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7) 왜 사람은 핍박받고 순교하게 되는가?(행7:1~3,46~53)_2022-08-05(금)

https://youtu.be/nqh7u6d7ovE  [혹은 https://tv.naver.com/v/28383216 ]

 

1. 하나님의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으니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럼, 그는 예수님의 어떤 것을 닮아가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진정 닮아야 할 것은 그분의 삶이다. 그것을 우리도 살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보기 드물게 예수님과 거의 똑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신약의 인물로서 '스데반'이다. 헬라어로 '스데반'은 '스테파노스'라는 말로서 '면류관, 월계관, 승리관'을 뜻하는 말이다. 옛날 그리이스나 고린도에서 열린 올림픽 제전의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월계수의 승리관이 곧 '면류관'이다. 그는 지금도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가 면류관을 쓰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과 똑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심에 의해 거짓고소를 당했다. 이것 역시 예수님과 똑같다. 그리고 죽을 때에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죽임당한 것도 예수님과 똑같다. 그리하여 스데반은 그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 땅의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여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하늘에서 24장로의 반열에 속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한 마을을 대표하는 왕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2. 스데반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었는데 왜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했는가?

  스데반은 예수님을 닮은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는 왜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을 요약하면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스데반 역시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성령충만하게 사셨다(행10:38). 그분의 공생애를 살펴보라. 그분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을 때부터 그분 위에 성령이 내려오시더니 그분에게 머물러 계셨다. 그리고 그의 공생애기간 동안 성령께서 물붓듯이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항상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길을 함께 걸어가셨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광야로 가셨고 거기에서 시험받는 것에서부터 그분은 공생애를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성령충만함을 받은 결과 수많은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그를 뛰다랐다. 고칠 수 없는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장애인에게서 창조의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귀신들을 제압하여 쫓아내셨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시대 선지자들 중에는 병든 자를 고친 이들도 있었지만, 장애인을 고쳐준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면서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셨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는 단 한 사람도 하지 못했던 일을 행하셨으니 그것은 곧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을 깨우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하셨다. 그분은 오직 진리만을 전하셨다. 결코 사람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구부리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거짓의 아비 마귀의 말을 따라갔다. 넷째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며 책망하셨다. 심지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는 독사의 자식들과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그들더러 회칠한 무덤이라고 꾸중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보이려고만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데반도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예수님처럼 성령충만한 자였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였으며, 진리를 전하고 죄를 책망하다가 순교를 했기 때문이다. 

 

3. 스데반은 왜 핍박받고 죽임을 당했는가?

  스데반이 당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했던 이유는 앞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그가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첫째, 스데반 역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는 적어도 2만명 이상되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영과 지혜가 충만하였고(행7:3,10),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으며(행7:5), 은혜와 능력이 충만했었기 때문이다(행7:8).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출한 안수받은 성도들 가운데 그가 제일 순위로 뽑힌 것이다. 그렇다. 그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인정해주고 증언해줄 수 있는 탁월한 영성가였던 것이다. 둘째,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나타났다. 이는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씀을 증언하는 순간에 큰 기적들과 표적들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행7:8). 그러나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난다고 해서 꼭 그가 핍박받고 죽임당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뜻이다. 안수받은 성도 빌립의 경우을 보라.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는 핍박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번째와 네번째 이유가 중요하다. 이것이 사람이 핍박받고 죽임당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 스데반은 진리를 외친 자였다(행7:2~43). 그는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붙들리게 되고, 또한 선동당한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공회에 붙들려간다. 그때에 스데반은 거짓증인들에 의해 모함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공회석상에서 변호했던 말씀을 살펴보면 그가 진리만을 외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전과 율법에 관하여 거짓된 고소를 받는데, 그때 그가 변호했던 말씀을 들어보면, 그는 성전과 율법에 대해 전혀 오차가 없는 말씀을 고스란히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넷째, 스데반은 죄를 지적하여 그들을 책망했다(행7:44~53). 그렇다. 스데반은 당시 유대인들이 어떤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이 말을 듣더니 이빨을 갈았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귿르은 소리를 지르면 일제히 달려들어 돌로 치고 그를 죽게 만든다. 결국 성령충만하여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고 진리를 외치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자는 핍박을 받고 결국에는 죽임당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가 있다. 

 

4. 스데반은 어떤 진리를 외쳤는가?

  나중에 더 자세히 배우겠지만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굵직한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갖고 있었는지를 정확히 꽤뚫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브라함의 갈대아우르 시절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아들과 요셉의 꿈, 그리고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출애굽, 출애굽과정에서 일했던 모세 그리고 모세가 받은 율법말씀 그리고 증거의 장막이 다윗시대를 거쳐 솔로몬의 성전이 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이야기했던 것이다. 장차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역사에 대한 남다른 혜안과 안목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아브라함의 할례의 언약과 모세의 율법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에 대해서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5. 스데반은 어떤 죄를 책망했는가?

  공회석상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상을 낱낱이 지적한 스데반은 현장에 있는 유대인들 곧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당신들이야말로 의인을 잡아 넘겨준 자로서 줄곧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배반한 자들이며, 의인을 죽인 살인자들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인'은 예수님을 두고 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이자 다윗의 씨로서 오신 예수님, 곧 모세가 장차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킨다"고 했던 바로 그분을 얼마전에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모세의 율법이나 솔로몬의 성전은 다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진짜가 오니까 진짜를 몰라보고 그를 죽였다고 그들의 죄를 정확히 지적한다. 그러자 그들은 벌떼처럼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돌로 쳐죽이는 일이 지행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 누가 과연 핍박받고 누가 순교를 하게 되는가? 그것은 진리를 외치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자일수록 그렇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유대당국자들의 미움과 시기질투를 받았고 그리하여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항상 칭찬만 듣고 산다면 지금 나 자신에게 뭔가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진리를 외치게 되면 그럴수록 이상하리만치 핍박이 찾아 오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면 책망할수록 죽임을 당하는 일이 더 잘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이야말로 참된 생명의 길을 걷는 자의 삶이요, 천성을 향한 길을 걷고 있는 삶이 아닌가 한다. 

 

2022년 08월 05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6) 안수받은 성도 스데반의 영성은 어떤 수준이었나?(행6:8~15)_2022-08-04(목)

https://youtu.be/zwhyxdvWSbs  [혹은 https://tv.naver.com/v/28359104 ]

 

1. 스데반은 어떤 사람인가?

  스데반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뽑은 안수받은 평신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5절). 그는 사도들의 직무들 중에서 구제와 행정에 관련된 직무를 감당하기에 적합한 자라고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제일 처음으로 추천받은 자였다.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영과 지혜가 충만하였고(3절,10절), 은혜와 능력도 겸비한 자였다(8절).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에 대해서 열정적이고도 탁월한 감각을 소유한 자였다. 또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큰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할 수가 있었다(8절).

 

2. 소위 예루살렘교회의 7집사들 중에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의 안수받은 평신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때 뽑혀 안수받은 사람은 총 7명이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중에서도 남달랐다. 그는 평신도 중에서 복음을 증거할 능력을 갖춘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과부들을 돌보는 일 이상도 가능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는 당시 평신도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지 않나 싶다. 사도라고 해서 평신도보다도 항상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실제 평신도들 중에서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능력면에서 볼 때 유명하지 않은 사도들보다 뛰어났지 않았나 싶다. 만약 그가 일찍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았더라면 사도로서 택함을 받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도 그는 복음증거 능력을 갖춘 자였다. 그러니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와 변론을 할 때에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혜와 성령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10절). 그러므로 헬라파 유대인들은 그를 어떻게 하면 없이할까 궁리하여 남자들을 사주하여 거짓으로 그를 고소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일곱 명의 안수받은 성도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 사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특별히 스데반은 빌립과 더불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였기에, 스데반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빌립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으며, 거기에서 기적과 표적들까지 행하는 자가 되었다. 

 

3. 현재 천국에서 스데반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지금의 시대는 천국에서 지금 무슨 일이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높은 영성을 가진 자들에 의하면, 지금 천국에서 스데반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에 있는 24장로들 중에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예배드릴 때에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의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예배드릴 때에는 순서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위치는 역시 24장로들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144,000명의 성도들이 있다. 144,000명의 성도들은 70줄의 보좌에 차근차근 앉아있다. 그런데 보좌 자리 1번 줄에 앉은 사람과 보좌 자리 70번 줄에 앉은 사람은 수준 차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보좌 10번 자리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스데반은 24장로들의 반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사실 신약시대의 성도들 중에서 24장로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은 딱 네 사람 뿐이다. 세례 요한,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그리고 스데반 뿐이다. 그중에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마지막 주자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인 자다. 그리고 베드로는 12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24장로의 반열에 올라가 있는 자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거기에 들어가 있으며, 이어서 스데반이 들어 있다. 여기서 스데반은 평신도의 대표로서 24장로의 반열에 든 것 같아 보이고, 아마도 순교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반열에 들어가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장차 순교자로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스데반 마을에 가서 살게 될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평신도라도 해서 천국에서 꼭 낮은 수준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스데반처럼 최고 수준의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평신도라 할지라도 천국에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높은 지위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서 들어갈 수도 없으며 어떤 이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달란트와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천국에서 주님 보좌 가까이에 나아가 예배하는 자가 되려면, 정작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가를 아는 것이다. 평신도들의 사역을 보면, 대체로 안내위원이나 예배위원으로 섬긴다. 그리고 찬양대원이나 식당봉사로 그리고 주차요원으로 그리고 구역장이나 여전도회장이나 남선교회장 등의 직책들로 섬긴다. 그렇다면 평신도가 이렇듯 섬기는 직책을 성실히 감당하면 다 천국에서 큰 자라 일컫게 되는 것일까? 스데반의 사례를 보니, 그것은 기본인듯 보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본다. 그것은 아무리 평신도라 할지라도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을 회개시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에 가서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공회 석상에서도 떨지 않고 유대인 지도자들의 허물과 잘못을 정확히 지적했다. 그리하여 구약시대에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의인들과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던 것처럼 이제도 역시 의인이었던 예수님을 잡아죽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아깝지 않게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였고 회개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평신도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천국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하고 회개의 중요성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이 천국에서 귀한 신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5. 평신도들은 말씀을 전할 수 없는가?

  평신도들도 말씀을 전할 수는 없을까?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안수받은 일곱 명의 성도들을 보니, 적어도 두 사람 곧 스데반과 빌립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자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든지 아니면 그들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겠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을 놀라우리만치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구약의 율법과 성전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평신도들도 역시 이 땅에 살면서 봉사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천국복음과 회개의 중요성을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먼저 알고 본인이 실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옛날에는 이처럼 말을 잘하는 수준의 사람들이 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카카오톡과 같은 메시지 전달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와 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메시지를 전송하면서 "한 번만 들어봐"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한 다음에는 당연히 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나 자신이 꼭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도 안 되면 "한 번 같이 가보자"하고 빌립처럼 천국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데려오면 될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시기로서, 알곡을 거두는 시기이다. 그리고 어린양의 신부로 단장할 시기이기 때문에 천국복음전파와 회개의 중요성 전파는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2022년 08월 04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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