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8(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새 이름'이 들려주는 놀라운 비밀(계3: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SvHXly-7plg [혹은 https://tv.naver.com/v/31818360 ]

 

1. 들어가며

  성경은 계시들의 기록이다. 그것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그렇다면 계시는 어디에서 완성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모든 계시의 마지막이자 계시의 종합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하여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까지 가야 한다. 만약 요한계시록의 바로 앞에 수록된 유다서까지만 보았지만 계시를 다 보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누군지에 관하여 요한계시록만이 전해주는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빌라데빌아 교회에서 주신 말씀을 살펴볼 것이다. 그중에서 예수께서 이기는 자에게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할 것이라는 말씀이 들려주는 놀라운 계시를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새 이름이 과연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군지를 보다 더 정확히 알아가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요한계시록 3:12의 말씀은 누가 들려주신 말씀이며, 그 말씀은 무엇인인가?

  요한계시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계1:19). 그것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에 먼저 본 것과 그리고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되어질 일로 구분할 수 있다. 이것들 중에서 '그가 본 것'은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인자같은 분이시다. 이것은 1장 9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이다. 그리고 '지금 있는 일'이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라는 것으로서,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말씀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차 될 일'이라는 요한이 환상과 계시의 말씀으로서, 요한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3:12의 말씀은 누가 들려주고 있는 말씀인가? 그것은 자신을 '거룩하사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들려주고 있는 말씀이다(계3:7). 특히 계3:12의 말씀은 그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결론적으로 주신 말씀으로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헬라어에서 바로 직역해 본단면 다음과 같다. 

계3:12  이기고 있는 자는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 안에 그를 기둥으로 [장차] 만들 것이다. 그러면 그가 결코 더이상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나의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부터(밖으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질적으로] 새[로운]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질적으로] 새[로운] 이름을 그이(그사람) 위에 [장차] 기록할 것이다.

 

3. 요한계시록의 3:12에서 1인칭 단수로서 자신을 '나'라고 소개하고 계시는 분은 대체 누구인가?

  그렇다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자신을 '거룩하사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라고 소개하고 계시는 그분은 대체 누구신가? 예수님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성령님이신가? 우리는 그분이 누군지를 요한계시록 1장에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거기에 보면 그분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분은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신데, 옷은 발에 끌리는 흰 겉옷을 입고 계셨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있었으며,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같고 눈 같았다. 그리고 그분의 눈은 불꽃같았으며, 그분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된 빛난 주석같았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오른 손에 일곱 별들(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쥐고 계셨으며, 그분의 일비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그분은 대체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빌라델비아에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신 이는 다른 분이 아니라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고 계시는 분이신 것이다. 

 

4. 자신을 가리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자신을 소개하신 분은 누구신가?

  우리는 성경에서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고 계시는 두 분을 만날 수가 있다. 한 분은 구약성경 이사야서에서 만날 수 있고 또 한 분은 요한계시록에서 만날 수가 있다. 먼저 이사야서 말씀을 보면,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소개하고 계시는 분은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이시다. 그분은 나 외에는 결코 다른 신들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자신을 무려 세 번씩이나 그렇게 소개하셨다(사41:4, 44:6, 48:12). 

사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사48:12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그런데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이다(계1:17, 2:8, 22:13). 

계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그런데 요한계시록 1:17과 2:8에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계1:18에서 자신을 자신 이제 살아있는 자이며, 자신이 전에 죽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죽었다가 살아난 적이 있는 분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8에 나오는 그분은 누구인가? 그분도 역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이기 때문에 그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13에 보면, 그분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이자,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라고 소개하신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분은 '나 예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계22:13).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하여,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자신을 말씀하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5. 요한계시록에서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시고 있는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고 계신가?

  그렇다면,구약시대에는 분명히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분명 '여호와'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떻게 말해야 옳은가? 그것은 우선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이 아니신데, 자신이 가리켜 여호와라고 사기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곧 여호와이시다. 

  셋째,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구약시대에는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자신을 예수라고 소개하신 것이다. 

  과연 이 셋 중에 어떤 것이 맞는가? 첫째는 우선 틀렸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요 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다. 사탄마귀가 거짓의 아버지인 것이지 예수께서 거짓말장이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가 정답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맞은 말일 수도 있으나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나 예수님을 둘 다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곧 여호와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와는 신성만 가지신 하나님이시고, 예수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호와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번째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말씀이나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이렇나 정의에서 적용하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원래는 자신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셨던 한 분 하나님이셨는데, 그분이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6. 예수께서 '나의 새 이름'을 이기는 자들에게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이 들려주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주신 말씀 가운데 그분이 이기는 자들에게 자신의 새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3가지 영적인 비밀을 발견할 수가 있다. 

  첫째,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신 분은 과거에 옛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새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옛 이름을 무엇이고, 새 이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분의 옛 이름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이고, 그분의 새 이름은 예수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의 옛 이름은 '여호와'이셨던 것이고, 그분의 새 이름은 '예수'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는 한 분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것이요, 신약시대에는 자신을 예수로 계시하신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옛 이름을 끝까지 사용하시지 않고 새 이름을 지으신 것인가? 그것은 당신의 이름이 새 이름으로 불려지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새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새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보통 옛 이름이 계속 사용되길 원하면서 새 이름을 짓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르기보다는 예수라는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도 같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혹은 '여호와가 구원자이시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에 구원자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예수'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있음을 본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께서 새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셨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오직 하나라고 하셨다(신6:4). 자신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하셨다(사44:6). 그리고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사도들이나 성도들 그리고 예수님도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곧 한 분 하나님께서 이제는 예수님으로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즉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언급한 '나의 새 이름'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이 예수님으로 오셨다가 당신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7. 나오며

  한 분이신 주님께서 오실 때가 다 되었는데, 아직까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20~30년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기가 어려웠다. 그때만 해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요20:28)이라고 하니, 하나님은 마치 두 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도 계시고 아들 하나님도 계시니 하나님은 두 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성령님께서도 하나님이라고 나온다. 그러니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삼위일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를 듣고 유대인들은 과연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에게 아들 같은 존재는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두 분 혹은 세 분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개신교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을 한고 있지만, 실제로는 두 분 내지는 세 분으로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세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한 분이시다. 한 분 하나님께서 다중으로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는 달리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존재하실 수 있고, 사역하실 수가 있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여 천국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삼위로 역사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 분 하나님께서 다중으로 사역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동시에 존재하실 수가 있었고, 동시에 일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홀로 한 분이신 그분께서 아들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계22:1,3).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만이 영원히 기억할 새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18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09) 왜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8:24~2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qtSi0PRDiEg  [혹은  https://tv.naver.com/v/18302497 ]

 

1.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엘로힘)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신명사문자(יהוה)인데, 우리말 개역성경에 따르면 "여호와"입니다(출3:15, 사42:8). 그런데 그 이름의 실제 발음이 어떤 것인지를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있습니다(참고로,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읽을 때에는 지금도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고 읽을 뿐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출20:7의 제2계명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다보니, 그만 그 음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고로 신명사문자(יהוה)를 읽을 때에는 "아도나이"라고 읽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신명사문자(יהוה)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신명사문자(יהוה)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이것을 읽는다면, "요오드, 헤, 와우, 헤"입니다. "요오드"는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서 그 음가가 "Y 혹은 J"가 될 수 있고, "와우"는  "W 혹은 V"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명사문자(יהוה)는 읽는 이에 따라 "야훼(YHWH)"라고도 읽을 수도 있고, "여호와(JHVA)"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16세기에 비로소 사람들은 신명사문자를 "여호와"라고 읽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야훼"라고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3:14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은 그 뜻으로 치자면, "에흐에" 혹은 "아하야[흐]"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 혹은 "여호와"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개하실 때에 "אָﬣיּﬣ"(에흐예 혹은 아하야[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제가 보기에는 아하야[흐]가 더 훨씬 더 원래 글자와 가까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아하야[흐]"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아(1인칭단수)+하야[흐](나는~이다)"가 합쳐진 단어로서, "나는 ~이다" 혹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접두어 "아"는 히브리어의 첫글자로서 "알렙"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אָﬣיּﬣ"(아하야[흐])는 "나는 알렙이다. 나는 알파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요한계시록 22:13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자신을 알파라고 소개하시면서 시작하셨던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께서 오메가로 재림하심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신약성경에서는 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혹은 야훼)"라고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성경에서 5,321번이 쓰였던 "여호와"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 들어와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손치더라도 신약시대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는 적어도 "여호와"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어디에도 "여호와"라는 단어가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간단하게,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사본인 맛소라텍스트에서 인용하지 않고, 전부다 구약히브리어성경을 가지고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LXX)를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70인역에서 "여호와"라는 단어는 전부다 "퀴리오스("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시118:25)"라는 말도 신약성경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22:32)"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실제적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요? 그것은 다음의 2가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혹은 야훼)"인지, "에흐에(혹은 아하야[흐])"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아하야[흐]"의 이름은 그 이름의 뜻에서 온 이름 같고, "야훼"의 이름은 그 단어의 음가에서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둘째, 구약의 자신을 "아하야[흐]"라고 소개하신 분이 신약시대에는 "예수"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4.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는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셨나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무려 세 번 씩이나 자신이 누군지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나는 ~이다" 혹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의 문장인 "에고 에이미"는 문장을 사용하셨습니다(요8:24,28,58).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그때 자신을 "아하야[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내가 그인 줄"을 나온 본문이 원래는 히브리어의 "아하야[흐]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문에 맞추어 이 문장을 다시 번역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출3:14~15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하야[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아하야[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요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아하야[흐]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아하야[흐]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아하야[흐]이니라 하시니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자신을 "아하야[흐]"라고 소개하신 분께서 이제는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아하야[흐]"라고 소개하셨고, 자신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셨으니,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더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왜나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이었던 "아하야[흐]"가 신약의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놀랍게도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단어 "아하야[흐]"가 신약의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은 출3:15의 말씀에 고스란히 암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하야[흐]"를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다시 말해, 출애굽기 3:14에서 자신을 "아하야흐"라고 소개하신 분이 15절에는 "여호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야[흐]"가 누군지는 "여호와(야훼))"에다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합치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하실 때에 굳이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여호와께서 기한에 이르면 사라에게서 아들로 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창18:10,14).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은 후에 진실로 기뻐했던 이유는 자신이 100세에  아들을 얻어서라기보다는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아들로 오셨음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아하야[흐]께서는 비로소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응당 자기의 백성들이 자신의 옴을 기뻐하고 환영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채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과거 "아브라함은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8:56). 그렇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여호와가 아니라 아들로 오신 아하야[흐]께서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굳이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훼)"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아하야[흐]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 "예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2021년 02월 04일(목)

정병진목사

 

​우리가 따라야 할 기도의 모범은 역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다. 그런데 이 기도에서 첫번째 기도제목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케 된다는 뜻은 대체 무엇인가? 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이나 하나님의 뜻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앞세운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분명히 "여호와"인데도 왜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이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아니하는가? 오늘날 우리가 영광스럽게 해야 할 하나님의 이름은 대체 누구인가? 주기도문의 놀라운 비밀이 여기에 들어있다.


2019-09-02(월) 2019년도 9월 특별새벽집회 첫째날 

제목: 주기도문강해(0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https://youtu.be/qnpAaKawK8E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들에게도 세례요한처럼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기도를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라는 것이다(눅11:1~4). 그런데 주기도문은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기도”와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잘못된 것임을 경계하면서, 제자들에게 진정한 기도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마6:5~8). 또한 이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성도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고 암송되고 있는 이상적인 기도의 모델이기도 하다.

주기도문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는 “기도의 대상”이 나오고(마6:9a), 둘째로는 “기도할 내용”이 나오며(마6:9b~13a), 셋째로는 “송영”이 나온다(마6:13b). 먼저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장차 기도드릴 대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불러야할 호칭이 “하나님”도 아니었고, “만군의 여호와”도 아니었으며, “주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것도 “하늘들 안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였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우리가 올리는 기도에 매우 관심이 많으시고 또한 늘 좋은 것들을 채워주시려는 분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정욕적으로 기도하기보다는 믿음의 공동체의 필요를 간구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분은 하늘들 안에 편재해 계시고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수 있는 전능자라는 사실도 배웠다. 그리하여 기도라는 것은 곧 믿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놀라운 경험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제 오늘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 가운데 첫 번째 기도제목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2. 주기도문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무엇인가? 

주기도문에는 총 6가지 기도제목(기원)이 나온다. 하나님에 대한 것이 3가지요, 우리 인간에 대한 것이 3가지다. 전반부 3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기원으로서 “당신”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고, 후반부 3가지는 “우리”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전반부의 기도가 하나님의 필요를 간구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다. 그런데 이것을 헬라어로 직역해보면, 여기에 한 가지 수식어가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의”라는 수식어다. 고로 이 문장은 “당신의 이름이 [단번에] 거룩하게 되시오며(Hallowed be your name)”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 기도제목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이름”이라는 단어와 “거룩하게 하다”라는 단어인 것을 알 수 있다. 


3.“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무슨 뜻인가? 

이제는 “거룩하게 하다”는 동사부터 살펴보자. 본문의 “거룩하게 되시오며”는 “하기아조”라는 동사의 명령법, 과거,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단번에 단호하게 거룩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거룩한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결코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분의 이름은 처음부터 영광스러웠었는데 어떤 경우에서도 그분의 이름이 추하게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는 주체도 신적 수동태로서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뜻이다. 


4. 왜 하나님의 이름이 항상 거룩한 상태에 있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은 더럽혀지거나 추하게 되어서는 아니 되며 항상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라시는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을 당신의 나라가 오는 것보다 그리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보고 계시다는 것이다. 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이리도 당신의 이름을 이리도 중요하게 보시는가? 그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셨고 어떻게 그 이름을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선포한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겔20:8-9 그들(이스라엘백성)이 [애굽땅에 있을 때에] 내게 반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노라 9 그러나 내가 그들이 거주하는 이방인의 눈 앞에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눈 앞에서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행하였음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온 우주와 만물의 창조주이자 주인으로서 피조물로부터 존중을 받으시려면,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맞게 행동해야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존재들(천사와 사람들)을 장차 심판하시려면, 당신은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하셔놓고 그것을 언제 했느냐면서 먹어버리면 아니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출6:7)” 그렇다. 그분은 그분의 이름을 걸고 어떤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했다면 그분은 꼭 그 일을 이루셔야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지키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셨던 말씀들이 그분의 말씀대로 그대로 성취되어지기를 기도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은 궁극적으로는 애굽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해 내시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사탄마귀에게 포로로 잡혀있는 우리들과 같은 죄인들을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인 천국에 데려가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제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지 아는가? 그것은 죄인들이 구출받아 천국에 들어갈 때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죄인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가장 슬퍼하시며 치욕스럽게 생각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제일 첫 번째 기도제목으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오며”라는 기도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기원이지만 실은 우리 인간이 구원받는 것에 관한 기원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가장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것도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이와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5. 이제는 언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가? 

그런데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신약성경에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로서,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린 지상최대의 명령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이요(요14:26), 또한 사도행전에 제자들이 전부 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며(마18:20), 예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견디게 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마10:22,24:9, 막13:13, 눅21:17~18).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님께서 시행하신다고 하셨으며(요14:14, 16:23~24),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다 받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5:16).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위해 이 세상의 것을 내려놓는 자는 이 땅에서도 여러 배를 받을 뿐더러 다음 세계에서 영생을 상속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19:29).

고로 우리는 오늘날 어떤 일에서든지 또는 어떤 고난의 현장에서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끝까지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계2:13, 3:8). 왜냐하면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는다면 오히려 기뻐하는 성도가 되자.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 우리의 것을 아낌없이 드리자. 그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아멘. 


2019년 9월 2일(월) 

정병진목사 


  성령님의 이름이 과연 있을까? 혹 성령님의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무엇일까? 어떤 이단에서는 성령님의 이름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이름을 모르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참 말일까? 또한 어떤 분은 성령님의 이름이 "보혜사(상담자, 모사, 위로자, 가르치는 이, 도와주시는 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보혜사는 이름이 아니다(요14:26, 15:26). 성령님을 대신하는 대명사로서, 성령의 역할과 그 직임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성령님이 이름이 과연 있는지, 굳이 있다면 그 이름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한 분 하나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하며, 예수 이외에 구원자가 없음을 다시금 되새겨보도록 하자.

  한국교회의 이단에 속하는 단체들 중에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며, 아들의 이름은 '예수님'인데 왜 성령님의 이름이 없겠느냐면서,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므로 반드시 성령님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약 누구든지 그 이름을 모른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면서 책망하기까지 한다. 과연 이들의 주장은 참 말인 것인까?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거짓된 주장을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우선 마28:19에 성령님의 이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아,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이라는 문장 속에, 성령의 이름이라는 글자가 나오니까 성령의 이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만약 아버지의 이름이 따로 있고 아들의 이름도 따로 있으며, 성령의 이름이 따로 있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고 말해서는 아니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들"이라고 말해야 옳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적고 있지 않다. 성경원문에 보면, 이름이라는 단어는 단수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버지의 이름이 곧 아들의 이름이고 아들의 이름이 곧 성령의 이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어 특성상 복수접미사를 잘 쓰지 않는다는 헛점을 이용하여 성령의 이름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아니다. 성령의 이름은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의 이름이 곧 아들의 이름이요 아버지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이제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예수께서도 성령의 이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의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인용한다. 먼저 계2:17을 인용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7)."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흰 돌을 주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그 이름을 받는 자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문제는 이 새 이름이 성령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 이름 곧 성령님의 이름이 '안상홍'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받는 자만 안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그 이름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와서 진리를 듣고 배우라고 한다. 그래서 성령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믿어서 성령의 시대에 구원을 받으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문장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님께서 어떤 상을 베풀어주시는데, 구약에 감추어있던 만나처럼 흰 돌로 상징되는 어떤 상을 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상에는 그 흰 돌을 받는 자의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 흰 돌을 받는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새 이름'이 성령의 이름이라고 주장할만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계3:12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새 이름이 곧 성령의 이름인데, 그 이름이 안상홍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본문을 보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3:12)"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어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주께서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주님의 새 이름이 곧 성령님의 이름이요, 그 이름이 안상홍이라고 주장한다. 아니다. 본문은 그렇게 해석될 수가 없다.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가 된 후에는 절대 다른 소유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며,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게 하겠다는 뜻이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는 뜻이다. 이제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는 "나의 새 이름"이라는 이름이 성령님의 이름이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구약시대에 구원자의 이름은 여호와였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구원자의 이름은 예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령의 시대가 되었으니 성령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럴싸 한 말인가?

  이제 우리가 이 본문에 나오는 "나의 새 이름"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교리로 사용되고 있는 삼위일체론이나 이단시되고 있는 양태론의 이론을 가지고서는 이 문장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삼위로 보는 관점에 의하면, 성령님도 그 이름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요, 앙태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제 시대는 성령의 시대가 되었으니, 성령님의 이름을 알아서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하면 홀딱 넘어가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삼위일체론도 틀렸고 양태론도 잘못된 이론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옷을 바꿔입고 등장한 것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분의 이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같은 이단 사람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존에 저를 통해 선포된 말씀들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삼신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자들은 하나님께서는 만세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각각 따로 존재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다가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로 활동을 하셨고, 신약시대에는아들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내려와 주로 활동하셨으며,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성령하나님께서 영으로 오셔서 주로 활동하시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니다. 이 교리는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지 세 분으로 존재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이나 사도행전이나 요한계시록 같은 천상의 모습이 기록된 곳을 다 찾아보라.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하늘에는 단 한 개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단 한 분의 하나님만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가 2개 내지는 3개가 아니다. 하늘에 올라가 보면, 셋째하늘의 한 중앙에 새 예루살렘성이 있고 그 성 한 가운데에 높이 들린 단 한 개의 보좌만 있다(사6:1, 단7:9, 계4:2~3). . 거기에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신다. 삼위일체론자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한 중앙에 놓여 있고 그 우편에 아들 예수님의 보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니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또 다른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보좌는 단 한 개 뿐인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자들은 만세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이 각각 때로 계셔서 그분들이 회의를 통해 사람을 지은 것이라고 다음의 말씀을 근거로 주장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이 본문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들 만들자"라고 했으니,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회의하신 것이 맞다."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틀렸다. 왜냐하면 이사야서를 보면 세 분 하나님이 회의해서 천지창조를 하신 것이 아니라, 혼자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 그렇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홀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지만 천지창조 전후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을 만들던 여섯째날에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상의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18장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형상을 하고 두 명의 천사와 나타나셨음을 통해서도 증명이 된다. 그리고 유대랍비들의 주석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는데, 그들은 창1:26~27에 나오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천사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하지만 삼신론적인 삼위일체론자들에 의해 이 문구가 지금까지 잘못 해석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리해 보자.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홀로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때 여호와께서 예수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과 상의하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홀로 창조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능자라고 계시하셨다(출6:2). 즉 전능자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전능자가 창조주가 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정확히 가르쳐주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모세시대에 들어오면서, 모세가 하나님더러 자기를 보낸 분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질문 가운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이시며, 그 이름의 뜻은 '나는 ~라고 하는 바로 그분(I am that I am)'이라고 가르쳐주셨다(출3:14~15). 하지만 아담의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불려지고 있었다(창4:25~26). 노아도 그렇게 불렀고(창9:2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그렇게 불렀다(창12:8, 26:25, 28:21). 하지만 모세시대에 비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확실히 여호와이며,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사실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나는 네가 바라고 요구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라고 하는"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는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며, 우리가 외롭고 힘들어할 때에는 "나는 너와 함께하는 여호와 곧 임마누엘"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라는 말의 원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심으로서 여호와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그 전에는 그냥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다이)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모세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시면서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애굽사람에게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가 여호와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출6:6~7, 7:4~5). 이 말은 여호와는 곧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민10:9, 신20:4, 33:29). 이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나는 예수다" 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뜻이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혹은 "여호와가 구원자이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마1:21)" 그랬다. 아담의 시대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는 말로 가르쳐주신, 한 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출해 내시면서, 비로서 자신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구원자이신 것을 밝히 드러내신 것이다.

  그런데 구약시대 때만해도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서 구원사역을 하시겠다고 계속해서 누누이 약속을 하셨다. 그리하여 훗날 하나님께서 정상 메시야를 보내셨는데, 알고 보니 메시야는 당신자신이었다. 즉 만세전부터 한 분이신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메시야로 탄생하신 것이다(사9: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육신을 입고 태어나게될 아들의 이름을 어떤 식으로든지 가르쳐주셔야 했다. 그때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미 이스라엘백성들의 출애굽시킨 여호와가 구원자이심을 포함하는 이름을 새롭게 알려주셨으니 그 이름이 바로 "예수"라는 이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이름이요, 그 이름 자체가 구원자이심을 표현하는 이름이자, 완전한 하나님의 이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 만세전부터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실 때에 당신 자신의 이름을 "예수"라고 가르쳐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이요, 한 분이신 하나님의 새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마28:19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와 성령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곧 그 이름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인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니, 여호와라는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이름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았다. 전부 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맨 처음 탄생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2:38)"으로 세례를 주었고, 사마리아교회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행8:16)"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최초의 이방인이었던 고넬료가정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10:48)"으로 세례를 베풀었으며,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행19:5)"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전부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이름이 예수인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은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한 분 하나님의 새 이름이자, 구약에 계시된 여호와의 이름을 포함하는 새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요5:43)"고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을 드러내신 것이다. 곧 여호와가 구원자이신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신 것이다(요17:6,26).

  그러므로 사실 성령님의 이름은 없다. 한 분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실 때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여호와"라고 말씀하셨지만,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이 곧 인류를 구원하신 일인 것을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오실 때에는 아예 자신의 이름 속에 여호와가 구원자이심을 그대로 포함시며 "예수"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포함하는 이름이요, 아들 자신의 이름인 것이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새 이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이 곧 예수인 것이다. 그렇지만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당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어 여러가지 사역을 하셨다. 특별히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낸 당신의 영은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리웠으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거룩한 영(성령)'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아들로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한 다음에는 당신의 영을 보내주셨으니 그 영이 바로 성령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한 분이신 구약의 여호와의 영이요, 신약의 예수님의 영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에게 더이상 새 이름은 필요없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서 공개되었고,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인 것으로 공개되었으니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굳기 캐묻는다면, 우리는 마28:19에 따라 그 이름은 바로 "예수"라고 하면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교회가 주장했던 의문점을 속시원하게 풀어보자. 계3:12에 나오는 "나의 새 이름"은 결국 누구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곧 예수라는 이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하고 계신 분은 만세전부터 홀로 한 분이신 그분이시다. 그분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때에 사람으로 오셨다. 그때 한 분 하나님께서 다른 새 이름을 하나 부여받았으니, 그 이름은 바로 '예수'라는 새 이름이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쳐진 이름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자 어린양의 이름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14:1)"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신약시대에 육신을 입고 메시야로 오실 때에는 자신의 이름을 "예수'라고 칭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한 분 하나님의 새 이름이자 한 분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으로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아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게 된며, 그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난다. 또한 그분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치료할 수 있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기도가 다 응답된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한 분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이요, 구약에 비하면 새 이름요,  최종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예수 이름 이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은 없다. 성령님의 이름을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그 이름은 '예수'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 무슨 성령님의 이름을 안상홍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한낱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려 하는데고 가만히 있는가? 어찌 구약성경에 단 한 번도 예언된 적이 없는 사람이 어찌 참람하게 자신을 성령님이라고 주장하는가? 그는 과연 무소부재하였던가? 전지전능하였던가? 그는 스스로 계신 존재였던가? 전부 아니었다. 그는 죽어서 그 시체는 이미 흙이 되어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말씀이 아닌 흙이 육신이 되어 한국사람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되, 죄된 본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태어난 자가 어찌 자신을 성령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신성모독이 아니고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런 자의 이름은 백 번 천 번을 불러도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구원자의 이름은 오직 예수님 뿐이기 때문이다(행4:12, 요14:6).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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