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4(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4) 양의 문이자 목자이며 하나님과 한 분이신 하나님(요10:1~4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MVr-2CxIa4  [혹은 https://tv.naver.com/v/32159167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과연 어떤 책인가? 요한복음은 사실 기독론의 책이다.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것들이 풍성하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예수님의 7가지의 표적으로도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을 통해서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의 2가지 자기 선언이 나온다. 그것은 예수께서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께서 '선한 목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신 것일까? 그리고 수전절 때 설교하실 때에는 왜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2가지 자기 선언과 아울러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일체성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더불어 만세 전 예정론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가 과연 요한복음에 나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는 초막절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어떠한 자기 선언을 하셨는가?

  요한복음 10장은 요한복음 7장부터 시작된 초막절 설교의 마지막 부분과 그때로부터 2개월 뒤 수전절 기간에 있었던 예수님의 설교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그중 초막절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 가운데 세 번째와 네 번째 선언에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이전 유월절 때도 오병이어의 표적과 함께 첫 번째로 자기 선언을 하신 바 있다. 그때는 당신 자신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막절 중간 즈음에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나서 두 번째로 자기 선언을 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막절의 끝에 가서도, 나면서 맹인된 자를 고쳐 주신 후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시고나서(요10:1~6), 이와 관련하여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셨다. 하나는 "나는 양의 [출입]문이다(요10:7,9)"라고 하신 것이요, 또 하나는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14)"라고 하신 것이다. 

 

3.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자 선한 목자로 표현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자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신 것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진짜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래서 누가 진짜 양의 문이자, 진짜 양의 목자인지를 알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왜나하면 예수님을 흠잡아 그분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실상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 주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과연 누가 진짜 양의 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누가 진짜 양의 목자인지를 알려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것을 말씀하심은 훗날 곧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깨닫고 회개하여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도록 하시려고 그렇게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 친히 자신을 '양의 [출입]문'이라고 말씀하신다(요10:7,9). 그럼 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스스로 양의 문임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누가 진짜 양의 문인지를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아주 훌륭한 양의 문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즉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로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양떼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정식으로 출입문을 이용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고 있었다(1절). 다시 말해 그들은 본래 양의 목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양을 도둑질하고 해치는 절도(도둑)요 강도였던 것이다(1절, 8절). 왜 그런가?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천국문을 닫아버리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마23:13).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자기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마23:15).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천국문을 막는 주범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 중에 먼저, 사두개인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충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사에 쓰이는 제물을 판매하고 성전 세겔로 환전하는 자들이었는데, 그 일들을 통하여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남기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있는 성전을 향하여, 더 이상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었던 사람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율법해석자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백성들로부터 칭송과 흠숭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해석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성들이 과연 율법을 어겼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찾아가서 물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에게로 가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전까지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것이다. 이에 분이 치밀어 올라왔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아서 어찌하든지 그분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벌써 그렇게 보낸 시간이 3년이 되었으니 그들의 시기 질투심은 당시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6개월 후가 되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히 알려 주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은 결코 '양의 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양의 문이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양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할 수 있어야 한다(9~10절). 즉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자기들을 통하여 양들로 하여금 꼴(목초지)을 얻되 들고나오면서 풍성히 얻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9~10절). 이것은 양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풍성한 축복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은 과연 누가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친히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5.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목자를 자처했지만 그들은 아주 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매도하고 있었고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죽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자란 무엇인가? 목자란 기본적으로 양떼를 돌보고 양육하며 푸른 초장과 맑은 시내로 인도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양떼를 사나운 이리떼 곧 사탄 마귀로부터 지켜내고 보호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양떼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부려먹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양떼들의 돈을 뜯어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선한 목자상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셨다. 그것은 첫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자라야 참된 목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선한 목자는 이리떼가 오면 양들을 내버려두고 달아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떼로부터 그들을 건져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삯꾼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럼, 삯꾼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돈을 받고 고용된 품꾼들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실제로 목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양도 자기의 양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그들을 내버려두고 그냥 달아난다. 그리하면 이리가 와서 양떼를 낚아채 가고 또한 흩어버리게 한다. 여기서 '이리'란 양떼인 하나님의 성도들을 해치는 세력으로서 사탄 마귀와 귀신들을 가리키며, 이단 세력 등을 가리킨다. 선한 목자는 이러한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양떼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양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양떼들을 위해 내어놓으셨던 것이다(막10:45). 

 

6. 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아직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6절). 즉 그들이 주님께 속한 양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주님의 양이 될 수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이 주님의 음성듣기를 거절하며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7절). 또 하나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27절).

  그렇다면 주님께 속한 양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살면서 주님의 양으로 정해지는 것인가? 사실 이것은 매우 영적인 일로서 그 실상은 이렇다. 사람은 남녀가 만나 사랑함으로써 아내의 자궁 안에서 생명이 수정이 되고 그리고 배 속에서 약 10달을 자라서 출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육체의 출생만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은 언제 어떻게 생성되고 자라게 되는가? 그것은 이렇다. 우선 사람의 영혼은 이 땅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늘의 낙원에서 창조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아이가 엄마의 태중에서 약 2~3개월 정도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그 아기의 몸속에 집어넣어 준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은 하늘에서 온 것이며, 사람의 육체는 이 땅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영혼은 구별하여 주님의 양이 될 영혼으로 미리 정해 놓으시고, 어떤 영혼은 주님의 양이 되지 못하도록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일까? 그건 아니다. 누구든지 이 땅에서 태어나서 자신의 영이 왔던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주님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귀신들이다. 자기들은 절대 못 돌아갈 것을 알고 그렇게 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이 만세 전부터 정해졌고, 마귀의 자녀가 만세 전부터 정해졌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 땅에 태어나서 주님의 양으로 정해져 가기 때문이다.

 

7. 주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정한 사람에게만 영생을 주시며, 한 번 얻은 영생은 영원히 보전되는가?

  이제 정리해 보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만세 전부터 예정된 것인가 아니면 살면서 구원받을 사람 안으로 예정되어 가는 것인가? 만세 전 예정론자들은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태초 전에 이미 예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예정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반대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셨다고 그들은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을 사람으로 예정해 놓으시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히 멸망받을 사람으로 예정해 놓았다는 것이다(이것을 '이중 예정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은 합당하며, 성경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세전 예정론자들은 그걸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나온다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내세우는 성경 구절로서 요한복음 10:29절의 말씀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가 다루는 본문 안에 만세 전 예정론에 관한 확실한 근거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진짜 그러한지, 개역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부터 살펴보자. 

요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만세 전 예정론자들은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준 자들에게만 영생을 주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람만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예수님에게서 그 사람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말씀의 의미는 예정론자들이 해석하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을 보면, 첫째,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는 자는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 '그들' 곧 '양떼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27절에 나오는 바로 그 '양들'을 가리킨다. 그러면 이 양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27절에 보면, 주님의 양들로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고,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자들이다. 즉 이들은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고 있는 자들에게 주께서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둘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자는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 그것은 중성 단수명사로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이미 주신 채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글 개역성경은 헬라어 원문을 따라 번역하지 않고, 소문자 사본의 말씀을 가지고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글 개역성경은 대문자 사본을 대본으로 하여 대부분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 요10:29에서 만큼은 후대 사본인 소문자 사본에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그것은 아마도 처음 한글로 성경을 번역했던 자가 아마도 만세 전 예정론을 교리로 믿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이 든다. 그렇다면, 원래 성경 원본에 가까운 번역본인 대문자 사본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요10:29 내 아버지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채 있는 그것은 모든 것들보다 크다. 그러므로 아무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계속] 낚아채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렇다.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인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그렇게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것을 예수님에게 주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던 것들에는 능력, 지혜, 권세, 영광 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것을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으려고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예수께서도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자를 절대 사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 안으로 예정되어 가고 있어도 그가 나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절하고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도 결국 영생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으로 요10:28의 말씀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요10;28 그리고 내가 그것들(양들)에게 '시대의 생명'을 준다. 그러면 그것들(양들)은 '그 시대까지' 스스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양들)을 내 손으로부터 [장차] 낚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자신의 음성을 듣고 있고 자신을 따르고 있는 자에게 주시는 것은 '시대의 생명'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까지의 유효한 생명을 그분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은 자라도 '그 시대까지'까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가 이미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받아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도 우상숭배하고 간음을 저지르거나 거짓말하는 등 십계명을 어기고 살면, 그러다가 회개치 못한 채 죽게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죽을 때에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대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이 시대를 떠나 다른 시대로 들어갈 때 생명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멸망 안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러한 구원이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3:5에서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8. 예수께서는 정말 신성 모독죄를 지은 것인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말씀하신다(30절). 왜냐하면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24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하나였다. 고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있는 중에도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거하시고 있었으며, 아버지 안에 예수께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38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도리어 말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선한 일들을 해 왔는데, 어찌하여 돌로 치려 하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 그분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신성 모독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구약성경의 말씀을 들어 변호하신다. 즉 구약의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재판하는 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신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시82: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히 구별하여 이 땅에 아들로 내려보냈던 자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신성 모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만일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거든 예수께서 행하신 아버지의 일들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는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시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자 예수께서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시어 베레아 땅으로 피신하신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된 책이요,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말해 주는 표적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을 많이 접하게 된다. 다른 세 개의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요한복음을 통해서는 예수께서 주 하나님으로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여러 말씀과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로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목수였던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천한 선지자로서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행하신 일들로 말미암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곧 아버지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파송받은 이이신 것이다. 고로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한 분이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그분은 만물이 있기 전부터 먼저 계셨다. 그리고 만물을 창조하셨던 창조주이시다. 그렇지만 유대인들 중에는 그동안 종교지도자들로서 누려왔던 물질적인 풍요와 백성들로부터의 찬사를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대적자가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약 4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 나라 자체를 없애버리신다. 회개하지 않은 완악한 자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들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양들로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얻은 영생(시대의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죽은 바 된 후에도 계속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생명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요, 내가 죽을 때에 내 속에 이제까지 줄곧 있어 왔던 성령께서 나를 떠나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2023년 01월 04일(수)

정병진목사

2022-09-25(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왜 한 번 얻은 영생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는가?(요10:26~2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JHlTrIszdMs  [혹은 https://tv.naver.com/v/29459531 ]

 

1. 들어가며

  어떤 분들은 한 번 영생을 얻었으면 그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주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분들에게 속한다. 이는 구원에 있어서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구원의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은 백 번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는 일거수 일투족을 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해두신 후에 인간이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딤전2:4,벧후3:9).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도록 그에게 강제로 믿음을 쑤셔 집어넣거나 아니면 주리를 트시는 분이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떨어졌다면, 하나님은 결코 심판 때에 그를 심판하실 수 없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뜻대로 다 해놓고 우리더러 왜 믿지 않았느냐고 다그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믿어서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 할지라도 그 이름이 지워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을 통해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잃어버릴 수가 있다는 것이 성경말씀이다(계3:5).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한 번 얻은 영생이라도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리고 한 번 얻었던 영생을 우리가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간직하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영생'과 '생명'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어떤 분은 '영생'과 '생명'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생을 얻는 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의 줄임말로서, 생명과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영생'은 어떤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언급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영생'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성경에서는 '영생'을 '아이오니오스 조에(ionios zoe)'라고 말한다. 이 말은 보통 우리말처럼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번역은 그 말이 의역이지 정확히 번역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아이오니오스 조에'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시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식어 '아이오니오스'는 명사 '아이온'의 형용사형으로서, '아이온'은 '시대(age)' 혹은 '세대'(generation) 혹은 '세상'(world)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오니오스 조에'는 '시대의 생명'이라고 번역해야 가장 적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생명 중에서 어느 시대에 필요한 생명이 가리키는 특별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생명'이란 무엇이며 '생명'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생명(=조에)'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조에'라는 생명은 육체의 생명을 가리키지 않는다. 육체의 생명은 헬라어로 '비오스'라고 한다. 육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명은 '비오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 그런데 '조에'라는 생명은 영혼에게 필요한 생명으로서, 이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이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도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그것을 취할 수 있도록 에덴동산에 과일의 형태로 놓아두셨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불순종하게 되어 에덴동산에서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 그래서 생명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생명으로 먹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그렇다.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취하면 사람을 영생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자기자신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요5:26). 그런데 예수께서는 살아있는 인격체이므로 그분을 우리가 직접 먹을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죽음의 과정을 통하여 그 생명을 해방시켰고 그 생명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바람처럼 호흡처럼 주시기 위해 성령이 되셨다(고전15:45, 고후3:17). 이제는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그 사람 속에 생명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 이 땅에 들어오셨으며, 먼저 인간이 지은 죄를 속량하시기위해 피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해방하여 누구든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요5:2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는 죽고 부활하신 후에 생명주는 영 곧 성령이 되셨다고 언급한 바 있다(고전15:45).

 

4. '영생'이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영생이란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영생'이란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시대의 생명'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은 '영생'이라고 하니까, 영원히 사는 생명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불신자들도 죽은 후에 지옥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이라는 단어가 시간과 장소에 관련하여 어떤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영생'이란 다음 시대에 우리가 필요한 생명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영생은 이 땅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영생은 우리가 죽고 난 후 다음 시대에 과연 어디서 살 것인가를 결정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이 다음 시대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한 자들은 내세(오고 있는 시대)에서 반드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8:29~30). 왜냐하면 영생은 다음 시대에 필요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고로 영생이란 한편으로는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장애인으로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18:8~9). 왜냐하면 영생이란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우리의 영혼이 들어가는 다음 시대의 장소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그때 대신하여 들어오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우리는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5. 영생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인가?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을 주시려 오셨다는 것을 알고 그분의 피가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에, 비로소 생명을 얻어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믿음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5:24).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얻은 영생을 과연 우리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가? 어떤 분은 한 번 얻은 영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에게 들어오시는 보혜사 성령은 영원토록 믿는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말씀은 요한복음 14:16~17에 나온다. 우선 그 말씀을 우리말 성경으로 그대로 옮겨보자.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렇다. 예수께서는 부활승천하신 후에 아버지께 구하여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또한 우리 속에 계시 것이라고 하셨다. 이때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으로만 성경을 본 사람은 한 번 믿는 자들에게 들어오신 성령은 결코 우리를 영원토록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우리는 2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는 해석에 조금 어려움이 있으면 헬라어원문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살펴보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의 주장이 항상 옳은 것인지를 다른 성경본문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럼, 첫째로, 헬라어원문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요14:16의 헬라어원문은 이렇다. "그리고 나도 역시 아버지께 장차 요청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다른 보혜사를 장차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과 함께 '그 시대까지' 계속 있게 하기 위해서"(요14:16 헬라어직역). 그렇다. 먼저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까지'로 함께 있기 위해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여기서 그 시대는 '다음 시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영원토록'이라고 번역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와 영원토록(그 시대까지) 함께 있게 하기 위하여 보혜사를 보내주신다는 문장이 바로 '가정법'문장이기 때문이다. '가정법'이란 실제가 아닌 것을 추측하거나 있음직한 가능성이나 가상을 나타내어 미래적인 의미를 띠는 문장법(mood)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한 번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신 성령은 반드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가정법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내주시는데 이 성령을 보내주시는 이유는 성령이 다음 시대에서도 계속해서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 위함인 것은 분명히 맞다. 하지만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다음 시대까지 함께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로, 다른 성경본문에서는 한 번 들어오신 성령께서 떠나시지 않고 계속해서 계신다고 증거하고 있는가? 한 개의 구절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우선 에베소서 4:30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성령을 계속해서 근심하게(슬퍼하게) 하지 말고 있어라. 그분 안에서 너희가 구원(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렇다. 성령께서는 구원의 날까지 곧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날까지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해주신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다음은 우리가 성령을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다. 만약 자기 안에 들어오신 성령을 계속해서 근심하게 했다면 그는 구속의 날에 성령이 떠나가실 수도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보혜사는 우리와 이 시대 뿐만 아니라 다음 시대까지 계속해서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신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을 계속해서 근심하게 한다면, 성령께서 이 다음 시대까지 계속해서 동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이 본문의 취지인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9에서 "너희는 성령을 계속해서 소멸하지(끄지) 말고 있어라"고도 하였다. 이는 어떤 믿는 이는 자기 속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을 자꾸 꺼버린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어떤 지시를 그에게 내리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성령의 권면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그가 문득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때에도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어주시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고 심판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날 그분은 긍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때도 성령께서 우리를 어여삐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까지 몽땅 강제로 끌고 천국에 들어가시는 분이 아니시다. 더욱이 한 번 영생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절대 변동이 없는 것이라면, 한 번 기록된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계3:5). 늘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성령을 소멸시켰던 자들은 그날에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6. 왜 예수께서는 한 번 얻은 영생이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한 번 얻은 영생이라도 이렇듯 영생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것은 적어도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는 믿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구원받는 그날까지 늘 깨어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마24:42).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다가 안일한 생각 혹은 방종 가운데 있다가 그만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그만 그날 성령이 떠나가심으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리 경성하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는 그날까지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죽음의 그 순간까지 어느 누구도 구원이 완전히 보장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 깨어있을 때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맡겨주신 일에 충성함으로서, 이 땅에서 살동안에 천국에서 받을 기업을 잘 준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마24:45~47). 늘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있으면 자신이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에 주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에 순종하고, 맡겨주신 일에 충성함으로 하늘에서 받을 기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주님은 영생은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갈5:16). 우리가 영생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 성령이 우리에게서 떠나감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깨우쳐주심에 늘 민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의 그날에 버림을 받아 슬피 울며 자신에 대해 이빨을 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그날부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회개하라고 권면하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이끄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슬퍼하게 하거나 그분의 활동을 소멸시켜 버리지 말라. 그러면 그는 결국 멸망 곧 죽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사망 안으로 들어갈 것이기 말이다. 

 

7. 나오며

  고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보전할 수 있도록 2가지 방법을 제시해 주셨다(요10:27~28). 그것은 첫째, 주님의 음성을 계속 들으라고 하셨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는 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섬겨주며,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라. 둘째, 주님의 뒤를 계속해서 따라오라고 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던 일을 우리도 뒤따라서 행하라는 뜻이다. 가난하고 병든 자를 심방하고 그들을 고쳐주며 천국복음을 전파하라(마9:23). 이런 자가 다음 시대에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죽는 날 성령께서 떠나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는 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게 될 있으며, 하늘에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장만해둔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얻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그 영생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받은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고 보전할 수 있도록 날마다 깨어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하여 하늘의 기업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다음 시대에는 반드시 영생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9월 25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09-2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3) 주께서 들려주신 거듭남과 영생의 비밀(요3:1~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18KQFLbh96U  [혹은 https://tv.naver.com/v/29458957 ]

 

1. 들어가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과연 자기가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는 했는데 그가 아직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이거나 영생을 소유해지 못했다면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그리고 영생을 소유했는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영생을 소유했는지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약 그가 거듭나지도 않았고 영생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거듭남이나 영생을 얻는 것이 과연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서도 가능한가? 오늘은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과 더불어 그 해답을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고자 한다. 

 

2. 니고데모는 누구며 왜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는가?

  니고데모는 그의 이름이 '니케(우세함,승리함)'와 '데모스(백성)'가 합쳐진 말로서, '백성 위에 우세함'이라는 뜻을 지녔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으로 볼 때 유대교 중에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는 율법을 매우 중요시하는 유대 종교 분파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의 지도자(통치자)였다. 그는 유대의 최고 중앙의결기구이자 최고재판소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다. 그는 한 마디로 율법에 있어서 최고 교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영적 갈증이 대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당시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경계하고 있는 예수님을 밤중에 몰래 찾아올 리가 없다. 또한 그는 굳이 다른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먼저 예수님을 높이는 말부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온 채 있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절대 행할 수 없는 표적들을 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예수님을 율법의 정규과정을 다 밟은 자로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그의 생각에는 예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보다도 더 뛰어난 분이요 율법에 대해서 뭔가를 더 알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율법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물어보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그가 가진 유대교의 율법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태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는 율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물과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3. 거듭남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께서는 율법 안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온 니고데모에게 한 가지의 대답을 통해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이때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율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이 거듭나고 또한 영생을 얻는 방법은 율법 안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물과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요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거듭 태어난다'고 하신 말씀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헬라어로 '아노덴'으로서 태어나는 것을 가리키는데, '아노덴'이라는 말은 '다시, 새롭게, 위로부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나겠느냐면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육체로부터 태어난 채 있는 것은 육체가 되는 것이요, 성령으로부터 태어나게 되어야 영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3:6). 그런데 여기에 보니, 거듭남의 과정에는 필수적으로 '물'도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을 의미하며, '성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물'에 대해서는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가 잘 이야기해 주고 있으니, 그것은 '물'은 정화의 수단으로서, '세례'로 예표되는 것인데 그것은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행2:38, 딛3:5).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그렇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 태어나려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훗날 자신이 죽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 생명주는 영으로 오셨다고 말했다(고전15:45). 고로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이 거듭 태어나려면 먼저는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처럼 사람은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렇게 사람이 거듭 태어나게 되면 그 순간에 무슨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며, 그를 돕기 위해 그 사람만의 수호천사가 파송이 된다. 

 

4. 사람은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먼저는 회개해야 하며 또한 믿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먼저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뉘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난 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이 자신의 죄를 없애는 것이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 속에 영접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신다. 이 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방법은 '회개'와 '믿음'이라는 수단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은 결코 율법을 지켜서 거듭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의 거듭남은 오직 예수께서 행하신 구속사역을 믿고 믿는 자들에게 보내주시는 성령을 영접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믿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니고데모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것은 곧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 사건이다(요3:14).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있었을 때였다. 그들이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의 마음이 많이 상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였다. 모세더러 자기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인도해 냈느냐면서,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곳에 왜 데려왔느냐고 하면서 불평했다. 그리고 하찮은 만나같은 음식은 더이상 자기들에게 싫증난다고 외쳤다. 그러자 화가난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게 하셨다. 이에 독이 퍼져 고통받고 있을 때에 그들은 모세를 찾아가 말했다. "우리가 여호와와 모세에게 원망하여 범죄를 했으니, 이 뱀들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청원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가지 방법을 지시하셨다. 그것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 뱀에 물린 자가 있으면 그것을 쳐다 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살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자 모세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아두었다. 그러자 백성 중에 뱀에 물린 자들 중에는 놋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뱀을 쳐다본 자는 모두가 살아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독뱀에 물렸으면 빨리 독있는 피를 흘려버고 해독제를 먹어야 살아날 것인데, 놋뱀을 쳐다보았는데 그만 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거듭남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예수께서 놋뱀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곧 믿음인 것이다. 

 

5. 거듭남에 있어서 율법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왕국은 오직 율법을 지킴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고 또한 구원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율법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정확히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율법으로는 사람이 중생할 수 없는가? 그것은 사람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을 다 지켜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것이 율법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온갖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자는 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기 때문이다(신27:26). 사실 이러한 율법과 거듭남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문제는 니고데모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훗날 사도 바울도 이 문제에 부딪혀서 약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당시 바울도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장을 목도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21:23에 말씀에 따르면, 누구든지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께서는 분명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저주받아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기고 정결법이나 음식법을 어기고 성전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죽고 없어진 그분이 어느날 생시에 그것도 대낮에 자기의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분이 살아서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바울은 깜짝 놀랐다. 죽은 자는 절대 다시 살아서 이 땅에 돌아올 수 없는데 그분이 자기의 눈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주받아 죽은 예수님과 그때 자기 눈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관계를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율법은 의롭고 거룩한 것이지기는 하지만,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 조항을 다 지키며 살아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임을  깨닫게 된다. 율법의 온갖 저주를 그분이 대신 담당하시려고 속죄양이자 아사셀양이 되신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의 저주 아래 갇혀있는 모든 자로 하여금 더이상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되는 길을 새롭게 그분이 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예수께서 대신 받으신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유일한 아들이셨지만,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생명을 받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율법으로서는 도무지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저주를 받는 것이지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어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의 법칙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자. 

 

6. 영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얻는가?

  이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사도 요한은 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지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3:16~21까지의 말씀이다. 이 부분을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자신을 가키려 "나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믿음과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이 부분은 아무래도 사도 요한이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하여 해설을 붙여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영생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주셨는데 이는 그를 믿고 있는 모든 자가 다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여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요3:16).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 안으로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오히려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그분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려고 하는 영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참고로 이것을 안다는 것을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요20:31). 다시 말해, 사도 요한이 앞의 3개의 공관복음서 외에 요한복음을 또 기록했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며, 그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만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먼저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주셨다(요5:26).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안에만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생명'은 어느 시기에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내세'다. '다음 시대'인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 자신의 영이 가서 사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생명을 이 땅에서 얻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는 사망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멸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땅에 살아있을 때에 이 생명을 얻지 못한 채 죽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사망'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있고 또 나를 보내셨던 분을 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 그리고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망에서부터 생명 안으로 옮겨진 채 있는 것이다(요5:24)" 그렇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가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컴컴한 곳으로 가서 살아야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한 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 인류를 대신하여 죄값으로 십자가에 달려죽은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영생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고로 영생이란 단지 영원히 사는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으로서, 이 생명을 가진 자는 죽은 후에 다음 시기에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으로 가서 거기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7. 사람은 왜 영생을 얻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사람 중에는 영생을 얻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빛으로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함으로 인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요3:19). 그래서 악을 행하고 있는 자는 모두 다 빛을 미워하게 되는데, 이런 자는 빛을 향하여 나아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더럽고 추한 자신의 죄된 행위들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요3:20). 그렇지만 오직 진리만을 따르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 그들은 자신에게 죄가 있으면 자기의 죄를 예수님께 고백함으로 용서를 구한다. 또한 이런 자들은 빛되신 예수님 안에서 행한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빛된 자녀라는 것을 드러내며 산다(요3:21). 그렇다. 사람이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빛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며, 그분이 우리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자기자신이 심판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그분을 믿고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을 때에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3:17~18).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래서 이 복음을 나만 알고 있지 말로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8. 나오며

  사람은 어떻게 거듭나며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그리고 '거듭남'이란 대체 무엇이며 '영생'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는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거듭남과 영생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람의 거듭남은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으로서 이는 '회개'와 '믿음'의 방법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이유에서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다음 시대에 가져야할 생명으로서, 아버지의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가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망'이란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한 자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오직 믿음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곧 율법의 의식법들을 지켜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어렵다. 또한 율법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도 없다.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지하고 사려깊은 니고데모라 할지라도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다. 율법보다 430년전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법칙이 지금도 율법보다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으니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거듭 태어나기도 하고 영생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알고 보면 이처럼 쉽고도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영생의 법을 모르고 있거나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먼저 믿어 거듭난 우리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도리인 것이다. 

 

 

2022년 09월 21일(수)

정병진목사

 

성도들은 세상의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으며 또한 악한 자 사탄마귀를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가? 그런데 사도 요한은 거듭난 성도들이 악한 사탄마귀를 이기는 것까지 목표를 두고 요한일서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래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기본적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세상과 마귀는 정복해야 한다는 것을 꼭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세상과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21-12-2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7) 세상과 그리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요건은 무엇인가?(요일5:4~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9oJxCxVEGRs [혹은 https://tv.naver.com/v/24416355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초신자용 양육교재와 비슷하며, 초기영지주의 이단예방을 위한 좋은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이 신앙의 기본요소를 갖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분과 교제하는 가운데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요한일서의 책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요한일서의 맨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성도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사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다. 이 말씀을 올바로 깨닫기 위해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의 의미와, 내가 생명을 자기고 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아무쪼록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세상과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 영적 싸움에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요한일서 5:4~21의 위치는?

  요한일서는 구분짓기가 상당히 어렵다. 왜냐하면 같은 주제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굳이 요한일서를 구분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일 처음 1~2장은 하나님과의 교제(코이노니아)라는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삶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놈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죄'라고 정의하고 그 죄는 오직 자백함으로 용서받을 서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결국에는 죄짓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은 자라도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면 그는 마귀에게 속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어서 3:1~4:6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적인 관점에서 성도의 합당한 신앙과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씨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4:7~5:3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4~21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도 요한은 이 부분에서 성도란 하나님께로부 난 자들인데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 자로서, 이들이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사용하여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신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시는 자는 사탄마귀도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승리하는 비결을 이 부분이 소개해주고 있는 것이다. 

 

3. 세상을 이기는 성도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도요한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을 몇 가지로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신앙의 성숙도를 알려주는 부분이 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을 칭하는 호칭을 통해 알려준다(요일2:12~14). 거기에 보면, 성도들에 관한 호칭이 3~4자기 정도가 나온다. 그것들은 '자녀들' 혹은 '아이들'이 있고, '청년들'과 '아비들'이 있다(요일2:12~14). 여기서 '자녀들'이란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버지가 누군지를 아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가 누군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태초부터 계신 이"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14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더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이라는 호칭이 등장하는데 이는 영적으로 강한 자들로서 영적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악한 자 곧 사탄마귀를 물리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란 어린아이의 단계를 넘어선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들 모두는 이미 회개하여 죄사함을 실천하고 있는 자들을 넘어서서 죄를 짓게 만드는 마귀 곧 악한 자 자체를 대적하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4. 성도들이 꼭 이겨야 할 2가지 대상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을 요한일서 5:4~21에서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언급한다. 그 중의 하나는 '세상'이고, 또 하나는 '악한 자' 곧 '사탄마귀'다. 무릇 성도라면 세상을 이겨야 하고 사탄마귀를 이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세상이나 혹은 마귀는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가? 그때 사용하는 무기이자 방편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바로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관하여서 요한일서 5:4~17절에서 언급을 하고, 이어서 악한 자 곧 사탄마귀를 이기는 믿음에 관하여서는 요한일서 5:18~21에서 언급을 한다. 

 

5. 어떤 성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도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어떻게 할 때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여기서에 언급된 '세상'이라는 단어는 이미 요한일서 2:16~17에서 말했던  바로 그 단어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지게 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즉 '세상'이란 하나님을 대적할 뿐더러 사탄마귀의 포로가 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이 세상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이 세상에 빠지는 것인가? 그것은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것들이 대단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에게 때로는 인기와 명예를 안겨주기도 하고, 칭찬과 부귀를 안겨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의 유혹을 잘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이 세상의 본질이 바로 사탄 마귀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놓여) 있다"고 말한다(요일5:19).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에 살더라도 어찌하든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성도는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고 또한 이길 수가 있는가? 그것에 대해 사도 요한은 오직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요일5:5). 한 마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해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 태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난 성도가 또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 요한은 대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길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요한일서에서도 사도 요한이 답하고 있지만,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가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서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뜻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을 지칭할 때에 그렇게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나타내신 것이라는 말한다. 즉 나타난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으로서 여호와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또 다른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 속에 하나님은 언제는 영이신 하나님이었던 것이지,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에,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사람인 주제에 자기를 하나님으로 빙자하여 말하느냐면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소하여 결국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다.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분은 하나님으로 나오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람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기에, 자기자신을 아들이라고 늘 칭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한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아들로도 계시고 그때부터는 아버지로도 함께 계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들로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을 때에는, 육체를 입지 않는 신성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을 이 땅에 파송하였고 사람의 태를 빌려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려 할 때에 조심할 것은 그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그분만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사탄마귀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해 주는 3가지가 있다고 말한다(요일5:6~9). 그리고 세 가지는 오직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이 땅에 보내어진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세 가지 증거 곧 '물'과 '피'와 '그영(보혜사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물과 피와 성령이 어떤 것이기에, 이 셋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해주는가? 사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은 둘이다. 그중에 하나는 '사람들의 증거'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증거'가 있다. 그중에 사람들의 증거란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있었으나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던 자들의 증거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들 중의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이 지금 그 증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일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증거를 직접 눈으로 보았던 이들은 죽고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증거 이외에 또다른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다. 그것이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라는 것이다. 왜나하면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셨다가 가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물'과 '피'는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실 때 취하신 인성의 일부분이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에, 그때 물질세계에 속한 것을 취하셨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육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육체는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 몸을 가지고 승천하심으로 그 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그렇지만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는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천하셨던 예수께서는 하늘에 가셔서 그분이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오셨으며, 이 육체를 통하여 인류의 죄를 속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오직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언해주시고 있다(요15:26).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기도 하신다(요14:26).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인 것이다. 

 

8.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 속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이 들어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육체를 입으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그분이 직접 인류의 죄를 대신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기 위함이었다. 이는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이다(히9:22). 그리고 죽음이 인류가 범죄한 죄값이기 때문이다(롬6:23). 그런데 인류의 죄를 속죄할 피는 더러운 피로서는 아니 되고, 깨끗한 피여야 했기 때문에 죄없으신 하나님께서 피흘릴 수 있는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가지고 오셨던 것들 중에 중요한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실 때에 그 속에 생명을 주어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이 땅에 있는 유한한 생명과는 다르다.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이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부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는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이었다. 즉 독생자였던 것이다. 그분이 아버지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만을 가지고 있으려고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 주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서 생명나무를 심어놓으셨던 것이다. 그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라는것이다. 하지만 첫째 아담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둘째 아담으로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죽고 부할하신 후에 그는 생명을 나눠주시기 시작하셨는데, 그가 쓴 방법은 당신 대신에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시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또 다른 방식으로 오심으로서, 그분이 오실 때에는 영으로 오시지만 믿는 이들 속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오시어 믿는 이들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있는 한 하나님의 생명도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죽은 날까지 생명을 지켜내야 한다. 어떤 일이 불어닥쳐도 그분을 부인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에 생명을 가지고 오셨던 성령께서도 떠나버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한 번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그 생명은 그가 죽는 날까지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계속해서 함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설령 죄를 범하였어도 성령은 그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에 주님을 부인하거나 죄를 지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성령께서도 그 사람을 떠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한 자들 속에는 누구나 다 영생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말한다. "아들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잇는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자기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요일5:12)"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고 있는 너희에게이 편지를 쓰는 것은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요일5:13)". 

 

9. 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믿는 이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말은 자기 속에 보혜사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고 부활하셨던 예수님을 일컬어 '생명주는 영'이라고 하였다(고전15:45). 그분이 생명주는 영 곧 보혜사 성령이 되어서 우리 안에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나 성령이나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이 발현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증상을 통해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오면 그 사람이 그 생명을 받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의 죽어있던 영이 말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방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성질이 곧 빛이요 진리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이 생명을 받은 자는 어둠 안에 거하지 아니하며, 거짓말도 하지 아니하고, 형제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이 생명을 받은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 진리를 말하며,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요한 사도는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다면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양자)가 되었으므로 그도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부부터 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죄를 범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요일5:14~17).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10. 죄들 중에 '사망에 이르는 죄'란 대체 어떤 것인가?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서 난제가 하나 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망에 이르는 죄"다. 대체 사도 요한은 어떤 죄를 가리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했으며, 왜 그러한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겠노라고 말한 것인가? 어떤 사람은 성령훼방죄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치부하는 것을 성령훼방죄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사망에 이르는 죄' 보다 더 원문상으로 정확히 말하면, '사망을 향하여 있는 죄'라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하니 '사망에 이르는 죄'는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사망'은 '생명'의 반대말이며, 여기에서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사망도 역시 육체적인 사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사망을 뜻하는 것이라야 한다. 다시 말해,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짓는 죄를 가리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이 영원히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는 어떤 죄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죄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불신앙의 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결국 죽을 때에 영원한 사망 안에 처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였지만 영원한 사망에 처하는 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한 번 믿었다면 어떤 죄를 짓더라도 그 죄와 상관없이 자신은 구원받는다고 믿는 죄를 가리킨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면 그는 죽는 날 그이 속에 들어있는 성령께서 그를 떠나가실 것이다. 죄를 다 처리하지 못한 자까지 주님은 그를 천국에 억지로 데려가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직 죄를 청산한 자만 천국에 데려가신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은 사람이 되셨고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내지 못한 자는 결국 남게 된다. 죄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는 매일 자기의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성령의 책망을 멀리하고 죄짓고 살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깨우쳐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우리 속에서 책망하시고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지만 성령의 책망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구약의 사울왕처럼 버림을 받고 말 것이다. 이러한 죄가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인 것이다. 

 

11. 악한 자 사탄을 이기는 자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탄마귀를 '악한 자'라고 칭하였다. 그것도 다섯 번 나오는데, 다 사탄마귀를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요일2:13~14, 3:12, 5:18~19). 그는 선한 자가 아니라 악한 자다. 그는 선과 악을 알고 있지만 악에 물들어 있는 자다. 그는 악을 밥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그는 한 마디로 악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잔인한 자다. 그는 냉혹한 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자에게 속아넘어가 그의 영원히 갇혀 있을 감옥에 들어가면 아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의 공격들 즉 유혹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가?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이 가진 능력과 지혜만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 다음으로 지혜롭고 미가엘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상당히 큰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지닌 우리 인간의 힘과 타락한 본성에 휩싸여 있는 우리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그를 이길 수가 없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탄마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지만 사탄마귀를 이기신 우리 주 예수님을 힘입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께서 사탄마귀보다 크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요일4:4). 사탄마귀는 피조물이고,우리 주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사탄마귀의 권세와 능력과 지혜는 제한적이지만 우리 주님은 무제한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힘입는다면 그를 거뜬히 이길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거듭 태어난 성도는 하나님께서 나셨던 자인 예수께서 그를 지켜주기 때문에 악한 자가 그를 손댈 수 없다고 했다(요일5:18).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 안에 전능자께서 들어와 계시는데 어찌 그 놈이 함부로 우리에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그 놈이 우리에 접근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게 될 때다(요일3:8).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에게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탄마귀를 이기셨던 예수님을 힘입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회개하기만 하고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면 우리는 거뜬히 사탄마귀를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마귀는 광야의 시험에서 3대 0으로 예수님에게 판정패 당했으며, 3년반 뒤에 십자가에서 KO패 당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죄없는 예수님을 그가 죽였기 때문에, 그의 계급이 무장해제 당했기 때문이다. 그날 그러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마귀는 불법을 사용하여 그가 가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님에게 넘기게 되었으며, 그때 그는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는 무저갱에 갇혀 이 지상에 못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주님 재림 직전에 잠깐 풀려서 올라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지금도 지하세계에게 자신의 부하들은 올려보내 그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쫄 필요가 없다. 우리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는 예수님 앞에서는 패배자이기 때문에 그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어있다. 내 안에 사탄마귀보다 더 큰 이가 내주하고 있음을 믿으라. 그리고 담대히 맞서라. 마귀를 대적하면 그가 피한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피하지 않으면 성령의 검으로 그의 머리를 찔러버리고 그의 몸을 싹뚝 잘라버리라(영의 세계에서 그렇게 명령하면 된다). 그가 우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다. 

 

12. 예수 그리스도는 대체 누구신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마무리 지으면서 예수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공개한다. 그분은 말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지지만 실은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라는 것이다(요일5:20). 그분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것불렸다는 것과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고 해서 그분은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다른 표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무렵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그렇다. 그분의 신성은 하나님이셨다. 다만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신성한 그분이 육신을 입어 인성을 잠시 취하신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고 부활하실 때에 그분의 몸은 신성의 영역으로 다시 이끌어가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신성한 세계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분이 비록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지만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낮춰 불러서는 아니 되겠기에 그분을 참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만이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공생애 마지막에 예수께서도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셨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그랬다. 하나님이 보내셨던 분, 그래서 자신을 아들이라고 칭하셨던 분은 하나님의 또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은 자기자신을 우상에게서 멀리할 것을 주문하였다(요일5:21). 그런데 이말을 헬라어 원문을 통해서 보면, 자기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켜내라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지면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 부분은 다른 설교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사도 요한은 초신자들에게는 이 부분까지 다 설명해 주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이 부분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것 같다. 그는 가장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갖추고 있으니까 말이다. 

 

13. 나오며

  요한일서를 공부하다보면 느끼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정말 암송해야 할 요절이 많은 성경책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책은 기초적인 영적인 진리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요한일서는 자범죄 용서를 위한 자백의 중요성(요일1:9)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빛'이시고(요일1:5), '사랑'이라고 하는 정의하고 있다(요일4:8,16).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있다고 말한다(요일2;1). 그리고 이 세상 안에는 악한 자가 있어서  이 세상이 그 악한 자 안에 놓여 있으며(요일5:19), 악한 자가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데, 그것들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있다고 말한다(요일2:16).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이며(요일2:22),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언급한다(요일4:2~3). 그러므로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를 분별하라고 권면한다(요일4:1). 그리고 요한일서는 진리의 성령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요일5:6),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으로서(요일5:6),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거짓이 없다고 말한다(요일2:27). 특히 요한일서는 우리가 대적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도 알려주는데 그를 '악한 자'라고 부르며(요일2;13,14, 3;12, 요5:17,18), 죄를 짓게 되면 누구든지 그에게 속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요일3:8).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그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요일3:8). 아담의 장남 가인이 차남인 아벨을 쳐죽인 것도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이었으니(요일3;12),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요일4:20). 그리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죄라고 가르쳐준다(요일3:15). 그리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만큼 귀한 일은 없다고 말한다(요일3:16). 더욱이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으며(요일4:10),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다고 말한다(요일4:14). 하나님을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만일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요일4:12).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일5:5). 그리고 성도가 세상을 이기려면 그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한다(요일5:4). 그리고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라고 알려준다(요일5:7~8). 그리고 예수께서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에, 누구든지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아들을 영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요일5:12).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거듭난 자는 예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악한 자라도 그를 만질 수 없다고 가르쳐준다(요일5:18). 왜냐하면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 계시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라는 것이다(요일5:20).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일서를 공부할 때 암송할 성경구절들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요한일서가 바로 이러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틈나는대로 아니 시간을 내어서라도 하루에 한 번씩 요한일서를 읽고 또 읽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어마어마한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영생을 소유한 자답게 살기를 바라며, 믿음을 사용하여 악한 자를 이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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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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