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1) 순교하기전 스데반의 영성과 그의 마지막 기도(행7:54~60)_2022-08-16(화)

https://youtu.be/3iHe3EVvnfY  [혹은 https://tv.naver.com/v/28646882 ]

 

1. 공회석상에 선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공회석상에 선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복음의 정통성을 알리고 유대인들의 오류를 논증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스데반의 순교로 이어졌다. 왜 그랬을까?

 

2. 영생으로 가는 사람과 멸망으로 가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전에 사도 베드로도 스데반과 거의 비슷한 설교를 여러 번상 하였다. 한 번은 오순절날 방언을 듣고 몰려든 무리들에게 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성전 미문에 있는 나면서 못 걷는 자를 일어서게 했을 때 몰려온 사람들에게 솔로몬의 행각에서 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베드로도 공회석상에서 증거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설교했을 때에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사실을 시인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반응했다(행2:36~37).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겸손히 시인하고 회개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영생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공회원들과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공회원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특히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자신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때에 그들은 격분했고 이빨을 갈았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스데반을 예루살렘 성밖으로 끌고가더니 거기서 돌로 쳐 죽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이러한 차이가 난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다. 참된 복음을 듣고 회개하라는 책망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차이다. 이때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 것이고, 이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멸망으로 가는 것이다. 

 

3. 죽음 직전의 스데반의 영성은 어떠했는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스데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것은 매우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가 공회 앞에서 복음증거를 마치자,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공회석상에서 그 모습을 그대로 그들에게 증거했다.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8). 이것은 공회원들로 하여금 분노를 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 공회 석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물었을 때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3~64). 그러자 대제사장이 자시의 겉옷을 찢으며 그가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리고 공회원들 역시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내렸다. 그런데 지금 스데반이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다른 심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즉결처형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성밖으로 잡아끌어서 내치더니 돌로 그를 죽인다. 그런데 묻고 싶다. 누구든지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보좌를 볼 수가 있는 것일까? 당시 공회에는 72명의 공회원들과 고소하는 자들이  여럿 있었으나 그들 중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보좌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홀로 외로이 서 있는 스데반의 눈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보인 것이다. 이는 스데반이 얼마나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이며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랬다. 그는 공회 석상에서 변호하는 그 순간마저도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증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증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가 알 수 있도록 그의 눈이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하신 것이다. 스데반은 사실 평신도였다. 그런데도 그의 영성이 이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어뗘했는가? 그들은 캄캄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영성은 그냥 '꽝'이었던 것이다. 

 

4.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는 무엇이었는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 그는 2가지 기도를 드린다. 하나는 자신의 영혼을 주 예수님께서 받아달라고 위탁하기는 기도를 드렸다. 즉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라고 기도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기도하셨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예수께서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이라고 기도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의 죄가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이는 그들이 지은 죄들을 예수님께서 용서해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 역시도 예수님의 기도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0"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는 예수님을 닮은 기도였다고 할 수 있이다. 그렇다. 그는 끝까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갔고 그분이 하신 말씀대로 살아간 것이다. 

 

5. 스데반의 마지막의 기도가 끼친 놀라운 영향은 무엇인가?

  스데반이 돌아맞아 죽어갈 때에 그는 마지막으로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들의 죄가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숭고한 기도는 대체 무엇을 말해주는가? 만약 그때에 스데반이 그들을 놓고 "주여, 저들의 죄를 꼭 기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면, 아마도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그 죄값을 치르며 비참하게 죽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들 중에 한 명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그들을 축복하는 기도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때에는 그 어떤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스데반을 죽일 때에 거짓 증인들이 자기들의 옷을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는데, 그때 그들의 옷을 맡았던 청년 사울이 회심을 하여 세계적인 복음전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당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기며 사탄의 앞잡이가 되었던 사람이 그만 사탄의 포로에서 벗어나서 겸손히 주님께 붙잡힌 종으로 쓰임받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한 명의 순교자의 영혼을 받으시고 악한 사탄 마귀로부터 위대한 한 사람의 영혼을 건져내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탁월하고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2022년 08월 16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7) 왜 사람은 핍박받고 순교하게 되는가?(행7:1~3,46~53)_2022-08-05(금)

https://youtu.be/nqh7u6d7ovE  [혹은 https://tv.naver.com/v/28383216 ]

 

1. 하나님의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으니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럼, 그는 예수님의 어떤 것을 닮아가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진정 닮아야 할 것은 그분의 삶이다. 그것을 우리도 살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보기 드물게 예수님과 거의 똑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신약의 인물로서 '스데반'이다. 헬라어로 '스데반'은 '스테파노스'라는 말로서 '면류관, 월계관, 승리관'을 뜻하는 말이다. 옛날 그리이스나 고린도에서 열린 올림픽 제전의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월계수의 승리관이 곧 '면류관'이다. 그는 지금도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가 면류관을 쓰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과 똑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심에 의해 거짓고소를 당했다. 이것 역시 예수님과 똑같다. 그리고 죽을 때에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죽임당한 것도 예수님과 똑같다. 그리하여 스데반은 그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 땅의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여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하늘에서 24장로의 반열에 속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한 마을을 대표하는 왕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2. 스데반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었는데 왜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했는가?

  스데반은 예수님을 닮은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는 왜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을 요약하면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스데반 역시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성령충만하게 사셨다(행10:38). 그분의 공생애를 살펴보라. 그분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을 때부터 그분 위에 성령이 내려오시더니 그분에게 머물러 계셨다. 그리고 그의 공생애기간 동안 성령께서 물붓듯이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항상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길을 함께 걸어가셨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광야로 가셨고 거기에서 시험받는 것에서부터 그분은 공생애를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성령충만함을 받은 결과 수많은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그를 뛰다랐다. 고칠 수 없는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장애인에게서 창조의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귀신들을 제압하여 쫓아내셨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시대 선지자들 중에는 병든 자를 고친 이들도 있었지만, 장애인을 고쳐준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면서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셨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는 단 한 사람도 하지 못했던 일을 행하셨으니 그것은 곧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을 깨우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하셨다. 그분은 오직 진리만을 전하셨다. 결코 사람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구부리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거짓의 아비 마귀의 말을 따라갔다. 넷째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며 책망하셨다. 심지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는 독사의 자식들과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그들더러 회칠한 무덤이라고 꾸중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보이려고만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데반도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예수님처럼 성령충만한 자였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였으며, 진리를 전하고 죄를 책망하다가 순교를 했기 때문이다. 

 

3. 스데반은 왜 핍박받고 죽임을 당했는가?

  스데반이 당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했던 이유는 앞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그가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첫째, 스데반 역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는 적어도 2만명 이상되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영과 지혜가 충만하였고(행7:3,10),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으며(행7:5), 은혜와 능력이 충만했었기 때문이다(행7:8).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출한 안수받은 성도들 가운데 그가 제일 순위로 뽑힌 것이다. 그렇다. 그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인정해주고 증언해줄 수 있는 탁월한 영성가였던 것이다. 둘째,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나타났다. 이는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씀을 증언하는 순간에 큰 기적들과 표적들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행7:8). 그러나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난다고 해서 꼭 그가 핍박받고 죽임당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뜻이다. 안수받은 성도 빌립의 경우을 보라.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는 핍박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번째와 네번째 이유가 중요하다. 이것이 사람이 핍박받고 죽임당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 스데반은 진리를 외친 자였다(행7:2~43). 그는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붙들리게 되고, 또한 선동당한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공회에 붙들려간다. 그때에 스데반은 거짓증인들에 의해 모함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공회석상에서 변호했던 말씀을 살펴보면 그가 진리만을 외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전과 율법에 관하여 거짓된 고소를 받는데, 그때 그가 변호했던 말씀을 들어보면, 그는 성전과 율법에 대해 전혀 오차가 없는 말씀을 고스란히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넷째, 스데반은 죄를 지적하여 그들을 책망했다(행7:44~53). 그렇다. 스데반은 당시 유대인들이 어떤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이 말을 듣더니 이빨을 갈았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귿르은 소리를 지르면 일제히 달려들어 돌로 치고 그를 죽게 만든다. 결국 성령충만하여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고 진리를 외치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자는 핍박을 받고 결국에는 죽임당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가 있다. 

 

4. 스데반은 어떤 진리를 외쳤는가?

  나중에 더 자세히 배우겠지만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굵직한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갖고 있었는지를 정확히 꽤뚫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브라함의 갈대아우르 시절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아들과 요셉의 꿈, 그리고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출애굽, 출애굽과정에서 일했던 모세 그리고 모세가 받은 율법말씀 그리고 증거의 장막이 다윗시대를 거쳐 솔로몬의 성전이 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이야기했던 것이다. 장차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역사에 대한 남다른 혜안과 안목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아브라함의 할례의 언약과 모세의 율법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에 대해서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5. 스데반은 어떤 죄를 책망했는가?

  공회석상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상을 낱낱이 지적한 스데반은 현장에 있는 유대인들 곧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당신들이야말로 의인을 잡아 넘겨준 자로서 줄곧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배반한 자들이며, 의인을 죽인 살인자들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인'은 예수님을 두고 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이자 다윗의 씨로서 오신 예수님, 곧 모세가 장차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킨다"고 했던 바로 그분을 얼마전에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모세의 율법이나 솔로몬의 성전은 다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진짜가 오니까 진짜를 몰라보고 그를 죽였다고 그들의 죄를 정확히 지적한다. 그러자 그들은 벌떼처럼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돌로 쳐죽이는 일이 지행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 누가 과연 핍박받고 누가 순교를 하게 되는가? 그것은 진리를 외치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자일수록 그렇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유대당국자들의 미움과 시기질투를 받았고 그리하여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항상 칭찬만 듣고 산다면 지금 나 자신에게 뭔가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진리를 외치게 되면 그럴수록 이상하리만치 핍박이 찾아 오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면 책망할수록 죽임을 당하는 일이 더 잘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이야말로 참된 생명의 길을 걷는 자의 삶이요, 천성을 향한 길을 걷고 있는 삶이 아닌가 한다. 

 

2022년 08월 05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6) 안수받은 성도 스데반의 영성은 어떤 수준이었나?(행6:8~15)_2022-08-04(목)

https://youtu.be/zwhyxdvWSbs  [혹은 https://tv.naver.com/v/28359104 ]

 

1. 스데반은 어떤 사람인가?

  스데반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뽑은 안수받은 평신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5절). 그는 사도들의 직무들 중에서 구제와 행정에 관련된 직무를 감당하기에 적합한 자라고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제일 처음으로 추천받은 자였다.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영과 지혜가 충만하였고(3절,10절), 은혜와 능력도 겸비한 자였다(8절).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에 대해서 열정적이고도 탁월한 감각을 소유한 자였다. 또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큰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할 수가 있었다(8절).

 

2. 소위 예루살렘교회의 7집사들 중에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의 안수받은 평신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때 뽑혀 안수받은 사람은 총 7명이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중에서도 남달랐다. 그는 평신도 중에서 복음을 증거할 능력을 갖춘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과부들을 돌보는 일 이상도 가능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는 당시 평신도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지 않나 싶다. 사도라고 해서 평신도보다도 항상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실제 평신도들 중에서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능력면에서 볼 때 유명하지 않은 사도들보다 뛰어났지 않았나 싶다. 만약 그가 일찍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았더라면 사도로서 택함을 받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도 그는 복음증거 능력을 갖춘 자였다. 그러니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와 변론을 할 때에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혜와 성령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10절). 그러므로 헬라파 유대인들은 그를 어떻게 하면 없이할까 궁리하여 남자들을 사주하여 거짓으로 그를 고소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일곱 명의 안수받은 성도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 사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특별히 스데반은 빌립과 더불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였기에, 스데반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빌립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으며, 거기에서 기적과 표적들까지 행하는 자가 되었다. 

 

3. 현재 천국에서 스데반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지금의 시대는 천국에서 지금 무슨 일이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높은 영성을 가진 자들에 의하면, 지금 천국에서 스데반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에 있는 24장로들 중에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예배드릴 때에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의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예배드릴 때에는 순서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위치는 역시 24장로들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144,000명의 성도들이 있다. 144,000명의 성도들은 70줄의 보좌에 차근차근 앉아있다. 그런데 보좌 자리 1번 줄에 앉은 사람과 보좌 자리 70번 줄에 앉은 사람은 수준 차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보좌 10번 자리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스데반은 24장로들의 반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사실 신약시대의 성도들 중에서 24장로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은 딱 네 사람 뿐이다. 세례 요한,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그리고 스데반 뿐이다. 그중에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마지막 주자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인 자다. 그리고 베드로는 12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24장로의 반열에 올라가 있는 자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거기에 들어가 있으며, 이어서 스데반이 들어 있다. 여기서 스데반은 평신도의 대표로서 24장로의 반열에 든 것 같아 보이고, 아마도 순교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반열에 들어가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장차 순교자로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스데반 마을에 가서 살게 될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평신도라도 해서 천국에서 꼭 낮은 수준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스데반처럼 최고 수준의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평신도라 할지라도 천국에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높은 지위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서 들어갈 수도 없으며 어떤 이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달란트와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천국에서 주님 보좌 가까이에 나아가 예배하는 자가 되려면, 정작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가를 아는 것이다. 평신도들의 사역을 보면, 대체로 안내위원이나 예배위원으로 섬긴다. 그리고 찬양대원이나 식당봉사로 그리고 주차요원으로 그리고 구역장이나 여전도회장이나 남선교회장 등의 직책들로 섬긴다. 그렇다면 평신도가 이렇듯 섬기는 직책을 성실히 감당하면 다 천국에서 큰 자라 일컫게 되는 것일까? 스데반의 사례를 보니, 그것은 기본인듯 보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본다. 그것은 아무리 평신도라 할지라도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을 회개시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에 가서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공회 석상에서도 떨지 않고 유대인 지도자들의 허물과 잘못을 정확히 지적했다. 그리하여 구약시대에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의인들과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던 것처럼 이제도 역시 의인이었던 예수님을 잡아죽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아깝지 않게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였고 회개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평신도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천국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하고 회개의 중요성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이 천국에서 귀한 신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5. 평신도들은 말씀을 전할 수 없는가?

  평신도들도 말씀을 전할 수는 없을까?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안수받은 일곱 명의 성도들을 보니, 적어도 두 사람 곧 스데반과 빌립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자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든지 아니면 그들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겠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을 놀라우리만치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구약의 율법과 성전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평신도들도 역시 이 땅에 살면서 봉사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천국복음과 회개의 중요성을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먼저 알고 본인이 실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옛날에는 이처럼 말을 잘하는 수준의 사람들이 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카카오톡과 같은 메시지 전달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와 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메시지를 전송하면서 "한 번만 들어봐"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한 다음에는 당연히 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나 자신이 꼭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도 안 되면 "한 번 같이 가보자"하고 빌립처럼 천국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데려오면 될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시기로서, 알곡을 거두는 시기이다. 그리고 어린양의 신부로 단장할 시기이기 때문에 천국복음전파와 회개의 중요성 전파는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2022년 08월 04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5) 교회에 의해 처음으로 세워진 안수받은 성도의 자격기준은?(행6:1~7)_2022-08-02(화) https://youtu.be/exbx3--lNyA [혹은 https://tv.naver.com/v/28312450 ]

 

1. 최초의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불평은 무엇이었는가?

최초의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불평은 무슨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성도들의 구제의 일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1절). 즉 히브리파 과부들은 구제를 잘 받았는데, 헬라파 과부들은 구제를 잘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원인으로는 아마도 1차적으로 볼 때, 교회의 성도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져서 구제할 대상도 많아지고 있었는데, 사도들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 빠진 자들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히브리파 과부들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도들과 언어 소통이 잘 되었지만, 아무래도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과부들은 사도들과 소통이 좀 덜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구제 대상에서 빠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 일에 대한 호소도 어렵다보니 불만이 누적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2차적인 것으로는 사도들의 업무가 과중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말씀만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무했던 그들이었는데, 성도들이 자꾸 사도들의 발 앞에 헌금을 가져오다보니, 그것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일이 사도의 주업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업무가 과중해서져 모든 것을 다 소화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헬라파 과부들의 불만은 점점 더 쌓여져 갔을 것이다.

 

2. 사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하였는가?

그러자 사도들은 이 문제를 놓고 제자들의 무리들을 불러모았다. 아마도 집집마다 모였던 작은 교회들의 대표들을 소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부여된 직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식탁들의 봉사에 치중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자들의 대표들로 하여금 구제와 행정의 일에 적합한 사람을 뽑아주기를 부탁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 놀라운 위탁이다. 즉 사도들이 직접 그 일에 적합한 일꾼들을 선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전적으로 평신도 대표들에게 맡겨 그 일을 추진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도들은 이 선출건에 대해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3. 초대교회 성도들은 누구를 일꾼으로 선택했는가?

그러자 성도들의 대표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을 1차적으로 선발하였다(5절). 그리고 이어서 빌립을 그리고 이어서 나머지 5명의 일꾼들로서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개종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선발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린 다음 그들에게 안수하여 공적으로 그 직임을 맡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의 평신도 대표들이 뽑은 일꾼들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들 전부가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2명의 히브리파 유대인의 대표로서 사도들이 있어서 그들은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 일을 전적으로 감당하게 되었고, 7명의 헬라파 유대인의 대표로서 7명의 안수받은 성도들은 성도들의 구제와 행정사무를 전적으로 담당하게 된 것이다.

 

4. 사도들이 제시했던 교회 일꾼들의 기준과 평신도 대표들이 뽑아온 일꾼들의 기준은 어떻게 달랐는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사도들이 제시했던 기준으로 일꾼들을 뽑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사도들이 제시한 기준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평신도 일꾼들을 뽑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사도들이 제시했던 기준보다 실제는 훨씬 더 엄격하게 구별되었던 사람들을 뽑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제시했던 평신도 일꾼들의 자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3가지다. 첫째는, 영이 충만한 사람이요, 둘째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셋째는 칭찬듣는 남자들이라고 했다(3절). 그럼 먼저, 첫번째 기준을 보자. 그것은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면 좋겠다는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아무래도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기준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듣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세번째 조건은 칭찬듣고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주변 성도들에 의해 그 믿음이 증명이 된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마르튀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동사는 "증언하다. 증인이 되다, 확증하다'라는 동사의 분사 수동태형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믿음이 교회공동체에서 인정된 사람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선발했던 사람들은 이보다 더 강력했다. 왜냐하면 뽑힌 일꾼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고, 말씀증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의의가 있는가? 첫째로, 그들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을 뽑았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에서는 일처리만 잘 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을 감당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에서 모이는 사람들의 그러한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영이 충만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이면 괜찮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뽑아왔다는 점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뽑아왔다는 것은 그들은 일만 잘하는 자를 기준으로 뽑지 아니하고, 성령의 권능과 지혜가 탁월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을 하는 사람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로, 다른 성도들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을 뽑으라고 제안했지만 실제 성도들은 복음을 위해서 복음을 바칠 자를 뽑아왔다. 그 대표가 바로 스데반이었던 것이다.

 

5. 오늘날에 교회의 직분자를 선출하는 것과 초대교회에서의 선출과정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달랐는가?

교회의 일꾼들을 뽑을 때에,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뽑았다는 측면에서는 오늘날이나 그때나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오늘날과 그때가 확연히 달랐던 것은 오늘날에는 대부분 기준 미달의 사람들을 뽑게 되지만 그때에는 자격 기준을 한참 뛰어넘는 사람들 곧 수준 높은 영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을 선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불어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들은 대부분 목회자 선에서 후보대상자를 선정하지만, 당시에는 그 일에 사도들의 입김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고(맡겨버렸고), 오직 평신도 지도자들의 전적인 권한과 관리 아래에서 일꾼들을 선출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실제로 뽑힌 일꾼들은 히브리파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고, 오직 헬라파 사람들만 뽑게된 것이다. 그리하여 히브리파 지도자와 헬라파 성도들 간에 균형이 맞추어졌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초기교히는 12명의 히브리파 사도들과 7명의 헬라파 평신도 일꾼들이 교회의 근간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사도들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 왕성하게 자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자기 본연의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7명의 평신도 일꾼들이 구제와 행정의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니, 성도들간의 불평 불만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니 예루살렘 교회에 제자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아지게 될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것으로 인하여 심지어 제사장들의 무리들도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7절).

 

2022년 08월 02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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