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3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1)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과 이 사건이 주는 영적인 의미(요2:1~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6AxoOHhg1fE  [혹은 https://tv.naver.com/v/28949313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맨 처음에 무슨 일로 시작하셨을까?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첫 번째 사역을 어떻게 시작하셨으며 또한 그때 어떤 기적을 행하셨는지 명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이 분명하게 나온다. 그것은 갈릴리 가나에 있는 어떤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체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길래 사도 요한은 그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라고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 있는가? 또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 주는 영적인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진정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들어주신 일에 불과한가 아니면 더 큰 영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것인가? 

 

2.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단순 부탁에 대한 수락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맨 처음에 행하신 일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일이다. 이것은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2가지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다. 즉 이것은 마리아의 청을 들어주다가 생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일은 이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이 일은 단지 예수께서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준 정도가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있으며 또한 예수님 자신에게도 이 사건이 주는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렇게 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둘 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때 마리아의 청원이 없었다면, 이러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요, 또한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는 의도가 없었거나 자기자신에게도 어떤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11절에 나와 있다. 예수께서 이 표적을 행하심으로 그분의 제자들의 그분을 믿었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사건 직전에 예수께서는 6명의 제자들을 뽑으셨다. 그들 중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와 이름이 안 나오는 제자(이는 사도 요한임에 틀림없다)가 있다. 그리고 안드레의 전도와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제자가 된 베드로, 요한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예수께서 직접 불러내신 빌립과 그의 친구 나다나엘(바돌로매)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중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이 누군지를 간접적으로 들었다. 그것은 그분이 첫째,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자, 둘째, 먼저 계신 이요, 셋째,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이며, 넷째,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이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를 받았다. 그런 후에 제자들은 점차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랍비이자, 그리스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기록한 이, 요셉의 아들이며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이스라엘의 임금(왕), 인자라고 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세례 요한의 소개와 자신들이 알고 있었언 것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인 신앙고백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가를 알아야 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인하여, 그분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자이시자, 만물의 창조자이신 것을 그들이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어서 예수께서는 자기자신에게는 어떤 목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이 사건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는 이 표적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원문상으로 보더라도 이것이 "표적들의 시작"이라고 나오기 때문에, 이 표적은 이어서 등장하게 될 다른 표적들의 샘플이 되며, 또한 그것들과 매우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사건의 서두에서 아직 당신이 표적을 일으킬 때는 아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매우 큰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표적이라는 것이다. 

 

3. 예수님은 자기자신에게 어떤 의도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인가? 

  이 사건의 발단은 예수의 어머니께서 예수님에게 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시작된다.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고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이야기함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왜 이 잔치자리에 참여하게 된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이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났으며, 이때 예수의 어머니는 잔치의 주관자로 참여하고 있었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잔치에 초청받은 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께서 어머니의 부탁이할지라도 꼭 들어주어야 할 위치에는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잠깐 초대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군지를 살펴보자. 제일 첫 번째로 들어갈 제자는 아마도 나다나엘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의 제자였기 때문이다(요21:2).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처음 만나셨을 때에 그가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요1:50). 고로, 제자들 중에 우선 순위로 초대된 자는 아마도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이었을 것이고, 이어서 다른 제자들도 같이 초대되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도 이 잔치에 초대되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잔치의 주인공과 어떤 인척관계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잔치의 주관자로서 등장한다. 즉 그녀는 이 잔치의 마실 것들을 담당하는 봉사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에는 또한 '연회장(잔치의 최고주관자)'이 나온다. 그는 이 잔치에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이때 예수의 어머니는 이 잔치의 마실 것의 주관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그것은 예수의 어머니에게는 좀 난처한 상황이 되는 것이고, 총 책임자는 신랑이든지 신부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는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연회장이나 신랑이나 신부에게 말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부탁을 한다. 그리하여 이 사건이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이 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4절을 헬라어에서 직역해 보자.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여인이여! 나의 때(적절한 시간)는 [아직] 다다르지 않고 있나이다" 그렇다.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사실 마리아의 잘못도 아니며, 예수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은 이때 포도주가 떨어졌다면 야단치거나 섭섭해할 입장인 것이지 책임질 입장은 아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말 한 마디가 예수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이 포도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3절). 그때 예수께서는 포도주가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반응하셨는데, 이는 '포도주'가 자신에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 때가 아직 다다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어떤 커다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의 때'란 어느 때를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때(호라)"는 어떤 시각을 가리키는 것인가? 여기서 '때'는 '호라'라는 단어로서 그 의미가 '가장 좋은 시간, 적합한 시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때란 예수님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어떤 사건의 때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직접 포도주가 되거나 아니면 포도주를 풍성하게 만들어야 할 때는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장차 그렇게 되어질 일에 대한 예표로서, 자신이 직접 포도주를 만들겠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때'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나의 때'는 어떤 때를 가리키는 것인가?

  예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나의 때'는 적어도 3가지 의미로 나온다. 첫째는 그가 죄인들의 손에 팔리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실 때를 가리킨다(마26:45).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였다(요7:30,8:20,13:1). 

요7: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리고 둘째는 그가 죽으신 후에 영광을 받으실 때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값을 피로 대속하시고 다시 부활하실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죽으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시고 말씀하셨다(요17:1,12:23).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그분이 재림하시어 거룩한 신부들을 취하여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때를 가리킨다(마26:45, 계19:7~9).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의 때'의 완성에 해당하는 때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거룩한 신부들을 얻으시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마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5. 예수께서는 첫 표적을 왜 혼인잔지집에서 셋째날에 일으키신 것인가?

  고로 우리가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우연히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어머니의 부탁을 받아 단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에 있어서 우연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사건마다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시각에 예루살렘에 개기일식이 있었지 않았는가? 그런데 개기일식이라는 것이 갑자기 일어나고 싶다고 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운행하게 하실 때부터 이미 작정된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첫 표적을 행하실 것도 이미 만세전에 작정된 대로 되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첫 표적이 '셋째 날에' 어떤 '혼인잔치 집에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고로 이 사건은 사실 '셋째날'에 일어난 사건은 우연이 아니며, 동시에 '혼인잔치집'에서 일어난 것도 우연히 아닌 것이다(1절). 왜냐하면 이 사건의 시작을 사도 요한은 '셋째 날에'로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날이 셋째 날이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에서 '이튿날에'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듯,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었는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던 날이 첫째 날이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일컬었다. 그날이 또한 둘째날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언급하였다. 그날은 적어도 두 명의 자신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었던 셋째 날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은 후에 다시 셋째 날이라고 했으니(요2:1), 이날은 실제로는 여섯째 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섯째 날이란 대체 어떤 날을 가리키는가? 그 날은 한 마디로, 천지창조 때에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던 바로 그날이요 이 둘이 하나가 되던 결혼식 날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께 여섯째날에 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창조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때는 아담과 하와만이 결혼하던 날이었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예수님과 성도들이 신랑과 신부로 참여하는 결혼식을 치를 날이기 때문에, 미리 예표적으로 이날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다. 그리하여 잔치의 기쁨을 한층 더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 날을 '여섯째 날'이라고 하지 않고 '셋째 날'이라고 기록한 것은 예수께서 셋째 날에 부활하셔서 영광을 얻으시는 날도 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등장하는 소품까지도 이 사건이 창조의 마지막 날이자 동시에 안식의 날을 앞 둔 여섯째 날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의 정결 의식(율법)에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봉사자들이 이 여섯 항아리에 아구까지 물을 채웠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여섯째 날 맨 마지막 시간에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6. 사람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떻게 해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예수님의 측면에서 이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우리 인간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사람에게 왜 기적이 필요하며 또한 어떻게 해야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지도 알려준다. 

  첫째로, 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함께하는 기적이 필요한 것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인간의 계획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예상치 않은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랑이 이 결혼잔치를 위해 얼마나 꼼꼼하게 잔치계획을 세웠겠는가! 잔치에 먹을 것이 떨어지거나 마실 것이 떨어진다면 신랑에게는 아주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랑은 보다 더 철저하게 준비를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포도주가 동이 나서 모자라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다. 그런데 그 시각에 어디가서 포도주를 마련해 온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곳에 전능자께서 함께 하고 있었다. 

  둘째로, 어떻게 될 때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될 때 사람에게도 기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이 사건에 따르면 3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예수님께 청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서 부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그 일은 마리아의 몫이었다. 마리아는 이 잔치의 주관자의 입장이었기에 그것에 대한 책임을 일부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예수님과 의논한 것은 아주 잘한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마리아의 몫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예수님을 잉태할 때부터 아주 특별한 소식들을 접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그녀에게 잉태될 자는 성령으로 잉태될 자이며,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가 탄생하던 날에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와서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 아이는 이 세상을 구원할 구주이며 그리스도이자 주님이라는 것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방박사으로부터 그 아이가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들은 것도 있었고, 예수께서 12살 때에는 성전을 자기의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했던 것도 가슴에 새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슨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문제를 연회장이나 신랑과 의논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가져간 것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수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 잔치집의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었던 봉사자들의 순종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때 일하던 일꾼들을 '하인들'이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실제는 '하인들(둘로스)'가 아니라 '봉사자들(디아코노스)'이다. 이들은 자원하여 그 잔치일을 도우러 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봉사자들에게 마리아가 말했다. "그가 혹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너희는 그대로 행하라(5절)" 이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시키는 일이 혹 사리에 맞지 않고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즉시 행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들이 그대로 시행한 것이다. 빈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운 것이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이제는 그것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다. 그때 연회장은 이미 포도주가 된 채 있는 물을 마시고는 감탄을 하면서 신랑을 불러 칭찬을 한다. "모든 사람은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놓는 것이 일반이오. 그리고 그들이 취하게 된 때에 더 못한 것을 내놓기 마련이라오. 그런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간직한 채 있었소(10절)". 사실 찬사는 예수께서 받으셔야 마땅한 것이지만 새로 맛 본 포도주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를 몰랐던 연회장은 신랑을 칭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이 행하신 일도 감추신다. 얼마나 겸손한 미덕인가?

 

7. 나오며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첫번째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마리아의 부탁에 대한 결과이지만 실제는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예수께서도 앞으로 자신의 공생애를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표적이었다. 즉 예수께서도 자신을 어떻게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며 또한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장차 천국에서 진행될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염두해두시고 행하신 기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 전능하신 창조주이자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한 이 사건을 통하여 모든 인생은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렇더라도 그러한 위기를 타계할 방법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곧 '기도'(청원)와 절대적인 '믿음'과 절대적인 '순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 내게 진정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이 사건의 사람들처럼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의 능력을 맛보는데,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게 필요하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지금 그것을 구하고 믿음으로 반응해보자. 왜냐하면 예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그때에는 우리도 역시 물떠온 봉사자들처럼 놀라운 기적을 맛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08월 31일(수)

정병진목사

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넷째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1) 천국입성의 세번째 조건, 충성이란 어떤 의미인가?(마25:14~30)_2022-03-03(목)

https://youtu.be/7EAknutRHW0  [혹은 https://tv.naver.com/v/25469989 ]

 

1. 천국입성의 실제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최소조건은 2가지다. 하나는 '거듭남'이다(요3:5). 회심으로서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모든 사람은 거듭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계속적인 '회개'다. 이것은 자백하는 회개를 가리킨다(요일1:9).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이미 목욕을 했으니 그 이후부터는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조건으로 한 가지가 더 있다. 이것이 없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 있겠지만, 주님의 바라심은 충분조건을 채우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순종'과 '충성'이다. 둘을 하나로 합쳐서 '충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야말로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신분과 상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천국의 입성조건은 충분조건으로 많이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등 외에도 자신이 댓가를 지불하여 기름을 준비함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혼인잔치의 예복이 될 것이며, 그곳에서의 신분과 상급이 될 것이다. 

 

2. 달란트의 비유는 왜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 오실른지 모르니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날이 언제 올른지 아무도 모르니, 자칫 잘못하면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썩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24장에 나오는 "충성되고 악한 종"의 비유와 마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주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 오시는 날 그분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야할른지를 늘 생각하고 그날을 준비하라고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 

 

3. 주님으로부터 사역을 맡은 주의 종들에게 필요한 '순종'과 '충성'은 무엇 같으며 또한 어떻게 다른 것인가?

  주님으로부터 사역을 맡은 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늘에서부터 이미 사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파송받아 온 종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자신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달란트를 통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받은 종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둘 다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성실해야 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 하지만 둘은 소명을 맡은 것에 약간 차이가 있다. 이 둘의 차이를 비교한다면, '순종'과 '충성'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아예 사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온 주의 종들이다. 이 종들은 자신이 받아서 이 땅에 온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천국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고 이미 천국에 이미 준비된 채 있는 신분과 상도 받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종들이 100%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인지라 그에게도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에 충성해야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새롭게 그에게 부여될 신분과 상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먼저 2가지를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는, 소명을 하늘에서 받았느냐 아니면 이 땅에서 달란트로 받았느냐의 차이가 그것이다.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 소명을 받고 이 땅에 온 자이다. 하지만 마25장의 종은 이 땅에서 달란트로 소명을 받은 자인 것이다. 둘째는,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부터 복이 결정되어 있지만, 순종하지 않았을 때에는 벌이 중하다는 것이다. 이 종은 하늘에서부터 이미 보좌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성실하게 순종했을 때에는 주인이 그에게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긴다고 하였으니(마24:47)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가 된다. 그렇지만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심한 형벌까지 받게 된다. 채찍으로 맞게 될 것이고, 외식하는 자들이 받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24:51). 그런데 마25장의 종은 충성하면 그에게 많은 상이 주어질 것이다(마25:21,23). 그러나 만약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묵혀두고 사용하지 않았을 때에는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게 될 것이다(마25:30). 

 

4. 순종과 충성의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주님의 종들이 사실 '순종'하는 것과 그리고 '충성'하는 것은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은 강조점에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것이 대부분 오늘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주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이라면, 충성하는 것은 오늘날 평신도들이 자신의 달란트와 은사에 따라 교회와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24장의 '순종의 종'과 마25장의 '충성의 종'은 또 어떤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셋째로, 그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이 우선인가 아니면 자신의 유익이 우선이냐 하는 것에 있다. 즉 순종의 종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특히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자다(마24:45). 그러나 충성의 종은 모든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며 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왜 자신에게 주어졌는지를 늘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그 책임을 깨닫고 그것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결과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된다. 즉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가 가서 열심히 일하여 남겼던 다섯 달란트는 모두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충성하면 그 남은 결과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넷째로, 그것이 의무적인가 아니면 자율적인가 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하늘에서부터 구체적인 사명을 지시받고 온 자는 자율적이지 못하다. 자신이 받아가지고 온 그것에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이 그에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이 받은 구체적인 그 사명에만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다르다. 그에게 주인은 달란트만을 맡겼을 뿐이다.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본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재량권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든지 그것은 종의 선택사항이다. 중요한 것은 왜 지금 내가 내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이 능력과 재주를 물려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달란트라 할지라도, 실은 자신을 어머니의 태중에 보내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달란트를 보다 더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마25장의 종으로 부름받은 자인 것이다. 

 

5. 충성이란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충성'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성실함과 열심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특별히 마25장의 종의 비유를 통해서 정의해보면, 스스로 주인의 기대와 바람을 알고서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재능, 재주, 능력)을 열심히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을 아주 무거운 책임감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묵혀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남김으로써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항상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오늘도 최선을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기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늘 살핀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른지 잘 가늠하여 적재적소에 그것을 배치한다. 그러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이와는 정반대로 살아간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묵혀두고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주인의 기대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쓰되 자신의 육체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그것에 사용하지않고 그러한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자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전혀 일하지는 않는 게으른 자가 바로 게으른 종인 것이다. 그럼 지금 나는 어떠한가? 과연 나는 하나님에게 충성된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게으른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2022년 03월 03일(목)

정병진목사

 

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셋째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0) 달란트의 비유, 순종의 비유인가 충성의 비유인가?(마25:14~30)_2022-03-02(수)

https://youtu.be/5Zv9DkRJoag  [혹은 https://tv.naver.com/v/25469494 ]

 

1. 달란트의 비유는 왜 열 처녀의 비유 다음에 주어진 것인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마25:14~30)는 '열 처녀의 비유'(마25:1~13) 다음에 나온다.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또"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왜냐하면~"이라는 말이다. 이는 앞 문장의 결론 부분인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달란트의 비유'를 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것이 곧 기름을 준비하는 것인데, 만약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알려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이미 주께서 하신 말씀을 더 구체화시킨 것이다. 즉 주님이 언제 오실른지 모르니 깨어서 준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충성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마24:44~45). 그래서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열 처녀의 비유'(마25:1~13)를 말씀해주신 것이고, 이어서 '충성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주시기 위해 '달란트의 비유'(마25:14~30)를 말씀해주신 것이다. 

 

2. 천국은 사모하면 차지할 수 있는 것인가?

  천국은 사모하지 않는 자가 차지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사모한다고 해서 다 얻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면류관에 대해 사모하고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은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전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이다. 게을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름이 어찌 그냥 기름병에서 채워지겠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날 회개하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에 "아, 믿는 것으로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러면서 "이제는 회개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회개하는 것이 없이는 결코 그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다. 머리로는 회개해야지 하지만, 회개를 위해 댓가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어찌 회개했다고 할 수가 있겠으며, 면류관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 면류관을 얻기 위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어찌 면류관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면 기름을 얻게 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달란트 비유'를 이어서 말씀해주신 것이다. 그것은 충성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 달란트의 비유는 충성하라는 비유인가 순종하라는 비유인가?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를 왜 주셨는지를 들었다. 그것은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베푸신 비유인 것이었다. 그렇다. 천국에서 넉넉히 들어갈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서도 높은 신분과 여러가지 면류관, 보다 더 앞쪽에 있는 보좌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열 처녀의 비유'로 말하면,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로 말하면 예복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해야 하는가? 둘 다 해야 한다.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이 둘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충성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순종하는 것과 충성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순종하는 것이나 충성하는 것은 둘 다 게을러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요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 비로소 이것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종하는 것과 충성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의 비유"(마24:45~51)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 나오는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마25:14~30)의 차이를 알 수 있다면 확실히 더 잘 알 수 있다. 주님은 똑같은 비유를 연거푸 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둘 다 "충성된 종과 악한 종"에 관한 비유이지만 둘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차이가 바로 '순종하는 것'과 '충성하는 것'의 차이다.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리면,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비유는 '순종의 비유'라고 한다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비유는 '충성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 첫째, 어디에서부터 책임과 사명이 주어진 것이냐의 차이가 있다. 마24장의 비유는 이미 하늘에서부터 그에게 어떻게 하라고 지시가 내린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자를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라 부른다. 그러나 마25장의 비유는 이 땅에서 주님께서 그 사람의 능력을 따라 달란트를 맡겨주시고 천국에 돌아가셨는데 다시 오실 때까지 자신이 받은 달란트로 열심이 일하였던 자를 가리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24장의 종은 정확하게 자신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주인의 집 사람들을 맡아서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다(마24:45). 그것은 이미 하늘에서 이 땅에 영혼을 내려보내실 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부여안고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자는 많지는 않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위해 그 일을 행하신다. 그런데 마25장의 종은 이 땅에서 받은 능력으로 일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자신의 조상들이 물려준 것에는 좋은 것도 있겠지만 나쁜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왜 나에게 이러한 능력들이 왔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이것을 어디에 써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 달란트 받은 이들의 모습이다. 사실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시받은 것은 없다. 단지, 능력만을 물려받는 것이다(물론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러므로 '순종'이 좀 의무성이 강한 것이라면, '충성'은 좀 자발성이 강한 것이다. 

 

5. 순종과 충성의 두 번째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순종'과 '충성'의 두 번째 차이는 '복과 형벌'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먼저 첫째로, 순종을 잘 한 이는 충성하는 이에 비해 상이 더 크다. 왜냐하면 사명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주인의 모든 것(소유)을 다 그에게 맡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4:47). 그러나 달란트로 자기 재량껏 일하여 주인의 소유를 더 남긴 자는 "주인이 은 것으로 그에게 맡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5:21,23). 사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하늘에서 사명을 받고 온 자는 이미 하늘에서 그가 받을 예비되어 있다(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 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둘째로, 불순종한 이는 불충성하는 이에 비해 형벌이 세다. 사명을 받았으나 불순종하여 악하게 행동한 종이 받을 형벌은 참으로 가혹하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이라고 했다(마24:51).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들이 휴황불못에 던져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불충성하는 종에 비해서는 더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불충성한 자 곧 한 달란트를 받았으나 그대로 가져왔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예루살렘 성 바깥의 어두운 곳으로 내어쫓겨날 것이라고 했지만, 불순종헸던 자는 본인이 성 바깥쪽으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맞을 뿐만 아니라 외식하는 자가 받을 형벌까지 받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5:30). 그렇다. 하늘에서 사명을 받아서 이 땅에 온 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불순종하면 더 강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자기의 부모로부터 능력을 물려받은 자는 충성하면 그에게 많은 상이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불충성했을 때에는 천국으로 지칭되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성 바깥에 있는 더 어두운 곳으로 버려지게 될 것이다. 

 

2022년 03월 02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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