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그리스도인들에게 '야고보서'하면,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이신칭의의 복음과 충돌되는 책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 책은 그러한 책인가? 이 책은 정말 사도적인 저작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책이며, 성경책에서 빼어버린다고 할 지라도 별 문제가 없는 책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 말씀이 산상수훈 곧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보서를 왜 하나님께서 성경책으로 주셨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야고보서강해의 첫번째 시간으로 야고보서의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특히 이 책의 저술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2022-03-23(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1) 야고보서 대체 어떤 책인가?(약1:1~12)_2022-03-23(수)

https://youtu.be/ohj4thygcaY [혹은 https://tv.naver.com/v/25816992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어떤 책인가? 야고보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서신서에 해당한다. 그리고 서신서 중에서도 일반서신에 해당한다. 사실 서신서는 바울서신과 나머지 일반서신으로 나누는데, 바울서신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며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고보서는 야고보서가 쓴 1권의 책이니까 적당히 넘어가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27권의 신약성경을 주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서신서에도 균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서신과는 상당히 차이나는 일반서신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은 일반서신 중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다루려고 한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서, 저자인 야고보는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이며, 무슨 목적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서 1:1~12까지에 나오는 시험(시련)을 대하는 자세와 시련을 이기는 방법 그리고 시련을 이겨낸 자가 받게 될 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많은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2. 야고보서는 누가 쓴 책인가?

  야고보서는 대체 누가 쓴 책인가? 우리는 야고보서 1:1에서 이 책을 쓴 저자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였던 '야고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맞다. 그럼, '야고보', 그는 누구인가? 과연 그는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야고보중의 한 사람인가 아니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제3의 인물인가? 혹 그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라면 그는 대체  여러 야고보들 중에 누구인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야고보'에는 약 네 명의 인물이 있다. 그중에 3명이 알려져 있는데, 첫번째로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 알패오의 아들인 야고보도 있다. 이는 보통 '작은 야고보'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도 있다. 그런데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A.D.44년에 제일 먼저 순교자가 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행12:2). 그리도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막3:18)가 있기는 하지만 그의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A.D.62년경에 순교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갈1:19, 마12:46~50)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주의 형제 야고보, 그는 예수께서 살아있을 때에는 불신자였다(요7:5).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개인적으로 목격한 이후에(고전15:7),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가의 탄생하고 스데반의 순교하자 대부분의 사도들은 흩어지고 그 책임을 야고보가 맡는다. 그래서 A.D.49년경에 있었던 예루살렘 공의회에 의장역할을 맡는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기둥같은 인물이었다(갈2:9). 유다서의 저자였던 유다가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할 정도로(유1:1), 야고보는 초대교회 당시 널리 알려진 초대교회의 핵심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야고보서를 기록한 것이다. 그가 A.D.49년에 안디옥과 스리아와 길리기아에 보낸 편지의 흔적이 사도행전 15장에서도 나오는데, 그때도 약1:1에 나오는 인삿말처럼 "문안한다"라는 말을 부정사 형태로 언급한다(행15:23). 그럼,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누구에게 왜 이 편지를 써 보낸 것인가?

 

3. 야고보서는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그럼, 야고보는 누구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인가? 야고보서 1:1에 의하면, 그는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12지파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흩어짐('디아스포라') 안에 있는 자들인 열 두 지파들"이다. 그런데 사실 야고보가 이 편지를 보낼 당시에 이스라엘은 3개의 지파만이 남아 있었다. B.C.722년 이후 북이스라엘의 10개의 지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9개 지파인데, 므낫세 지파가 요단강을 중심으로 반지파씩 땅을 분배받았기에 10지파로 본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이스라엘이 12개의 지파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3개 지파에 있어서 두 번의 '디아스포라'(흩어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B.C.586년에는 남유다가 느부갓네살에게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 거기에서 정착하여 살면서 점차 전 세계로 흩어졌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신약시대에 스데반의 순교이후(행8:1)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로마 제국의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두번째의 디아스포라 사건으로 전 로마제국의 각지에 흩어진 성도들을 가리켜, '흩어짐' 안에 있는 12지파들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예수를 믿는 예루살렘의 유대인이자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편지를 보낸 대상은 전세계로 흩어진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4. 야고보는 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왜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108구절을 전부 읽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유가 한 가지 있고, 감추어진 채 있는 이유가 또 하나다. 먼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는 로마의 각지로 흩어져있는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들을 책망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 각지로 흩어젼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 원래는 유대인들이었기에 로마 각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나간다. 그런데 이 때 2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호감을 갖고 받아들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배척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전자는 주로 부자들이었고 후자는 주로 가난한 자들이었다. 유댕인들은 A.D.70년 나라가 멸망한 후에 거의 다 죽고, 약 10만명 정도가 포로가 되어 로마에 이송된다. 그들의 자손들은 노예생활을 하면서 점차 자유인이 되어갔고, 바벨론 포로이후에 자유민이었던 유대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돈을 버는 것이었다. 나라는 이미 망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들에게 가나안땅을 되찾게 해 줄 것이라고는 믿음으로 돈을 준비한 것이다. 그래서 세금을 많이 바치는 유대인들은 로마인들도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회당으로 들어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부자들인 자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배척을 받았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배척받고 있는 비천한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리고 부자들이었지만 가난한 형제를 돕지 않는 부자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부자들에 대한 언급이 세 번이나 나온다(약1:9~11, 2:1~9, 5:1~6). 그런데 갈수록 그 강도가 세진다. 즉 처음에는 부자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가진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약1:9~11). 왜냐하면 부요함은 풀의 꽃과 같아서 금방 시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두번째로 부자들을 언급할 때에는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고 홀대했던 것을 책망하기 시작한다(약2:1~9).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부자들을 언급할 때에는 그들에게 임할 책망과 진노를 강하게 말한다. 그들이 말세에 재물을 쌓았으니 하나님을부터 불의 심판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야고보서 이 편지를 쓰게 된 첫번째 이유다.

  그런데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게 된 두번째의 숨겨놓은 동기가 있다. 그것은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형제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처음에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증거가 되었지만 점차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음식을 가려먹지 않고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자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교회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도 받고 믿음만 있으면 어떤 죄를 지었든지 다 용서받는다는 교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마디로 사도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서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데에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이 잘못 와전되어 전달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했지만 여기서 이방인들이 지키지 않아도 될 '율법의 행위들'은 전부 의식법(제사법, 절기법, 정결법, 할례법, 음식법)이었던 것이지 한 번도 도덕법인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방인들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예수님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그만 여기에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형제사랑을 실천하지 않아도 예수님만 믿고 있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는 자신의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되어 있다. 특히 객과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일은 반드시 실천하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야고보서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엄하게 책망한다. 행위들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말이다. 그러한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도 없다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두번째 저술 목적인 것이다. 

 

5. 야고보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1:1~12에는 어떤 말씀인가?

  야고보서는 얼핏 보면 중구난방식(衆口難防)으로 쓰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뚜렷한 구조나 체계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이 서신서에 속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시작 부분의 한 개 구절에서만 '문안인사'라는 형식을 갖추고 쓰고 있을 뿐만 서신형식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또한 내용도 단편적인 교훈들이 산재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야고보서도 일정한 구분이 지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야고보서는 3가지 주제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의 첫번째 부분(서론)은 '시험(시련)"이고(약1:1~18), 두번째 부분(본론)은 "믿음과 행함"부분이며(약1:19~5:6),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부분(결론)인 "고난"의 문제를 각기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첫번째 부분(서론)(약1:1~18)을 살펴보면, 이 부분의 주제는 "시험에 의해 검증되는 참된 믿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야고보는 시험에 대한 성도의 바른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약1:1~18의 첫번째 부분(서론)을 나눠서 보면, 첫째로, 1~12절에서는 시험 곧 시련을 당할 때의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 13~18절에서는  사람이 시험 곧 유혹을 당하는 원인은 인간 내부의 욕망에 있음을 지적한 이후 진정으로 좋은 은사와 선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임을 교훈하고 있다. 특히 1~12절에서는 이 편지를 보내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문안인사(1절) 후에는 시험 곧 시련의 시험을 당할 때의 성도의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2~12절). 이때  야고보가 제시하는 성도의 자세는 4가지다. 첫째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2~4절). 둘째는 하나님께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5~8절). 셋째는 가난한 자는 오히려 당당해지고 부한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9~11). 왜냐하면 부함은 풀은 마리고 꽃이 시듦같이 금방 쇠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째는 시험을 이긴 자에게 주시는 복 곧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임을 말하고 있다(12절). 그리하여 성도들이 시험중에 있더라도 끝까지 인내로 시험을 극복하고 승리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6. 나오며

  야고보서는 성도들에게서는 보통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을 말하는 책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서를 과연 누가 썼으며, 어떤 대상에게 썼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맥락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과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충돌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바울의 이신칭의와 야고보서의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다른 평행선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의 복음은 신앙의 여정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서신이라면, 야고보서는 신앙의 여정을 다 마치려할 즈음에 필요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과 야고보의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편만을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서신서를 읽고 싶다면, 사도바울의 책(12권)만을 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와 상반되는 책으로 간주되는 일반서신의 책도 같이 읽어야 한다. 특히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일이삼서를 읽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신앙의 여정을 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차 들어갈 천국을 대비해서도 동시에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오늘날처럼 한 번 믿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되며, 한 번 믿으면 과거에 지은 죄와 현재 짓고 있느 죄와 미래의 죄가 다 사함받을 것이라고 믿는 이 세대 사람들을 깨우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바른 구원관과 율법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산상수훈의 중요성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야고보서라는 성경 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2022년 03월 23일(수)

정병진목사

 

여러분은 신약성경 야고보서의 저자로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는 적어도 예수님과 25년에서 28년 정도를 함께 살았던 인물이다. 자신의 형인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뛰놀며 함께 일하며 회당에도 같이 다녔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며,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런데 나중에는 초대교회의 가장 큰 핵심적인 인물로 급부상하여 쓰임받게 된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예수님을 영광스러운 주님이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요, 심판하실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놀라운 숨겨진 역사가 들어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간증이 될 수도 있다.

 

1. 들어가며

  예수님은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요1:18). 아니 그분은 전능한 하나님이시다(사9:6).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전능자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가셨다는데, 그냥 왔다가 가셨겠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흔적을 남기시지 않았겠는가? 그가 오심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최종적인 단계의 행동이신데 모르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전능자가 오셨다가 가신 것을 인류가 알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능자께서는 자신이 오셨다가 가신 것을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도록 어떤 증거들을 남기셨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 전능자이신 그분을 만나 기적을 체험하고 문제해결을 받은 사람들이 일차적인 증거가 된다. 하지만 육신을 입고 오신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에 대하여 어느 누구가 반증할 수 없는 증거까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바로 그분의 부활이었다. 사람은 죽었다가 결코 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어디에서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사건을 통해서 예수께서 전능자이시며,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이 확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활을 목격한 자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부활사건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변화된  한 사람을 소개할까 한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을 온전히 깨닫게 될 때 어떤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우리가 잘 몰랐던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인물,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인물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다. 성경에는 여러명, 최소한 4명에서 6명의 야고보가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로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있고,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있다. 요한의 친형제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는 상당히 비중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는 그때는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하지만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이후 그는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로 등장한다. A.D.49년경 이방인의 율법준수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모였던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야고보가 의장격으로 나오기 때문이다(행15장). 그리고 스데반집사의 죽음으로 인하여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 여러지역에 나가서 사역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교회의 빈자리를 채웠던 자가 바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와 그리고 사도들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을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는 야고보를 사도들보다 앞에 위치시켰다(갈2:8~9).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어떻게 되어서 갑자기 초대교회의 핵심인물로 급부상하게 된 것일까?

 

3. 신약성경 야고보서의 저자는 누구인가?

  우선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신약성경 야고보서의 저자의 문제를 풀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가 누구인 줄 알면, 그의 신앙이 어떤 자인지를 알 수 있고, 그가 바로 야고보서의 저자인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인지도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대체 어느 야고보일까?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신약성경 야고보서를 쓴 저자는 적어도 4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는 회당예배에 익숙한 사람이며(약2:2), 하나님을 만군의 주(여호와)라고 칭하고 있고(약5:4), 하나님을 한 분으로 알고 있으며(약2:19), 아브라함을 자신의 조상으로 둔 야고보다(약2:21). 둘째 그는 적어도 야고보서가 쓰여질 당시(A.D.62)에 살아 있어야 하고,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흩어진 믿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곳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약1:1). 셋째, 그는 무엇보다도 욥기서와 잠언 뿐만 아니라 구약의 율법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자라야 한다. 넷째, 더욱이 그는 야고보서를 쓰고 있을 당시(A.D.62) 예수님을 영광스런 주님이자 약속된 메시야로 믿고 있으며, 자신은 그분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자다. 그리고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을 심판주라고 믿고 있는 자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저자인 그는 누구인가? 위의 4가지 특징들을 요약해보면,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밖에 없다. 왜냐하면 요한이 형제인 야고보는 A.D.44년에 가장 먼저 헤롯아그립바왕에 의해 순교했기 때문이다.

 

4. 야고보의 놀라운 신앙고백, 그것은 어떻게 터져나온 것인가?

  그렇다면, 신약성경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인 것이 확실해진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우리의 눈을 의심할만한 성경구절이 등장한다. 그것은 야고보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약1:1)과,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이자, 구약의 약속된 메시야요, 재림하실 심판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약2:1). 정말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서 이 야고보서를 썼다면,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친동생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12지파에게 문안하노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을 종의 위치로 낮추어 그분을 주인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주님이라고 표현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이라는 표현은 오직 여호와를 대신하는 용어이기에, 야고보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을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결론이다. 그러기에 그분을 심판주라고까지 표현하지 않았겠는가!(약5:8)

 

5. 메시야이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몰라본 야고보

  그럼, 대체 야고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일까? 신약성경에 기록된 분명한 사실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그는 예수님의 바로 밑의 친동생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친동생으로는 야고보 외에도 유다와 요셉과 시몬 및 2명 이상의 여동생들이 있었다(막6:3). 둘째,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2번정도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예수님을 걱정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2년의 초막절이 가까운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더이상 갈릴리 촌구석에서 사역하지 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독촉하고 있기 때문이다(요7:3~4). 그때만 해도 야고보는 자신의 형인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했던 메시야이며, 사람이 되어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형제들마저도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일러다(요7:5)"

  그렇다면, 적어도 25~28년동안 함께 살았던 형 예수가 메시야인지 왜 야고보는 몰라보았던 것일까? 예수께서는 전능자이시지만 자신의 전능성을 다 쓰지 않고 거기에 제한을 두셨기 때문이다. 그가 메시야인 것을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로만 사용하였다. 그랬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인정을 받은 메시야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자신을 제한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야고보는 자신의 형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눈여겨 보았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3년반이 지난 어느날 자신의 형이 산헤드린공회에 붙들려가서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자 그의 마음도 같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내심 자신의 형이 비록 메시야는 아닐지라도 뭔가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만 형이 신성모독죄로 죽임을 당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야고보는 식음을 전폐하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한다(이것은 유대 역사가의 전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하는 소문이 들려온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열한사도들도 보았다는 소식이 듣게 된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다. 어느날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에게도 나타나신 것이다(고전15:7). 그때 주님은 야고보에게 "형제여, 보라! 이제 내가 부활했으니, 이제 나를 보고 너의 떡을 먹으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자 야고보는 그때까지 의심했던 모든 잘못을 회개하면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결국 예수님이 정말 메시야였기 때문이다.

 

6. 야고보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

  결국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부활과 현현은 야고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그분이 부활했으니 그분이야말로 죽음을 정복하는 영원한 생명이심이 증명되었으며, 언제라도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 있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신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또한 그순간에 이전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말씀이 다 거짓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도 믿어지게 된다. 그리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니, 예수님은 자신의 친형이 아니라, 잠시 사람의 몸을 입었던 전능자인 것이 믿어지게 된 것이다. 더욱이 감람산에서 돌아온 후, 어머니의 고백은 또 한 번 야고보를 놀라게 하였는데, 그것은 예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자라는 자기 어머니의 고백이었다. 그녀가 18살(?)이었을 때, 천사가 나타나 이제 곧 임신을 하게 될 것인데, 마리아에게 잉태될 자는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성령으로 되는 것으로서, 나실 바 되는 그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함받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메시야에 관한 가장 큰 의구심의 하나였던 메시야의 출생의 비밀이 순식간에 다 풀려버리게 된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삶은 다 구약에 나와있는 예언과 일치한 것이었는데, 그분의 출생만큼은 비밀에 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가 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임마누엘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7. 야고보의 놀라운 변화

  그러므로 그때부터 야고보는 더이상 예수님을 자신의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신은 예수님의 종일 따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약1:1). 더욱이 흩어진 믿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의 주님 곧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외모로 취함 안에서 가지지 말라.(직역)"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헬라어원문은 예수님을 외모로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충고의 말씀이다. 자기도 약25~28년동안 예수님을 외모로만 보았기에 그를 메시야야 나타난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이상 자기처럼 예수님을 외모로만 잘못보아 의심하고 무시했던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이다.

  그후 야고보는 어떻게 살았는가? 그는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시어 한 일을 증거하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얻도록 돕는 일에 드린다. 그러니 베드로가 빈 자리였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을 크게 전도하여 예루살렘교회로 하여금 수만명이 되게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8. 나오며

  그렇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가난한 청년이자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게 자신의 전생애를 기꺼이 바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야고보처럼 그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가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데에 전 생애를 바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직장생활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야고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가 되어 오시어 한 일을 증거하여 다른 사람도 구원얻게 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나중에는 하늘에 있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자가 되어있을 것이다(약1:12).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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