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46) 다툼과 논쟁의 불씨를 베드로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가?(행11:1~18)_2022-09-27(화)

https://youtu.be/KGpiNfylwHA  [혹은 https://tv.naver.com/v/29486615 ]

 

1.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파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었는가?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받아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접촉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문제삼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가운데 할례자들에 속한 자들로서,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간 것과 거기서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베드로가 랍비들의 교훈을 어긴 것으로 보았으며, 이는 유대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2. 베드로는 새로 부딪힌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돌아갔을 때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느 정도 예상한 것 같다. 이는 그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차례대로 스스로 그들에게 설명한 사실을 통해 확인이 된다(행11:4). 왜냐하면 베드로도 욥바에서 보자기 환상을 보기 전까지는 할례자들과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역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율법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음식법을 지키켜 살았던 것이다. 보자기 환상을 보기전까지 베드로는 자기 입에 어떠한 부정한 짐승의 고기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행11:8). 이렇다는 것은 그가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려왔고 더욱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줄 생각은 결코 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심으로,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이 이제는 더이상 이방인들도 부정하다거나 혹은 불결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2가지 방식으로 할례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자초지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과 함께 있었던 여섯 명을 증인들로 그들에게 내세운 것이다. 

 

3. 베드로는 자신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어떻게 설명했는가?

  베드로는 자신이 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한다. 그가 욥바에서 맨 처음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 환상은 구약의 율법에 따라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짐승도 이제는 더이상 더럽지 않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 골자다. 그리고 곧이어 이방인이었던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때도 성령께서 자신에게 지시하기를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따라나섰고 그들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오순절날 자기들에게도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성령의 은사를 주셨던 것처럼, 고넬료 가정에도 역시 동일하게 성령이 쇄도하였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방언을 말하였고 방언찬양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이다. 

 

4.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자녀들)이 되는 것은 무엇에 달려있는가?

  베드로의 이러한 증거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에는 어떤 특별한 조건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 베드로를 비롯한 120명의 유대인들이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제일 처음으로 성령을 받고, 이어서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 것은 다 자기들이 할례를 받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모여있던 자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 동일하게 성령을 받은 것이고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조건 곧 할례를 받거나, 유대인이 되거나 하는 조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것을 통해 일어나는 것임을 확인해준 것이다. 그렇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려면 그때에는 아브라함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 이후에는 달라진 것이다. 무거운 멍에와 같은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율법의 저주로부터 인간을 속량하러 오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생명을 해방하여 나눠주셨던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성령을 통해 생명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고로, 오순절 성령강림 시대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상 회개와 믿음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다툼이나 논쟁의 불씨가 있을 때에 지도자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은가?

  사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의 대표는 베드로였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복음전파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행한 일에 대해 어느 누구도 태클을 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사도들이 아니라 평신도들 중에 어떤 할례파들이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을 방문하고 그들과 식사를 했다는 것을 두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럼, 그때 베드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는 사실 예루살렘교회의 대표로서 그들을 책망하고 징계를 해야 마땅했다. 만약 그때가 베드로가 변화받기 전이었다면 베드로는 그들에게 화를 버럭 내거나 윽박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달라졌다. 이는 베드로가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설득하기로 선택했다. 사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이니, 대표자의 권위로 그들을 눌러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감히 사도에게 대항하느냐고 그들을 엄히 꾸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방인과 친교하거나 식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의하여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 증인 6명을 동참케 하였기에, 베드로의 증거가 사실인 것을 보증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잠잠해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주는 회개를 주셨다고 인정하였다. 참으로 좋은 결말을 맺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베드로의 지혜로운 대처는 결국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에게도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물꼬를 확실히 열어준 계기가 된 것이다. 

 

 

2022년 09월 27일(화)

정병진목사

 

초대교회가 처음으로 직면해야 했던 핍박과 위협의 어려운 상황에서, 대체 예루살렘 교회는 그것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베드로와 요한을 우선 피신시켰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 나중을 기약하자고 결의를 했을까? 그런데 그들이 선택했던 선택지는 다름 아닌 '합심기도'였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를 보니, 우리가 보통 드리는 기도와는 달랐다. 그러면 그때 그들의 중보기도의 내용은 어떠했을까? 우리도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에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대처와 중보기도는 우리의 갈 길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오늘은 그 기도를 분석해보자.

 

2022-06-2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19) 예루살렘 교회가 모여서 드린 첫 번째 기도는 어떤 기도였나?(행4:23~31)_2022-06-26(주일)

https://youtu.be/438S6AMWq6c  [혹은 https://tv.naver.com/v/27620853 ]

 

1. 들어가며

  세상에 이제 갓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와 복음전파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한 것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나면서 못걷게 된 자를 고쳐 준 일이 있게 된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의아하게 여기는 군중들을 향해 그 이유를 전하게 되었는데,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친 것과 예수님이 누군지를 전하는 것을 두고 불법이라면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어 그들을 심문해 보았지만 잘못한 일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보면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하고 위협하면서 내보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들었던 바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면서 공회를 빠져 나온다. 그리고 곧장 성도들이 모여있는 장소(마가다락방으로 추정됨)로 이동하여 그동안에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그랬을 때에 과연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 대책회의를 세웠던 것일까? 아니면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자들이 최고로 긴장을 하고 있으니 지금은 자제하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결의했을까? 아니면 죄없는 베드로와 요한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또한 취조했으니 산헤드린 공회를 심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을까? 우리는 오늘 예루살렘의 교회가 최초로 직면한 위험 앞에서 과연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도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루살렘 교회는 당면한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대처했는가?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보고를 듣고 결정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와 요한을 어디로 피신시키는 일을 논의했을까? 아니면 지금은 어려운 시기이니 만큼 복음전파를 자제하자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예루살렘은 복음전파를 하기에 합당한 곳이 아니니, 복음전파의 기수를 사마리아나 이방인에게 돌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고 했을까? 그런데 그때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것은 놀라운 결정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합심으로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결의했기 때문이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는 대책회의를 강구하지도 않았으며, 차기를 기약하자는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 하나님께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을 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그들은 과연 어떤 기도를 주님께 드렸을까? 

 

3.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고 또한 찬양했는가?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주께 기도할 때에 그들은 과연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기도했을까?

  첫째로, 그들이 기도하면서 불렀던 하나님의 명칭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기도의 대상을 향하여 "대주재여!"라고 기도하였다(행4:24). 헬라어로 보면, '데스포테스'라는 단어인데, 이는 그 뜻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호칭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신앙이란 모든 일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대주재'라는 명칭은 하나님을 모든 만물의 창조자로서 인정한다는 신앙고백이며, 그분의 뜻과 섭리를 그대로 따르겠다는 뜻이다. 참고로, 신약성경에서 '대주재'라는 표현은 사도 베드로가 한 번(벧후2:1), 사도 바울도 한 번(딤후2:21), 사도 요한이 한 번(계6:10), 누가가 누가복음에서 한 번(눅2:29), 사도행전에서 한 번(행4:24), 그리고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가 한 번(유1:4) 사용한 적이 있는 흔히 않는 호칭이다. 

  둘째로, 그들은 대주재에게 어떤 찬양을 먼저 드렸는가?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먼저 어떤 찬양을 드렸는가?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당신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던(만드셨던) 분이십니다. 또 당신의 종(파이스) 우리 조상 다윗의 입으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렇다. 그들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섭리대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것을 찬양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자기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일어나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그것은 시편2:1~2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행4:25~26). 왜냐하면 시편의 예언을 따라 예루살렘의 도시 안에 헤롯 안디바(B.C.4~A.D.39 재위)와 본디오 빌라도(A.D.26~36 재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4.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드린 중보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모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그들은 무슨 기도로 중보기도를 드렸을까? 그들은 3가지 기도를 드렸다.

  첫째, 그들은 지금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적대세력을 지켜보아달라(주목해달라)고 기도했다(행4:29a). 그들은 "이제도 그들의 위협들 위로 그것들을 주목해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좀 감해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고, 고난을 아예 없애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대세력을 없애달라고도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을 위협하고 대적하고 있다고 할지라라도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는 것이니만큼 주님께서 뜻하시는 바 대로 행해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적대세력에 대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겠다는 기도였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핍박 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행4:29b).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당신의 종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계속 말할 수 있도록 담대함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옵소서" 그랬다. 그들은 대적들이 함께 모여 복음전파를 대대적으로 방해하고 있고, 또한 복음을 전파한다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움츠러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적들의 위협에 겁먹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셋째, 치유와 표적과 기사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 일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행4:30). 그들은 "당신의 손 안에서 고침을 위하여 당신에게 사람들이 손을 내밀게 하옵시고, 표적들과 기사들이 당신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계속 일어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천국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세상에서는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것들 곧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기적들이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렇다. 교회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는 세상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제공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께서도 공생애 시절에 제자들을 파송하여 천국복음을 전하게 할 때에 어떻게 하셨는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세와 능력을 주셔서 파송하셨다(마10:1, 눅9:1~2). 12사도들와 예루살렘 교회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랬다. 그들은 박해로 인해 좌절하거나 결코 낙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들과 동행하여 일하시는 교회가 되어, 천국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5. 그들이 기도를 마쳤을 때에 주님으로부터 어떤 응답이 내려졌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기도를 마쳤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땅을 진동시켰다(행4:31). 그들이 기도하고 있던 장소가 흔들렸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는지를 잘 대변해주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들과 계속해서 동행하시겠다고 하는 싸인을 그들에게 주신 것과 같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기들이 비는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6. 나오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에는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며 생활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핍박과 고난이 찾아오게 되면 많은 이들이 그만 핍박에 주눅이 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과연 어떠했을까? 고난을 피해 도망을 쳤는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맞딱뜨리게 된 핍박과 위협 속에서 차후 대책회의를 강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놓고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합심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는 자신의 뜻대로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주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간구한 것이다. 그리고 다만 그들에게 누르고 있는 핍박에 대한 두려움을 잘 이겨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또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 곧 천국복음을 계속해서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특히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표적들과 기사들이 일어나기를 간구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음과 더불어, 자기들이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옳게 행동하고 있음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도응답을 받았고, 더욱 더 힘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06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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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 건설된 최초의 교회, 그 교회는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예루살렘교회였다. 하지만 그 교회가 건설된지 2~3년이 채 못되어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흩어버리시기로 결정하셨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가 더 견고해지도록 그대로 두시지 아니하시고, 왜 흩어버리려고 작정하셨던 것일까? 기왕 어렵게 교회가 세워졌다면, 교회가 더 성장하도록 그들에게 힘을 주고 격려해주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왜 예루살렘교회를 흩어버리시기로 결정하셨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교회도 흩어짐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A.D.32~33년경, 예루살렘교회는 상당히 큰 부흥을 이뤄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을 허락하셨다. 그때에 일곱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집사가 죽임을 당했다. 어느날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12명의 사도들처럼 큰 기사와 표적을 그곳에서 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말로서 그를 이기지 못하자, 거짓으로 그를 공회에 고소하였고, 사형언도를 내렸다. 그는 결국 무참히 돌로 맞아 순교하고 말았다. 그때였다. 스데반이 죽은 것에 대해서 교회가 아무런 대항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있던 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교회의 세력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러자 "기회는 이 때다"고 생각하고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남여를 무론하고 감옥에 쳐넣었다.

  하나님게서는 왜 죄없는 스데반이 돌아맞아 죽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계셨던 것일까? 그러면 하늘의 공의가 사라지고 유대인의 법정이 더럽혀지고 마는데, 왜 하나님은 그 일에 개입하지 않으신 것일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 더 견고해지도록 그대로 놔두지 아니하시고 왜 핍박을 사용하여 그들을 흩어버리신 것일까?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결코 그냥 되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는 큰 부흥을 이뤄가고 있던 예루살렘교회에 왜 핍박을 허락하셨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한 마디로 예루살렘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에서 빗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실 때에는 어떤 목적이 있으시지 않았을까? 종합해보면, 그것에는 2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음부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는 거점을 이 세상에 확보하려는 데에 있다(마16:18). 다시 말해 비록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을 음부가 흡수하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는 데에 그 존재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교회를 세우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회의 규모가 크다 할지라도 그 영혼들이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교회의 존재목적을 상실한 교회이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교회의 존재목적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복음전파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른채, 지금도 영문도 모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려는 데에 교회의 존재목적이 있는 것이다(마28:19~20, 막16:15~16). 그렇다. 생각해보라. 구속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시기 직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부탁하셨는가?  그것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막16:15~16)"고 하셨다.

  하지만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의 이러한 뜻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역행하고 있었다. 벌써 교회의 구성원의 숫자가 만 명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명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예루살렘에 있거나 그곳을 방문한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해주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교회를 흩어버리기 직전까지, 그들은 이방인 단 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지 않고 있었고, 자기들끼리만 구제하여 돕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복음이 어디 제자들의 전유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만약 복음을 유대인들의 전유물로 삼으실 것 같았으면, 왜 예수께서 갈릴리 촌동네의 무식한 어부들, 세리와 같이 인간취급받지 못한 사람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여 제자를 삼았다는 말인가? 그들은 벌써 자신이 어떻게 주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받아 제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잊고 있었다. 그들도 어느샌가 과거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복음을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전도해서 이뤄놓은 결과에만 만족하고 기뻐할 뿐, 자신들이 해야 할 사명 곧 교회의 존재목적을 실천하는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랬다. 그들은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가는 영혼의 울부짖음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유대나라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마리아사람들이 어떠한 상태를 당신은 알고 아는가? 그들은 귀신의 힘을 빌려 표적과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 시몬에게 붙잡아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몇 년 전에 예수께서 그곳에 가서 뿌려놓은 씨앗을 중간에서 마술사가 가로채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큰 하나님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셨는가? 오직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면, 그들가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 하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벌써 그 사명을 망각하고, 자신이 이뤄놓은 결과에만 도취되어, 사마리아와 이방인들의 영혼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사는 문제 즉 구제사역에만

 온갖 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는가? 약하고 천하고 소외받은 변방출신의 사람들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들은 잊어버렸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가 이 세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기는 하지만 그 교회를 흩어버리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복음을 전해줄 수 있을까? 그것은 큰 교회라는 자부심이나 자신은 특별히 선택받았다고 하는 특권의식에만 사로잡힌 자가 아니다. 그것은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조건없이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나같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조건없이 복음을 듣게 하신 하나님께 "저는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을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교회가 세워진지 몇 년이 지났지만 이러한 주님의 뜻은 저버린 채, 오직 자기만족에만 도취해 있었다. 자기가 속한 교회가 바로 원조교회요 큰 교회라는 자부심만 있었을 뿐 자신을 먼저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교회의 사명을 망각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런 교회는 없어져야 할 교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럼 교회는 언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인가? 예루살렘교회는 복음을 전파할 대상을 제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파할 시기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단 한 사람도 주님의 명령에 주의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이방인선교에 단 한 사람도 뛰어들지 않았다. 자기들의 구제에만 관심을 기울인 채, 그 시기를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을 보라.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도 처음에는 나사렛파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세력을 없애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메섹도상에서 그는 변화되었다. 죽고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예수께서 그에게 버젖이 그리고 확실하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사실인 것을 깨달았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했는가? 조금 더 견고한 교회를 세운 다음에 전도하려고 했는가? 아니면 자기의 선교사역을 지원해 줄 재정이 채워진 다음에 전도하려고 했는가? 아니다. 그는 즉시로 사람들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전해주었다(행9:20). 그렇다. 전도는 즉시로 하는 것이다. 그래야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요, 훗날 없어짐을 면하는 것이다.

  그렇다. 전도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행하는 가장 고귀한 행위다. 전도란 자신이 복음에 빚진 자인 것을 아는 자가 행하는 영혼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예수께서 그 그리스도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 자신인 것을 당신은 정말 알고 있는가? 그러면 나가서 전하라. 대상에 제한을 두지 말고 누구에게든지 가서 복음을 전해주라. 복음을 듣지 않고 죽으면 저들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그러면 왜 가만히 있는가? 가서 복음을 전해주라. 그들을 찾아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몸을 입으셨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셔야했는지를 전해주라. 그것이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존재목적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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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며, 어떻게 하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우리는 항상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처음에 세워진 교회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즉 처음으로 세워진 최초의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였다. 예루살렘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세워진 이 지상의 첫 교회이다. 오순절날 성령강림사건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초대교회는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되 기도할 때에는 성전에서, 떡을 뗄 때에는 집에서 모였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내 놓았다. 사도들은 그것으로 가난한 자나 과부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따라 무료로 나눠주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는 좋았던지 불신자들도 부러워했다. 유무상통하는 생활,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행복한 삶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은혜가 더한 곳에 사탄이 역사한다고, 초대교회에도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루살렘교회에 있었던 하나의 징계사건을 통해 과연 교회가 지켜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건강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중에서도 구브로 출신의 바나바의 섬김은 당시 모든 믿는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구리광산 일로 말미암아 돈을 벌어 예루살렘에 사 두었던 땅을 기꺼이 팔아서 기쁨으로 교회 앞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마다 자신들도 교회 앞에 재정으로 섬기고픈 생각을 하는 이가 많았다. 그중에는 아나니바와 삽비라 부부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3시간 간격으로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사도행전은 이들 부부의 헌금생활에 문제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과연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이들 부부가 헌금을 적게 드린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헌금을 속여서 드린 것이 문제의 시작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팔았던 자기들의 땅값의 일부를 감추어두고 교회 앞에 드릴 때에는 다 드린 것처럼 속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헌금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얼마를 드려야 한다고 강요하신 적은 없으시다. 다만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정한대로 하되, 인색함이나 억지로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후9:7). 이들 부부도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려고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 사탄이 끼어 들어왔다. 그것을 허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성령의 깨달음으로 인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권한 안에 있게 할 수가 없더냐?" 이것은 무슨 말인가? 땅을 팔기 전에 그 땅의 권리가 아나니아에게 있었고, 판 후에도 그 땅값에 대한 권리가 아나니아에게 있었지만 왜 그 권리를 사탄에게 내 주었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나니아야, 네가 땅을 얼마나 팔았는지 아는 이가 있을까! 그러니 네게 필요한 것은 따로 떼어놓고, 교회 앞에서는 다 팔아서 바친 것처럼 해 봐, 그럼 교인들이 얼마나 너의 선행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겠니?" 그는 어느새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래서 성도들과 사도들과 하나님을 속이게 되었던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이것이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거룩한 교회에 사탄이 들어와 아나니아의 마음을 장악한 상태에서 헌금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사탄이 자신의 마음에 가득차도록 아나니아가 허용했기 때문이다. '가득찼다'는 말은 성령으로 충만해졌다는 말과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마음에 이미 사탄이 충만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밤하늘의 달이 조금씩 조금씩 차올라 보름달이 되듯, 사탄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장악해갔던 것이다. 그렇다. 사탄은 하루 아침에 우리의 생각이나 영혼을 노략질하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생각을 틈타 들어와 나중에는 우리의 생각을 장악하고 우리의 영혼을 노략질한다. 헌금을 하면서도 사탄에게 쓰임을 받은 상태에서 헌금하면 되겠는가? 그는 이랬어야 했다. "내가 땅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지만 저의 믿음이 아직 부족해서 다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이라도 주님께 바치고자 합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 부부는 사탄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해버렸고, 오로지 사람들로부터 칭찬듣고 영광받기를 사모했던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속이면서까지 재산을 다 팔아 바친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만약 이 헌금의 실상이 안 밝혀지고 그냥 그대로 지나갔다고 생각해보라. 그들 부부는 교회에서 어떤 중직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결국 예루살렘교회는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찬 더럽혀진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거룩하기를 바라신다(고전3:16~17). 특히 첫 것이 거룩하기를 바라신다. 첫 것이 더럽혀지면 그 다음의 것도 따라서 더렵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나안땅의 첫성인 여리고성에서 일어났던 아간의 탈취물도둑사건은 만천하에 드러나야 했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했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결국 초대교회는 이 사건을 통해 교회의 거룩함과 순수함을 지켜나갈 수 있었고, 바르게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지역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성도들이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듣고 영광받기를 사모하지 말라. 그러면 마귀가 잡아쓰는 사람이 되기 쉽다. 겸손하라. 그리고 정직하라. 그리고 깨끗하라. 그래야 우리들의 뒤를 따라오는 자들이 우리들의 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오지 않겠는가? 우리의 세상적인 생각과 인간냄새 펄펄 나는 것을 후배들에게 보여 주어서는 아니된다. 회개하라. 우리의 자녀들이 지금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다 우리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교회생활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 잘못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과거 신앙생활모습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자녀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라. 눈물로 회개하라. 그래야 자녀들을 다시 바르게 인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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