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9) 왜 초기교회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을까?(행20:7)_2022-12-28(수)

https://youtu.be/gKQaVxqPWGY  [혹은 https://tv.naver.com/v/32115854 ]

 

1.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어느 요일에 모였는가?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드로아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안식일에 모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만 해도 주일은 쉬는 날(공휴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낮에 일하고 밤에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그때 바울은 어느 성도의 집 3층 다락방 안에 모여서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던 것이다. 

 

 

2. 안식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주일에 예배 모임을 가지면 안되고 꼭 안식일(주간의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다. 이름하여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다. 그런데 이들이 믿고 있는 교리를 보면, 문제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구원론과 안식일 준수는 상당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안식교에서 가르치는 대부분의 이러한 교리들이 다 엘렌 지 화이트라는 여사에게서 나왔다라는 것이다. 안식교인들은 엘렌 지 화이트 여사를 선지자라고 믿고 따른다. 이 여사는 안식교를 창시한 죠지 밀러(A.D.1782~1847)의 부인인데, 죠지 뮬러가 죽자 그 배턴을 이어 받은 자로서, 이 여사가 말한 것들은 거의 성경처럼 믿고 신뢰하며 따르고 있다. 사실 죠지 뮬러는 1844년 10월 22일에 주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하지만 그때 오시지 않자,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때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셨고 거기에서 천국에 들어올 자를 가르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름하여 '조사심판'이다. 안식교인들은 이 심판에서 제외되면 결국 구원을 못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사심판의 핵심은 바로 구원론에 있다. 

 

3.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의 구원론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안식교인들의 구원론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안식일 준수와 구원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고, 계명(십계명)도 준수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특히 계명들 중에서 제4계명 곧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계명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만약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면 짐승의 표인 666표를 받아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지만 계명들을 준수하지 못한 자는 조사심판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생명(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조에')을 얻고 죄사함을 받아야 구원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아무리 계명을 준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생명을 얻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뿐이다.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을 수 있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믿고 계명도 준수해야 구원얻는다는 것은 잘못된 구원론이다.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기 때문이다(마4:17, 요3:16, 롬10:8~9, 행16:31). 

 

4. 안식일에 관한 안식교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안식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일종의 생명줄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안식일에 대한 입장은 어떤 것인가? 그들의 주장을 모아서 살펴보면, 3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안식일은 폐지된 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법으로서 안식일법은 이미 폐지되었다(갈4:9~11, 골2:16~27, 호2:11, 히4;1,11). 둘째,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는 자는 태양신 종교를 따라가는 우상숭배자여서 결국 그들의 이마에 짐승의 표인 666표가 찍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은 일요일을 태양의 날로 여기지도 아니하며,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도 아니다. 주일에 성도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초기 교회는 안식일을 지켰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제정하여,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자들을 강제로 일요일예배로 바꿨다는 것이다. 아니다. 초기 교회 중에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그것은 행20:7의 말씀에도 나와 있으며, 여러 교부들의 어록과 초대 교회가 남긴 책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사도행전 강해 88강을 참고하기 바란다). 

 

5.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드렸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렇다면,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눴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안식일은 한 마디로 모형이고 그림자로서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히10:1,4, 골2:16~17). 안식일의 진짜 실체는 예수님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천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히4:11). 다시 말해, 구약에 주어진 안식일은 율법 중 의식법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이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야말로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의식법들은 완성되어졌다. 그리하여 폐지된 것이다. 다시 말해, 안식일이라는 것은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표요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없다면, 사람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만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없이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인데도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나 안식일법에 의하면 그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을 만드신 예수님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법을 주신 목적을 모르고 규정만을 내세워 사람을 정죄하는 그들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날(안식일)과 달과(초하루)과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맥추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과 해(안식년, 희년)를 다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결코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갈4:9~11).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와 참된 안식과 평강을 이미 얻은 자들이 다시 율법에 매여 종노릇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율법의 의식법들(할례, 안식일, 절기법, 음식법, 정결법, 제사법)이 아니라,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들은 다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골2:16~17).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구약의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만이 우리 모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가져다 주고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 곧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321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니 그날 예배를 드리기에 더욱 편리하여졌기에 일요일인 주일에 예배를 드렸던 것이지, 태양신을 섬긴다는 의미로 일요일에 예배드린 것이 아니다. 고로 성도들은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지, 일요일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또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으므로 주일에 예배를 드린 것이다. 

 

2022년 12월 28일(수)

정병진목사

2022-10-05(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5) 생수와 예배에 관하여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요4:1~42)_2022-10-05(수)

https://youtu.be/EMzCkOuNO40  [혹은 https://tv.naver.com/v/29743485 ]

 

1. 들어가며

  사마리아 여인, 그녀는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살고 있던 어떤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물을 뜨러 왔다가 예수님과 마주치게 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왜 베뢰아를 거쳐서 가는 우회 길을 선택하지 아니하시고 그날 따라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직행로의 길을 선택한 것인가? 혹시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더 큰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일까? 그때 예수께서 그녀에게 주실 수 있다고 하신 '생수'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여인이 질문했던 '예배'의 핵심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동네의 창녀였던 것일까?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 관련지어 참으로 질문할 것도 많이 가지고 있고 알아볼 것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혼의 갈증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이 난다"는 제목의 설교의 본문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전도법 강의에 주요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요한복음 4장의 핵심 주제는 대체 무엇인 것인가? 오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의 주제를 한 번 살펴보고, 그동안 풀지 못했던 궁금증들을 풀어봄으로서 주님이 주신 위대한 말씀의 진면목을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요한복음 4:1~42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대체 무엇인가?

  요한복음 4:1~42절에는 사실 3가지 중요한 작은 주제가 나온다. 첫째는 '생수'를 주제로 하여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예배'를 주제로 하여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추수에 관하여 예수께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이 이어 나온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4:1~42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대체 무엇인가? '생수'인가, '예배'인가, '추수'인가? 오늘 본문을 다 공부하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추수'라는 거대한 주제 가운데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제자들과의 대화 및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대화가 등장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른 길을 통해서 갈릴리로 갈 수도 있으셨는데, 일부러 사마리아 길을 통과하여 가는 것을 선택하셨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또한 그분의 양식이 다름이 아니라 이 땅에 '자신을 보내셨던 이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요4:34)이라는 말씀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곧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신 것이다(요4:6).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와 같은 사실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특히 4절 말씀에, "그런데 그분은 사마리아를 통하여 통과하여 가는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하셨다(원문)"는 말씀에 들어 있다. 그렇다. 그분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제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셨다. 그러고는 희어져 추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을 향해 일부러 찾아가신 것이다. 그때에 가장 먼저 사마리아 전도의 첫 시작점으로 주님의 눈에 들어온 사람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우물가의 한 여인이다. 

 

3. 사마리아 여인은 정말 창녀였는가?

  그렇다면 그날 물을 뜨러왔던 여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과연 '창녀'였을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녀의 신분을 창녀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때에 신부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그녀가 창녀였다고 설교함으로 대부분의 주석들이 이 여자를 창녀로 주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4장에서는 그녀를 어떤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창녀가 아니라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인으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여자를 주님께서도 '귀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요4:21). 이것은 주님께서 그녀를 귀부인으로 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 여자는 낮 12시에 물을 뜨러 온 것이 아니라 오후 6시에 물을 뜨러왔던 평범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요4:6). 왜냐하면 오늘 본문 6절에 의하면, 그 여인이 물을 뜨러 온 시각이 '대략 6시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시각이 오후 6시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시간은 로마의 시간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힌 시간을 요한복음 19장에서도 로마시간법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시간이 '제 6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시각이 아침 6시였기 때문이다(요19:14).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이기 때문에 공관복음의 시간 기록 방법처럼 유대인의 시간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 시각은 예수께서 여행 중에 피곤해서 지쳐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요4:6). 즉 예수께서 낮 12시부터 피곤하여 물가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온종일 걸으신 후에 비로소 저녁 6시쯤 되어 사마리아 동네에 도착하셨기 때문에 피곤하신 것이다. 셋째, 만약 이 여자가 창녀였다면 나중에 그녀가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간증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창녀가 말한 것을 귀담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올 사람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4:28~30). 그런데 보라.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넷째, 이 여인은 남자를 여러 명 거느린 여자가 아니라 정식으로 남편을 다섯 명 두었지만 기구한 운명 때문에 그때 같이 살고 있던 남자와는 결혼도 못한 채 지내왔기 때문이다. 남편을 다섯 두었다는 것을 통해 그 여인을 창녀라고 볼 수 없다. 창녀는 남편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그녀는 기구한 운명 때문에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사별을 했거나 아니면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불쌍한 과거를 가진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 만난 남자와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여인을 비롯한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 전체가 당시 메시야를 매우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동네 사람들도 메시야를 만나러 물가로 나아온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여인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었는가?

  예수께서는 이미 선험적인 지식으로 사마리아 동네의 영적인 상황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군가가 그곳에 가서 복된 소식을 전해주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번 기회에 직접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일부러 사마리아 동네를 향하여 간 것이다. 그래서로 그곳 마을의 입구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 그분이 멈춰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동네 사람 누군가는 물을 뜨러 그곳에 올 것이라고 예상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그리고 손에는 두레박을 가진 채 물을 뜨러 오고 있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물을 달라고 하는 청을 한다. 그러자 일반적인 일이었다면 그것은 너끈히 청을 들어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사마리아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보였기에 그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의 청을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주님은 그녀가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는 말씀을 그녀에게 들려주신다. 그것은 만약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고 또한 그분이 줄 수 있는 선물 곧 생수가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에게는 물을 길을 두레박도 없고, 그 우물은 매우 깊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생수를 가지고 있게 되었기에 그러한 말씀을 하는 것이냐면서 반문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우물 물을 마시는 자는 또다시 목마르겠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물을 마시는 자의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구치는 물의 샘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자 그녀는 그러한 물이 정말 있다면 자기에게도 주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게 하고, 물을 긷기 위해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일상적인 화제를 통하여 영적인 진리를 이끌어내시고,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대화법을 통하여 그 여인을 전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주실 수 있다고 하는 '생수'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수(생명의 물)'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아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답이 들어있다. 첫째로, 그것은 그것을 한 번만 마시더라도 다음 시대까지 결코 목마르지 아니할 물이라고 하셨다(요4:14). 그리고 둘째로, 그 생수는 그것을 받은 자의 속에서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물의 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4:14).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라는 것은 이 세상의 물질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갈증을 영원히 해결해줄 그러한 물은 이 세상에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물이 이 세상의 물이 아니라 천국에서 오는 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국에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계22:1). 고로 이 물은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결국 생명을 가지고 사람 속에 들어오실 '성령'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선물'을 '성령'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행8:20, 11:17). 또한 성령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시면서 그분이 주실 수 있는 것은 '생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17). 그리고 예수께서도 초막절 끝날에 생수의 강에 대해 설교하시면서, 그것은 믿는 자의 뱃속에서 솟아올라오는 성령의 물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7:37~39).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렇다.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생명의 물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이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되면, 사람의 영의 배에서부터 물이 올라와서 가슴을 채우게 된다. 그러면 그시로 그냥 만족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더이상 이 세상의 것을 가지지 않아도 부요한 마음으로 가득차게 되고 세상 것이 하나 없어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왜 뜬금없이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을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생수를 달라고 하는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하는 그 여인에게 갑자기 자신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죄의 문제 해결없이는 예수께서는 결코 성령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때 그 여인은 과연 어떻게 대답했을까? 그녀는 자신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그녀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실은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할 이유가 그녀에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그것을 직접 확인해야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예수님에게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그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그대로 고백하자, 그녀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들려준다. 그것은 그녀에게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죽어서 다시 재혼했는지 아니면 남편이 그녀를 버렸기 때문에 재혼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이처럼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지금 간음을 저지르고 있는 상태와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예수님에게 말씀드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모진 인생을 다 알고 있는 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선지자이십니다"라고 말한다. 

 

7. 여자는 왜 갑자기 예배할 장소를 물어본 것인가?

  자기의 눈 앞에 있는 유대인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점차적으로 알게 된 여인은 예수께서 진정 선지자라면 알 수 있는 어떤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자기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예배하는 곳은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예배에 관한 진실을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을 예배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예배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심산에서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예배할 때가 오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때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영 안에서 진리로 예배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예배를 받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예배의 핵심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먼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면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 '영 안에서'라는 함은 유대인들이 예배드릴 때에 너무나 형식에 치우쳐 있었을 뿐 마음은 거기에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예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 함이요, 둘째, '진리 안에서'라 함은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이 정한 방식에 따라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예배 방식도 잘못된 것이요, 말씀에 없이 자기들이 정한 방식에 따라 예배하는 사마리인들의 예배 방식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인가? 그것은 형식에 따라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서 마음을 다해 예배하는 것을 가리키며, 자기의 정한 방식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따라서 예배한느 것을 가리킨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한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가 오시게 되면 그분은 전체의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이이다'라고. 그러자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이해해버린다. 즉 자기와 말씀하고 있었던 바로 그이가 모세가 예언했던 '나와 같은 선지자'(신18:15)로서,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실 주실 메시야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자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 둔 채 동네로 들어간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외친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9. 그 여자가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놀라은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분에게 감사하고 찬양하고 드리고 싶어서다. 그리고 둘째는 그분을 전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를 만나자 그녀는 즉시 예배에 관해 질문한 것이다. 그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행했던 만큼 많이 모든 것을 다 자신에게 말했던 사람을 와서 보라고 외친 것이다. 이분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또 누구겠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그녀의 외침을 듣고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야곱의 우물가로 몰려나온다. 그렇다. 한 여인의 능동적이고도 열성적인 외침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 모두가 메시야를 기다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야가 왔다는 외침을 듣고는 메시야를 보기 위해서 우물가로 몰려온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때문에 예수님에게 나아온 것이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메시야에게로 나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된다(요4:42).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몇 년이 지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신다. 그리고 생수와 같은 성령을 오순절날 마가다박방에 모인 120명의 유대인들에게 보내주신다. 그리고 스데반의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자들 중에 일곱 집사의 하나인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다(행8:4~13). 하지만 그때에 그들은 성령을 받지는 못한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이 소식을 들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된다(행8:14~17). 그리하여 생수와 같은 성령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가 된다. 

 

10. 나오며

   예수께서는 왜 다른 길들을 놔두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길을 선택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사마리아가 이미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가서 그들을 추수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처음으로 그 문을 열어젖히고자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신 것이다. 그때에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가 바로 우물가를 찾아온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주님은 그녀가 메시야를 만나지 못해서 그때까지 자신의 영혼에 갈급함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녀에게 생수에 관한 말씀을 시작으로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신다. 하지만 생수로 비유하신 성령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받을 수 없기에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한다. 부끄러운 자신의 실상이지만 그녀가 솔직하게 예수님에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그녀가 찾고 있는 메시야라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신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과 그동안 대화를 나눴던 분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차리고는, 동네 안으로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난 소식을 기쁘게 전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희어져 추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마리아에도 추수가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추수는 훗날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성취가 된다.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역과 인종과 민족에 상관없이 누구나 복음을 듣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들에게 값없이 생수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 주님을 진정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신다. 

 

2022년 10월 05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4) 최초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비결(행2:42~47)_2022-06-20(월)

https://youtu.be/HWAv6VM12bI  [혹은 https://tv.naver.com/v/27452170 ]

 

1. 최초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누구인가?

  오순절 성령강림과 더불어 부어진 성령세례를 통해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 들리자, 그 음성을 듣고 매우 놀란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들으며 놀라워하고 있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설교를 행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그들이 못박아 죽인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이 되셨다고 증언한다. 그러자 그 설교를 들었던 헬라파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러면 우리가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묻게 된다. 그러자 베드로는 일어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악(그리스도를 죽인 죄)을 회개하고 그리고 세례를 받을 것을 주문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약 3천명 가량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최초로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따랐던 120명의 갈릴리 사람들과 더불어 헬라파 유대인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이다. 이들 중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이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모두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었다는 점이다. 

 

2. 예루살렘 교회와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똑같이 닮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기본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최초의 교회의 모습은 일종의 교회원형과도 같기 때문에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미흡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전에 우리가 더욱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이룬 사람들과 오늘날 한국교회를 이룬 사람들에게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이룬 사람들 중에는 단 한 명의 이방인도 없었다. 그들이 본토박이로 살아왔든지 아니면 외국에서 살아왔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유일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한 마디로 '미신성향'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어떠한가? 반 만 년의 세월동안 우리는 미신과 잡신을 섬겨왔다. 우리는 무당에게 물어보고 살았고 부처를 섬기며 살았으며 조상제사를 빼먹지도 않고 지내왔다. 이 모든 것의 실체는 다 귀신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사람의 미신성향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60~80퍼센트 정도 된다. 그러니 한국 사람 속에는 악한 영들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교회의 모델로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가면 아니 된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먼저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귀신들의 미혹과 공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과연 그 성령운동에 귀신이 개입되어 있는지 우리는 늘 분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역시 '회개'라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할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 회개해서 우리 국민들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아니하면 교회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겉으로 성령을 따라간다고 하지만 귀신을 따라가는 집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졌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초기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와 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리고 교제에 그리고 떡을 떼어냄과 그리고 기도들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있어왔다(행2:42)." 그렇다.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는 4가지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는 교육이다(디다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배우기를 힘썼다. 그때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도들이 직접 들었고 배웠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리고 말씀 그리고 그분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행적들 역시 구약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교제다(코이노니아). 그들은 집에서 모이거나 성전에 모일 때에 그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간증했을 것이다. 누구에게서 귀신이 쫓겨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병들었는데 치유받았다는 이야기, 성령세례 후에 어떻게 기도해서 은사를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떡을 떼었다는 것이다. 그럼 떡을 떼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성찬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애찬을 가리키는 것이일까? 고전11장을 읽어보면, 아마도 그것은 애찬 후에 성찬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46절에도 역시 그들이 집을 따라서 떡을 떼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들이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였던 것이고, 그 집에서 모일 때에는 떡을 떼는 일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저녁에 모일 때 먼저 식사를 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성찬식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는 기도들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초기 교회는 기도 공동체였던 것이다. 전에 그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도 기도에 몰두한 적이 있는데, 역시 성령을 받아 교회를 이루고 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에 의하여 기적들과 표적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4.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아주 특별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44~45의 말씀을 통하여 초기 교회가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토지와 소유물을 내놓아, 공동체 구성원의 필요를 따라서 전체의 것들을 공동의 것으로 나누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공산주의 체제와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의 핵심은 자발적인 참여냐 아니면 강제참여냐 하는 것이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토지와 소유물을 하나님께 내놓았던 공동체였다. 그렇다. 초기 교회는 개인의 자유가 존중된 공동체였다. 어떤 것도 강제성이 없었다.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자발적으로 섬김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주의는 이와 다르다. 공산주의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는 얼마든지 제한되고 침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결정한 어떤 지시사항이 내려오면 개인의 자유의사와 상관없이 그 지시사항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다. 그것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가 공산주의 공동체였다는 말은 잘못 알려진 말이며,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자발적인 기부문화와 더불어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는 공동체였던 것이다. 

 

5.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우리가 초기 예루살렘 교회를 살펴볼 때에 가장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초기 예루살렘 교회도 역시 사람들의 공동체였는데 왜 그들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되고 생색을 내기도 하며, 자기자랑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그러한 부정적인 일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거룩함이 그들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과연 무엇이 그들을 변질되지 않게금 막아준 것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었을 것이다(행2:43).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남자만 3천명 이상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인구대비 교인수는 상당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그들이 서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서로 죄악된 삶을 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 위에 성령이 임재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령의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나타남은 교회가 올바른 길을 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 교회에서 이 기능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없어져버렸다. 하나님의 임재를 모르고 경험도 해 보지 않은 자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성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은 염소짓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도 교회에서 어른 노릇을 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2022년 06월 20일(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배란 무엇이며, 예배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요소는 무엇인가?(출8:1)
https://youtu.be/XDmcvaxIYak


1.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의 하나인데, 예배의 기원은 사실 제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사실 제사는 과도기적이요 임시적인 조치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선조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우리의 죄를 속량받아야 하는데, 그것의 예표가 바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시대에는 신약적인 뜻의 "예배"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비롯한 용어로서, "섬기다(아바드)"라는 단어라든지, "샤햐(절하다,경배하다)"는 단어가 쓰이고 있을 뿐입니다. 구약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는 대체로 "제사드리다(자바흐)"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란 무엇이며 제사의 핵심요소는 무엇입니까?


2. 구약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실행했던 의식은 제사였습니다. 특히 B.C.1446년경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리고 시내산에서 절기를 지키기 전까지, 구약시대의 여러 족장들은 제단을 쌓은 후에 거기에다가 제사를 드려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의 핵심은 바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는 족장시대에는 가장이 드렸고 그리고 율법이 수여된 후에는 제사장이 드렸던 의식으로서 하나님을 섬김의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제사의 핵심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드릴 수 있었고, 속죄를 간구했으며, 감사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피흘려 죽은 희생제물을 통해서 제헌자들은 자신이 죽어야 할 자리에 희생제물이 대신 죽어 바쳐지는 것을 보면서 속죄의 은총에 감사했니다. 그렇다면, 출애굽시대에 비로소 제사제도에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로 나와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출7:16, 5:1, 3:18)


3. 하나님께서는 미디안광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는 모세를 불러내어 사명을 전달하셨습니다. 그것은 "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라(출3:12)"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왕 바로에게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그전에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과 바로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을 계속되었으며 그리고 반복되었습니다(출4:23, 7:16, 8:1,20, 9:1, 10:3).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족장들이 해왔던 제사제도에서 섬김의 방법에도 일종의 변화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절기를 지킨다(하가르)"는 말로도 표현되었는데, 그 뜻은 "춤을 추며 즐거워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크고도 놀라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인데, 그들은 이 사건 후에 춤을 추며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직후에, 독수리의 날개에 업혀 초자연적으로 비하히롯에 3일만에 당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18km나 되는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고 난 후에, 물에 빠져 죽어있는 애굽의 군대들을 보면서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했습니까?(출15:1~21)


4. 홍해를 건넌 후 바알스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 감격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사실 그때 상황은 자기들이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입술은 찬양이 절로 흘러나왔고 여인들은 소고를 치며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의 첫번째 묘사입니다. 그리하여 이후로 하나님의 섬기는 제사제도와 맞물려 찬양을 하며,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희생제물을 바쳤던 제사제도가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방식으로의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은 바로 찬양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족장시대에 사실 그 어느 누구도 희생제물만을 바칠 때에 노래하거나 춤을 춘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해주신 민족적인 구원 앞에서 찬양과 감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찬양이 저절로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시작된 찬양은 다윗시대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찬양을 담당하는 레위인들을 둘 정도로 더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통일왕국도 다윗의 손자의 시대에 이르러 분열되기 시작했으며, 20대에 가서는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게 나라가 그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문제가 이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사를 지낼 성전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당을 짓고서 제사를 드리지 않는 모임을 갖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회당예배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씩 수정발전하여 신약의 성도들이 드리는 기독교예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오늘날 죽은 자 때문에 행하는 추도식이나 장례식(핵심은 발인예식)을 추도예배 혹은 장례예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5. 추도식이나 장례식은 사실 예배가 아닙니다. 또한 그것을 예배라고 말해서도 절대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고도 놀라운 일(창조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이 자연발로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높여드리는 경배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망이 임한 것이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임한 곳에 하나님을 높이어 찬양드리는 예배가 사용되어서져서는 절대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추도[예]식이나 장례[예]식은 오늘날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라고 부르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식순서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추도식이나 장례식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높여드리는 찬양이 들어가서는 절대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는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버젓이 드려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목회자나 장로님들 돌아가시면 시체를 아예 성전 안에 들여다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일을 온 성도들이 다 같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때문에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안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축하하거나 기뻐하거나 춤출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시체를 가져다놓고, 죽은 자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니까, 지금도 경배받기 위해서 안달이 나있는 귀신들이 와서 그 예배를 받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도록(특히 예배하도록) 지음받은 존재들이나, 자기들이 [인간들에 의해] 섬김을 받아보기 위해 스스로 타락하여 귀신이 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그들은 하늘에서 쫓겨나올 때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게 되면, 귀신을 통해서 저주가 사람 안으로 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도 추도예배나 장례예배같은 것을 드리면, 다른 것을 통해 축복을 받아야 함에도 동시에 저주받는 일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 곧 창조의 은총과 구원의 은총을 근거로 그분을 높여드리며 찬양드리며 감사할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섬김에만 예배라는 말을 붙혀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8년 10월 19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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