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5) 누가 과연 천국에서 큰 자가 될까?(마18:1~6)_2022-03-08(화)

https://youtu.be/B6klwIHhuME  [혹은 https://tv.naver.com/v/25537125 ]

 

1.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에 관하여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2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일부러 한 어린아이(파이디온)을 불너내신 후에 그 아이를 그들 한 가운데 세워놓으시고는 2가기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먼저 돌이키야 하고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한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마18:3). 그리고 둘째, 누구든지 거기에 있는 어린아이처럼 자기자신을 낮추는 이 바로 그이가 천국(하늘들의 왕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18:4).

 

2. 예수께서는 시청각 실물교육을 통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 한 가운데에 세우신 후에, 천국에서 과연 누가 큰 자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지부터 말씀해 주셨다. 첫째는 기존 생각으로부터 돌이켜야 한다고 하셨다(마18:3). 여기서 '돌이키다'는 헬라어 단어는 '스트레포'라는 단어로서, '돌아서다. 변하다. 바꾸다.'는 뜻을 가졌다. 이는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에서 돌아서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기존관념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약한 자들 위에 군림하거나 권세를 부리는 것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20:25~27). 둘째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마18:3). 여기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그 의미를 또렷이 알 수 있다. 그때는 어떤 사람들(부모들)이 자기의 어린아기(블레포, 갓난아기)을 안수해 주심을 바라고 데리고 왔을 때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들(파이디아)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내버려두고) 금하지(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파이디온)와 같이 받아들이지(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눅18:16-17)" 그렇다.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말의 뜻은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특성을 가리킨 것이다. 천국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을 그대로 믿고, 천국이 이렇다고 하면 그런 줄로 그저 믿고서 자기도 그곳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소망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왕국 곧 천국에 대해 들려주면, 그 말씀을 아무런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환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로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거나 그것을 바라거나 소망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3.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어린아이(파이디온) 하나를 세워놓고 그러한 어린아이처럼 자기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셨다(마18:4). 이 말씀은 결국 천국에서 위상의 문제는 곧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며, 겸손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천국에서 큰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조건('거듭남'과 자백하는 '회개')과 충분조건(최소조건에다가 '충성')을 채운 자여아 한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겸손한 자,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군림하려는 자, 주인행세만 하려는 자는 천국에 가면 가장 작은 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고로 이 말씀은 천국에서 낮은 신분을 가질 자가 누가 될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항상 겸손히 낮은 자세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천국에 들어가거나 천국에 큰 자가 되려면 그냥 어린아이 곧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면 되는 것인가?

  우리는 천국에 입성하거나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에 있어서 주의할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게 되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잘못 알고 있으면서, 오늘도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고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앗따고 해서 그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아니며, 또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믿지 않는 자들 중에도 얼마든지 긍휼을 베풀며 실천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이들 중에는 단 한 명도 천국에 들어간 자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 자체가 천국입성의 조건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를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도 아예 율법말씀에 객과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신24:19~21). 그렇게 하면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의 선행을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잠19:17). 하지만 이것이 천국입성의 직접적인 조건이 결코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 곧 거듭나지 않는 자는 천국에 아예 못 들어가기 때문이다(요3:5). 고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일에 충성할 때에 그가 군림하는 자세로 행할 것이 아니라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섬기라는 것이다. 무조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체가 천국입성의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자기와 자기의 후손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는 그것이 아닌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내 형제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자가 양의 자리에 들어가고 결국 창세로부터 준비된 왕국을 상속받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 내 형제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죄를 지어서 못 먹고 못 입고 나그네 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지극히 작은 자가 된 자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를 돕는다면 그는 천국에도 들어가고 하늘나라도 역시 상속받게 될 것이다. 

 

5. 사회적인 약자를 돌보면서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또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적인 약자가 불신자이든지 신자이든지 상관없이 주님께서 인정해주는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를 주의하면 된다. 첫째, 사회적인 약자를 섬기는 일을 할 때에 반드시 '주의 이름으로" 행하라는 것이다(마18:5). 그렇게 했을 때에만이 약한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눅9:28). 그리고 둘째, 돕더라도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도로 찾아내어 그들을 회개하도록 도와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마18:12~14, 눅15:3~7).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준다고 할 때에 동성애자를 도와준다고 치자, 이때에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계속해서 동성애를 즐기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여 동성애를 벗어나도록 도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로 촛점이 맞추어져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결국에 천국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2022년 03월 08일(화)

정병진목사

 

이 시대에 과연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인가? 이 표현은 사회적인 약자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다른 이를 지칭하는 것인가? 많은 이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왜냐하면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를 돕지 않는 자들이 그만 심판 후 염소가 되어 영영한 불에 던져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말씀은 믿음으로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인가? 대체 누구를 돌아보아야 우리도 양이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인가?

 

2022-03-06(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천국복음(13) 회개와 천국복음 관점에서 보는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_2022-03-06(주일)

https://youtu.be/tg4-DdYGl1A [혹은 https://tv.naver.com/v/25536608 ]

 

1. 들어가며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천국에 관한 3가지 비유가 나온다.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이 비유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있게 될 그리스도인들의 심판에 관한 비유이다. 그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되어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좌우로 갈리어 오른편 양의 자리에 있는 자는 영생의 세계에 들어가고, 왼편 염소의 자리에 있는 자는 영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 둘을 서로 다른 곳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양과 염소로 나뉘게 되는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양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 시대, 교회에게 주신 사명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이러한 것들을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 구원 및 천국에 관한 일반적인 궁금증은 무엇인가?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알려져 있는가? 그것은 '양'은 믿는 신자들을 가리키고, '염소'는 불신자들을 가리키며, '지극히 작은 자'는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과연 예수만 믿으면 어떠한 선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이 백 퍼센트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최소 조건은 '믿음'과 '회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분조건은 '믿음'과 '회개' 그리고 '충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그가 선행을 하고 구제하면서 약자를 돕고 있으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며 천국을 기업으로 차지할 수 있는가?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지 못해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자, 그리고 회개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 내지 못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구원관을 가져야 한다. 그 말씀을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있다. 그러하면 바른 구원론, 바른 천국관이란 어떤 것인가?

 

3.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과 '염소'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양과 염소의 비유는 심판에 관한 말씀으로서, 장차 천국에 누가 들어갈지를 가르쳐 주는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는 천국에 들어가면 누가 하늘의 왕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을 것이며 누가 영영한 불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인지를 알려 준다. 그렇다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과 '염소'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먼저, 단어의 개념 정의부터 살펴보자. 이 비유에 등장하는 '양'은 '어린양(헬라어 '아르니온')'이 아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양은 다 자란 양을 가리키는 '프로바톤'이다. 다시 말해 이 양은 성숙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염소'는 어떠한가? 여기에 나오는 '염소'는 헬라어로 '에리포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염소들 중에서 '염소 새끼'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양과 염소는 다 자란 양과 어린 염소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비슷하여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함유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는 그날에 이 둘은 서로 쫙 갈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을 '양'이라고 표현하셨는가? 먼저 양은 심판 때에 예수님의 보좌 오른편에 서게 될 자로서, 창세로부터 준비된 채 있는 왕국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주님은 그들을 '의인들'이라고 칭하셨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행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믿음이 증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심판 후에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염소'는 어떤 사람인가? 염소는 예수님의 보좌 왼편에 서게 될 자들로서, 영원한 불에 들어갈 저주를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이 증명되지 못한 자들로서, 끝까지 자신의 운명이 지옥이 될 것인지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결국은 영원한 불 속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4. 양과 염소는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양과 염소의 차이를 낳게 했는가? 그것은 이들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있다. 지극히 작은 자들로 언급하고 있는 6가지 종류의 사람들 곧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를 그들이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서, 양과 염소로 갈리게 된 것이다. 양의 자리에 있게 된 사람들은 이들을 돌보아준 자들이며, 염소에 속한 자들은 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던 자들이다. 양의 자리에 있던 자들은 그것이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염소의 자리에 있던 자들은 그들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겼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가 섬길 대상을 가리어서 섬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생색내고 자기 이름이 높여지고 명망을 얻게 되는 일에는 자신의 물질을 썼지만 지극히 작은 자들이라고 일컫는 자들에게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자들이다.

 

5. 여섯 가지 종류의 가장 작은 자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여섯 가지 종류의 지극히 작은 자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경에 따르면, 이들에 대하여 구약적인 견해가 있으며, 신약적인 견해가 있다. 구약적인 관점에서 이들을 보면 '지극히 작은 자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에 대한 구약적인 견해는 이렇다. 구약시대 여호와께서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곡식을 벨 때에는 이삭을 조금 떨어뜨려 놓으라고 하셨고, 감람나무의 열매를 딴 후에는 다시 가서 살피지 말라고 하셨으며,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도 다시 가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조금 남겨두라고 하셨다(신24:19~21). 이것이 율법이다. 또한 시편에서도 여호와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그네들(객들)을 보호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다(시149:9).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객과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그들의 송사를 굽게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당신의 백성 곧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 있을 때에 나그네(객)로 있었기 때문이다(신10:19).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살고 있었고, 자국민이 아니라 나그네(객)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그들을 이끌어 내어 주셨던 것처럼, 사회적인 약자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약자들을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사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생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 왜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고로 사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받게 된 것을 고치려면 단지 식량과 의복을 공급해 주는 것으로 부족하다. 그들로 하여금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케 하여 질병과 가난과 자녀의 앞길을 막는 악한 영들을 떠나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들의 삶은 버겁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선적으로 그들을 물질적으로 도우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에게 우선적으로는 의식주를 공급해 주는 일을 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저주로부터 해방을 받는 회개를 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6. 신약적인 관점에서 즉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둘째, 신약적인 관점에서 이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즉 예수께서는 이들이 누구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우리는 성경 말씀의 워딩 자체를 잘 살펴야 한다.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 예수께서는 이들을 누구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건 40절에 나온다. 마태복음 25:40절에 보면, 이들은 '이 내 형제들(these my brethren) 중의 가장 작은 자들(the least)'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그냥 '지극히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 앞에 '이 내 형제들'중에 가장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이들은 누구인가? 먼저 첫째로, 주님께서는 이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다. 그럼, 주님의 형제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그냥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인가? 아니다. 예수께서 '내 형제들'이라고 하실 때에, 자신의 육신의 형제들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언젠가 주님께서는 "누가 내 형제들이요 모친이냐?"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들이요 자매들이요 모친"이라고 하셨다(마12:48~50).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요20:17)" 그렇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지 않는 자를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만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록 혈육으로 형제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예수님에게 그는 '내 형제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주님은 이들을 '이(these)'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다. 이는 지금 주님 가까이에 있는 자들이 그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예수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영의 눈으로 영적 세계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천국에 들어갈 때에 충분조건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결코 주님 가까이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고로 '이 내 형제들'은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주님 가까이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믿고 회개하였으며 그리고 충성한 자였다. 이러한 성도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결코 주님 가까이에 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이들은 거기에 있는 양들이라면 그들 중에서도 주님 보좌 가까이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들은 주님 재림시에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고 있던 자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천사들만 대동하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살전3:13).

 

7. 회개와 천국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이 내 형제들'을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기는 들어가되, 충분조건으로 들어간 자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럼, 왜 천국에 충분조건으로 들어간 사람들인데도, 주님은 그들을 '가장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다가 더 좁은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스스로 복음 전파의 길에 나선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 때문에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복음 때문에 이방 땅으로 가서 나그네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복음 때문에 낙후된 곳에서 가서 복음을 전하다 보니 아프게 되어도 병원이 없어 고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복음 때문에 문화와 종교가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만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특히 주님께서 믿는 자들을 불러 올려 심판하시는 그 순간에도 남겨진 사명자가 이 세상에 있어, 낯선 나그네로 그대로 있을 것이고, 감옥에 갇힌 자도 있을 것이다. 왜냐햐면 주님께서 이들을 소개하실 때에는 미완료 문장으로 소개하셨기 때문이다. 

 

8. 양과 염소가 신자와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고로 우리는 양과 염소가 신자와 불신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좁은 길을 선택한 자를 도와줄 리가 없을 터이고, 불신자가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하는 이들을 도와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과 염소는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주님의 형제들로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마땅히 도와야 할 위치에 있었던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수고와 노력과 어려움을 염소들은 그만 본체만체 한 것이다. 이들을 위해 자신의 돈과 물질을 써 봤자 자기에게 별로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들을 돕는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명예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 것이니, 그들은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이 직접 오셔서 도와 달라고 했다고 하면 모를까하고 그들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 사수와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희생하고 있는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17~18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집 곧 교회에서 심판을 먼저 시작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과 죄인들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씀한다. 그러면 불신자들과 죄인들은 훗날 천년 왕국 후에 백보좌 심판에서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먼저 그리스도인들만 하늘에 불려 올라가(휴거되어) 심판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 각자가 선악간에 행한 대로 받는 일이라고 말했다(고후5:10).

 

9. 나오며 - 이 시대에 남겨진 마지막 사명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시대에 남겨진 마지막 사명은 대체 무엇인가? 지금 이 시대는 사실 마지막 추수의 시기다. 이제 천국문을 닫을 시간이 곧 올 것이다. 지금은 주님께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시기다. 그러므로 자신을 천국에 들어갈 줄로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미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깨워야 할 때다. 그러므로 지금 전파해야 할 복음은 역시 천국복음이다.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고 어떻게 거기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는지를 알려 주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 이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주님께서 오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4:14).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법이 되는 세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히는 주의 종들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적그리스도가 표를 주어 그것이 없이는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하는 시대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파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도 대비해야 한다. 고로 앞으로 세워질 '회개와 천국복음 연구소'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할 자를 양성하는 일을 할 것이며, 이들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못 먹고 못 자고 못 입을 때에 그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들을 치료해 주고, 이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마지막 시대를 향한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2022년 03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21) 지극히 작은 자 및 양과 염소는 대체 누구신가(마25:34~46)_2021-09-09(목)

https://youtu.be/yZvL3FQan0g  [혹은  https://tv.naver.com/v/22365583 ]

 

1. 성경(헬라어 원문)이 말씀하고 있는 양과 염소 비유의 핵심 사항은 무엇인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첫째, 이 비유가 성도들의 심판에 관한 비유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 심판을 받은 후 새 예루살렘 성에 준비된 왕국을 상속 받든지 아니면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채 있는 영원한 불에 들어가든지 하는 심판이다(고후5:10, 마16:27, 벧전4:17~18). 이 일은 마지막 종말의 때에 주님께서 공중으로 성도들을 불러 올리신 직후에 일어날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 지상 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이 있을 것이고 이어 백보좌 심판이 있을 것이다(계20:11~15). 고로 이 심판은 결코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백보좌 심판의 비유가 아니다. 그 이유는 백보좌 심판에서는 상을 받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심판 받는 염소도 왕 앞에서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마25:44).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염소들도 직접적으로 행하지 않았던 것이지 생색내는 일을 해 왔던 자들이다. 둘째, 이 비유는 성도들 중에서 영원한 불 곧 불 못에 던져지는 자도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셋째, 그런데 그날 심판의 순간까지 자기가 염소였는지를 잘 모르고 있고, 자신의 행위(외식이겠지만)를 몰라주는 왕에게 항의를 할 정도라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그날 그 시각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 할 것이지 믿을 때에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언젠가 죽어보면 알 것이다. 

 

2. 양과 염소의 비유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는 대체 누구인가? 둘 다 성도들인데, 양들은 자기들이 행했던 것을 자랑하거나 생색내는 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들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그날 심판대에 불려 가는 그날까지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의인들'이라고 불렀다(마25:37,46). 그런데 염소는 달랐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드러나거나 높여지는 일에는 기꺼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 곧 보잘것 없는 자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들 생각에 멋있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마23:29-30)" 그렇다. 이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소 때에 자신의 행동이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누군지 헬라어 원문을 보니, 그들은 다 자란 '염소'가 아니라 '염소 새끼'(에리포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내가 혹시 염소는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설마 내가 염소이겠어.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그래도 교회에서 신앙생활한 지 벌써 수십 년이 되었고, 내가 장로와 집사인데, 결코 그럴 리가 없지'라면서 넘겨 버린 일이 있던 자들이다. 성경은 심판의 그 순간까지 자신이 염소였다는 것을 모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3. 양과 염소의 비유는 행위 구원을 알려 주는 심판의 비유인가?

  또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가지고 행위 심판 구원론으로 몰고 가는 이들도 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 곧 주리고 목마를 때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혀 주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혀 있을 때에 와보았다는 말이 꼭 그들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 받았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실은 그 판단이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로 첫째,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에 한편 강도(아마도 오른편 강도였을 것)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눅23:43). 둘째, 여기에 나오는 그들의 행위는 자기들이 구원 받기 위하여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참된 믿음에 따라 그들의 삶 속에서 맺혀지고 있는 일종의 열매들이었기 때문이다(마7:20). 한마디로 그들의 그러한 행동들은 구원 받기 위한 행위들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믿음에 따른 열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믿음으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섰지만 결국 마지막 심판 때에는 열매로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고 늘 자신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4. 성도들이 돌보아 주어야 할 '지극히 작은 자들'이란 대체 누구인가?

  인자의 심판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이야말로 창세로부터 준비된 왕국을 상속받을 자들이라고 칭찬해 주신다(마25:34). 그렇다면 그들이 돌보아 주었다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적어 보면, 그들은 주린 자와 목마른 자이며, 나그네다. 그리고 그들은 헐벗은 자요, 병든 자이자 옥에 갇힌 자이다. 그럼 이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들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다. 그러나 마태복음 24~25장에 나오는 문맥에 따라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따라 해석해 보면, 이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2종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구약적인 개념에서 정의한 것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신약적인 개념에서 정의한 것이 하나 있다. 먼저, 구약적인 견해에서 정의한다면, '지극히 작은 자'란 그가 신자와 불신자를 떠나서, 객과 고아와 과부와 같이 소외되고 힘없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신14:29). 가난하고 소외된 자, 감옥에 갇혀 있는 자 등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에서도 객(나그네)과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꼭 돌보아 주어야 할 약한 자들로서 여호와께서도 이들을 도와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신약적인 의미에서 주님의 형제들로서 '지극히 작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주님의 형제들이 될 수 있는 자는 누군가? 얼핏 보기에는 혈통적인 이스라엘 백성만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신14:29). 특히 어려움과 고통받는 자들이 그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신약적인 의미에서 주님의 형제들은 영적으로 보아서 예수님의 피를 나눈 자들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들 내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쓸모없는) 자"라는 대상은 그때 왕과 레벨이 같은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날 심판하고 계신 이가 왕이시고 그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고로 그분 옆에 있는 그분의 형제들은 곧 왕의 형제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곧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그분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로서, 천국에 있는 땅 위에서 왕 노릇하고 있던 고귀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이 누군지에 대해 무조건 '가난한 불신자들, 소외된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해석하면 아니 된다. 창조적인 관점에서 넓게 생각한다면 이들도 포함되기는 하겠지만 실제로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고 있던 자들 중, 사람들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럼, 이들의 진짜 실체가 누구인지는 내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2021년 09월 09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19)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과 차이점은(마25:31~3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BUpMsvKnu8  [혹은 https://tv.naver.com/v/22308344  ]

 

1.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에는 3가지의 천국 입성 및 심판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첫 번째는 열 처녀의 비유이며(1~13절), 두 번째 비유는 달란트 비유이고(14~30절), 세 번째 비유는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31~46절). 

 

2.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의 3가지 비유는 각각 독특한 점도 있지만 사실 이 세 가지 비유는 같은 종류의 다른 비유들이다. 그럼 무엇이 같은가? 첫째, 이 세 가지 비유는 마지막 날에 있을 성도들의 상급과 심판에 관한 비유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상급보다는 심판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듯 보인다. 왜냐하면 종말과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들을 언급하는 본문들 가운데 모두 비유의 끝은 각성과 경고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비유가 아마겟돈전쟁(곡과 마곡의 전쟁) 이후에 있을 백보좌 심판의 비유라고 한다면 상(급)에 관한 언급은 없었을 것이다. 그냥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하여 불못에 던지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상급도 있고 심판도 있다. 성도들에 관한 상급과 심판에 관한 비유인 것이다. 둘째, 이 세가지 비유는 성도들이 심판을 받게 되면 딱 둘로 갈라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문 밖(새 예루살렘 성의 진주문 밖)에 영원히 버려질 자와 성 안에 들어가 혼인잔치를 하는 신부들로 갈라진다.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먼저 주인의 즐거움(혼인잔치)으로 들어간 후에 주인으로부터 많은 것을 맡게 되는(므나의 비유와 합치면 여러 고을들 위에 왕노릇하는 것) 자가 있는가 하면,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슬피 울 자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 따르면, 복을 받아 창세로부터 예비된 채 있는 왕국을 상속받을 자와 저주를 받아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채 있는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로 갈라진다. 셋째, 재림의 때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 주님은 심판주로 오신다. 사실 초림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형체를 입고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한 없이 자신을 낮추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은 한없이 높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만민을 공의대로 심판하실 심판주이기 때문이다. 

 

3. 주께서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성도들을 심판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많은 성도들은 다시 오실 주님은 초림의 예수님과 같아서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왠만한 잘못은 다 용서하시어 모른 채 넘어가주실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랑의 주님이 아니시다  공의와 심판의 주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셔서 보좌에 앉으시는 분은 우리를 심판하시되, 우리의 믿음을 따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그랬고, 달란트의 비유에서 그랬으며,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그러하신다. 모두가 다 그들의 행위들에 따라 성 안과 성 밖의 지역으로 나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가? 그건 아니다. 여기서의 '행위'란 구원얻기 위해 행하는 행위들이 아니다. 믿음을 갖고 있고 회개하는 자라면 당연히 열매로서 나타나는 행위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열매나 믿음에 따른 어떤 열매가 자연스럽게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날 심판의 때에 성 바깥에 남겨지거나 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거나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의 노정을 시작하지만 우리의 노정의 끝나는 날에 받을 심판은 우리의 행위를 따른 심판이 될 것을 짐작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비록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날 심판대에 앞에 섰을 때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를 미리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4.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말은 진정 사실인가?

  그렇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는 사랑과 용서의 주님으로 오시지 않으시고 공의와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날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는 우리의 믿음을 따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긴 행위들을 따라 심판하신다. 그런데 그날 그 심판의 장소에서 어떤 사람은 상을 받을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가 모두 다 부정적인 경고의 성격이 매우 강한 비유들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날 심판의 때에는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말씀들이 있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19:27-29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눅22: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5. 이 비유의 차이점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비유의 차이점은 심판 후에 장차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최종적인 장소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상 받을 장소도 각각 차이가 있고, 벌을 받을 장소도 각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첫째로, 열 처녀의 경우를 보자. 열 처녀 중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그녀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것을 말해 주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 밖에 버려진다는 것이다. 둘째로,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경우를 보자. 이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즐거움(어린양의 혼인잔치와 같은 것)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 악하고 게으른 종은 더 바깥의 어둠의 장소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셋째로, 얌과 염소의 경우를 보자. 이 비유는 실천적으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났던 자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처소 곧 왕국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염소의 비유는 그 어떤 행위도 나타나지 않았던 자들로서 그래서 버림을 받고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주님으로부터 떠나가게 되는 자들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거주할 장소가 각각 다르다. 그들은 성밖이나 바깥 어두운 곳이나 영원한 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이러한 곳으로 가면 안 된다. 우리는 죽은 후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나아갈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므나의 비유처럼 왕노릇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기업을 차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2021년 09월 07일(화)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