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친동생이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는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왜냐하면 이 책의 기록 시기가 A.D.45~49년경이라고 보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유대인들의 유일신앙과 예수님에 대한 높여진 신앙고백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으며, 회당과 교회라는 공간이 동시에 등장한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고 야고보는 왜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시험과 은사 그리고 참된 경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인가?

2022-03-30(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2) 야고보가 말하는 시험과 은사 및 참된 경건이란 대체 무엇인가?(약1:13~2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EdhicFSo6Y [혹은 https://tv.naver.com/v/25953907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언제 쓰였을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쓴 책은 사도 바울이 쓴 '데살로니가전서'라는 책이며,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쓴 책은 '마가복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학자마다 저술 시기를 다르게 보기는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는 A.D.53년경에 쓰여졌던 것 같고, 마가복음은 70년경에 쓰여진 것 같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는 언제쯤 쓰였을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야고보서 1:1~12절의 말씀을 통하여 야고보서의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기록 목적을 살펴보았고, 시험을 당할 때에 성도의 신앙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었다.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두 번째 시간으로서 지난번에 다 나누지 못했던 야고보서의 개요 부분과 아울러, 야고보서 1:13~27에 나오는 말씀 곧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인 인간 내부의 욕심에 대한 경계(1:13~16) 및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사'와 '선물'(1:17~18) 그리고 말씀의 들음과 실천 및 오직 실천으로만 입증되는 참된 '경건'(1:19~27)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야고보서는 언제 쓰였는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맨 처음 야고보서의 저자 문제를 다루었다(약1:1).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다. 그는 A.D.49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총회에서 의장직을 수행하였던 자로서 초대 교회의 기둥과 같은 자였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둘째로,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군지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흩어져 있는 나그네'로서 유대인들이지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셋째로, 이 야고보서 편지를 쓰게 된 배경과 목적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2가지였다. 그것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 중에 이미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유대교에도 몸 담고 있으면서 부자로 살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가난한 형제들을 보고도 돕고 있지 않는 것을 책망하기 위해서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깊게는 이방인 지역에 이신칭의의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예수만 믿으면 어떠한 회개의 열매들이 없이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므로 그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지난 주 야고보서 개요 부분에서 함께 다뤘어야 했던 부분을 보충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는 대체 언제였을까?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는 보통 이른 시기로서 A.D.45~49년경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늦은 시기로서 A.D.60~62년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야고보가 A.D.62년경에 순교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쓴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내증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이 편지는 아무래도 A.D.45~49년경 곧 예루살렘 총회가 있기 전에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로, 이 편지에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A.D.49년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의 대표가 모여서 총회를 개최했다. 이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방인들도 역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함이었다(행15:1). 그때는 베드로와 야고보서의 발언권이 매우 중요했는데, 마무리는 의장격인 야고보가 하였다. 그는 주께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울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에게는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결국 이 총회에서는 야고보 안이 채택되었고 예루살렘 총회가 잘 마무리 되었다. 그러므로 만약 야고보서가 A.D.49년 이후에 쓰였다면, 그 편지에는 당연히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안도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야고보서에는 단 하나의 결정 사항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이 편지는 A.D.49년 이전에 쓰인 책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둘째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간의 갈등이 표출되기 전의 상황이 본서에 나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이방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회당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약2:2). 이는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많이 충돌하지 않은 시점인 것을 말해 준다. 

  

3. 야고보서가 쓰여질 당시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쓰여질 당시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먼저, 이때 야고보를 비롯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신앙관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도 불렀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대인이자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먼저 첫째로, 야고보가 하나님을 '만군의 주(여호와)'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나오는 아주 독특한 표현이다. 그런데 사실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사무엘상에서부터 등장하는 하나님의 칭호로서(삼상1:3,11),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하나님의 칭호다. 그런데 여기에도 그러한 표현이 나온다(약5:4). 또한 둘째로, 야고보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약2: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야고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빛들의 아버지'(1:16), '하나님 아버지'(약1:27), '주 아버지'(3:9)라고 표현한다. 이는 유대인들은 절대 사용할 수 없는 칭호로서,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칭호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인들이었던 성도들은 당시 하나님을 '만군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동시에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제는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주 예수 그리스도'(1:1), '영광의 주'(2:1),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5:7),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5:8)',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5:14), '주께서 그(병든 자)를 일으키시리라'(5:15)고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미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야고보를 비롯한 당시 믿음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이미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을 면류관과 같은 상주시는 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1:12).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장차 오실 '재림주'와 '심판주'로도 믿고 있었다(5:7~8, 9). 또한 그들은 그분을 '치유의 하나님'으로도 고백하고 있었다(5:14~15). 

 

4. 야고보서에서 인용되고 있는 구약성경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었는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약 15~20년 정도 될 무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때 당시에 야고보서는 회당 예배를 드리면서 구약성경의 말씀을 늘 들었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친히 하신 말씀은 직접 듣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구약성경을 그대로 인용한다. 최소 6군데에서 그가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한 구절로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표현(창15:6, 약2:23)이 나오고 있으며,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기록된 십계명의 말씀 중에서 '살인하지 말라'(출20:13, 신5:16,약2:11), '간음하지 말라'(출20:14, 신5:17, 약2:11)는 말씀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는 레위기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약2:8). 그리고 그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는 표현을 이사야 40:8에서 가져왔으며(약1:11),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표현을 잠언에서 가져온 것 같다(잠3:34, 약4:6).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야고보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마5~7장)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대로 인용한 말씀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읽으면 그것이 산상수훈의 말씀이라고 그냥 생각되어지는 말씀이 무려 21군데나 된다. 이는 당시 야고보가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서와 똑같은 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사용하고 있지만,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야고보에 등장하는 말씀과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이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5. 사람이 시험받는 원천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과연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일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야고보는 1:2~12의 말씀을 통하여 시험을 당할 때에 성도가 취해야 할 신앙 자세를 언급한 바 있다. 이어지는 1:13~18절의 말씀에서 야고보는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이 인간 내부의 욕심(욕망)에 있음을 경고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한 것들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면서 동시에 사람을 시험하지도 않으신다고 말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각종 좋은 은사와 선물들을 하늘로부터 내려 주시는 분이며, 성도들을 피조물들 가운데 첫 열매로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고 있는 대목을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있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창22:1)" 또한 사무엘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격동시키어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는 말씀도 나온다(삼하24: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들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고 또한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시험 중에서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렇다. 시험('페이라스모스')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세 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 중에서 아브라함을 시험한 그 시험은 '테스트(test)'로서의 시험을 가리키며, 야고보서 1:2~3에 나오는 시험은 '시련(trial)으로서의 시험'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여 죄짓게 하기 위해 시험하는 것 같은 시험(temptation)을 하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좋은 은사와 선물을 주시고 거듭남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6.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와 성도의 경건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하는가? 야고보는 1:19~25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신중하게 들어야 함과 들은 바는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한다. 왜냐하면 이 편지의 수신자였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일부가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책망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도는 듣기는 신속히 해야 하지만 말하기도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권면한다(1:19). 왜냐하면 사람이 분노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1:20).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더러운 말과 넘치는 악을 버리고 온유함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1:21).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마치 자기의 얼굴이 더러운지 아니 더러운지를 거울을 보고 알게 되지만 돌아가서는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도 같다는 것이다(1:23~24). 그러므로 진정 복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가 진정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1:25).

  이어서 야고보는 실천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믿음의 한 예로서, 유대인들이 옛날부터 실천해 오고 있는 '경건 생활'의 예를 하나 든다. 만약 어떤 성도가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말은 하는데, 자기의 입술을 재갈물리지 않은 채 말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는 것이다(1:26).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경건은 고아와 과부들과 같은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지켜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1:27). 오직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말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7. 나오며

  야고보는 초대 교회가 탄생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12사도들은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안에 남아 있어 신앙 지도를 해야 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삶은 기독교 내에서만 인정받았던 신앙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존경받는 신앙인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지켜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도 그를 '낙타 무릎'을 가진 자라고 표현하였으며, 그를 '의인 야고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으면 그러한 별명이 붙었겠는가? 그는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의 눈으로 볼 때에도 역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였던 것이다. 그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그러한 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하라고 권면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기도 생활을 철저히 실행에 옮겼던 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은 유대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도 의인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야고보가 염려했던 것처럼, 믿음은 갖고 있지만 열매가 없는 사람은 아닌가? 야고보는 말한다. 믿는 것은 귀신들도 잘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2:17).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2:14). 우리를 돌아보자.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역시 귀로 듣기만 한 채 아무런 열매가 없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러면 우리의 경건은 헛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 회개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의 삶을 살아 보자. 그것만이 내 영혼이 살 길이요 내 영혼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구원의 생명길이기 때문이다. 

 

2022년 03월 30일(수)

정병진목사

 

보통 그리스도인들에게 '야고보서'하면,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이신칭의의 복음과 충돌되는 책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 책은 그러한 책인가? 이 책은 정말 사도적인 저작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책이며, 성경책에서 빼어버린다고 할 지라도 별 문제가 없는 책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 말씀이 산상수훈 곧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보서를 왜 하나님께서 성경책으로 주셨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야고보서강해의 첫번째 시간으로 야고보서의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특히 이 책의 저술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2022-03-23(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1) 야고보서 대체 어떤 책인가?(약1:1~12)_2022-03-23(수)

https://youtu.be/ohj4thygcaY [혹은 https://tv.naver.com/v/25816992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어떤 책인가? 야고보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서신서에 해당한다. 그리고 서신서 중에서도 일반서신에 해당한다. 사실 서신서는 바울서신과 나머지 일반서신으로 나누는데, 바울서신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며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고보서는 야고보서가 쓴 1권의 책이니까 적당히 넘어가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27권의 신약성경을 주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서신서에도 균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서신과는 상당히 차이나는 일반서신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은 일반서신 중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다루려고 한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서, 저자인 야고보는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이며, 무슨 목적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서 1:1~12까지에 나오는 시험(시련)을 대하는 자세와 시련을 이기는 방법 그리고 시련을 이겨낸 자가 받게 될 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많은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2. 야고보서는 누가 쓴 책인가?

  야고보서는 대체 누가 쓴 책인가? 우리는 야고보서 1:1에서 이 책을 쓴 저자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였던 '야고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맞다. 그럼, '야고보', 그는 누구인가? 과연 그는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야고보중의 한 사람인가 아니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제3의 인물인가? 혹 그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라면 그는 대체  여러 야고보들 중에 누구인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야고보'에는 약 네 명의 인물이 있다. 그중에 3명이 알려져 있는데, 첫번째로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 알패오의 아들인 야고보도 있다. 이는 보통 '작은 야고보'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도 있다. 그런데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A.D.44년에 제일 먼저 순교자가 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행12:2). 그리도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막3:18)가 있기는 하지만 그의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A.D.62년경에 순교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갈1:19, 마12:46~50)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주의 형제 야고보, 그는 예수께서 살아있을 때에는 불신자였다(요7:5).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개인적으로 목격한 이후에(고전15:7),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가의 탄생하고 스데반의 순교하자 대부분의 사도들은 흩어지고 그 책임을 야고보가 맡는다. 그래서 A.D.49년경에 있었던 예루살렘 공의회에 의장역할을 맡는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기둥같은 인물이었다(갈2:9). 유다서의 저자였던 유다가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할 정도로(유1:1), 야고보는 초대교회 당시 널리 알려진 초대교회의 핵심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야고보서를 기록한 것이다. 그가 A.D.49년에 안디옥과 스리아와 길리기아에 보낸 편지의 흔적이 사도행전 15장에서도 나오는데, 그때도 약1:1에 나오는 인삿말처럼 "문안한다"라는 말을 부정사 형태로 언급한다(행15:23). 그럼,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누구에게 왜 이 편지를 써 보낸 것인가?

 

3. 야고보서는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그럼, 야고보는 누구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인가? 야고보서 1:1에 의하면, 그는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12지파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흩어짐('디아스포라') 안에 있는 자들인 열 두 지파들"이다. 그런데 사실 야고보가 이 편지를 보낼 당시에 이스라엘은 3개의 지파만이 남아 있었다. B.C.722년 이후 북이스라엘의 10개의 지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9개 지파인데, 므낫세 지파가 요단강을 중심으로 반지파씩 땅을 분배받았기에 10지파로 본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이스라엘이 12개의 지파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3개 지파에 있어서 두 번의 '디아스포라'(흩어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B.C.586년에는 남유다가 느부갓네살에게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 거기에서 정착하여 살면서 점차 전 세계로 흩어졌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신약시대에 스데반의 순교이후(행8:1)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로마 제국의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두번째의 디아스포라 사건으로 전 로마제국의 각지에 흩어진 성도들을 가리켜, '흩어짐' 안에 있는 12지파들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예수를 믿는 예루살렘의 유대인이자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편지를 보낸 대상은 전세계로 흩어진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4. 야고보는 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왜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108구절을 전부 읽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유가 한 가지 있고, 감추어진 채 있는 이유가 또 하나다. 먼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는 로마의 각지로 흩어져있는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들을 책망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 각지로 흩어젼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 원래는 유대인들이었기에 로마 각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나간다. 그런데 이 때 2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호감을 갖고 받아들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배척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전자는 주로 부자들이었고 후자는 주로 가난한 자들이었다. 유댕인들은 A.D.70년 나라가 멸망한 후에 거의 다 죽고, 약 10만명 정도가 포로가 되어 로마에 이송된다. 그들의 자손들은 노예생활을 하면서 점차 자유인이 되어갔고, 바벨론 포로이후에 자유민이었던 유대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돈을 버는 것이었다. 나라는 이미 망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들에게 가나안땅을 되찾게 해 줄 것이라고는 믿음으로 돈을 준비한 것이다. 그래서 세금을 많이 바치는 유대인들은 로마인들도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회당으로 들어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부자들인 자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배척을 받았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배척받고 있는 비천한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리고 부자들이었지만 가난한 형제를 돕지 않는 부자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부자들에 대한 언급이 세 번이나 나온다(약1:9~11, 2:1~9, 5:1~6). 그런데 갈수록 그 강도가 세진다. 즉 처음에는 부자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가진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약1:9~11). 왜냐하면 부요함은 풀의 꽃과 같아서 금방 시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두번째로 부자들을 언급할 때에는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고 홀대했던 것을 책망하기 시작한다(약2:1~9).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부자들을 언급할 때에는 그들에게 임할 책망과 진노를 강하게 말한다. 그들이 말세에 재물을 쌓았으니 하나님을부터 불의 심판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야고보서 이 편지를 쓰게 된 첫번째 이유다.

  그런데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게 된 두번째의 숨겨놓은 동기가 있다. 그것은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형제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처음에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증거가 되었지만 점차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음식을 가려먹지 않고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자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교회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도 받고 믿음만 있으면 어떤 죄를 지었든지 다 용서받는다는 교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마디로 사도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서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데에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이 잘못 와전되어 전달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했지만 여기서 이방인들이 지키지 않아도 될 '율법의 행위들'은 전부 의식법(제사법, 절기법, 정결법, 할례법, 음식법)이었던 것이지 한 번도 도덕법인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방인들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예수님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그만 여기에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형제사랑을 실천하지 않아도 예수님만 믿고 있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는 자신의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되어 있다. 특히 객과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일은 반드시 실천하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야고보서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엄하게 책망한다. 행위들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말이다. 그러한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도 없다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두번째 저술 목적인 것이다. 

 

5. 야고보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1:1~12에는 어떤 말씀인가?

  야고보서는 얼핏 보면 중구난방식(衆口難防)으로 쓰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뚜렷한 구조나 체계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이 서신서에 속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시작 부분의 한 개 구절에서만 '문안인사'라는 형식을 갖추고 쓰고 있을 뿐만 서신형식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또한 내용도 단편적인 교훈들이 산재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야고보서도 일정한 구분이 지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야고보서는 3가지 주제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의 첫번째 부분(서론)은 '시험(시련)"이고(약1:1~18), 두번째 부분(본론)은 "믿음과 행함"부분이며(약1:19~5:6),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부분(결론)인 "고난"의 문제를 각기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첫번째 부분(서론)(약1:1~18)을 살펴보면, 이 부분의 주제는 "시험에 의해 검증되는 참된 믿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야고보는 시험에 대한 성도의 바른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약1:1~18의 첫번째 부분(서론)을 나눠서 보면, 첫째로, 1~12절에서는 시험 곧 시련을 당할 때의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 13~18절에서는  사람이 시험 곧 유혹을 당하는 원인은 인간 내부의 욕망에 있음을 지적한 이후 진정으로 좋은 은사와 선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임을 교훈하고 있다. 특히 1~12절에서는 이 편지를 보내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문안인사(1절) 후에는 시험 곧 시련의 시험을 당할 때의 성도의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2~12절). 이때  야고보가 제시하는 성도의 자세는 4가지다. 첫째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2~4절). 둘째는 하나님께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5~8절). 셋째는 가난한 자는 오히려 당당해지고 부한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9~11). 왜냐하면 부함은 풀은 마리고 꽃이 시듦같이 금방 쇠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째는 시험을 이긴 자에게 주시는 복 곧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임을 말하고 있다(12절). 그리하여 성도들이 시험중에 있더라도 끝까지 인내로 시험을 극복하고 승리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6. 나오며

  야고보서는 성도들에게서는 보통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을 말하는 책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서를 과연 누가 썼으며, 어떤 대상에게 썼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맥락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과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충돌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바울의 이신칭의와 야고보서의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다른 평행선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의 복음은 신앙의 여정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서신이라면, 야고보서는 신앙의 여정을 다 마치려할 즈음에 필요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과 야고보의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편만을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서신서를 읽고 싶다면, 사도바울의 책(12권)만을 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와 상반되는 책으로 간주되는 일반서신의 책도 같이 읽어야 한다. 특히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일이삼서를 읽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신앙의 여정을 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차 들어갈 천국을 대비해서도 동시에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오늘날처럼 한 번 믿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되며, 한 번 믿으면 과거에 지은 죄와 현재 짓고 있느 죄와 미래의 죄가 다 사함받을 것이라고 믿는 이 세대 사람들을 깨우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바른 구원관과 율법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산상수훈의 중요성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야고보서라는 성경 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2022년 03월 23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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