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이삭이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왕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창22:1~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1hUurNGbfc [또는] https://tv.naver.com/v/31251510

 

1. 들어가며

  창세기에서 이삭 이야기는 주로 다른 사람과 겹쳐서 나온다. 즉 이삭 이야기는 자신의 부친이었던 아브라함과 겹쳐서 나오고, 자신의 아들이었던 야곱과 겹쳐서 나온다. 그러므로 굳이 이삭 이야기만 단독적으로 나오는 것은 창세기 26장, 단 한 장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이삭 이야기는 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사건은 주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라는 주제가 부각되는 것일 뿐, 이삭의 헌신과 희생이라는 주제로 잘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출3:16).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삭의 부분도 대강 넘어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삭도 천국에서는 왕적 지위를 누리는 한 사람으로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삭은 어떻게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또한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2.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것을 알려면 그 반대를 살펴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죽어 12진주문을 지나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며, 천국에서도 왕 노릇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줄 알고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그날 심판 때에 주님으로부터 모른다고 내침을 받고 성밖에 쫓겨난 사람일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죄를 짓고 살았다면 그는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응당 그래야 한다고 수용할 것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교회 생활을 했는데 그만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난다면 그것처럼 불쌍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장차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다(눅13:26~27)

눅13:26~27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급한 사람들 가운데,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다(눅13:28~29). 왜냐하면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 안으로 장차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자들의 대표 주자들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이 공히 증거해 주는 바다(신30:19).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어떻게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되어서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그중에서 오늘은 이삭 부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3. 이삭의 신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렇다면 이삭은 어떻게 신앙이 형성된 것일까? 우리는 창세기 22장에서 비로소 이삭이 아버지에 의해 번제물로 바쳐지는 장면을 보면서, 이삭이 묵묵히 자신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그의 나이는 요세푸스가 쓴 유대 고대사를 보면 25살이라고 나오고, 미드라쉬나 야살의 책을 읽어 보면 37세였다고 나온다. 어찌되었든지 그는 30살 정도의 총각 시절에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총각 시절에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믿음은 대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최소한 창세기 22장 이전에 형성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루 아침에 자신을 번제물로 드릴 만큼 갑자기 신앙이 좋아질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을 번제물로 바칠 때에, 이삭이 자신을 주님께 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면, 아마도 그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을 것이다. "이 양반이 실성을 했나"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삭의 신앙은 대체 어떻게 되어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인가? 그것은 그 이전에 등장하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이삭이 젖 뗄 무렵에 돌잔치 비슷한 것을 했는데, 그때 자신보다 13년 먼저 태어난 형 이스마엘이 자신을 놀리는 것을 자신의 어머니 사라가 목격하게 되면서부터다. 어머니 사라는 이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아브라함의 기업을 상속받을 자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준 애굽 여인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심히 근심한다. 왜냐햐면 비록 첩을 통해서 난 아들일 지라도 그도 역시 자신의 아들이요 장자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아, 너는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어라. 왜냐하면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창21:12)"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게 된다. 

  그렇다면 사라는 무슨 권리로 남편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요구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을 장막 문 뒤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내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서 나은 아들 이삭만이 후사가 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창17:19~21). 그리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게 되고 아브라함의 집에는 이삭만 남게 된다. 그러니 훗날 이삭이 자신을 번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어머니 사라의 신앙 교육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지금 천국에 올라가 보면, 천국은 24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24장로들 중의 하나가 '사라'라는 것에 대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는 어떻게 되어서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된 것인가? 그것은 사라에게 있어서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이 24장로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며, 또한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 이삭을 24장로의 한 사람으로 앉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사라는 이삭이 태어나고 이삭이 24장로의 반열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이삭의 신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삭의 신앙 형성은 자신의 어머니 사라의 신앙 교육 때문이었던 것이다. 젖 뗄 무렵이니까, 아마도 이삭의 나이 3~5살 정도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사라는 이삭에게 그가 어떻게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지,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는지를 철저하게 교육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나이 30살 때에는 이미 자신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쳐도 그것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신앙의 부모나 영적 지도자를 만나 그들로부터 우리가 장차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지도받는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오늘날 누가 과연 약속의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는 사람이 되는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여종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 그리고 자유하는 사라와 그의 아들 이삭이 왜 어떤 자는 아버지의 후사가 되지 못하고 또 어떤 자는 아버지의 후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당시 육체를 따라 났던 이스마엘이 약속을 따라 났던 이삭을 핍박한 것 같이, 오늘날도 역시 종의 법인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성령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었더라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지 않고 육체를 따라간다면 그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갈5:18~21). 그렇다. 우리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태어나 성령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옛사람인 육체를 따라간다면 우리 중에 그날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 곁에서 떠나가라"라는 말을 들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종의 신분으로 천국에 들어가고, 신약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아들의 신분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구약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자는 다 아들의 신분이자 상속자의 신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신분을 가진 자라도 모두가 다 천국에서 상속자의 신분을 갖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도 역시 육체의 소욕을 따라간다면 상속자의 신분을 갖지 못할 뿐더러,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는 새 예루살렘 성 밖으로 쫓겨나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이삭이 자신을 번제물로 바친 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삭이 자신을 번제물로 기꺼이 바친 사건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삭이 자신을 번제물로 바친 사건은 신약시대에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골고다 언덕에서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친 사건에 비유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삭이 자신을 번제물로 바치는 그 순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OK라는 사인이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신앙은 약 30살 때에 이미 절정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삭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그의 신앙을 인정하셨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사건이 있은 후에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날 이삭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그때부터 이삭은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는 인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자면, 첫째, 그 사건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직접 나타나셨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창26:1~20). 즉 하나님과 그는 대면하여 말할 수 있었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 그가 손대는 모든 일에도 복을 받았다. 왜냐하면 평생을 목축업만 해 오던 이삭이었지만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둬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고, 그의 집에는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으며, 종들도 심히 많게 되었던 것이다(창26:12~14). 이 모든 것은 이삭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들이다.  

 

6. 번제물 사건 이후 이삭이 보다 더 성숙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삭이 자신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친 사건 이후 이삭은 보다 더 성숙해졌다. 그것은 그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했고 반응했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이삭이 그랄 땅에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농사가 풍년을 이뤘다. 평생 농사만 짓던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이 잘 되는 것을 볼 때 시기 질투심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러자 그들은 가서 이삭의 우물을 메꾸어버렸다. 그러자 이삭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우물을 팠다. 그런데 하나님께 바쳐진 이삭에게 형통함의 축복이 있었다. 거기에서도 물이 솟아나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랄 사람들이 자기네 땅에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우물을 빼앗아 갔다. 그래도 이삭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그랄 사람들이 오지 않을 장소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물을 팠다. 그랬더니 거기에서도 우물이 나왔다. 이처럼 이삭은 이미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온유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다.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원수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그에게 복을 주신 것이다. 그러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자신의 친구 아훗삭과 함께 그리고 그의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이삭을 찾아왔다. 서로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온 것이다. 그때 그랄 왕은 말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8~29)" 그랬다. 아무리 그의 백성들이 이삭의 일을 훼방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랄 왕이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이삭이 자신들의 땅에 침범해 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 뻔하니까,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찾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삭은 하나님과 사람들이 인정하는 온유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과연 누가 천국의 땅을 기업으로 얻는 자가 되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천국 복 8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중에서 세 번째 복은 이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그렇다. 온유한 자는 천국에서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 이삭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당신 스스로를 말씀하실 때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11:29). 그렇다. 우리는 이삭의 성숙한 성품을 통해 온유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며 그곳에서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늘 체크할 수 있어야 한다. 

 

7. 나오며

  이삭은 훌륭한 신앙을 소유하는 데에는 사실 이삭 혼자만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좋은 신앙의 부모나 영적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다. 자신의 미래가 여기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말씀으로 양육을 받느냐가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다. 사실 이 땅에 태어나서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는데, 한 번도 천국은 어떻게 들어가며, 그곳에서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못 들어 본 사람은 그 나라를 사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준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달랐다. 그의 어머니 사라가 철저하게 그에게 신앙교육을 시켜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나이 서른 살 정도가 되었을 때 이미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좋은 부모가 없다고 환경만 탓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다. 내가 좋은 신앙의 부모를 못 만났다면, 좋은 영적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그리고 나는 그러한 부모를 만나지 못했어도 나 자신이 내 자녀에게 좋은 신앙의 부모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그 날을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죄짓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아니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내 성품이 환경에 따라 흔들려서 그만 평정심을 잃어버리는 수준이라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부지런히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우고 이삭처럼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언젠가는 온유한 자가 되어 있을 것이며,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2022년 11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9) 스데반 당시 유대인들이 본받아야 할 아브라함의 믿음(행7:1~16)_2022-08-12(금)

https://youtu.be/KykgKMpem7o  [혹은 https://tv.naver.com/v/28578421 ]

 

1. 스데반이 공회석상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 가운데 잘못된 점은 무엇이었는가?

  스데반이 거짓고소자들에 의해서 산헤드린 공회석상에 서 있었을 때에, 유대인들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던 것일까?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육체의 할례를 받았던 자기자신들은 이미 선택받은 사람이며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화려하게 보이는 성전을 우상처럼 떠받들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자기들은 천사가 전해준 율법도 귀하게 여긴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로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는데도 그 예수님을 배척하고 결국 죽였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은 형식주의에 완전히 물든 나머지 하나님의 뜻과 실제에 대해셔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2. 스데반이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깨우치기 위해 설교에 첫번째로 등장시킨 인물은 누구였는가?

  그러자 스데반은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첫번째로 아브라함을 등장시킨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스데반이나 공회회원이나 다같이 존경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스데반은 공회에 있는 장로들과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행7:2)" 그랬다. 그는 그들을 가리켜 '부형들' 곧 '남자 형제들과 아버지들이여'라고 치칭함으로서, 먼저는 자신을 낮추었으며, 또하는 공회원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그들에게나 스데반에게나 다같이 존경하는 인물이자 그들의 조상이며 한 혈통 아래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부각시킨 것이다. 하지만 스데반이 갖고 있는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그들이 갖고 있던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3. 스데반이 아브라함을 맨 처음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왜 스데반은 성전과 모세의 규례로 자신을 고소했던 자들 앞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꺼냈던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성전과 모세의 규례가 형식주의로 흘러가서 이제는 거의 절대시되고 있고 우상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성전 건물을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있었으며, 모세의 규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전을 짓게 하신 목적과 모세를 통해 일러준 율법규례의 본래적인 의도에서 많이 빗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과 스데반 자신에게 있어서 공통된 영역 곧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꺼내어 그들이 현재 어떤 실수를 하고 있는지를 지적한 것이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자 공회원들이 아브라함이 가진 삶과 믿음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잡힌 것 하나 없었어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따라갔는데, 지금의 세대 사람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붙들고 있다라는 것이다. 

 

4.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보이지 않고 약속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아브라함은 자신의 손에 어떤 것이 쥐어지지 않았어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갔던 것이다. 그 증거는 이렇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쥐어진 것 하나 없이도 그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갔었다. 둘째로 어느 덧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는 했으나 그곳에서 발 붙힐 만한 땅도 유업으로 받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한 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였다는 것이다(롬4:19~21). 셋째로, 중간에 잠깐의 실수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이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할례를 행했는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기꺼이 감행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가 할례를 받으면 일주일동안 꿈쩍도 하기 어려운데, 아브라함은 자신과 13살된 이스마엘과 자기 밑에 있는 모든 남종들 약 1천여명에게 모조리 할례를 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만약 그때에 적이 쳐들어오면 한꺼번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과 자신의 집과 자신의 종들의 보호자요 수호자인 것을 믿었기에 그렇게 행돋한 것이다. 넷째로, 그가 살아있을 때에 약속의 아들로서는 이삭 딱 한 사람만 곁에 있었지만 그는 약속의 땅과 자손번성의 약속을 그의 아들에게 기업으로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이제 100세가 되어 기적처럼 얻은 아들이었던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혀 흐트러뜨림 없이 순종했다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우상이 될 만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100세 낳은 독자 이삭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아들마저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니 그냥 내어드린 것이다. 이것은 그가 보이는 어떤 것을 우상시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일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땅의 것을 결코 자신의 우상으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토 친척 아비집도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카 롯도 떠나보낼 수 있었고,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도 후사의 명단에서 제외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100세 낳은 독자 이삭도 기꺼이 번제로 드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아브라함의 신앙으로부터 우리도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아브라함에게서 배울 수 있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않겠다는 그의 각오다. 그러므로 우리도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어떤 것을 진짜 복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도 역시 우상숭배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기업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어야 한다. 곧 그분의 약속의 말씀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늘에 처소를 예비해놓고 있다면 그대로 믿는 것이다. 맡은 일에 충성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눈에 보이는 복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의 잘못을 겸손히 시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는 어떤 것일지라도 기꺼이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이 그날 할례를 받았다. 이는 그가 잠시 육체대로 행했던 것에 대한 회개의 표시였다. 육체대로 행하여 첩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것이 바로 할례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할례를 한꺼번에 다 받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자신과 식솔들 모두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 그것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눈에 보이는 단 하나의 축복이라도 주님이 달라고 하시면 기꺼이 드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린 일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은 그 일 하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시면 그냥 드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아들이 필요하다면 다시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믿은 것이다. 자기의 아들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데반 당시 유대인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씨 곧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씨를 붙잡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성전과 육체의 할례만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고 한느 말이 나오자 화가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는 하늘에 닿게 된다. 그리하여 약 40년 뒤 A.D.70년 이스라엘 나라는 역사 속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만다. 

 

2022년 08월 12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43)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4) 아브라함의 회개(창17:9~14)_2020-09-02(수)

https://youtu.be/bMNY29P7Xu0  [혹은  https://tv.naver.com/v/15555445 ]

 

 

1. 구원얻는데 회개는 선택사항인가요 필수사항인가요?

  구원얻는데 회개는 믿음과 더불어 필수사항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려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구원얻으려면 믿음과 더불어 회개는 필수적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을 때에 보통 믿고 그날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을 때에 회개했어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처럼 회개는 구원의 시작과 끝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회개는 구원의 최종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욥의 회개가 들려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동방사람 욥은 보통 "인내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욥기서 42장은 회개로 끝납니다. 고로 욥의 이야기는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 혹은 "고난은 인내해야 복이 되어 찾아온다"는 것이 주제가 아니라, 회개없이는 의인이라고 불리는 자도 구원받을 수 없으니 회개하라고 했다는 것이 그 주안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욥이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은 끝까지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고는 회개하지 않고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시험 후 그가 세 친구들과 변론하는 것을 보면, 그는 정말 자신을 의로운 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욥을 깨우쳐주기를 원했습ㄴ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제사를 지내며 또한 [원시율법]을 따라 그것을 율법을 준행한 것으로 의인이 되거나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통해서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그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욥은 그때까지 자신이 죄짓지 않고 살고 있었던 것이, 자신과 자신의 재산과 소유물을 하나님께서 울타리로 지켜주셔서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으로 하여금 그의 재산과 그의 건강을 치도록 허락하자, 그는 이내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을 위로코자 왔지만 자신을 도한 정죄하였던 세 명의 친구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환경이 달라지니까 속에 감추어둔 죄성이 올라와 욥도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은 의롭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엘리후를 만나서 한 방 펀치를 받고, 곧이어 등장하는 하나님에 의해 그는 자신의 무지함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재와 티끌을 무릎쓰고 회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일지라도 회개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욥기서의 교훈입니다. 

 

3. 아브라함은 믿음만으로 구원얻었나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지만 믿음만으로 구원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초창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창15:6).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지만 이내 그의 믿음은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들처럼 그의 자손을 많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었지만, 1년이 채 못되어 그는 자신의 정욕과 육체를 사용해 자식을 낳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첩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떠나버렸습니다. 무려 13년동안이나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3년 후,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잘못했다는 회개의 표시로서 할례를 받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언약의 자손이라는 표시로 보기보다는 회개의 표시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그후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자신의 육체에 할례를 행하기하면 그것이 곧 자신이 언약의 자손이 되는 길이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지금의 성도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4:11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나이가 99세 때에 행했던 할례가 86세 때에 받았던 믿음을 인힌 것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이는 믿음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를 회개하도록 긍휼을 베풀어주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헛 것이 될 뻔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라도 죄짓지 않고 살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믿었던 당일날 죽을 사람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에게 순종적인 믿음이 뒤따라 왔으니, 다 장성했던 아들 이삭을 제물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도 곧바로 순종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의 회개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고로 아브라함의 회개에는 2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 안에는 회개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 믿음만으로 복을 받는다거나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칭의는 믿음으로 그에게 주어졌으며 또한 시작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믿음은 결코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으며, 비로소 회개를 통해서 그의 믿음도 확실하게 인쳐질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둘째, 회개하는 자라야 비로소 행함의 열매도 뒤따라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날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얻는다고 주장하는 성도들이 있는데, 이는 시작의 칭의를 완성의 칭의로 착각하는 것이며, 갓 믿어서 칭의를 얻은 사람에게 달리기 경주가 다 잘 끝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닙니다. 칭의는 구원의 여정에 첫발을 내디딘 것 뿐입니다. 믿었을 때에 입혀준 흰 옷은 살다보면 자범죄들로 인해 더럽혀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상시 예수님의 피로 씻어서(회개하여) 자신의 옷을 희게 만들어놓아야 합니다(계7:14, 22:14). 그래야 자신이 죽거나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 흰 세마포옷을 입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아브라함의 회개가 칭의와 구원의 요소였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에는 어떻게 증거해주고 있나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믿음은 비로소 그것을 지킬 때에 진짜 믿음이라고 가르치며(계14:12), 회개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더럽혀진 의의 옷을 빨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계7:14,22;14). 결국 예수의 피로서 자신을 정결한 처녀로 만들어가면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오직 그분만을 따라가는 자가 될 때에, 그런 자들 중에 하늘의 시온산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경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계14:1~5). 고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다면 날마다 회개하여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깨끗히 빨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로 회개는 구원얻는 데에 쓰이는 악세사리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회개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2020년 09월 02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히브리서가 가르쳐주는 아브라함이 바라고 믿었던 그 믿음은 어떤 것이었나?(히11:13~19)_2019-09-18(수)

https://youtu.be/x9amRl1nug4

 


1. 어떤 사람의 일대기를 두고 당시 말해지는 것과 시간이 흘러서 후대에 말해지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어떠했나요?

  야곱과 에서의 삶은 창세기 25장부터 33장까지 집중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에서는 B.C.2006년경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두 국민이 나누일 것"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게 될 것" 및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미 예견되어 있었습니다(창25:23). 그런데 사도바울이 쓴 로마서에 의하면,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3)"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읽는 독자는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 것은 아닌가 하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닙니다. 바울이 그러한 성경말씀을 인용한 것은 창세기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훗날의 평가가 기록된 말라기 1장2~3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게 되었고 에서는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은 창25장의 예견이 아니라, 그때로부터 약 600년이 지난 시점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평가가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대에 일어난 일과 후대의 평가를 잘 구별해서 나눠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왜곡해서 해석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해석의 경우 아브라함에 대한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2. 창세기에 나와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나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과 히브리서 기자가 나중에 평가하는 믿음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와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보는 믿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비록 없는데도 그것이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그대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라도 얼마든지 다시 살려낼 수 있는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일한 아들로서 독생자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가는 믿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 부름받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여깁니다.

 

3. 히브리서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세기에 기록된 믿음과는 어떤 공통점과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창세기에 기록된 믿음은 대부분 히브리서에도 동일하게 나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희미하게 있거나 나타나지 않는 믿음의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2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히브리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늘 자기자신을 외국인(낯선 자)과 나그네(순례자, 체류자)라고 생각했기에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이 없는 믿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눈에는 이 세상에 속한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가 진정 이 세상에 속한 물질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가나안 땅에 있는 일곱족속과 싸웠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튼튼한 군사력으로 가나안을 정복했었을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 한 번도 가나안 족속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것을 강제로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에 매장지를 돈을 주고 샀을 정도입니다. 둘째는 그가 진정 바라보고 사모했던 것은 하늘에 있는 더 좋은 본향(아버지의 땅, 하나님의 도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 속한 것을 바라보거나 그것을 욕심내지 않은 대신 그는 늘 하늘에 있는 도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에 거기서 살 도시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 때문에 하늘에 도시(새 예루살렘 성)을 마련하시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거나 거기서 왕노릇하려는 자의 삶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거기에 살 도성에 있을 자신의 기업을 늘 바라보고 살았던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2가지 일은 무엇입니까?(히11:16)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2가지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소개하실 때에(예를 들어 출애굽직전에 모세에게 나타나서), 당신자신을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시게 된 배경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신 것을 그분이 드러내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로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큰 도성을 준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서 받을 보상을 위해 달려갔던 아브라함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하나의 큰 도시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5.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가져야 할 필수적인 2가지 신앙의 요소는 무엇입니까?(히11:6)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다음과 같은 2가지 믿음을 꼭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믿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시더라도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늘 의심하는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보이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혹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눈 앞에 실현되지 않아도, 자기의 생전에 실현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고 그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실 것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며 전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구할지라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갈 때에는 그분에게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약 기도한다 할지라도 응답이 없을 것입니다. 의심하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기도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람에 의해 어디론가 날아가 없어질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내 기도를 듣고 있다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며, 그분에게 무엇인가를 간구할 때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며, 이런 자가 결국에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건투를 빕니다.

 

2019년 9월 1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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