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의 비유는 주님 오실 때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비유라는 것쯤은 아마 모두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그 '기름'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성령'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것인가? 우리는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 기름을 가지고 왔는데도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를 통하여, '기름'은 이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자는 오늘부터라도 그 기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2022-02-2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천국복음(06)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구분하는 2가지 기준은?(마25:1~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4tC_no-EUd8 [혹은 https://tv.naver.com/v/25389890 ]

 

1. 들어가며

  마태복음 25장에는 천국에 관한 3가지 비유가 등장한다. 그것들 중에 첫 번째 비유가 바로 '열 처녀의 비유'다. 이 비유는 누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놀라운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에 관한 기본적인 포맷은 이미 며칠 전에 함께 나누었다. "천국복음(05) 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천국에 못 들어갔는가?"가 그 제목이다. 오늘은 이 비유에 대한 두 번째 시간으로서, 똑같이 둘 다 처녀들이었으며, 똑같이 둘 다 신랑을 기다리던 여인들이었는데, 왜 한 편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었고, 반대로 왜 또 한 편은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 근본적이 이유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번 말씀을 통하여 대체 '기름'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이 깊이 묵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나도 기름을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철저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 비유는 천국에 들어가는 최소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충분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2. 천국 준비는 그냥 열심히 준비하면 되는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깨어있으라' 혹은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하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의 의미요 저렇게 하는 것이 준비하고 있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중에 가장 흔한 생각은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요 준비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조금 뚜렷하지 않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깨어있으라 그리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충성하고 있으라"는 의미이며, 또 하나는 "지혜롭게 행동하고 있으라"는 의이다(마24:44~45). 그러므로 내가 지금 깨어 있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고, 또한 똑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지혜롭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우쳐주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2가지 비유를 들어서 말씀해주셨다. 하나는 "지혜롭게 하고 있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마25:1~13). 그리고 또 하나로 "충성하고 있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풀어주시기 위해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해주셨다(마25:14~30).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열 처녀의 비유"는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지혜롭게 준비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소중한 말씀이라고 하겠다. 사실 기도도 배워서 할 때에 시간이 절약되고 더 잘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듯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워서 준비한다면 훨씬 그 날을 잘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3. 처녀들이 천국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거나 못 들어가게 되었던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혼인잔치 곧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천국의 영광의 광장에서 이루어질 혼인잔치는 과연 누가 참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늘 "열 처녀의 비유"에 따르면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요,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하면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생긴 것인가? 그것은 딱 2가지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는 그날 신랑과의 만남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느냐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준비한 기름이 과연 주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전자는 기름을 준비한 채 나갔느냐 아니면 그냥 나갔느냐 하는 문제요, 후자는 기름을 가지고 가긴 갔어도 그 기름을 과연 신랑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느냐 받지 못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4. 천국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자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했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등(등잔이나 횃불)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가지고 나갔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등만 가지고 나갔다. 곧 기름을 가지고 갔느냐가 결국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이 된 것이다. 그럼, 왜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가지고 나간 것인가?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딱 한 가지 차이에서다.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을 마중만 나간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을 생각하고 준비하고서 나갔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마중만 나갔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1절과 6절에서 알 수 있다. 1절을 보면, 열 처녀들은 모두 다 자기의 등을 취한 후에 신랑을 맞이하러 나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맞이하러'라는 말은 '마중을 위하여, 영접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이것을 헬라어로 보면, '휘판데시스'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누가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지가 나오는데, 이는 그분과의 만남을 위하여 준비하였던 자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만남'이라는 단어는 '아판데시스'이다. 그렇다.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가 신랑을 마중 나갔던 것은 다 동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을 마중만 나간 것이 아니라, 신랑과의 만남을 준비한 채 나갔던 것이요, 미련한 처녀는 그냥 마중만 나간 것이다. 

 

5. 슬기로운 여인이 준비했던 기름은 어떤 용도였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슬기로운 여인이 준비했던 기름은 꺼져가는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한 용도였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맞다. 하지만 그 기름은 그 용도로만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이 비유의 후반부에 나온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미련한 다섯 처녀가 신랑이 온다는 말에 깨어나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등잔에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자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좀 달라고 청한다. 하지만 그들은 곱게 거부하면서 자기가 쓰기에도 부족할 것 같으니, 가서 댓가를 지불하고 사오라고 말한다. 그러자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사기 위해 급히 나간다. 그리고 얼마 후에 돌아온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혼인 집 문이 닫혀 있는 상태였다. 그러자 그들이 신랑에게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청원한다. 그런데 신랑은 그들은 알지 못하겠다고 잘라 말한다. 다시 말해 "너희가 내 신부가 될 사람인지는 나는 결코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지나갔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신랑이 그들을 혼인잔치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그들의 등불이 활활 타오르지 않아서였는가? 아니다. 그들이 신랑의 영접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이유는 그들이 나중에 기름을 채워서 왔더라도 그 기름은 신랑을 위해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등불이 활활 타오르지 않아서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신부로 맞아들이기에 합당하지 않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슬기로운 여인들이 신랑을 맞이하기 전에 준비했던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슬기로운 여인들이 준비했던 기름이 꺼져가는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한 용도로만 쓰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신랑이 오기 전에 준비한 기름은 그녀들로 하여금 신랑을 자신의 남편으로 맞이들이기 위해 합당한 준비를 했다는 증표였던 것이다. 뒤늦게 기름을 가지고 온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그것이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신부로서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여인들은 언제부터 이 기름을 준비한 것인가? 그것은 '처음부터'다. 그들이 앞으로 자신이 신부가 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부터다. 왜냐하면 2절 말씀을 보니,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된 것이 나중에 신랑을 만날 때에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음을 헬라어 동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을 보면, 슬기로운 처녀는 처음부터 신랑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지혜로운 이들로 있어왔기 때문이요(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구문), 미련한 다섯 처녀도 역시 처음부터 신랑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미련한 이들로 있어왔기 때문이다(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구문). 그 근거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그릇에다가 기름을 준비했기 때문이요,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그것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 왜 슬기로운 처녀는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할 수 있었는가?

  그렇다면 슬기로운 처녀는 어떻게 되어서 처음부터 그 기름을 준비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아까 말씀드렸지만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을 장차 영접하기 위해서만('휘판데시스') 살았던 것이 아니라 신랑과의 만남('아판데시스')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부는 처음부터 장차 신랑이 자신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하면 신랑이 자신을 아내로 맞이해 줄 것인지를 생각하며 준비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신랑이 자기를 아내로 맞이해줄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왔던 것이다. 만약 그날 그들이 신랑을 만났는데,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나는 당신을 모르겠소. 그래서 나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소"라고 말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기다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지런히 신랑과의 만남을 위해 모든 나날을 준비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그들이 가져간 '기름'은 그저 단순한 기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헌신과 수고와 땀과 노력의 결정체들이었던 것이다. 사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슬기로운 처녀들이 가지고 간 기름의 그릇이 '기름병'이었다고 나온다. 그 안에 기름을 채워서 가져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삶에서 혼신의 노력으로 댓가를 치러 신랑을 맞을 준비하였던 것이 한 방울씩 한 방울씩 기름이 되어 그 기름병에 채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처녀들이 신랑을 마중 나갈 때에 그들의 허리에서는 찰랑찰랑하면서 기름이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 기름병에 담겨진 것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일생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럼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들은 그 기름을 준비하기 위해 때로는 서슬퍼런 핍박을 견디어내야 했을 것이고, 노동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 남들보다 더 빨리 일어나서 일해야 했으며, 남들보다 더 늦게까지 일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기쁨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장차 신랑을 마주 대할 만남의 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것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처음 믿었을 때에 받은 것을 그냥 가진 채 그냥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주님과의 맞선에서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지에 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8. 열 처녀의 비유가 들려주는 기름의 4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시간을 통하여, 열 처녀의 비유가 들려주는 기름의 4가지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첫째는 그것은 절대 남에게 나눠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준비한 것은 자기만이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꺼져가는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라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등불'은 계4:5에 의하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 곧 '성령'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만나는 그날까지 성령께서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수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기름을 미련한 다섯 처녀에 나눠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미련한 처녀들이 달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라고 하였다. 자기들도 댓가를 지불하여 기름을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넷째는 자신이 죽기 전에 준비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열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신랑은 지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졸았고 잠들었다. 모두가 지쳐서 그만 잠든 것이다. 여기서 '잠들었다'는 말은 요11:11~13이나 살전4:13~16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열 처녀들은 모두 다 죽은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에 큰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호령'도 아마 천사장의 호령이리라고 본다(살전4:16). 그러자 그들이 깨어났다. 그들이 부활한 것이다(살전4:16, 고전15:12~18). 그런데 부활한 후에 나가서 준비해온 기름은 그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님께서 그것을 인정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댓가를 치르지 않은 분들은 죽은 후에라도 반드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 치른 댓가를 통해서 절대 혼인잔치에 참여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댓가를 치러서 우리의 것을 장만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 우리가 이땅에 살고 있을 때 뿐이다. 

 

9. 슬기로운 여인들이 준비했던 기름의 최종적인 쓰임은 어디에서일까?

  헬라어원문을 보면, 슬기로운 여인들이 준비했던 기름병의 숫자가 각각 다르다. 어떤 여인은 한 개의 기름병을 준비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여인은 두 개의 기름병이나 다섯 개의 기름병을 준비했을 수도 있다. 아니 어떤 여인은 한 개의 기름병 안에 기름을 다 채우지 못해 이제 맨 밑바닦에 채울 만큼의 기름만 가지고 있었던 여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맞이하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며 준비했던 그 여인들을 다 신부로 맞이해주었다. 사실 이 비유에 나오는 '신랑'은 전지전능한 분이다. 왜냐하면 신랑이 곧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미련한 다섯처녀에게 "나는 처음부터 너희들이 나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기름병에 담긴 기름이 어떻게 해서 채워졌는지를 다 알고 계셨던 것이다. 어떤 기름은 핍박과 고난을 참으면서 준비했던 한 방울의 기름이라는 것을 그분은 아시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것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신랑을 만날 그날을 위해 수고한 땀방울의 결실이라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날 기름병의 크기와 숫자와 그리고 양에 따라 신부들에게 장차 하늘나라에서 받을 복들을 주실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이러한 면류관으로 주실 것이고, 아니면 저러한 면류관으로 주실 것이다. 그리고 면류관에 박힐 보석도 이러한 것으로 주시기도 하고, 저러한 것으로 주시기도 하실 것이다. 기름의 종류와 양에 따라서 말이다. 그리고 그 준비한 기름의 크기에 따라 보좌 자리도, 천국 집도 각기 마련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신분도 정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기름은 처녀들의 일생의 수고와 사랑과 눈물과 땀이 담겨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기꺼이 하늘나라를 위해 그 기름을 준비했던 것이다. "오, 주여 나도 지금부터라도 그 기름을 준비하게 하소서!"

 

10. 나오며

  열 처녀의 비유를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난다. "그랬었구나. 그 여인들이 그렇게 해서 기름을 준비하였고 그것을 허리에 차고 마중 나갔었구나"하고 생각하면 그 기름 한 방울 한 방울의 의미가 다시 한 번 되새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실천하지 않았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러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그러한 사실에 관심도 없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곧 그들은 자신은 신랑을 마중 나갈 수 대상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 그날 그 시에 어떻게 신랑을 만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등'으로 상징되는 '성령'을 받았고(계4:5), 처음에는 그것으로 불도 사를 수 있었기에 그것이 있으면 신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은 지체되었다. 오늘날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믿는 순간에 죽지 않는다.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살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등불이 점차로 희미해져간다는 알아야 한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미처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믿은 것으로 혼인잔치에 그냥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혼인잔치에 못 들어간다. 그러므로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충분조건으로 그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면 오늘 이 시간부터라도 그렇게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후5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이라 할지라도 하루치의 품삯을 주었던 그 포도원 주인(마20:1~16)이신 우리 주 예수님,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 예수님을 기억하고 오늘부터라도 신부단장을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2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05) 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천국에 못 들어갔는가?(마25:1~13)_2022-02-25(금)

https://youtu.be/-q3f8_LatVg  [혹은 https://tv.naver.com/v/25388161 ]

 

1. 마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의 주제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의 주제는 언제 주님이 오실른지 모르니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깨어 있는 것은 곧 준비하고 있는 것과 같다(마24:42, 25:13). 그러므로 열 처녀 중에서 슬기로운(지혜로운) 처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미련한(어리석은) 처녀가 될 것인가는 신랑이 올 때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있는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2. '열 처녀의 비유' 말씀 중 그동안 잘못 알려져 온 해석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동안 열 처녀의 비유는 곡해되어 온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것들 중의 하나는 '열 처녀'가 바로 '신부의 들러리'였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본문은 이들을 들러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들의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와 같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5:1). 그리고 이들에게 예수님은 신랑인 것이지 자신의 친구의 남편이 아니다. 자기들과 관계되어 있는 신랑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 처녀는 신랑을 "주여 주여"라고 불렀다(마25:11). 이는 이 신랑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또 하나는 신랑이 닫았던 그 집의 문이 신부집의 문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것도 바른 해석이 아니다. 이 혼인 잔치는 신랑과 함께 신랑의 집에서 시작되는 혼인 잔치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권한은 신부나 신부의 아버지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님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마25:10~12).

 

3. 이 비유는 무엇에 관한 비유인가?

  이 비유 말씀은 천국에 관한 비유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4장부터 시작된 주의 재림 시에 있을 징조에 관한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는 비유이며, 주님의 재림은 곧이어 혼인 잔치로 이어지는데, 실제 재림하시는 예수께서 혼인 잔치를 배설할 장소는 새 예루살렘 성 안이기 때문이다(계19:9, 21:2). 정확히는 [천국에 가시면 아시게 되겠지만]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영광의 광장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채 성밖에 남겨졌다는 것은 슬기로운 처녀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채 성밖에 남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왜 미련한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왜 미련한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 곧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그것은 똑같은 말이지만 표현을 달리하면 2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둘 다 똑같이 자기 자신을 위한 등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기름을 따로 준비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마25:10). 둘째는 열 처녀들 중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주님께서 전혀 아신 바 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마25:12). 먼저, 첫째로 이들의 차이는 '여분의 기름'의 준비 여부에 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다른 그릇에 기름을 더 준비해 두었다. 이 비유의 주제가 '준비하고 있으라'인 만큼,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까지 충분히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아니 기름을 따로 준비하는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이 처음부터 어떤 자들이었는지가 2절에 나오는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열 처녀들 중에 다섯 처녀는 미완료 시제로 그들은 처음부터 어리석어 왔고 현재도 어리석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지혜로워 왔고 현재도 지혜로운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둘은 처음부터 달랐다. 이것을 요즘 말로 표현해 보면 이렇다. 열 처녀 모두는 다 예수님이 신랑인 것도 알고 있었고, 등('등잔'이나 '횃불')으로 표현된 성령도 받아서 간직한 채 있었으며, 그분이 오시면 혼인 잔치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로 두 종류 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수 있으며, 두 종류 다 재림하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는 처음부터 그 준비를 해 오고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그 준비를 해 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자기들은 준비하지 않고 있어도 언제든 결혼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이 누리게 될 결혼 잔치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잔치에 참여하려면 신부 단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열 처녀들 중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주님께서 처음부터 알아온 채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마25:12). 미련한 다섯 처녀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했을 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 밤에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전혀 모른 상태에서 기름을 구하러 가야 했다. 하지만 그녀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에 그녀들의 손에 기름이 들려져 있었는지를 알 수는 없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들은 한 사람도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은 댓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그들의 손에 기름을 갖고 있느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시는 주님의 눈에 그들은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최종적으로 "내가 너희를 알아온 채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5:12). 이것은 완료 구문으로서 이미 주님에게 있어서 그들은 아무런 의미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알다'는 말에 사용된 단어는 바로 '오이다'라는 단어이다. '오이다'는 '기노스코'에 비해, 지식적인 앎에다가 친밀한 관계까지 포함된 개념이다. 참고로 '기노스코'는 지식적인 앎에다가 체험적인 앎을 같이 합친 개념이다(마7:23). 그러니까 미련한 다섯 처녀들에게 주님은 형식적인 주님이었을 뿐 주님과 커뮤니케이션(교통)이 되는 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을 단장하는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5. 슬기로운 처녀가 처음부터 준비해 두었던 '여분의 기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슬기로운('프로니모스') 다섯 처녀는 언제부터 등잔(혹은 '횃불')에 태울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는가? 그건 놀랍게도 처음부터다. 그럼 슬기로운(정확히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했던 '기름'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이 비유 이야기 속에서는 무엇이라고 딱히 정의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른지에 대해서는 4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첫째, 신랑이 언제 오든지 그 신랑을 맞이할 때에 사용할 충분한 양의 기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마25:3,8). 둘째, 꺼져가는 등불(혹은 횃불)을 밝힐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마25:8). 참고로 여기서 '등'이란 요한계시록 4:5에 나오는 단어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켜놓은 일곱 등불을 가리킨다. 고로 이 등불은 사도 요한의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의 일곱 영들' 곧 성령이라고 할 수 있다(때로는 그것을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시119:105 참조). 그러므로 여분의 '기름'이란 성령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그냥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마25:9).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마25:9). 그러므로 '기름'을 성령으로 푸는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결코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기름'은 남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빌려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나온다. 오롯이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희생하여 준비하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값진 진주 장수의 비유처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사야 할 만큼 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넷째, 이것은 반드시 신랑이 오기 전에 혹은 자기가 죽기 전에 준비해 놓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마25:5~7, 요11:11~13).

 

 

2022년 02월 25일(금)

정병진목사

 

 

누가 열린 새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나아갈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의 문에 천사들이 경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갈 성에 왜 천사들이 그 성의 문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문은 보석들로 만들어진 문이 아니라 진주로 만들어진 문들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죽는 날, 그 성 문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열 처녀의 비유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20210-09-03(금) 금요기도회
제목: 바른종말신앙(17) 열 처녀의 기름준비 여하에 따른 문(門)의 두 가지 역할(마25:1~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Uxo_ZegblQU [혹은 https://tv.naver.com/v/22255868  ]

 

1. 들어가며

  문은 보통 출입구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마25:1~13)를 보면, 문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참여여부를 결정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문이 성 안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문이지만, 성밖에 버려진 자들에게는 심판의 문으로 쓰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문'은 대체 어떠한 문이며, 이 문은 과연 두 종류의 처녀들 곧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에게게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문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열 처녀의 비유에 등장하는 '문(門)'은 대체 어떤 문인가?

  마25장 1~13절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문을 통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갔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그냥 문 밖에 버려짐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門)은 대체 어떤 문인가? 본문에 등장하는 '문(門)'은 혼인잔치를 치르게 될 신랑집의 문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문은 신부집의 문이라고 생각해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집 안에 대기하고 있는 신부를 위하여, 신랑을 맞으러 나가도록 신부의 들러리 10명이 집 밖으로 마중 나갔던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하지만 성경을 정확히 보니, 그게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집이 신부집이었다고 한다면, 신부를 대신하여 들러리를 나갔던 모든 처녀들은 그간 수고했다고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을 제공받아야 마땅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랑이 문 밖으로 나와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데리고 들어간 후에 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뒤늦게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외치는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신랑은 그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만약 그 집이 신부집의 문이었다면 문을 열어주고 안 열어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신부에게 있거나 신부의 아버지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부를 위해 그동안 고생한 들러리를 집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 집은 신랑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집이 신랑 집이었기에 신랑이 그 집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랑 집의 이 문(門)은 영적으로 볼 때 어떤 문(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신랑이 누구냐에 따라 그 문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데, 결론적으로 이 문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 등장하는 '신랑'은 종말의 때 곧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당사자이시다. 왜냐하면 신랑은 종말의 때에 우주적인 교회에게 혼인잔치를 하려고 이 땅으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신랑은 교회의 영원한 신랑이 되실 우리 주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집은 신랑의 집이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집은 과연 어떻게 불리게 되는가? 그것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불라게 된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에 등장하는 '문(門)'이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누가 문(門)을 통과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가?

  누가 문을 통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 예식에 참여하게 되는가? 그것은 그날 신랑의 신부가 될 자들이다.  일명, '이기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계21:7),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택함을 받은 자들(계21:2,9)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오늘의 비유에서는 열 처녀들 중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 해당한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에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깨끗히 빨았던 자들이요(계7:14), 자기 자신 안에 더이상 죄가 남아있지 않는 자들이다. 왜냐햐면 날마다 어린양의 피에 자기 자신의 옷을 빨고 있었기 때문이다(현재분사형)(계22:14). 그러므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또렷히 있는 자들이다(계21:27). 

 

4.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어떤 문인가?

  그렇다면, 장차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치러질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문은 대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간 신부의 자격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데(계21:27), 그때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가지, 어린양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자라야 한다고 했다. 고로 이 문의 역할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을 안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최종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가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의 영광은 한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만일 그 성 문 앞에서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아서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성 밖에 남겨지거나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빨을 갈든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그는 결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성 밖에 버려진 존재, 성밖에서 형벌을 받는 존재,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존재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어린양의 신부가 되도록 그토록 많은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한편,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이 성의 문에 관한 좀 더 많은 정보가 있다.

  첫째, 이 성의 문은 동서남북에 한 개씩만 있는 문이 아니라, 각 방향마다 3개씩 있어서 동서남북의 문들을 각각 합치면 총 12개나 된다는 것이다(계21:13). 그러므로 이 성의 문은 누구든지 동서남북에서 다 오더라도록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주님의 우주적인 오심(파루시아)의 때에 우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이다(마8:11~12).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에는 이방인이 그 잔치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 잔치에 못 참여하게 될 것이다. 둘째, 이 문들 위에서 12명의 천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계21:12). 왜 그런가? 천국에 악한 영들 곧 귀신들이라도 몰래 쳐들어오거나 공격하기 때문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문은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인 전투천사들이 방어할 것기 때문이다. 귀신들과 싸우는 대상은 전투천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12천사들은 어떤 천사들인가? 그들은 바로 천국의 경비담당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지키고 있는 천사는 경비담당 천사들로서 출입을 통제하는 천사들인 것이다. 그럼 왜 12천사들이 이 성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문을 두루도는 화염검을 가진 천사가 경비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이 천사들은 사람이 못 들어오게금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침입하는 귀신들과 싸우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누군가가 그 성 안으로 못 들어가도록 막는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이 문은 진주 문이라고 되어 있다(계21:21). 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진주 문인가? 왜 그 문은 금으로 된 문도 아니고, 은으로 된 문도 아니며, 12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진 문도 아닌가? 왜 그 문은 진주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진주는 사실 자신의 연한 살결에 모래 알이 들어와 상처를 낼 때에 그것에 반응하는 조개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상처와 고통과 아픔의 결과물이 바로 진주인 것이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이 땅에 고통받고 외면당하고 핍박 당하는 성도들의 눈물이 모여 진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한 기름이다. 진주는 사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통당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죽임당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을 시인했던 증거가 바로 진주문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성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자는 대체 누구인가? 좀 전에서 언급했지만 그들은 한 마디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겠다(계21:27). 그러므로 경비 천사들은 사람들이 그 성의 문으로 나아올 때에 성 안으로 들여보내주거나 그렇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한다. 물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심과 허락하심 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천국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천국에서 천사나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종)로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혹 인간이 천사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지위를 갖고 있다면, 천국이라고 해도 그 천사를 함부로 부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권한 하에 주어진 천사들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천사들이나 인간들은 천국에서 서로 공손한 말을 한다. 물론 이 땅에 보내어진 천사들을 구원얻을 후사들(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어 있다. 혹시 천국에 가브리엘이나 미가엘 천사장을 보았다면 그들은 상당히 높은 계급을 가진 천사들로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자가 이리 오라 저리 가라고 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5. 이 성의 문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고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검사를 맡는 장소는 바로 새 예루살렘 성 문 앞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기는 자 곧 거룩한 신부들만이 그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서 살 자이자 어린양의 신부가 될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천사장의 호령에 이어, 신랑되신 예수께서 밖으로 나와서(재림하시어) 그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때 슬기로운 자들에게 이 문은 영원한 "구원의 문"이 될 것이다(마25:10, 눅13:23~25). 왜냐하면 이 문은 그들에게 영원히 걱정 근심 슬픔 눈물, 아픔과 사망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완전한 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이 어떤 자들에게는 "심판의 문"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이 문을 앞에서 저지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미려한 다섯 처녀들에게 이 문을 심판의 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9). 그러므로 그날 미련한 처녀들에게 이 문은 심판의 문이 될 것이다. 영원히 주님과 교제가 단절되는 것을 알려주는 문이 될 것이요, 걱정 근심 슬픔 눈물 그리고 아픔과 사망이 없는 새 예루살렘 성이 어떤 곳인지를 뼈져리게 알게 해 주는 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그날이 우리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주님은 이미 문 앞에 와 계신다고 하셨다(마24:33). 여기서의 문은 어떤 문인가? 이전에는 몰랐지만 이 문이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인 것이다(계21:9, 22:14~15). 보좌에서 내려오시어,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과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지상으로 재림하시기 위해 그분이 지금 새 예루살렘 성 문 앞에 서 계시다는 뜻이다. 고로 우리 중에는 가까운 미래에 주님의 재림을 목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른지도 모른다. 그날 그 문은 우리에게 어떤 문이 될 것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니 그 문은 "열린 문"이라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열려있었기 때문이다(계3:8). 왜냐하면 그 교회 성도는 적은 능력을 지녔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은 자는 기본적으로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고(계3:20),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도 역시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며,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못한 자,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도 그 문은 닫힌 문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 본문처럼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그 문은 영원한 닫힌 문이 될 것이다. 그렇다. 지금부터라도 기름등불을 잘 준비하자.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고 활활 타오르고 있는 등불을 지녀 어둠을 뚫고 신랑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보자. 건투를 빈다. 

 

2021년 09월 03일(금)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