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9) 왜 초기교회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을까?(행20:7)_2022-12-28(수)

https://youtu.be/gKQaVxqPWGY  [혹은 https://tv.naver.com/v/32115854 ]

 

1.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어느 요일에 모였는가?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드로아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안식일에 모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만 해도 주일은 쉬는 날(공휴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낮에 일하고 밤에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그때 바울은 어느 성도의 집 3층 다락방 안에 모여서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던 것이다. 

 

 

2. 안식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주일에 예배 모임을 가지면 안되고 꼭 안식일(주간의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다. 이름하여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다. 그런데 이들이 믿고 있는 교리를 보면, 문제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구원론과 안식일 준수는 상당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안식교에서 가르치는 대부분의 이러한 교리들이 다 엘렌 지 화이트라는 여사에게서 나왔다라는 것이다. 안식교인들은 엘렌 지 화이트 여사를 선지자라고 믿고 따른다. 이 여사는 안식교를 창시한 죠지 밀러(A.D.1782~1847)의 부인인데, 죠지 뮬러가 죽자 그 배턴을 이어 받은 자로서, 이 여사가 말한 것들은 거의 성경처럼 믿고 신뢰하며 따르고 있다. 사실 죠지 뮬러는 1844년 10월 22일에 주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하지만 그때 오시지 않자,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때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셨고 거기에서 천국에 들어올 자를 가르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름하여 '조사심판'이다. 안식교인들은 이 심판에서 제외되면 결국 구원을 못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사심판의 핵심은 바로 구원론에 있다. 

 

3.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의 구원론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안식교인들의 구원론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안식일 준수와 구원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고, 계명(십계명)도 준수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특히 계명들 중에서 제4계명 곧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계명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만약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면 짐승의 표인 666표를 받아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지만 계명들을 준수하지 못한 자는 조사심판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생명(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조에')을 얻고 죄사함을 받아야 구원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아무리 계명을 준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생명을 얻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뿐이다.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을 수 있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믿고 계명도 준수해야 구원얻는다는 것은 잘못된 구원론이다.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기 때문이다(마4:17, 요3:16, 롬10:8~9, 행16:31). 

 

4. 안식일에 관한 안식교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안식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일종의 생명줄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안식일에 대한 입장은 어떤 것인가? 그들의 주장을 모아서 살펴보면, 3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안식일은 폐지된 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법으로서 안식일법은 이미 폐지되었다(갈4:9~11, 골2:16~27, 호2:11, 히4;1,11). 둘째,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는 자는 태양신 종교를 따라가는 우상숭배자여서 결국 그들의 이마에 짐승의 표인 666표가 찍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은 일요일을 태양의 날로 여기지도 아니하며,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도 아니다. 주일에 성도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초기 교회는 안식일을 지켰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제정하여,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자들을 강제로 일요일예배로 바꿨다는 것이다. 아니다. 초기 교회 중에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그것은 행20:7의 말씀에도 나와 있으며, 여러 교부들의 어록과 초대 교회가 남긴 책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사도행전 강해 88강을 참고하기 바란다). 

 

5.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드렸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렇다면,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눴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안식일은 한 마디로 모형이고 그림자로서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히10:1,4, 골2:16~17). 안식일의 진짜 실체는 예수님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천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히4:11). 다시 말해, 구약에 주어진 안식일은 율법 중 의식법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이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야말로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의식법들은 완성되어졌다. 그리하여 폐지된 것이다. 다시 말해, 안식일이라는 것은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표요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없다면, 사람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만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없이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인데도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나 안식일법에 의하면 그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을 만드신 예수님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법을 주신 목적을 모르고 규정만을 내세워 사람을 정죄하는 그들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날(안식일)과 달과(초하루)과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맥추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과 해(안식년, 희년)를 다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결코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갈4:9~11).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와 참된 안식과 평강을 이미 얻은 자들이 다시 율법에 매여 종노릇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율법의 의식법들(할례, 안식일, 절기법, 음식법, 정결법, 제사법)이 아니라,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들은 다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골2:16~17).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구약의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만이 우리 모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가져다 주고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 곧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321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니 그날 예배를 드리기에 더욱 편리하여졌기에 일요일인 주일에 예배를 드렸던 것이지, 태양신을 섬긴다는 의미로 일요일에 예배드린 것이 아니다. 고로 성도들은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지, 일요일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또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으므로 주일에 예배를 드린 것이다. 

 

2022년 12월 28일(수)

정병진목사

2022-10-1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6) 예수께서 제2표적과 제3표적을 행하신 이유과 그 영적인 의미(요4:43~5:18)_2022-10-19(수)

https://youtu.be/jmcWkoGiMRE  [혹은 https://tv.naver.com/v/30429688 ]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하셨다(요2:23, 20:30). 그중에서 성경에 기록된 채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어떤 기적들은 아예 '표적'이라고 표기되어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기적들 중에서 왜 어떤 것은 표적이라고 말해지며 또한 그것이 성경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요한복음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요1~12장)이자, '영광의 책'(요13~21장)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 12장까지 7가지 표적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이 표적들 중에서도 꼭 알아야 할 표적들을 7가지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가리켜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과 5장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표적을 행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4장의 표적은 우리도 잘 알다시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살린) 사건'이요(요4:43~52), 요한복음 5장의 표적은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이다(요5:1~18).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쳤던 이러한 기적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기록한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한 어떤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2번째와 3번째 표적을 살펴보면서, 왜 예수께서 이러한 표적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그 표적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2.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 가셨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 들러 희어진 곡식을 추수하신다. 그리고 이틀 후에 갈릴리로 가신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키러 왔다가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던 갈릴리 사람들은 이제 갈릴리에서도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한다. 그때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가나에 가셨다. 그곳은 이전에 예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장소였다. 그런데 그곳에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헤롯 안디바(재위 B.C.4~A.D.39)의 친족인 것 같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왕의 신하'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바실리코스'라고 나온다. 이는 그가 '왕에게 속한 자'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왕족이었든지 왕의 신하이었든지 상관없이 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왕의 신하(왕족)는 그 아들의 병을 고쳐보기 위해서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무려 34Km나 되는 거리를 달려온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계속해서 요청하였다.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말이다(요4:47). 그러자 주님께서는 거기에 모여 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만일 너희는 표적들과 기사들을 보지 못한다면, 너희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표적주의 신앙을 나무라듯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환영하던 무리들 역시 예루살렘에서부터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였다. 

 

3. 무엇이 과연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왜 표적을 보고 찾아온 무리들을 향해 나무라듯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표적주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표적을 본 자들은 표적 때문에 주님을 신뢰하기도 하지만 표적이 사라지면 주님을 버리는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표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하지만 예수께서 힘없이 붙잡혀 가시고 또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신앙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도 믿는 신앙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말미암기 때문이다(롬10:17). 그런데 이때 당시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도 역시 표적주의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왔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는 신앙을 바꾸기 시작한다. 표적주의 신앙에서 말씀신앙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순간, 말씀만으로도 자신의 아들이 나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왕의 신하는 다시 한 번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자신의 어린 자식을 고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주님께서 딱 두 마디 말씀을 하셨다. "가고 있어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요4:50)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때 왕의 신하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예수님에게 이렇게 불평을 했을 것이다. "고쳐 주시려면 와서 고쳐 주실 일이지, 그렇게 말만 휙 던져버리면 그것으로 아이가 고쳐지기라도 하는 것입니까?"하고 말이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믿었다. 그리고 진짜 가버나움으로 가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다가 자기 집에서 오는 종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종들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집을 떠나올 때만 해도 아이는 막 죽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아난 것이다. 언제냐고 물으니 전날 일곱 시쯤에 열병이 떠나갔다고 했다. 계산해 보니 그 시각은 주님께서 그 아이가 살아 있다고 하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그러자 왕의 신하와 그의 집안 식구들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된다. 

 

4.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낸 것을 왜 표적이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단지 죽어 가던 아이를 살려 놓은 사건을 두고 왜 사도 요한은 그것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말하였던 것인가? 여기서 '표적'이라는 말은 기적은 기적인데 어떤 영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기적을 가리킨다. 특히 그 사건이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사건일 때 그 기적을 '표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어 가던 아이를 살린 이 기적을 두고 왜 사도 요한은 표적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이 사건은 예수께서 '말씀'으로서 사망을 향하고 있는 아이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요1:1~3), 말씀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1:4).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예수님이야말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생명을 주시는 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이 사건은 예수님만이 진정한 왕이신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왕의 신하는 왕족으로서 자기의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돈도 있었을 것이고 권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헤롯 안디바왕이 자기의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도 고칠 수 없었고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것을 예수께서 오셔서 해결해 주심으로서, 예수님만이 인생들의 진정한 왕이신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사실 나다나엘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별 볼 일 없는 분으로 알았다가 그분이 누군지를 깨닫고는 즉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했었다(요1:49). 셋째, 이 사건의 핵심은 바로 아버지가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낸다는 것인데, 이것은 장차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어 가는 아들 예수님을 살려내는 예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죽어 가는 자신의 아들을 가리켜, '아들(휘오스)'이라고도 했다가, '어린아이(파이디온)'라고도 말했다. 특히 예수님을 만나서 말할 때에는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다. 아이는 약하기 때문에 더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네 어린아이가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아들은 아버지보다 모자라는 유약한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와 동등하시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한 분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행하신 세 번째 표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의 공생애의 2년 차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명절을 지키기 위함도 있으셨겠지만 거기서 하실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양의 문 앞에 위치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었던 중풍병자를 고치시려 그곳에 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연못가에는 다양한 종류의 병든 자들이 있었다. 맹인들, 다리 저는 사람 그리고 혈기 마른 사람 등 다양한 종류의 환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게서는 그중에 38년된 중풍병자를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6) 그때 그는 자신은 도무지 병고침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왜냐하면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면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낫게 된다는 말이 있어서 병든 자들이 몰려 있는데, 자기는 자기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도 없고, 또한 자기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고 있어라. 그리고 네 침상을 들어올려라. 그리고 걸어가고 있어라."(요5:8).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병은 치료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침상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맨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세 번째 행하신 표적은 38년이나 되어서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일어나서 걷게 했다는 것이다. 

 

6. 왜 예수께서는 그 많은 병든 자들 중에서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셨던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실 땅에 떨어질 그러한 말씀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필요한 말씀이었으며 그 말씀은 다 진리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께서 스스로 하시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에게 할 말을 일러 준 것이며(요12:49~50), 아버지에게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그대로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들은 그대로 하시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요8:26,28,38). 고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분을 이 땅에 보내셨던 아버지의 말씀이었다(요14:24). 또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셔서 그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요14:10). 그러므로 그분의 행동 하나에도, 그분의 말씀 한 구절에서도 우리가 빼내야 할 말씀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며(요10:30), 예수님은 아버지의 또 다른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누군가를 찾아간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가신 것이고, 예수께서 누군가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명절에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서 38년이나 되었던 중풍병자를 찾아가신 것은 의도적인 방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38년된 중증환자를 찾아가신 것일까? 그것은 죄로 인하여 38년이나 징계를 받고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간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방문하신 곳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예루살렘이었고,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곳은 베데스다 곧 '긍휼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38년된 병자를 찾아가신 것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광야에서 38년간을 고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중풍병자가 38년간을 그 병으로 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그를 징계로부터 거두어 내어 안식을 주시기 위해 찾아간 것이다. 그러니까 지은 죄로 인하여 움직일 수도 없고 걸어 다닐 수 없는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 내어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곳에 가신 것이다. 이제 38년간의 징계를 끝내시고 이스라엘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 그 사람에게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치신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7. 38년된 중풍병자는 어떻게 안식을 얻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38년된 중풍병자는 어떻게 안식을 얻게 되었는가? 그것은 첫째, 전적으로 그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이다. 왜나하면 중풍병자는 절대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고 걸어갈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일부러 그러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의 병을 낫게 하신 것이다. 둘째,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순종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3가지를 명령했다. "일어나고 있어라(에게이로). 너의 침상을 들어올려라(아이로). 걸어가고 있어라(페리파테오)" 첫 번째와 세 번째의 동사는 '현재 명령형'이고, 가운데 동사는 '과거 명령형'이다. 현재 명령형은 계속해서 그것을 하라는 명령이고, 과거 명령형은 단번에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그때 중풍병자는 아무런 댓구를 하지 않았다. 만약 보통 사람 같았으면, "아, 이 사람아, 당신 말대로 내가 일어설 수 있고 자리를 들 수 있으며 또한 걸어갈 수 있었다면, 내가 왜 여기에 이렇게 누워 있겠는가? 이 사람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 보는 청년 같은 예수님에게 아무런 댓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본다. 왜냐하면 이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과연 누구에게 광야에 엎드려지게 했느냐고 말이다(히3:17). 그것은 범죄한 자들이라고 했다(히3:17). 그래서 누가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느냐고 질문하면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자들이었다고 했다(히3:18~19). 그러므로 그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을 배척했으며,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그리고 불법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정죄했고 죽이는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죽고 부활하신 후에 40년이라는 회개의 기간을 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A.D.70년 디도장군에 의해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을 고하게 된다. 

 

8. 예수께서는 왜 안식일에 그 중풍병자를 고치셨는가?

  예수께서는 인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도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택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요5:9).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리라는 것을 모르셨을까? 아니다. 예수께서는 일부러 안식일을 택하여 그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이다. 그것은 유대 율법주의요 형식주의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유대인들은 그 병자에게 물었다. 누가 자신의 병을 고쳐 주셨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가 말하려 했을 때에는 이미 예수께서 피하고 없으셔서 누구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후 예수께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더 이상)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는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고쳐 주신 이는 예수님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 말을 듣자마다 유대인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예수님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안식일의 본 정신을 바로 세워준 것이다. 왜냐하면 38년 동안이나 질병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이야말로 그에게 참된 안식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들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지만 그날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질병과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고 그분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역시 아버지의 또 다른 체현이신 아들 예수께서도 동일하게 아버지처럼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제정하신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을 허물어뜨리는 장본인이라고 판단했고, 더욱이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함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여기는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엄격한 구약의 율법시대일지라도 안식일에도 제사드리는 제사장들은 안식일법에서 예외였으며, 비록 그날이 안식일일지라도 소나 나귀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그들도 빠진 동물들을 건져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말라는 율법 말씀도 없었다. 다만 그날에 일하지 말라는 것을 과대 해석함으로 물건(침상)을 운반하는 것을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서 안식일법에 저촉되지도 아니할 뿐더러, 참된 안식을 제공해 주고 있는 분이시기에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신 것이다. 

 

9. 나오며

  요한복음은 예수가 누구신가가 사실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래서 그분을 앎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작정하고 쓴 복음서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이나 표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몇몇 표적만을 선별하여 요한복음에 기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기록된 사건은 정말로 중요한 사건들이 아닐 수 없다. 그 사건들과 표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께서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밝혀 주는 단서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행하셨던 제2표적과 제3표적 역시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는 사건들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2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이야말로 말씀이 육신을 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곧 살리는 분 곧 생명 수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이 모든 인류의 왕이시자,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제3표적을 통하여, 그분은 구약의 여호와로서, 죄로 말미암아 38년 동안 광야에서 고통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제공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안식일의 제정자이자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제2표적이나 제3표적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기 위해 세팅되어 있었던 현장이었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우리는 과거 예수께서 행하셨던 제1표적(요2:1~12)에서도 왜 그날이 여섯째 날이었으며, 또한 왜 그 장소에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 역시 여섯째 날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후 결혼시켰던 날로서, 장차 신부를 취하러 오실 신랑되신 예수님의 결혼 잔치의 예표인 것을 함께 살펴보았다. 그렇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려 하는데, 어찌 미리 세팅된 채 없이 그 일을 하셨겠는가?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행하시는 일이요 그분이 하신 말씀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 하나님'(요20:28)으로 고백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저술 목적인 것이다. 

 

 

2022년 10월 19일(수)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출애굽기 25장부터 30장까지는 성막건축에 관한 제도와 규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성막에서 봉사할 제사장과 그의 의복에 관한 규례까지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31장에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성막을 건축할 실제 제작자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어떤 사람을 지명하여 불러서 그 일을 맡기신다. 그들은 다름 아닌 유다지파 사람 브살렐과 단 지파 사람 오홀리압과 그리고 지혜로운 자들 다수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불러서 사용하셨을까? 그리고그 뒤이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준수명령을 다시 상기시키신다. 왜냐하면 비록 성막을 건축하는 시기라 할지라도 결코 안식일 준수를 어겨서는 안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친히 당신이 손가락으로 쓰신 율법의 두 돌판을 건네주신다. 이것이 바로 출31장의 핵심 내용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누가 과연 하나님의 성막의 건축자로 부름을 받아 쓰임을 받게 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안식일준수 명령에 따른 하나님의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오늘날 주일성수의 개념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는 왜 성막건축자로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불러내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출25장부터 지금까지 모세에게 성막건축에 필요한 재료들과 그 제조들에 관하여 하나하나씩 소상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막에서 봉사할 제사장을 어떻게 세워야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입을 옷을 어떻게 만드는 것까지 알려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제 성막건축자를 지명하여 부르시는 장면이 출31장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자들의 대표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브살렐이었고 또 하나는 오홀리압이었다(출31:2,6). 그리고 마음이 지혜로운 자들을 그들에게 붙여주라고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남자 장년만 6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의 사람들 중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불러서 그들로 하여금 성막을 건축하라고 시키셨는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그들이 성막건축에 꼭 필요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둘째로, 남들보다 더 중요한 훌륭한 신앙의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성막의 주 건축자인 브살렐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자.

 

  성막의 실제 주 건축자는 사실 "브살렐"이었다. 그러나 성막건축자로서 그의 이름만 덜렁 나오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도 같이 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고로 성막의 주 책임자가 "브살렐"이었던 것 처럼, 부 건축자는 "오홀리압"이라는 인물인데 하나님께서 그를 언급하실 때에는 그의 부친까지의 이름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브살렐은 그의 할아버지까지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첫째, 브살렐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을 왜 굳이 거론하시면서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라고 했는지부터 살펴보자. 브살렐은 사실 유다의 6대손이다. 왜냐하면 유다는 베레스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갈렙을 낳았으며, 갈렙은 훌을 낳았고, 훌은 우리를 낳았으며, 우리가 브살렐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대상2:3~9,18~20).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브살렐의 할아버지부터 그 이름을 거곤하신다. 그런데 그 이름은 "훌"이었다.

  그런데 "훌"이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모세의 누나였던 미리암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인물로서,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장막을 치고 있었을 때, 공격해온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여호수아가 이끌고 나간 이스라엘 군대가 이길 수 있도록 두 손들고 기도하는 모세의 기도에 협력했던 협력자였다. 왜냐하면 모세가 지쳐서 당신의 두 손을 내리게 되자, 그의 두 손을 아론과 훌리 받쳐서 여호수아로 하여금 전쟁에서 이기도록 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출17:10~12). 그러니까 훌은 모세의 매형으로 추정되는 인물로서, 아론과 함께 모세를 도왔던 핵심인물이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우리를 낳았고 우리가 '브살렐'을 낳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명하여 불러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신약시대로 쳤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사람은 돈독한 신앙의 가문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본인도 돈독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의 아버지였던 우리가 그에게 지어진 이름 속에 부모와 조부무의 신앙의 고스란히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브살렐"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그늘(보호)아래 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의 조부였던 훌과 그의 부친이었던 우리, 이 둘 중의 한 사람이 브살렐이라는 이름을 지었을텐데, 그 이름 속에는 브살렐로 하여금 "너는 항상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전수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 브살렐은 신앙이 돈독한 가문의 사람일 뿐만 아니라, 본인의 신앙도 참으로 룰륭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신앙의 조건만으로 성막건축자로 부름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막건축을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막건축의 주책임자로 불러내었던 브살렐은 뼈대있는 신앙의 가문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본인도 신앙을 갖추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그는 성막건축에 관한 탁월한 실력을 갖춘 자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라. 그리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게 하라(출31:3~4)". 그렇다. 그에게는 신앙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막건축에 필요한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성막을 건축하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 성막건축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신앙과 기술에 완벽한 자가 없다는 것이다.

...  그리고 왜 굳이 브살렐의 지파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 것인가?

 

3.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에는 왜 동역자가 중요한가?

  비록 브살렐이 성막건축의 총책임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성막은 사실 혼자서 건축할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브살렐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동역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아무리 휼륭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맡겨진 책무를 바빠서도 못할 수 있고, 기술이 없어서 못할 수도 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브살렐의 약점을 보완하고 조각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과 각종 실들을 짤 수 있는 기술을 갖춘 오홀리압을 붙혀주신다. 그것도 주 책임자로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성막건축을 명령하실 때에 성막건축에 참여할 주책임자로서 브살렐 외에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불러내신 것만 해도 확실하다.

 

4. 하나님께서는 성막건축의 끝부분에서 왜 안식일규례를 다시 언급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성막건축의 끝부분에서 왜 안식일규례를 다시 언급하는 것인가?

 

 

 

 

 

5. 오늘날 성도들은 구약의 안식일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6. 출31장에 보면, 출31:14절에서"안식일"을 복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일곱째날을 왜 큰 안식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7. 성막건축과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8. 나오며

 

 

2019년 4월 24일(수)

정병진목사

 

 


과연 그리스도인들 중에 안식일이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아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주간에는 안식일이 두 번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또 얼마나 될까? 개인적으로 나 자신도 5년전 메시야닉 쥬(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유대인들)을 접하기 전까지 이러한 사실을 잘 몰랐다. 아니 그렇게 들어본 적도 없었고, 배운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식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안식일에는 주간의 안식일(제칠일안식일)과 절기의 안식일들(7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절기의 안식일들(7개)는 폐지하셨지만 십계명에 나오는 주간의 안식일은 폐지하지 않았다고 가르친다. 아니 주간의 안식일은 창조직후에 제정하신 것이고 또한 폐지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주간의 안식일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모르는 일반 성도들은 이들의 주장이 성경적인 것이라고 판단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무엇을 어떻게 속이고 있는가? 오늘은 그것을 확실히 집어보자.

2019-01-04 금요기도회
제목: 예수께서는 주간의 안식일은 빼고 7개의 절기의 안식일들만 폐지하셨을까?(엡2:11~18)
https://youtu.be/02aclh6XCX4


1. 들어가며

  오늘날 우리 믿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되면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이라면서, 창조직후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안식일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분파(이단세력)가 있습니다. 그들을 보통 "안식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안식일을 폐지하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안식일을 주일로 바꾼다고 말씀도 안 하셨으니 안식일은 폐지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으니, 4번째계명으로 주신 안식일법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으며, 안식일을 끝까지 지키는 자가 여자의 남은 자손이 되어 결국 구원을 얻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얼마나 그럴듯한지, 듣는 자는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성경적인 주장인가 하고 생각할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 안에는 거짓의 함정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안식교의 교리들이나 주장들을 살펴보면 오늘날 개혁교회보다도 더 성경적인 주장을 하는 부분이 분명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가운데 가장 성경적인 분파가 안식교가 아닌가 하고 착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안식교에서 말하는 절기의 안식일과 주간의 안식일(제칠일 안식일)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오셔서 폐지하신 것은 절기의 안식일들 뿐이지 주간의 안식일은 폐지되지 않았는지를 정확히 살펴봄으로써 결국 안식교가 오늘ㄹ날 무엇을 속이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안식일은 단수인가 복수인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은 한 가지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일곱째날인 주간의 안식일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을 원문으로 읽어보거나, 구약의 율법을 읽어보면, 안식일에는 "주간의 안식일(제칠일 안식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절기의 안식일[들]"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안식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주간마다 돌아오는 제칠일 안식일(이것을 주간의 안식일이라고 부른다)이 있고, 또한 절기 중에도 쉬는 날(안식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절기 중에 있는 안식일은 언제일까요? 레23장과 민28~29장을 읽어보면, 유월절부터 시작되어 초막절로 끝나는 이스라엘의 7개의 절기들 가운데 총 7개의 안식일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기록에는 안식일이 복수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약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안식일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마28:1).

마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마28:1[직역] 그런데 안식일들의 늦은 시간에(다 지나간 후에), 안식일들의(안식일들이 지나간) 첫[날]안으로 날이 밝아아고 있을 때에, 막달다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다.

  한글로된 성경만을 보거나 영어로된 성경만 보면, 안식일은 복수가 아닙니다. 단수로 나와있습니다. 특히 영어성경에서는 "안식 후 첫날"이라는 문장을 "주간의 첫날(the first day of the week)"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28:1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안식일은 결코 단수명사가 아니며 복수명사일 뿐만 아니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 본문의 앞부분 즉 "안식일들이 다 지나고(늦은 시간에)"는 표현은 안식일이 그 주간에는 최소한 두 번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3. 유대인들은 절기의 안식일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안식일들을 구분하고 있을까요? 좀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주간의 안식일(제칠일안식일)과 절기의 안식일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절기의 안식일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주간에 일곱번째 날입니다. 그날을 요일로 계산하면 그날은 토요일입니다. 그렇다면, 절기의 안식일들은 언제일까요? 절기의 안식일들에 관하여는 레23장과 민28~29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의 7가지 절기들(유월절,무교절,초실절,칠칠절,나팔절,속죄일,초막절) 가운데, 안식일을 끼고 있는 절기는 총 5가지입니다. 즉 7가지의 절기들 중에서 무교절(레23:7~8/민29:18,25),칠칠절(레23:21/민28:26),나팔절(레23:24/민29:1),속죄일(레23:27,32/민29:7),초막절(레23:35~36/민29:12,35)에만 안식일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절기들 중에 유월절과 초실절은 안식일이 들어있지 않은 절기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절기의 안식일들은 일곱가지가 된 것일까요? 그것은 무교절과 초막절에는 첫날과 마지막날을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무교절의 첫날(1월 15일)과 마지막날(1월 21일)과 초막절의 첫날(7월 15일)과 마지막날(22일)이 안식일 곧 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의 5개의 절기들 가운데 총 7번에 걸쳐, 그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성회로 모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기법상에 나타나 있는 안식일들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어떤 주간에는 주간의 안식일과 절기의 안식일이 겹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그 주간도 역시 절기의 안식일(무교절의 첫날)과 주간의 안식일이 겹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28:1에 보면, "안식일들이 다 지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그 주간은 어떤 안식일이 겹쳐 있었던 것입니까? 그 주간을 시간적으로 재구성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월 13일(수) : 이날은 유월절 예비일로서, 오후3시~오후6시에 유월절양을 미리 잡습니다.

1월 14일(목) : 유월절 당일날입니다(그러나 이 날은 안식일은 아닙니다).

1월 15일(금) : 무교절의 첫날입니다. 이날은 절기의 안식일입니다.

1월 16일(토) : 이날은 주간의 안식일(제칠일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이날 오후6시 이후부터 다음날(17일) 새벽시간 사이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야 요나의 예언을 따라 삼일삼야를 땅 속(음부)에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12:40)

1월 17일(일) :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간으로는 16일 저녁(오후6시)부터 17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주간의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신 것이 됩니다.

 

4. 과연 예수께서는 절기의 안식일만 폐지하시고 주간의 안식일은 폐지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과연 예수께서는 절기들 중에 있는 안식일들만 폐지하시고 주간의 안식일은 폐지하지 않으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각종 규례들로 구성된 의식법들에 속한 모든 안식일들을 다 폐지하셨습니다. 그러한 근거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그러한 근거로서는 첫째, 경륜상의 증거가 있으며,  둘째, 직접적인 증거가 있으며, 셋째, 사도의 증거들이 있습니다.

  첫째, 경륜상의 증거입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은 율법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모형이자 그림자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있을 것들입니다(히10:1, 갈3:19,23, 골2:17). 특히 십계명 중에 안식일준수법을 주실 때에는 출애굽1세대들에게는 창조의 은총을 기억하라고 주신 법이지만(출20:8), 출애굽2세대들에게 주신 법은 구속의 은총을 기억하라고 주신 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신5:12). 구약이 창조의 은총에 더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신약은 구속의 은총에 더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특히 구약시대에 주어진 율법 중에서 모든 의식법들은 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예표들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절기법에 나오는 유월절은 장차 오셔서 대신 죽어서 인류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실 예수님에 대한 예표입니다(고전5:7).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셔서 유월절양으로 대신 죽으심으로 유월절을 완성했으니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완성하심으로 구약의 절기법들은 다 폐지되어진 것입니다.

  둘째, 직접적인 증거들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세례]요한까지니(마11:13)"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심으로 율법으로 사람을 구속하던 시대가 끝났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요10:30)"고 말씀하심으로, 구약의 율법에 규정된 모든 예언과 예표들이 다 성취되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직접 제사장이 되어 속죄제물로서 대신 죽으심으로 구약의 모든 제사법까지 다 폐지하셨음을 직접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에게도 직접적으로 구약의 의식법들이 폐지되었음을 말씀하셨는데, 사도행전10장에 보면 보자기환상 속에 그 증거가 나옵니다. 보자기 안에는 율법에 규정해놓은 온갖 더러운 짐승까지(레11장) 다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짐승들 중에 율법에 더럽다고 규정된 것은 자신이 날 때부터 결코 먹지 않았다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고 하셨습니다. 결국 구약에 규정해놓은, 의문에 속한 음식법(레11장)마저 십자가에서 다 폐지하셨음을 분명히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접촉함으로 자신을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규례도 폐지한 것임을 베드로는 이해했습니다(행10:28). 이처럼 절결법(정부정법)도 폐지된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동물에 대한 부정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부정까지도 없애버리셨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셋째, 사도의 증거들도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법조문들(규례들)로 쓴 증서 곧 의식법들의 모든 규례들을 지워버리시고 그들을 들어올려 없애버리셨다고 언급했습니다(골2:14).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즉 음식법들)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즉 안식일법을 비롯한 모든 절기법)을 이유로 누구든지 더이상 이것들을 가지고 비판할(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수 없다고 증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일뿐 몸(실체)는 아니며, 실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골2:17). 더욱이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주님께서 안식일법을 비롯한 모든 절기법들을 완전히 폐지하셨음을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율법)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들]과 달[들]과 절기[들]과 해[들]을 삼가(면밀히)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9b~11)"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의문에 속한 모든 율법들 곧 의식법들을 다 폐지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날들(안식일들, 금식일들), 달들(월삭), 절기들(유월절,무교절,초실절,칠칠절,나팔절,속죄일,초막절)과 해들(안식년,희년)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교에서는 예수께서 오셔서 절기법 안에 들어있는 안식일들(무교절의 첫날부터 초막절의 여드레날까지 총 7가지 절기안식일)만 폐하신 것일 뿐, 십계명에 있는 안식일법은 폐하지 않았다고 고집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의문들에 속한 모든 법이 폐지되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골2:14이나 갈4:10을 통해서 분명하게 주님이 폐지하신 것이 "안식일들"과 "날들"이라고 말함으로 모든 안식일들 즉 주간의 안식일이 되었든지 절기의 안식일들이 되었든지 다 폐지되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말씀(엡2:15)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십계명 안에 들어있는 의문의 율법(의식법)까지 다 폐지하셨음을 분명하게 언급하였습니다. 자, 그럼 엡2:14~15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엡2:14~1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4~15[직역]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 둘(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던 분이시다. 그분은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의 육체 안에서 허물어버리신 후에(폐지하신 후에), 규례들 안에 [있는 ] 계명들의 율법을 무효케하신 후에, 그 둘로 그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창조하기 위하여 평화를 만드시면서"
  이 말씀에 따르면 "법조문(규례들=의식법이 정한 규례들)으로 된 계명의 율법(곧 제4계명인 안식일법)까지 다 폐지하셨다고 분명하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폐지하신 의식법들에는 안식교에서 말하는 절기의 안식일들만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십계명에도 나와있는 의식법의 규정인 안식일에 관한 규정까지도 같이 폐지하셨음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으로서 안식일계명은 한층더 계승 발전되긴 했지만, 의식적인 규정들을 지켜서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것들은 다 폐지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할례를 받아 언약백성이라고 주장하는 의식적인 규례들은 이미 폐지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적으로 유대인들(선민)이라는 것 자체가 은총을 주는 수단이 되었던 시대는 지나간 것입니다.

 

5. 나오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주일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두고, 어떤 불편이나 의심이 없이 그날에 모여 예배드립니다. 왜냐하면 처음 교회가 탄생할 때부터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는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의 의식법들을 폐지하시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쓰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1844년 이후 엘린 지 화이트라는 여사가, 예순미을 믿는 자라도 안식일을 지켜야한다고 하는 논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1844년 예수님의 재림예언이 불발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안식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입니다. 안식교는 지금까지 제칠일 안식일(토요일) 준수를 목숨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마지막 시대에 남은 백성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안식일준수는 잘못된 것입니다. 1844년 이전에는 기독교분파 가운데 안식일준수를 주장하는 이들이 없었습니다(단지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을른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1844년 예수재림예언이 불발로 끝나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사람들은 엘렌 지 화이트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고 그들로 인해 안식일준수가 새롭게 부각된 것입니다. 하지만 좀 전에 살펴보았듯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약에 속한 모든 의식법들을 다 폐지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안식일법과 절기법도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폐지된 안식일에는 7개의 절기의 안식일들과 한 번의 주간의 안식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이상 안식교의 잘못된 주장에 속아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도 믿고 율법의 행위가 지켜야 하는 다른 구원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자는 주장과 일맥 상통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면 됩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시지 결코 안식일준수와 같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019년 01월 04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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