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는 결혼후 약 10년간 자녀가 없었다. 그녀가 자식을 낳지 못할 이유는 특별히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때 그녀가 그 문제를 돌파하려고 선택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기도'였다. 기도는 사실 하늘에 속한 능력이 이 땅으로 파고 들어오게 만드는 일종의 영적 장치다. 그러자 그녀는 본격적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결과를 보게 된다. 대체 그녀가 발견한 기도란 어떤 것이었으며, 어떻게 기도했길래 그녀는 첫번째 아들 사무엘 이외에도 5명의 자식을 더 낳을 수 있었던 것인가? 그녀가 가르쳐주는 기도응답의 비밀코드를 이제 알아보자.

2021-11-19(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무엘상강해(04) 한나가 드린 기도, 대체 어떻게 되어 응답된 것인가?(삼상1:7~2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FjXKXWoxWzo [혹은 https://tv.naver.com/v/23692867 ]

 

1. 들어가며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 중에 유명한 기도가 있다면, 어떤 기도가 있을까? 아마도 롯의 구출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 가족과 식구들을 살리기 위한 야곱의 철야 기도, 우상 숭배했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거는 모세의 기도, 한나의 서원 기도, 다윗의 회개 기도, 엘리야 선지자의 불을 내리는 기도, 히스기야의 전심 기도, 예레미야의 눈물의 기도, 다니엘의 하루 세 번 기도 등은 유명한 기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도들 중에서 여자가 드린 기도는 '한나의 기도' 뿐이다. 대체 그녀는 어떤 기도를 드렸던 것일까? 그리고 그녀는 대체 어떤 기도를 드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게 된 것일까? 그녀가 드리는 기도는 오늘날 기도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더불어 꼭 응답받기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응답받는 기도의 전형을 보여 주는 아주 중요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2. '한나'라는 여인은 어떤 사람인가?

  '한나'는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레위인의 후손인 엘가나의 정실 부인이었다. 그때 그녀의 남편이었던 엘가나는 숩의 현손으로서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이었다. 그때 엘가나와 한나는 숩의 자손들이 사는 두 개의 고지라는 뜻을 가진 '라마다임 소빔'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집온 그녀에게 결함이 있었으니 그녀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마도] 자식을 보기 위해 엘가나는 고민 끝에 첩 곧 후실을 들인 것 같다. 그 첩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그런데 후실로 들어온 둘째 부인은 정말 자식을 잘 낳는 것이었다. 얼마를 두었는가 하고 살펴보니,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그녀는 적어도 아들 두 명과 딸 두 명을 낳았던 것 같다(삼상1:4). 그러니까 그녀는 최소 4명의 자녀들을 둔 것이다. 그런데 4명의 자녀들을 두기까지 한나는 여전히 자식을 낳지 못한 채 그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더 괴로운 것은 브닌나가 명절을 지키러 실로 성소에 올라갈 때에 자기를 놀림으로 자기를 격분시키는 것이었다. 아마도 애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놀리지 않았겠는가 싶다. 

 

3. '한나'는 왜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것인가?

  옛날 시대에는 여자가 시집 갔는데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것은 큰 수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나가 그러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했던 것일까? 성경과 동시에 오늘날의 의학적인 지식을 동원해 말할 수 있는 여자의 불임의 요인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여자나 혹은 여자의 선조가 우상 숭배의 죄를 지었을 경우다. 그러한 경우 하나님께서는 임신을 못하게 하신다(출23:24~26). 그런데 구약시대에는 우상 숭배에 대한 징계 조치로 인해 여자가 자식을 못 낳았다고 한다면, 신약시대는 우상 숭배에 대한 징계 조치가 달라져서 귀신들이 자궁 속에 들어와서 잉태를 방해하기 때문에 자식을 못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결혼을 했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한다면, 우상 숭배의 죄가 있나를 살피고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여자의 자궁 속에 들어 있는 귀신들을 쫓아내야 한다. 둘째는 여자가 자연의 법칙을 어길 경우에도 애를 낳지 못한다. 예를 들어, 여자가 나이가 많아지면 애를 낳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여자가 늙어지면 아이의 생산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자궁이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을 때에도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이것을 한방의 용어로 말하자면, 자궁에 어혈이 많이 있으면 수정란이 착상이 잘되지 않아 아이를 낳지 못한다. 그리고 난소에 용종같은 것이 생기고 생리할 때에는 많은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다 어혈이 많아서 그렇다. 그리고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세 번째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애를 낳지 못하도록 막으실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흔하지 않는 것이다.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간혹 하나씩 있는 것이 성경에 등장한다. 이러한 사례를 성경에서 고르라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삼손의 엄마(삿13:2~7), 사무엘의 엄마인 한나(삼상1:2~6), 세례 요한의 엄마였던 엘리샤벳(눅1:5~7)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고자 여인의 태를 닫으셔서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여인들은 결국 서원 기도를 통하여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게 된다. 장차 사무엘을 낳게 되는 한나의 경우도 바로 이 세 번째의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녀의 자궁을 닫아 버리셨기 때문에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1:5~6).

 

4. 자식을 낳기 위해 한나가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남편으로부터는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설움에 북받쳐 사실 눈물로 살아야 했다. 특히 브닌나가 자신을 격동시킬 때에는 그 괴로움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자 한나는 어떤 마음을 품었을까? 아마도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다음과 같은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첫째는 브닌나를 시기 질투하다가 결국 그녀를 쫓아 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둘째로, 우울증에 빠졌을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무자한 자신의 처지를 놓고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 그것은 그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어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실로의 성소에 나가서 기도하기를 작정한다. 본래 여자들은 명절을 지키되, 굳이 중앙 성소(당시에는 '실로'에 있었다)에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녀는 남편을 따라 올라간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불임의 수치를 시기 질투로 푼 것이 아니라 기도로 풀려고 했던 것이다. 참으로 잘 선택한 일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5. 한나는 자식을 낳기 위해 대체 어떤 기도를 드려서 응답받은 것인가?

  그렇다면 한나가 자식을 얻기 위해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성경을 살펴보니, 한나가 드린 기도는 최소 3가지 형태의 기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한나는 자식을 얻기 위해 기도를 하는 가운데 점차 기도를 배워갔다. 그래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자식을 낳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한나가 선택한 기도의 방법이란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총 5가지의 기도 방법이었다. 

  첫째, 그녀는 작정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삼상1:3,7). 그녀는 매년 절기 때마다 남편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가 기도하였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자식을 낳을 때까지로 작정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가 사무엘을 낳은 이후에 3년간은 성전에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삼상1:21~22). 그렇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 매년 성전에 나아가서 기도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불임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날을 작정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7일 작정 기도, 21일 작정 기도, 40일 작정 기도, 100일 작정 기도, 3년 작정 기도 등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다. 

  둘째, 그녀는 금식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삼상1:7~8). 어느 해였다. 한나가 성전에 올라갔지만 다른 식구들과 함께 공동으로 식사하는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먹는 것을 중단하였다.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께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금식을 계속한다. 그리고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주어진 후에 비로소 음식을 먹는다(삼상1:18). 사실 금식 기도처럼 강력한 기도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악한 영의 결박까지도 풀어 해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라. 대부분의 성경의 위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 풀기 어려운 문제 앞에서 탄식하지 말고 금식 기도에 들어가 보라. 그런데 참고로 오늘날 우리가 금식 기도할 때에는 조심할 것이 있다. 처음부터 날짜와 시간을 너무 무리하게 잡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 끼 금식 기도나 혹은 하루 금식 기도를 실천해 보라. 그리고 이어서 3일 금식 기도, 7일 금식 기도를 도전하고, 더 나아가서는 21일 금식 기도, 40일 금식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셋째, 그녀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삼상1:10). 그녀는 자기도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울면서 또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은 사실 눈물에 약하신 분이시다. 눈물 자체에 약하다기 보다는 우리의 진심 어린 기도에 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한 소원을 올릴 때에는 눈물로 기도를 드려 보라. 경험해 보시면 이것 또한 얼마나 강력한 기도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기도해도 사실 대부분 기도 응답을 받는다. 작정하여 금식하면서 눈물로 기도하는데 안 들어주실 하나님은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방법으로 기도를 드렸는데도 기도 응답이 되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때에는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어서 기도 응답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기도하는 여자였던 한나도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한나는 그러한 영적인 감각이 있었던 여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른 종류의 기도를 드린다. 

  넷째, 한나가 서원하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삼상1:11). 그렇다. 그녀가 작정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눈물로 기도해 보았지만 응답이 없었을 때에,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이 임신하지 못하는 분명한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곧장 서원 기도에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자기 자식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서 나실인으로 쓰임받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나님께 서원으로 기도하기 시작한다. 만약 자기에게 남자의 씨를 주신다면 그 자식을 영원히 하나님께 드리겠노라고 기도를 드린 것이다.

  다섯째, 그녀는 이어 영의 견고한 기도를 드린다(삼상1:15). 그녀는 그때 영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서원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임을 알아차린다. 그러자 그녀는 자식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서운하게 생각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주님께 아뢰었던 서원을 철회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영이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도는 배우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야 한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친밀해지는 하나의 과정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실현되기 위한 나의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의 태를 열어 주신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모세와 견줄 만한 하나님의 종 바로 '사무엘'이라는 인물이다. 

 

6. 주의 종의 축복 기도, 과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나가 믿음의 여인이었다는 것은 영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을 때에 발생하게 된다. 한나가 영의 기도에 들어갔을 때에 성전 문 앞에서 그것을 줄곧 지켜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이었다가 직무를 쉬고 있던 사사, 엘리였다. 엘리 제사장은 그녀가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녀더러 낮부터 술 취해서 되겠느냐면서 포도주와 독주를 끊으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기에 겸손히 제사장에게 아뢴다. 자기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기도를 했었노라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악한 여자로 보지 말기를 요청한다. 그러자 비로소 상황 파악을 한 엘리 제사장은 그녀에게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1:17)"이라고 축복해 준다. 그렇다. 아무리 영적으로 무능하고 무지한 주의 종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그 종에게 있을 때에는 주의 종의 축복 기도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는 복있는 사람이다. 그러자 그녀는 주의 종의 축복 기도를 하나님의 응답의 확증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때에 드디어 금식을 끝냈고 더 이상 그 문제로 근심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동침하니 곧 임신이 되었고 그녀는 곧이어 아이 사무엘을 출산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었는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한나는 사무엘 출산 이후에 또 임신하여 자식을 낳게 되었으니, 무려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더 낳게 된다(삼상2:21). 다산의 축복이 그녀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브닌나보다도 2명의 자식을 더 낳았는지도 모른다. 

 

7. 나오며

  기도는 사실 사명이자 일종의 훈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두신 송수신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한나가 처음에는 브닌나의 격동으로 인해 자기의 설움을 못 이긴 채 기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도하면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작정하고 기도하게 되었고, 금식하며 기도하였으며 눈물로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된다. 그리고 즉시 장차 태어날 아기를 주님께 드리겠노라고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자신의 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주의 종의 축복 기도를 통해 확증을 얻게 된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분명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그때에 우리도 역시 한나의 기도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받을 점이 있기에 한나의 기도를 성경책 속에 남겨 두셨기 때문이다. 한나의 기도처럼 기도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도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 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5배의 축복을 더 주실 것이다. 그녀가 처음 기도하여 얻은 사무엘을 주님께 드렸더니,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알려졌던 한나였지만 무려 3남 2녀라는 자녀를 더 두었기 때문이다. 

 

2021년 11월 19일(금)

정병진목사

 

  방언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교회에서 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통역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전14:13,28).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들이 교회에 왔서는 그만 성도들은 미친 사람처럼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 방언을 통역해 줄만한 사람을 어디 쉽게 발견할 수 있는가? 만약 방언을 통역해 주는 사람이 건전한 목회자라면 좀 낫겠지만, 만약 평신도가 방언을 통역하게 된다면 방언통역은 안 하느니보다 더 큰 문제를 유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방언통역을 실제로 해보면 일종의 예언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예언의 단점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이 방언을 통역하느냐에 따라 방언의 내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방언통역을 하는 사람이 대체적인 윤곽만을 통역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통역은 왜 필요한지 그리고 방언통역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실제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그리고 방언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방언통역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첫째로, 방언소리만으로 자신이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답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므로 만약에 방언을 통역하지 아니한다면 자신의 영이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젼혀 알 수가 없다(고전14:2). 그러므로 답답해진다. 만약 방언을 하는 자가 자기의 영이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상태 가운데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든지 답답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해야 한다. 둘째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그것이 예언처럼 교회의 덕을 끼치기 때문에 방언은 통역할 필요가 있다(고전14:4~5). 사도바울은 말한다.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통역하지 아니하면 교회의 덕을 끼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통역해서 모든 사람이 듣게 할 때에 비로소 방언은 교회에게 덕을 끼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방언통역을 통해 성령께서 그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하며 책망도 하기 때문이다.

  둘째, 방언통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방언통역은 보통 2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방언을 말하는 자가 방언을 하고 나면 방언의 통역의 은사를 받은 자가 그 방언을 통역해주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방언을 말하는 자가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을 들으면서 동시에 통역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다고 방언기도의 내용이 많다고 해서 많이 통역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라. 어떤 것은 방언의 길이가 길더라도 한 마디로 간단하게 방언통역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것은 방언의 길이는 아주 짧은데도 엄청 길게 방언통역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앞의 통역의 경우는 거의 문구대 문구로 통역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뒤의 통역의 경우는 방언의 내용이 대체적으로 어떤 것인지가 모아져서 즉각적으로 통역이 되는 것이다. 각기 장단점이 있기는 하다. 앞의 경우는 문구대 문구 통역이므로 그것으로 인하여 방언하는 자의 과거의 죄악이 숨김없이 폭로되어 방언하는 자를 시험들게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뒤의 경우는 방언내용의 대체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으나 정확한 내용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두번째의 경우는 방언을 통역하는 자의 분량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므로, 방언을 통역할 때에는 어떤 방식으로 통역하는지를 알고 통역을 받아야 할 것이다.

  셋째, 실제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어떤 것이 통역이 되는가?

  보통 3가지로 통역이 되어 나온다. 한 가지는 정말 그 성도의 영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가 통역으로 나온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언처럼 그 사람에게 말하여 권면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책망하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성령의 음성이자 하나님의 음성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나온다. 이렇듯 방언의 내용은 '기도'이거나 '예언'이거나 '찬양'이다. 대충 분량으로 계산해 본다면 기도의 경우는 약 15%, 예언의 경우가 약 80%, 찬양의 경우는 약 5%정도 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와같이 방언의 내용은 생각 외로 성령께서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책망하는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넷째,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통역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만약 통역이 문자대 문자로 통역된다면 그 통역은 아주 분명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 윤곽으로 알고 통역한다면 그 통역은 통역하는 자의 신앙과 성경을 아는 분량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통역된 방언내용이 성경말씀을 대용하거나 성경말씀에 앞설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통역된 방언은 성경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보증해준다고나 할까이다. 그렇다. 오직 성경말씀만이 진리인 것이다(요17:17). 방언통역은 영의 간구 즉 기도하는 자의 영의 소원도 같이 들어있기에 그것은 결코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에서 혹 예언이 나왔다고 해서 꼭 그대로 되어질 것처럼 운명론에 빠져서도 아니 될 것이다. 방언 중에서 예언적인 부분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니만큼 그것을 들어쓰면 그것을 붙잡고 더욱 기도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방언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방언의 내용에서 버릴 것은 단 한 가지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방언을 통역해 보면 방언의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을 떨어뜨리는 내용이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간구하는 내용이 전혀 나오지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싶은 것은 할수만 있으면 방언통역은 말씀에 대한 바른 정립이 되어있는 목회자가 통역할 것을 추천해 드리고 싶다. 만약 평신도가 방언통역을 하게 된다면 잘못하다가는 잘못된 예언처럼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방언통역은 사실 목회적으로 매우 유용한 은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위험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혹 이때까지 방언 통역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방언만 하고 있는 성도가 있는가? 그렇다면 신뢰할만한 통역자를 만나 꼭 통역을 받아보라. 그래야 방언기도의 내용을 알면서 기도할 수 있으니, 더욱더 방언기도를 힘있게  그리고 방언기도를 더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방언하면서도 답답함을 덜 느끼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예언처럼 방언통역이 나왔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영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므로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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