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메시지는 지난 메시지에 이어지는 두 번째 메시지다. 그것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성령받기를 기도해야 한다 할지라도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지키지 않는 한 우리도 역시 악한 영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복음 전파자로서, 성령세례를 받아 능력을 받고 사역해야 하는 것이지만 오늘 이 영적인 비밀을 잘 알지 못한 채 사역하다가는, 죽는 날 심판대 앞에 가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낙인찍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우는 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 우선순위란 대체 무엇인가?

 

2022-06-12(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06) 성령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2)(행1:12~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G3WeggvqPI [혹은 https://tv.naver.com/v/27323402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천국복음'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마9:35). 이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그때 끝이 오게 될 것이다(마24:14). 그리고 이 천국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천국복음을 알고, 이 천국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나 이 천국복음을 듣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아무나 이 천국복음을 전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천국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행1:4~5). 그런데 예수께서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하신 근본 이유는 성령세례를 통하여 능력으로 옷입혀지기 위함이라고 하셨다(눅24:49). 그렇다면 성령세례를 받는 직접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도에 전무하는 것이다(행1:14). 성령받기를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 내려오시기 때문이다(행2:1~4). 그렇다면 누구든지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자는 무조건 전심으로 기도하면 되는 것인가? 그래서 능력의 성령으로 옷을 입을 수 있는가? 오늘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메시지가 성령세례와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길잡이가 되기를 소망한다. 

 

2. '성령세례'란 무엇이며, 성령세례의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성령세례'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 부어지는 것을 가리킨다(행2:17). 성령께서 믿는 이들에게 쇄도해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로 하여금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세례를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이 승천하시기 직전 12사도들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셨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행1:4).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다(행1:5). 이는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통하여 능력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눅24:49).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은 능력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세례를 통하여 능력을 받아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믿고 천국가는 것을 악한 영들이 환영하고 박수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사탄 마귀에게 붙들려 있는 자들을 전도하는데 그놈들이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탄 마귀와의 영적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과 권세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악한 영들로부터 탈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남들도 악한 영들에게서 탈출시켜 천국에 들어가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3. 오순절날 성령세례를 받은 베드로는 어떻게 전도했는가?

  그렇다면, 오순절날 약속의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어떤 능력을 받았으며 또 어떻게 복음을 전파했을까? 사도 베드로는 당시 열한 사도들의 대표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또한 여러 여인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 그리고 다른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성령받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한 마디로 이들은 성령받기 위해 기도에 전무한 것이다(행1:14). 그러자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내려 오셨다(행2:1~4).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능력으로 무장되었다. 그러자 학문 없는 범인인 줄로만 알았던 베드로는 말씀으로 무장이 되었다. 군중 가운데 일어서더니 모인 무리들에게 담대히 설교하여 하루에 3천 명을 회개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그가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던 '나면서 못 걷는 자'를 만나서 고쳐 주게 된다. 그러자 고침받은 이가 성 안을 뛰어다니면서 자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았다는 것을 만방에 알려 주었다. 이 소문은 금방 예루살렘 안에 퍼졌고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려고 침대와 이불 채를 가지고 길거리로 나왔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로부터 귀신을 쫓아 주었고 각종 병자들을 치료해 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다. 정말 능력으로 무장하여, 악한 영들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고침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4. 누구든지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세례도 받고 능력도 받게 되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누구든지 성령받기를 사모하여 열심히 기도하면 다 성령세례를 받게 되는가? 그리하면 성령세례를 받아서 능력으로 옷입혀지게 되는가? 이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날 무조건 기도에 전무한다고 해서 참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려면, 당시 그들의 영적 상태와 우리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한 후 성령 받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던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지금 우리의 영적 상태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영적 상태와 우리가 똑같은 조건이라면 우리도 역시 전심으로 기도하면 참된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120명의 성도들의 신앙 상태와 지금 우리의 신앙 상태가 똑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상황은 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세례나 능력을 간구하기 전에 우리의 영적 상태부터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120명의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는가? 첫째,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날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대체 누구였는가? 그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목격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했던 자들은 120명 뿐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500명 이상이었기 때문이다(고전15:4~6). 형제들만 500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380명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그들도 역시 예수님을 부활과 승천을 목격했지만 그들 중에 2/3가 떠나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120명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로 살고자 작정하고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주 예수님에 대한 부활을 죽기를 각오하고 전하기로 마음 먹은 자들이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대대 자자손손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키어 오던 경건한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 대부분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도 역시 안식일이 되면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던 자들이었고(행1:12), 정결법과 음식법을 철저히 지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었던 것이다(행10:12~15). 그러므로 그들은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국 사람과는 전혀 다른 신앙의 바탕이 되어 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했다고 우리가 기도를 따라한다고 해서 그들이 받았던 성령세례를 우리도 받을 수 있다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들의 영적 상태처럼 우리도 과연 준비되어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처럼 우리도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5.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날 120명의 영적 상태와 우리가 역시 동일한 상태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기도에 전념하는 것으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상황이 다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반만년의 역사를 미신과 잡신을 섬겨 왔고, 무당과 점쟁이를 섬기고 살아온 민족이다. 아니 우리 조상들 중에는 신내림을 받아 무당과 점쟁이의 삶을 살았던 자들도 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부터 약 1,600년 동안 우리는 부처를 섬겨 왔다. 나무나 돌로 만든 부처상에 절을 하고 탑돌이를 하면서 우상을 숭배해 온 것이다. 그리고 조선 시대부터 약 500년간 우리 민족은 조상 대대로 자기의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 몸속에는 우상 숭배의 영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러한 영들을 제거하는 일들은 하지 않은 채, 삼각산에 올라가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이 우리를 속여 성령을 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나 귀신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귀신들도 얼마든지 우리에게 환상을 보여 주고 음성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세례를 받기를 간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회개를 통해 내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도 않은 채, 자신도 산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고,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하면서 자신도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받아서 예언한다는 사람이나, 성령받아서 병든 자를 치유한다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점검해야 한다.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그 영이 성령인지 악령인지를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일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120명의 성도들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면 우선 말씀을 공부하여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 우리도 그들처럼 순교를 각오하는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개하여 자기 속에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악한 영들을 제거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6. 내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도에 수련하는 자가 되었을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우리 한국 사람들은 대대로 귀신들을 섬겨 온 이방인들 중의 이방인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기 전까지 우리 민족은 각종 귀신들을 섬겨 온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도 아니한 채 성령받기를 사모하고, 또한 산에 올라가 기도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여기 좋은 예화가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 8장의 이야기다. 빌립 집사가 이방인의 땅인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의 일이다. 그곳에는 마술사 시몬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빌립 집사가 와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빌립 집사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아 무장된 상태로 그곳에 온 자였다. 그러니 복음을 전파할 때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든 자들도 치유함을 받아 그곳에도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다. 그러자 사마리아 동네에서 귀신을 받아서 마술사로 일하고 있던 시몬이 빌립을 열심히 따라다닌다.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면서 빌립에게 세례까지 받는다. 그런데 그가 세례를 받았던 것은 진정 복음의 증인이 되고자 함이 아니었다.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빌립 집사의 모습을 보고서 그것을 자기도 가져 보려는 욕심에서였다. 그런데 그때, 사마리아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파송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거기에 있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받기를 기도해 준다. 그리고 안수하였을 때 그들도 역시 자기들처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도 안수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면서 부탁을 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황당한 그의 부탁을 받고 그를 엄히 꾸짖게 되는데,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 줄로 알았으니 네 돈과 함께 망할지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네가 받을 어떠한 분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속히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라. 그리고 주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행8:20~22)"고 말한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보니 그에게는 악함이 가득한 상태였고, 그가 악한 영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그가 회개했는지 안했는지가 성경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최초의 교회 역사 학자였던 유세비우스(A.D.260~340)가 그후의 일을 기록해 두었다. 그의 책 "교회사 제2권 14장"에 보면 이러한 기사가 나온다. 
  "이 마술사는 과거에 유대에서 사도 베드로로부터 사악함을 정죄받았을 때에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빛 때문에 영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서쪽으로 도피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는 바다를 건넜다. 그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에 당시 그곳에는 악한 정신이 사로잡고 있었으므로 그의 계획은 곧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그 도시의 시민으로부터 신으로 숭배받으며 그의 신앙까지 세워졌다." 

  그렇다. 그는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지배해 왔던 그 악한 영을 그대로 가진 채 로마로 건너가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속였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신처럼 행세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 자기 속에 악한 영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 영을 성령의 역사로 얼마든지 가장하며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어디에서든지 기적이 나타나고 병든 자가 낫게 되고 희한한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여기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7. 성령세례 받기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고로 우리도 성령을 받기를 원한다면 성령받기를 기도하기 전에 2가지를 점검해야 한다. 첫째로, 그것은 내가 과연 주님에 대한 순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체크해 보는 것이다. 주님이 누군지도 모른 채 성령세례를 간구했다가는 귀신이 주는 것도 성령이 주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은 참신앙인 것이지 미신이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미신은 신앙의 대상이 누가 되었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냥 자기에게 복만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참 신앙은 다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성령세례도 받아야지 성령세례만 받으면 좋다고 성령세례를 받았다가는 귀신의 장난에 그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회개하여 내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여 깨끗한 상태가 되었는지를 체크해 보는 것이다. 회개 없이는 악한 영들은 내게서 절대 제거되지 아니한다. 우리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 숭배의 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악한 영들이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지 우리들은 사실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영들을 제거하지 않는 한, 우리도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처럼 악령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을 성령의 사람이라고 속이는 자가 될 수 있다. 고로 먼저 내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 숭배의 죄들부터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지은 자범죄들까지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능력받아서 오히려 자신의 영혼이 더 망가지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8. 나오며

  성령세례나 은사를 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순서를 지켜야 한다. 우리와 같은 우상 숭배에 찌들어 있던 이방인들은 기도보다도 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믿음을 점검하는 일이요, 또한 회개하는 일이다. 이것이 뒷받침 되지 않는 한 어느 날 우리도 주님을 배반하고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귀신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귀신이 보여 주고 들려주고 능력주는 것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또한 기도를 많이 하여 성령세례를 받아 은사 사역을 잘해 오던 자라 할지라도 자기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 사역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교만의 영이 올라가 자기를 무엇이나 되는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고 나중에는 예수님은 죽었으니 그는 실패자였다고 하면서 자신만이 인류의 구원자요 하나님이라고 떠들어대기도 한다. 이것이 모두 회개를 하지 않아서 나오는 병폐들인 것이다. 특히 우리 민족이 섬겨 온 악한 영들은 실로 종류도 많고 또한 큰 놈들도 많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영들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로 기도에 전념하다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철저한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철저한 공부가 더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은사를 구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회개하여 내 속에 있는 영들을 먼저 내보낸 뒤에 또한 악한 영들에 붙잡혀 있는 다른 이들을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2022년 06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칭의가 곧 구원은 아니다(롬5:9, 미래형이다). 칭의란 구원의 여정에서 첫 발을 내딛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칭의는 믿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두번째 실수가 가르쳐주는 교훈의 핵심이다(롬4:11, 골2:11~12). 오늘날 우리도 온전한 칭의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 된 믿음에다가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할례"란 어떤 의미였을까? 언약백성의 표시였나? 아니면 다른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인가? 여기 할례가 주는 본질이 있다.

 

2021-05-02(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창세기강해(86) 할례, 그것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회개의 시작이었다(창17:1~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a_Unkj_lwI [혹은 https://tv.naver.com/v/20006734 ]

 

 

1. 들어가며

  아브라함은 갈대아우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후, 자기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곳에 그만 기근이 찾아왔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은 물어보지 않은 채 애굽땅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래를 후궁으로 삼고자 데려갔던 것이다. 힘도 없었던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사래가 아니라면 약속의 씨를 얻을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도 가만 있지 않으셨다. 즉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여 사래와 아브라함을 구출해내셨다. 그리고 그를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하지만 그때 아브라함이 벧엘에 올라가 기도했다는 말은 있어도 그가 거기서 회개했다는 말은 없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실수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 한 번 더 그리고 나중에 또 한 번 더 발생한다. 그렇다면 두번째로 실수를 범한 아브라함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브라함에게 두번째 실수는 참으로 괴로운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엄히 책망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고 찾아오신 것만으로도 그는 기뻐했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던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놀랍게도 아브라함의 반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그 가정에 드리워 있던 저주를 끝마치게 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임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때 두번째 실수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고 난 뒤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비로소 회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75세 때에 부름받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은 아내가 임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고(창12:2), 그의 자손(씨)이 땅의 티끌같이(창13:16) 그리고 하늘의 별처럼 많이 있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창15:5). 무엇보다도 그 방법은 양자를 삼는 방법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나오는 출생을 통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창15:4). 그렇지만 하란 땅을 출발한지 10년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도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은 당시 고대근동의 풍습을 따라가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본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면 첩을 들여 자식을 낳게 하는 것이었다. 아내의 제안을 아브라함이 받아들임으로 결국 아브라함은 사라의 여종이었던 애굽여인 하갈을 자신의 부인(히브리어 원문)으로 맞이한다. 그래서 아들을 얻게 되었으니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에 아브라함의 기쁨은 상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뒤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1년, 2년, 5년, 10년이 지나갔다. 다시 3년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타나시어 그가 저지른 행동이 얼마나 불신앙적이었고 불순종적이었으며 이기적이이었는지를 책망하신다(창17:1). 그러자 그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말씀을 우리는 "할례언약"이라고 부른다. 

 

3. 할례언약의 주된 내용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나타나시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그 언약을 일컬어 우리는 "할례언약"이라고 부른다(창17장). 할례언약은 할례조항만이 들어있는 언약은 아니다. 할례가 이 언약의 주된 내용이기는 하지만 4개 혹은 많게는 5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 중에서 첫째와 셋째 조항은 아브람과 사래에게 그들의 이름을 바꾸라는 것이었다(창17:4~8, 15~16). 아브람("고귀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으로, 사래("나의 왕비")에서 사라("왕비" 즉 "모든 사람들의 왕비")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때부터 그들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둘째 조항이 가장 중요한 데,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더러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었다(창17:9~14).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두번째 실수는 그의 고추를 사용하여 육체를 따라서 자식을 낳은 것이기 때문에, 그 끝의 포피를 잘라냄으로 자신의 잘못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하는 표시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넷째 조항은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장차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하여 앞으로 또 언약을 맺으겠다는 것이었다(창17:19,21). 하지만 부차적으로 이미 태어난 이스마엘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이 있었으니, 그도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받게 하여, 그가 열두 지도자들을 낳는 민족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4.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행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육체를 따라서 자식을 산출해 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가족중 남자들더러 할례를 받으라고 한 것은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의 모든 남자들이 결단코 세상적인 방법이나 인간적인 방법을 따라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갈 것이며, 두 번 다시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겠다고 하는 표시였던 것이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부르며 "세례"라고 칭하였다(골2:11~12). 왜냐하면 세례와 할례가 그 방법과 뜻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세례나 할례는 과거에 죄를 짓고 살았던 자기자신을 수장하고, 이제부터는 새롭게 시작하시는 주님만 붙들고 살겠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당시 어떠했을까?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듣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주시겠다고 해도 피식 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다(창17:18). 이것은 무슨 뜻인가? 사라를 통하여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으므로, 기왕 이미 태어난 채 있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장자로 인정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그럴 수 없다고 하셨다. 그의 아내 사라가 낳은 아들이라야 그의 씨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었던 아브라함은 최종적으로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왜냐하면 그의 불신앙과 신앙이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감사하게도 아브라함은 그날 즉시 자기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 곧 자기의 아들 이스마엘과 자기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남자들과 그리고 외부에서 사온 종들이나 할 것 없이 남자들을 다 데려다가 할례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때부터는 하나님이 기뻐하고 바라시는 인생을 살겠다고 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신약성경에서는 "회개"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상으로 향하던 자신의 발길을 멈추고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표시가 바로 회개의 본 뜻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두고, 그가 단지 언약자손이 되겠다는 표시를 했다는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물론 그러한 뜻도 포함된 것이지만, 할례의 원뜻은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구원을 위한 참된 믿음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요소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에게서 저주가 끊기기 시작한 시점이 어디였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후에 곧바로 사래가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연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 돌아와 25년을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에게서 불임의 저주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여전히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주가 끝마쳐지고 자식을 낳게 될 때, 비로소 그때부터 복이 시작되는 것이요 그것이 구원의 여정에 들어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만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 재고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개신교(기독교)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믿음만 있으면 칭의도 받고 구원도 받고 천국에까지 넉넉히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지금 천국에 들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칭의를 구원의 완성으로서 보아서는 절대 아니 된다. 왜냐하면 저주로부터 벗어나 복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칭의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창15:6에서 받은 칭의는 이제 구원의 노정에 첫 발을 내딛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우리도 온전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을 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칭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무할례 때에 받았던 칭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이다(롬4:1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 받은 칭의를 우리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99세가 되기까지 주님으로부터 할례언약을 받기전까지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창17:1). 그러므로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게 되면서 그리고 자신의 고추 끝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시행할 때부터 비로소 그의 믿음은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칭의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믿음이 견고해지고, 더욱이 회개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온전한 칭의는 온전한 믿음에다가 회개가 동반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을 수 있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주장은 반드시 재고해야만 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칭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회개가 동반되지 아니한 칭의를 결코 온전한 칭의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만 읽어보면, 칭의는 믿음으로만 얻는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이 말씀하신 칭의를 간과하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만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우리의 신앙의 표준은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칭의를 주실 분은 사도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의 말도 맞기는 맞지만 그때 언급하지 않은 것도 볼 수 있어야 온전한 것이라고 말할 ㅅ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서 비로소 칭의를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18:9~14). 그것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 바리새인과 어느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 나온다. 이때 바리새인은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교만함과 거만함은 참으로 가관이다. 하지만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세리는 그와 같지 않았다. 그는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한 채 다만 가슴을 치면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저 바라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회개가 동반되지 아니한 믿음을 두고 온전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의 단적인 예가 바로 창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할례사건이었던 것이다. 

 

6. 나오며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실수를 통해 그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배워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장차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도 배우게 된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를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실 때에는 아브라함 혼자만 불러내신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내까지 한 몸 안에서 그를 불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했다. 그래서 아내로부터 자식을 얻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의 아내도 저주로부터 벗어나개 해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오직 자기만 저주에서 벗어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았을 때 그는 다 된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그를 엄히 꾸짖으신 것이다. 자신의 믿음도 교정되어야 했지만 사래에게 드리워진 불임의 저주까지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에 모든 일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은 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다루셔야 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 앞에 굴복하여 회개할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그리고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을 책망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즉시 엎드렸다. 그가 비로소 하나님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할례를 시행함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또한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그와 사래의 저주로부터 그들을 풀어주셨다. 고로 할례를 시행하던 그날, 아브라함은 아내와 더불어 저주로부터 벗어나 복받는 시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실수는 아브라함 자신을 참된 믿음으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도구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실패의 수업을 통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회개의 효능을 그때부터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약하여 넘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참된 진리의 길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지금도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5월 02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83) 아브라함이 얻은 칭의 과연 그의 믿음이 온전해서였을까?(창15:1~7)_2021-04-30(금)

https://youtu.be/BxnA68GAqTY  [혹은 https://tv.naver.com/v/19930631  ]

 

 

1. 아브라함은 전쟁을 치른 후 왜 두려워하고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전쟁에 나갔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아브라함이 무찔렀던 북방왕들이 다시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귿르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돌아간 후에 다시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며 걱정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자신의 318명의 사람들로서 그 많은 북방의 메소포타미아 4개의 연합군(동맹군)들을 다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 돌아간 자들 중에 왕이라도 살아있다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쳐들어올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전쟁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이었나요?

  그런데 그때 환상 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에게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를 위하는 방패이니라. 그리고 너의 상은 매우 클 것이니라"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적군들을 막아줄 테니, 그것에 대해서는 걱장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해온 일은 너무나도 잘 한 일이었다고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일로 인해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게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자 아브라함은 즉시 어떤 질문을 던졌나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자 아브라함은 이때다 싶어 즉시 그가 가장 궁금해하는 아들 소식을 물어보았습니다. 언제 아들을 주실 것인지를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는 않고 우회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바로 답을 주실 수 있도록 말이죠(제가 생각하기에 아브라함은 협상의 달인인 것 같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 집의 후사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일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의 아들(엘리에셀)이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창15:3~4)" 그러자 주께서 즉시 그 말에 대한 대답해주셨습니다. 아니 대답을 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다.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될 것이 아니다. 네 몸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창15:4)" 대화를 잘 뜯어보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질의에 공략당한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상당히 기지가 뛰어난 인물 같아 보입니다. 

 

4.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시청각 교육은 무엇이었나요?

  이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불러내었습니다. 그 때는 밤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하늘을 잘 보고 저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가 그것을 셀 수 있다면 한 번 세어보아라. 네 씨가 이와 같이 있게 될 것이다(창15:5)"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진정 나에게 많은 자손을 허락하시려고 생각하신 것이 확실하구나."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시고는 그 믿음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5. 그렇다면 이때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온전한 것이었나요?

  아닙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진정 하나님이 그것을 하실 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온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또 환경에 따라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후에도 아브라함은 역시 실수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언전히 믿지 못하는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나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는 온전히 믿지 않았음을 성경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기의 아내 사래가 그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고 하자, 그는 엎드려 속으로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겠으며 사라는 90세인데 어찌 출산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뒤에서는 자식에 대한 조짐이 보이지 않자, 첩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낳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인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신다고 했어도, 첩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것입니다(창17:18).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때 온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믿음을 가상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창15:6). 그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주는 것을 대견스럽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믿음은 한 순간에 딱 주어지는 완전체가 아닙니다. 믿음을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했던 사도바울의 말처럼, 믿음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에 반응하며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갈 때에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나도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일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를 하더라도 실패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나갈 때에 믿음의 분량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입니다. 마치 보름달이 상현달에서 시작하여 점점 보름달이 되어가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실패한 일도 있었지만 거기에서 그것이 주는 교훈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믿음을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야고보(예수님의 친동생) 장로가 그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채워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2:23-24 )"  그렇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날마다 순간마다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깨닫는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믿음을 좀 더 잘 자라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듣고 들은 것을 아멘으로 화답할 때에 생겨나기 때문입니다(롬10:17~18).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되, 어쩌다 한 번 듣는 것으로는 성장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릴만 할 때 듣는 수준으로는 잘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잘 들어야 합니다. 기왕이면 매일 듣는 것이 좋습니다. 새벽마다 듣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겪는 여러가지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고 무엇을 내게 가르쳐주시는지를 귀기울일 때에 성장합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 뜻대로 살아갈 때에 믿음이 더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루 아침 일확천금을 캐는 것처럼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또 사건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해 나갈 때에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1년 04월 30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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