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 보통 '요한계시록'하면 장차 되어질 일이 기록된 책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좀 더 들여다보면,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려주는 최종 계시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시다. 과거에 사람이셨던 분이시다. 고로 예수님은 신성에 관한 칭호와 인성에 관한 칭호를 모두 다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천상에서 예수께서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을까? 요한계시록에서 그분을 칭하는 마지막 칭호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그분에 관하여 칭호 한 가지만을 고르라면 우리는 어떤 칭호를 고르는 것이 선택해야 하는가?

 

2022-06-05(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의기독론(30)[최종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30)(계22:20~21)_2022-06-05(주일)

https://youtu.be/mUao2GcYn2s  [혹은 https://tv.naver.com/v/27207834 ]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누구신가?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질문 중의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만큼 우리도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요,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가 살아낸 만큼 저 천국에서 우리의 지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을 제대로 믿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주는 가장 훌륭한 성경(교본)을 하나를 고르라면 우리는 단연코 요한계시록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늦게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구약의 모든 계시의 완성으로 주어진 결론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기독론에 관한 연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에 관하여 거의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요한계시록의 기독론의 마지막 시간으로서 총 정리의 시간을 가짐과 동시에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은 한 마디로 어떤 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신성한 칭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에 관한 신성한 칭호들도 있고, 인성에 관한 칭호들도 있다. 그중에서 신성에 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칭호들을 종합해 보면,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신성한 칭호로서 자신을 맨 처음에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계1:17)"고 말씀하셨는데, 맨 나중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예수님의 칭호가 구약시대에는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칭호로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사41:4, 44:6, 48:12). 그러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실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바로 그분이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8에서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누구신가? 그분은 '주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이'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올 자"라고 말씀하셨다(계1:4,8,4:8). 그런데 이분은 진정 누구신가? 우리는 이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일곱째 나팔과 함께 ㅊ너국에서 공중하늘로 오신 예수께서 자신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신 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계11:17, 16:2). 이때 공중하늘로 오신 그분은 "인자같은 이"라고 표현되어 있다(계14:14). 그런데 요한계시록 1:13의 말씀을 보면, "인자같은 이"는 예수님으로서, 자신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신 이이시다(계1:17).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을 '보좌에 앉으신 이"라고 하심으로 그분이 주 하나님 자신인 것을 드러내셨다(계3:21, 20:11~12).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라고도 하셨다(계1:18, 11:15). 그리고 이어서 그분은 자신을 '창조의 근본(시작)이신 이'라고도 하셨다(계3:14). 또한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이 땅에 보낸 성령을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감찰하시는 전지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다(2:18, 23, 5:6).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바쳐진 동일한 경배와 찬양을 그대로 받고 계신다(계5:12~14). 고로 우리는 그분에게 불려진 칭호들을 종합해 볼 때에 예수님은 바로 '한 분 하나님'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3.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있는 예수님의 인성의 칭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렇지만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한 때는 사람이었던 존재였음을 분명히 밝히셨으니, 그의 칭호들 속에서 우리는 그분이 과거 인성을 취하셨던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원래는 '다윗의 뿌리'이셨지만(계22:16), 그분은 '유다지파의 사자'이자(계5:5) '다윗의 자손'으로서(계5:5,22:16)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아기'이자 동시에 '아들'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계12:2,5). 그리고 그분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는, '그리스도'라는 3중의 직책을 수행하셨으며(계1:1,2,5, 11:15, 12:10, 20:4, 20:6), 인류를 위한 대속제사를 위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었고(계5:6,7,8,13...총30회),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계11:8). 그것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인자(사람의 아들)'로 오셨기에(계1:13,14:14)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되실 수가 있으셨다(1:18). 그분은 또한 그리스도로서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가 되셨으며(17:14,19:16), 그분은 '목자'이기도 하신다(계7:17). 그리고 그분은 인간으로 오셔서 성실하게 사셨기에 아버지에게 대하여 자신을 "충성되고 신실한 이"라고 표현하실 수 있었다(1:5). 또한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이 땅에 아들로 보내어졌기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셨다(계2:18).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한 때에 인성을 취하실 분이지 지금도 인간이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때 인성을 취하셨다는 측면에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이 누군지는 한 마디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은 한 마디로 어떤 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주[님]"(퀴리오스)이라는 칭호로 정의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왜냐하면 주님이라는 칭호는 그분이 인성을 취하실 때에도 불려진 칭호이지만, 지금 천국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칭호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이라는 칭호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사람들과 제자들이 먼저 불렀던 칭호였다. 그때 '주님'이라는 칭호는 그것이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선생님'이나 혹은 '위대한 선지자'와 같은 의미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공생애를 살고 계실 때에 사람들과 제자들이 불렀던 칭호를 보면, 그분은 "주님", "랍비", '선생님",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등으로 불리셨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만물로부터 '주님'이라는 칭호를 기꺼이 받고 계신다. 

 

5.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주님'이라는 칭호는 어떤 칭호인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주님'이라는 칭호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칭호였을까? 요한계시록을 보면, '주님'이라는 칭호는 다음과 같은 3가지 대상에게 사용되었다.

  첫째는 '한 분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때 '주님'이라는 칭호는 '하나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동시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주 하나님"(11회)(계1:8, 4:8, 4:11, 11:17, 15:3, 16:7, 18:8, 19:6, 21:22, 22:5, 22:6)이라고 불리셨다. 그리고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7회)(계1:8, 4:8, 11:17, 15:3, 16:7, 19:6, 21:22) 혹은 "주 하나님이 전능하신 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2회)(계1:8, 4:8) 라고 사용되기도 하였다. 둘째로, '주님'이라는 칭호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계11:4). 이것은 구약의 말씀인 스가랴서를 인용하여서 그렇다(슥4:14). 마지막으로 셋째, 그것은 순수하게 우리 주 예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총 6번에 걸쳐서 나온다(계1:10, 11:8, 14:13, 17:14, 22:20, 22:21).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는 '주님'이라는 칭호는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이라는 용어는 사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동격의 칭호라고 정의할 수 있다. '주님'이라는 말과 '하나님'이라는 말이 사실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요한복음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20;28)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나의'라는 소유격을 빼버린다면,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이는 '주님'이라는 칭호가 곧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대신하는 동격의 칭호라는 것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제자들이 '주님'이라고 불렀던 분을 이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편, 요한계시록의 맨 마지막 부분에 가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주 예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20-21)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도 요한은 맨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 "주님'이라는 용어를 붙여서 사용함으로써 그분이 곧 '주 하나님'이신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계22:16에서는 예수님께서 손수 자신을 가리켜 "나 예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분이 구약시대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라는 것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라는 의미의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스스로 있는 자시요 그분만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6. 나오며

  우리는 장장 30번의 시간을 통하여,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살펴보았다. 처음에 그분은 흰 머리를 가지시고 흰 옷을 입으신 분으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다. 그것은 다니엘이 보았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단7:9). 하지만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 나타나신 것이며, 신약시대에는 아들로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하늘로 되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지금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는 바로 예수께서 앉아계신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한 분 하나님의 보좌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불렀다(계22:1,3). 예수께서는 원래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다가 우리를 위해 사람으로 오셨으며, 다시 하늘로 되돌아가신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경륜을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으로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칭호가 아니며,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칭호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차 오실 이'로 표현된 하나님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계11:17, 16:5). 영국의 신약학자 리차드 보컴(보쿰) 교수는 그의 저서 "요한계시록 신학"(한들출판사, 2000)이라는 책에서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보컴 교수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였다. "그리스도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요, 예수님이 통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앉으시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이 곧 주 하나님이신 것이다. 할렐루야! 

 

2022년 06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14)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1)(행9:20~22)_2020-08-04(화)

https://youtu.be/SEGyfJxPIxU  [혹은  https://tv.naver.com/v/15106834 ]

 

1.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나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게 해주는 다른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대체 어떤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그것은 2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바른 믿음과 예수께서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를 구원을 받게 됩니다. 

 

2.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하나요?

  사람이 구원얻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도 2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그 그리스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혹 누군가 예수님에 대한 이 두 가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음부의 문들도 그를 결코 이기지(우세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지금도 지구 깊숙한 곳 음부에서는 불이 타고 있는데, 이 지상에는 저 음부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문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들은 지금도 죽은 영혼들을 빨아당기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받지 못하고 죽었다면 즉시 음부는 그 영혼을 빨아당길 것입니다. 

 

3.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나요?

  예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딤전2:6).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마20:28, 막10:45). 고로 사람이 구원얻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후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혹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곧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죽고 나서도 자기 죄로 죽지 아니하고 인류를 위하여 대신 죽었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3일만에 약속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곧 예수의 부활은 그분이 자신의 죄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주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4.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 가운데 첫번째로 그분이 "바로 그 그리스도"라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어야 하나요?

  예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바로 그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라 함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구원자로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 곧 "오실 그이"를 지칭합니다. 이분은 구약시대 무려 4,000년동안 약 350가지 이상 미리 약속되어졌는데,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자기가 그리스도이니 자기를 믿으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미리 350가지 이상 예언된 대로 오셔서 그 일을 이루셔야 바로 그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렇게 오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혈통과 그분의 공생애(그분의 출생, 메시야로서의 삶,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에 대한 구약의 예언처럼 예수께서 오셨으며 또한 사셨음을 신약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 가운데 두번째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어떻게 알려졌나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은 그분은 단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만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서 태어나신 분으로서, 그분은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실 모든 생명체는 같은 종류가 있습니다. 사자의 새끼는 사자의 종류이며, 독수리의 새끼는 독수리의 종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종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놀라운 선언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구약시대에 살았던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로 오셔서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성경을 꿰뚫고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 그 누구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자, 대제사장은 공회를 열어 예수께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를 확인합니다. 이때 예수께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옷을 찢으면서 그가 신성모독죄(참람죄)를 지었으니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 했습니다(막14:61~64, 요19:7). 그처럼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두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사복음서에 보면, 그분이 기도하는 장면이 가끔씩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꼭 "아버지여"라고 호칭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칭찬하실 때에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마11:25)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에도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에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해 주옵소서...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12:27~28)라고 기도하셨으며, 마가다락방에서 성만찬을 마치시고 나서는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리셨는데, 그때에는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요17:1),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께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당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요17:11), "아버지여, 당신이 내 안에 내가 당신 안에 있는 것 같이.."(요17:21),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요17:24),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당신을 알지 못하여도 나는 당신을 알았사옵고..."(요17:25),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을 때에는 "압바 아버지여, 당신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항상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칭하셨고, 더 친밀한 호칭이었던 "압바"라는 명칭도 사용하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마가다락방에 드린 최종 기도에서 예수께서는 3년반동안 제자들이 비로소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과 "아버지께서 그를 보낸 것"을 알고 믿게 되었다면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요17:7~8).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인류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태어나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자, 하나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처녀인 마리아에게 보내어 그녀를 통하여 태어날 분은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입니다(눅1:32,35). 그럼 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늘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내일 이 시간에 나누겠습니다. 

 

2020년 08월 04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마2:9~12)_2019-12-26(목)

https://youtu.be/_mZ6j7tbnqc

 

1. 멀리서 아기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절하며 드린 예물들은 무엇이었나요?(마2:12)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2. 동방박사들이 드린 "황금와 유향과 몰약"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동방박사들이 드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우선 비싼 예물들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헐값에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당시 현물로서 매우 비싸게 거래되는 것들이었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대표적인 무역상품이었으며, 귀족들의 소유물이었습니다.

 

3.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은 무엇을 말해주나요?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은 그들이 아기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느냐를 말해줍니다. 그러므모 그들이 아기예수님을 인류를 구원할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아기예수님께 천하고 흔한 것을 바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친 예물들은 아기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기대와 존경심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드린 예물은 그들이 왜 3,200km나 되는 먼 거리를 목숨 걸고 달려왔는지를 알려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아기예수를 귀한 분으로 여겼다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4.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요?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야기는 결코 헛되거나 우연한 것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를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쳤던 예물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해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또한 그분이 어떠한 삶을 사실 것인지를 암시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쳐진 예물이 예사롭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첫째, '황금'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최고의 권위자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 느부갓네살왕이 꿈으로 보았던 금신상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다니엘이 해석해 준 바에 따르면,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었는데 이는 느부갓네살왕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단2:32,38). 그리고 은으로 된 가슴과 두 팔이 보였는데 이는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철과 진흙으로 된 발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로, 구약시대의 관점에서 동방박사들이 바친 '황금'은 그들이 왕의 탄생을 축하하러 왔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유향'은 흰 색의 향기나는 고급향품인데, 이는 성소에서 사르는 향의 재료(출30:34)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릴 소제제사에 들어가는 향품으로 쓰였습니다(레2:1). 그래서 유향은 거룩한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비록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기는 하셨지만 그분의 인생은 부패나는 우리 인생과는 달리 거룩하고 순결하신 분이시자 그러한 삶을 사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셋째, '몰약'은 시체에 부패방지와 냄새제거를 위해 사용하는 고급 향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속죄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어 죽기 위함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동방박사들이 떠나오기 전부터 준비했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그분을 최고의 왕이시자 죄없고 흠없는 순결한 분으로 대접해드리고,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신 고귀한 희생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5. 오늘 우리가 바치는 헌금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나요?

  사실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께 바친 예물은 아기예수를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고로 만약 동방박사들이 그때 흔하고 값싼 것을 예물로 예수께 바쳤다면, 그들의 예물은 아기예수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아기예수를 그 정도로 취급하면서 목숨을 내건 머나먼 순례길을 그들이 스스로 선택했을리가 만무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예물은 어떠해야 합니까? 그것은 곧 자기자신의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고 있느냐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일예물이라고 할지라도 좀 더 정성과 최선을 다해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을 어떻게 믿고 있느냐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2019년 12월 26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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