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8) 예수께서 제4표적과 제5표적을 행하신 이유와 그 영적인 의미(요6:1~3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6KsFAZXxxqY  [혹은 https://tv.naver.com/v/30623657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 중에서 사도 요한은 표적이라고 불릴 만한 7개의 기적을 요한복음에 수록해 놓았다.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바, 전반부는 예수님의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고(1~12장), 후반부는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13~21장). 전반부는 보통 '표적의 책'이라고 부르며, 후반부는 보통 '영광의 책'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표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7가지 표적들 가운데 포함시켰으며 또한 이것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진정 '표적'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며, 오늘 다루게 될 2가지 표적들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표적들인가? 

 

2.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4표적과 제5표적을 보는 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6장 1~15절과 16~21절에서 7가지 표적 가운데, 네 번째 표적과 다섯 번째 표적을 수록하였다. 이들 중에서 네 번째 표적은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 불린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실 공관복음서에도 공히 기록되어 있는 표적에 해당한다. 그런데 원래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인데, 왜 네 번째 표적으로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요한복음에도 기록된 것인가? 그리고 다섯 번째 표적으로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마태복음과 그리고 마가복음에도 등장하고 있는가? 왜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도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요한복음에 수록해야 했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 두 가지 기적이 '표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표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기적일 때에 붙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고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그분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는 놀라운 표적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요한복음에 수록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것과는 성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는 단지 예수께서 이런 기적들을 행하셨다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기적들을 표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공관복음서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기적들이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3.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떤 관점으로 기록된 것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어떠한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는가? 우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관복음에서는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수께서 빈 들에서 행하셨던 음식의 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서 성인 남자만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공관복음서를 가지고 설교할 때에는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을 우리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를 다룬다. 그리고 설교할 때에는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구체적인 기사를 공관복음 설교에 가져다 쓴다. 그래서 빌립처럼 저녁 식사 비용이 얼마나 될 것인지를 계산만 하지 말고, 안드레처럼 예수님께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를 갖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래서 그 작은 헌신이 결국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져다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게 되면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건축을 하려 할 때에도 계산을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 작은 마중물이라도 주께 드리게 되면 그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러한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왜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건 2가지다. 첫째는 그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있을 때에 만나를 내려 주셨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 만나 곧 생명의 떡이라는 것까지 말해 준다. 사실 오병이어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저녁을 먹게 할 수는 없다. 당시 빌립은 200 데나리온 어치 떡을 구입한다고 할지라도 2만 명의 군중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왜냐하면 200 데나리온으로 떡을 구입했을 경우 약 6,000명 정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병이어로 계속해서 창조의 기적을 행하시는 방법 이외에는 불가능한 것인데, 예수께서 그렇게 행하셨으니 예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 요지다. 그리고 둘째, 그분이 왜 이러한 기적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려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영혼의 필요 곧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육신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필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분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그 옛날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과 구주로 붙들어서 하늘의 참 생명을 얻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내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생명을 주는 자이며,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표적만 추구하는 표적주의 신앙의 끝은 어떠한 것인가?

  그런데 당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한 끼의 저녁 식사를 해결했던 군중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예수께서는 당시 수많은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그들의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계속해서 자신의 먹을거리를 책임져 달라는 것이었다(30~34절). 마치 모세가 매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었던 것 같이, 이제는 예수께서 모세가 되셔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거리를 계속 제공해 달라고 한 것이다. 당시는 못 먹고 못 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람의 영혼에 생명을 공급해 주시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러한 혜택을 계속해서 제공받게끔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15절). 그들에게 예수님만큼 좋은 지도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즉시 그 자리를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배고픈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백성들의 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유월절 전날 밤, 빌라도의 심문을 받을 때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왕이기는 하지만 어떤 왕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벳새다에서 가버나움까지 쫓아온 이유는 진정 자기들의 영혼에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던 것이다(26절). 

 

5.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보통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제자들이 바다를 노저어 가다가 풍랑을 만난 뒤, 배가 뒤집혀질 위기에 처하자, 예수께서 그들을 살려 주시려고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들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건져 주신다는 것으로 설교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다섯 번째 표적으로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목적이 공관복음이 말하고 있는 목적과는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당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자기 육신의 필요를 채워 줄 적임자로 알고 따라다녔기 때문에, 제자들만큼은 자신의 스승이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을 배고픔에서 건져 주실 분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이 믿고 따라갈 예수님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이 표적을 기록한 것이다. 즉 그들이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은 다름 아닌 천지 만물의 창조주로서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일부러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도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하여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나니'라는 말은 '에고 에이미'라는 문장으로서, "나 자신은 나다." 혹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 보이는 아주 특별한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표현으로 계속 등장한다. 또한 그때 제자들이 떨었던 것은 그들이 바람과 파도 때문에 떨었던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눈으로 목도함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버나움까지 쫓아왔던 군중들이 다 떠나가는 그 순간에도 제자들은 떠나가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또한 이 땅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를 이 사건을 통해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만큼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분 곁에 남아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신 바 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8~69)" 그렇다. 이러한 대답은 제자들만큼은 여타의 군중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당시 군중들에게 어떤 권면의 말씀을 하셨는가?

  그때 군중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주님을 찾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산 위로 올라가셨고, 제자들은 밤에 배타고 가버나움으로 갔는데, 예수께서 보이지 않게 되자, 다음날 그들도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쫓아간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째로, 이제는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다(27절). 또한 그 양식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사실 그때 군중들은 왜 가버나움까지 쫓아왔는가? 그것은 먹으면 소화되어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먹으면 썩어 없어질 한 끼의 식량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육신의 양식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든지 채워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결국 주님께서 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왜 예수께서 그들의 곁을 떠나셔야 했는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 보내셨던 자신을 믿어서 영생을 얻으라고 권면하셨다(28~29절). 그들은 그때까지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일시적인 혜택을 맛보는 것일 뿐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혜택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모세가 만나를 매일 내려 준 것처럼 예수께서도 자기들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 아니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교정해 주었으며, 하나님의 떡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알려 주셨다. 

 

7. 나오며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이다. 왜냐하면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의 표적들 가운데서 일곱 가지 기적만을 따로 모아 요한복음에 수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에서는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한 일곱 가지 표적을 만나게 된다. 그래야만이 독자들이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며, 그분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표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자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뚜렷이 증거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눠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볼 때에, 예수님이 보는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벳새다의 빈 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과 같이,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을 알라고 일으킨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어떤 목적으로 주님을 찾든지 그가 진정 예수님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하늘의 참된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다. 결코 썩어 없어질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만 주님을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로서 교회에서 바라고 소망할 것은 교회가 무슨 먹을거리를 주지는 않나가 관심거리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의 영혼에 필요한 생명과도 같은 말씀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시간 한 시간 떼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고로 이제는 내가 교회에서 과연 생명을 공급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09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회개(13)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03) 사람의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요16:7~9)_2020-12-07(월)

https://youtu.be/6OFDHBKDLYQ  [혹은 https://tv.naver.com/v/17069110  ]

 

1. 주의 천사가 나타나 알려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가장 큰 기쁜 소식은?(눅2:10~11)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유대땅 베들레헴(다윗의 동네)에 "구주(구원자)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천사는 그분이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그리스도)이시며, "주님"(아도나이)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에 350가지 이상 약속된 메시야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소식이야말로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눅2:10-12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2. 이 세상에 구주(구원자)로 오실 분에 대해 B.C.730년경 이사야선지자는 어떻게 예언했나요?(사9:6)

  이 세상에 탄생할 구주(구원자)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렇습니다. 이사야선지자는 말하기를 "그분은 장차 한 아기로 태어나실 것인데, 아들로 오실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어깨에는 통치권이 있고 그분은 그의 이름을 위대한 보혜사요, 강한 하나님이요, 영원한 아버지이며, 평강의 통치자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3.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요?

  그럼, 사람이 짓는 가장 큰 죄는 대체 어떤 죄일까요? 그것은 우상숭배의 죄일까요? 아니면 살인죄일까요? 그와같은 죄들도 사실 심각한 죄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크고 근원적인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7)."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믿지 않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이미 2천년전경 유대땅에서 일어났으며, 벌써 2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 이 놀라운 소식을 듣지 못한 이들이 아직도 있으며, 또한 그 소식을 듣고도 그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가장 먼저는 자기 가족부터 전해주어야 하고 친구와 이웃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행1:8, 행16:31). 왜냐하면 아무리 놀라운 소식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자는 그 혜택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4.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오늘날에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당시 예수님을 가장 근거리에서 지켜보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야(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도 대단한 고백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영이 없었다면 결코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바요나(요나의 아들=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일지라도 실제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계시를 받지 못했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사도바울의 기도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늘 기도해야겠습니다. 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해야겠지만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예수님은  진정 누구신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진정 누구신가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은 구원자요, 메시야(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분은 "주님이자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습니다(요20:28).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온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공생애 기간에는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었으니 누가 그것을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인간이 고백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정도가 아닌 분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니,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 곧 "나는~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그분으로,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8:24,28,58).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았던 당시 유대인들일지라도 그들 대부분은 다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8:21-24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여기에 나오는 "내가 그인 줄"이라는 말씀은 그분이 바로 출3:14에 나오는 "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8장에 보면,여호와께서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때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내년 이 맘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아브라함에게 정말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고로, 그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아들로 오신다는 것일 실행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까지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만해도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지만 그분이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으며,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은 잘 모릅니다(딤전3:16). 지금도 믿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이 처음과 마지막이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계1:8, 22:13). 그런데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당시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께서 가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 죄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2020년 12월 07일(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14)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1)(행9:20~22)_2020-08-04(화)

https://youtu.be/SEGyfJxPIxU  [혹은  https://tv.naver.com/v/15106834 ]

 

1.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나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게 해주는 다른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대체 어떤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그것은 2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바른 믿음과 예수께서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를 구원을 받게 됩니다. 

 

2.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하나요?

  사람이 구원얻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도 2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그 그리스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혹 누군가 예수님에 대한 이 두 가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음부의 문들도 그를 결코 이기지(우세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지금도 지구 깊숙한 곳 음부에서는 불이 타고 있는데, 이 지상에는 저 음부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문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들은 지금도 죽은 영혼들을 빨아당기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받지 못하고 죽었다면 즉시 음부는 그 영혼을 빨아당길 것입니다. 

 

3.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나요?

  예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딤전2:6).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마20:28, 막10:45). 고로 사람이 구원얻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후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혹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곧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죽고 나서도 자기 죄로 죽지 아니하고 인류를 위하여 대신 죽었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3일만에 약속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곧 예수의 부활은 그분이 자신의 죄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주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4.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 가운데 첫번째로 그분이 "바로 그 그리스도"라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어야 하나요?

  예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바로 그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라 함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구원자로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 곧 "오실 그이"를 지칭합니다. 이분은 구약시대 무려 4,000년동안 약 350가지 이상 미리 약속되어졌는데,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자기가 그리스도이니 자기를 믿으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미리 350가지 이상 예언된 대로 오셔서 그 일을 이루셔야 바로 그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렇게 오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혈통과 그분의 공생애(그분의 출생, 메시야로서의 삶,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에 대한 구약의 예언처럼 예수께서 오셨으며 또한 사셨음을 신약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 가운데 두번째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어떻게 알려졌나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은 그분은 단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만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서 태어나신 분으로서, 그분은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실 모든 생명체는 같은 종류가 있습니다. 사자의 새끼는 사자의 종류이며, 독수리의 새끼는 독수리의 종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종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놀라운 선언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구약시대에 살았던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로 오셔서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성경을 꿰뚫고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 그 누구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자, 대제사장은 공회를 열어 예수께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를 확인합니다. 이때 예수께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옷을 찢으면서 그가 신성모독죄(참람죄)를 지었으니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 했습니다(막14:61~64, 요19:7). 그처럼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두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사복음서에 보면, 그분이 기도하는 장면이 가끔씩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꼭 "아버지여"라고 호칭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칭찬하실 때에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마11:25)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에도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에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해 주옵소서...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12:27~28)라고 기도하셨으며, 마가다락방에서 성만찬을 마치시고 나서는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리셨는데, 그때에는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요17:1),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께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당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요17:11), "아버지여, 당신이 내 안에 내가 당신 안에 있는 것 같이.."(요17:21),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요17:24),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당신을 알지 못하여도 나는 당신을 알았사옵고..."(요17:25),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을 때에는 "압바 아버지여, 당신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항상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칭하셨고, 더 친밀한 호칭이었던 "압바"라는 명칭도 사용하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마가다락방에 드린 최종 기도에서 예수께서는 3년반동안 제자들이 비로소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과 "아버지께서 그를 보낸 것"을 알고 믿게 되었다면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요17:7~8).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인류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태어나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자, 하나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처녀인 마리아에게 보내어 그녀를 통하여 태어날 분은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입니다(눅1:32,35). 그럼 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늘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내일 이 시간에 나누겠습니다. 

 

2020년 08월 04일(화)

정병진목사

20183월 특별새벽집회

주제:“다시 회개와 믿음으로!”

 

[제목]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찬송]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말씀] 요한복음 14:1~7(신약 171)

2018.3.2()

 

1.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오늘도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구원얻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다(딤후4:18). 물론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되면 건강도 얻고 지혜도 얻으며, 기도하여 응답도 받을 뿐만 아니라, 저주도 벗어나게 되고 가난과 질병도 이기게 되며, 귀신들의 공격까지도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신앙생활하는 가장 큰 목적은 역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확고히 붙잡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신앙의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려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다(1:15). 그러나 한 때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에 취해, 그만 회개의 중요성을 빠뜨리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잘못 포장하게 되었고, 회개하지 않아도 만세전 예정에 따라 구원받는다고까지 착각하고 되었다. 그렇다면 구원의 요소를 오직 믿음하나만 알고 믿었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타락과 도덕적인 타락을 가져왔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한국교계를 바라보게 되면 부패한 냄새가 하늘을 찌른다. 오늘날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를 일삼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믿는 자들마저 불신자처럼 돈과 명예와 인기를 성공이라고 추구하다보니, 교회는 마치 세상성공을 위한 교습소가 되어버렸고,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니 음란까지 치고 들어와 어디 성한 곳이 하나 없다. 어찌할 것인가? 이제는 회개해야 한다. 지은 죄를 회개하여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2.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그래서 어제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말씀을 살펴보았다. 사람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 것인가? 사람이 회개할 것은 사실 2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율법을 어긴 언행들 곧 자범죄들을 회개해야 한다. 이것들을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 그리고 둘째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음성을 외면한 것으로부터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 이때 성령께서 오셔서 행하시는 일은 2가지다. 하나는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증언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를 책망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15:26,16:9).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여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14:26, 16:13). 그래서 우리를 무지와 거짓으로부터 탈출하도록 도와주신다. 이러한 일들 중에는 우리가 현재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결국 진리를 떠나 사탄마귀를 좇다가 지옥에 떨어질 것들이 있다. 이러한 죄들로는 요한계시록 2~3장에 잘 나와 있으니, 첫째가는 첫사랑을 버린 죄,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으며 음행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거짓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수용한 죄, 회개도 않고 행함의 열매도 없는데도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은 죄, 물질적으로는 부요하지만 영적으로는 비참하고 가련한 상태에 있는데도 부자로 착각하며 산 죄 등이다. 사실 믿는 자들이 초기에는 율법을 어긴 죄들을 회개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이 누군지를 발견하여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게 된다. 하나님의 크신 희생과 사랑을 외면한 채 자기 고집대로 살아온 것이 드디어 죄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계2~3장에 나오듯,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못한 것들,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하지 않은 것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은 배은망덕함, 잘못된 가르침인 것을 알면서도 쉽게 믿고 편하게 믿고자 분별하지 아니함 등에 대해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되 죽을 때까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죽을 때에 회개한 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3.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이처럼 우리 믿는 이들에게 회개는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회개만 해서는 구원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죄들을 씻어줄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며, 믿을 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생명을 받아야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와 더불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곧 믿음이다. 하나님이 인류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아무리 열심히 회개해 봐도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구원(죄사함과 생명수여)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믿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이요, 또 하나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데 두 번째의 경우의 믿음은 보편적으로 믿는 자라면 다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흠없는 피만이 죄를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9:22).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피흘려 인류의 죄를 속죄할 것이라는 예표는 계속되어 왔으니, 유월절 양, 속죄제사법,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 고난받는 메시야(53) 등은 대표적인 그 예들이다.

문제는 예수께서 누구시냐를 믿는 믿음에서 차이가 난다. 오늘날에 믿는 자들의 경우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이 그리 선명하지 않다. 단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 정도로만 믿고 있다(16:16).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축소된 채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도 약하다. 그러니 가난해진다거나 질병에 시달리게 되면 가난과 질병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되고, 어려운 일을 닥칠 때에 흔들리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이단에 빠지는 자들도 종종 발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있고 아버지가 있다고 하니, 어머니도 있다는 말에 홀딱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 착각하여 그녀를 신봉하는 천주교까지 생겨난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가르쳐준다.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떠날 기약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신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 그리고 주님이 보내주실 성령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성령님을 알고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때에 비로소 자유와 기쁨과 해방과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그 어떤 심판도 받지 아니하고(5:24), 영원히 죽지도 않는 영생을 가지게 되며(11:25~26, 3:16,36,5:24,6:40), 하나님의 자녀도 되고(1:12), 보혜사 성령도 받기 때문이다(7:39). 고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만을 믿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12:45)”이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14:9~10)”이라 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12:44)”이며,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13:20)”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14:9)”이라고 하셨고, “너희가 들은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14:24)”이며, “나를 미워하는 것은 나와 내 아버지를 미워한 것(15:22,24)”이고,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8:19)”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은 비록 아기이자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기묘자인 모사(보혜사)였던 것이다(9:6). 그러므로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피이며,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피를 하나님의 피라고 말해서는 아니 되며,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말해서도 아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가 없고,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아들이신 예수께서 피흘리셨으며, 예수께서 죽으셨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는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그 모든 일들을 다 행하신 것이다.

 

4. 나오며

그렇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우리가 아버지의 집(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자 보이지 않는 것의 실제다(14:6).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그분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성령을 보내실 때에 당신의 생명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분배해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가 흘린 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으며(요일1:7), 우리 안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들어오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 곧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어도(요일5:19), 마귀는 우리를 절대 만지지도 못한다(요일5:18).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이 세상에 있는 이보다 더 크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일4:4). 예수 그분,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시오, 지금 이 땅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인 것이다. 그분만을 찬양하며, 그분만을 높여드리자, 그리고 이제는 어떤 일이 닥쳐와도 그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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