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가끔씩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성도들의 친교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런데 요한일서 1장에 보면 이 말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며, 이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은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는 자들은 누구였는가? 왜 사도 요한은 그들을 분별하라고 그렇게 강조해서 말해야 했던가?

2021-11-10(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2) 성도의 코이노니아의 핵심요소와 그것이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일1:5~2;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gvXSoKg9Gs [혹은 https://tv.naver.com/v/23470017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초신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자양분을 얻게 하고, 영혼을 노리고 있는 거짓 교사들이었던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성도들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을 본받아 형제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실천적인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소중한 책이다. 요한일서는 알다시피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와 함께 사도 요한이 쓴 서신으로서, 이것들 중에서 첫 번째 책이 요한일서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대략 A.D.90~95년경으로 추정되며, 그 대상은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로서 사도 요한이 전파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거나 신앙의 기초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초신자용 신앙 지침서가 바로 요한일서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요한일서 강해 두 번째 시간으로서, 코이노니아(교제, 교통, 사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코이노니아가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코이노니아에는 어떤 방면이 있으며, 코이노니아를 가능케 하고 그것을 지속시켜 주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2. '코이노니아'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코이노니아(koinonia)'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교제를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인데, 이 단어를 한글로 번역할 때에는 보통 '교제(친교)' 내지는 '사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영어에서는 이 단어를 대부분 'fellowship'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가끔식 'communion'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코이노니아'의 본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단어의 뿌리를 찾아보면 알 수가 있는데, 원래 이 단어는 '코이노스'라는 형용사에서 온 말이다. 형용사 '코이노스'는 우리말로는 '공통된'이라는 뜻을 가졌다. 따라서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상호 간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서로가 공통된 정서를 함께 나누며 공통된 목표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코이노니아'란 공통된 분모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교제를 일컫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제를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인 간의 공통 분모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크게 확대해 보면 그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와 교제를 나누실 하나님이 먼저 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었으며(요5:26), 이 생명을 예수에게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일1:2, 5:11~12) 또한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요일5:13). 이때 하나님께서 분배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를 일컬어 성경에서는 '거듭난 자'라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라고도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영적인 교통을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대체 누구와 코이노니아를 가지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에는 두 가지 방면이 있다고 했다. 그것들 중 한 가지는 하나님 및 예수님과 갖는 교통이라고 했다(요일1:3).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성도들 간의 교통이라고 했다(요일1:7). 그런데 이것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를 수직적 교제라고 부르며, 성도들끼리 갖는 교제를 수평적인 교제라고 부른다.

 

3. 성도들이 서로 코이노니아를 갖기 위하여 꼭 해야만 하는 일 2가지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성도들 간에 교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 2가지 있다고 말했다. 그중 첫 번째는 성도들은 반드시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요일1:5~7). 왜냐하면 우리 주 하나님이 빛이시며(요일1:5),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그 빛을 비추러 오신 참 빛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1:9, 요일2:8). 그러므로 성도가 이 빛 가운데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는 어둠 가운데서 걸어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도가 죄를 범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즉시 죄를 자백하여 예수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요일1:9). 이는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회개'라는 것을 알려 준다. 주님과 우리 믿는 이들 사이에 그리고 우리 믿는 이들 사이에 코이노니아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리하면, 그것의 첫 번째는 반드시 성도가 어둠의 일을 끊고 생명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 것이다. 이때 자신이 빛 가운데 걷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죄를 짓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현재 어둠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 것을 반증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은 죄를 자백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4. 사도 요한은 왜 빛 가운데서 걸어감으로 하나님과 코이노니아를 이루어야 하고 그래서 형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하는가?

  사도 요한이 '빛'과 '어둠'이라는 단어를 꺼내어 사용할 때에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를 염두해 두고 쓴 것이다. 영지주의자들도 역시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을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다른 것이다. 그들은 영지를 깨달은 자를 일컬어 빛 가운데 있는 자요, 구원받은 자라고 말하지만,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 참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빛의 아들이 되어 빛 가운데 살 수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요12:35~36).  

  그렇지만 당시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은 현재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늘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순간에도 역시 죄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영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육체에 속한 어떤 것이 자신의 영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는 죄를 짓고 있었어도 그들에게 그것은 문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약 그 상태로 죽는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불타는 영영한 불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에 있어서 '영지'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인간이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방출되어 나온 신적 존재이므로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빛을 받는 것이요 영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길을 사람들이 모르니까 그 길을 알려 주려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진리의 빛을 깨닫도록 빛을 비추기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참된 빛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존재는 굳이 예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다만 영지를 깨우쳐 줄 존재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것인가? 그리고 왜 하나님이셨던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던 것인가? 그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다. 오직 우리 인류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었기 때문이다(롬6:23). 그런데 하나님은 본래 영이시므로 죽으실 수가 없으셨다(요4: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피 흘려 죽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요1:14). 그러나 이미 영지를 깨달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육체를 입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물질세계는 저급한 신이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아주 저급한 신으로 밖에는 생각이 안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육체를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거짓 선지자요,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말했다(요일4:1~3, 요이1:7). 그래서 오늘날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을 일컬어 가현설론자라고 부른다. 그렇다. 기독교의 최대의 이단이었던 초기 영지주의자들은 영지를 깨닫기만 하면 자기도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영지를 깨달으면 하나님이 된다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어찌 피조물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가르침은 사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던진 미끼였다. 그런데 이것을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정말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께서 더러운 육체를 입으실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때에 예수께서 육신을 입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지금까지 인류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 중 단 한 사람도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감사 드리자. 그리고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 찬양을 올려 드리자. 왜냐하면 그분의 성육신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지를 깨달은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계명은 필요치 않는 것이다. 그들은 육체를 가진 형제를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영지만 깨달으면 그들은 이미 신이 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득도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말한다. 자신이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들을 무조건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진실로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빛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런 자하고는 교제를 끊으라는 것이다. 그들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요, 그들은 거짓말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코이노니아가 단절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모셨음에도 죄된 본성으로 인하여 죄를 짓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우선 사도 요한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을 한다든지 혹은 자신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미혹하는 자 곧 영지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따르지 않고 사탄이 가르쳐 준 말장난을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연약함에 쌓여 죄를 짓는 성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이미 2천년 전에 예수께서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지만, 그 속죄의 효력이 나타나게 하려면 반드시 지은 죄를 자백하라는 것이다(요일1:9). 죄를 자백할 때에라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지은 죄들로부터 그를 깨끗하게 하고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 가운데는 현대 영지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한 번 믿어서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자신이 예수를 믿을 때에 이미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사실 우리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회심의 회개를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이때에 지옥 갈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하신다. 그러면 그가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죄된 본성이 영영 사라진 것이 결코 아니다. 여전히 죄된 본성은 남아 있다. 그래서 그것은 육체가 죽는 날까지 활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섰다 하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러한 고민을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 바로 로마서 7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회심의 회개를 하였고 예수님을 모셔 들였다면, 그는 그때부터는 발을 씻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는 이미 목욕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을 씻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현대에도 있다. 이들이 바로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이다. 한 번 믿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영지주의자들인 것이다. 속지 말자. 우리는 요한 사도를 통해 주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어느 때고 죄를 지었다면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2천년 전에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6. 성도의 단절된 코이노니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래서 사도 요한은 편지를 써 보내는 목적을 2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1:2)"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죄를 지었어도 아무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하라는 것이다(요일1:9). 그리고 우리의 최대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요일2:1).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실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바로 의로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첫 번째 변호사(파라클레토스)인 셈이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두 번째 변호사(파라클레토스)인 셈이다(요14;16, 26, 15:26). 그런데 이미 속죄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시어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죄만을 용서해 주시는 것일까? 아니다. 그분은 믿는 이들의 죄를 용서해 줄 화목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장차 믿을 자들까지 포함하는 화목 제물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너무 절망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때마다 즉시즉시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코이노니아)을 단절시키지 말아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그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단절되지 않도록 미리미리 예방해야 하는데, 그것은 빛을 따라 행하든지 아니면 지은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사도 요한이 A.D.90~95년경에 보낸 편지에서 가장 염려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제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속아 마치 그것이 진리의 가르침인 줄을 알고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예방 주사를 미리 맞혀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제 갓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시작하는 이들이자, 성도 간에 코이노니아를 소망하고 있는 이들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영지주의자들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며,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인도해 주는 선구자이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 가운데 어디 틀린 말이 있는가? 없다. 여기까지는 우리 주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그들의 가르침이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럽고 추한 물질계를 만든 신은 저급한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육체를 입고 오셨건만, 그들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은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그분이 더럽고 추한 육체를 입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 속에 잠시 들어가서 일하다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그를 떠났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육체를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미혹이요 사탄의 궤계요 적그리스도의 속임수인 것이다(요일2:18, 26, 4:1,3,6, 요이1:7).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 편지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 편지의 서두(요일1:1~2)에서부터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요일2:2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5:5~6a)".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히 찬양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2021년 11월 10일(수)

정병진목사

 

 

요한일서, 대체 이 책은 무슨 책인가? 왜 이 책은 '공동서신(일반서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 책은 서신서임에도 불구하고, 왜 발신인과 수신인 그리고 인삿말도 없는 책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이 책의 주제는 대체 무엇인가? '생명의 교통'인가 '사랑의 실천'인가? 왜 이 책은 영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고 언급하는가? 대체 이들 수신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오늘은 요한서신(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강해의 첫 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메시지 전체가 흥미진진하다.

 

2021-11-03(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1) 요한일서 과연 어떤 책인가?(요일1: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HOQ55jldTk  [혹은  https://tv.naver.com/v/23368603  ]

 

1. 들어가며

  '요한서신'이란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요한서신은 과연 어떤 책인가? 누가 누구에게 쓴 책이며, 무슨 목적으로 쓴 책인가? 오늘은 요한서신의 첫 번째 책인 요한일서의 배경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요한서신은 요한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 편지다. 그런데 이 책은 크게 보면 서신서 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언제 이 편지를 쓴 것일까? 나이가 50대에 쓴 것인가 아니면 60대에 쓴 것인가? 그리고 이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어떤 일이 당시에 일어났던 것인가? 사실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나이 든 사도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리가 만무하다. 고로 요한서신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서신의 배경을 파악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서신서가 한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요한서신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편지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이며,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하여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쓰게 하실 때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과 의도가 있어서 편지를 쓰게 하셨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배경과 원인을 찾아본다면, 이 편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될 것이다. 자, 오늘은 첫 시간이니 만큼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이 책이 쓰이게 되었고 그 주제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요한서신은 신약성경 가운데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요한서신 곧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는 한 마디로 서신서에 속한다. 그런데 요한서신은 좀 더 크게 보면 공동서신(共同書信)에 속하고, 더 크게 보면 서신서에 속하며, 더 크게 보면 신약성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약성경은 크게 네 종류로 구분된다. 복음서와 역사서와 서신서 그리고 계시서(묵시서)가 있다. 복음서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있으며, 역사서에는 사도행전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서신서들이다. 서신서에는 또한 바울이 쓴 편지들만을 모아서 '바울서신'이라고 부르는데, 13권의 성경책이 있다. 로마서에서 디도서까지가 바울 서신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8권의 성경책들 곧 히브리서에서 시작하여,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까지를 우리는 공동서신 혹은 일반서신이라고 부른다(여기에서 '히브리서'는 바울서신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더러 있다). 공동서신(일반서신)이라고 하게 된 이유는 처음에는 단순히 바울서신 이외의 다른 편지들을 가리키는 말로 시작되었지만, 이 8권의 서신들의 특징이 하나같이 이단을 대적하고 또한 박해 중에서 능히 믿음을 굳건히 하라는 모든 교회의 공통된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교회 전체를 위한 서신(바울서신은 특정한 교회나 목회자를 위한 서신이었다), 곧 ‘공동서신’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나 요한일서 같은 경우에는 그 수신자와 발신자까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3. 요한서신은 신약성경에서 어떤 책으로 분류되며 누가 쓴 책인가?

  그럼 요한서신은 신약성경에서 어떤 책으로 분류되며, 누가  쓴 책인지를 살펴보자. 사실 요한서신은 요한일서와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통칭하는 표현으로서, 이 세 권의 책들은 누가 썼는지 이 편지만으로는 알 수 없다. 누가 썼다고 기록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편지들을 요한이 쓴 편지라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책의 제목들이 그렇게 알려진 것일까? 그것은 적어도 기독교 초기 교회의 전승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누가 최초로 이 책들을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라고 명명했고 이 책들을 사도 요한이 쓴 책이라고 명명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자 아폴로니우스(Apollonius)가 최초라고 한다. 그가 2세기 말에 처음으로 이 세 권의 책들을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초기 교부 오리겐((Ὀριγενες, 185년경~254년경) 이후에는 바울서신 외의 다른 모든 편지들을 '공동서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특정한 몇몇 서신만을 일컬어 '공동서신'이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히브리서를 제외한 7서신을 일컬어 '공동서신'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럼 누가 공동서신이라는 표현을 쓴 것인가? 그는 다름 아닌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 A.D. 263-339년경)다. 그리고 훗날에는 '히브리서'가 바울서신에서 점차 공동서신으로 분류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부분 신학자들은 히브리서부터 유다서까지 총 8권의 편지들을 '공동서신'이라고 부른다. 

 

4. 요한서신은 누구에게 보낸 책인가?

  그렇다면 요한서신들은 요한이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는 그 편지를 받는 대상이 나온다. 요한이서의 서두에 보면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라고 나오고(요이1:1), 요한삼서는 요한이 사랑하고 있던 장로 '가이오'라고 나온다(요삼1:1). 그런데 요한일서의 서두에는 수신인도 안 나오고 발신인도 안 나오고 문안 인사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요한일서는 누구에게 보내어진 편지란 말인가? 우리는 요한일서가 아주 독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일반적인 편지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편지들은 다 '나 누구누구는 아무개에게 편지하노니,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형식으로 쓰고 있는데, 요한일서는 서두에서나 말미에 수신자와 발신자 그리고 문안 인사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편지가 그렇게 쓰여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중에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일서의 수신자는 대체 누구인가? 감사하게도 총 다섯 장 분량의 요한일서를 잘 읽어 보면, 이 편지를 누구에게 썼는지 대강 짐작케 하는 단서들을 살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그들을 향하여 부른 호칭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보낸 것이다. 첫째로,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을 대상을 향해 "나의 자녀들아(아이들=테크니아)(1회)(요일2:1)" 혹은 "자녀들아"라고 불렀다(5회)(요일2:12, 28, 3:7, 18, 4:4). 이는 이들이 영적으로 볼 때에 아직 어린 자식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어 둘째로 사도 요한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아가페토이)"라고 불렀다(5회)(요일2:7, 3:2, 21, 4:1, 7). 이는 사도 요한과 친분이 있거나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어서 사도 요한이 그들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받는 대상을 가르쳤든지 사도 요한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셋째,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 '아이들아'라는 표현도 사용하였지만 그것 외에도 '아비들아'(파테레스)(요일2:13,14), '청년들아'(네아니스코이)(요일2:13,14)라는 표현도 함께 사용하였다. 이는 영적으로 다양한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넷째, '아이들아(파이디아)'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들아'라는 헬라어 단어는 '파이디온'이다.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4~5세에서 초등학교 아이들 정도의 아이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영적인 나이로 볼 때에 유아들과 같은 자들에게도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으로 우리는 이 편지가 장성한 분량에 도달한 어른을 위한 편지가 아니라, 이제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영적으로 탄생한 어린아이부터 성숙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사도 요한은 언제 어디에서 목회를 하였거나 또한 바울의 뒤를 이어 성도들을 가르친 것일까?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질 때만 해도 핵심 멤버였다. 왜냐하면 12사도들 중에서 3명 안에 드는 핵심 멤버(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하여 3천 명이 되었을 때에도 그는 베드로와 같이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사울이 스데반을 죽인 사건 이후로 예루살렘 교회에도 세찬 핍박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행8:1~3). 그러자 12사도들 이외에 모든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어떤 이는 자기 고향으로 가서 교회를 세우기 시작한다. 그중에 빌립 집사는 예루살렘 교회의 7명의 안수 집사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가 사마리아에 가서 교회를 세웠고(행8:4~13), 또 다른 이들은 이방 땅 안디옥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된다(행11:19~20). 그러자 그곳에서도 교회가 생긴다. 그것이 바로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다. 교회가 생길 때마다 사도들이 가서 성령의 선물받기를 도와주면서 교회는 성장하지만, 사도행전 15장 이후 사도들의 행적은 더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A.D.66년경에 이스라엘의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자 로마가 군대를 보내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 잠시 쉬는 틈을 타서 기독교인은 예루살렘을 빠져나온다. 그중에 아마도 사도 요한도 포함되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디로 갔는가? 다른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사도 요한은 A.D.70년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하자, 그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쓰임받을 수 있도록 날마다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는 요한은 바울의 주된 사역지였던 에베소 교회로 사역지를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적어도 30년을 목회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돌보았고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노년의 시기였던 A.D.90~95년 사이에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요한일서를 써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6.  A.D.90~95년 당시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A.D.90~95년 당시 교회에 큰 어려움이 찾아왔다. 물론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A.D.81~96)의 황제 숭배 강요도 큰 핍박이었다. 도미시안 황제는 자기를 주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했다. 그런데 오직 그리스도인들만큼은 그 지시를 이행할 수 없었다. 그러자 기독교인에게 대대적인 핍박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이 교회 내에 침투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이었다. 이들은 영적인 지식 곧 그들이 말하는 비밀스러운 지혜를 얻어서 구원얻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인데, 이 사상은 원래 헬라 사상과 동방 종교의 신비 사상을 유대교의 신앙과 기독교 신앙에 접목함하여 많은 교회의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린 이단종파다. 어느새부턴가 영지주의자들은 교회까지 치고 들어왔고 성경 교사로서 활동한다. 그리고 이 세상은 저급하고 무가치한 물질세계와 영원하고 완전한 영의 세계로 이분화되어 있으며, 인생은 그 영혼이 육체에 갇힌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이제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와 영적 세계로 복귀함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저급신으로 취급하였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물질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영지주의자들은 우주의 기원은 최고의 절대신(모나드=단일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것으로부터 아이온이 빠져나와 여러 신들이 생겨났는데, 가장 멀리 떨어진 신들 중에는 데미우르고스(여호와)가 있고, 이 신이 물질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절대신으로부터 가장 먼저 나온 아이온이자 절대신과 마주하는 신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만이 구원의 길을 제대로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은 저급한 육체를 입을 리가 없다고 하였다. 단지 그분은 육체를 입은 흉내만 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에는 그분이 사람으로 보였으나 그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신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사상적 체계를 바실리데스(Basilides)(A.D.117-138)라는 사람이 기독교 영지주의를 집대성하게 된다. 이것을 '가현설(Docetism)'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 4:2과 요한이서 1:7에 나오는 바,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요일4:2-3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이1: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또 한 부류는 그리스도(아들)와 예수를 분리하는 자들이었다. 그중에서 케린투스(Cerinthus, 50-100 AD, Egyptian theologian)라는 사람은 그리스도는 절대신으로부터 나온 최고의 존재로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가 되었지만, 그가 죽을 무렵에 예수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예수를 잠깐 양자로 삼아서 썼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양자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단도 요한일서에 고스란히 나온다(요일2:22).

요일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결국 영지주의 이단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3가지 방면에서 정면 충돌하고 있었다. 첫째, 예수는 육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더럽고 불결하고 무가치한 육체를 입을 수가 있겠느냐고 한 것이다. 둘째, 예수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육체를 입지 않았으니 죽을 리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죽은 자는 예수가 아니라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것이다. 셋째, 예수는 부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이 죽지 않았으니 부활할 리도 없는 것이다. 결국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3대 신앙고백을 정면으로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약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어 아들로 오지 않았다면 인류의 죄를 없앨 수가 있었겠는가? 아마 시작 자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해 죽지 않았다면 인간의 죄는 여전히 지금까지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사망을 이기고 음부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으며, 우리의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졌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 고로 영지주의는 매우 무서운 기독교 이단이자,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7. 요한일서의 3대 주제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은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는 영지주의 이단 세력이 교회에 침투함에 따라,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어린 영혼들을 빼가려는 것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고 이단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 알게하고, 이들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기 위한 예방 주사용으로 쓰여진 편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편지의 수신인과 발신인도 생략하고 문안 인사도 생략한 채 곧바로 예수님의 성육신부터 쓰기 시작한다. 자, 이제, 요한일서 1:1~2의 말씀을 보자.

요일1:1-2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그렇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비롯한 여러 증인들이 태초부터 있어 온 생명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33년 반을 사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인류의 속죄의 값을 대신 치르시고 죽으셨음을 증언다. 그리고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직접 자신이 보았다고 증언한다. 사도 요한 자신이 직접 그분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도 들었고, 자신은 그분 가까이에서 자세히 그분을 지켜 보았으며 직접 손으로도 만져 보았다고 말한다. 고로 요한일서의 3대 주제 가운데 2가지의 주제가 여기에서 나온다. 그중에 첫 번째가 바로 이단 세력의 분별과 퇴치법이다. 그런데 다음 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이단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신성한 생명과 이 생명과의 교통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주제다. 그리고 아울러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어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어 사람이 되게 하셨고 우리의 친족(고엘)이 되어 대신 죽어 인류를 사랑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생명으로 취한 사람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세번째 주제다. 그러므로 요한일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이단 분별 및 퇴치, 둘째, 신성한 생명과의 교통, 셋째, 형제와 이웃 사랑이다. 덧붙여 요한이서는 이단을 제대로 분별하여서 그들과 교제하지 말 것을 교훈하는 책이며, 요한삼서는 이와는 반대로 교회의 지도자와 교사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들을 냉혹하게 대했던 장로 '디오드레베'를 책망하고 진리대로 형제와 이웃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 데메드리오를 칭찬하는 것이 요한삼서다. 

 

8. 나오며

  그러므로 요한일서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초를 제공하는 책이자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이단 세력을 침투시켜 교회를 망가뜨리려는 사탄을 어떻게 생명의 능력으로 제압하는지를 알려 주는 책이다. 그리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신이 거듭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가르쳐 주는 책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하는 책이 바로 요한일서이다. 즉 하나님에게서 나와 있어 왔던 영원하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며, 그분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는 그분이 참된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요한일서이다. 오늘은 요한서신 강해 중 첫 날이므로 이 책의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이 책을 썼던 시기 그리고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 주에는 신성한 생명의 능력과 교통과 아울러 어떻게 사람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지를 좀 더 살펴볼 것이다. 

 

2021년 11월 03일(수)

정병진목사

 

바울은 어떤 지도자였을까? 그는 자신이 아들처럼 낳았다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목회의 편지들을 통해서 그동안 교회에게 보냈던 것과는 좀 다른 편지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구원론"에 대한 새로운 말씀들이 들어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을 언급하기 시작하였고, 믿음의 인내를 강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이것을 강조한 것인가?

2020-05-1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모든 시대를 이끌어갈 참된 영적 지도자(딤전2:4~7)
https://youtu.be/1ed5vMw_u_A [혹은 https://tv.naver.com/v/13896543  ]

 

 

1. 들어가며

  우리의 시대와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이끌어갈 영적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치유와 은사능력이 뛰어난 목회자여야 하는가? 아니면 성도의 지적인 수준을 채워주는 교양있는 목회자여야 하는가? 아니면 늘 성도의 삶에 관심가져주고 심방오고 기도해주는 목회자여야 하는가?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지금의 시대와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를 동틀어 이끌어갈 영적 지도자상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자신의 아들같이 여기다가 제4차전도여행 중에 에베소교회에 머물게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속에 그 해답이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에 따라 여러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유형의 지도자이든지 반드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알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어떤 목회자가 되어서 혼란스런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될 수 있는가?

 

2. 디모데전서는 어떤 책인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도바울의 목회서신으로 알려진 "디모데전서"가 있다. 디모데전서는 목회서신이라는 불리는 '디도서' 그리고 '디모데후서'와 함께 13개의 바울서신들 가운데 맨 나중에 기록된 3권의 목회서신들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디모데전서와 후서 그리고 디도서를 읽어보면, 우리는 사도행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목회서신에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있다가 잠시 풀려났던 A.D.62~63년경의 전도여행기록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에는 그러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이때 바울은 옥중에서 잠시 풀려나 일행과 함께 마게도냐를 거쳐(딤전1:3), 에게해를 건너 소아시아에 있는 드로아로 떠난다. 그리고 가보의 집에 들러 겉옷을 맡겨두고(딤후4:13), 그곳을 떠나 에베소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디모데를 그곳에 목회자로서 남겨둔다. 그리리하여 바울을 대신하여 목회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그리고 다시 소아시아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바다를 건너 지중해의 그레데섬에 도착하여 이번에는 디도를 목회자로 남겨두고(딛1:5), 배를 타고 아가야지방에 상륙한다. 바울은 거기서 겨울을 보내려 하다가 다시 로마관원에 붙잡혀서 로마로 압송되고 두번째로 감옥에 갇혀있다가, 2~3년 뒤 네로황제에 의해 순교를 당하여 주님 곁으로 떠난다. 그런데 바울이 아가야지방에 있을 때에  오면서 떨어드렸던 두 명의 목회자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디모데전서"요 "디도서"이며, 그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유언처럼 써 보낸 편지가 바로 "디모데후서"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와 후서돠 디도서에는 정말 목회에 필요한 필수요소들이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 무엇을 썼는가?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무슨 내용의 편지를 썼을까? 그것을 읽어보면 대략 3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거짓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자와 이단을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여러종류의 거짓된 가르침과 이단들이 있었으니, 거기에는 쾌락주의자도 있었고 금욕주의자도 있었으며, 영지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성경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거짓된 가르침도 있었다. 둘째는 경건생활의 핵심인 기도생활을 잘 할 것과 복음전파자로서 알고 있어야 할 복음의 핵심이 무엇이며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로 사명을 잘 감당할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셋째는 에베소에 교회의 직분자들인 장로들과 집사들을 세우되 어떤 기준으로 선발하고 세울 것인지가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그중에서 둘째부분으로서 디모데의 경건생활의 핵심인 기도생활에 대한 권면과 아울러, 디모데가 어떤 소명을 가진 자인지를 분명이 각성한 채 복음전파자와 교사로서 그가 꼭 알고 있어야 할 복음의 핵심내용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얻기를 바라시며 진리의 완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구원에 관한 소식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한 분인데 그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로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는 내용이었다. 어찌보면 너무나 평범한 내용처럼 보인다.

 

4.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해준 복음의 핵심내용은 왜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바울서신을 많이 읽어본 사람들은 바울이 이때 디모데에 써보낸 복음의 핵심내용에 상당히 변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전에 써 보냈던 편지들 곧 바울이 개척했던 교회들과 빌레몬에게 보내었던 10개의 편지들과 목회서신들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는 문장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전에 바울이 잘 언급하지 않았거나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핏보면 이것이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디모데는 왜 할머니 때부터 유대인으로 살았던 집안으로서,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경건한 유대교의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유대인들은 매일 신6:4~9의 쉐마를 낭독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신6:4~5)" 그런데 바울은 유독히 하나님이 하나요 유일한 분인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딤후2:5에서만 이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딤전1:17에서도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훌로 하나이신 하나님께..."라고 썼다. 특별히 여기에 나오는 "홀로 하나이신"이라는 말은 두 단어가 아니다. 한 단어로서 헬라어로보면 "모노스"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단일한, 유일한, 오직"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다. 그런데 이러한 단어를 또 한 번 더 사용한다. "하나님이 그의 나타내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딤전6:15)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유일하신"이라고 쓰고 있다. 이 말도 "모노스"라는 단어다. 영어로 말하면, 스테레오가 아니라 "모노"라는 것이다. 단일한, 유일한,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한 분 하나님을 바울은 강조해야 했는가?

 

5. 바울은 목회서신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바울이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목회서신(딤전,딛,딤후)에서 하나님을 기록할 때 약간 이상한 부분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로서 새로운 단어를 붙여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디모데전서의 첫 시작부터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딤전1:1)" 바울은 여기서 이전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던 호칭을 하나님에게 붙여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구주(소테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이전까지는 항상 아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붙혀서 사용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은 사도바울만이 아니라 사도베드로와 사도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이 둘도 "구주"라는 명칭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하지 않고, 목회서신에서 무려 6차례나 하나님의 명칭을 기술할 때 동시에 사용한 것이다. 딤전4:10에 가서는 아예 설명까지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그는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4:10)" 사실 "구주"라는 단어는 "구원자"라는 뜻으로, 천사가 아기예수의 탄생 때에 붙혀준 명칭으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그리고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이전의 편지들이나 사도베드로나 요한의 서신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이 단어를 붙혀 사용했다. 하지만 목회서신을 쓰면서 사도바울은 이 명칭을 하나님에게 사용했는데, 무려 6번이나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딤전1:1,2:3, 4:10, 딛1:3,2:10,3:4). 바울은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라고 하면서 그분에게 구주라는 명칭을 붙여놓았는가?

 

6. 바울이 디모데전서에 새롭게 언급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새로운 표현은 무엇이었는가?

  더욱이 바울은 이전에는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새로운 표현을 사용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딤전3:16). 그는 디모데전서에서 먼저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언급했다(딤전1:15). 그러나 좀 더 뒤쪽에 가서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나타난 바 되신 분을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지 않고, "그는"라고 언급했다(딤전3:16). 그러나 여기서 "그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보면, 인칭대명사인 "그(he)"가 아니라, 관계대명사로서 "호스(그리고 그는)"이다. 그러므로 "그분"이란 앞에 있는 어떤 명사주어를 받는 것인데, 앞에 있는 명사주어 가운데 3인칭,남성,단수는 "하나님"이시다. 고로 후대의 사본인 TR헬라어사본이나 비교적 앞에 쓰인 비잔틴사본에서는 아예 "그는" 이라는 관계대명사를 "하나님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바꾼 것인지 처음부터 그렇게 한 것인지는 사실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난 바 되셨다고 명명한 것이다. 그렇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만 말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고 말하였다. 이는 보다 더 분명한 메카니즘을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1:23에서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임마누엘"이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처녀의 몸에 잉태되셨음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성육신만을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이라고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7. 바울은 왜 유일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해 디모데에게 강조해야 했는가?

  그런데 또하나 놀라운 사실이 디모데전서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바울이 "유일한 하나님"에게 "구주"라는 용어를 붙여서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구주(소테르)"라는 단어는 바울의 목회서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1번만 예외)을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붙여서 사용되고 있다. 일례로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구주"라는 용어를 붙여서 사용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목회서신에서 "구주"라는 용어를 예수님에게만(4회)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더 많이 사용했다(6회)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딤전1:1, 2:3, 4:10, 딛1:3,2:10,3:4). 왜 그랬을까?

  사도바울이 예수님에게만 사용하는 용어로서 "구주"라는 용어를 목회서신에 와서는 왜 하나님에게 더 많이 붙여 사용한 것인가? 그것은 4차전도여행을 하면서 무엇인가 충격을 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단 영지주의의 초기 세력들이 막 발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와 그레데섬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해야 할 두 명의 사역자들(디모데와 디도)에게 꼭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이 이것을 넣은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이제 모든 사역을 접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상황에서, 두 명의 후배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과 전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분은 하나인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영지주의 이단 사람들은 구약의 여호와를 저급한 신이라고 보았으며, 신약의 예수님은 가장 최상의 신이라고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구약의 여호와는 분풀이를 하시고 화부터 내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신약의 예수님은 용서하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고로 사도바울은 보통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용어만을 사용하다보면, 나중에는 아버지와 예수님은 전혀 별개의 존재인량 인식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바울은 아버지도 구주요, 예수님도 구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구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8. 믿음으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바울은 또 무엇을 말했는가?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구원의 방편으로서 믿음에 대하여 새로운 권면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지켜내지 않는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 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1:19~20)" 그러나 이전의 편지들에서 사도바울은 구원은 은혜로 받은 것임을 매번 강조했었다. 그러나 목회서신에서부터 그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믿음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전의 편지들에게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앗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진노하심에서 구원얻을 것이라고 했다(롬5:9). 그리고 빌립보성도에게 쓴 편지에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1:6)"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내가 확신하노니...그 어떤 다른 피조물일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목회서신에 들어와서 사도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딤전6:12)"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흠없고 책망받을 것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했다(딤전6:14). 그리고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도 했다(딤전6:21). 그리고 본인도 죽는 그날까지 믿음을 지켜왔다고 했다(딤후4:7). 

 

9. 나오며

  바울이 목회서신을 써 보내던 시점부터 바울에게 있어서 상당히 많은 변화가 찾아온 것 같다. 그것의 하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강조였다. 심지어 성육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이라고 말하면서도(딤전1:15) 동시에 하나님의 성육신(딤전3;16)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자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으로까지 그 범위를 더 넓혀놓았다. 보통 사도들이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분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국한시키어 표현하던 것에서, 이제는 한 분 하나님의 사역으로 그 범위를 더 넓힌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영지주의가 교회 가운데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다른 분으로 보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딤전6:20). 그러므로 위격적인 면에서 분명 아버지와 아들은 다르지만 한 분 하나님이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이단세력에 의해 기독교는 계속 공격을 받고 미혹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구원론에도 상당한 변화가 찾아왔다.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에서 믿음의 인내를 강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번 가진 믿음이라도 그것을 끝까지 지키지 않는다면 믿음에서 파선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 바울은 제4차 전도여행을 끝으로 자신의 사역이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쓴 목회서신들 곧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와 디모데후서는 그가 유언처럼 쓴 목회서신들이다. 우리도 이제는 그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강조와 믿음의 인내를 통한 구원을 다시 한 번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2020년 05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

 

2020년 05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어도 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음식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 내 육신과 영혼 그리고 우리의 주변사람과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또한 믿음이 약한 형제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관하여 구약의 율법서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과 사도들은 과연 어떻게 명령하고 계시는가? 오늘날 상가집에 갔을 때 나온 음식은 과연 먹어도 되는가?

2019-10-20(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결코 먹지 말아야 하는가?(시106:28~29)
https://youtu.be/2HE_1vOdmAI


1. 들어가며

  "우상의 제물" 그러니까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어도 되는가 아니면 결코 먹어서는 아니 되는가? 어떤 분들은 그것을 먹어도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는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저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성경에 있는 말씀 중에 어떤 말씀을 근거로하여 우상제물의 취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정말 성경말씀  곧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우상의 제물을 취식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그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면 왜 먹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었을 경우에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모든 음식은 다 먹을 수 있는가?

  모든 음식은 먹을 수 있는가? 사람들마다 그것을 먹을 수도 있다는 말하는 분들도 계시고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는 분들도 있다.

  먼저,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이나 진리를 아는 자들은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딤전4:3b).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선한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이니, 감사함으로 기도하면서 먹으면 괜찮다는 것이다(딤전4:4~5). 그래서 오늘날에 오순절교단의 한 교파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고 십자가를 긋고 먹으면 아무 문제 없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반대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 본인에게서 하나님의 징계가 나타나고 자기에게만 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과 자기의 후손에게까지 해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오늘늘 우리 믿는 이들은 과연 어떤 가르침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3. 신약성경은 과연 우상의 제물 취식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들 좀 더 앞으로 나아가면 구약성경의 율법규정에는 우상의 제물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첫째, B.C.1445년경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음식법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가?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룩하기 때문에 그들도 거룩할 것을 명하신다. 특히 거룩한 백성은 거룩한 음식만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레11:45~46). 그때 육류 중에서 깨끗한 고기와 더러운 고기를 어떻게 구별하는지를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은 레위기11장에 기록되어 있다. 레11장에 보면 먹지 못하는 부정한 동물들이 있다. 그것들은 첫째로, 짐승 중에는 쪽발이 되었지만 새김질하지 못하는 짐승(예, 돼지) 내지는 새김질은 하나 쪽발이 되지 못하는 짐승(예, 낙타)은 부정하니 먹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다. 둘째로,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는 지느러미나 혹 비늘이 없는 것은 부정하다고 했다(예, 고등어, 명태, 낙지, 상어, 고래). 그리고 셋째로, 새들 중에는 죽은 사체를 먹는 새는 부정하니 먹지 말라고 했다(예, 독수리, 까마귀). 넷째로, 날개가 있으며 네 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을 부정하다고 했다(예, 깔다귀). 그러나 앞의 곤충들 중에서 톡톡 뛰는 다리가 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예, 메뚜기, 여치). 그리고 네 발로 다니는 짐승들 중에서 발바닦으로 다니는 짐승도 부정하다고 했다(예, 사자, 곰, 표범). 그런데 여기에 보면, 우상의 제물에 관한 규정은 없다. 다만, 민수기 25장에서 출애굽2세대들이 그만 싯딤에서 모압여인들와 음행을 하게 되는데, 그들이 그 여자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청하였더니 그들이 그곳에서 가서 먹고 마시면서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게 되고 그들이 브올의 바알과 결합하게 되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였다(시106:28~29).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율법규정에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규정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A.D.49~50년경 예루살렘공의회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처음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하고 이어서 사마리아교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흩어진 헬라파유대인들에 의해 최초의 이방인교회인 안디옥교회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할례파 유대인들이 안디옥교회에 있는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행15:2). 그러나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예루살렘교회에 보냈다. 그리하여 최초의 예루살렘공의회가 열리게 되는데, 그 때 공의회의 수장이었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의 견해를 따라,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에게 대해서는 자기들의 조상들이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지 말고, 다만 음식과 음행만 주의시키자고 결의하게 되었다. 그때 먹지 말고 권면한 3가지의 음식이 있었으니, 그것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은 것"이었다(행15:20,29, 21:25). 그렇다. 예루살렘공의회에서는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오더라도 그들에게 율법의 규례들 즉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음식과 음행에만 주의를 시켰는데, 그 음식들 중 하나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곧 "우상의 더러운 것"을 먹지 말라고 결정하였던 것이다.

  셋째, 신약의 사도들 중에서 사도바울은 A.D.55년경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가? 사도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도 먹을 수 있다고 허용하는 듯하는 말은 했지만 결국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서, 믿음이 강한 자는 어떤 것이라도 다 먹을 수 있다고 편지를 시작하고 있다(고전8장). 왜냐하면 이 세상에 우상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은 한 분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고전8:4).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그래서 조심할 것은 믿음이 강한 형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을 믿음이 약한 형제가 보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만일 음식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고전8:13).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가진 자유가 남을 해치는 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로 했다(고전9장). 그리고 그는 좀 더 나아가서는, 성찬식과 우상의 제물을 비교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 것을 말한다(고전10:14~33). 즉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식에 참여하게 되는데, 성도들이 참여하는 성찬식용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며, 마시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고전10:16). 마찬가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우상과 교제하는 것이 되는데,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니,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는 곧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된다고 주장한다(고전10:20).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를 향하여 그들은 그들은 결코 귀신과 교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찌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겠으며, 어찌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약하디 약한 존재인데, 우상의 제물을 먹음으로 하나님을 분노하시게 하면 되겠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모든 것이 다 자신을 세우는 것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고전10:23). 특히 주의 몸을 잘 분별하지 못한 채 성찬식에 참여하는 성도들 가운데에는 약한 자도 생기고 병든 자도 생기며, 심지어는 죽는 자도 생긴다고 경고했다(고전11:27). 결국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서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것임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넷째, A.D.95~96년경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 다시 하늘에 가셔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때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특히 소아시아 일곱교회들 가운데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 가운데 주신 말씀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얼마나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조금 있다고 살펴볼 것이다). 이는 곧 성도들은 결코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것은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이 우상숭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두아디라교회에는 이세벨이라는 거짓여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두아디라 성이 자기들의 수호신인 티림노스를 경배하고 그 신에게 바쳐진 음식을 나눠먹는 식사에, 자기 교회의 성도들이 참여하는 문제에 있어서 놀라운 주장을 했다. 그것은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아마도 영지주의적 사고를 가진 것 같다). 이미 영지를 깨달은 자는 물질(음식)이 영혼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고 믿은 것 같다(그리하여 성도들을 우상숭배의 죄로부터 풀어버린 것이다). 결국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는 우상숭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은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는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되고, 그러면 그는 죽어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계21:8). 둘째,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이후 레위기 11장에 규정된 율법규정에 따른 고기취식금지는 다 없어졌기에, 신약의 성도들에게 어떤 고기나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단 하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만큼은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상의 배후에는 귀신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뒤에서 경배받고 있는데, 귀신은 더러운 영이면서 저주받은 영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제물이 바쳐지면 동시에 그 제물도 더럽게 되고 저주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기는 다 먹을 수 있으나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만큼은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먹는 자도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셋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게 되면 자신의 육신과 영혼에 심각하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계2:22~23). 특히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좋다고 가르치는 자는 질병의 침상에 던져지게 되고, 그러한 가르침을 동조하며 따라가는 자는 큰 환란에 빠지게 되며,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좋다고 가르치는 자의 자식이 하루 아침에 죽임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전10:20에서도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면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고 했다. 고전11:29~30의 말씀처럼,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도 잘못 먹으면, 사람이 약하게 되고 병들게 되며 심지어 죽게 되는 경우도 발생하는데, 하물며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계:21:8에 가면, 우상의 제물을 먹어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둘째사망의 해를 받는 것이다.

 

5. 나오며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에 심각한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모습을 지켜본 자들 중에 담대한 자는 큰 환난에 던져지며, 그것에 완전히 빠진 자는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 줄을 알면서 먹는 자들 중에서는 잘못되면 실족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만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질병과 사건사고에 시달리게 되고 환난에 처해졌을 때에는 그만 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음식은 먹을 수 있어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만큼은 결코 먹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더러운 음식이요 우리의 육체에게 질병을 가져다주며, 영혼을 지옥에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늘날에 상가에서 나오는 음식은 보통 상조회에서 제공하는 음식으로서, 그것을 죽은 자에게 바치거나 제사를 행한 후에 물려나온 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먹는다고해도 별 탈은 없을 것이다.

 

2019년 10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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