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09)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08)(계3:5)_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시다(1)_2022-05-06(금)

https://youtu.be/L87C_JHi--E  [혹은 https://tv.naver.com/v/26759086 ]

 

1. 요한계시록에는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이미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계3:21). 그분이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계1:8, 1:17, 22:13). 그러나 그분은 아직도 아들로서 해야 할 사역이 남아 있다. 그러한 일에는 재림과 심판 사역이 있다. 그런데 언젠가 그분이 아들로서의 사역을 마치게 된다면 그분은 이제 모든 것을 끝마치시고 안식하시게 될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의 시작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된 것이며, 그분을 위하여 된 것이었다(골1:16). 그러므로 그분께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그것들을 완성하시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작하셨던 모든 것을 끝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1차적인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께서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셔서 주 하나님으로서 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예수님은 주 하나님께서 가지시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존재하고 있다. 곧 그분은 첫째로, 주 하나님이시다(계1:8, 22:20~21). 둘째로, 자기 스스로를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계1:4,8, 2:8, 21:6, 22:13). 셋째로 그분은 자신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올 자'로 말씀하신다(1:4,8, 4:8, 11:17, 16:5). 넷째로, 그분은 전능한 자이시다(1:8, 4:8, 11:17, 15:3, 16:7,14, 19:6,15, 21:22). 그리고 다섯째로, 그분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이시다(계10:6, 15:7). 그리고 여섯째로, 그분은 보좌에 앉아 계신 이(4:2,3,9,10, 5:1,7,13, 6:16, 7:10,15, 19:4, 21:5)이시다. 그리고 일곱째로 그분은 창조주이시다(계4:8,14:7). 그리고 여덟째로서,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시다(계1:17, 22:13, 22:1,3, 3:21). 

 

2.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가?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신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렇게 말씀하신다(계2:27, 3:5, 3:21). 그리고 사도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증거하고 있다(계1:6, 14:1)

계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우리는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의 우편에서 아들로서 해야 할 사역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사탄 마귀의 세력들을 쳐부술 일과 진실한 성도들 곧 이기는 자들에게 상을 주실 일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과 심판과 상급 수여가 끝날 때까지 예수께서는 주 하나님이시지만 여전히 아들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것이다. 

 

3. 실제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하나라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구약의 성경은 무엇인가?

  분명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보내셨던 자(아버지)"라고 지칭하셨다(요8:18,14:23, 17:18,25). 그리고 자신은 "보냄을 받은 자(아들)"라고 말씀하셨다(요8:32). 그러나 보내셨던 아버지와 보내심을 받은 아들은 '둘'(two)이 아니라 '하나(one)'라고 말씀하셨다(요10:30). 왜 그런가? 그것은 예수님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요(요14:9~10),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요14:10). 그런데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말씀하는 것이고, 구약 시대에도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서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사야서만을 읽어서는 그러한 사실을 발견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사야서와 요한복음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함께 읽을 때에라야 그것을 발견하기가 용이하다. 왜냐하면 이사야서에서는 첫째,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는 자기 선언은 오직 여호와께서만 하셨기 때문이요(시41:4, 44:6, 48:12), 둘째,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오실 길을 예비할 자를 보내신다고 하셨는데, 그는 바로 선구자로서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사40:3). 그런데 실제로는 예수께서 오셨고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서 그 길을 예비한 자는 세례 요한이었기 때문이다(마3장,막1장,눅3장,요1장). 셋째,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이 홀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언급하셨기 때문이다(사44:24).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곧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모여 협의를 했다는 것과 같은 진술은 구약에 없기 때문이요, 창1:26~27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기 때문이다(전 총신대 구약학교수 김정우 교수 논문 참조). 고로 이사야서는 메시야에 대해 예언으로서의 가장 탁월하고 많은 분량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아주 많은 분량의 예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4. 이사야 선지자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주 하나님 되심의 증거는 무엇인가?

  이사야서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주 하나님 되심의 증거는 무엇인가? 사실 이사야 선지자의 활동시기는 A.D.700년경이었지만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탁월한 계시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러면 이사야서에서 들려주는 예수님의 주 하나님 되심의 증거들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 이사야서에서는 누군가 '여호와의 오실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세례요한에 주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만이 홀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계3:14). 셋째, 여호와만이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께서 '나는 처음으로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2:13). 넷째, 이사야서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는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것인데 그 아기와 아들은 '기묘자인 모사(뛰어난 보혜사)'요, '전능한 하나님' 혹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사9:6), 실제적으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보혜사와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5.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을 어떻게 묘사하였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신지를 잘 몰라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그들은 예수께서 만세 전부터 하나님으로 계셨던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첫 장부터 알려주고 있다. 즉 요한복음에서는 1장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으로 계셨다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본 후에는 곧바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요1:1~3, 49).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지만, 둘은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10:30). 그리고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고 말씀하심으로 예수께서 곧 아버지라고 보아야 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요14:9). 아버지가 아들과 어떠한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시간 관계상 다음 시간에 또 계속적으로 더 살펴보도록 하자. 

 

2022년 05월 06일(금)

정병진목사

 

예수님은 왜 자신을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시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왜 자신을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아들이라는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기에,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굳이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그렇다면 아버지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라고 할 수 있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제2위에 해당하는 분이라는 뜻인가? 구약시대에는 과연 아버지가 계셨는가? 그리고 아들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나타났던 적이 있었는가? 만세전부터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셨다는데 그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고 하는데, 왜 그랬어야 했는가?(사9:6) 그리고  그분이 아들이 되셔야 했던 이유는 진정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또한 무엇인가? 오늘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러면 우리는 아들로 오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1.들어가며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요5:44, 8:41).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구약이 그렇게 단언하여 증거하고 있고 신약도 그렇게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하는 문제를 두고 한 때 많이 고민했던 시대가 있었다(4세기경). 그래서 그때부터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에 관한 정의가 내려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나중에는 신조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성령님에 대한 정의도 내려져야 했다. 그런데 한 번 정해진 신조는 좀처럼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는가?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전통이 되고 그것이 정통이라는 말로 위장되어 사람들을 그 기준으로 판단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 내려진 정의들이 성경적이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참 고민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 부분에 대해 제대로 말을 하자니 이단 삼단하는 분들에게 매도당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렇다고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할 책임을 가진 목회자가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전해야 하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아니 힘써서 알아가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힘써 알아갈 존재이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그냥 알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이나 귀신들을 하나님으로 알고 섬길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되고 있는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살펴봄으로서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은 시간이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다가 동정녀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는가?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성경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신약성경 중에서도 특히 사복음서에서 요한복음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찾아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거기에 성부와 성자에 관한 말씀이 집중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기가 쉽지 않거나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은 성경을 요약해주는 그런 교리집이나 요약집들이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신학자들의 모여서 그러한 작업을 하였는데, 그것을 일컬어 "교리"라고 부르며, 그것이 교회 가운데 신앙으로 고백되어지면 "신조"라고 부르게 된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계에 여러가지 신조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제일 첫번째로 나온 신조가 바로 "니케아신조"(A.D.325년)다. 그런데 훗날 니케아신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의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골격이 된다. 그리고 이 신조를 보완한 것이 "콘스탄티노플신조"(A.D.381)라는 것인데, 이것부터가 큰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 신조에 보면 성경에 없는 말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징적인 표현인데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이것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 분이나 세 분 하나님으로 잘못 이해하게 되어버린다.

  먼저, 니케아신조를 보자. 여기에는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자를 믿습니다... 또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아버지로부터 특유하게 나셨고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시요...또한 성신을 믿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신조만을 그대로 읽게 되면, 신앙고백자는 하나님을 세 분으로 알게 될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 한 분 하나님이 있는데 거기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한 분 하나님 아버지와 한 분 아들과 한 분 성령이 있다고 언급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님에 관한 신조가 이상하게 변질되고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즉 니케아신조를 보완한 "콘스탄티노플신조(A.D.381)"가 바로 그 예이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언제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는지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데, 그때은 "모든 세대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셨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정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동정녀마리아의 출생을 통해서 비로소 이 세상에 나타나셨기(계시되었기) 때문이다(요1:14,18). 물론 하나님의 품 속에는 이미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계셨다(요1:18). 즉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아들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약시대만 해도 아직 아들은 출현하기 전의 상태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노플신조에 나오는 "모든 세대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셨다"는 문구는 잘못된 것이다. 더욱이 이어서 나온 콘스탄티노플신조(A.D.381)에 보면, 기존의 사도신조에 한 가지 조항을 더 추가하였는데,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가운데, "하늘에 오르사" 다음에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라는 조항이다. 하지만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께서 진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승천하시어 하늘에서 승리자로서 계신다는 것, 즉 영광스런 자리에 오르시어 통치가 되셨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인데, 사람들은 하나님 우편에 또 다른 예수님의 보좌가 있어서, 거기에 승천하신 예수께서 앉으셨다고 착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A.D.325년에 나온 니케아신조에는 이러한 문구가 없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언제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는지에 관한 규정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신조 때부터 성경에 없던 말이 추가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아타나시우스 신조"(A.S.450)에 보면, 이젠느 예수께서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출생하였다"고 못박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 홀로 계실 때에, 시간이 아직 탄생하기 전에 아들이신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뒤에 나온 신학자들은 성자 예수님은 이미 시간 이전에, 만세전부터 아버지로부터 나오시어 존재하고 있다가, 동정녀마리아의 몸을 빌어 태어나셨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삼위일체를 믿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서, 이 삼위일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단에 속한다고 말해버렸다. 그러므로 그 뒤에 모든 믿는 이들은 만세전 즉 시간이전부터 아들이 계셨으며, 이 아들이 동정녀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태어나셨다는 신앙고백을 아무런 분별없이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3. 예수님은 언제부터 계셨는가?

  그렇다면 성경은 아들에 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 성경의 기록은 간단하다. 예수께서 동정녀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실 때에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기 하루 전날밤에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에(안으로)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를 향하여) 가노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날 초저녁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사도요한은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다가 하나님께로(을 향하여)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요13:3)" 그렇다. 예수께서 지금으로부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실 때에, 아버지께로부터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노플신조나 아타나시우스신조는 이 부분에 있이서 잘못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시간이 생기기도 전에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나오시고 성령이 또한 발출하셨으며, 그러다가 천지창조사역이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는데 이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구약이전부터 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을 다 뒤져보라. 거기에 아들이 나타나 있었다고 언급하는 대목은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다. 만약 있다고 하는 비슷한 문구가 있다면, 그것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들과 나눈 대화들일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7)" 천지창조전에 이미 창조되어 있는 천사들과 하나님께서 나눈 대화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홀로 즉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창1:28)"던 것이다. 또한 이사야선지자는 천지창조사역에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만 일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사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 그러므로 구약시대만 하더라도 아들이란 하나님의 생각속이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이지, 아직 밖으로 표현되지 아니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동정녀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셨고 곧 아들로 탄생하신 것이다. 아들이 천국의 어딘가에 서성이며 있다가 오신 것이 결코 아니다.

 

4. 아들이란 어떤 존재이며, 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인가?

  그렇다면, 아들이란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다시 말해, 아들은 나타난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그분이 그때 창조되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며, 이전부터 하나님의 생각 속에 존재하시고 있던 하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것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그분의 존재는 동정녀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으로 비로소 나타나신(출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란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에 대한 별칭이다. 하지만 그분은 이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100% 신성이 있고, 또한 100% 인성으로 조성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될 때에는 반드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리킬 때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성이란 그분이 탄생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실 수 있는 존재가 되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 그러셨는가? 그것은 우리 죄많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부득이하게 취하신 선택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피흘릴 수 없고 고난받을 수 없으며, 또한 죽으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흘림 없은즉 죄사함이 없으니(히9:22, 레17:11), 하나님께서 피흘려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 고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하나님이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인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들이라고 한 표현은 언젠가는 사라질 표현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부득이 취하신 신분이 아들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아들이라는 신분으로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원수마귀와 귀신들 및 사망을 처리하는 일이다(고전15:23~26). 이것도 아들의 신분으로 하실 일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요19:30). 인류속죄를 위해 아들로서의 일을 완성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때에 동시에 이 세상임금인 마귀도 심판을 받았다(요12:31~32). 그래서 그는 그는 이 세상에서 쫓겨나 지하음부에 갇히게 되었다(물론 그는 자신의 영을 보내어 지금도 일하고 있고, 자신의 부하들인 귀신들을 음부의 문들로 보내어 여전히 사탄마귀로서의 일을 열심히 행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하나님께서는 마귀에게 완전한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두번째로" 다 이루실 일"이다(계21:6). 그들을 불못에 멸하는 일이다(계20:10). 그러므로 그때까지 예수께서는 아들이라는 신분을 유지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하여 대제사장(히4:14~16)과 중보자(요일2:1~2, 히7:25)로서의 일도 수행하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란 누구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버지는 상대적인 표현이다. 아들이 있기에 아버지라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는 자는 아버지라고 불리워지지 않듯이,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하늘에 계신 분 곧 신성만을 가지신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고로 아버지는 신성만을 가지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반대로 아들이란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만세전부터 홀로 한 분으로 존재하셨던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하나님은 두 분처럼 표현되셨다. 하늘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이 땅에는 아들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고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음에 대한 부득이한 표현인 것이다. 사실은 그분의 본질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빌2:6, 히1:3). 하지만 사람이 되셨으니(인성을 취하셨으니),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표현할 수 없기에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한편, 공생애기간 중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도 표현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의 사람되심을 강조하신 표현임과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호칭하는 표현인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아들이라는 신분은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어떤 제한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러셨는가? 그래야만 속죄제물이 되어 죽으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귀가 예수님을 얕잡아보고 달려들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어찌 마귀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도했겠는가? 그도 사실은 몰랐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하나님 같기도 하고 사람같기도 했기에, 사람이면 죽일 수 있다고 덤벼든 것이다. 하지만 죄없는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으니, 마귀는 그 범죄행위 때문에 사망권세를 빼앗기고 말았다(계1:18). 그리고 그때에 이 세상으로부터 음부(땅속)로 쫓겨나게 되었던 것이다(계20:1~3).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약해지심으로 인하여 그도 예수님을 죽으실 수 있었으니(고후13:4),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인류의 죄가 속량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신 것 때문에 예수께서는 때로는 다른 표현들을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13:16)",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14:28)" 그렇다. 신성만을 가지신 아버지는 제한이 없으시다. 하지만 고난받고 죽으시기 위해 모든 것(능력, 권세, 신성, 전지전능...)을 제한하신 예수께서는 재림하실 그날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권한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행1:7). 사실 재림은 예수님의 재림이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재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슥14:3~5). 그렇지만 이러한 문구들로 인하여, 여호와증인과 같은 이단은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들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전능한 창조주께서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오신 것을 두고, 예수님을 피조물로까지 낮춘 그들의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회개하면 이같은 죄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다.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할 수 없다).

 

5. 나오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사람되신 하나님이요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이며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때 당시 하나님을 볼 수 있었고 만져볼 수도 있었다(요일1:1). 하지만 육체를 입으셨던 시기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형님이요 선생님 정도로 알았다가, 예수께서 부활하시자, 그들은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무소부재한 상태로 출현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그분 앞에 완전히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다(요20:28). 심지어 예수님의 친동생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피조물로 격하시키지 말라.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로 말하지 말라.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해 부득이하게 취하신 그분의 낮아지심을 두고, 그분을 피조물이라고 운운하는 것은 신성모독죄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신조처럼 예수님의 나오심에 관하여 잘못 정의하는 것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아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심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아들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속에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아버지도 계시고 아들도 계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분 하나님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단지 우리 인간의 구속을 위해 무소부재하시고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 뿐이다. 우리를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 피흘리고 죽음 안으로 친히 걸어가신 우리 주 하나님,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하자. 그리고 그분만을 나의 주 하나님으로 모시고 섬기자.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이다.

 

 

 

 

  예수님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하나님이신가? 신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도 되시고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을 금방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적은 없으시다. 전부 다 간접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8:19)"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와 하나님이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의미에게 자신을 아들이라고 칭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옳을까? 놀랍게도 정작 예수님은 당신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간접적으로 말씀했지만,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요8:24,28). 왜 그러셨을까?

  여기서 우리가 우선 알아볼 것은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는가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했던 이유는 보통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율법을 어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주셨기 때문이다(요5:16,18). 구약시대에 안식일인데도 성전 안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에게 적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는 예수께서 성전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느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의 몸된 인격적인 성전을 가리키는 것임을 그들은 몰랐기 때문이다(요2:19). 셋째는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대들의 사고에 있어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사실 예수께서는 누구신가? 원래는 만세전부터 하나님이셨는데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옳은 것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생각에 예수님은 결단코 하나님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 서 있는 예수는 지금 사람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요10:33). 왜냐하면 그들에서 있어서 하나님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기꾼인가? 만약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닌데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내지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면 그는 희대의 사기꾼이 될 것이다. 혹 그분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하나님이시라면 이스라엘은 정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한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이신지 아닌지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 볼 수 있을까?

  첫째, 예수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그의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셨다. 예를 들어, 고칠 수 없는 문둥병자를 깨끗이 낫게 하셨고,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했으며,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내셨다. 또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도 하셨고, 말씀 한 마디로 나무를 뿌리 채 마르게 하기도 하셨고, 스스로 바다 위를 걸어오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처음 본 나다나엘의 과거를 이미 알고 있었고, 베드로가 3번씩이나 부인할 것도 미리 알고 게셨다. 예수님이 바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요 전능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준다.

  둘째,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어느날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행하셨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9:2)” 그리고 안식일에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12:8)”고 말씀하셨다. 대체 누가 안식일을 제정하셨는가? 그리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이신 것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셋째,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에 대한 모습과 예언이 어떻게 아들 예수에게서 나타났고 성취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먼저, 구약성경에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모습과 많은 물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승천 후 예수님의 모습이나 음성과 동일하다는 것이다(7:9,1:26~28과 계1:13,4:2, 43:2과 계1:15). 그리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백성들이 불렀던 찬송소리 곧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노랫소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다는 예언이었다(108:25~26). 그리고 구약시대 여호와께서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44:6,48:12)”고 말씀하셨는데,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께서도 이와 동일한 말씀을 그대로 하셨다(1:17,22:13). 요엘서에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2:32)”고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았다(22:16). 그리고 스가랴서에 보면, 천하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당신의 천사들과 함께 예루살렘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14:5,9), 신약성경에 보면 곧 재림하실 분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요(19:16, 살전3:13,4;14), 그분이 그의 천사들과 함께 감람산에 오실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1:9~12).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B.C.730년경에 장차 아기(baby)이자 아들(Son)로 태어나실 메시야는 전능한 하나님(God)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Father)라고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9:6).

  넷째, 결정적인 것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표적을 보여주셨다. 이것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의심과 거짓된 주장들은 한꺼번에 잠잠해졌다. 그분이 바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알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어느 초막절절기 때에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에게 당신이 누군신지를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바로 구약시대에 말씀하신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I am that I am)”라는 것이었다(8:24,28).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던 여호와시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하도록 명령하셨던 여호와께서 예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만났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였다.

  먼저, 예수께서는 당신이 육신의 모양을 하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음을 말해주었다(창18:1~2). 장막문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다른 두 명의 천사들과 함께 자기의 장막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즉시 달려가 여호와께 절하며, 여호와와 다른 두 명의 천사를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음식을 장만해서 드시도록 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다시 그에게 돌아올 것인데, 그때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후 정말 1년이 지나자 아브라함은 기적적으로 아들 이삭을 얻었다(21:1~2).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초막절날 예수님은 당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못하고 배척하는 유대인에게 이렇게 책망하면서 말했다.

8:39-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그들에게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8:56-58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나는 예흐예니라) 하시니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B.C.1446년경 모세에게도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지시하셨다음을 말씀하셨다(3:1~22). 그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말할 것인지를 묻자,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예흐예 아쉐르 예흐예)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예흐예 아쉐르 예흐예)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렇다. 예수께서는 지금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에 나타났던 여호와께서 바로 당신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에게 나타났던 여호와께서 바로 당신 자신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14:7).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이자,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2016-02-29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이시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요8;23~29).ts_00003263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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