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을 대상을 향해 "나의 자녀들아(아이들=테크니아)(1회)(요일2:1)" 혹은 "자녀들아"라고 불렀다(5회)(요일2:12, 28, 3:7, 18, 4:4). 이는 이들이 영적으로 볼 때에 아직 어린 자식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어 둘째로 사도 요한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아가페토이)"라고 불렀다(5회)(요일2:7, 3:2, 21, 4:1, 7). 이는 사도 요한과 친분이 있거나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어서 사도 요한이 그들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받는 대상을 가르쳤든지 사도 요한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셋째,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 '아이들아'라는 표현도 사용하였지만 그것 외에도 '아비들아'(파테레스)(요일2:13,14), '청년들아'(네아니스코이)(요일2:13,14)라는 표현도 함께 사용하였다. 이는 영적으로 다양한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넷째, '아이들아(파이디아)'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들아'라는 헬라어 단어는 '파이디온'이다.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4~5세에서 초등학교 아이들 정도의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영적인 나이로 볼 때에 유아들과 같은 자들에게도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으로 우리는 이 편지가 장성한 분량에 도달한 어른을 위한 편지가 아니라, 이제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영적으로 탄생한 어린아이부터 성숙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사도 요한은 언제 어디에서 목회를 하였거나 또한 바울의 뒤를 이어 성도들을 가르친 것일까?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질 때만 해도 핵심 멤버였다. 왜냐하면 12사도들 중에서 3명 안에 드는 핵심 멤버(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하여 3천 명이 되었을 때에도 그는 베드로와 같이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사울이 스데반을 죽인 사건 이후로 예루살렘 교회에도 세찬 핍박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행8:1~3). 그러자 12사도들 이외에 모든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어떤 이는 자기 고향으로 가서 교회를 세우기 시작한다. 그중에 빌립 집사는 예루살렘 교회의 7명의 안수 집사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가 사마리아에 가서 교회를 세웠고(행8:4~13), 또 다른 이들은 이방 땅 안디옥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된다(행11:19~20). 그러자 그곳에서도 교회가 생긴다. 그것이 바로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다. 교회가 생길 때마다 사도들이 가서 성령의 선물받기를 도와주면서 교회는 성장하지만, 사도행전 15장 이후 사도들의 행적은 더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A.D.66년경에 이스라엘의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자 로마가 군대를 보내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 잠시 쉬는 틈을 타서 기독교인은 예루살렘을 빠져나온다. 그중에 아마도 사도 요한도 포함되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디로 갔는가? 다른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사도 요한은 A.D.70년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하자, 그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쓰임받을 수 있도록 날마다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는 요한은 바울의 주된 사역지였던 에베소 교회로 사역지를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적어도 30년을 목회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돌보았고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노년의 시기였던 A.D.90~95년 사이에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요한일서를 써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6.  A.D.90~95년 당시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A.D.90~95년 당시 교회에 큰 어려움이 찾아왔다. 물론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A.D.81~96)의 황제 숭배 강요도 큰 핍박이었다. 도미시안 황제는 자기를 주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했다. 그런데 오직 그리스도인들만큼은 그 지시를 이행할 수 없었다. 그러자 기독교인에게 대대적인 핍박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이 교회 내에 침투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이었다. 이들은 영적인 지식 곧 그들이 말하는 비밀스러운 지혜를 얻어서 구원얻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인데, 이 사상은 원래 헬라 사상과 동방 종교의 신비 사상을 유대교의 신앙과 기독교 신앙에 접목함하여 많은 교회의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린 이단종파다. 어느새부턴가 영지주의자들은 교회까지 치고 들어왔고 성경 교사로서 활동한다. 그리고 이 세상은 저급하고 무가치한 물질세계와 영원하고 완전한 영의 세계로 이분화되어 있으며, 인생은 그 영혼이 육체에 갇힌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이제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와 영적 세계로 복귀함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저급신으로 취급하였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물질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영지주의자들은 우주의 기원은 최고의 절대신(모나드=단일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것으로부터 아이온이 빠져나와 여러 신들이 생겨났는데, 가장 멀리 떨어진 신들 중에는 데미우르고스(여호와)가 있고, 이 신이 물질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절대신으로부터 가장 먼저 나온 아이온이자 절대신과 마주하는 신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만이 구원의 길을 제대로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은 저급한 육체를 입을 리가 없다고 하였다. 단지 그분은 육체를 입은 흉내만 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에는 그분이 사람으로 보였으나 그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신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사상적 체계를 바실리데스(Basilides)(A.D.117-138)라는 사람이 기독교 영지주의를 집대성하게 된다. 이것을 '가현설(Docetism)'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 4:2과 요한이서 1:7에 나오는 바,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요일4:2-3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이1: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또 한 부류는 그리스도(아들)와 예수를 분리하는 자들이었다. 그중에서 케린투스(Cerinthus, 50-100 AD, Egyptian theologian)라는 사람은 그리스도는 절대신으로부터 나온 최고의 존재로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가 되었지만, 그가 죽을 무렵에 예수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예수를 잠깐 양자로 삼아서 썼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양자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단도 요한일서에 고스란히 나온다(요일2:22).

요일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결국 영지주의 이단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3가지 방면에서 정면 충돌하고 있었다. 첫째, 예수는 육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더럽고 불결하고 무가치한 육체를 입을 수가 있겠느냐고 한 것이다. 둘째, 예수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육체를 입지 않았으니 죽을 리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죽은 자는 예수가 아니라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것이다. 셋째, 예수는 부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이 죽지 않았으니 부활할 리도 없는 것이다. 결국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3대 신앙고백을 정면으로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약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어 아들로 오지 않았다면 인류의 죄를 없앨 수가 있었겠는가? 아마 시작 자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해 죽지 않았다면 인간의 죄는 여전히 지금까지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사망을 이기고 음부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으며, 우리의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졌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 고로 영지주의는 매우 무서운 기독교 이단이자,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7. 요한일서의 3대 주제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은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는 영지주의 이단 세력이 교회에 침투함에 따라,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어린 영혼들을 빼가려는 것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고 이단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 알게하고, 이들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기 위한 예방 주사용으로 쓰여진 편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편지의 수신인과 발신인도 생략하고 문안 인사도 생략한 채 곧바로 예수님의 성육신부터 쓰기 시작한다. 자, 이제, 요한일서 1:1~2의 말씀을 보자.

요일1:1-2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그렇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비롯한 여러 증인들이 태초부터 있어 온 생명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33년 반을 사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인류의 속죄의 값을 대신 치르시고 죽으셨음을 증언다. 그리고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직접 자신이 보았다고 증언한다. 사도 요한 자신이 직접 그분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도 들었고, 자신은 그분 가까이에서 자세히 그분을 지켜 보았으며 직접 손으로도 만져 보았다고 말한다. 고로 요한일서의 3대 주제 가운데 2가지의 주제가 여기에서 나온다. 그중에 첫 번째가 바로 이단 세력의 분별과 퇴치법이다. 그런데 다음 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이단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신성한 생명과 이 생명과의 교통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주제다. 그리고 아울러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어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어 사람이 되게 하셨고 우리의 친족(고엘)이 되어 대신 죽어 인류를 사랑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생명으로 취한 사람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세번째 주제다. 그러므로 요한일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이단 분별 및 퇴치, 둘째, 신성한 생명과의 교통, 셋째, 형제와 이웃 사랑이다. 덧붙여 요한이서는 이단을 제대로 분별하여서 그들과 교제하지 말 것을 교훈하는 책이며, 요한삼서는 이와는 반대로 교회의 지도자와 교사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들을 냉혹하게 대했던 장로 '디오드레베'를 책망하고 진리대로 형제와 이웃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 데메드리오를 칭찬하는 것이 요한삼서다. 

 

8. 나오며

  그러므로 요한일서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초를 제공하는 책이자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이단 세력을 침투시켜 교회를 망가뜨리려는 사탄을 어떻게 생명의 능력으로 제압하는지를 알려 주는 책이다. 그리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신이 거듭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가르쳐 주는 책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하는 책이 바로 요한일서이다. 즉 하나님에게서 나와 있어 왔던 영원하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며, 그분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는 그분이 참된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요한일서이다. 오늘은 요한서신 강해 중 첫 날이므로 이 책의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이 책을 썼던 시기 그리고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 주에는 신성한 생명의 능력과 교통과 아울러 어떻게 사람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지를 좀 더 살펴볼 것이다. 

 

2021년 11월 03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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