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골리앗과의 싸움은 무모한 싸움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다윗이 승리한다. 그런데 다윗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있지 않았다. 골리앗은 블레셋나라의 싸움돋우는 자로서 거인이자 용사로서 정복불능의 전사였다. 그런데 다윗은 소년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그를 물리치고 만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싸움이 말해주는 3가지 잊지 말아야 할 3가지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2021-12-19(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무엘상강해(29) 다윗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거인 골리앗(삼상17:38~5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hJ8Vl_cVPY [ 혹은 https://tv.naver.com/v/24171270 ]

 

  다윗과 골리앗과 싸움, 사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은 중과부적의 적을 상대할 때에 적을 골리앗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믿는 이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단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의 한 장면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한 의도와 목적이 분명 있을 것이니 말이다. 대체 사무엘서의 기자는 무엇 때문에 이 이야기를 이처럼 자세하게 기록해 둔 것인가? 그리고 더불어 이 이야기를 통해서 누구든지 공부할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골리앗에서 비해서 턱없이 연약하고 부족했던 다윗이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들도 더러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2.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된 배경은 어떠했는가?

  지금까지 사울은 몇 번에 걸쳐 블레셋과 싸움을 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블레셋에 싸움 돋구는 자가 등장하여 이스라엘의 사기를 완전히 쏙 빼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 계산해보면,  사울의 나이는 적어도 65세는 되었을 것이며 많게는 70살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윗이 이 전쟁에 전사로 참여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것에서 가늠해볼 수 있다. 사실 다윗은 15세 정도였을 때에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사울에게서 하나님이 떠나가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역사하고 있었을 때에, 수금연주하는 자가 되어 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궁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윗의 악기를 연주할 때에 사울의 병은 그때마다 잦아들었고 왕은 기뻐하여 그를 자신의 무기드는 자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다윗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 형들의 안부를 묻고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세 형들의 병참식량을 전달하기 위해 전쟁터에 갔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다윗이 수금탔던 일들은 사울이 이상 증세가 나왔을 때에만 적용되었던 것 같으며, 사울왕의 무기드는 자도 여러 명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아니면 이번 시기에는 그러한 역할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민수기 1:3에 의하면, 다윗은 아직 어렸다. 왜냐하면 남자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나이는 20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 나가지 못했으나,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인하여 전쟁터에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때 적들에게서 싸움돋우는 자가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된다. 

 

3. 왜 이제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거인족이 이 전쟁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인가?

  사실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하러 들어갔을 때에 가나안 땅에는 거인족에 해당하는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영토 내에 있는 아낙자손은 전멸을 당했다. 그렇지만 블레셋 땅에 속한 가사와 가드 그리고 아스돗에는 그때까지 아낙자손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수11:22). 본문에 보니 골리앗은 가드사람이라고 나와 있다(삼상18:4). 그러니까 골리앗은 블레셋 나라 가드 땅에 살아남은 거인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번 전쟁에서는 대적의 왕들이 등장하지 않고 싸움돋우는 골리앗이 등장하여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는가? 그것은 이외로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신 목적이 있었는데 그가 자신이 받은 사명대로 살지 않으니 적이 득세하게 하신 것이요. 그렇게 설처대는 블레셋의 강한 장수라 할지라도 다윗이 나와서 물리치게 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왕으로 다윗을 선택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다윗이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이골이 나 있는 용사를 물리친다면 전쟁의 승리는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4.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3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웠던 이 싸움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앙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라고 믿었다. 그것을 그는 몇 번씩이나 말했다(삼상17:26,36,46~47). 하나님은 전능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다윗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의 새끼를 물어갈 때에도 따라가서 그 짐승들의 입에서 양을 꺼낼 수 있었으며, 또한 그 짐승들이 자기를 해하려 할 때에는 그것들의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일 수가 있었다. 특히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모욕하는 자는 가만 두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은 하나님께서 처리해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삼상17:36,45). 그러므로 다윗은 골리앗에게 나아가면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라고 했던 것이다(삼상17:45). 

  둘째, 다윗의 준비됨이 있었다. 다윗은 사실 전투경험은 없다. 하지만 그는 전투능력을 갖춘 자였다. 그에게는 2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첫째는 그의 담대함이었다. 그는 양떼를 해치는 사자과 곰을 만나서 그것과 대치할 때에도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둘째는 양떼를 이끄는데 필요한 물매를 던지는 능력이 탁월했다. 사실 목동에게 있어서 양떼를 제 길로 인도하려면 물매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멀리서도 양떼를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양떼를 이끄는 대장 숫염소가 있는데, 그 놈만 잘 관리하면 양떼를 관리하는 것이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물매로 돌을 날려서 대장 숫염소의 배를 맞추는 훈련을 많이 했을 것이요. 문제가 생기면 정확히 물매로 돌을 날려서 그 숫염소의 배를 맞추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왕은 골리앗을 상대할 이스라엘 병사로서 다윗을 보내야 했다. 그러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군복과 무기를 들게 했으나 맞지가 않았다. 다윗은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몇 걸음 걸어본 다윗은 사울의 군복과 장비를 벗어놓고 그냥 양치는 목동으로 모습으로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다. 양칠 때 사용하는 막대기와 물매만을 들고 나간 것이다(삼상17:40). 

  셋째, 적의 방심과 헛점이 있었다. 골리앗은 용사 중의 용사였다. 특히 어려서부터 그는 싸움꾼이었다(삼상17:33). 그리고 전쟁터에 나온 그의 모습은 철저히 전투장비로 무장한 것이었다. 먼저 그는 기골이 장대했다. 그의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약 2m80cm)이나 되었으며, 그의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 갑옷을 입었으며(갑옷 무게만 오천 세겔 곧 57.5kg), 두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찼으며, 어깨 사이에는 놋창을 그리고 손에는 창자루를 들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그의 칼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병기든 소년은 그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러니 과연 누가 이 장수를 무찌를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강한 자라도 헛점은 있게 마련이다. 그때였다. 소년 다윗이 그를 상대하겠다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니 골리앗의 눈에 소년 다윗이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겠는가? 그는 말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오느냐(삼상17:43)." 그러자 골리앗은 자신의 놋투구를 벗어서 땅에 내팽개치고는 다윗에게도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자 다윗은 물매에 엘라 골짜기에서 주운 돌멩이를 넣고는 빙긍빙글 돌리다가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던졌다. 골리앗의 다른 신체 부위에는 돌멩이가 치고 박힐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날 따라 놋투구를 쓰지 않았던 골리앗의 이마에 정면으로 돌멩이가 박혀버린 것이다. 그는 앞으로 쓰러졌고 이어 먼지가 날렸다. 그러자 다윗은 달려가서 그의 허리에서 칼을 빼서 그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보고는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는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스라엘과 유대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쳐부수었으니 가드와 에그론에 이르까지 그들을 칠 수가 있었다. 

 

5. 이 싸움이 말해주는 3가지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다윗이 골리앗과 치른 전투는 단순히 두 나라간의 전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진 신체적 조건과 전투장비로써 골리앗을 죽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싸우러 나갈 때에 그의 손에는 사실 칼도 없었다. 오직 다윗은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처리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영적 교훈이 있다면 우리도 그것을 가슴에 담아두어야 한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를 도와주시고 그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다윗이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믿음과 그분은 자기를 찾는 자들을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신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다윗이 평소 때 양떼를 짐승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싸운 경험이 없었거나 물매로 이끄는 숫염소의 배를 맞추는 실력이 없었더라면 이 전쟁에서 다윗이 승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평소때 사람은 아니었지만 양떼를 해치는 짐승들과 싸우면서 담대함을 갖게 되었고,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도와주시는 것이다. 

  셋째, 아무리 강한 적이라 할지라도 약점은 있다는 것이다. 골리앗이 강했고 단단한 무장을 했지만 그날 놋투구를 쓰지 않음으로 그날 골리앗은 죽고 말았다. 그렇다. 사탄마귀가 우리 인간보다 강할지라도 그들에게도 역시 약점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십자가에서 패배하여 무장해제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십자가에서 패배한 적이라는 것을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다윗은 이제 사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만한 재목감이라는 것이 이 전쟁을 통하여 입증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적의 장수를 칼이 없는 채 물리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대의 지휘관이 된 다윗은 가는 곳마다 적들을 제압함으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그 사명을 바톤터치하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으로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내는 일이었다(삼상9:16). 하지만 사울왕은 이제 그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의 반볼적인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셨으니 그가 바로 다윗이었던 것이다. 

 

6. 나오며

  우리는 과연 다윗이 이렇게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특히 다윗이 골리앗과 치르게 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가 아니었다면 과연 다윗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과연 다윗이 모든 이스라엘백성들로부터 칭송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같이 해 본다. 그렇다. 이 모든 배후에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적절한 시기에 당신의 사람을 세워 나가신다. 이제 사울은 더이상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지속적으로 당신의 말에 불순종하는 자를 들어쓰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다윗이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고 그가 자라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재목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다윗을 일약 이스라엘의 왕까지 생각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다윗은 사울왕의 시기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미움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다윗이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온전히 세워지기까지는 숱한 난관들을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을 잘 극복해나가게 된다. 이 뒷 이야기는 이 다음 시간에 기약해보자. 

 

 

2021년 12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것은 신앙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을까?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것은 이 세상사람들도 얼마든지 하고 있는 일들 중의 하나다. 어떤 사건이 실재 일어났던 일이었는 것을 여러 기록물들과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기록은 정말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일까?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고 그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놀라지 말라.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역사적인 이야기들은 단 하나도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다 실재했던 사건들을 기록해놓은 역사적인 기록들이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기록은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며, 부풀려서 써놓은 조작된 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그렇다고 증명해준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성경이 기록이 가짜라고 그 증거를 찾아서 보여주겠다고 한 자들은 다 성경이 얼마나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인가를 발견하고는 모두가 다 자신의 입을 다물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증거들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현대인들의 가장 큰 화두의 하나는 인공지능로봇이다. 과연 인공지능로봇이 언제 상용화되어 쓰일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결국에 우리 인간을 지배하려고 시도할 것인지도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지난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9단과의 바둑대국은 인공지능로봇이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 좋은 실례였다. 섬뜻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로봇이라 할지라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입력된 데이타 값이 없는데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를 지배할 수 있도록 가능성과 방법을 인공지능로봇에 집어넣지 않는 한 인공지능로봇은 그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그들은 결코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신적존재를 믿는 존재가 된다면 그들도 하나님께 기도할 것인데,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잘 안다. 그들이 아무리 기도해봤자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응답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에 결코 그들은 신적 존재를 믿거나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오직 자유의지를 가지고서 의지적인 결단을 할 수 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신앙은 대체 무엇이며, 오늘날 사람들이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것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살펴보아, 내가 어떻게 하면 더욱 더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역사적인 사실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역사적인 사실이란 역사 속에서 실재 있었던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지만 역사에 실재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했다고 후대 사람들이 조작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받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이 실재 있었다고 하는 증거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에는 그때 당시의 기록물이 있거나 유적이나 유물이 남아있다면 후대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실재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세종대왕께서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셨고 1446년에 반포하신 것은 역사적 사실인가? 역사적인 사실이다. 어떻게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했는지에 관한 소상한 기록물들이 존재하고 있고 지금 우리가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순신장군이 명랑해전에서 우리배 12척으로 왜놈배 333척을 수장시켰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인가? 그것도 훈민정음과 동일하게 이것도 역시 기록물들과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한다.

 

3. 성경에 기록된 사건은 혹시 조작된 이야기이거나 뻥친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을 믿는 것과 신앙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을 믿는 것은 간단하다. 정말 그 사건이 그 때 있었는지를 역사적인 기록물들을 찾아보거나 유적들과 유물들을 찾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지어낸 이야기일까 역사적인 사건이었을까? 예를 들어보자. 이스라엘 민족이 B.C.1877년 야곱의 인도를 받아 70명이 애굽(이집트)으로 이주하였고 430년이 흐른 뒤 B.C.1446년에 그것을 탈출하여 나왔다고 성경을 말한다. 그리고 그해에 애굽의 어마어마한 전차부대가 홍해에 빠져죽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이었을까?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조작된 이야기이거나 부풀려서 만든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어떤 몇몇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사를 해 보았다. 하지만 애굽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이야기는 기록해두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므로 종살이하던 히비루(히브리인들을 지칭하는 말)에 대한 몇 몇 기록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뻥친 이야기라고 했다. 소수 몇 사람의 이야기를 200만명의 이야기로 부풀려서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기록을 통해, 그 사건이 진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면 혹시 기록으로는 남아있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발굴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요셉의 곡식저장창고가 고스란히 거기에 묻혀 있었고, 애굽군대가 물에 빠져 죽은 자리에는 애굽의 전차바퀴가 3,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200만명이 이동하며 텐트를 치던 자리에는 돌무더기가 그대로 남아있었고, 그들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찧어서 음식을 만들어 먹던 절구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무도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를 뻥친 이야기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4.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다는 것과 신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다는 것과 신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역사적인 사실은 그때 그 사건이 실재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하지만 신앙은 다르다. 그때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기적과 같은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여하여 그분이 미리 말씀하신대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서,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도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일어나게 될 것임을 믿는 것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역사적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역사하신 그 흔적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것은 단순히 그때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만을 말해주지만, 그 모든 일들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역사하신 것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책을 신앙을 위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사건 속에 어떻게 개입하시어 역사하셨는지를 보여줌으로서, 혹시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능한 창조주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역사하시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을 믿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B.C.700년경 히스기야 왕 때에 남유다를 쳐들어온 앗수르군대가 있었다. 그런데 역사적인 기록(비문)에 의하면, 그때 앗수르군대가 전염병으로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 그들을 쳐서 하루 아침에 18만5천명이 송장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왕하19:35).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앗수르군대가 갑자기 급성전염병에 의해 몰살당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히스기야의 기도들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모독한 앗수르군대를 없애버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신앙인 것이다.  

 

5. 신앙과 관련하여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런데 성경의 구약과 신약은 적지 않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아직 육체를 가진 적이 없으셨기에,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말씀으로 사람들을 만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이스라엘과 관련된 대제국의 역사는 다 그분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게 되면 말씀에 기록된 대로 복을 주셨고, 그들이 말씀에 불순종하면 말씀에 따라 징계를 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면하고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왔던 이스라엘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우상을 만들어 섬기려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지만, 당신이 진짜로 존재하고 있으며, 당신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자로서 인류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직접 일에 착수했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으로 볼 수도 있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은 보이지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고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류에게 확증해주는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는 어떤 하나님의 역사가 간직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A.D.33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의 골고다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로마의 빌라도총독의 명령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은 삼일만에 다시 나타나셨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계속해서 있다고는 기록하고 있다(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제18장).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고전15:3~4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이 세상의 기록물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에는 놀라운 사실이 더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기는 죽었으나 그가 죽은 이유가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은 성경의 예언에 따라 우리 인류의 죄를 위하여 그분이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5:3). 그리고 그분이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기는 살아난 것이지만 그가 살아난 이유를 기록하고 있으니 성경의 예언에 따라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5:4).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과연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죽었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으며, 그분이 3일만에 살아난 것이 우연도 아니며 제자들의 착각이 아니라 진짜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는 방법을 통해서다. 하나님께서 창조주하나님으로서 모든 인류역사와 사건들의 주관자이심을 알려주시기 위해 미리 말씀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은 이미 수백 수천년전에 미리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죽으실 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기 천오백년전에는 유월절양으로(출12:5~8), 680년전에는 고난당하고 죽임당할 메시야로 미리 보여주시고 예언하신 것이다(사53:4~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의 죄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그분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분의 부활도 요나선지자의 예표를 통해 미리 예언되었음을 알고 그분을 믿게 되는 것이다(마12:39~40).

 

7.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것과 신앙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것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역사적인 사실은 남겨진 기록물과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어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면, 신앙은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일하신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인 사실은 과거의 현재의 사건들만을 다루지만 신앙이란 역사적인 사건 속에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앞으로 되어질 어떤 들이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약속하신 것이 있다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 것이다.

  셋째, 역사적인 사건은 오직 검증가능한 것들 즉 보이거나 만질 수 있거나 들을 수 있는 것을 다룬다면, 신앙은 보이지 않은 영적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을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사건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였음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앞으로 모든 것들도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주신다. 하나님은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병들었다고 하더라도 회개하고 기도하면 고쳐주신다. 우리가 회개학 때 우리의 죄들을 말끔히 씻어주신다. 우리가 믿음을 굳게 지키고 배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천국으로 맞아들이신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 때 충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그것에 합당한 보상(몫)을 주신다." 이런 것들이 저절로 믿어지는 것이다.

 

8. 나오며

  성경은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 없던 사건들을 조작해서 기록하거나 부풀려서 기록해놓은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은 세상에 일어난 사건들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건들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이루어진 것인지까지 기록해 두심으로써,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안 될 것이 전혀 없으며, 그분이 한 번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 아직 천국에 가보지 않았어도 천국에 있다는 것을 믿으며, 지금 내가 병들었어도 나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오 놀라운 신앙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전능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며, 오늘도 우리가 비는 우리의 기도까지 들어주시고 응답하신다고 하니 이 어찌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찬양하자!!!

 

2018년 8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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