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4 주일낮예배

제목: 그날 혼인잔치에서 입을 예복은 어떻게 준비하는가?(마22:11~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gn0etazFeFA  [혹은 https://tv.naver.com/v/28137452 ]

 

1. 들어가며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성도들을 천국의 혼인잔치 안으로 더 많이 들여보내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재밌게 하고 알차고 보람지게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날 천국에 못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는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더이상 교회가 아니라 친교단체 내지는 봉사단체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도들 중에 과연 누가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는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것에 관한 첫 번째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자신의 소유나 돈 그리고 세상의 쾌락을 더 귀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자는 결국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세상의 것이 더 좋아서 결국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천국의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온다.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천국 혼인잔치에 참여할 때에 입는 옷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그 옷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며, 그 옷은 누가 주는 것이며, 그 옷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인가?

 

2. 올바른 칭의론과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지금 죄인이고 부끄러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자신은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되었고 그래서 자신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곰곰히 따져본다면 거기에는 좀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을 때에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입혀지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구원의 완성은 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은 끝난 것으로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칭의는 구원의 노정에 이제 막 들어서게 되었으을 뜻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롬3:28).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롬3:24). 하지만 그것이 곧 구원의 완성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롬5:9의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리가 그분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더욱 그분으로 인하여 진노하심으로부터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구원'은 앞으로 받을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 완성된 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이들은 칭의를 오직 믿음으로 얻는 줄로만 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서를 과대해석한 것이다.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진술은 맞다. 하지만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줄 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칭의가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하여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 나온다(눅18:9~14). 이 비유에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한 바리새인과 어떤 세리의 기도가 있다. 그때 바리새인은 남더러 들으라고 자신의 행위를 기도하면서 자랑을 한다. 하지만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다만 가슴을 치면서 회개한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지은 자입니다.(눅18:13)"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둘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18:14)" 그렇다.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온전한 칭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를 얻은 자 중에 구원에 이를 자가 있는 것이다. 즉 칭의를 얻은 자 중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자가 나오는 것이다. 

 

3.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누가 결국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가?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결국 누가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천국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그것에 응답하는 자다. 그런데 이미 그 잔치자리에 참여하기로 예정된 자라 할지라도 그날 청함을 거절한다면 그는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 또 하나는 청함을 받아서 그 잔치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는 자가 들어간다. 그 잔치 자리에까지는 갔으나 결국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채 쫓겨나게 된다면 그는 결국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4.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은 왜 혼인잔치에서 쫓겨나고 말았는가?

  그렇다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도 누가 잔치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는가? 본문에 보니 예보을 입지 않았던 어떤 사람이라고 나온다. 그때 그는 왕의 사환들('천사들'을 상징)에 의해 손과 발이 묶인 채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래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는 간다. 대체 그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 잔치자리까지 참여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혼인잔치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입어야 할 옷(겉옷=엔뒤마)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다. 잔치자리에 참여하는 것은 사실 그가 누가 되었든지 상관 없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죄인이어도 관계 없다. 그리고 그가 이방인이어도 상관 없다. 잔치의 초청에 응한다면 누구든지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초청에 응하여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된 자라도, 혼인잔치에서 입어야 할 예복을 입지 않고 있으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곧 누구든지 겉옷을 반드시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 옷이 없으면 그 잔치에 절대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5. 천국의 혼인잔치에서 입는 예복은 누가 준비하는 것인가? 혼주인가 아니면 자기자신인가?

  그렇다면, 천국 혼인잔치에 참여할 때에 입어야할 예복(엔뒤마=겉옷)이란 대체 어떤 옷이며, 누가 준비해주는 옷인 것인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누가 과연 궁극적으로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들어가는지를 들었다. 그 사람들은 먼저 초청받았던 자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것을 더 좋아했고 사랑했기 때문이 그 잔치자리를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왕의 명령에 따라, 큰 길에 만나게 되었던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대신 초청을 받고 그 잔치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영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그럼 먼저 초청받았던 자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고위층인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평행본문을 보면, 이 잔치자리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 두 종류라고 나온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사회적으로 약자들인 계층의 사람들 곧 소외계층의 사람들과 죄인들이 먼저 그 잔치자리에 참여하게 된다(눅14:21~22). 그래도 잔치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러자 주인은 길들과 산울타리로 가서 거기에 있는 사람까지 강권하여 데려다가 잔치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 또한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이방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소외계층의 사람이 되었든지 아니면 이방인이 되었든지 이들은 원래 잔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잔치가 있는지 조차도 몰랐고 자신은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들은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도 안 해 본 자들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그들이 예복을 마련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날 혼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입었던 옷들은 다 혼인집에 손님들이 준비해서 입고 간 옷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혼주가 자신의 아들의 혼인잔치를 위해 미리 준비해놓았다가 그날 잔치자리에 참여한 자들에게 입혀주었던 옷이었다.

  그럼, 왜 혼주는 그날 잔치자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똑같은 예복(겉옷)을 입게 하였는가? 그것은 자신의 아들과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추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날에 거지들이 그 잔치자리에 초대되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잔치는 어떤 잔치가 되겠는가? 그 잔치는 아마 거지잔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혼주가 옷을 내주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초대된 자들의 신분과 허물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만약 그 자리에 부자가 왔다고 치자, 만약 그도 혼주가 내주는 옷을 입지 않았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거만한 모습을 드러내었을른지도 모른다. 혹 그가 구걸하던 거지였다고 치자, 그런데 그도 역시 혼주가 내주는 옷을 입지 않았다면 그는 더럽고 추한 거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혼주는 모든 사람들의 신분을 아들의 수준과 어느 정도 부합하게 맞추기 위해 예복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잔치에서 입었던 겉옷들은 다 손님들 자신이 준비해서 입었던 옷이 아니라 그날 혼주가 준비해서 주는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혼주가 내주는 옷을 입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혼주의 호의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는 것이요, 혼주에게 상당한 무례를 저지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혼주가 내주는 예복을 입지 않고 거기에 들어와 식탁에 비스듬히 누워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왕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띠는 그 사람을 불러다가 말을 한다. "친구여, 그대는 왜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에 들어와 있느뇨?" 그러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도 역시 잔치자리에 들어와서 보니 그 옷은 잔치에 매우 중요한 옷이었다는 것과, 만약 그 옷을 입지 못하는 자는 결코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옷을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6. 혼주가 주는 혼인잔치의 예복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때 혼주가 내주어 입게 된 혼인잔치의 예복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예복의 영적인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 이 땅에서의 혼인잔치와 천국에서 치르게 될 혼인잔치는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혼인잔치에서 신부는 딱 한 명이지만, 혼인잔치의 하객들은 신부가 아닌 객들로서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혼인잔치는 이와는 다르다. 천국에서의 혼인잔치에서 신부는 혼자가 아니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곧 단체적인 신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결혼식에 참여하는 신부와 결혼식 후에 있는 피로연의 자리에 참여하는 자들은 다 동일한 신부들이라는 점이다. 각각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신부들이 곧 그날 하객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에는 신부가 입는 옷이 곧 하객이 입는 예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부가 입을 예복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사도 바울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라고 정의했다(갈3:27~28). 왜냐하면 그 결혼잔치는 어린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결혼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소 그 옷은 그리스도의 옷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옷을 마련해 줄 수 있는가? 아마도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옷은 오직 혼주이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옷인 것이다. 아들의 수준의 옷과 비슷한 옷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옷이 어떤 옷인지에 대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곳은 "흰 옷"이라고 말씀하셨다(계3:4~5). 즉 결혼식 때에 신부들이 입게 될 옷은 "흰 옷"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천국의 모든 신부들은 흰 옷을 입고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데교회 안에 이렇듯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몇 명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신의 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라고 했다. 왜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우상숭배 행위에 참여하지 않아서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처럼 앞으로도 이기는 자가 결국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때에 장차 흰 옷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도 결코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거꾸로 뒤집어보라. 그럼 이 세상에서 자신의 흰 옷을 더럽히게 된 자는 결국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 되는 것이며,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날이 되면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성밖으로 내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계3:4~5, 계22:15).

 

7.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신부옷을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들은 신부옷을 어떻게 준비하고 단장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필수사항이고 또 하나는 선택사항일 수도 있겠지만 후자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첫째는 자신에게 입혀진 흰 옷을 그날 결혼식 때에 입을 수 있도록, 날마다 씻어 깨끗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계22:14). 그래야 새 예루살렘의 문 안에 들어가며 그 안에 있는 결혼식의 장소 곧 영광의 광장으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의 옷을 깨끗하게 간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의 피에 자신의 죄를 씻어내는 길밖에 없다(계7:14). 왜냐하면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자신의 옷이 더럽혀지기 때문이다(요일1:7). 그런데 생각해보라. 만약 회개하고 믿었던 그날에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그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수 십 년을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날동안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마귀와 귀신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활동하고 있으며, 자기 안에 죄성이 가득한데 어찌 죄를 짓지 않고 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천국의 혼인잔치의 필수적인 조건은 회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회개없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깨끗하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둘째로, 신부가 자시의 옷을 단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만약 신부라면 자기의 옷에 수를 놓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고, 보석을 달아 더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그가 남자라면 그는 자기의 머리에 쓸 면류관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사61:10). 그러나 이것은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니 그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준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다(계19:7~8). 어린양의 아내가 자기자신의 세마포 옷을 스스로 아름답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진짜 더 깨끗하고 거룩한 신부로서 준비되기를 원한다면, 그래서 더 거룩하신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 결혼식에 참여할 성도가 되기를 진정 원한다면 그는 날마다 회개하여 자신의 옷을 깨끗하고 빛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더욱 더 의로움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면류관과 보석으로 자기자신의 옷을 아름답게 단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으로 준비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렇다. 이러한 일은 오직 자기자신이 자기의 의로움으로 단장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단장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8. 신부가 자신의 혼인잔치를 위하여 겉옷을 준비하는 핵심진리는 무엇인가?

  신부가 자신의 결혼식과 혼인잔치를 준비할 때에 입어야 할 예복 곧 신부복이자 겉옷이란 대체 어떤 옷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입혀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인가 아니면 자신이 준비한 옷인 것인가? 그것은 둘 다이다. 그러나 그 옷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다. 그리스도의 공로 없이는 우리는 스스로 절대 의로워질 수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입혀주신 칭의의 겉옷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의의 옷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번만 회개하는 것으로 되어지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함과 동시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 열매들로서 옷에 수를 놓고 보석들을 달 아야 한다. 이것은 순종과 충성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삶과 같다고 하겠다. 당시 열 명의 처녀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나 다섯 명은 미련하여 아무런 준비를 하고 않았고 그저 처음 준비한 등과 기름만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하지만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날마다 댓가를 지불하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마중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신랑은 더디 왔고 기름이 바닦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었으니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때 비로소 기름을 사러 갔지만 때는 늦고 말았다. 그렇다. 기름은 일평생 준비하는 결혼 예복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 순종과 충성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없는 자는 그날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9.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안전한 것인가?

  우리는 지난 번과 오늘 비유의 두 가지 비유 말씀을 통하여,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분명하게 배울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 의의 옷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옷이 더럽혀진 것을 모른 채 계속 죄를 짓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자는 그날 버림을 받고 말 것이다. 더럽혀진 옷을 입고 천국 결혼식과 혼인잔치의 피로연에 동시에 참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미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옷이 더럽혀져서 도무지 잔치 자리에 입고 갈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린 자는 결국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최소 그가 언젠가는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한 번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던 자라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천국 문에 이르렀을 때에 그곳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번 구원받았다고 해서 영원히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를 억지로다도 끌어다가 천국에 데려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것은 교리에서나 나올 뿐이다. 예를 들어, 성도의 견인과 같은 교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다. 칼빈의 교리 중에서 그의 기독교강요 제4권에 비로소 등장하고 있는 "성도의 견인교리"를 들어보았는가? 곧 한 번 구원받았으면 그는 최종적으로 구원에서 탈락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 교리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기 때문이다. 

 

10. 나오며

  어떤 사람은 자신은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줄 확신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들 중에 그날에 이르러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날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쫓겨난 자신을 보고 거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겠지만 아무 소용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생 가운데 얼마든지 더럽혀진 자신의 겉옷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초청에 응한 자가 가는 것은 맞기는 하지만,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입혀준 의의 옷을 날마다 깨끗하게 씻지 않는 자는 그곳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더럽혀진 옷을 입고 그날 새 예루살렘 성 안의 영광의 광장에서 펼쳐지는 어린양의 결혼식 및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밖에 버려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자신의 더럽혀진 의의 옷을 희고 깨끗하고 빛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서 그 열매를 준비하자. 그리고 순종과 충성함으로서 면류관과 보석과 수놓은 옷으로 단장해야 한다. 그래서 그날 우리 모두는 천국 문 앞에서 기쁜 얼굴로 만날 수 있는 성도가 되자. 할렐루야!

 

2022년 07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우리가 교회가 나와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할렐루야! 아멘"이라는 말일 것이다. 왜 우리는 교회에서 이 말을 자주 듣게 되는 것인가?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언제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가? 요한계시록 19장의 서두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어서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양의 결혼식을 언급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이마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왜 복있는 것인지를 알려준다. 여러분은 어린양의 결혼식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언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혹시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어 믿는 자들만을 불러내어 7년동안 공중에서 혼인잔치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예수께서 재림하시어 결혼식을 치른 후 천년동안 지상에서 활동하는 것을 혼인잔치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러나 안까깝게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천상의 찬양소리인 "할렐루야 아멘"과 더불어 "어린양의 결혼식과 결혼잔치"의 과연 무엇을 의미하며, 언제 얼마동안 있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들(일곱인재앙, 일곱나팔재앙, 일곱대접재앙)에 촛점을 맞추어 요한계시록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9장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전의 재앙과 심판의 장면에서 이제는 환희와 감격과 찬양의 장면으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자연에 재앙을 내렸고 이어서 사람들에게 재앙을 3중적으로 내렸다. 특히 사람들은 불신세력 곧 마귀에 속한 자들과 큰 음녀(큰 성 바벨론)를 중심으로 재앙을 내렸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9장부터는 상황이 반전된다. 드디어 승리하는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고통과 슬픔과 사망이 없는 천상의 아름다운 세계로의 대전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천상에 있는 존재들(천사와 구원받은 성도들)의 감격적인 찬양과 어린양의 결혼식 준비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등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특히 요한계시록 20장에 가서는 천년왕국의 의미와 아울러 천년왕국 후에 있어질 영원한 통치에 관한 소개가 나온다. 그리고 21~22장은 새하늘과 새땅 곧 천국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나온다. 이것들 중에서 오늘은 천상의 세계에 있는 피조물들 즉 네 생물과 24장로들과 구원받은 신구약의 백성들과 천사들의 찬양이 어떤 것인지를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준비된 신부의 어린양의 혼인식(결혼식)과 혼인잔치를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먼저는 왜 하늘에 있는 존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것이고, 둘째는 어린양의 결혼식이라는 대체 무엇이며, 그의 아내(?)가 결혼식을 준비하였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지 그리고 어린양의 신부와 어린양의 결혼식잔치에 초청함을 받은 하객들은 누구며 왜 이들이 왜 복있는 자들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도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2. 하늘에 있는 구원받은 백성들과 영적 피조물들의 대합창

  하나님께서는 맨 마지막에 있을 대접재앙들 중에 일곱번째 대접재앙을 통해서 이때 큰 성 바벨론을 심판하신다(계16:19). 큰 성 바벨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많은 물들 위에서 여왕으로 앉아 있되, 사탄을 상징하는 일곱머리 뿔을 가진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 음녀를 가리킨다(계17:1,3). 그녀는 땅의 가증한 것들(우상들)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땅의 음녀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계17:5). 이 여자는 아브라함 때부터 종교를 이용하여 땅의 왕들을 다스려왔으며, 땅의 왕들과 무역 즉 거래를 통해서 부와 사치를 누려왔던 존재다(계18:3). 이름하여 종교를 가장하여 세상의 왕들을 지배했던 음탕한 여인으로서,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숭배케 한 장본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종교를 가장했으나 나중에 기독교를 가장하여 지금까지 활동해오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녀는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과 예수를 증언하는 자들을 무참히 살해해왔다(계17:6,18:24). 이 여자는 결국 로마카톨릭으로 일단 귀결되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하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일순간에 심판하실 것이다(계18:10,16,19). 이것은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일어날 것이다(계19:1~10). 그리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고, 이어서 아마겟돈전쟁으로  인하여 인류의 역사는 마감될 것이다(계19:11~21).

  이제 요한계시록 19장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하여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선포하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시작된다. 이때 찬양하는 주체는 2종류다. 하나는 이미 구원받아서 천국에 들어와서 왕노릇하고 있는 자들로서, 하늘의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나는 천상의 존재로서 네 생물들과 천사들이다. 이들의 음성은 실로 크고 놀랍기만 하다. 그 내용의 핵심은 "할렐루야!"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큰 음성이다. 이 음성은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같기도 하고(계7:9~10,18:1,6), 그리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았다(계18:6, 14:2). 이 두 가지 음성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음성이다. 그리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았다고 했다(계6:1,10:3). 이는 네 생물 내지는 천사의 음성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참되고 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셨기 때문이다(계19:2). 둘째는 그녀(음녀)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땅을 부패하게 만들었던 큰 음녀를 심판하셨기 때문이다(계19:2). 셋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의 피를 그녀의 손으로부터 신원하셨기 때문이다(계19:2). 그러므로 그녀가 먼저 불못으로 들어가 영원히(세세무궁토록) 고통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계19:3).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녀(음녀)로 인하여 고통받았고 죽임당했던 의로운 자들을 보상해주실 것이다(계19:5, 11:18).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보지 않은듯 하나 다 보고 계시며, 하나님께서는 관여하지 않는듯 하나 모든 만유를 다스리시며,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3. 어린양의 결혼식과 혼인잔치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이어서 하늘에 있는 영적인 존재들(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선한 천사들)이 함께 큰 소리로서 어린양의 혼인식(결혼식)이 다가왔음을 선포하며, 이 결혼잔치에 초대함을 받는 자들이 복이 있음을 선언한다.

  그렇다면 어린양의 결혼식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이 결혼잔치에 초청함을 받았다는 것을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이 헷갈려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어린양의 결혼식과 결혼잔치에 대해 교회(그리스도인들)가 진짜로 그리스도와 공중에서 결혼하여 7년동안 혼인잔치를 연다거나 혹은 결혼후 1,000년동안 지상에서 결혼잔치가 펼쳐진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마치 천년왕국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그럴까? 혹시 여러분은 아는가? 천상에 있는 영적인 피조물의 이러한 선언 이후에 그 어디에서도 어린양의 결혼식이 실제로 일어났다거나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베풀어졌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어린양의 혼인식(결혼식)과 어린양의 혼인잔치(결혼잔치)가 직접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후에 되어질 어떤 상황 등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임을 얄려준다.

 

4. 어린양의 결혼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먼저 어린양의 혼인식(결혼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진짜 남녀의 성적인 결합처럼 신혼밤이의 일이 발생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렇게 해석해온 수많은 이단들이 있어왔다. 그들은 다 사기꾼들이었다. 성경에는 한 번도 남녀의 성적인 결합 자체를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린양의 결혼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천사의 선포 속에 암시되어있다. 우선 천사가 외치는  어린양의 결혼식에 대한 내용부터 살펴보자.

계19:6b~8[헬라어직역] 할렐루야! 왜냐하면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가 [왕으로] 통치하셨기(왕노릇하셨기) 때문이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우리가 크게 기뻐하자.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 영광을 [장차] 돌릴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혼인식(결혼식)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여인(귀네,아내)가 자기자신을 준비(단장)하였기 때문이다. 8 그리고 그녀(어린양의 아내)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옷]을 [단번에] 입도록,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왜냐하면 이 세마포[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이 선포에 의하면 어린양의 결혼식이 시작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가온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주의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다. "그(어린양)의 여인(안내)"라는 단어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구원받은 성도들을 그분의 아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이스라엘의 결혼풍습을 잘 알고 있는 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결혼풍습에 따르면, 정혼(약혼)한 자는 법적으로 볼 때 이미 결혼을 약속한 남편의 아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은 따로 떨어진 두 존재가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 결혼풍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자. 어떤 총각이 어떤 아가씨와 결혼하려면, 총각은 결혼지참금과 서약서를 가지고 랍비와 함께 장차 장인이 될 신부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결혼지참금을 드린 후 서약서를 낭독하여, 장인될 어른에게 결혼승낙을 요구한다. 그러면 장인될 사람은 결혼지참금을 받고서 서약서가 마음에 들었을 때 1차로 합격시켜준다. 그리고 처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의사를 묻는다. 그때 총각은 포도주 한 잔을 따른 후에 그녀에게 포도주 반 잔을 주는데, 만약 그녀가 그 포도주의 잔을 비우게 되면 결혼이 성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마지막으로 처녀는 포도주 몇 방울을 서약서 위에 떨어뜨리는데, 이것은 피 곧 생명을 상징하는 포도주로 서약을 하는 것으로써 죽음 이외에 둘 사이를 나눠질 수 없음을 다짐한다. 이것이 결혼식의 첫부분인 "약혼"이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신랑될 총각은 떠나간다. 그리고 약 1년간의 기간을 각각 따로 갖는다. 그 기간에 총각은 약혼한 신부와 함께 살 집을 마련한다. 그리고 신부는 신부수업을 받는다. 그런데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부가 정절(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식의 중간부분인 "결혼식 준비"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혼식이 진행될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오직 신랑의 아버지만 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이 신혼집을 다 짓게 될 즈음에 아버지가 결혼식 날짜를 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날짜가 되면 신랑은 이제 신랑의 들러리들과 더불어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온다. 그때, 신부도 신랑이 언제 올지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부분 신랑은 밤중에 온다고 한다. 그때 신랑의 친구들(들러리)은 동네가 떠나가게 큰 소리로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외친다. 그러면, 신부의 들러리들이 등불을 들고 동네어귀로 나가 신랑의 일행을 맞이한다. 그리고 신부집으로 안내한다. 이때 신부가족에게 인사를 건넨 신랑은 이제 신부를 데리고 자기가 장만해둔 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날 밤을 보낸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모든 하객들이 모인자리에서 손수건을 흔들며 "자 보시오."라고 외친다. 거기에는 신부가 정절을 지킨 흔적의 피가 묻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약혼한 후에 정절을 지키지 못해 피가 묻어나지 아니하면 그때는 파혼이 된다.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신랑은 자기의 여인에게서 피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해도, 자신의 신부를 믿기에 자신의 옆구리를 송곳으로 찔러 피를 묻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한다고 한다. 이때 신랑의 아버지는 결혼이 성사되었다고 선언하면서 마음껏 잔치를 즐기라고 한다. 그리고 신부에게 자신이 준비한 결혼예복(깨끗한 세마포)을 내어준다. 그러면 신랑신부가 이 예복을 입고 결혼잔치에 함께한다. 그러므로 결혼의 제일 마지막 순서는 결혼잔치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결혼식의 핵심인 "결혼식"라는 것이다.

  한편, 결혼식 잔치는 자식의 장가를 위해 미리 초청장을 보낸 하객들이 참석하게 되는데, 이 때 초청장을 받은 하객들이 오지 않을 때에는 다른 사람이도 참석을 시킨다. 네거리로 나가서 지체장애자들이라도 데려오라고 하고, 그래도 하객들이 부족할 때에는 성밖으로 나가서 만나는대로 데려오라고 시킨다. 이 비유가 바로 마22장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하객의 비유다(마22:1~14). 이것이 결혼식의 끝부분인 "결혼잔치"라는 것이다.

  이상의 이스라엘의 결혼식의 풍속도를 통해서, 여러가지 성경의 의문들이 다 풀릴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왜 결혼식 날짜는 아들도 모르고 천사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안다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마24:36). 그리고 약1년동안의 시간은 신랑이 신부를 위해 집을 장만하는 시기로서, 이것을 빗대어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b~3)" 그리고 신부측에서 볼 때에, 그날이 가까이 오면 신부의 들러리들(슬기운 다섯처녀)이 왜 깨어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마25:1~13). 그리고 이 신부가 될 여자(처녀)를 일컬어 "어린양의 아내(결혼한 여인)"이라고 부르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계19:7).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우리는 법적으로 예수님의 약혼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성도들은 법적으로 볼 때에는 이미 어린양의 아내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약혼후 약1년이 지나 결혼식을 치르기 전까지, 신부가 꼭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신부의 "정절"이다. 만약 그때 정절을 지켜내지 못한 신부는 결국 퇴짜를 당하고 말 것이다. 결혼이 깨지는 것이다. 신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결혼식날에 어린양의 아내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옷이 주어진다는 의미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신부될 여인이 정절을 지켜낼 때에야 비로소 시아버지가 그 신부에게 드레스(세마포옷)를 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부가 입을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옷이 왜 성도들의 옳은 행실들이라고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함을 받는 것이 왜 복인가?

  이어서 한 천사가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니, 기록하라"면서 이렇게 선포한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9:9)" 우리는 여기서 천국에 들어간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군지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필요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방금 앞구절에서만 해도 구원받은 성도들을 "그(어린양)의 아내(계19:7)"라고 말하고 있고, 계21:9에서는 "신부"라고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을 지칭하는 표현이 여러가지인 것이다. 어떤 특징을 따라 각각 다르게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양과 관련지어서는 방금처럼 "어린양의 아내" 내지는 "어린양의 신부"가 될 것이다(계21:9).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지어서는 "하나님의 종들(계19:10, 22:3)", "하나님의 아들들(계21:7)", "하나님의 상속자들(계21:7)", "하나님의 백성들(계21:3)"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죄와 마귀와 죽음과 싸워서 이기고 들어온 자들이기에 "순결한 처녀들(계14:4)", "이기는 자들(계21:7)", "땅의 왕들(계21:24)"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복음서에서는 "신랑의 친구들(들러리)(요3:29)"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신부의 친구들(들러리들)(마25:1~2)"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계19:9의 말씀처럼 "혼인집에 초대된 하객들(마22:3, 계19:9)"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다 구원받은 성도들에 대한 표현들로서 어떤 상황에 염두해두고 표현하는 용어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이 복있는 자인가? 그것은 그런 자만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자만이 영광스러운 천국의 분깃에 같이 참여하게 되기에 복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천국에 영원히 살고 싶은가?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지 말고 그분의 초청에 응하여 어찌하든지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6. 나오며

  방금 전에도 우리는 어린양의 결혼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어린양의 결혼식은 결코 이성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어떤 결혼식도 아닌 것이다. 천국과 이 세상에 따로 떨어져 있는 신랑과 신부가 함께 사는 것은 가리킨다(호2:19~20). 이제는 영원히 떨어져 살지 아니하고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것을 일컫는 영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약혼녀가 되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본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사람 곧 어린양의 아내가 된 것이다(물론 약혼녀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분과 잠시 떨어져 살 때에 정절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천국에 못 들어가게 될 것이다(물론 지금 죽는다면 그 일을 죽는 그날에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파혼인 것이다. 우리가 정절을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내가 그분의 약혼녀라 할지라도 죽는 그날에 파혼당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귀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자를 일컬어, 성경은 "음녀"라고 말한다. 이미 신랑이 있음에도 음행을 저지른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과연 지금 나는 음녀인가? 아니면 신랑을 만나게 될 그날까지 정절을 지키는 어린양의 신부인가? 그것은 오늘의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건투를 빈다.

 

2018년 3월 2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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