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26) 천상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다(01)(계11:15)_2022-05-31(화)

https://youtu.be/RiLxLsOvPLc  [혹은 https://tv.naver.com/v/27082945 ]

 

1.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기본적으로는 "주"(계22:20,21), "예수"(22:16,22:20,21), "그리스도"(1:1,2,5, 11:15, 12:10, 20:4,6), "하나님의 아들"(계2:18),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5:6,9,12), "유다 지파의 사자"(계5:5), "다윗의 뿌리이자 자손"(계5:5,22:16), "광명한 새벽별"(계22:16), "만왕의 왕, 만주의 주"(17:14,19:16), "목자"(7:17) 등이 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한 신성한 표현도 있다. 그러한 표현으로는 "주 하나님"(계1:8), "전능하신 이"(계1:8), "장차 오실 이"(계1:8), "처음이요 마지막"(계1:17), "알파와 오메가"(계22:13), "시작과 마침"(계22:13),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계1:18), "보좌에 앉으신 이"(계20:11), "인자같은 이"(1:13) 등이 있다. 

 

2.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몇 번 나오는가?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아래와 같이 총 7번 나온다(계1:1,2,5, 1:15, 12:10, 20:4, 20:6).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2가지 용례로만 쓰였다. 첫째로는, '예수'라는 이름과 더불어 3번 사용되었다(계1:1,2,5). 그리고 둘째로는, 그분의 직무와 더불어 4번 사용되었다는 것이다(계11:15, 12:10, 20:4, 20:6). 참고로 '예수'라는 명칭은 총 12번 나온다. 

계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원문은 '그의')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3.  '그리스도'는 대체 무엇을 뜻하는 단어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라는 말은 그리스도이신 그분의 이름을 뜻한다(마1:21).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뜻하는 명칭인가? 그것은 그분이 행하시는 직무를 뜻하는 명칭이다. 사실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구약의 '메시야(마쉬아흐)"라는 명사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요1:41). 그렇다면 '마쉬아흐'는 단어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기름붓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마샤흐'에서 온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마쉬아흐'라는 표현을 한글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번역하고 있는 말씀이 나온다. 시편2:2의 말씀이다.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마쉬아흐)'를 대적하며 

  그렇다.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가지신 어떤 직무를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기름부음을 받아서 수행하는 어떤 직무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당연히 기름부음을 받아서 사역을 감당하셔야 했다(눅4:18). 그런데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구약 시대에 보니,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어떤 직무를 맡기신 3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첫째는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어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부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신 것이다. 둘째는 '왕'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이 되려는 자에게도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지자'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 중에 직접 기름부음을 받고 선지자가 된 자는 오직 한 사람 뿐이다. 그는 사밧의 아들 '엘리사' 뿐이다(왕상19:16). 나머지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고로 구약 시대에 기름부음을 받아서 거룩한 직무를 수행한 자들로는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이러한 3가지 직무를 수행하셨다. 

 

4.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직무는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기름부어 세우라고 하셨던 3가지 직무들 중에서 어떤 직무를 지금도 여전히 수행하고 계실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왕'의 직무 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천국에서 왕의 직무 외에는 제사장의 직무나 선지자의 직무가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필요 없게 되었는가? 첫째로, '제사장'의 직무다. 그리고 제사장의 직무 가운데 가장 큰 직무는 제사 드리는 일을 집례하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수행해야 했던 직무였다. 이윽고 예수께서는 그 직무를 다 끝내시고 하늘로 가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늘에서 더 이상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으신다. 둘째로, '선지자'의 직무다. 선지자의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 주요한 일인데, 이러한 직무 역시 예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만 필요했던 직무였다.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말씀하신다. 또한 천국에서는 무엇인가를 공부하지 않아도 다 아는 곳이다. 저분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 알아버린다. 그곳이 천국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제사장의 직무와 선지자의 직무를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왕직만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5. 천국에서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같은 분인가 아니면 다른 분인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분이 서로 같은 분인지 다른 분인지를 분명하게 계시한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시다(계22:20,2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것은 곧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과 같다. 영국의 대신학자 리차드 보컴 교수는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의 책 "요한계시록 신학"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공유하고 계신다고 하면서, 그분이 행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고 하였다. 즉 예수께서 통치하는 것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이요, 예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보좌에 앉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과 천사들과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린양에게 유일한 하나님에게 바치는 찬송과 경배를 동일하게 바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세상의 왕국이 이제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셨다는 음성이었고, 그가 장차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계11:15). 만약 주님과 그리스도가 각각 다른 분이라면, "그가 장차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표현하지 말고, "그분들이 장차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노랫소리는 주어요 3인칭 단수다. 그분이 왕 노릇하는 것이다. 이 때 그분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고 예수께서 왕 노릇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는 것이기에, 하늘에서 나는 음성은 "그가 장차 왕 노릇할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 예수께서는 장차 우리도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게 되는가? 그것은 지상에서 예수께서 왕 노릇했던 것처럼 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어떻게 왕 노릇했는가? 그것은 귀신들을 지배하고 다스림으로 왕 노릇하셨다(마12:28). 그러므로 우리도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려면 이 지상에 있을 때에 예수님처럼 귀신들을 내쫓아야 한다. 천국에서 얻게 될 지위는 이 지상에서 얼마나 왕 노릇하는 자가 되었느냐고 판단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31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9)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셨던 한 분 하나님이시다(1)(계1:4~7)_2022-05-20(금)

https://youtu.be/MkQ-uO2JXNk  [혹은 https://tv.naver.com/v/26940566 ]

 

1.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장의 서두의 인사말(계1:4~6)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소개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사실 계시의 책이자 묵시의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예언의 책이자 또한 편지의 책이다. 그러므로 형식으로 보면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은 바로 요한계시록 1:4~6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누가 누구에게 편지하는지를 밝힌다. 그것은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요한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서로서,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때 요한은 성자 예수님이 누구시며 또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계1:4~6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2.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사도 요한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언뜻 보기에는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편지들을 쓸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사도 바울의 편지들과 다르다. 다른 이유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 첫째로, 사도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원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사용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표현도 사실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둘째, 요한이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순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성령'하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도 편지에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지만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있기만을 기원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편지의 인사말에 바울의 편지 속에는 결코 성령 하나님이 들어 있지 않는 데에 비해, 사도 요한의 편지인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3.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를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3~4에서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분의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표현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 관한 표현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 얼핏 보기에는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 관한 표현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다고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처음에 표현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것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장차 오실 이'는 분명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근거가 바로 7절에 나온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 이 말씀에 나오는 '그'는 분명 그 앞 구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표현인 것이지 성부에 대한 소개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이라는 표현도 성령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이 표현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어린양의 일곱 눈들'을 가리키며(계5:6), 구약 시대로 치자면 이 표현은 땅에 두루 돌아다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곱 눈들'을 가리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슥4:10). 다시 말해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자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모든 것들을 감찰하는 분이 곧 하나님이신을 것을 드러내 주고 있다. 

 

4. 요한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가 아니라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서로 말씀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로 말하지 않고 있다. 성자와 성령의 순서가 앞뒤가 서로 바뀐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성자에 대한 소개가 너무나 길어질 것 같으니까 먼저 간단하게 성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인 이유가 될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의 실제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시고 나타내시어 일하시는 순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홀로 창조하셨다(사44:24). 그분은 성자와 성령과 협의하거나 회의하지 않으시고, 홀로 하늘을 펼쳤으며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이 홀로 땅을 펼치셨다. 그리고 당신의 영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다시 4,000년이 지난 후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나 이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다(요16:27~28).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이지 처음부터 따로 있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다. 단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고로 요한계시록 1장의 서두 인사말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는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는데 그분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5.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3가지 신분을 가진 자이자, 3가지 활동을 하시고 계시는 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첫째, 그분은 세 가지 신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참된 증인'이자, '죽은 자들의 먼저 나신 이(첫 열매, 원형)'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시다. 둘째, 그분은 세 가지 활동가로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분'이자, '우리를 그분의 피 안에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던 이'이시다. 그리고 더불어 그분은 '우리를 왕국으로, 하나님이신 그의 아버지에게 제사장들로 만드신 이'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일은 현재의 일이며, 그분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은 실은 과거의 일이며, 더불어 우리를 왕국과 제사장들로 만들고 있는 일은 과거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것이며 그 일은 아마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을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과거에 인간이셨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만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기에, 그분이 인성을 취하실 때에 신성이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로 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예수님을 인성을 배재한 분으로 소개할 수 없으며, 또한 그분을 신성만을 가진 분으로도 소개할 수는 없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자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20일(금)

정병진목사

 

 

 

 

성도들은 세상의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으며 또한 악한 자 사탄마귀를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가? 그런데 사도 요한은 거듭난 성도들이 악한 사탄마귀를 이기는 것까지 목표를 두고 요한일서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래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기본적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세상과 마귀는 정복해야 한다는 것을 꼭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세상과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21-12-2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7) 세상과 그리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요건은 무엇인가?(요일5:4~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9oJxCxVEGRs [혹은 https://tv.naver.com/v/24416355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초신자용 양육교재와 비슷하며, 초기영지주의 이단예방을 위한 좋은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이 신앙의 기본요소를 갖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분과 교제하는 가운데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요한일서의 책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요한일서의 맨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성도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사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다. 이 말씀을 올바로 깨닫기 위해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의 의미와, 내가 생명을 자기고 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아무쪼록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세상과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 영적 싸움에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요한일서 5:4~21의 위치는?

  요한일서는 구분짓기가 상당히 어렵다. 왜냐하면 같은 주제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굳이 요한일서를 구분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일 처음 1~2장은 하나님과의 교제(코이노니아)라는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삶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놈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죄'라고 정의하고 그 죄는 오직 자백함으로 용서받을 서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결국에는 죄짓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은 자라도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면 그는 마귀에게 속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어서 3:1~4:6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적인 관점에서 성도의 합당한 신앙과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씨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4:7~5:3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4~21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도 요한은 이 부분에서 성도란 하나님께로부 난 자들인데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 자로서, 이들이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사용하여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신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시는 자는 사탄마귀도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승리하는 비결을 이 부분이 소개해주고 있는 것이다. 

 

3. 세상을 이기는 성도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도요한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을 몇 가지로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신앙의 성숙도를 알려주는 부분이 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을 칭하는 호칭을 통해 알려준다(요일2:12~14). 거기에 보면, 성도들에 관한 호칭이 3~4자기 정도가 나온다. 그것들은 '자녀들' 혹은 '아이들'이 있고, '청년들'과 '아비들'이 있다(요일2:12~14). 여기서 '자녀들'이란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버지가 누군지를 아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가 누군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태초부터 계신 이"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14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더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이라는 호칭이 등장하는데 이는 영적으로 강한 자들로서 영적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악한 자 곧 사탄마귀를 물리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란 어린아이의 단계를 넘어선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들 모두는 이미 회개하여 죄사함을 실천하고 있는 자들을 넘어서서 죄를 짓게 만드는 마귀 곧 악한 자 자체를 대적하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4. 성도들이 꼭 이겨야 할 2가지 대상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을 요한일서 5:4~21에서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언급한다. 그 중의 하나는 '세상'이고, 또 하나는 '악한 자' 곧 '사탄마귀'다. 무릇 성도라면 세상을 이겨야 하고 사탄마귀를 이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세상이나 혹은 마귀는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가? 그때 사용하는 무기이자 방편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바로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관하여서 요한일서 5:4~17절에서 언급을 하고, 이어서 악한 자 곧 사탄마귀를 이기는 믿음에 관하여서는 요한일서 5:18~21에서 언급을 한다. 

 

5. 어떤 성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도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어떻게 할 때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여기서에 언급된 '세상'이라는 단어는 이미 요한일서 2:16~17에서 말했던  바로 그 단어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지게 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즉 '세상'이란 하나님을 대적할 뿐더러 사탄마귀의 포로가 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이 세상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이 세상에 빠지는 것인가? 그것은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것들이 대단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에게 때로는 인기와 명예를 안겨주기도 하고, 칭찬과 부귀를 안겨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의 유혹을 잘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이 세상의 본질이 바로 사탄 마귀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놓여) 있다"고 말한다(요일5:19).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에 살더라도 어찌하든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성도는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고 또한 이길 수가 있는가? 그것에 대해 사도 요한은 오직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요일5:5). 한 마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해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 태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난 성도가 또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 요한은 대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길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요한일서에서도 사도 요한이 답하고 있지만,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가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서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뜻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을 지칭할 때에 그렇게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나타내신 것이라는 말한다. 즉 나타난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으로서 여호와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또 다른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 속에 하나님은 언제는 영이신 하나님이었던 것이지,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에,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사람인 주제에 자기를 하나님으로 빙자하여 말하느냐면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소하여 결국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다.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분은 하나님으로 나오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람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기에, 자기자신을 아들이라고 늘 칭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한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아들로도 계시고 그때부터는 아버지로도 함께 계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들로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을 때에는, 육체를 입지 않는 신성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을 이 땅에 파송하였고 사람의 태를 빌려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려 할 때에 조심할 것은 그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그분만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사탄마귀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해 주는 3가지가 있다고 말한다(요일5:6~9). 그리고 세 가지는 오직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이 땅에 보내어진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세 가지 증거 곧 '물'과 '피'와 '그영(보혜사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물과 피와 성령이 어떤 것이기에, 이 셋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해주는가? 사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은 둘이다. 그중에 하나는 '사람들의 증거'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증거'가 있다. 그중에 사람들의 증거란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있었으나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던 자들의 증거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들 중의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이 지금 그 증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일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증거를 직접 눈으로 보았던 이들은 죽고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증거 이외에 또다른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다. 그것이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라는 것이다. 왜나하면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셨다가 가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물'과 '피'는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실 때 취하신 인성의 일부분이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에, 그때 물질세계에 속한 것을 취하셨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육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육체는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 몸을 가지고 승천하심으로 그 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그렇지만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는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천하셨던 예수께서는 하늘에 가셔서 그분이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오셨으며, 이 육체를 통하여 인류의 죄를 속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오직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언해주시고 있다(요15:26).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기도 하신다(요14:26).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인 것이다. 

 

8.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 속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이 들어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육체를 입으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그분이 직접 인류의 죄를 대신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기 위함이었다. 이는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이다(히9:22). 그리고 죽음이 인류가 범죄한 죄값이기 때문이다(롬6:23). 그런데 인류의 죄를 속죄할 피는 더러운 피로서는 아니 되고, 깨끗한 피여야 했기 때문에 죄없으신 하나님께서 피흘릴 수 있는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가지고 오셨던 것들 중에 중요한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실 때에 그 속에 생명을 주어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이 땅에 있는 유한한 생명과는 다르다.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이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부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는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이었다. 즉 독생자였던 것이다. 그분이 아버지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만을 가지고 있으려고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 주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서 생명나무를 심어놓으셨던 것이다. 그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라는것이다. 하지만 첫째 아담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둘째 아담으로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죽고 부할하신 후에 그는 생명을 나눠주시기 시작하셨는데, 그가 쓴 방법은 당신 대신에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시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또 다른 방식으로 오심으로서, 그분이 오실 때에는 영으로 오시지만 믿는 이들 속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오시어 믿는 이들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있는 한 하나님의 생명도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죽은 날까지 생명을 지켜내야 한다. 어떤 일이 불어닥쳐도 그분을 부인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에 생명을 가지고 오셨던 성령께서도 떠나버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한 번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그 생명은 그가 죽는 날까지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계속해서 함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설령 죄를 범하였어도 성령은 그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에 주님을 부인하거나 죄를 지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성령께서도 그 사람을 떠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한 자들 속에는 누구나 다 영생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말한다. "아들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잇는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자기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요일5:12)"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고 있는 너희에게이 편지를 쓰는 것은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요일5:13)". 

 

9. 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믿는 이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말은 자기 속에 보혜사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고 부활하셨던 예수님을 일컬어 '생명주는 영'이라고 하였다(고전15:45). 그분이 생명주는 영 곧 보혜사 성령이 되어서 우리 안에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나 성령이나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이 발현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증상을 통해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오면 그 사람이 그 생명을 받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의 죽어있던 영이 말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방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성질이 곧 빛이요 진리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이 생명을 받은 자는 어둠 안에 거하지 아니하며, 거짓말도 하지 아니하고, 형제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이 생명을 받은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 진리를 말하며,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요한 사도는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다면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양자)가 되었으므로 그도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부부터 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죄를 범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요일5:14~17).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10. 죄들 중에 '사망에 이르는 죄'란 대체 어떤 것인가?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서 난제가 하나 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망에 이르는 죄"다. 대체 사도 요한은 어떤 죄를 가리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했으며, 왜 그러한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겠노라고 말한 것인가? 어떤 사람은 성령훼방죄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치부하는 것을 성령훼방죄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사망에 이르는 죄' 보다 더 원문상으로 정확히 말하면, '사망을 향하여 있는 죄'라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하니 '사망에 이르는 죄'는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사망'은 '생명'의 반대말이며, 여기에서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사망도 역시 육체적인 사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사망을 뜻하는 것이라야 한다. 다시 말해,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짓는 죄를 가리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이 영원히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는 어떤 죄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죄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불신앙의 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결국 죽을 때에 영원한 사망 안에 처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였지만 영원한 사망에 처하는 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한 번 믿었다면 어떤 죄를 짓더라도 그 죄와 상관없이 자신은 구원받는다고 믿는 죄를 가리킨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면 그는 죽는 날 그이 속에 들어있는 성령께서 그를 떠나가실 것이다. 죄를 다 처리하지 못한 자까지 주님은 그를 천국에 억지로 데려가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직 죄를 청산한 자만 천국에 데려가신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은 사람이 되셨고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내지 못한 자는 결국 남게 된다. 죄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는 매일 자기의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성령의 책망을 멀리하고 죄짓고 살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깨우쳐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우리 속에서 책망하시고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지만 성령의 책망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구약의 사울왕처럼 버림을 받고 말 것이다. 이러한 죄가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인 것이다. 

 

11. 악한 자 사탄을 이기는 자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탄마귀를 '악한 자'라고 칭하였다. 그것도 다섯 번 나오는데, 다 사탄마귀를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요일2:13~14, 3:12, 5:18~19). 그는 선한 자가 아니라 악한 자다. 그는 선과 악을 알고 있지만 악에 물들어 있는 자다. 그는 악을 밥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그는 한 마디로 악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잔인한 자다. 그는 냉혹한 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자에게 속아넘어가 그의 영원히 갇혀 있을 감옥에 들어가면 아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의 공격들 즉 유혹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가?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이 가진 능력과 지혜만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 다음으로 지혜롭고 미가엘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상당히 큰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지닌 우리 인간의 힘과 타락한 본성에 휩싸여 있는 우리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그를 이길 수가 없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탄마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지만 사탄마귀를 이기신 우리 주 예수님을 힘입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께서 사탄마귀보다 크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요일4:4). 사탄마귀는 피조물이고,우리 주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사탄마귀의 권세와 능력과 지혜는 제한적이지만 우리 주님은 무제한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힘입는다면 그를 거뜬히 이길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거듭 태어난 성도는 하나님께서 나셨던 자인 예수께서 그를 지켜주기 때문에 악한 자가 그를 손댈 수 없다고 했다(요일5:18).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 안에 전능자께서 들어와 계시는데 어찌 그 놈이 함부로 우리에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그 놈이 우리에 접근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게 될 때다(요일3:8).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에게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탄마귀를 이기셨던 예수님을 힘입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회개하기만 하고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면 우리는 거뜬히 사탄마귀를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마귀는 광야의 시험에서 3대 0으로 예수님에게 판정패 당했으며, 3년반 뒤에 십자가에서 KO패 당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죄없는 예수님을 그가 죽였기 때문에, 그의 계급이 무장해제 당했기 때문이다. 그날 그러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마귀는 불법을 사용하여 그가 가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님에게 넘기게 되었으며, 그때 그는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는 무저갱에 갇혀 이 지상에 못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주님 재림 직전에 잠깐 풀려서 올라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지금도 지하세계에게 자신의 부하들은 올려보내 그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쫄 필요가 없다. 우리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는 예수님 앞에서는 패배자이기 때문에 그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어있다. 내 안에 사탄마귀보다 더 큰 이가 내주하고 있음을 믿으라. 그리고 담대히 맞서라. 마귀를 대적하면 그가 피한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피하지 않으면 성령의 검으로 그의 머리를 찔러버리고 그의 몸을 싹뚝 잘라버리라(영의 세계에서 그렇게 명령하면 된다). 그가 우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다. 

 

12. 예수 그리스도는 대체 누구신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마무리 지으면서 예수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공개한다. 그분은 말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지지만 실은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라는 것이다(요일5:20). 그분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것불렸다는 것과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고 해서 그분은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다른 표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무렵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그렇다. 그분의 신성은 하나님이셨다. 다만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신성한 그분이 육신을 입어 인성을 잠시 취하신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고 부활하실 때에 그분의 몸은 신성의 영역으로 다시 이끌어가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신성한 세계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분이 비록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지만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낮춰 불러서는 아니 되겠기에 그분을 참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만이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공생애 마지막에 예수께서도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셨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그랬다. 하나님이 보내셨던 분, 그래서 자신을 아들이라고 칭하셨던 분은 하나님의 또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은 자기자신을 우상에게서 멀리할 것을 주문하였다(요일5:21). 그런데 이말을 헬라어 원문을 통해서 보면, 자기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켜내라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지면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 부분은 다른 설교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사도 요한은 초신자들에게는 이 부분까지 다 설명해 주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이 부분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것 같다. 그는 가장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갖추고 있으니까 말이다. 

 

13. 나오며

  요한일서를 공부하다보면 느끼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정말 암송해야 할 요절이 많은 성경책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책은 기초적인 영적인 진리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요한일서는 자범죄 용서를 위한 자백의 중요성(요일1:9)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빛'이시고(요일1:5), '사랑'이라고 하는 정의하고 있다(요일4:8,16).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있다고 말한다(요일2;1). 그리고 이 세상 안에는 악한 자가 있어서  이 세상이 그 악한 자 안에 놓여 있으며(요일5:19), 악한 자가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데, 그것들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있다고 말한다(요일2:16).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이며(요일2:22),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언급한다(요일4:2~3). 그러므로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를 분별하라고 권면한다(요일4:1). 그리고 요한일서는 진리의 성령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요일5:6),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으로서(요일5:6),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거짓이 없다고 말한다(요일2:27). 특히 요한일서는 우리가 대적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도 알려주는데 그를 '악한 자'라고 부르며(요일2;13,14, 3;12, 요5:17,18), 죄를 짓게 되면 누구든지 그에게 속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요일3:8).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그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요일3:8). 아담의 장남 가인이 차남인 아벨을 쳐죽인 것도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이었으니(요일3;12),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요일4:20). 그리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죄라고 가르쳐준다(요일3:15). 그리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만큼 귀한 일은 없다고 말한다(요일3:16). 더욱이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으며(요일4:10),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다고 말한다(요일4:14). 하나님을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만일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요일4:12).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일5:5). 그리고 성도가 세상을 이기려면 그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한다(요일5:4). 그리고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라고 알려준다(요일5:7~8). 그리고 예수께서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에, 누구든지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아들을 영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요일5:12).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거듭난 자는 예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악한 자라도 그를 만질 수 없다고 가르쳐준다(요일5:18). 왜냐하면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 계시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라는 것이다(요일5:20).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일서를 공부할 때 암송할 성경구절들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요한일서가 바로 이러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틈나는대로 아니 시간을 내어서라도 하루에 한 번씩 요한일서를 읽고 또 읽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어마어마한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영생을 소유한 자답게 살기를 바라며, 믿음을 사용하여 악한 자를 이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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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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