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6(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9) 생명의 떡의 설교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선언(요6:35~7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gfWuP2TXsU  [혹은 https://tv.naver.com/v/30826799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된 '표적의 책'이며, 13장부터 21장까지는 예수님의 강화를 중심으로 기록된 '영광의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이 양쪽에 다 걸쳐 있다. "나는~이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은 1~12장에서 다섯 번 나오고(요6:35, 8:12, 10:7, 10:11, 11:25), 13~21장에서 두 번 더 나온다(요14:6, 15:1).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복음에서는 하나의 단락에서 예수님의 표적도 나오고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나오는 것이 딱 한 번 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이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은 네 번째 표적으로서 '오병이어의 표적'이 나옴과 동시에,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으로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도 같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표적의 역할은 어떤 것이며, 자기 선언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왜 당신 자신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주시려는 '영생'과 그리고 예수님의 성만찬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나의 것으로 취할 수가 있는가? 

 

2. 오병이어의 기적과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요6:1~13)은 예수께서 행하신 7가지의 표적들 가운데 4번째 표적에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그간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 그리고 아울러, 왕의 신하의 아들을 소생시키셨고, 베데스다의 38년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리고 이번에 네 번째 표적으로서 어린 소년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가지고서 성인 남자만 5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음식 기적을 베푸셨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라는 비유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은 어떤 관련이 있으며 또한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먼저, 둘의 관련성을 살펴보자. 먼저 이 둘은 예수께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시는 생명과 관련이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의 육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베푸신 기적에 해당하며,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은 예수께서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오셨음을 말해 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고로 둘 다 육체이든 영혼이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생명과 관계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먼저,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 사람들에게 육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공급자인 것을 말씀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은 예수께서 생명의 공급자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께서 생명 그 자체로서 자신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 행하신 일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면,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은 예수께서 '사람으로서' 인간을 위해 무엇을 행하러 오셨는가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것을 더 큰 눈으로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의 하나로서, 예수께서 왜 표적을 행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 주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은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일으키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야말로 영생하는 양식을 주시러 오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는 자기 선언은 예수님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생명 그 자체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3. 예수께서 당신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선언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갈릴리 벳새다에서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 가득 남기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실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그들은 예수님만 있으면 자기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들어 임금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피하여 산으로 가셨고 밤에 바다 위를 걸어서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까지 쫓아왔다. 그럼, 그들이 거기까지 따라온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이미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려 주셔야 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내가 생명을 주러 오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내가 곧 생명 그 자체이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에게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런데 곧바로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께서 생명이라는 것을 알기 쉽도록 비유적으로 말씀하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육체의 생명에 필요한 양식의 공급자로서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셔야 할 것을 대신 그렇게 비유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생명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떡을 계속해서 생산해 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먹이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서 내어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믿어서 영생을 얻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있으면서 그분을 믿지 않았다. 

 

4. 사람들이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께서는 당신이 생명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모를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는 것이냐면서 의아해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장차 당신자신을 내어 주실 것을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줄 양식은 곧 자신의 살과 피라고 하셨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내어 주시려고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후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해방하여 우리에게 주시려고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결코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6:53).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셔야 주님께서도 그를 마지막 날에 부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요6:54). 왜냐하면 예수님의 살만이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만이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로 인하여 생명을 받았듯이, 사람들도 인자로 인하여 생명을 받으면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식물 생명에 빗대어서 말씀하시다가 이어서 동물 생명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들은 생명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거기에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은 어렵도다고 하였다. 그래서 누가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고 서로에게 이야기하였다. 

 

5. 예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어떻게 할 때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생명이니만큼 당신을 떡처럼 먹어서 생명으로 취하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한 번 더 그것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서,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여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최종적으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발언하고 있는 말씀들이 영이요 생명입니다(요6:63)"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요, '영은 예수님께서 발언하고 있는 말씀'이니, '생명을 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고로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에게 스스로 나아온 후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6:35).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육신의 양식을 생산하여 주시는 분으로서, 기적을 행하시는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사람들이 떠나자 예수께서는 12제자들에게 어떻게 물으셨는가?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자 또한 영생을 위한 살과 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더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떠나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더 이상 그들에게 육신의 떡을 생산하여 주시지 않고 영혼에 필요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 말씀하시자 그들이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직접 선택하여 세우신 12제자들에게도 질문을 던지셨다. "여러분도 가는 것을 원하십니까?"(요6:67) 그때였다. 12명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나서서 말했다. "주여, 당신이 영생의 입말씀들(레마들)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떠나가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당신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믿은 채 있으며 아미 알아온 채 있습니다"라고 했다(요6:68~69). 그렇다. 무리들이 아닌 12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미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라는 것이 인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한 번 더 말씀하시면서, 12명 중에서도 떠나갈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12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가지 않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들 중에 한 명은 예수님을 넘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여러분 열둘을 세운 것은 맞지만, 여러분들 중에 한 명은 마귀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는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설을 달아 놓았다. 그렇다. 그렇게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 앞에 몰려들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신 것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어렵다고 하면서 떠나갔다. 하지만 12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만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7.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오늘날 많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6장 37절과 39절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실 것인데 그러면 아들은 그들을 잘 보존했다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마지막 날에 부활시키는 말씀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러한 말씀이 아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이 말씀을 개역 성경으로 살펴보자.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처럼 개역 성경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자(사람)가 있는데, 사람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이러한 자만이 예수님에게로 나아갈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결코 내쫓지도 아니할 것이고, 그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마지막 날에 다 부활시킬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 번역한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자가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채 이 본문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라. 결코 그렇게 쓰여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얻을 자를 만세 전에 정해 놓았다고 말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얻을 자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내신다는 말씀도 역시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이 본문을 번역하면서, 요한복음 6:37,39의 말씀은 만세 전 개인예정의 말씀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니다. 그렇다면 실제 헬라어 원문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요6:37[직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것(중성, 단수)은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계속] 오고 있는 자(남성, 단수)는 내가 결코 바깥쪽으로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요6:39[직역]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이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중성, 단수)을 내가 그것에서부터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지막 날에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요6:37이나 6:39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시려고 예정해 놓은 개인이 따로 있다는 말씀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중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지키고 또한 부활시키기 위해 예수님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마도 그러한 것에는 "지혜, 명철, 능력, 권세" 등이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지금도 아들에게 사람들을 보내시고 있다. 다만 자기 스스로가 아들에게 가지 않으려 하고 아들을 보고도 믿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께서는 이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것을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부활시켜 영생의 나라로 데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8. 나오며

  표적으로서 4번째 표적인 '오병이어의 기적'과 또한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으로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의 6장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당신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기 때문이요, '나는 생명의 떡이다'는 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생명 그 자체인 것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생명 수여자임과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이시다. 우리는 그것을 표적과 자기 선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생명을 취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 그분 앞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그분이야말로 생명 수여자임과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이신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생명이며, 예수님의 말씀이 또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6:63). 이러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더러, 예수께서 행하신 그 일들을 결코 잊어버리지 말라고 아예 성찬식으로 제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행하신 일은 귀중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통해 이 생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그날까지 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상황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생명을 잘 간직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죽는 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영원한 생명이 곧 영원토록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16일(수)

정병진목사

 

2022-11-0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8) 예수께서 제4표적과 제5표적을 행하신 이유와 그 영적인 의미(요6:1~3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6KsFAZXxxqY  [혹은 https://tv.naver.com/v/30623657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 중에서 사도 요한은 표적이라고 불릴 만한 7개의 기적을 요한복음에 수록해 놓았다.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바, 전반부는 예수님의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고(1~12장), 후반부는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13~21장). 전반부는 보통 '표적의 책'이라고 부르며, 후반부는 보통 '영광의 책'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표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7가지 표적들 가운데 포함시켰으며 또한 이것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진정 '표적'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며, 오늘 다루게 될 2가지 표적들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표적들인가? 

 

2.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4표적과 제5표적을 보는 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6장 1~15절과 16~21절에서 7가지 표적 가운데, 네 번째 표적과 다섯 번째 표적을 수록하였다. 이들 중에서 네 번째 표적은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 불린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실 공관복음서에도 공히 기록되어 있는 표적에 해당한다. 그런데 원래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인데, 왜 네 번째 표적으로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요한복음에도 기록된 것인가? 그리고 다섯 번째 표적으로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마태복음과 그리고 마가복음에도 등장하고 있는가? 왜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도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요한복음에 수록해야 했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 두 가지 기적이 '표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표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기적일 때에 붙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고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그분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는 놀라운 표적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요한복음에 수록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것과는 성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는 단지 예수께서 이런 기적들을 행하셨다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기적들을 표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공관복음서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기적들이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3.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떤 관점으로 기록된 것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어떠한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는가? 우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관복음에서는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수께서 빈 들에서 행하셨던 음식의 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서 성인 남자만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공관복음서를 가지고 설교할 때에는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을 우리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를 다룬다. 그리고 설교할 때에는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구체적인 기사를 공관복음 설교에 가져다 쓴다. 그래서 빌립처럼 저녁 식사 비용이 얼마나 될 것인지를 계산만 하지 말고, 안드레처럼 예수님께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를 갖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래서 그 작은 헌신이 결국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져다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게 되면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건축을 하려 할 때에도 계산을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 작은 마중물이라도 주께 드리게 되면 그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러한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왜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건 2가지다. 첫째는 그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있을 때에 만나를 내려 주셨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 만나 곧 생명의 떡이라는 것까지 말해 준다. 사실 오병이어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저녁을 먹게 할 수는 없다. 당시 빌립은 200 데나리온 어치 떡을 구입한다고 할지라도 2만 명의 군중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왜냐하면 200 데나리온으로 떡을 구입했을 경우 약 6,000명 정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병이어로 계속해서 창조의 기적을 행하시는 방법 이외에는 불가능한 것인데, 예수께서 그렇게 행하셨으니 예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 요지다. 그리고 둘째, 그분이 왜 이러한 기적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려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영혼의 필요 곧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육신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필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분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그 옛날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과 구주로 붙들어서 하늘의 참 생명을 얻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내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생명을 주는 자이며,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표적만 추구하는 표적주의 신앙의 끝은 어떠한 것인가?

  그런데 당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한 끼의 저녁 식사를 해결했던 군중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예수께서는 당시 수많은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그들의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계속해서 자신의 먹을거리를 책임져 달라는 것이었다(30~34절). 마치 모세가 매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었던 것 같이, 이제는 예수께서 모세가 되셔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거리를 계속 제공해 달라고 한 것이다. 당시는 못 먹고 못 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람의 영혼에 생명을 공급해 주시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러한 혜택을 계속해서 제공받게끔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15절). 그들에게 예수님만큼 좋은 지도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즉시 그 자리를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배고픈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백성들의 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유월절 전날 밤, 빌라도의 심문을 받을 때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왕이기는 하지만 어떤 왕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벳새다에서 가버나움까지 쫓아온 이유는 진정 자기들의 영혼에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던 것이다(26절). 

 

5.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보통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제자들이 바다를 노저어 가다가 풍랑을 만난 뒤, 배가 뒤집혀질 위기에 처하자, 예수께서 그들을 살려 주시려고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들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건져 주신다는 것으로 설교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다섯 번째 표적으로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목적이 공관복음이 말하고 있는 목적과는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당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자기 육신의 필요를 채워 줄 적임자로 알고 따라다녔기 때문에, 제자들만큼은 자신의 스승이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을 배고픔에서 건져 주실 분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이 믿고 따라갈 예수님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이 표적을 기록한 것이다. 즉 그들이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은 다름 아닌 천지 만물의 창조주로서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일부러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도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하여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나니'라는 말은 '에고 에이미'라는 문장으로서, "나 자신은 나다." 혹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 보이는 아주 특별한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표현으로 계속 등장한다. 또한 그때 제자들이 떨었던 것은 그들이 바람과 파도 때문에 떨었던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눈으로 목도함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버나움까지 쫓아왔던 군중들이 다 떠나가는 그 순간에도 제자들은 떠나가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또한 이 땅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를 이 사건을 통해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만큼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분 곁에 남아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신 바 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8~69)" 그렇다. 이러한 대답은 제자들만큼은 여타의 군중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당시 군중들에게 어떤 권면의 말씀을 하셨는가?

  그때 군중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주님을 찾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산 위로 올라가셨고, 제자들은 밤에 배타고 가버나움으로 갔는데, 예수께서 보이지 않게 되자, 다음날 그들도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쫓아간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째로, 이제는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다(27절). 또한 그 양식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사실 그때 군중들은 왜 가버나움까지 쫓아왔는가? 그것은 먹으면 소화되어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먹으면 썩어 없어질 한 끼의 식량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육신의 양식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든지 채워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결국 주님께서 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왜 예수께서 그들의 곁을 떠나셔야 했는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 보내셨던 자신을 믿어서 영생을 얻으라고 권면하셨다(28~29절). 그들은 그때까지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일시적인 혜택을 맛보는 것일 뿐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혜택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모세가 만나를 매일 내려 준 것처럼 예수께서도 자기들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 아니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교정해 주었으며, 하나님의 떡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알려 주셨다. 

 

7. 나오며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이다. 왜냐하면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의 표적들 가운데서 일곱 가지 기적만을 따로 모아 요한복음에 수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에서는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한 일곱 가지 표적을 만나게 된다. 그래야만이 독자들이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며, 그분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표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자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뚜렷이 증거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눠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볼 때에, 예수님이 보는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벳새다의 빈 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과 같이,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을 알라고 일으킨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어떤 목적으로 주님을 찾든지 그가 진정 예수님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하늘의 참된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다. 결코 썩어 없어질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만 주님을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로서 교회에서 바라고 소망할 것은 교회가 무슨 먹을거리를 주지는 않나가 관심거리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의 영혼에 필요한 생명과도 같은 말씀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시간 한 시간 떼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고로 이제는 내가 교회에서 과연 생명을 공급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0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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