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는 역시 바울 서신과 비교해 볼 때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유다는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유1:5 헬라어원문). 그리고 그분을 만유의 대주재로 소개한다. 파격적이다. 그리고 그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고 말한다. 중간에 탈락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천사들의 타락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육체를 더럽히고 영혼을 더럽히는 음행의 죄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오늘 메시지는 우리의 신앙의 허리끈을 다시 졸라매줄 것이다.

 

2022-02-23(수) 수요기도회

제목: 유다서강해(02) 유다서에 등장하는 구원론과 천사론과 심판론(유1:5~7)

https://youtu.be/kqmqo7nhyww [혹은 https://tv.naver.com/v/25318020 ]

 

1. 들어가며

  유다서는 좀 특별한 책이다. 이 책은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 그동안 다른 신약성경을 통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고백이 나올 뿐만 아니라 '위경'이라는 책에서 인용된 구절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다서에는 일반적으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신칭의의 구원론이 나오지 않고 한 번 받은 구원이라도 그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에 대해 언급을 한다. 또한 천사들의 타락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오늘 이 시간은 유다서 강해 두번째 시간으로서,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 곧 유다서의 개론으로서 유다서의 저자와 기록시기 그리고 편지의 대상과 편지를 쓴 목적에 이어지는 본문으로서, 본론의 첫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그중에서 오늘 말씀은 유다서를 왜 쓰고자 했었는지를 살펴보는데, 이단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적 전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부분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보다 더 정확하게 알 수있 될 것이며, 성도들의 구원관이 보다 더 확실하게 정립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천사들의 타락 및 소돔과 고모라의 성의 멸망에 따른 심판이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도 함께 깨닫게 될 것이다. 

 

2. 유다서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유다서는 편지글이다. 그러므로 편지형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이 책이 비록 25절 밖에 안 되는 대단히 짧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서신형식이 모두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서신 형식에 따라 이 책을 구분한다면, 이 책의 구조는 도입부(1~4절), 본론부(5~23절), 종결부(24~25절)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도입부(1~4절)는 유다가 수신자들에 대한 본인의 문안인사 및 서신의 집필동기를 간략하게 쓰고 있다. 이때 그는 이렇게 썼다. 헬라어로 직역해본다.

유1:1~4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런데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받은 채 있는 이들이자 그리스도에게 지켜주심을 받은 채 있는 이들에게 [편지한다]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들에게 증가되어지길(많게 되기를) 원한다.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의 공동의(일반의, 공통의) 구원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부지런함으로 [계속] 쓰는 것을 행하면서, 성도들이 한번(단번에) 넘겨받았던 믿음을 위하여 [계속] 힘써 싸우도록 너희에게 권면하면서, 편지를 써야할 압박(필요)을 가졌다. 4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가만히(슬그머니, 몰래)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옛적부터 이러한 심판(정죄) 안으로 미리 기록된 채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경건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함(호색, 음탕, 성적인 방종)으로 바꾸고 있고, “유일한(단 하나의, 홀로) 대주재(세상의 소유주, 주인)이며 곧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는 자들이다”. 

 

3. 유다서에서 소개해주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유다서는 다른 책에 비해서 아주 독특한 부분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을 '대주재'와 구약시대의 '여호와'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경책으로 알려진 "모세의 승천기"와 "에녹서"의 글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위경에 기록된 말씀이 정경에 들어왔는가? 사실 정경과 외경 및 위경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먼저 유다가 예수님을 홀로 한 분이신 '대주재'로 소개하고 있는 저자의 의도와 예수님이 구약시대 출애굽을 인도한 참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음을 소개해주고 있는 대목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정통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이었던 유다가 자신의 친형이었던 예수님을 2가지로 고백하고 있다. 첫째로, 유다는 예수님을 '주재(데스포테스)'라고 고백하고 있다(유1:4). 그는 예수님을 "유일한(단 하나의) 대주재이며 곧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유1:4)"라고 고백하였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대주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다(행4:24). 그런데 그 명칭을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로, 유다는 예수님을 구약시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여호와라고 고백하고 있다(유1:5). 헬라어 원문(NA28)을 보면, "예수께서 한 백성을 애굽의 땅으로부터 구원하여 내신 후에 두 번째로는 믿지 않았던 자들을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유1:5). 이는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구약시대에 역사하신 만군의 여호와로 고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의 성도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백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20년 이상을 형과 동생으로 같이 살았던 유다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분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은 유다가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에 친유대적인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고백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본문이라고 하겠다. 

 

4. 예수께서 '대주재'이시며, '여호와'라고 하는 신앙고백은 오늘날에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오늘날 21세기를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다가 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인 A.D.70~80년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 하나님'이자 '여호와'로 고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유대인들인데, 그중에서 예수님의 친동생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고로 우리는 중간에 유다를 변화시킨 충격적인 사건을 상정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예수님의 친동생들 중에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에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요7:5).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예수께서 잠깐 자신을 착각하고 떠돌아다니는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들은 확 달라졌다. 죽은 자가 살아서 그들 앞에 나타났었기 때문이다(고전15:6~7). 그건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절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으며, 문들을 닫아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들어올 수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더이상 선지자나 교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안타깝게도 유다서 1:4~5에 나오는 "대주재"와 "예수님"을 번역할 때, 성경과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 책들이 허다하다. 특히 킹제임스 버전 쪽의 성경책들은 전부다 이 2가지를 잘못 번역하고 있다. 킹제임스 번역본의 하나인 킹제임스 흠정역을 우선 보자. 이 번역본에 따르면 유1:4~5에 나오는 예수님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들은... '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라. 그러므로 비록 너희가 전에 이것을 알았을지라도 내가 너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곧 '주'께서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시고 그 뒤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유1:4~5). 그렇다. 우선 킹제임스 번역본에서는 '대주재'라는 단어를 '주 하나님'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주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로 구별시켜놓았다. 즉 예수님 이외에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 따로 있는데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번역해놓은 것이다. 한 마디로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예수님을 더이상 한 분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번역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신 분을 '주께서'라고 번역해놓았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NA28)은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우리말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다. '주께서'라는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헬라어성경과 킹제임스 버전 쪽의 성경책은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킹제임스 쪽의 번역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다수사본' 혹은 '공인원문(표준원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TR(Textus Receptus)에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본은 11세기 이후에 나오는 소문자 사본으로서, 그 권위가 많이 떨어지는 사본들이다. 보다 다 원문에 가까운 사본은 초기(4~5세기)에 나오는 대문자사본들로서, 이 대문자사본에서는 예수님을 '대주재(데스포테스)'라고 표기하고 있고,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내신 분도 '예수님'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소문자사본 계열에서는 예수님과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서로 나누려고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구약의 여호와가 예수님이 아닌 것처럼 번역하려고 한 것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그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작업이라고 하겠다. 여호와(아버지)도 하나님이요, 예수님도 하나님이며, 성령님도 하나님이신데, 여호와는 예수님이 아니며, 예수님은 성령님이 아니고, 성령님은 여호와(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들의 생각에 천국에 아버지 하나님은 한 가운데에 있는 보좌에 앉아계시고, 오른쪽에는 예수님이 앉아계시고, 왼쪽에는 성령님 혹은 비둘기가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고백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분이라고 성경에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서 족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되었고 활동하셨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만세전의 계획을 따라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이 분은 아들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이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뒤에 그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이후부터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동시에 활동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고백을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유다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진실로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5. 하나님을 말씀을 따르지 않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음란을 일삼고 있는 이단 세력들에게 유다가 예시해주는 3가지 심판은 무엇인가?

  유다는 경건하지도 않고 음행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죄가 아니라고 하고,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장차 받게될 심판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전에 이미 일어났던 3가지 심판의 사건들을 예시한다. 첫째는,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부분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심판받아 죽었다는 것이다(유1:5). 다시 말해 애굽에서는 출애굽 세대들은 비록 애굽에서 구출을 받았지만 자신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결과 결국 광야에서 엎드려 죽어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의 처음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의 처소를 떠나간 천사들을 하나님께서는 큰날의 심판때까지 영원한 쇠사슬로 흑암 아래에 가두셨다는 것이다(유1:6).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주신 지위와 그 직분을 망각한 그들의 최후를 유다는 영원한 흑암이라고 말했다. 셋째,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 스보임(신29:23, 호11:8)이 음란하고 동성애를 행함으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다(유1:7).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육체를 더럽히고 음란을 일삼는 자들을 가만 두지 않고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하신다는 것이 이 본문말씀이다.

 

6. 유다서에 나오는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유1:5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구원론의 관점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친유대적인 서신들로서 유다서나 야고보서 그리고 히브리서는 구원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서신들만을 대해왔던 성도들은 구원에 대해서는 매우 낙관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가 의롭지 아니한 자라도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분의 의가 자기에게 전가되어 의로워진다는 말에 익숙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모든 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생각의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신칭의는 그가 처음 예수믿었을 때의 구원의 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구원의 여정의 첫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인생의 모든 여정을 마칠 즈음에 믿음에 따른 행위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가서도 열매가 없다면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고보서는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맨 끝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신앙의 모든 여정을 끝마치려 하는데, 행위의 열매가 뒤따르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헛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서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출애굽1세대들이 1차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지만 그들이 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완성하려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실 약속의 땅 곧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믿음을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망불평하고 음행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면 그는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출애굽해서 나온 1세대들은 다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예정을 따라 애굽에서 구출되어 나온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꼭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광야에서 범죄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여 육체는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게 하셨을지라도만 이미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니 그의 영혼 만큼은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바램일 뿐이다. 신약시대 사도 바울의 설명을 보라. 사도 바울은 출애굽1세대들이 분명 징계를 받아 광야에서 멸망받은 것이라고 했다(고전10:5).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본보기가 되어 말세를 만난 우리들에게 경고로서 주어진 것이라고 말했다(고전10:11). 히브리서 기자도 역시 광야에 엎드려져 죽은 자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히3:16~19). 그들은 안식의 장소에 못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가 말하고 있는 바,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지만 광야에서 멸망받은 자들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처음 믿었을 때에 구원받았던 사실을 것을 두고 자신의 미래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을지라도 다시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요, 범죄한 것을 자백하여 용서받지 못한다면 우리도 결국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못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다가 말해주고 있는 성경적인 구원관이다. 

 

7. 유다서에 나오는 천사론은 어떤 것인가?

  유다서는 천사들에 관하여도 언급한다. 유다는 천사의 존재를 당연시한다. 그러나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천사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분파가 있었다. 그들은 사두개파들이다(행23:8). 그들은 '천사'만 인정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영'도 없다고 하고 '부활'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다는 천사들이 있으며, 그 천사들도 역시 심판을 받은 상태에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유1:9에 보면, 천사장(천사들의 우두머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미가엘'이다. 그리고 천사장인 미가엘이 마귀와 변론을 하였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렇다. 천사들 중에는 더 높은 계급을 가진 천사장의 계급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들이 어떻게 되어서 심판을 받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유1:6). 그들은 맨 처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 지음을 받았다(시103:20~22). 그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하나님과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창조된 존재였다(히1:14).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과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지 않고 자신이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다. 그들의 가진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을 시켜, 하나님과 구원받을 상속자를 섬기려하지 않고 자신이 섬김받기를 선택한 천사들을 하늘에서 쫓아버리셨다. 그때는 아마도 최소한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의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하늘에서 쫓겨나서 영원한 쇠사슬(영적인 어떤 제한)을 묶여 흑암(어둠) 아래에 갇혀진 것이다.

  그럼, 그들이 갇혀진 '어둠(조포스)'이란 대체 어디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빛의 나라인 천국의 반대편으로서, 이 우주와 지옥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곳은 늘 어둡다. 먼저는 공중인데 이는 그들이 하늘에서 쫓겨나와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엡2:2). 그리고 일부는 지옥 어두운 곳에 던져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벧후2: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싸울 대상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이라고 하였다(엡6:12).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범죄하면 하늘에서 쫓아버리는데, 하물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데려가시겠는가?

 

8. 유다서에 나오는 심판론은 어떤 것인가?

  또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비롯한 아드마와 스보임의 심판도 알아야 한다(신29:23, 호11:8). 유다가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을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사건을 통하여 언급했기 때문이다(유1:7). 그럼, 어떻게 되어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의 이웃 도시들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당시 교회에서 활동했던 초기 영지주의자들처럼, 그들은 음란하였고 다른 육체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내려 그 성들을 다 태워버리셨다(창19:24). 그러자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나는 모든 것들이 다 파괴되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규정해놓은 것을 행하는 것은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심판을 받기 전에 회개하여 그 죄를 씻어버리면 되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나 천사들은 다시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을 위한 속죄제물과 속죄의 피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속죄의 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자백함으로 그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받을 수 있다. 심판 받기 전에 죄를 회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것뿐이다.  

 

9. 나오며

  오늘 우리는 평소 때 잘 접해보지 아니한 친유대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유다가 쓴 것이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은 참으로 놀랍고 또 놀랍다. 왜냐하면 유다는 예수님을 홀로 유일한 만유의 대주재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분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유1:4~5). 늘 하나님을 삼위로만 생각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확실히 한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돕기 위하여 그분은 지금도 삼위로 일하시고 계신다. 특히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오셨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몰래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초기 영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육체가 사람의 영을 더럽힐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혹시 믿는 자가 음행을 저질러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자 유다는 이들이 잘못된 거짓 선생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이들을 경고하기 위해 유다서를 썼다. 그런데 원래 이 편지는 공통으로 받은 구원에 관한 진리를 전하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단세력이 매우 위험한 세력이었기에 유다는 그들과 힘써 싸워서 올바른 신앙을 수호하라고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심판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얻은 구원을 어떻게 이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유다가 가르쳐준 구원론은 한 번 얻는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그것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례가 보여준가고 유다는 말했다. 그리고 자기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 천사들도 심판을 받아 흑암 아래에 갇혀있다고 했다(유1:6). 그리고 죄 중에서도 음행의 죄 특히 동성애의 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되 그런 자들은 불못에 보내신다고 유다는 언급하였다(요1:7). 그렇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 지은 죄들을 빨리 회개하여 악한 영들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귀신들이 들어오는 통로를 만들어 주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죽는 날 우리는 결코 영원한 불의 심판을 받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생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은 회개하며 신앙을 수호하는 것이다. 

 

 

2022년 02월 23일(수)

정병진목사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된 곳은 대체 어디인가? 그곳은 바로 창세기 2장 4절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엘로힘)은 여호와와는 대체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리고 신약의 예수님은 또 여호와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왜 모세는 천지만물의 창조주를 굳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소개해야 했는가? 여기에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다. 오늘은 그것을 알아보자. 2021-02-26(금) 금요기도회 제목: 창세기강해(29) 나 여호와가 하나님(엘로힘)이니라(창2:4~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r0iKtqnJl_A [혹은 https://tv.naver.com/v/18709333 ]

 

 

1. 들어가며

  창세기의 천지창조의 기사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히니 있다면, 그것은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에 있어서 주어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분명히 창세기 1장의 기사는 천지창조를 보여준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 또다른 천지창조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 순서는 약간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포인트는 똑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만드셨으며, 식물도 동물도 그렇게 하였고, 사람도 그렇게 창조하시고 만드셨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부 내용에 들어가보면 둘은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이 1장보다 훨씬 더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오늘 새벽에 전한 메세지에 이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대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에 대해 모세는 왜 "여호와"라는 이름을 넣어서 소개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천지만물 창조 기사 중에서 창세기 2장 4절이 그 이전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보면, "엘로힘"이 창조하셨다고 나온다. 그런데 창세기 2:4이하에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 이외에 "여호와"는 명칭이 하나 더 들어간 것이다. 이것을 두고 신학자들마다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명확한 것은 "여호와"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모세도 창2:4의 주어를 "엘로힘;'에서 "여호와 엘로힘"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주어가 바뀐 것이다. 

 

  그럼, 왜 모세는 천지만물의 창조자를 "엘로힘"에서 "여호와 엘로힘"으로 바꾼 것인가? 그 이유는 3가지다.

  첫째, 이는 창세기 1장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엘로힘)이 다른 어떤 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가리킨다는 것알 알게 하기 위함이다. 사실 창세기 1장의 기사만 보면, 어떤 신적 존재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기에 신적 존재라는 분을 여호와 하나님 말고도 다른 신들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 세상에 신들이라 일컬어지는 많은 신들이 있지만 그러한 신들이 천지만물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께서 그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한 그 신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창2:4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지만물을 창조하고 만드셨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구절들을 읽어보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곧 전능자는 그의 이름이 "여호와'이신 분이라고 또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 

출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사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사42: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렇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이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라고 이름하는 바로 그분, 유일한 창조주, 그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알고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렇게 배웠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특히 창1:26~27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경륜적으로 나중에 표현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소급 적용하여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어디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협의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사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욥9:8-10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구약성경에서는 오직 여호와께서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 밖에 존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골1:15), 지혜로(시104:24)",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시104:30,욥33:4)" "말씀[하심]으로(창1:3,요1:3)"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말씀들도 다 한 분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을 증거해 준다. 그런데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창세기 2장에 도입함으로써, 이 세상에는 "신들"이라고 불려지는 우상들이 있지만,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이는 그들이 아니라 "여호와"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82:1 하나님은 신들(엘로힘)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시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엘로힘)이며 다 지존자(지극히 높으신 이=옐론)의 아들들(벤)이라 하였으나 
시86:8 주여 신들(엘로힘)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둘째, 이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지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명칭은 고유명사로서,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지금까지도 잘 모른다. "여호와?", "야훼?", "아하야[흐]?" 등이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을 표기하고 있는 신명사문자(하나님의 이름을 표기하고 있는 히브리어 4개 문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3:14~15)"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혹은 "아하야[흐] 아쉐르 아하야[흐]"를 해석해놓은 말이다. 그런데 이때 처음의 "에흐예"는 "나는 ~이니라"이고, 뒤의 "에흐예"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여기서 "에흐예"라는 단어는 "하야"(be동사)라는 동사에서 왔기에, 이것을 번역하면, "스스로 있는 자", "나는 ~이다", "[만물을] 있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것을 "아하야[흐]"로 보면, "나는 알렙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글자인 '알렙'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모세에게 나타나서 자신의 나타내 보이셨던 그분은 "나는 알렙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선언을 헬라어로 바꾸면 "나는 알파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보면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는 구약에 알파이신 분이 곧 오메가이시라는 뜻이다. 곧 구약시대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엘로힘이 곧 알파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더하여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분이 "나는 오메가다"라고 더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기소개가 더 발전된 것이다. 왜 그럴까? 그 답은 계22:13에 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자기를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소개하고 계시는 분이 나오는데 그분은 "나 예수"이기 때문이다(계22:16). 고로 우리는 구약시대에 여호와라는 분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나는 알파다"라고 소개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이 훗날 아들의 이름으로 오시게 되었을 때에 그분도 자신을 "나는 오메가다"라고 표현하셨으니, 곧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구약의 여호와나 신약의 예수님이나 모두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이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우리 인간과 멀리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직접 손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말씀하시며 약속을 체결하시는 친밀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며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계시하셨을 때에는 모세 때였다(출3:14~16). B.C.1448년경의 일이다. 이는 천지창조후 약 2,500년이 지난 후였다. 그런데 히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신 다음에는 꼭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렇게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내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고자 함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걸고 무슨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면서 어떤 약속을 하신 것은 반드시 그것을 지키시고 성취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창세기 2장의 기사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아담을 직접 손으로 빚으신 다음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두신 후, 그 사람에게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다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고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을 엘로힘으로 소개하고 있는 1장의 인간창조기사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와 교제하시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3. 구약의 여호와가 곧 신약의 예수님인가?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교제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내셨던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의 예수인가? 그렇게 말해도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것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잘못 할 수도 있게 하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정확히 말하면,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다면, 한 분 하나님께서 신약시대에 자신을 예수로 계시하셨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며, 아들의 이름으로 오신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기에,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이 되셨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다 더 정확히 말하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속에 이미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즉 구약시대에는 자신을 "나는 알렙이다"라고 표현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이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신약시대에 오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그분을 예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시만 사실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죽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후에 그분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통해서도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그분은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사역(인류속죄사역)을 전부 완수하시고 천국에 올라가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전히 천국에서 아들로서 감당해야 할 일들 곧 중보와 재림과 심판의 사역을 남겨두시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역을 수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성경은 여전히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4. 나오며 

  참으로 하나님의 존재는 신비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오죽했으면 학자들이 하나님을 정의할 때에 "삼위일체"라는 말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동안 알려진 바대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신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분으로 각자 존재하셔서 서로 의논하는 일을 행하셨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사44:24). 그러나 시간 밖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현재에 계신 분이기에, 그분 안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함께 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렇듯 우리가 우리는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잘 모르면 이단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여호와증인" 이단은 예수께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는 이단이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신앙고백하는 세미 이단과 같다(어찌 하나님에게 어머니가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장길자를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장길자는 신적 존재란 말인가? 그녀가 과연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고 동시존재가 가능한 이인가?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로 쪼개놓았으니,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는데 왜 어머니가 없겠느냐고 하는 논리에 빠지면 그만 이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만 가르치니, 정통신앙에 속해 있는 자도 그만 이단에 빠져버리기 일쑤인 것이다. 정확히 알라. 구약의 한 분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는데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신 것임을 말이다. 그리고 만세전부터 하나님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렇더라도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가지고 나오셨기에 그분은 자신을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일컬으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동시존재하고 계시며, 지금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셋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2월 26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0) 엘로힘과 여호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출6:2~8)_2021-02-05(금)

https://youtu.be/3X7ThN2Dtns  [혹은  https://tv.naver.com/v/18325116 ]

 

1.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상용되고 있는 "엘로힘"과 "여호와"는 어떤 단어인가요?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하나님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엘로힘"이라고 하는 용어(대명사)가 나오지만, 창세기 4장 1절부터는 "여호와"라는 용어(이름)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둘은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어떤 속성부분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르게 사용하는 용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것들 중에서 "엘로힘"이라는 용어는 일반대명사로서, 복수의 형태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왜냐하면 한글성경에서 "하나님"으로 쓰이고 있는 용어에는 "엘로힘" 외에도 "엘", "엘로하" 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하나님에 대한 고유명사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 단어는 단수입니다.

 

2. 엘로힘(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엘로힘)"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하나님에게도 이름이 있느냐고 묻는 이가 있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곧 "여호와"라는 용어입니다. 물론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일 뿐, 실제는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야웨)"라는 용어가 훨씬 더 실제에 가까운 발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에 대한 단축형으로서 "야[흐]"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할렐루야"는 '찬양하다'는 뜻의 '할랄'에다가, '루'라는 2인칭의 복수 접두사이며, '야[흐]'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라는 용어의 단축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름 중에서도 "히스기야, 예레미야" 등에서 "아[흐]"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들이 다 '여호와'를 지칭하는 단축용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역성경에서 "여호와"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에 "야훼(야웨)"라고 번역했어야 더 좋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여호와"와 "야훼(야웨)"라는 발음 중에서 "여호와"를 선택해서 사용해왔기에 우리도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야훼(야웨)"가 맞을까요? 아니면 다른 이름이 또 있나요? 그것은 "야훼(야웨)"라는 용어가 하나님의 이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사42:8, 시83:18). 그런데 놀랍게도 출3:14에서는 "야훼(야웨)"라는 하나님의 이름 이외에 "에흐예"(히브리어맛소라사본 즉 히브리어 자음에다가 모음을 붙힌 버전)라는 이름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흐예"라는 용어도 사실은 "아하야[흐]"로 발음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야훼(야웨)"이거나, "아하야[흐]"일 것입니다. 그리고 "야훼"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그것이 무슨 뜻을 지녔는지를 모르지만, "아하야[흐](혹은 '에흐예')"는 그 뜻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밝혀져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이다" 내지는 "나는 알렙(알파)이다"이거나, "나는 지금 존재하는(존재케하는) 이이다"입니다. 고로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이것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하고 있고, 표준새번역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나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4. 엘로힘과 여호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럼,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엘로힘"과 "여호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용어가 쓰일 때의 강조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먼저 "엘로힘"은 창1:1에 나오는 용어로서, 그분이 창조주라는 의미로서 처음으로 나오는데, 이 용어는 한 마디로 그분의 전능성(못 하실 일이 없고, 못 아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출6:2~3). 그래서 이 용어는 하나님에 대한 초월성과 전능성이 강조된 객관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그 뜻이 "아하야[흐]"이므로 그분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이자, 그분은 "알렙 곧 시작하는 이"라는 뜻이지만, 특별히 이 용어를 사용된 곳을 보면, 대부분 그분이 어떤 개인이나 민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것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나타날 때 사용이 됩니다(출6:4~8).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그분이 시작하시고 홀로 자존하시는 분을 뜻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대상과 약속을 맺으시거나 혹은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사용할 때에 나타나는 용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여호와는 약속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늘 자신을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약속하셨고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도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자로서 신약시대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고로 구약의 "아하야[흐]가 "여호와"로 표현된 것이라면, 신약의 "아하야[흐]"는 "예수"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체적으로 구약의 여호와가 "약속하신 이"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신약의 예수님은 "약속을 성취하신 이"로 강조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5. 우리는 어떻게할 때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나요?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먼저, 여호와(신약은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곧 언약을 맺으시고 성취하셨던 하나님이신 여호와요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약속을 하셨는지를 꼭 붙드는 것이 관건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아하야[흐]")은 한 번 약속하셨으면 그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신다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어떤 것들을 약속하셨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둘째는, 그분의 전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을 "엘로힘"으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로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하여 여호와의 약속을 찾았다면,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요일5:18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예수)가 그(하나님께로부 난 자들=거듭난 성도)를 지키시매 악한 자(마귀)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는 약속의 말씀을 들었다면, 우리는 즉시 그 말씀을 이루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악한 자인 마귀는 결단코 나를 건드릴 수 없으며, 어거하지 못한다는 것을 믿은 후에 담대히 그들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해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믿음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 그 시간 속에서는 물리적인 법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고 바뀌게 됩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1년 02월 05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수의 이름 속에 감추어진 메시야 탄생의 비밀(마1:18~21)_2019-12-06(금)

https://youtu.be/eGIA5Icpq8o

 

1. 2천년전에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메시야는 누구였나요?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마1:16,18)

 

2. 이사야 9:6에 따르면, 이 땅에 메시야로 탄생하시게 될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예언되어 있었나요?

  이사야 9:6에 의하면, 메시야는 한 아기로 태어나실 것이며, 그분은 아들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그분의 어깨에는 통치권이 주어져 있고, 그분의 이름은 기묘자인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통치자)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우리가 사람의 눈에 보이게는 아기이요 아들로 보게 되지만, 실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바로 이사야 9:6의 예언의 핵심입니다.

 

3. 그렇다면 천사가 요셉과 마리아에게 미리 알려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아직 잉태되기도 전에 천사장 미가엘을 마리아에게 보내어 그녀에게 아기가 잉태될 터인데, 그분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라고 일러주었습니다(눅1:31). 그리고 마리아에게 잉태된 이후에는 주의 천사가 다윗의 자손이었던 요셉에게 가서 그분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라고 알려주었습니다(마1:21). 곧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와 정혼한 상태에 있던 요셉에게도 당신의 천사를 보내어, 그의 꿈 속에서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이며, 그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라고 일러주었습니다(마1:20~21). 그런데 그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는 뜻으로서,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혹은 "여호와가 구원자다"라는 뜻입니다.

 

4. 왜 신약성경에는 단 한 번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인가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켰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질문을 받고서 당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공개하셨습니다(출3:14~16). 하나님께서도 모세 이전에 조상들에게는 그분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려주지 않았으며, 다만 당신 자신을 "전능의 하나님(엘샤다이)"로 알려주셨을 뿐입니다(출6:2~3). 그러다가 모세의 질문을 받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출3;14~15). 그래서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무엘시대부터 하나님의 칭호는 "만군의 여호와"라고 약간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27권을 보면, 구약시대에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던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의 비밀이 그 이름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라고 알려졌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아들의 신분으로 오실 때에는,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라고 공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이상 구약시대에 쓰였던 하나님의 이름이 쓰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 속에 "여호와"의 이름도 같이 담겨 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쓰지 않아도 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최후의 당부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로 보면, 이 문장은 좀 특이합니다. 왜나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각각 있다고 한다면 "이름"이라는 단어는 복수로서 "이름들"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름"이 단수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은 같은 이름이요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사도행전에 고스란히 나오는데, 사도행전에 가 보면, 제자들이 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 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회개했던 3천명의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으며(행2:38), 빌립집사는 사마리아에서 주 예수를 받아들인 사마리아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행8:16). 또한 사도베드로는 가이사랴에서 성령받은 고넬료집안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게 했습니다(행10:48). 또한 사도바울도 에베소에서 12명의 성도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행19:5). 한편, 사울도 바울이 될 때에, 다메섹에 살던 믿는 형제 아나니아에게서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여기서 "주"는 곧 예수님을 가리키니 그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행9:17~18,22:16). 뿐만 아니라 사도요한이 천국에 올라가서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데,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셨습니다(계22:16). 고로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5. "예수"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마1:21)

  "예수"라는 이름은 사실 헬라어식 이름이 아니라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 "예수"는 "예수아"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은 "구원" 혹은 "구원자, 구주,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요나서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욘2:9)"라는 본문을 히브리어로 보면, "예호바 예수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구원은 여호와께"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서의 기자는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이는 그가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왜냐하면 그분자신이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장차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입니다. 고로, 예수라는 뜻은 "구원" 혹은 '구원자, 구주, 구세주"라는 뜻인데, 놀라운 것은 누가 무엇으로부터 누구를 구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그들(사람들)의 죄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마1:23에 보니,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바로 성탄절이요 성육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도 말하기를 "그가 자기자신에게 속한 땅 안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자기자신에게 속한 자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11, 헬라어원문)라고 말했습니다. 즉 예수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오신 사건 것입니다. 고로,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만 섬기고 그분만 경배하고 그분에게 영광돌리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9년 12월 06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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