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쓴 시편 65편은 어떤 노래인가? 그는 왜 시온에서 찬송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는가? 그리고 주님의 택함을 받은 자 그리고 주님 부르실 때에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는 왜 천국에서 복된 자라고 언급하였는가? 시온산과 그리고 주의 성전과 주의 궁전은 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가? 내가 천국에서 복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영광과 신분의 비밀이 놀랍게도 시편 65:1~4의 네 마디의 말씀 안에 다 들어있다.

 

2022-06-26(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주님의 뜰에서 살게 될 하늘에서 복 있는 자(시65:1~4)_2022-06-26(주일)

https://youtu.be/3Am7Mhu5huY  [혹은 https://tv.naver.com/v/27599540 ]

 

1. 들어가며

  시편은 어떤 책인가? 그것은 자신의 살면서 경험했던 간증을 기도나 시 그리고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은 그저 단순한 시가책이 아니다. 어떤 것은 자신이 체험한 깊은 영적인 것들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도 더러 있다. 그러므로 시편을 시편답게 설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우선적으로 시편은 메시야 예언을 많이 담고 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그는 적어도 시편 25개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수록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도 부활 후 제자에게 구약성경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24:44)"고 하셨다. 그리고 시편은 만약 본인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영적인 비밀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장차 이루어질 천국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아울러 심지어 천국에 있는 생명책과 눈물병까지도 기록해놓고 있다. 특히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도 기록해 놓았는데, 회개 없이는 결코 사람의 죄가 용서될 수 없음과 아울러 의인과 악인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경험을 많이 한 후에 이 시편을 읽고 또 묵상하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65편은 대체 어떤 내용이 기록된 것인가? 그리고 이 시편이 말씀하고 있는 장소로서 '시온'과 그리고 '주의 뜰, 주의 집, 주의 성전'이라는 대체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가? 그리고 시편 기자는 하늘에서 어떤 사람이 복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렇게 복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2. 시편 65편의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에게 시편 65편은 주로 2개 구절이 설교 본문으로 자주 등장한다. 첫째는 2절 말씀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65:2)" 그러므로 2절 말씀은 주로 기도회 때 애용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육체이든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임을 전하려 할 때 이 본문을 사용한다. 그리고 둘째는 4절 말씀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이 말씀은 주로 헌신예배 때에 사용되는 말씀으로서, 설교자들은 '주의 뜰, 주의 집, 주의 성전'이 오늘날 '교회'라는 의미라면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신다는 본문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적용은 가능한가? 그렇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은 이 말씀에 대한 적용의 하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진정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분이 들으신다는 것이며, 주의 몸된 교회에서 봉사해서 복을 받으라는 말씀인가? 그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쓴 시편기자가 진정 무엇을 말하려고 이 본문을 썼는지를 찾아가고자 한다. 참고로, 시편 65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1~5절까지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고, 6~8절은 '창조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9~13절에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곧 '시혜자이신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시편65편 기자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이 시편을 쓴 것인가?

  이제는 우리가 시편 65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이 시편은 누가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썼는지를 먼저 살펴 보자. 시편들 가운데에는 그 시편이 어떤 상황이나 사건 가운데 썼다는 기록들을 가지고 있는 시편들이 있다. 예를 들어 시편 51편 같은 경우는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에 그에게 왔을 때'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어, 이 시편이 어떤 상황과 배경하에 썼는지를 가늠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시편 65편은 그 배경을 알가 쉽지 않다. 표제어에 설명이 붙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노래는 표제어에는, 다윗이 지은 시편으로서 성가대의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시편은 다윗이 쓴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다윗시대에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같은 어떤 지휘자를 따라 불렀던 노래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시편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 보면(나중에 더 자세히 보겠지만) 다윗이 어떤 깊은 영적 체험을 하고 쓴 것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편은 다윗이 자신의 말년의 어떤 시점에 구원자요 창조주와 시혜자이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예배자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4. 시편65편의 1~4절의 말씀은 다윗의 어떤 영적 체험을 기록한 것인가?

  그렇다면 시편 65편 1~4절의 말씀은 다윗의 체험한 어떤 장면을 기록한 것일까? 얼핏 보기에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는 자 곧 그분의 성전에 사는 자가 복있는 자라는 것과 주의 뜰과 주의 집과 주의 성전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는 주님 가까이 나아가며 그에게 찬양을 드린다는 표현을 보고, 혹시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는 제사장들이 복 있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 짚은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제사장이 아닌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는 유다지파 사람으로서 왕이 되었기에,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자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지금 땅에 있는 지상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다윗시대에는 지상에 성전이 없었다. 다만 펄럭이는 휘장 가운데 법궤를 안치하고 있었을 뿐이다. 또한 그가 1절에서 '시온에서 찬송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을 보자. 이것은 제사장이 제사를 집례하는 상황이 아니라 어떤 잔치와 같은 상황에서 자기의 순서가 되어 찬송하기를 기다리는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으로는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주의 성전'이라는 표현은 '주의 거룩한 궁전'이라고 쓰여있음을 본다. 여기서 '궁전(헤칼)'이라는 말은 주의 집과 주의 뜰이 바로 제사드리는 곳이 아니라 왕이 거주하는 처소로서 궁전이나 궁궐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시편 65편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제사드리는 공간이 아니라 성도가 주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왕의 처소 곧 왕의 궁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다윗은 대체 주의 궁전에서 무엇을 체험한 다음에 이 시편을 쓴 것인가?

 

5. 다윗은 과연 누가 복 있는 자가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다윗은 이 시편에서 누가 복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그것을 딱 2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장차 시온에서 주님께 찬양을 부르게 될 자들이 복 있는 자라고 했다(1절).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서원이 당신에게 [장차] 완성될 것입니다(1절, 히브리어 직역)" 그는 자신이 서원하여 기도했던 어떤 것이 이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분이 행하신 일을 찬양하기 위해 그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다윗은 지상에 있는 성전에서 서원제에 감사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가 생전에 왕으로 있을 때에 시온산에는 아직 성전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인가? 그것의 힌트는 '시온'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다. 여기서 '시온'이라는 단어는 시온산을 가리키는 말로서,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예루살렘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 그때에 가나안의 여부스 거민에게서 빼앗아 자신의 왕궁으로 삼은 산이 바로 시온산이었다(삼하5:7). 그런데 자신은 생전에 시온산에 성전을 짓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언급한 시온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장차 들어가게 될 하늘의 시온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땅에 있는 시온산도 처음에는 다윗이 빼앗은 예루살렘 동남쪽의 작은 공간만을 가리켰으나, 나중에는 예루살렘의 동쪽의 대부분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예루살렘 도시를 대신하는 용어로 확대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지도를 보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안에 시온산이 있으며, 시온산 안에 다윗의 궁전(궁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장차 성도가 들어갈 천국이 시온산과 예루살렘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즉 현재 천국은 거대한 정방형의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성 한 가운데에 '시온산'이 있고, 시온산의 한 중앙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나님의 처소가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 중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천국에 시온산이 있다는 것을 이미 언급한 바 있으며(히12:22), 사도 요한도 천국에 올라가서 시온산에 144,000명의 성도들이 서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 광경을 기록해 놓았다(계14:1). 고로 시편 65편은 하늘에 있는 시온산에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광경을 그대로 묘사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고로 이 시편은 하늘의 시온산에서 예배하는 성도들이 자신이 찬양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시온산 안에 있는 주의 궁전의 주의 뜰 안에 거주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다(4절). 이때 다윗은 누가 천국에서 복있는 자인지를 좀 더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것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시온산 그리고 시온산에서도 주님의 처소, 주님의 처소 중에서도 주님의 뜰 안에 거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거주하다'는 히브리어 동사를 보면, 그 의미가 일시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혹은 계속적으로 거주한다는 의미 곧 '정착하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예배드릴 때만 한 번 주의 뜰 안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아예 거기에서 거주하여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누가 복 있는 자인지는 자명하다.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주의 궁전의 뜰 안에 거주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주의 궁전의 뜰은 어떻게 생겼으며, 누가 과연 그 뜰 안에 거주하게 되는 것일까? 참고로, 히브리 어원문을 보면, '뜰'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기재되어 있다. 즉 주의 뜰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인 것이다. 

 

6. 하늘에서 주의 궁전과 주의 뜰은 어떻게 생겼는가?

  천국에서 하나님의 처소는 새 예루살렘 성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 볼 때에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시온산을 가리키며, 더 좁게는 시온산 안에 한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주님이 계시는 천국의 뜰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나누어져 있을까? 그것의 예표는 바로 '성막'이자 '성전'과 같다. 왜냐하면 3절 말씀에 보니 그곳이 죄를 사함받는 장소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성경에 나온 바에 따르면, 주의 궁전의 모습은 주님이 모세에게 이 땅에 성막을 지으라고 함으로서 그 모습이 점차로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막은 그 뜰을 한 개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안뜰'이라는 뜰이다. 그런데 솔로몬 시대에 최초로 성전이 지어지는데, 이때 솔로몬 성전은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설계도를 받아서 지은 성전으로서 이 성전에는 뜰이 2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안뜰'과 '바깥뜰'이다. 그런데 이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후 다시 지어졌는데, 두번째로 지어진 성전은 뜰이 무려 4개가 되었다. 성소가 없는 바깥뜰에는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이라는 뜰이 있었고, 성소가 있는 안뜰에는 '이스라엘(남자)의 뜰'과 '제사장의 뜰'이라는 뜰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뜰의 구분이 천국에 가면 자신의 신분에 따른 거주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막에도 나오고, 에스겔성전 환상에서도 나온다. 도표로 정리하면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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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누가 주의 성전의 뜰에서 살게 되는가?

  그렇다면 누가 성전의 뜰에서 살게 될까? 성전의 뜰을 넓게 본다면 새 예루살렘 성전 전체를 가리킬 수 있지만, 작게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 주변만을 가리킬 수 있다. 사실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가 살 장소는 이미 구획으로 정해져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구획을 넘어서 다른 곳으로 갈지라도 그곳에 집을 짓고 살 수는 없다. 그것은 행한대로 갚아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주의 뜰에 정착하여 살게 되는가? 누가 더 주님 더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4절 말씀에 그 조건이 2가지로 나온다. 

  첫째, 우선적으로 그곳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아서 이 땅에 보내어진 자들이 살게 된다(시65:4). 시65:4의 말씀을 히브리어로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시65:4[직역] 당신이 택하시고 있고, 가까이 오게 하시고 있어서, 당신의 뜰들 안에 [장차] 거주하게(정착하게) 될 사람은 복된 자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집 곧 당신의 거룩한 궁전(왕궁)에 좋은 것으로 [장차] 만족할 것입니다. 

  그렇다. 주의 뜰들(안뜰과 바깥뜰 혹은 4가지 뜰들) 안에 들어가서 정착하며 살게 될 자들은 두 종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는 주님이 택하신 자들이다. 이들은 주님께서 영혼을 이 땅에 보내기 전에 천국의 낙원에 있는 영혼을 불러다가 사명을 주어 이 땅에 보낸 자들이다. 이 땅에는 그러한 자들이 시대마다 있었다. 본문을 보니, '택하신다'는 동사의 시제나 '가까이 오게 하신다'는 동사의 시제나 둘 다 '미완료'구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때도 그렇게 하셨지만 아직도 그렇게 하시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그럼, 구약시대에는 누가 택함을 받아 성전에서 봉사했는가? 그것은 단연코 제사장들이었다. "여호와께서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만이 주의 뜰 안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출19:22). 그중에서 대제사장은 성전의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제사장은 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이 땅에 보낸 사명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자신이 제사장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께서 12제자들을 선택하실 때에 그들이 제자가 되고 싶다고 제자가 된 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 주님께서 그를 지명하여 불러서 당신의 제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토기장이신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롬9:20~21)

  둘째, 주님께서 가까이 오라 하실 때에 그렇게 주님께로 나아가서 쓰임받는 자가 그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초청을 받을 때에 그 초청에 응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주님 나라에서 일하라고 초청받을 때에 그대로 응하면 된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타락할 때에 하나님께서 제사장은 아니지만 '나실인(일정 기간 동안 자신을 구별하여 주님께 드리는 사람)'을 써서 그로 하여금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구약의 삼손이나 사무엘은 나실인이었으며, 세례요한과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나실인이었다. 유다지파 사람이었던 예수께서도 원래는 대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율법의 나실인 규정을 따라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나실인으로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쓰임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딱 2가지다. 첫째는 주께 기도하여 자신을 서원제로 드리는 자가 그렇게 쓰임받을 수 있다(1~2절). 즉 서원하여 자신을 주께 드리기로 결정한 자가 그렇게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다윗도 역시 유다지파 사람으로서 제사장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사장이 죽고 거의 없어지자, 다윗도 기도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뤄드리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신을 주께 드리기로 서원한 바 대로 주님께서 그에게 이뤄주셨으니, 이제 주님께 드릴 찬송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1절). 둘째는 제사장이 아닌 세속에 속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한 자가 그렇게 쓰임받을 수가 있다(3절). 죄악된 말과 죄악된 행동을 하는 죄인일지라도 속죄를 통해 죄용서를 받은 자라면 그도 하나님께서 쓰임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8.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주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어도 좀 더 주님의 지성소 가까이에 들어가서 그곳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로 나와 있다. 하나는 그가 만일 주님으로부터 택함받아 이 땅에 보내어진 자라면 그는 주님이 맡겨주신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종으로 부름받은 자라면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거기에 잘 나와 있다. 만약 하늘에서부터 이 땅에 사명을 받아서 내려온 자라 할지라도 그가 만약 악하고 게을러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는 새 예루살렘 성밖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절대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은 주님이 주시지만 그것을 행하느냐 마느냐는 본인의 결정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실인처럼 서원기도로 통해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는 자는 날마다 자신을 회개하여 깨끗한 그릇으로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믿고 회개하여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나실인처럼 드리고 싶어하는 성도들이 더러 있다. 그러면 그는 먼저 더러운 자신을 더욱 더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결국 죽어서 거룩한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누가 더러운 자신을 깨끗하지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을 주께 드리면, 그는 결국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시편 24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산(시온산)에 오를 자가 과연 누구이며, 그의 거룩한 곳(지성소)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24:3). 이어 그는 손(행동)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시24:4). 그렇다. 회개가 관건이다. 회개를 통해 깨끗한 그릇이 되기만 하면 더욱더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주님의 지성소 가까이 나아가 예배하고 거기에서 정착하며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9. 나오며

  다윗은 그때에 이미 본 것이다. 다윗은 장차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어느 위치에서 예배를 드리며, 또한 어떤 처소에서 영원히 거주하며 살게 되는지를  본 것이다. 다윗이 시편 65:4에 언급한 "주의 뜰들"은 바로 성도들의 신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의 뜰을 넓은 의미로 본다면, 그곳은 새 예루살렘 성 전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좁은 의미로 본다면, 주님의 보좌 가까이 위치한 지성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우리가 어떤 장소에 앉아 예배를 드리며, 그리고 어디에서 거주하게 될른지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택정함을 받아 천국을 전파하도록 이 땅에 보내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서원기도를 통해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정해서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미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는 자신의 직분에 충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밖으로 내어쫓겨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옥에도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천국복음을 듣고 주님의 사역으로 초청을 받은 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드릴 것인가를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적당히 살다가 간신히 턱걸리로 천국에 들어가 성벽 주변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이 땅에서 주님께 서원하였던 것을 잘 이뤄드려 주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살 것인지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한 것이 없는데 그가 보좌 가까이에 가서 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다 자신이 행한대로 보상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더 보좌에 더 가까이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것은 누가 더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드리느냐 하는 것이다. 고로 이것 역시도 회개가 관건인 것이다. 날마다 회개하자. 그래서 주님께 깨끗한 나실인으로 주님께 자신을 드려 영원히 영광스러운 신분을 준비하여 천국에 들어가자. 

 

2022년 06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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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02) 모리아산과 여호와이레가 들려주는 주님처형장소의 비밀(창22:9~14)_2021-05-21(금)

https://youtu.be/UzTu0opjFws  [혹은  https://tv.naver.com/v/20318677 ]

 

1.창세기 22장의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창세기 22장의 주제는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귀결됩니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이 뒤따른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좀 달리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 것인지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메시아의 죽음에 관한 모형론적 사건인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속죄의 어린양으로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창18:10,14, 22:2,8,14).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아들 이삭을 어디에서 바치라고 명령하셨나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즉 그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어디로 가서 바치라고 했을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곳을 "모리아산"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하는(지시하는, 일러주는) 하나의 산, 거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창22:2).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서 바치라고 한 것이지 모리아산(지금의 '성전산')에서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리아 땅에는 적어도 2개 이상의 산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땅의 어떤 한 산으로 가서 거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한 것이 팩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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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수풀에 걸린 숫양으로 제사를 드린 장소를 어떻게 명명했나요?

  모리아 땅은 모리아산(지금의 '성전산')보다는 조금 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산으로 올라가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쳤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막으셔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숫양을 대신하여 번제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 산(모리아 땅에 있는 하나의 산)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습니다(창22:14). 여기까지는 모두가 팩트(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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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더러 굳이 모리아 땅에 있는 어떤 산(나중에는 "여호와이레"가 됨)에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당시 아브라함이 줄곧 거주해온 곳은 "브엘세바"였습니다. 그곳은 유다남부지역에 있는 것으로 블레셋과 가나안땅 사이의 경계지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서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모리아산은 지금은 '성전산'(해발 741m)으로 불리는 곳으로서, 브엘세바에서 약 86km(직선 75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굳이 이삭을 모리아 땅의 한 산에에서 바치라고 한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곳이 바로 장차 예수님께서 속제제물로 죽으실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일종의 예행연습을 한 것입니다. 그 산(하나님이 지시한 한 산)은 지금 우리에게는 "골고다(해발 777m)"라고 알려진 바로 그 장소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모리아 땅에는 2개의 산(봉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의 '성전산'이라고 일컫는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모리아산'이라고 지칭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 바깥 북쪽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소로서 오늘날 "골고다"라고 일컫는 산(언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땅에 있는 바로 그 산(골고다)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8장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이삭"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실(성육신하실) 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들로 오실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창18:10,14). 

  그런데 1882년의 일입니다.  영국의 찰스 고든 제독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골고다를 처음으로 예수께서 처형하신 장소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이전 사람들은 예수께서 처형되신 장소를 어디로 알고 있었을까요? 그곳은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정한 곳으로서, 지금의 성묘교회(예루살렘 성전 밖의 서쪽에 위치)가 있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요19:17에 말씀에 따르면,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입니다. 헬라어로는 "해골"이라고 하는 장소입니다. 그러자 이것을 근거로 영국의 고든 제독이 그 장소를 추척한 끝에, 결국 해골모양을 하고 있는 지금의 "골고다"가 바로 예수님의 처형장소인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장소로서, 모리아 땅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바로 그 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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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 사용된 지도 전부보기] https://dongtanms.kr/72621

  

5. 히브리어 "모리아"와 "여호와이레"가 가르쳐주는 예수님의 비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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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더러 이삭을 바치게 했던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셨을까? 그것은 장차 아버지께서 아들로 오셔서 인류의 속제제제물이 되어 죽으신다는 것을 알려주려 하신 것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모리아산 이삭 번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모리아"는 무슨 뜻이며, "여호와이레"는 또 무슨 뜻일까요?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은 그 의미를 금방 눈치챌 수도 있겠지만, 한글과 영어성경만 알고 있는 분은 아무리 성경을 읽어보아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리아"가 무슨 뜻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여호와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는 뜻 정도만 알고 있엇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 단어는 사실 동일한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모리아"의 정확한 발음은 "모리야흐"이며, "여호와이레"의 정확한 발음 역시 "여호와이르에"로서, 둘 다 동사 "라아+여호와(혹은 여호와+라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라아"라는 동사는 "보다, 눈여겨보다,자세히보다"는 1차적인 뜻과 아울러 "예비하다, 준비하다, 마련하다"는 2차적인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리야흐"는 "라아(보다)"에다가 "야흐(여호와의 줄임말)"로서, "여호와께서 [번제에 쓸 어린 양을] 보이실 것이다." 혹은 "[우리가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여호와를 볼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이레"라는 단어도 역시 "여호와"에다가 "라아(보다)"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로서, 그 뜻이 "모리야"와 동일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이실 것이다." 혹은 "여호와를 볼 것이다"는 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라아"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수풀에 걸린 숫양을 준비해놓으시 고로, "라아"라는 뜻에는 "준비하다, 예비하다, 마련하다"는 뜻도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고로 오늘날까지 "여호와이레"의 뜻은 "여호와가 보이실 것이다"는 뜻보다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는 뜻으로 더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지금의 골고다를 "여호와이레"라는 이름으로 명명한 것을 보면, 모세가 쓴 이러한 해설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너무나도 깜짝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말에서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원문을 직역하면, 실은 "여호와의 산에서 그분이 자기자신을 장차 보이실 것이다(In the mountain of Yahveh he will see himsef) "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장차 골고다에서 어린양이자 아들로 보여주실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 사건은 "장차 나무(십자가) 위에서 죽을 사람(이삭과 같은 아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그가 바로 나다"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를 위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한 분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은혜를 갚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1년 05월 21일(금)

정병진목사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있고 거기에 시온산도 있다. 그런데 나중에는 예루살렘이 시온산이요, 시온산을 예루살렘이라고 뜻하게 된다. 그러다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지상에 있는 시온산과  예루살렘이라는 명칭이 하늘의 시온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는 명칭으로 쓰이고 있음을 발견하된다. 이 땅에 있는 지명이 하늘의 지명이 된 셈이다. 대체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무엇 때문에 시온산과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하늘의 명칭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하늘의 시온산에 바로 그곳에 144,000명이 서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되어서 하늘의 시온산에 서 있게 되었던 것인가? 그들은 과연 산술적인 숫자로서 십사만사천명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미들을 더 가지고 있는 것인가? 또한 이들이 시온산에 서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그들이 시온산에서 서서 행하는 일은 또 무엇인가? 오늘 이 시간에는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의 실체에 대해 좀 더 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에 보면 144,000명에 대한 환상이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고, 또 한 번은 14장에 나온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인가? 같은 사람이라면 왜 같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라면 왜 다른 것인가? 그리고 이들이 시온산에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왜 앉아 있지 않고 서 있는가? 그리고 시온산에 서 있으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래서 오늘은 요한계시록의 가장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144,000명의 사람들이 누군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2. 요한계시록 14장의 위치

  요한계시록 14장은 일곱번째 나팔이 울려퍼지고 일곱째대접심판이 부어지기 직전에 위치한 삽입계시다.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 14장은 일곱번째 나팔이 울려퍼졌지만 일곱째대접심판이 부어지기 전에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한꺼번에 보여주는 특별계시의 한 부분이다. 이 특별계시는 계12장과 13장과 14장에 걸쳐 있다. 계12장에서는 해를 옷입은 여자와 용과의 싸움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용과 여자(하나님의 백성들을 산출하는 모체)와의 오랜 싸움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계13장에서는 무저갱에 감금된 사탄을 대신하여, 사탄이 무저갱에서 올려보내는 하수인들 곧 바다에서 올라오는 열 뿔 가진 짐승(적그리스도)과 땅에서 올라오는 두 뿔가진 어린양같은 짐승(거짓선지자)에 관한 이야기도 살펴보았다. 이 두 짐승은 42달동안(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승천이후 재림 때까지) 일할 적그리스도의 가장 충직한 부하들이다. 먼저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는 일을 한다. 그러다가 바다짐승이 말씀의 칼에 상하여 거반 죽게 된 이후에는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거짓선지자)이 첫째짐승(바다짐승)의 바톤을 이어받아 이제는 교회에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을 행하는 것도 살펴보았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승천이후 재림때까지 사탄이 하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는 활동하지 않으며, 거짓선지자가 활동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계14장에 3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첫째가 바로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며(계13:1~5), 둘째는 세 천사의 큰 음성이 나오고(계14:6~13), 셋째는 곡식과 포도의 추수(계14:14~20)가 나온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계14장 1~5절의 이야기는 계14장에 나오는 중간계시의 제일 첫번째 계시다. 우리는 여기서,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신 어린양과 더불어 인류 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전쟁에 예수님을 뒤따라 누가 과연 참여하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이들은 과연 어떻게 되어서 이 전쟁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는지, 이들의 숫자가 144000명이라는데 그 숫자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3.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은 누구인가? 이들이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는 첫째, 이들이 서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살펴봐야 하며, 둘째, 144,00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셋째, 이들이 거기에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144,000명의 사람들이 서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들이 서 있는 장소는 시온산이다(계14:1). 시온산은 현재 예루살렘의 동남쪽에 위치한 옛 예루살렘도성 안에 있는 산(해발765M)을 가리킨다. 다윗이 이 산(시온산성)을 빼앗아 다윗성이라 이름하였는데, 나중에는 이 시온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명명되기에 이른다. 사실 현재 예루살렘에는 3개의 산이 있다. 예루살렘 동쪽에는 기드론골짜기 건너편에 감람산(해발 830M)이 있고, 예루살렘 남쪽에는 두로베온골짜기 안쪽편에 시온산(해발765M)이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남쪽에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면 기드론골짜기 안쪽면에 성전산(해발750M)이 있다. 이 3개의 산들 중에서 계14:1에 시온산이 나온다.

  왜 예루살렘에 있는 3개의 산들 중에 144,000명이 서 있는 산은 시온산이라고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이 시온산성을 다윗이 가나안일곱족속의 하나인 여부스족속으로부터 빼앗아, 하나님의 도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적과 전쟁하여 이겨서 얻은 산이 바로 시온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계14:1에 나오는 시온산 앞에 서 있는 144,000명의 사람들도 다 영적 싸움에서 마귀와 싸워서 이긴 자들만 그곳에 서 있다. 어디서 이긴 자들인가? 그들은 이 땅에서 살 때, 이 세상에 있는 임금인 마귀와 죄와 싸워 이겨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며,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그곳에 들어간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시온산은 지상에 있는 시온산일까? 아니면 하늘에 있는 시온산일까? 적어도 지상에 있는 시온산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도들을 데리시고 재림하실 장소는 '감람산'이지 '시온산'은 아니기 때문이다(슥14:4, 행1:9~12). 그리고 비록 일곱째나팔이 울려퍼졌지만 그리스도께서 지상으로 강림하시기까지는 아직도 몇 가지 과정들이 더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탄진영의 사람들에게 내리는 일곱개의 대접심판도 아직 집행되지 않았고, 이들이 예수님과 벌이게 될 인류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도 아직 남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44,000명이 함께 찬양을 부르고 있는 이곳은 결코 지상의 시온산이 아니다. 그러면 시온산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정확히 3절에 나와 있다.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네 생물들과 24장로들 앞에 서서 찬양을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계14:3). 그러므로 이들은 지금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성의 시온산에 서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이 땅에서 구속함을 받아 거기로 옮겨진 자들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의 기록말고도 하늘에는 시온산과 예루살렘성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성경책이 있다. 그 성경책은 히브리서다. 히12:22에 보면,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새 예루살렘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 믿음 안에서 승리를 거둔 자들이 거하는 장소가 바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시온산인 것이다.

  참고로, 이들이 이미 시온산에 들어가 있는 것은 예수님의 승천이후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만약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무덤 속에 잠자고 있다거나 부활체를 입지 못하고 어떤 중간처소에 머무르고 있다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폐기처분해야 할 것이다. 이미 여섯째인을 떼실 때에부터 하늘에 있는 분향단 밑에서 순교해서 천국에 들어간 자들의 탄원이 있기 때문이요(계6:9~11), 그리고 일곱째인이 떼지기 전에, 환난에 나온 큰 무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서 찬양을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계7:9~17). 이러한 말씀들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에는 모든 믿는 자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 그럼 144,000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순히 산술적으로 144,000이라는 숫자인가? 아니면 영적인 어떤 의미를 지닌 숫자인가? 사실 이 문제는 요한계시록 강해를 시작하면서 수없이 다루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비록 서신의 형식을 빌려 기록한 편지의 책이지만, 이 책은 환상과 시각적인 묵시를 기록한 계시의 책이자, 심오한 상징이 사용된 예언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모든 숫자는 실제적인 숫자인 것도 있지만 거의가 다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테면, 7(3+4)은 이 땅에서의 완전수이지만, 12(3×4)는 하늘에서의 완전수다. 예를 들어, 이 지상에 언급된 교회가 7개이며(계2~3장), 7개의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가 나오고, 일곱나팔과 일곱대접심판재앙이 나온다. 특히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뿔이 7개다. 그것은 어린양께서 이 땅에서 가지신 권세가 완전한 것이지, 실제로 천국에 일곱뿔달린 어린양이 실제한다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러나 천국에서 완전수는 12이라는 숫자가 사용된다. 12지파와 12기초석, 12진주문, 24장로, 144규빗의 성곽, 12,000스타디온의 성  등이 다 12숫자에서 나온 것들로서 천국은 완전한 공간이요 완전한 장소인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144,000의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선적인 의미로서 하나는 12×12×1,000이다. 이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따온 12(열둘)과 신약에서 12사도들에게서 따온 12(열둘)에 많은 수(1,000)을 곱한 것이다. 그러므로 144,000은 구약백성들 가운데 구원받을 백성들의 완전수와 신약백성들 중에서 구원받을 자녀들의 완전수에다가 아주 많다는 의미의 1,000이 곱해진 숫자인 것이다. 한편,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즉 계7장에 나온 바와같이, 육적 이스라엘백성들 중에서 인침을 받은 숫자가 144,000명인 만큼, 환난에서 나오는 셀수 없이 많은 무리의 숫자 144,000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것을 취하든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는 완전하면서 많은 수인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144,000이라는 숫자는 산술적인 숫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상징적인 숫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의 사람들은 이미 구원얻은 채 천국에 들어가 있는, 충만하고도 완전한 성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산술적으로 144,000명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단들 가운데 신천지와 같은 이단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144,000명은 산술적인 숫자로서, 그 숫자에 자신이 들어가야 한다고 열심히 가르친다. 그러나 신천지인이 144,000명을 넘어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다음부터는 누군가가 탈락되어야 그 자리에 채워질 것인데, 나중에라도 144,000명 안에 포함되기를 원하는 자는 이미 144,000명 안에 들어있는 누군가가 탈락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아니다. 144,000은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충만하고도 완전한 수인 것이다.

  셋째, 그렇다면 이들은 왜 시온산에 앉아 있지 않고 서 있는 것인가? 원래 성경에서 통치하고 다스리는 자는 다 앉아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주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으로 등장하고 있다(계4:2, 5:1,13, 7:15, 19:4). 그리고 어린양도 보좌에 앉아계시는 분으로 등장한다(계2:21, 20:11, 21:5). 그런데 계14:1~5에 출현하고 있는 144,000명의 구원받은 성도들은 시온산 위에 서 있다그렇다면 이들은 왜 시온산에 서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싸우려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모여서 서 있기 때문이다(계12:17). 이것은 계12장에 이미 나온 모습이다. 사내아이(그리스도)를 낳은 여인이 광야로 도망치자, 용이 그 사내아이를 잡아먹지 못해 분풀이를 하는데, 이제는 그 여인에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여인을 도와서 보호해준다. 그러자 용이 바닷가의 모래위에 서서 이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전쟁하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계12:17). 그러므로 이제 인류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신 주 예수께서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그의 성도들과 함께 강림하여 그들을 쳐부술 것이다(살전3:13, 계19:11~21)). 이것이 바로 땅을 망하게는 자들에 대한 주 하나님이신 어린양의 심판이다(계11:18). 다시 말해 용의 세력과 그리스도의 세력이 마지막 한 판의 전쟁을 위해 서로 대진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양과 함께 144,000명의 성도들도 시온산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4.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미 구원받은 천국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사람은 천국에는 마귀가 없으니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도 일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게 노동이 되는 힘든 수고는 아니다.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하고, 둘째 천사들을 다스리는(통치하는) 일을 한다. 그렇다. 천국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종들로서의 역할과 동시에 천사들을 다스리는 왕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천국에 들어간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어떤 일들이 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거문고를 연주하거나(계5:8) 입술로 찬양하는 일을 한다(계7:10~12, 11:15, 2~3). 그리고 주님의 재림전까지는 기도하는 일까지도 병행한다(계8:3~5)(이 일은 예수님의 재림이후에는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그때 부르는 찬양의 내용은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을 구약백성들과 신약백성들이 함께 모여 행하는 예배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한 번 상상해보라. 그들의 아름다운 하모니 소리를 들어보라. 사도요한은 그들의 합창소리를 "많은 물소리"라고 표현했다(계14:2). 사실 많은 물소리와 같은 음성은 원래 하나님과 예수님의 목소리였다(겔43:2,계1:15). 그런데 천국의 백성들도 그렇게 아름다운 하모니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계19:6). 그리고 천사들도 우렛소리로 함께 찬양을 한다(계6:1, 14:2)

 

5. 천국에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144,000명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이때 사도요한은 과연 누가 하늘에 있는 시온산에서 찬양을 하며, 또한 곧 있어질 주님의 재림시에 누가 동행자로서 참여하게 되는지를 소개해주고 있다. 그것은 총 6가지 정도로 언급되는 인물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6가지 조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여기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천국에 들어가게 될 구원받은 백성들이 되는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여자들과 더럽힘을 받지 아니한 자들이다. 이들은 처녀들처럼 신앙의 지조와 정절을 지킨 자들인 것이다(계14:4). 여기에 나오는 여자는 계1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산출하는 산모가 아니라, 계17장에 나오는 음녀(바벨론)인 여자. 왜냐하면 144,000명의 사람들은 정절을 지킨 자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루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이러한 음녀와 더불어 정조를 유린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다. 둘째, 이들은 어린양이 인도하면 어디든지 뒤따라가는 자들이다(계14:4). 그런데 이들의 인도자를 보라. 그는 목자”가 아니라 어린양이시다. 왜 그렇게 표현하고 있을까?(7:17) 그것은 아마도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내주고 섬기다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양들은 죽어서까지 가죽을 내주고, 고기를 내주며, 털까지 다 내준다. 심지어 죽는 것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하늘의 시온산에 있는 144,000명에 포함되는 조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의 성도들은 이 땅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던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중에 상당수는 순교자들일 것이다(6:9~11, 15:2~4, 18:20,24, 19:2, 20:4). 셋째, 이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로서, 사람들 중에서 속량함을 입은 자들이다(계14:4).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살고는 있지만, 이 세상의 음녀인 바벨론(세상제국의 첫대표)과 함께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속하고(구약백성들),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신약백성들)로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 그들이다(계14:4). 그러므로 넷째, 이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첫 열매로 바쳐진 자들인 것을 알 수 있다(계14:4). 왜냐하면 이들이 바로 첫째부활에 참여한 "첫열매들"이기 때문이다. 첫째부활이란 주님의 재림시에 있을 둘째부활과는 다른 것이다. 첫째부활이란 주님승천이후 주님재림시까지 죽은 성도들이 곧바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계20:5). 이들은 천년동안(주님승천이후 재림시까지) 하늘에서 왕노릇하고 있다가, 주님께서 악의 무리들을 처단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어린양의 뒤를 따를 자들을 가리킨다(계19:14). 그리고 다섯째, 이들은 그들의 입술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리만을 말하고 고백하는 자들이다(게14:5). 이세상 임금인 마귀는 거짓의 아버지다. 마귀는 창세기 3장 때부터 아담과 하와를 거짓말로 속인 놈이다. 그리고 지금도 속이고 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지어내거나 거짓말을 좋아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계21:8). 그들의 종국은 불못이다. 그리고 여섯째,  늘 회개를 통해서 죄가 씻겨져 있어 흠이 없는 자들이 그들이다.(계14:5) 사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 중에 흠이없는 성도란 없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을 제외하고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흠없는 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들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마귀의 유혹을 받는데 어찌 죄짓지 않고 살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성도들이 흠이 없는 성도들일까? 그것은 하나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회개하는 자들이다. 이들비 흠없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흠이 없도록 날마다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이다.

 

6. 나오며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이 행하신다. 그러나 구원의 끝은 우리가 맺어야 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구속사역을 만세전에 계획하셨고,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그 일을 다 성취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다 이루셨다"고 선언하셨다(요19:30). 구약에 예언된 350여가지의 메시야예언을 다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그때에 인류의 죄값을 다 치르신 것이다. 그렇다. 주님의 이러한 속죄(구속)사역 때문에 인류는 구원받을 수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이 자동적으로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해야할 일은 없다. 그렇더라도 그분이 하신 일을 믿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하여 내 죄가 예수님의 피로 씻겨지도록 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자 몫이다(요일1:9)

  그런데 이것을 알고 회개하여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자는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을 잘 알고 있기에 쉽게 죄를 지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하면 몸둘 바를 모른다. 오직 감사와 찬양만이 나올 뿐이다. 그러니 세상의 유혹과 핍박이 아무리 몰려온다고 해도 쉽게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거나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에 신앙의 정절을 지킨다. 그리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어간다. 그 길이 비록 좁지만 생명의 길이기에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가더라도 항상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거짓과 불의를 좋아하지 않으며, 늘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생각나는 모든 죄를 날마다 깨끗히 씻어낸다. 그렇다. 우리는 바로 이런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될 때, 우리도 언젠가는 하늘의 시온산에 들어가 거기서 주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당신은 재림팀에 합류해 들어가고 싶은가? 하늘의 144,000명의 성도들의 일원으로 말이다. 그러면 오늘부터라도 신앙의 지조와 정절을 지키며 주님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거짓말을 좋아하지 말고, 철저히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럴 때에 우리도 144,000명 안에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1월 24일(수)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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