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26) 다윗이 환궁하면서 보여준 지도자의 덕목은 무엇인가?(삼하19:1~39)_2022-02-03(목)

https://youtu.be/-yHnWzbTLOo  [혹은 https://tv.naver.com/v/24914340 ]

 

1. 압살롬이 죽은 것을 두고 슬퍼하는 다윗에게 항의한 요압의 의도는 과연 합당한 것이었는가?

  전쟁에서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파서 마하나임 성문 윗방으로 올라가 슬피 운다(삼하18:33~19:1). 그렇다면 그는 왜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슬피 울었던 것인가? 그것은 죽은 대상이 비단 자신의 아들이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지은 범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대신 죽게 된 것을 슬퍼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자기의 군대들에 대해서는 합당한 태도가 아니었다. 만약 그때 압살롬이 죽지 않았더라면 다윗과 압살롬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요압은 왕이 왕의 목숨과 왕의 자녀들과 처첩들의 목숨을 구원한 부하들의 얼굴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고 있다고 하면서, 왕이 압살롬의 죽음을 계속해서 슬퍼하는 것은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부하들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와서 왕의 부하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고생했다고 위로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요압의 이러한 항의는 온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 편으로 보면 압살롬에 대한 왕의 지나친 애착을 바로 잡고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반대로 요압 자신이 왕명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 사실을 무마하기 위한 자신의 책임 회피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 이번 사건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요압이 한 말을 마음에 새겨두었다. 

 

2. 다윗에게 요압장군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

  다윗에게 요압장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그의 누나였던 스루야의 세 아들들 중에서 맏아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에게 외조카인 셈이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왕으로부터 10년간 도피생활을 할 때부터 그는 다윗에게 굉장한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그때 도움을 주지 아니했다면 다윗도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후 사울왕국을 주도했던 이스보셋의 군대를 무찌르는 데에도 요압 장군의 도움은 실로 컸다. 그리고 다윗이 유다지파와 함께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주변민족을 정복하는데 요압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암몬자손 나하스의 아들 하눈을 무찌를 때에는 요압이 그 전쟁의 막바지에 다윗을 모셔와서 정복하게 하고 하눈의 왕관을 쓰게 함으로써 왕의 이름을 높여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종의 충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왕명을 어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먼저는 사울과 이스보셋의 군장이었던 아브넬을 죽였다. 그러나 다윗은 항복해온 아브넬을 자신의 부하장수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브넬은 그 전에 자신의 셋째 동생 아사헬을 그가 죽였다는 이유로 인해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를 슬그머니 불러내어 죽인 일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다윗이 그토록 그를 죽이지 말고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당부했던 압살롬을 죽였다. 그래서 요압은 왕명을 두 번을 어기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압살롬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마저 죽여 없애버린다. 왜냐하면 다윗이 자기 대신에 그를 왕의 최고사령관으로 앉혔기 때문이다(삼하19:13). 그렇게 보면 요압장군은 상당히 시기질투심도 많았고 혈기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를 좋게 말하면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왕의 명령에 가장 불복종했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요압장군은 잘못을 책망하고 싶으나 책망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유언으로 요압장군을 죽여 처리해 줄 것을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부탁한다(왕상2:5~6). 

 

3. 다윗은 왜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는 도중에 아마사를 요압의 뒤를 이어 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는가?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환경하는 도중에 군사령관을 교체한다. 원래는 요압이었는데, 압살롬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원수의 군장에게 취해야 하는 일반적인 원칙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죽여 다시는 반역의 무리에 동참하는 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아니 항상 그래왔다). 오히려 아마사를 자신의 군대의 군사령관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반역도들을 용서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반역도들의 대장을 자신의 군대장관으로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반역도들을 다윗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기를 도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회유와 포섭 작전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반란군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리고 숨겨진 의도가 있다면, 죽이지 말라고 했던 압살롬을 요압이 살해한 것에 대한 강등조치가 아니었을까도 싶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조치는 결국 요압장군의 분노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요압이 아마사마저도 살해해버리는 요인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4. 다윗은 왜 환궁하는 것을 지체했으며, 또한 환궁하는 일에 왜 유다장로들이 앞장 서게 했을까?

  다윗은 압살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제는 적의 장수까지 자신의 부하로 두었기에, 얼마든지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또 기다린다. 전에도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무려 2번씩이나 주어졌지만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처리하실 때까지 기다린 것과 마찬가지로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기다린 것이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은 금방 온 이스라엘 땅에 퍼졌을 것이고, 그 소문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도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그 반응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스라엘의 10지파의 백성들이 서로 말하기를, 자기들이 비록 압살롬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였지만 압살롬이 죽고 말았으니 이제라도 다시 다윗을 왕궁으로 모시도록 하자고 협의한 것이다. 그때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긴급히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유다장로들이 있는 헤브론에 즉파한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벌써 환궁의 일을 서두르고 있는 판국에, 유다지파는 다윗의 형제들이요 골육친척인데도 왜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려하느냐고 귓뜸을 해준 것이다. 그럼 왜 다윗은 유다 장로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준 것인가? 그것은 사실 유다지파가 다윗을 죽이려 했던 압살롬과 함께 반역의 주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다윗이 환궁하는 것을 유다지파가 소홀히 한다면 유다지파는 영영 다윗의 곁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과거의 행동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반등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잘 성사되게 한다면 유다지파는 영영 다윗 편에 서서 다윗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를 좋게 여긴 유다장로들은 유다족속을 이끌고 요단강 이쪽 편에 있는 길갈로 마중을 나가게 된다. 

 

5. 이상의 사건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지도자의 덕목은 무엇인가?

  지도자란 모름지기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보고서 그것을 덥석 물어버리는 어리석은 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하며, 지금 내리고 싶은 결정이라도 좀 참고 있다가 나중에 내려야 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 즉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현재의 상황에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갈라진 민족의 경우라면 어찌하든지 그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일치와 단결에 매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다윗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갔다. 첫째로, 그는 함부로 속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결정은 뒤로 미루어 놓기도 하였다. 둘째로 그는 절대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것이다. 특히 다른 사람이 시샘을 낼 것 같은 것은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셋째로, 그는 아무리 원수가 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돌이키면 그를 포용하며 용서할 줄도 아는 지도자였고, 자신에게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들을 기억해 주었고 그들의 공로도 잊지 않고 보답할 줄도 아는 훈훈한 지도자였던 것이다. 

 

2022년 02월 03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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