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2(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도행전강해(30) 모세는 준비된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도 하나님의 때가 있었다(행7:17~3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RmUZ5v--wvs  [혹은 https://tv.naver.com/v/28578512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이 땅에 보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그에게 비로소 일을 시키실 때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일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때'라고 부른다. 모세에게도 그랬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게 하려고 선택한 특별한 그릇이었다. 하지만 그가 언제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는 모세 자신도 사실은 모르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 중에는 모세가 40세가 아니라 80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비로소 부름받아 쓰임받았다는 것을 출애굽기를 통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왜 모세는 40세에는 안 되었고 80세가 되어서 비로소 쓰임받게 되었던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과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임하기까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가? 여기,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때에 관한 비밀이 있으니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래서 나도 언제 어떻게 쓰임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때까지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성경을 볼 때 종합적으로 통전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의 기록들은 모두가 다 역사적인 사실들이며 그것은 영구히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 책을 우리는 '행위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허락이 있으면 그 기록들을 다시 들여다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라 할지라도 다른 또 누군가가 그 장면을 보고 성경에 기록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의 기록들 중에서 생략된 부분을 다른 성경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모세의 삶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모세가 직접 기록하지 않았어도 성령의 감동으로 그 장면을 들여다 본 어떤 기록자들이 다른 곳에 모세의 사건을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로서 구약 성경에서는 '시편'의 말씀이며(시78편) 신약 성경에서는 '사도행전'(행7장)과 '히브리서'(히11장)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기록된 모세의 이야기를 다른 성경에서 찾아봄으로써 그때 일을 보다 더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고, 거기에 기록되지 않은 일들까지도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느샌가 모세가 3기의 인생을 살았다고 알고 있다. 출생부터 40세까지, 그리고 40세에서 80세까지 그리고 80세에서 120세까지로 말이다. 그럼 누가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었을까? 출애굽기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80세 이전의 삶에 관하여 40년과 또 40년의 삶이었다고 기록된 곳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모세가 태어나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어 40년을 살았다는 것(행7:20~23)과 다시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서 40년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행7:30~36). 그러므로 성경은 종합적으로 그리고 통전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3. 모세는 태어나서 40세까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구약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3대 인물을 들라고 하면 아마도 우리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언급할 것이다. 그중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세'는 율법을 받은 자로서 잘 알려져 있고, '다윗'은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가장 완벽한 왕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 다 모두 예수님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두 번째 사람 '모세'는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하여 데리고 나왔고 광야에서 율법과 성막제도를 받았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코앞까지 인도한 영도자였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모세가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자체가 없다는 말과도 아마 일치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태어나서 40세까지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는 출애굽기 2장에서 그의 출생과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에 자신의 동족을 돌아볼 생각이 나서 저지른 살인 사건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태어난 후 석달 쯤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된 이후 40세가 되기까지 모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의 안수받은 성도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모세가 40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비로소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7:22에 나온다. 우선 행7:22의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해 보자. 

행7:22 그리고 모세가 애굽사람들의 모든 지혜 안에서 훈련받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말들과 일들 안에서 능력 있는 이로 있어 왔다. 

  여기서 "있어 왔다"는 말은 미완료 구문으로서 그가 미디안으로 도망치기 전까지 그는 애굽에서 그것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자 왕자로서 애굽의 모든 학문을 다 익혔을 뿐만 아니라 말들이 능했고, 일들을 잘 처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록을 보더라도, 그가 젊었을 때에 구스에 원정을 나가서 대승을 거두고 오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그는 문화 예술 언어 분야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분야에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냥 배운 수준이 아니라 애굽의 바로가 될 자로서 강하게 훈련을 받았고 또한 그것을 잘 수행해 내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5. 모세는 왜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무명의 삶을 살아야 했는가?

  이렇게 뛰어난 모세가 왜 갑자기 40세부터 80세까지 그만 미디안 광야에서 무명의 목동으로 살아야 했을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때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성급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자기가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이다. 그 일은 그의 나이 40세에 일어났다. 그것에 대해 스데반은 이렇게 설교하였다. 

행7:23~25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을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동의하리라)고 생각(확신)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동의하지) 못하였더라

  그랬다. 그는 나이 40이 다 찼을 때에 자신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동족 한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는 가만 있지를 못하고 그를 쳐죽이는 일을 하고 말았다. 이것은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동의하는 사건이 될 줄로 알았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모세가 자신의 혈기로서 애굽 사람을 쳐죽인 행동은 결코 장차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로서의 품성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의 행동을 동의해 주시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모든 것을 틀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애굽 땅에서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친다. 왜냐하면 아직 그에게 하나님의 때가 오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하나님의 때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일해야 할 때를 무려 40년 뒤로 더 밀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6.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정하신 때 곧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까? 우리 모든 인생은 지금의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 시간은 우리가 임의로 막을 수가 있다. 이때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가리켜 우리는 '크로노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해진 딱 그 시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카이로스'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전3:1~2[직역] 모든 일에는 시간(크로노스)이 있고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다 때(카이로스)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그런데 모세는 '크로노스' 속에서 자신이 '카이로스'를 정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데도 모세는 "이제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갖추었으므로, 바로 지금이 내가 일을 시작해야 할 때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고 자신을 지금까지 훈련시켰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알게 하기 위해 애굽 사람을 쳐죽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세의 생각이었을 뿐 하나님의 때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수를 모세만 저지르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러한 실수를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곧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었음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출3:4~6).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쓰시고자 준비시켰다는 것과 이제 그 일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경로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부르심'이라고 부른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세가 40세에 애굽인을 쳐죽인 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믿고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대제국 애굽에서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모세가 40년 뒤 80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나오려고 할 때에도 얼마나 바로의 완강한 반대가 있었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10가지 초자연적인 재앙을 그들 위에 내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이 준비되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제는 되었다"고 할 때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7.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우리가 준비하고 있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우리가 준비하고 있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까지 우리가 정작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적어도 3가지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쓰실 인재가 되도록 묵묵히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소양과 자질을 익히고 훈련받고 몸에 배게 하는 것이다. 모세는 태어나서 40년간 그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때를 오게 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둘째로, 기도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도가 쌓여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지만 우리 인생들이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 없이는 하나님께서도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말씀은 출애굽기 2장에 기록되어 있다.

출2:23~25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그렇다. 기도의 분량이 차야 하는 것이다. 기도가 쌓여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을 만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르짖어 기도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적으로 일러 준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를 시켰는가? 모세가 태어날 즈음에 모든 사내아이를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허락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에 대한 애굽의 학대가 가속화 되자 더욱더 부르짖어 기도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도 차야 했다. 또한 더불어 모세의 기도가 채워져야 했다. 그런데 모세는 40년 동안 거의 기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홀로 40년간 광야로 내보내어진 것이다. 그리고 40년을 아침저녁으로 자연 속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40년 뒤에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또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모세가 40세에 미디안으로 도망쳐 미디안에서 40년을 살았을 때에 그 훈련의 시간이 마치는 날 찾아오셔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힘을 빼는 일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일을 마치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나를 비우고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런데 40세까지 모세는 얼마나 자신의 힘과 지혜로 충만했던가? 그러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가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미디안 광야로 내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모세는 80세부터 쓰임을 받았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그의 나이 120세가 되었어도 그의 눈은 결코 흐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8. 나오며

  모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기다릴 수 없었다. 자기 딴에는 애굽의 모든 학문과 지혜를 익혔고 정치 군사 훈련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기의 성과도 거두었었다. 또한 자기의 어머니(하셉슈트 공주)가 살아 있었기에 얼마든지 모친의 도움을 받아 남부 애굽에서 왕으로 등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때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애굽에서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찌 이끌고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굽의 술사들도 지팡이로 뱀을 만들지 않았는가? 애굽의 나일강을 핏빛으로 물들게 하지 않았는가? 그들에게도 어마어마한 능력들이 있었다. 물론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때가 오기까지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먼저는 소양과 자질을 갖추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는 기도의 분량을 채워야 한다. 그리고 셋째는 내 힘을 빼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가 오게 하는 비결이다.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지 말라. 우리의 기도의 분량이 내 시대에 차지 않는다면 2~3대에서까지라도 채우리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가 왔음을 우리에게 알려줄 때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면 겸손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2022년 08월 12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9) 스데반 당시 유대인들이 본받아야 할 아브라함의 믿음(행7:1~16)_2022-08-12(금)

https://youtu.be/KykgKMpem7o  [혹은 https://tv.naver.com/v/28578421 ]

 

1. 스데반이 공회석상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 가운데 잘못된 점은 무엇이었는가?

  스데반이 거짓고소자들에 의해서 산헤드린 공회석상에 서 있었을 때에, 유대인들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던 것일까?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육체의 할례를 받았던 자기자신들은 이미 선택받은 사람이며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화려하게 보이는 성전을 우상처럼 떠받들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자기들은 천사가 전해준 율법도 귀하게 여긴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로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는데도 그 예수님을 배척하고 결국 죽였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은 형식주의에 완전히 물든 나머지 하나님의 뜻과 실제에 대해셔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2. 스데반이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깨우치기 위해 설교에 첫번째로 등장시킨 인물은 누구였는가?

  그러자 스데반은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첫번째로 아브라함을 등장시킨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스데반이나 공회회원이나 다같이 존경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스데반은 공회에 있는 장로들과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행7:2)" 그랬다. 그는 그들을 가리켜 '부형들' 곧 '남자 형제들과 아버지들이여'라고 치칭함으로서, 먼저는 자신을 낮추었으며, 또하는 공회원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그들에게나 스데반에게나 다같이 존경하는 인물이자 그들의 조상이며 한 혈통 아래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부각시킨 것이다. 하지만 스데반이 갖고 있는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그들이 갖고 있던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3. 스데반이 아브라함을 맨 처음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왜 스데반은 성전과 모세의 규례로 자신을 고소했던 자들 앞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꺼냈던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성전과 모세의 규례가 형식주의로 흘러가서 이제는 거의 절대시되고 있고 우상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성전 건물을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있었으며, 모세의 규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전을 짓게 하신 목적과 모세를 통해 일러준 율법규례의 본래적인 의도에서 많이 빗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과 스데반 자신에게 있어서 공통된 영역 곧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꺼내어 그들이 현재 어떤 실수를 하고 있는지를 지적한 것이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자 공회원들이 아브라함이 가진 삶과 믿음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잡힌 것 하나 없었어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따라갔는데, 지금의 세대 사람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붙들고 있다라는 것이다. 

 

4.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보이지 않고 약속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아브라함은 자신의 손에 어떤 것이 쥐어지지 않았어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갔던 것이다. 그 증거는 이렇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쥐어진 것 하나 없이도 그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갔었다. 둘째로 어느 덧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는 했으나 그곳에서 발 붙힐 만한 땅도 유업으로 받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한 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였다는 것이다(롬4:19~21). 셋째로, 중간에 잠깐의 실수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이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할례를 행했는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기꺼이 감행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가 할례를 받으면 일주일동안 꿈쩍도 하기 어려운데, 아브라함은 자신과 13살된 이스마엘과 자기 밑에 있는 모든 남종들 약 1천여명에게 모조리 할례를 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만약 그때에 적이 쳐들어오면 한꺼번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과 자신의 집과 자신의 종들의 보호자요 수호자인 것을 믿었기에 그렇게 행돋한 것이다. 넷째로, 그가 살아있을 때에 약속의 아들로서는 이삭 딱 한 사람만 곁에 있었지만 그는 약속의 땅과 자손번성의 약속을 그의 아들에게 기업으로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이제 100세가 되어 기적처럼 얻은 아들이었던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혀 흐트러뜨림 없이 순종했다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우상이 될 만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100세 낳은 독자 이삭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아들마저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니 그냥 내어드린 것이다. 이것은 그가 보이는 어떤 것을 우상시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일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땅의 것을 결코 자신의 우상으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토 친척 아비집도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카 롯도 떠나보낼 수 있었고,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도 후사의 명단에서 제외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100세 낳은 독자 이삭도 기꺼이 번제로 드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아브라함의 신앙으로부터 우리도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아브라함에게서 배울 수 있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않겠다는 그의 각오다. 그러므로 우리도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어떤 것을 진짜 복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도 역시 우상숭배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기업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어야 한다. 곧 그분의 약속의 말씀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늘에 처소를 예비해놓고 있다면 그대로 믿는 것이다. 맡은 일에 충성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눈에 보이는 복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의 잘못을 겸손히 시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는 어떤 것일지라도 기꺼이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이 그날 할례를 받았다. 이는 그가 잠시 육체대로 행했던 것에 대한 회개의 표시였다. 육체대로 행하여 첩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것이 바로 할례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할례를 한꺼번에 다 받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자신과 식솔들 모두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 그것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눈에 보이는 단 하나의 축복이라도 주님이 달라고 하시면 기꺼이 드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린 일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은 그 일 하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시면 그냥 드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아들이 필요하다면 다시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믿은 것이다. 자기의 아들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데반 당시 유대인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씨 곧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씨를 붙잡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성전과 육체의 할례만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고 한느 말이 나오자 화가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는 하늘에 닿게 된다. 그리하여 약 40년 뒤 A.D.70년 이스라엘 나라는 역사 속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만다. 

 

2022년 08월 12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8) 스데반은 무엇을 책망했으며 어떤 진리를 전했는가(행7:44~53)_2022-08-09(화) 

https://youtu.be/9D_HA5i0FeA  [혹은 https://tv.naver.com/v/28450211 ]

 

1. 스데반은 공회석상에서 어떤 변호를 했는가?

  예루살렘 교회의 안수받은 성도였던 스데반은 과부들을 위한 '구제'의 일만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며, 기도에 있어서도 기사들과 표적들이 나타날 만큼 강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능히 당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사람들 매수하여 스데반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그를 공회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자 스데반은 이전의 베드로처럼 70명이 모여있는 공회석상에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그때 스데반은 어떤 변호의 말씀을 했을까? 그것을 요약하면, 일종의 설교와 같았다. 그리고 그 내용은 크게 3가지 정도였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할례의 언약과 모세의 율법과 솔로몬의 성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진리였으며, 그것은 유대인들이 이때껏 잘못 알고 있고 잘못 행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는 내용이었다. 

 

2. 스데반은 당시 공회석상에서 무엇을 책망했는가?

  스데반은 차분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차분히 자신과 그들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공회원들이나 자신이 다 똑같은 한 핏줄이자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 굳이 둘로 나눠져서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 것이다. 그리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까지의 족장들의 이야기를 언급했고, 이후에 기근으로 애굽에서 들어갔다가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모세가 했던 역할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모세가 세운 증거의 장막이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성전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은 과연 지금 어디에 계시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고 있는지를 언급하였다. 이러한 진술과정을 통해 스데반은 그들에게 6가지를 책망한 것이다. 

  첫째, 자신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할례만 받았을 뿐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으며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자신의 조상들의 이야기는 사실 시기와 질투심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의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야곱의 10명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형제였던 요셉을 핍박하고 죽이려 하였으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죽이려 하였으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회개를 외쳤던 자들 곧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다는 것이다. 셋째, 그들이 모세로부터 율법을 받았지만 율법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넷째, 자기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해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40년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살았고 이스라엘 본토에서 생활할 때도 그렇게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서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은 그분을 진실로 섬기는자들의 마음 속에 있으며, 어디에나 계시는데 유대인들은 성전 자체를 우상시해왔다는 것이다. 여섯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했던 아브라함의 씨이자, 모세가 말했던 '나와같은 선지자' 한 사람을 보내준다고 했던 그분이요,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분이 의인이신 예수님이신데,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그를 죽이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3. 스데반이 전했던 진리의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스데반은 책망과 동시에 무엇이 자신과 유대인들이 지켜야만 했으며 순종해야만 했던 진리였는지를 증거한다. 그것도 역시 여섯 가지 정도로 요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할례의 언약의 효력은 형식에 있지 않고 그 내용과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례는 반드시 회개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할례를 받게 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지 못했던 것을 참회하는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지 할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째, 참된 믿음은 진실된 하나님의 종들을 잘 알아보고 그들의 지도를 잘 따라가는 것이지 그러한 참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에 대한 표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우상숭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40년간 장막에 거했으나 그들은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장막에 감추어 두었던 몰록의 신과 레판(토성)의 별신을 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우상숭배행위는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을 들어간 후에도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은 천사가 전해준 것이지만 그것마저 따르지 않았으며, 또한 율법은 모형과 그림자이며 율법을 만드신 예수님의 말씀이 진짜라는 것이다. 다섯째, 솔로몬이 지은 성전 역시 모형과 그림자이며, 진정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참 성전이었다는 것이다. 여섯째, 예수님은 요셉의 삶으로서 예표되었고 모세가 곧 오리라고 예언하였으며,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의인이셨고 또 그 약속대로 오셨는데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분이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4. 스데반의 증거가 힘이 있었고 또한 유대인들이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스데반의 증거가 힘이 있었던 이유는 첫째는 그의 모든 증거가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상태에서 말씀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의 증거했던 모든 말씀은 다 성경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 및 거역적인 삶 그리고 성전에 대한 맹목적인 신격화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성경적인 근거로 변호했기 때문이다. 그때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장막에 돌아가서는 여러 우상들(애굽의 송아지우상, 암몬의 몰록신, 바벨론과 바사의 레판(토성)의 별신)을 섬기고 살아왔음을 아모스 5:25~27의 말씀을 인용하여 언급한다(행7:42~43). 또한 하나님께서는 만상의 주인으로서 하늘에 계시며 언제 어디서든지 그분을 찾는다면 만날 수 있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으로 잘못하고 가르치고 있음을 이사야서 66:1~2의 말씀을 인용하여 증언했던 것이다(행7:49~50).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곳에만 제한되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행7:48). 그러니 그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증거를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빨을 갈더니 급기야는 돌로 그를 쳐죽이는 파렴치한 행각을 벌이게 된다. 

 

5. 스데반이 증거했던 책망과 진리의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는가?

  스데반은 사실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가 했던 모든 말씀은 다 성경에 근거한 것이었고 또한 참 진리를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생명을 얻을 자는 이러한 책망의 말을 들었을 때 반응이 다르다. 그들은 이러한 책망을 말을 듣게 되면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겸손히 자신의 죄를 자복하면서 "그러면 내가 어찌할꼬"라는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자는 책망의 말을 들었을 때에 더 악랄하게 나온다. 이것이 생명의 길을 걸어갈 자와 사망의 길을 걸어갈 자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생명을 얻을 자는 진리의 말씀 앞에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말씀을 왜곡하고 살아왔으며 잘못 적용하고 살아왔는지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유턴하여 그 말씀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사망의 길을 걸어가는 자는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그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외식된 행위만을 진리로 포장하며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진정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살펴보자. 그리고 진리의 말씀에 나는 과연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왔는지를 다시 돌아보자. 오 주여, 우리의 어리석음과 교만함과 우준함을 용서해 주소서. 아멘.

 

2022년 08월 09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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