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그리스도인들에게 '야고보서'하면,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이신칭의의 복음과 충돌되는 책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 책은 그러한 책인가? 이 책은 정말 사도적인 저작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책이며, 성경책에서 빼어버린다고 할 지라도 별 문제가 없는 책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 말씀이 산상수훈 곧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보서를 왜 하나님께서 성경책으로 주셨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야고보서강해의 첫번째 시간으로 야고보서의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특히 이 책의 저술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2022-03-23(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1) 야고보서 대체 어떤 책인가?(약1:1~12)_2022-03-23(수)

https://youtu.be/ohj4thygcaY [혹은 https://tv.naver.com/v/25816992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어떤 책인가? 야고보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서신서에 해당한다. 그리고 서신서 중에서도 일반서신에 해당한다. 사실 서신서는 바울서신과 나머지 일반서신으로 나누는데, 바울서신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며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고보서는 야고보서가 쓴 1권의 책이니까 적당히 넘어가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27권의 신약성경을 주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서신서에도 균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서신과는 상당히 차이나는 일반서신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은 일반서신 중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다루려고 한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서, 저자인 야고보는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이며, 무슨 목적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서 1:1~12까지에 나오는 시험(시련)을 대하는 자세와 시련을 이기는 방법 그리고 시련을 이겨낸 자가 받게 될 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많은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2. 야고보서는 누가 쓴 책인가?

  야고보서는 대체 누가 쓴 책인가? 우리는 야고보서 1:1에서 이 책을 쓴 저자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였던 '야고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맞다. 그럼, '야고보', 그는 누구인가? 과연 그는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야고보중의 한 사람인가 아니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제3의 인물인가? 혹 그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라면 그는 대체  여러 야고보들 중에 누구인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야고보'에는 약 네 명의 인물이 있다. 그중에 3명이 알려져 있는데, 첫번째로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 알패오의 아들인 야고보도 있다. 이는 보통 '작은 야고보'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도 있다. 그런데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A.D.44년에 제일 먼저 순교자가 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행12:2). 그리도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막3:18)가 있기는 하지만 그의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A.D.62년경에 순교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갈1:19, 마12:46~50)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주의 형제 야고보, 그는 예수께서 살아있을 때에는 불신자였다(요7:5).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개인적으로 목격한 이후에(고전15:7),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가의 탄생하고 스데반의 순교하자 대부분의 사도들은 흩어지고 그 책임을 야고보가 맡는다. 그래서 A.D.49년경에 있었던 예루살렘 공의회에 의장역할을 맡는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기둥같은 인물이었다(갈2:9). 유다서의 저자였던 유다가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할 정도로(유1:1), 야고보는 초대교회 당시 널리 알려진 초대교회의 핵심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야고보서를 기록한 것이다. 그가 A.D.49년에 안디옥과 스리아와 길리기아에 보낸 편지의 흔적이 사도행전 15장에서도 나오는데, 그때도 약1:1에 나오는 인삿말처럼 "문안한다"라는 말을 부정사 형태로 언급한다(행15:23). 그럼,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누구에게 왜 이 편지를 써 보낸 것인가?

 

3. 야고보서는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그럼, 야고보는 누구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인가? 야고보서 1:1에 의하면, 그는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12지파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흩어짐('디아스포라') 안에 있는 자들인 열 두 지파들"이다. 그런데 사실 야고보가 이 편지를 보낼 당시에 이스라엘은 3개의 지파만이 남아 있었다. B.C.722년 이후 북이스라엘의 10개의 지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9개 지파인데, 므낫세 지파가 요단강을 중심으로 반지파씩 땅을 분배받았기에 10지파로 본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이스라엘이 12개의 지파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3개 지파에 있어서 두 번의 '디아스포라'(흩어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B.C.586년에는 남유다가 느부갓네살에게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 거기에서 정착하여 살면서 점차 전 세계로 흩어졌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신약시대에 스데반의 순교이후(행8:1)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로마 제국의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두번째의 디아스포라 사건으로 전 로마제국의 각지에 흩어진 성도들을 가리켜, '흩어짐' 안에 있는 12지파들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예수를 믿는 예루살렘의 유대인이자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편지를 보낸 대상은 전세계로 흩어진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4. 야고보는 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왜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108구절을 전부 읽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유가 한 가지 있고, 감추어진 채 있는 이유가 또 하나다. 먼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는 로마의 각지로 흩어져있는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들을 책망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 각지로 흩어젼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 원래는 유대인들이었기에 로마 각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나간다. 그런데 이 때 2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호감을 갖고 받아들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배척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전자는 주로 부자들이었고 후자는 주로 가난한 자들이었다. 유댕인들은 A.D.70년 나라가 멸망한 후에 거의 다 죽고, 약 10만명 정도가 포로가 되어 로마에 이송된다. 그들의 자손들은 노예생활을 하면서 점차 자유인이 되어갔고, 바벨론 포로이후에 자유민이었던 유대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돈을 버는 것이었다. 나라는 이미 망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들에게 가나안땅을 되찾게 해 줄 것이라고는 믿음으로 돈을 준비한 것이다. 그래서 세금을 많이 바치는 유대인들은 로마인들도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회당으로 들어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부자들인 자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배척을 받았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배척받고 있는 비천한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리고 부자들이었지만 가난한 형제를 돕지 않는 부자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부자들에 대한 언급이 세 번이나 나온다(약1:9~11, 2:1~9, 5:1~6). 그런데 갈수록 그 강도가 세진다. 즉 처음에는 부자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가진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약1:9~11). 왜냐하면 부요함은 풀의 꽃과 같아서 금방 시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두번째로 부자들을 언급할 때에는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고 홀대했던 것을 책망하기 시작한다(약2:1~9).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부자들을 언급할 때에는 그들에게 임할 책망과 진노를 강하게 말한다. 그들이 말세에 재물을 쌓았으니 하나님을부터 불의 심판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야고보서 이 편지를 쓰게 된 첫번째 이유다.

  그런데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게 된 두번째의 숨겨놓은 동기가 있다. 그것은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형제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처음에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증거가 되었지만 점차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음식을 가려먹지 않고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자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교회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도 받고 믿음만 있으면 어떤 죄를 지었든지 다 용서받는다는 교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마디로 사도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서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데에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이 잘못 와전되어 전달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했지만 여기서 이방인들이 지키지 않아도 될 '율법의 행위들'은 전부 의식법(제사법, 절기법, 정결법, 할례법, 음식법)이었던 것이지 한 번도 도덕법인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방인들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예수님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그만 여기에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형제사랑을 실천하지 않아도 예수님만 믿고 있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는 자신의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되어 있다. 특히 객과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일은 반드시 실천하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야고보서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엄하게 책망한다. 행위들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말이다. 그러한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도 없다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두번째 저술 목적인 것이다. 

 

5. 야고보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1:1~12에는 어떤 말씀인가?

  야고보서는 얼핏 보면 중구난방식(衆口難防)으로 쓰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뚜렷한 구조나 체계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이 서신서에 속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시작 부분의 한 개 구절에서만 '문안인사'라는 형식을 갖추고 쓰고 있을 뿐만 서신형식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또한 내용도 단편적인 교훈들이 산재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야고보서도 일정한 구분이 지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야고보서는 3가지 주제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의 첫번째 부분(서론)은 '시험(시련)"이고(약1:1~18), 두번째 부분(본론)은 "믿음과 행함"부분이며(약1:19~5:6),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부분(결론)인 "고난"의 문제를 각기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첫번째 부분(서론)(약1:1~18)을 살펴보면, 이 부분의 주제는 "시험에 의해 검증되는 참된 믿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야고보는 시험에 대한 성도의 바른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약1:1~18의 첫번째 부분(서론)을 나눠서 보면, 첫째로, 1~12절에서는 시험 곧 시련을 당할 때의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 13~18절에서는  사람이 시험 곧 유혹을 당하는 원인은 인간 내부의 욕망에 있음을 지적한 이후 진정으로 좋은 은사와 선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임을 교훈하고 있다. 특히 1~12절에서는 이 편지를 보내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문안인사(1절) 후에는 시험 곧 시련의 시험을 당할 때의 성도의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2~12절). 이때  야고보가 제시하는 성도의 자세는 4가지다. 첫째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2~4절). 둘째는 하나님께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5~8절). 셋째는 가난한 자는 오히려 당당해지고 부한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9~11). 왜냐하면 부함은 풀은 마리고 꽃이 시듦같이 금방 쇠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째는 시험을 이긴 자에게 주시는 복 곧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임을 말하고 있다(12절). 그리하여 성도들이 시험중에 있더라도 끝까지 인내로 시험을 극복하고 승리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6. 나오며

  야고보서는 성도들에게서는 보통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을 말하는 책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서를 과연 누가 썼으며, 어떤 대상에게 썼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맥락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과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충돌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바울의 이신칭의와 야고보서의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다른 평행선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의 복음은 신앙의 여정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서신이라면, 야고보서는 신앙의 여정을 다 마치려할 즈음에 필요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과 야고보의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편만을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서신서를 읽고 싶다면, 사도바울의 책(12권)만을 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와 상반되는 책으로 간주되는 일반서신의 책도 같이 읽어야 한다. 특히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일이삼서를 읽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신앙의 여정을 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차 들어갈 천국을 대비해서도 동시에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오늘날처럼 한 번 믿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되며, 한 번 믿으면 과거에 지은 죄와 현재 짓고 있느 죄와 미래의 죄가 다 사함받을 것이라고 믿는 이 세대 사람들을 깨우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바른 구원관과 율법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산상수훈의 중요성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야고보서라는 성경 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2022년 03월 23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02) 장차 누가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마7:15~23)_2022-02-22(화)

https://youtu.be/tDk4l6zvn0M [혹은 https://tv.naver.com/v/25317717 ]

 

1. 예수께서는 어떤 의미로 '천국(하늘들의 왕국)'을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과 유사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이라는 측면에서 상태적인 천국을 의미하는 말이라면,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실현된 공간적인 장소를 뜻하기에, 그 의미는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어떤 장소적인 의미의 천국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천국'에 비해 '하나님의 나라'는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만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이 지상에 계실 때에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면 이미 거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마12:28). 그러나 천국은 귀신이 잠시 쫓겨나는 그 정도의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귀신이 아예 없는 곳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장소적인 천국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사탄 마귀와 귀신들이 없다. 그리고 거기에는 죄와 죽음도 없으며, 시기 질투와 근심 걱정 혈기 분노도 없고, 어둠도 전혀 없는 복된 장소다. 

 

2. 사도 바울은 구원의 최종적인 목표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순교 직전에 보낸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8)" 그렇다. 그는 자신이 이제 주님이 계시는 그 천국에 들어갈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의 마지막 영역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구원의 여정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회개와 예수님을 믿은 것은 곧 구원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구원의 끝(완성)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구원의 완성은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가고(사명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냈을 때라야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구원의 완성으로서 주어지는 최종적인 결론인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예수 믿을 때부터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 아니 된다. 그리고 이제 예수 믿었으니 당신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면 아니 된다. "이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달려가려고 100m 트랙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의 노정 어딘가에서 미끄러지거나 끝까지 경주하지 못하고 중간에 탈락하기 일쑤다. 끝까지 경주에서 이긴 자들이 많지 않다. 그래도 경주에서 이긴 자들을 가리켜 요한계시록 2~3장에서는 '이기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자들은 거의 없다. 

 

3. 예수께서 말씀해 주신 장소적인 천국은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가?

  많은 사람들은 천국을 '셋째 하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12진주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새 예루살렘 성이 곧 천국인 것이다. 그곳 안에는 '영광의 광장'이라는 아주 넓은 장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혼인 잔치'가 치러질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혼인 잔치를 치를 장소가 바로 그 천국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자신이 천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것을 말한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천국의 개념은 새 예루살렘 성의 12진주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 1~13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도 정확히 나온다. 열 처녀 중에서 오직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 두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12진주] 문 안으로 들어가서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 그러나 여분의 기름을 사러 갔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성 밖에 남겨진다. 그런데 이 비유를 천국 비유로 들려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고로 그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곧 그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4.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누가 장차 천국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 누가 천국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한 가지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여 주여"라고 말했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들 안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행하고 있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마7:21).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계속해서 나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마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다 행동(열매)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말씀한다는 사실이다. 천국 입성의 조건으로서 '믿음'만을 말씀하고 있는 본문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 행위로서 그 믿음이 증명될 수 있는 것 곧 열매로서 확인이 되는 것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누가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누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첫째는, 자기가 가진 의로움이 최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것보다는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셨다(마5:20). 둘째는, 마태복음 7:21에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셋째는, 마태복음 19:27~30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라고 하셨다. 이때 버려야 할 것으로는 집이나 형제자매, 부모나 자식 그리고 전토라고 언급하셨다(마19:29). 마지막으로 넷째로, 마태복음 25:1~13에서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자세한 것은 다음에 계속 나올 것이다).  

 

5.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행동(열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마태복음의 말씀만을 살펴본다면, 장소적인 의미로서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입성할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다 행함 곧 열매로 자신의 믿음이 증명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믿음만으로 천국에 입성할 수 있다는 말씀은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천국 입성의 조건은 행위라는 말인가? 그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딱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행위가 뒤따르지 않은 자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태복음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도, 부활 승천하셨던 주님께서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에서 하신 말씀 속에 나온다. 거기에는 믿음과 더불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있는 자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22:14)"고 하셨다. 그렇다.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비록 자신의 겉옷이 더럽혀져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겉옷을 빨아서 희게 하고 있는 자들은 12진주문을 통하여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함(열매)을 천국 입성의 필수 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로 정리하면, 행함(열매)은 천국 입성에 관한 충분조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과 회개는 천국 입성의 최소 조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간신히 믿음과 회개로 천국 곧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간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자신의 집이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은 면류관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144,000명이 앉는 보좌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즉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왕 노릇하지 못한 채 섬기는 자로 살아갈 것이다(그렇다고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다. 천국에서 섬기는 자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살아가니까). 그러므로 믿음과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는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한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부터라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면서 그날을 준비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2월 22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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