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다보면 걱정되는 일이 좀 생긴다. 그것은 내가 회개한다고 회개하고 있지만 혹시 내가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의 구원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다 회개하지 못할 죄인데 굳이 회개하려고 그렇게까지 힘써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우리가 고백하지 못해 남아있는 죄, 과연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지, 이 메시지에 안으로 들어오라. 히브리서의 말씀이 다시 보일 것이다. 오 주여, 우리에게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소서!!!

2021-12-0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 있다면 그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가?(히9:6~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U81s29EfZMU [ 혹은 https://tv.naver.com/v/23929679 ]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셔야 했는가? 이 땅에 살았던 위대한 선각자들이나 성인들이라도 그들은 결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어서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그것은 크게 3가지다. 하나는 죄[사함]의 문제요, 또 하나는 사망(죽음)의 문제요, 마지막 하나는 이 세상임금인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퇴치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대강절을 맞이하여 예수께서 베풀어주실 죄사함의 은총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조금 들여다 보고자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예수께서 그때 완전한 속죄제사를 드리셨으니,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채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러한 진술은 합당한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사람의 모든 죄가 어떻게 용서함 받게 되는지를 살펴보되 구약의 제사법을 가지고 살펴보고, 우리가 지은 죄들 중에 하나라도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죄사함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사함과 관련하여 알고 있는 사실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술은 원칙론에서는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까지 들어가려면 '믿음'에다가 반드시 '회개'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믿음과 더불어 우리의 회개가 함께 동반될 때 이 모든 혜택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그래서 안전하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에 우리들의 저주까지 다 끝냈으니 우리에게는 더이상 받을 저주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번째 진술은 성경과 위배가 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서 주신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구원을 받지 못한 채 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모든 저주가 완전히 다 사라져서 더이상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회개하지도 않았는데도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정말 물질의 축복을 받고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었기에 모든 병에서 다 치유받고 건강하고 살고 있는가?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사고로부터 자유함을 입고 있는가? 그리고 자녀들은 형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다 사실이라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믿겠다고 달려들고 말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아니다. 병원에 가보라.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지 아는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라도 얼마나 가난에 허덕이는 자가 많은지 아는가? 또 자녀들의 문제 때문에 밤을 지새우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두번째 진술은 선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중간의 과정을 생략한 채 이것만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회개를 하는데, 회개와 관련되어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 교회는 우리나라에 약 1%에 속하는 교회로서 한 번 받은 구원이지만 그것이 영원한 구원이 되게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회개하고 있는 교회들 중의 하나이다. 회개 없이는 구원이 완성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개할 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 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회개기도문"이라는 책자를 사용한다. 그것을 보고 회개한다. 그러면 자신이 무슨 무슨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에 진정 회개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회개를 하다보면 하나의 궁금한 점이 생긴다. 과연 이 회개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회개를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어차피 죽을 때까지 회개를 해야 하는데 혹시 회개하지 못한 채 넘겨버린 죄가 있다거나, 그것이 죄인지 모른 채 죄를 지은 죄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 죄 때문에 구원에서 탈락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다 회개하지 못하는데, 그렇다면 적당히 회개할 일이지, 뭘 그리 열심히 회개할 필요가 있겠는가"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를 끝까지 들어보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오늘날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께서 우리 대신 속죄제물로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그때 그분이 우리 사망의 값과 저주의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믿으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우리 대신 속죄제물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회개하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용서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우리 대신 속죄제물로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기에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때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가 지었던 죄와 앞으로 우리가 지을 죄까지도 다 담당했으니 우리는 다 죄사함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주장이 합당한 것인가? 만약 이 질문이 옳다고 동의해주지 않으면, 요즘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은 그때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어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구약시대에 속죄제사법이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뭐든지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언제나 처음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처음에 사람이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예표론적으로 보여준 예표적인 사건이자 말씀이기 때문이다. 

 

5. 구약시대에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어떻게 해서 용서함 받았는가? 그것은 속죄제사법을 통해서 용서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지은 자가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깨닫고 용서받기를 바라면 그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그 법을 일컬어 '속죄제사법'이라고 한다. 이러한 속죄제사법은 구약성경 레위기 4장과 16장에 나오는데, 레위기 4장에서는 개인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속죄제사법이 나온다. 그리고 레위기 16장에서는 이스라엘 온 회중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대속죄일 속죄제사법이 나온다.

  먼저, 개인이 죄를 짓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속죄함(용서)받는 방법부터 살펴보자. 레위기 4장에 보면, 이때에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제물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방법은 똑같다. 먼저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달은 자가 자신이 지은 죄값을 치를 흠없는 대속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나아간다. 그때에는 신분에 따라 송아지, 양과 염소 등을 가지고 간다. 그리고 본인이 흠없는 속죄제물에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넘긴다. 그 다음 그것을 자신이 칼로 찔러서 죽인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제물의 피를 양푼에 담아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제물의 고기는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면 된다. 그러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엄청난 많은 양의 돈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제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대속죄일 제사법에 대해 살펴보자. 레위기 16장에 보면, 온 이스라엘이 죄를 용서받는 제사법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을 일컬어 '대속죄일 제사법'이라고 부른다. 이 제사는 제사장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드리는 것이며, 매일 드리는 것도 아니다. 일 년에 한 번 차례만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제물의 피를 바르고 뿌리는 장소가 속죄제사법과 각각 다르다. 여기에서는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에 들어가서 피를 바르고 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에는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마저도 처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므로, 먼저 자기를 위한 속죄제사와 번제를 드린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사와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의 속죄제사에 있다. 그런데 이때 드리는 대속죄일 제사는 양을 한 마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나 드린다. 이 때 사용하는 양은 '숫염소'를 사용하는데, 두 마리를 가져다가 제비뽑기를 하여 하나는 여호와를 위한 양으로 잡고, 또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양으로 삼아 무인지경에 버리고 온다. 먼저, 여호와를 위한 양은 대제사장이 잡아 그 피를 담아서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앞에 뿌린다. 그리고 성소로 나와서는 그 피를 향단의 뿔에 바르고 일곱 번을 뿌린다. 그리고 나와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아사셀양에게 안수하여 넘긴 다음, 정한 사람에 맡겨 사람이 살지 않는 불모지에 버려둔 채 오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도착하면, 대제사장은 "너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로 선포를 한다. 그러면 온 회중은 그날에 금식을 끝내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한다. 

 

6. 대속죄일에 제사법이 알려주는 이 제사법에 대한 주님의 의도는 대체 무엇인가?

  구약시대로 다시 한 번 가보자.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어겨서 도둑질을 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사람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양이나 염소를 가져다가 속죄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돈도 들어가고, 시간도 들어가고 자신에게 번거롭기 때문에, 분명 자신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 년에 한 번 모든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제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대속죄일 제사'다. 그러므로 그는 평상시 개인적으로 속죄제사는 드리지 아니한 채, 대속죄일 제사에만 참여한다. 그리고 그날 대제사장의 선포를 통해 일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진정 이 때에 이 사람이 일 년 동안 지은 죄가 다 용서된 것일까?우리가 하나님이라고 가정해보자. 과연 그렇게 해서 죄사함을 받으려고 한 자를 지켜보호해 주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제사를 받아주신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예수께서 인류를 위한 대속죄일 제사를 치렀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믿기만 하면 자신은 완전한 속죄를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들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그러한 사람들로서, 대속죄일 제사에만 참석하여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평소 때 자신이 지었던 개인 죄를 용서받는 제사는 한 번도 드리지 아니하고,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하여 모든 것을 떼우려는 자들을 위하여 히브리서 기자로 하여금 성경을 쓰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있다. 

 

7. 대속죄일에 제사 한 방으로 일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함받을 수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백성인 한 사람이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한다면, 그는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다 사함받을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때 진짜 자신의 죄들을 용서함받는다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죄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구약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들도 분명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그리고 대속죄일 제사에 참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인가? 그들은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과 대속죄일에 지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대속죄일 제사 때에 용서받을 수 있는 죄목이 다르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 이제는 히브리서 9:6~7을 보자. 

히9:6-7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개인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제사장은 개인용 속죄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지만 한꺼번에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사해주는 속죄제사법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대속죄일 제사 때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죄목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들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그것은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해서 드리는 제사라고 말이다. 이 때 '허물'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아그노에마'이다. '아'는 부정접두어이며, '그노에마'는 '앎,이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그노에마'는 무지하여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뜻한다. 그러므로 대속죄일 제사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자기가 죄인지도 모른 채 지었던 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속죄일 제사법은 평소 때 개인이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고 드리는 속죄제사와 다른 것이다. 이때에는 그것이 미처 죄인 줄을 모르고 있다가 지은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대제사장이 대신 드려주는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대속죄일 제사를 통해 자신은 완전한 속죄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평소 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하여 예수님의 피를 통해 속죄를 받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지은 죄들을 용서받도록 하기 위해 대속죄일 제사법을 주신 것이지,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했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8. 그리스도인은 대속죄일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지는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말한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고 자신의 피로 대속죄일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한 번의 제사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더 이상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우리가 지은 죄들을 계속해서 자백할 때에 용서해주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요일1:9). 그렇다. 개인이 지은 죄는 날마다 개인용 속죄제사 곧 그 죄를 개인적으로 자백해서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백하여 죄를 고백했다 할지라도 어떤 것은 미처 회개하지 못한 채 넘어가버린 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은 그것이 죄인 줄로 몰라서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남아있는 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죄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대속죄일제사를 골고다 언덕에서 드리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다 사해주실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분에 의해 온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대속죄일 제사를 믿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다고 주장하려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아니다. 그렇게 해서 아니 된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그렇게 믿겠노라고 할지라도, 과연 자기와 자기의 가문에 드리워진 저주가 떠나가게 되는지를 살펴보라. 자신의 죄를 낱낱이 구체적으로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저주가 떠나가는지 지켜보라. 그렇다.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는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주도 한 번에 다 날아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죄목을 꺼내어 놓고 기도할 때에 하나씩 하나씩 저주도 나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할 때에 이미 죄 때문에 내 속에 들어와 있던 영이 하나씩 하나씩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자가 많은지, 구약시대로 치자면 대속죄일 제사에 한 번 참여하는 것만으로 일년 동안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죄용서를 받으려고 시도하는 자의 죄를 과연 다 용서해주시겠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은 죄를 철저히 깨닫고 대신 죽어가는 속죄양을 보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애통해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속죄제사를 보실 때에, 그들이 미처 다 회개하지 못한 죄를 그때에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아무나 한 번 믿었다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그런 식으로 해서 한꺼번에 죄가 다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저주도 역시 한꺼번에 싹 나가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죄를 회개할수록 저주도 사라지게 해 놓았다. 개인적으로 죄를 회개할수록 귀신도 역시 떠나가게 해 놓은 것이다. 그것이 회개하는 자에게 주신 축복이다. 자신이 지은 개인적인 죄마저도 회개하지 않으면서, 한 번 믿고 회개한 것으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말하지 말라. 진짜 그렇게 죄가 용서 되는지 보았는가?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라. 회개하라. 특별히 자신이 지은 개인적인 죄를 보다 더 철저하게 회개하라. 그래야 혹시 내가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2021년 12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회개(02) 왜 회개해야 하는가?(02) 한 번 회개로 지은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는가?(히10:9~14)_2020-11-25(수)

https://youtu.be/mqu-1u0YWRc  [혹은 https://tv.naver.com/v/16874195   ]

 

 

1. 한 번 회개하면 지은 죄를 한꺼번에 다 용서받을 수 있나요?

  한 번 회개해서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아마도 모든 인류가 다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진실로 회개했으면 굳이 더 회개하지 않아도 자신의 죄는 다 용서받는다고 믿고 있는 성도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럼, 그는 왜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단 번의 제사로 영원히 성도들을 온전케 하신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속죄제사는 성도들을 영원히 온전케 한 것인가요?

  의외로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완전한 희생제사를 자기의 완전함으로 생각하여, 예수께서 단 번에 희생제물로 드려지심을 자기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즉 자기는 예수님의 속죄제사의 공로로 용서를 받게 된 것이니, 더이상 무슨 제물이 필요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자기도 죄도 그때 다 용서받은 줄로 앏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속죄의 완전성을 자기에게 잘못 적용한 사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를 드린 희생제물은 완전합니다.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요, 더이상 속죄제물이 필요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이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셨지기에, 그분이 흘리신 피는 분명 사람의 피였지만 동시에 그분은 하나님의 피이기도 하기에(행20:28), 그분의 피의 효능은 끊임없이 지속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속죄제사는 한 번의 속죄제사에 한 마리의 속죄제물만이 효력이 있었던 것처럼, 한 번 드려진 속죄제물이 계속해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누군가 또다시 죄를 지으면 또다른 희생제물을 필요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므로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한 번이지만 영원히 효력이 있습니다(히7:24~25). 그러므로 그분은 단 번의 제사로 모든 사람을 영원히 온전케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다릅니다. 비록 그분의 속죄는 완전한 것이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귀신들의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그날까지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죄와 싸워야하고 마귀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넘어지면 다시 회개를 통해서 예수님의 피로 우리 자신의 죄를 씻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14절(원문)의 말씀처럼, 그분의 제사는 한 번의 제사로 계속적인 것 안으로 완전하게 된 채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거룩하게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한 번 만 자백해도 된다고 했나요?

  요한 사도는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과연 어떻게 해야 죄용서를 받고 깨끗하게 되는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더우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요일1:9)"(표준새번역). 그렇다면 우리가 한 번만 자백하면 내가 지은 모든 죄가 다 용서되는 것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요일1:9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한다면" "그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이다"고 말이죠.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의 골고다의 희생사건 자체가 우리의 죄를 자동적으로 용서해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이 지은 죄를 비로소 자백할 때에라야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 본문을 헬라어로 살펴보면 그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는 "자백하면"이라는 동사가 동사, 가정법, 현제, 능동태구문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서 가정법은 현재가정법과 과거가정법이 있습니다. 현재가정법은 반복적 계속적인 경우에 사용되고, 과거가정법은 단번에 혹은 단호하게 하는 경우에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을 헬라어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계속해서 자백하고 있으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백은 한 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자기가 지은 죄를 자백할 때에는 마음으로 해도 되나요?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할 때에는 마음으로 해도 되는 것인가요? 결론은 "아니올시다"입니다. "자백하다"라는 단어 자체도 말을 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백하다(시인하다)"는 단어는 "호모로게오"라는 동사인데, 여기서 "호모"는 "같은, 동일한"이라는 뜻이고, "로게오"라는 동사는 "말하다"는 뜻입니다. 고로 "호모로게오"라는 동사는 자신이 지었던 죄를 다시 말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생각이었든지 말이었든지 행동이었든지 지은 죄를 자백하여 용서받기를 원할 때에는 반드시 말로 시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기도문을 눈으로만 읽는 것은 자백이라고 할 수 없으며, 누군가 녹음해놓은 것을 듣는 것도 자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자신의 입술로 소리내어 말해야 시인(자백)이 되는 것입니다. 

 

5. 지은 죄의 숫자가 너무나 많은데, 꼭 지은 죄의 숫자만큼 회개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야 정상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자백한 것만이 용서된다고 나와있기 때문입니다(요일1:9). 예를 하나 들어서, "음란의 죄"를 회개할 때에는 몇 번이나 자백해야 할까요? 아마도 나이가 많을수록 더 많이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몇 번이나 자백해야 할까요? 아마 그것은 수백 수천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7년 이상 회개임상실험을 하여 죄가 어떻게 용서되었는지를 조사해했던 바에 따르면, 사람이 지은 죄는 최소한 160번 이상은 해야 용서되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 네 번씩 회개한다면 40일을 꼬박 쉬지 않고 회개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적어도 360번 이상을 회개해야 어느정도 회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죄의 양상도 다르고, 숫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몇 번이나 회개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딱히 정해진 답안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수 백 번을 회개했을 때에 더이상 자신이 지은 죄가 거리낌없이 느껴진다면 그때는 회개가 어느 정도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까지 회개해야 하는지를 "성령께서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굳이 그것을 확인하려면, 회개하기 전에 갖고 있었던 자신의 저주(가난, 질병, 무지) 등이 다 떠나갈 때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할 때에는 조상들이 물려준 세력들(귀신들, 뱀들)이 내 몸에서 다 떠나갈 때까지 우리는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따르면, 진실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위해 가슴을 치기를 그치지 않았던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하니, 꼭 죄를 지은 숫자만큼 반드시 해야 하는 것같지 않습니다. 회개의 숫자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내가 지은 죄의 숫자만큼 죄를 시인하고 자백한다고 각오로 일평생 회개를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0년 11월 25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수께서 온 인류의  속죄제물이 될 수 있었던 3가지 조건은 무엇이었는가?(레4:1~12)_2020-03-17(화)

https://youtu.be/4XIQOI48a1k

[ 또는 https://tv.naver.com/v/12905134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1.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나요(죽으셨나요)?

  예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유대의 예루살렘 성문밖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2.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인류의 속죄를 위한 죽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나요?

  예수께서 그날 돌아가신 것이 인류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 되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했습니다. 첫째, 속죄하는 장소가 정한 장소여야 했습니다. 둘째, 제물이 속죄제물로서 합당해야 했습니다. 셋째, 합법적인 집례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돌아가실 장소가 어디여야 했었는지는 어제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곳은 반드시 성막(성전)이어야 했습니다. 아무데서나 속죄제물을 잡아서 제사드린다고 해서 속죄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택한 장소,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는 곳이어야 했고, 그곳은 성전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골고다언덕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9:1~12과 10:19~20의 말씀을 조합해보니,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치신 [걸어다시는] 성막(성전)이었습니다(요1:14, 2:19~21). 또한 그분이 골고다언덕에서 죽으신 것은 그 언덕의 지하(예레미야동굴)에 법궤가 놓여있었고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의 피가 그곳에 떨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로서 예수께서 버림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속죄제물이 되기 위한 가장 합당한 장소에서 정확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3. 예수께서는 어떻게 인류의 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서 합당하신 분이셨나요?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합당한 장소에서 돌아가셔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제물로서도 합당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했습니까? 그것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제물로서 흠이 없어야 했으며, 둘째는 사람이어야 했으며, 셋째는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셔야 했습니다. 우선 첫째조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합당한 속죄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흠없는 제물이 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속죄제사로 사용되어지는 모든 제물들은 비록 속죄하는 사람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제물을 드리기는 했어도, 다 흠이 없는 제물을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레4:3,14,23,28). 여기서 "흠이 없다"는 표현은 죄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과 같은 분으로 태어나셨기에(벧전1:19), 그분에게는 죄된 본성도 없었으며(고후5:21), 또한 범죄하지도 아니하셨습니다(히4:15,요일3:5). "너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벧전1:18~1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려 하심이라(고후5:21)",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니라(요일3:5)"

 

4. 인류의 대속제물이 되기 위한 두번째 조건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둘째로, 그분은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수송아지나 숫양같은 제물로서는 인류의 죄를 속죄할 수가 없는데, 이는 장차 진짜가 와서 죽을 것에 대한 예행연습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히10:1,4). 고로 사람(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이 범죄한 것을 짐승이 대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감당해야 했습니다(창9:5~6). 고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셨는데(딤전3:16), 죄없는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서(막10:45) 그리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참 희생제물이 되시려고,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잉태는 남자(아담)의 씨가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실 수밖에 없었으며, 동정녀(처녀)인 마리아의 태만 빌려 태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5. 인류의 대속제물이 되기 위한 세번째 조건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셋째로, 그분은 인류의 대표자의 안수를 통해 죄를 전가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확실히 그렇게 해서 죄를 전가받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세례요한의 외침을 통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난 다음날 세례요한은 그분을 보자마자 성령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을 통해 죄를 전가받으셨기에 이제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계시는 속죄양"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사건이 어떻게 인류의 죄를 전가하는 의식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례요한더러 "선지자보다 더 나은(위대한) 자"라고 칭했으며(마11:9), 그를 가리켜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보냄받은 선구자(마11:10)라고 하셨고,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선지자의 대표)로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마11:14), 그는 율법과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였으며(마11:13), 더욱이 그는 여자가 낳은 자들 중에 가장 큰 자였기 때문입니다(마11:11). 또한 그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 가운데 아비야 반열(24반차 중에 8번째 반차)의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나셨기에 선지자요 선구자요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눅1:5).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인류의 죄를 넘기기에 가장 합당한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넘길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세례의식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된 본성도 없고 죄도 짓지 아니했기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세례요한은 말리면서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에 [어찌]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례요한이 당신에게 세례를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한 의를 성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반드시 그렇게 해서 당신이 죄를 넘기지 않는다면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은 두 손으로 안수하여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온 백성의 속죄를 위한 대속죄일 제사 때에도 대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대표적인 아론이 속죄염소에게 두 손으로 안수하여 죄를 넘기듯이 말입니다(레16:21). 그리하여 죄를 넘겨받으신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다가 3년반동안 흠없는 제물인 것을 인정받으신 후에, 절기의 규례에 따라 유월절 저녁 해질녘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이 치룬 속죄의 은총을 누구나 다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내일은 예수께서 과연 대제사장으로서 합당하신 분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020년 03월 17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수께서는 골고다언덕에서 돌아가셨는데 어찌 그것이 인류 위한 속죄제사가 될 수 있었는가?(히9:1~12)_2020-03-16(월)

 

[또는 https://tv.naver.com/v/12885805 ]

 

1. 사람이 속죄제사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했나요?

  사람이 속제제사를 드리려면 3가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첫째는 제사드리는 장소가 있어야 했고, 둘째는 제사에 사용될 제물이 있어야 했으으며, 셋째는 제사를 드릴 제사장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속죄제사를 드리려면 장소로서 성막(성전)이 있어야 했고, 제물은 흠없는 제물이 필요했으며, 제사장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왜 제사를 성막(성전)에서 드려야 한다고 하셨나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데, 그 절차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사드릴 장소로서 최초로 시내산 아래에 성막이 건축되기 전만에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장소는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셋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같은 족장들은 보통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장소나 나타난 장소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예표로서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는데, 그 장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로서, 아라우나의 타작장마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 장소가 의미있는 장소였음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막이 세워진 이후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기업으로 얻을 땅에 들어갈 때에는 아무데서나 제사를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장소에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신12:14~27,14:23~24), 나중에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7년간 성전을 짓고나서 그가 드리는 기도를 보면, 그곳은 바로 "성전"이었습니다(왕상8:29). 그러므로 속죄제사는 아무데서나 드리려서는 아니되고 꼭 성전에서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온 백성을 위해 드리는 속죄제사는 일반적인 속죄제사와는 어떻게 차이가 있었나요?

  일반적인 속죄제사는 죄를 지은 사람에 따라서 즉 그가 "제사장"이냐 "이스라엘 온 회중"이냐 "족장"이냐 "평민"이냐에 따라서, 제물이 각각 다르긴 했지만(레4장), 모든 속죄제사는 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자가 흠없는 제물을 성막(성전)으로 끌고가서 자신의 죄를 제물에 안수하면, 제사장이 그 제물을 잡아서 성소에 피를 뿌리는 것으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대속죄일제사(레16장)는 대제장들과 백성의 회중를 비롯하여 지성소와 회막과 분향단을 속죄하기 위한 제사로서, 이 때에는 드리는 제물들도 더 많았고(번제물과 속죄제물), 절차도 더 복잡했으며(제사장을 위한 제사와 온 백성을 위한 제사), 집례도 대제사장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대속죄일 제사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4.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죽지 않았고 골고다언덕에서 죽었는데, 어찌 그것이 대속죄일 제사라고 할 수 있나요?

  예수께서는 성전(예루살렘의 스룹바벨성전)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골로다언덕 위에 있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되어서 그것이 인류를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죄일제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요?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둘째는 온 인류를 위한 속죄제사로서 드려지는 두 마리의 속죄양(숫양)이 제물로 드려질 장소가 바로 골고다였기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치신 성막이었던 것입니다(요1:14, 2:18~21).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성막을 치셨기 때문이요(요1:14), 또한 예수께서 직접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성전된 자기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요2:19~21). 더욱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몸이야말로 첫째성막 곧 성소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히9:1~12).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물질적인 성전에 있는 성소의 휘장도 같이 한 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데(마27:51,눅23:45), 그 휘장을 두고 예수님의 육체라고 해석했던 것입니다(히10:19~20). 그리고 둘째로 속죄양 두 마리가 속죄제물로 드려지려면 골고다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한 마리의 속죄양은 여호와를 위한 양으로서 이 양은 성전에서 죽임을 당해 그 피가 지성소의 법궤의 동쪽 위와 그 앞에 뿌려졌어야 했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골고다언덕 밑에는 남유다 말기로 추정되는 시점에 제사장들이 옮겨놓은 법궤가 예레미야 동굴 속에 감추어져 있었고, 예수께서 죽으실 때 일어났던 지진으로 인해 십자가 아래에 있던 피가 바위틈을 따라 그 법궤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의 간증). 그리고 또 한 마리의 속죄양은 대제사장의 안수를 받게 한 후 죄를 짊어지고 버려져 죽게하라고 했는데(레16:7~10,20~22), 예수께서는 세상죄를 짊어지신 뒤에(요1;29) 당시 예루살렘 밖(영문밖)에 있는 골고다로 가셔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두 마리의 속죄양이 되어 규례대로 죽으신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골고다언덕의 속죄제사는 인류를 위한 대속의 제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예수님이 몸이 성소(첫째성막)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성전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골고다언덕에서 죽으신 것을 두고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가르쳐주는 영적인 설명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온전한 장막이신 당신의 몸(성소)을 찢어서 제물로 바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9:11~12,10:19~20). 그러므로 예수님은 당시에 "걸어다니는 성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성전은 그당시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몸은 걸어다니는 인격적인 성전이 되어서,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성전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몸이 위치해 있다면 아무데라도 다 성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의 물질적이며 고정적인 예루살렘성전이 이제는 이동적인 성전으로 그 개념이 바뀌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오순절성령강림 이후에는 모든 믿는 자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되었기에, 모든 성도가 곧 움직이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만나보려면, 사람들은 물질적인 예루살렘성전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으며, "내가 하는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돌아가셨던 그 장소가 곧 성막이자 성전이었던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그가 율법을 어긴 것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020년 03월 16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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