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3)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계5:6~14)_예배와 관련하여(01)_2022-05-12(목)

https://youtu.be/-4mdIIVANKA [혹은 https://tv.naver.com/v/26808816 ]

 

1. 요한계시록 5:6~14에 나타나 있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5:6~14의 말씀은 천상에서 예배하고 있는 장면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예배에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네 생물과 24장로들 그리고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에게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기 교회 성도들이 일찌감치 예수님을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으로서 찬양하고 경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2. 예수께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찬송가에는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예배 시간에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하나님께 찬송과 경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도 동일하게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 예를 들어 보면, 이렇다. 찬송가 26장 구세주를 아는 이들 찬송하고 찬송하세. 찬27장 빛나고 높은 보좌에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같이 빛나네. 찬30장 전능하고 놀라우신 나의 주님 구세주, 찬31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백성들아 사랑을 전하세. 찬32장 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예수 사람이 되신 하나님. 찬33장 영광스런 주를 보라 고난받는 그 모습. 찬 36장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찬 37장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를 찬양하세.... 그렇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이렇듯 우리 주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리는 찬송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3. 요한계시록 5장은 천상의 예배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지상의 예배를 가리키는가?

  우리는 요한계시록 5장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는 천상의 존재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4종류의 존재들로서, 네 생물들, 24장로들, 천천만만의 천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조물들'이다. 이 때 피조물들은 이렇게 찬양을 한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 권능(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5:13)" 그렇다면 이때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양과 경배를 올리고 있는 피조물들은 천상에 있는 피조물들인가 아니면 지상에 있는 피조물들인가? 우리말 성경(개역개정)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5:13)" 우리말 성경에는 처음 시작을 '하늘 위에'라고 시작한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하늘 위'가 아니라, '하늘 안'이다. 그래서 다시 요한계시록 5:13의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하늘 안에 있는, 땅 위에 있는, 땅 아래에 있는, 바다 위에 있는, 그것들 가운데 있는 바, 모든 피조물이 [있다]. 내가 들었다. 그들이 말하고 있기를, 보좌 위에 앉아 있는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이 세대들의 세대들까지(세세토록) [있을지어다]" 그렇다.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 나오는 모든 피조물은 천상에 있는 피조물들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천상의 존재들이 예배드리는 장소는 제일 높은 하늘이므로, 더 이상 하늘 위에 있는 존재가 없기에 '하늘 위'가 아니라 '하늘 안'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상에서는 누가 예배를 드릴까?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과 예수님을 알고 경배하는 사람들만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있는 것이다. 

 

4. 천상의 예배와 지상의 예배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 천상에서 드리는 예배와 지상에서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천상에서 드리는 예배의 핵심 사항은 다음 3가지 뿐이다. 첫째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엎드린 후에 경배한다(절한다)는 것이다(계5:8,14). 둘째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찬양을 올린다는 것이다(계5:9~10,12,13). 셋째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기도를 올려드린다는 것이다(계5:8). 그렇지만 맨 마지막에 나오는 '기도'의 요소는 예수께서 재림하시어 심판을 끝내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면 더 이상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상에서의 예배의 핵심은 '찬양'에 있다. 거기에 찬양이 있다면 그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고, 찬양이 없다면 그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5. 지상에서의 예배의 정의와 구성 요소는 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예배학에서는 대부분 예배를 정의하기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이라고 한다. 그런데 천상의 예배를 보면 '만남'이라는 것이 핵심 사항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핵심은 찬양을 올려드리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절하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때 천국에서 면류관을 쓰고 있는 성도들은 그냥 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면류관을 벗은 후 예수님께 절을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예배를 드리려고 오신 분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만났다고 정의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예배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보이지 않지만,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데 그때에 3가지를 주신다는 것이다. 첫째는 말씀(말씀 선포=설교)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복(축도)을 주신다는 것이다. 셋째는 피와 살(성찬)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편에서는 무엇을 바치면서 그분과 교제할 수가 있는가? 그것도 역시 3가지다. 첫째는 찬양을 올려드린다. 둘째는 기도를 올려드린다. 셋째는 예물(헌금)을 올려드린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는 예물을 드리지 않는 예배는 더 이상 예배라고 부를 수 없다면서, 예물을 드리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기도회'라고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천상에서 드리는 예배를 보니, 예물을 드리지 않는다고 하여 예배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천상에서의 예배의 요소가 '찬양'과 '기도' 그리고 '엎드리고 절함'이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12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01)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비밀(창22:1~8)_2021-05-20(목)

https://youtu.be/_9daspLCyaE [혹은  https://tv.naver.com/v/20305816  ]

 

1.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하셨나요?

  아브라함과 블레셋왕 아비멜렉과의 상호불가침 계약을 체결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제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 그리고 내가 네가 일러준 한 산 거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12:2)" 이 말씀에 따라 아브라함은 그의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게 됩니다. 물론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 여호와의 천사가 막아섬에 따라 대신 수풀에 걸려있는 숫양으로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2.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이처럼 시험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한 이 사건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직접 찾아와 만나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 언제인데 또 아브라함을 시험하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시험하는 심술궂은 분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누구시며,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미리 보여준(여호와이레)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창18:10,14). 

 

3. 이삭은 어떻게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나요?

  얼핏 보기에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해보시는 사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장차 아들로 오셔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장차 행하시려는 인류 구원의 사건의 비밀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던 아브라함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 그때 아브라함에 나타난 분은 실은 한 분 하나님이셨습니다. 구약시대 단 한 번,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그날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한 가지 약속을 하셨는데, 그것은 지금은 비록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식이 없지만, 기한이 이르러 하나님께서 다시 사라를 방문하는 날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입니다. 그리고나서 약 1년 뒤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난 이삭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모습으로 온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창2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은 장차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친히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사건과 같은 이치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삭이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날 아브라함이 바친 이삭은 결코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실 분에 대한 예표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바쳐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아버지인 자기에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 있나이까?"하고 물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창22:8). 그런데 우리말성경으로 이 말을 보면,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양이을따로 준비해놓으신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성경 창세기 22장 전체를 다 읽은 사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수풀에 걸려있는 숫양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아브라함은 거기서 기꺼이 독자를 바칠 생각으로 거기에 올라간 것이지 어떤 요행을 바라고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당시 자기와 자기의 아내로서는 도저히 낳을 수 없는 자식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친다하고 하여도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또 다른 방법으로 아들을 주시든지, 아니면 죽은 아들이라도 다시 살려내주시든지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영어성경을 비롯한 우리말성경에서는 부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지만 창22:8의 말씀을 히브리어원문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번제에 쓰실 한 어린양으로 보여줄 것이다(혹은 예비하실 것이다)" 혹은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내 아들아, 번제에 쓸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자신으로부터 친히 보여줄(혹은 준비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자신의 아들을 내려보내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께서 창세기 18장에서 이미 계시한 말씀과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계시가 들어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우리 인류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삼으셨다고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다는 것이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한 분 하나님께서 다시 오신 결과라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창18:14,10, 22:8). 고로 우리는 이삭이 곧 장차 우리 인류의 구속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사건의 줄거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께서 아들을 제물로 취하신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예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때 아브라함의 종들 둘이 산 밑에까지는 따라왔지만 그이후부터는 아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등에 지고 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을 통하여, 장차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기 때문인다. 산 맡에서 4왔던 종들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구약시대에는 율법이 도와주었지만 아들이 오시면 그후에는 아들이 친히 속죄의 사역을 담당할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마랳, "두 명의 종들"은 거기까지 도와준 "율법"을 상징하고, 직접 나무를 지고 올라간 이삭은 십자가(나무)를 지고 골고다언덕을 올라가셨던 예수님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때 이삭의 나이도 십자가 지실 때의 예수님의 나이와 같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때 이삭의 나이를 25세로 보았으며, 야살의 책에서는 37세로 보고 있습니다).

 

5. 왜 오늘날까지 성도들은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으로 보지 못하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에게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몸으로 나타나셔서 장차 어떻께 인류를 구속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당신이 다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창18:10,14). 그러나 A.D.325년 니케아종교회의 이후로 하나님은 셋으로 계시지만 한 분이라는교리로 굳어버렸습니다. 이처럼 니케아종교회의를 비롯한 여러 초기 기독교회의가 이단세력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는데 앞장선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전달해주지 못함으로 인하여,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일하셨던 하나님의 비밀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활동하셨습니까? 그분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는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삼위일체 교리들이 확정됨에 따라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도 그 교리에 입각하여 번역을 해왔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그때에 이해가 조금 안 되는 부분이 있어도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것입니다. 그나마 주님이 다시 오시려고 하는 이 때에 하나님께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갖도록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2021년 05월 20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상에 계신 주 예수님은 왜 자신을 어린양으로 나타내 보이셨는가?(계4:6~11)_2019-06-04(화) 

https://youtu.be/j-5vclmQNtQ


1. 주일성수의 핵심은 무엇을 있을까요? 그것은 "예배"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4~5장에 나오는, 천상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보니 예배의 핵심은 "엎드려 절함"과 "찬양"과 "기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엎드려 절함"은 자세를 가리키고, "찬양과 기도"는 예배의 표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천상의 예배를 보니, 지금 우리가 지상에서 드리는 예배가 차이가 나는 부분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계4:10; 5:8,14)


2. 천상의 예배에서 특별한 점은 천상에 있는 구원받은 [신구약]백성들의 대표자인 24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엎드린다는 것은 절을 받을 대상이 있기 때문에 하는 행위입니다. 만약 엎드려 절을 할 대상이 없는데도, 거기에다가 절을 한하면 그는 아마 미친 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 천상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보겠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을 때에 24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자 곧 자신을 어린양으로 나타내 보이자, 24장로들이 그분께 엎드려 경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보좌에 앉아계시는, 홀로 한 분이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볼 수가 없습니다(딤전6:16).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분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나타나 보여지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그분께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신적 대상인 하나님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행위는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높여 찬양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자 사람들은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천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자신을 어린양으로 나타내 보이자, 24장로들이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천사들도 따라서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24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아니라 어린양에게 엎드려 경배했던 것일까요?


3. 요한계시록은 처음 읽을 때에는 참으로 뭐가 뭔지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특별히 헷갈리는 것은 요한계시록 1장에서 분명히 자신을 나타내보이신 예수께서 4장 이후부터 21장까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맨 끝에 있는 22장 후반부에 가서 비로소 자신을 다시 나타내 보이십니다(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천사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계22:16)" 참고로, 요한계시록 2~3장은 1장에 자신을 계시하신 "인자같은 이" 곧 예수님께서 일곱교회에서 보내라는 편지이니까 뛰어넘어간다고 친다면, 1장 이후 21장까지 예수님은 자신을 감추시고 나타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4장부터 21장까지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있습니다(4:10; 5:8,13). 여기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에 해당하며, "어린양"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4장에서 천상의 모습을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에 대한 천상의 모습만 있습니다. 그런데 5장으로 넘어가면, "보좌에 앉으신 이"와 더불어서, 찬양과 경배를 받고 계시는 "어린양(아르니온)"이 등장합니다. 영국의 대 신약학자 리차드 보캄(보컴,보쿰)은 찬양과 경배를 받고 있는 어린양을 일컬어, 그분이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유대인은 오직 한 분 하나님에게만 찬양과 경배 그리고 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사도요한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또 다른 두번째 신에게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보캄).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혹은 곁에) 계신 어린양은 보이지 않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체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보이는 어린양에게 24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했고(계5;8,14), 그 뒤에는 천군천사들도 그분에게 엎드려 경배하게 됩니다(계7:1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때에 어린양으로 나타내 보이셨을까요?


4.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때, 어린양으로 모습으로 나타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서는 딱 2가지 존재에게만 경배행위가 나온다는 말씀을 통해서 그 뜻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 외에 또 다른 어떤 짐승에게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짐승은 사탄마귀(용)을 대신하는 존재로서 첫째는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계13:1~10)이요 둘째는 "땅에서 올라오고 있는 짐승"(계13:11~18)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어린양"도 일종의 짐승과 같아 보이고, "바다짐승"이나 "땅짐승"도 일종의 짐승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이후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은 바다짐승이나 땅짐승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탄마귀에게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는 신실한 성도들은 한 분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존재에게도 절하지 않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짐승"(대제국으로 표현됨)은 로마의 11대황제 "도미시안(도미티아누스)"가 분명합니다. 그가 자신을 백성들에게 "우리의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경배하라고 강요한 살아있는 황제가 바로 당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찬양을 올릴 때에 똑같은 고백합니다. "우리의 주 하나님이여! ..."(계4:11) 그리고 계5장에 가면, 어린양에게 경배를 올립니다(계5:8,14).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 주 예수님만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이지, 결코 이 땅에 있는 로마의 황제가 경배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묘사되어 있고, 이 세상의 황제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5.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도 비유할 수 있을텐데 왜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의 겸손과 낮추심과 희생과 사랑을 표현해주기 위함입니다. 즉 전능자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완전히 낮추시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분을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세상이 통치자인 당시 도미시안황제는 사람들 위에 자신을 높이고, 군림하면서 강제로 자신을 숭배하라고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대조되는 모습입니까? 진짜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비워 피조물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셨건만, 이 세상의 왕이라는 자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을 모조히 죽이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누가 진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가를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 불과하겠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심과 동시에 구원자이십니다. 특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자신을 목숨까지 희생하는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가면, 즉시 그분께 엎드리지 아니할 수 없으며 경배를 드리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면 어린양으로 자신을 나타내보이시는 하나님께 그냥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께서 못난 우리 죄인들을 위해 그렇게까지 낮아지셨으며, 그렇게까지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까지 맛보셨던 것을 잊을 수가 없고, 감사하고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신 하나님께 늘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립시다.


2019년 6월 4일(화)

정병진목사


예배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의식을 행할 때 우리는 예배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 절하고 경의를 표하면 그것이 예배인가? 그러나 그것은 존경의 표시일 수도 있도 감사의 표시일 수도 있다. 엎드려 절하는 것을 가지고 예배라고 정의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또한 예배의 요소는 무엇인가? 어떤 것이 들어가야 그것을 예배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거기에는 찬양과 기도가 들어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높이는 말을 할 수 있지만 대부분 그를 찬양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에게 기도하지도 않는다. 고로 예배란 예배를 받은 대상이 신적인 존재라는 전제하에 행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네 생물과 24장로들과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어린양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있고, 그분께 찬양을 드리며 기도를 드린다. 왜 그들은 보좌 위에 앉으신 이,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엎드려 경배하거나 찬양하거나 기도하지 않고, 어린양에게 하고 있는가? 계5장은 완전한 천상의 예배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예배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예배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것인가? 오늘은 그것을 찾아보자.

2019-06-02(주일)
제목: 예배란 무엇이며 어떻게 드리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계5:7~12)
https://youtu.be/Xo_9eNPhenU


1. 들어가며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받으실까? 어떤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이것은 예배의 태도에 관한 문제이지, 예배의 내용이나 방법에 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에 헌금을 내지 않으면 예배드린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교회나 목회자도 있다. 정말 예배시간에 헌금을 바치지 않으면 예배드린 것이 아닌가? 그리고 토요일에 늦게 잠을 자다보니, 주일에 와서 그만 설교시간에 졸다가 갔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예배를 드린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 예배인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배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들어가야할 요소는 또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함께 드리는 천상의 예배 안으로 한 번 들어가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과연 천국에 있는 천상의 존재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 예배는 이 지상에서 드리는 예배와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일까를 찾아보자.

 

2. 오늘날의 예배형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지금 전 세계 교회들에서 드리는 예배는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일까? 누가 만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것인가? 대부분의 성도들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금처럼 예배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해준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인간의 자연발로적인 반응과 참여 속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예배는 우리 개혁교회의 작품이 아니며, 로마카톨릭의 작품도 더더욱 아니다.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모임의 형태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예배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것은 B.C.586년에 남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B.C.1010년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이 탄생하셨고, B.C.946년경에서는 통일 이스라엘의 3대왕이었던 솔로몬에 의해 성전도 완공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솔로몬의 아들 대에 가서 나라는 두 동강이가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북쪽 이스라엘은 속히 우상에 물들어버렸으며, B.C.722년 제19대 호세아 왕 때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살만에셀 왕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하지만 남유다도 이와 거의 비슷한 경로를 밟았으니,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때로부터 약 150년이 지난 B.C.586년 제20대 시드기야왕 때에 남유다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그런데 그때 남유다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었고, 솔로몬성전은 완전파괴되었으며, 남은 왕족과 귀족들 약 5만명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거기서 그들에게 안식일이 찾아왔다. 이전에는 안식일에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지만 이제는 성전이 없다.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의 유브라데 강가에 나와서 그 옛날 안식일을 지키며 노래하던 그날을 기억하며 슬피 울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식에게만큼은 이러한 비참한 것을 물려주지 않으리라고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포로생활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선지자들의 외침을 듣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만큼은 율법(토라)와 선지서(느비임)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그만한 집(회당)을 마련하고는 안식일에 되면 거기에 모여, 쉐마를 낭독하고, 기도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선지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회당장의 축도로 모임 마쳤다. 그것은 매안식일마다 지속되었고, 그러자 그것이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회당예배"라고 불렀다. 즉 희생제물을 잡아 바치던 제사의 형태에서 기도와 말씀중심의 예배형태로 바뀌게 된 것회당예배인 것이다. 결국 회당예배의 핵심은 신앙고백과 기도와 성경낭독과 해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가 회당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기원의 순서까지 들어가니, 회당예배는 첫째, 예배의 기원. 둘째, 쉐마낭독(신6:4~9). 셋째, 테필라(기도). 넷째, 성경낭독과 해설. 다섯째, 회당장의 축도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찬찬히 이것들을 살펴보라. 이것은 오늘날 개혁교회의 예배형태와 유사하지 아니한가? 바벨론 포로시절부터 시작되었던 회당예배를 드리던 초대교회 유대인 성도들이 유대교의 회당예배를 기독교예배에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3. 예배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을 두고 예배라고 말할 수 있는가? 뒤에 가서 배우겠지만, 그냥 어떤 대상에게 절을 하면 즉 경배한다면 그것이 예배인가? 절을 하는 것이 예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절을 했다고 해서 예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현하거나, 존경이나 복종의 표시할 때에 절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에는 나라의 통치자들과 고위관원들이 있고, 부모나 그리고 호의나 자비를 베풀어준 분들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절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예배드렸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어떤 대상에게 경의나 존경의 표시를 행하는 것이로되, 그 대상이 신적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경배를 받을 대상이 신적 존재가 아니라면 그것은 예배행위가 아닌 것이다. 자기 생각할 때에 신적 존재임에 분명하다고 믿는 대상에게 경의나 존경의 표시를 할 때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예배인가를 규정하려면, 예배를 받을 대상이 신적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예배를 드리는 자가 그에게 경의와 존경과 표시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되는 것이다.

 

4. 천상예배는 어떤 요소로 구성되었을까?

  그렇다면, 사람이 누군가에게 예배를 드릴 때에 경의나 존경의 표시로서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일까? 이것은 천국에서 천상의 존재들이 어떻게 예배드리는가를 관찰해보면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세 존재가 행하고 있는 경배행위들이 나온다. 세 존재로는 첫째로,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있었고, 둘째로, 구원받은 신구약성도들을 대표하는 24장로들이 있었으며, 셋째,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세 존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행위를 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딱 3가지였다. 이 3가지가 있고, 경배받을 대상이 신적 존재였을 때, 그것은 "예배"라고 말하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엎드려 절했다는 것이다(계4:10, 5:8). 세 존재는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엎드려 경배를 드렸다. 이것이 예배의 첫번째 요소다. 그런데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예배의 요소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상에서는 달랐다. 그곳에는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배받을 대상이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는 경배받을 대상을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가짐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엎드려 경배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그 대상을 존경하고 경외한다는 표시다. 둘째는 그분의 명령이라면 무슨 명령이라도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고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분의 말씀이라면 무슨 말씀이든지 순종할 각오가 되어있는 자가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새 노래로 찬양했다는 것이다(계5:9~10). 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찬양을 올려드리되 새 노래로 그분의 영예를 높여드렸다. 그분이 하신 일을 높여 찬양한 것이다. 이것을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린양으로 오신 것과 그분이 죽으시고 사람들을 자신의 핏값으로 사신 뒤에, 그들을 천국에서 왕국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음을 높여 찬양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이 신적 대상이 아닌지를 구분하려면 그 대상에게 찬양을 올려드리는가를 보면 된다. 이 세상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있다. 하지만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도 그 인물을 높이어 찬양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만약 그러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대상을 신적 존재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높여 찬양한다. 이는 그를 인민들로부터 신적 대상으로까지 높이려는 수작인 것이다. 아니다. 피조물은 결코 찬양받을 수 없다. 피조물은 신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신적인 존재에게만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인 것이다.

  셋째, 그들은 그분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계5:8). 왜냐하면 24장로들의 손에는 찬양하기 위해 준비된 거문고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가 들려있었으니 그것은 향이 가득히 담겨있는 금대접이었다. 그리고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었다. 결국 어떤 대상이 신적 대상이 되려면 그에게 누군가가 기도를 드려야 한다. 신적 대상은 전능하기에 그 기도를 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을 재림예수니 보혜사 성령이니 하는 자들일지라도 자기에게 기도하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니 그들은 결코 신적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다른 분이다. 비록 사람으로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전능자이기 때문이다.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분은 계시며, 사람들이 비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5. 천상예배에서 예배를 받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천상에서 드려지고 있는 예배에서 과연 누가 경배와 찬양과 기도를 받고 있었는가? 놀랍게도 그분은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었다. 요한계시록 4:10에서는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그에게 면류관을 벗어드릴 것이라고 말했다(세 동사가 전부 미래형이다). 그런데 5장에 가보니, 24장로들이 어린양에게 경배를 하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어린양에게 7가지 송영을 올려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에게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렸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어린양에게 높여드린 것은 7가지 송영이었다. "일곱"이란 이 땅에서의 완전수이므로, 어린양은 이 땅에서 완전하게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말해준다. 또한 요한계시록 7장에 가면,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이번에는 하나님에게 7가지 송영을 올려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계7:11~12).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린양이 바로 찬양과 경배와 기도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영국의 대 신약학자인 리차드 보컴 교수(현재 72세)는 자신의 요한계시록 강해를 쓰면서 놀라운 말을 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오직 한 분 하나님에게 돌려드려야 할 영광과 찬송을 어떻게 어린양이신 예수님에게 돌릴 수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어린양이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라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결코 그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찬양과 경배를 받고 있는 어린양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사칭하는 사깃꾼이든지가 맞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옛날부터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엎드려 절했으며, 그분만을 찬양했으며, 그분에게만 기도를 바쳤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들은 사자밥이 되기도 했고, 불구덩속이 속에도 들어갔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에게 천상의 존재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은 초기교회 성도들에게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두번째 신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체현이었던 것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속죄사역을 마치고 이제는 천국에서 모든 피조무들에게 찬양과 경배를 받고 계신 것이다.

 

6. 과연 예수님은 성도들로부터 정말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신가? 아니면 두번째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그분이 두번째 신적 존재가 아니라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의 체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딤전3:16에서, 그분(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하늘로 올려지신 바 되었다고 언급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다고 말했다(요1:18). 그렇다. 예수님은 리차드 보캄 교수가 언급했듯이 믿는 이들에게 두번째 신이 아니다. 그분은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의 나타남이다.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결코 볼 수는 없다. 아마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신 바 되었으니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천국에 들어간다면, 거기서 우리는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행하신 일을 영원토록 찬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이 세상이 끝나는 그 시간까지 기도를 쉬지 아니할 것이다. 한 생명이라도 예수께서 하신 일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것이니 말이다.

 

7. 나오며

  1978년에 유행했던, 전 세계의 10대 팝송 가운데 한 곡이 있다. 그것은 "Rivers of Babylon(바벨론의 강가에서)"이라는 곡이다. 자메이카 출신의 혼성그룹이 불렀던 노래다. 1970~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곡이 유대인 슬픔(애통)의 노래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음악이 경쾌하니 디스코춤을 추는 곡으로 알고 있던 자들은 사뭇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 곡은 시편137:1~3의 말씀을 그대로 노래화한 것이다. 내용인즉 그들이 바빌론의 강가에 앉아서 슬피 울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자가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에게, 자기들이 믿는 신의 노래를 한 번 해보라고 명령하는데,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정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을 하여 포로로 끌려와 있는데, 그렇다고 바벨론신을 섬기는 바벨론왕 앞에서 어찌 흥겹게 노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죄를 짓고 실패한다면,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가는 곳이 불못 곧 지옥이기 때문이다. 지옥에서는 하나님이 아무리 위대하고 최고이며 그분만이 신들의 중의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또한 거기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다. 그렇다. 우리가 찬양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면 지금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실패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면 결코 거기에서 찬양할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 가서 슬피 울지 말고, 지금 찬양할 수 있을 때 그분이 행하신 일을 높여 찬양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부르짓기만 하면 들어주시는 이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적 대상에게 드리는 예배의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동영상] "바벨론의 강가에서(영문, 한글번역)"  https://youtu.be/UB4OKEYqCCc

2019년 6월 2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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