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의 지은 죄값을 과연 후손들이 받게 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왜 한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의 범죄는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는 왜 기브온 거민들의 학살에 대한 속죄를 사람이 갚도록 허락하셨는가? 다윗이 당한 3년기근과 그의 속죄를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에도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후손들이 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 그 해답들이 있다.

 

2022-02-0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무엘하강해(28) 사울왕이 지은 죄값을 왜 다윗시대에 받아야 했는가?(삼하21:1~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G6n8_BklRs [혹은 https://tv.naver.com/v/24990954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왜 선왕이었던 사울왕 때에 저지른 죄의 댓가를 다윗왕에게 물으신 것일까? 다윗은 처음에는 왜 자기 시대에 3년동안이나 연거푸 기근이 발생하는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3년차 되던 해에는 하나님께서 물었다. 왜 기근이 해년마다 찾아오는지를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거민에게 행한 일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기브온 거민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기도를 하게 했고 하나님께 그들의 억울함의 보셨으나 끝내 사울왕이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죽자, 다윗왕 시대에 기근을 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다윗이 말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단지 배치를 뒤에 했을 뿐이다. 이 사건은 다윗왕의 초기에 일어난 사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울은 기브온 거민들을 살해한 것인가? 그리고 이 사건은 어떻게 해서 해결이 되어 기근이 사라지고 그 땅에도 비가 내리게 되었는가? 어떤 이야기는 원인만을 이야기할 뿐 그 해법과 과정이 생략되기도 하지만 이 사건은 에필로그로 기록된 사건으로서 그 모든 전 과정을 소개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사건을 통하여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후손이 진짜 받는 것인지 그리고 한 민족의 지도자의 범죄가 자기 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그리고 조상들이 지은 죄는 어떻게 풀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사울의 시대를 이은 다윗의 통치 초기에 왜 기근이 연거푸 이스라엘 땅에 찾아온 것인가?

  다윗의 통치 초기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다윗이 범죄하지도 않았는데, 이스라엘 땅에 연거푸 3년 동안이나 기근이 찾아온 것이다. 1년 정도야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연거푸 지속되는 가뭄소식에 다윗은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묻기로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를 그것은 다윗이 지은 죄가 아니라 선왕이었던 사울왕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사울왕이 자기의 왕권강화를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기브온 땅을 차지하려고 그랬는지 기브온 거민을 칼로 죽인 일이 있었던 것이다(삼하21:1). 그런데 사실 기브온 거민은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했던 가나안 일곱족속 중의 하나였다. 히위족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이 민족만큼은 죽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민족이 이스라엘을 찾아와 화친을 청하였는데, 그 전후 속사정을 모른채 그들과 화친하는 바람에 그들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과 화친한 상태에서 그들이 가나안 일곱 족속 중 하나라는 것을 3일 후에 알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과 화친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는 대신에 나무패며 물긷는 자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민족을 사울왕 시대에 와서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살해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기브온 거민도 이스라엘 사람이었기에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으시고 그 땅에 비가 내리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연거푸 3년동안이 하늘이 막혀 비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3. 한 나라에 기근이 연거푸 발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나라에 집중적으로 기근이 임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민족이 범죄하여 그 민족을 치실 때에 칼(전쟁)과 기근(가뭄)과 전염병으로 치신다고 율법으로 아예 선포하셨기 때문이다(레26:23~26).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공동체를 민족적으로 치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에는 꼭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을 사용하셨다(겔6:4~8, 5:11~12).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시대이지만 기근이 3년동안 지속된 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치시는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울과 그의 집안이 지은 죄를 민족적으로 치신 것인가? 그것은 죄는 사울과 그의 집안이 지은 것이지만 실은 한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그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죄를 민족의 죄로 보시는 것이다. 이처럼 한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가 짓는 죄는 그만큼 큰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값을 물으실 때에는 민족적으로 죄값을 물으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자의 잘못과 실수가 한 나라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알고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가 범죄하거나 실수하지 않도록 기도를 해야 함을 명실할 필요가 있다. 

 

4. 다윗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한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다윗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하였는가? 그것은 기브온 거민을 불러다가 드르에게 어떠헥 속죄해야 그들이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축복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삼하21:3). 그런데 그들에게서 나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들은 이 죄는 속죄의 예물을 바치는 것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자기의 민족을 이스라엘 땅에서 살지 못하도록 학살을 자행하였고 멸하였던 사울의 자손 일곱 사람을 달라고 하였다. 그들을 나무에 매달라 그들 조상들이 억울하게 죽었던 죄값을 받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것도 사울의 고향이자 왕도였던 기브아에서 말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다윗은 그것을 승낙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지은 죄값을 사람으로 담당하게 하겠느냐고 묻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도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맹세한 것이 있어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살리고, 사울의 첩 리스바가 난 두 아들들인 알모니와 므비보셋(동명이인)과 사울의 딸 메랍이 시집가서 낳은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그러자 그들이 일곱 명을 붙잡아 기브아 산 위에서 그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게 된다. 죄를 지은 자는 사울이었데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 7명이 대신 죽임을 당한 것이다. 

 

5.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후손들이 담당하게 된다는 데 과연 그게 사실인가?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그의 후손들이 담당한다는 것을 여실이 알 수 있다. 사울이 기브온 거민을 억울하게 죽인 일은 아무도 그 죄값을 담당하는 사람이 없자, 한 나라의 지도자가 죄를 지은 것이었기에 이스라엘 전역에 기근이 찾아오게 하였다. 그렇더라도 그 죄값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말씀으로, 억울하게 다른 사람을 고의로 죽인 죄에 대해서는 샘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그를 죽여 히흘린 죄값을 그 사람에게 담당시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민35:30~34). 이것이 율법규정이다. 그러므로 사울왕이 억울하게 기브온 거민을 학살한 죄값은 사울왕이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나 사울왕이 그 죄값을 받지 못한채 다른 죄값으로 전쟁으로 죽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통해 사울의 죄를 찾아내게 하셨고, 이제는 그의 후손들이 그 죄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기브온 거민의 억울한 마음을 사라지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죄값을 7배로 물으신 것이다.

  그렇다. 자기 조상들이 죄은 죄값을 후손들이 받게 되는 경우가 성경에도 여러번 나온다. 대표적인 예로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자기의 나물밭을 삼기 위해 이세벨을 통하여 나봇을 죽인 일이 있었다. 그때 이세벨은 나봇이 왕과 하나님을 저주하였다고 하는 거짓말로 뒤집어씌어 그를 억울하게 죽게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봇의 포도원에 흘린 피값을 고스란히 아합왕에게서 찾았으니, 아합의 첫째 아들 아하시아와 둘째 아들 여호람이 질병으로 죽어나갔고, 둘째 아들의 42명의 손자들과 아합의 자손 70명이 하루 아침에 죽어나갔다. 그리고 이세벨은 신하들이 밑으로 떨어뜨려 해골이 깨지고 사지가 터져 죽어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게 되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렇다. 남을 억울하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그 후손이 그 댓가를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6. 기근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다윗시대에 임한 3년간의 기근은 사울의 아들들과 손자들 7명이 죽었다고 곧바로 해결되지 아니했다. 그것으로 곧장 기브온 거민들의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속죄사건은 이 일이 있은 후 약 6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비가 내림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개월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들이 6개월 동안 나무에 매달려 살이 썩어 내려 뼈만 앙상하게 남을 때까지 지속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사울의 첩 리스바가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자기의 아들들과 조카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동안 바위 위에 굵은 베옷을 펴놓고 애곡을 하였다. 그리고 그 시체에 낮에는 공주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게 못하게 지켜내었다. 그 시작은 보리를 베기 시작할 때부터였는데, 그녀의 애곡은 그 땅에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4월에 시작된 애곡이 10월에 가서야 비로소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때 비로소 그 땅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본 다윗은 그녀의 깊은 슬픔을 위로해주고 싶어했다. 그전에 죽었던 사울왕의 뼈와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의 거민에게 받아서 이번에 죽은 사울왕의 아들 둘과 외손자 5명과 함께 가족묘지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하여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모두가 합장된 것이다. 사울이 지은 죄로 인하여 자기 아들 요나단과 알모니와 므비보셋이 함께 묻혔고, 자기의 외손자 다섯명도 함께 그 묘에 묻힌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죽인 죄는 그 죄값을 크게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7. 사울의 범죄에 대한 속죄는 왜 동물의 희생제물로서는 아니 되고 꼭 사람이 죽었어야 했는가?

  이것은 조금 전에도 살펴보았듯이 사울이 기브온 거민을 죽인 죄는 우연히 죽인 죄가 아니라 고의로 살해한 죄이기 때문에 그 피값을 사람이 치러야 한다는 율법규정에 따라 시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이러한 속죄 행위가 장차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건으로, 흠없는 속죄양이 아니라 직접 사람 제물로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시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실 때에 동물의 희생제물이 아니라 인간제물로서 주님이 직접 죽으실 것을 미리 짐작케 하는 사건을 미리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 장차 그리스도가 직접 속죄제물로 죽으실 것을 예상하였을 것이다. 

 

8. 나오며

  왜 사울왕이 범죄했던 것을 다윗 시대에 온 백성이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사울왕의 범죄행위는 단지 개인적인 일탈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범죄행위는 국가적인 죄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저지르는 범죄행위를 너무 쉽게 보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국가적인 재앙을 초래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은 지기 시대에 임한 기근재앙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였고, 그것은 사울왕이 고의로 사람을 살해한 죄에서 비롯된 것을 깨닫고 그것에 대한 속죄를 행함으로 결국 그 땅에 기근의 재앙이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후손들이 톡톡히 치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후손들이 그 죄값을 받게 될 때에는 7배로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고의로 범한 죄는 동물의 희생제물이 사용되는 속죄제사로는 절대 아니 되며 직접 사람이 죽임당하여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 인류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 직접 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지은 죄는 동물이 대신 죽어서는 아니될 만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죽임당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에 들어와서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후손들이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조상들이 지은 죄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제는 그의 후손들이 회개함으로 없앨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죄들이 예수께서 인류의 죄값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의 상황이라면 우리 모두는 엄청난 재앙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미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우리가 회개하는 것만으로 제거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도 이와같은 사실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조상들이 지은 살인죄라도 이제 그의 후손들이 얼마든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면서 속히 낱낱이 그러한 죄들을 회개하여 저주로부터 온전히 해방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2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17)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5)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4)(히2:14~15)_2020-08-07(금)

https://youtu.be/d78T-I0N0v8 [혹은  https://tv.naver.com/v/15162366 ]

 

 

1. 구원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누구로 믿어야 하나요?

  사람이 구원얻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구약에 약속된 그 메시야(그리스도)이신 것과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어느 누군가 둘 중의 하나만 믿고 나머지 하나를 믿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는 구약시대 4,000년동안 약 350가지 이상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이십니다. 동시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로 인하여 3년반을 따라다녔던 베드로는 그것을 알아보았습니다(마16:16). "당신은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실로 대단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분이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까? 먼저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뜻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요10:30~36). 왜냐하면 "사자의 새끼"가 사자이고, "독수리의 새끼"가 독수리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롬5:10에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죽을 수 있는 존재 곧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원래 죽으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딤전6:15~16). 그럼, 예수께서는 왜 죽으셨나요? 그것은 한 마디로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히2:9, 딤전2:6, 고전15:3, 갈1:4). 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간단하지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곧 죽기 위해 사람되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라는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3. 왜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을까요?

  그럼, 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것일까요?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대신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럼, 왜 굳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사람되신 하나님)께서 죽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인류의 죄를 속죄할 수가 없었기 대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첫째로, 하나님이 사람되신 이유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중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흠없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사망에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롬5:12). 그리고 아담은 그 범죄의 댓가로 후손들에게 죄성을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성 곧 원죄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갖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에는 인류의 죄를 대속할만한 흠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시어 흠없는 제물되어 죽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첫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된 예수님만이 인류의 죄를 대속할만한 조건을 갖추신 유일한 분이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되신 이유는 이것 외에도 2가지가 더 있습니다. 

 

4.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두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두번째 이유는 하나님과 인류의 원수였던 저 마귀(루시퍼)를 멸하고 더이상 마귀로 하여금 마귀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히2:14, 요일3:8). 마귀는 누굽니까? 그는 루시퍼요 옛뱀이요 사탄이며, 이 세상의 임금입니다(요12:31, 14:30, 16:11). 그런데 특별히 그를 "마귀(디아볼로스)"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이름의 뜻이 "비방하는 자, 참소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도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은 "마귀의 일들"을 멸하기(파괴케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3:8).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도 역시 죽음을 통하여 사망의 세력을 잡은(가지고 있는) 자 곧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멸한다"는 단어는 "카타르게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무효케 하다. 쓸모없게 만들다. 못쓰게 만들다"는 뜻입니다. 고로 예수께서 혈과 육을 취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마귀를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히2:14). 왜냐하면 첫째로 마귀는 사람이 죄를 짓지 아니하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기 때문이요 둘째로, 마귀가 사람을 미혹하여 죄를 짓게 했어도, 누군가가 대신 그 죄값을 담당해버리면 마귀는 아무 쓸모없게 되어버리는데, 이 일을 하려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5. 예수께서는 어떻게 마귀의 사망권세를 무효케만들어버리고 그가 하는 일들을 파괴시키셨나요?

  그것은 마귀로 하여금 죄없는 예수님을 죽게 만들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들어오긴 했지만 마귀라는 놈도 예수님을 이전에는 결코 본 적도 없고 그에 대해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그러자 마귀는 그가 누군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께서 40일동안 광야에 가시어 금식하여 굶주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악의 조건을 갖춘 것입니다. 그러자 곧장 그에게로 가서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3번 다 번번이 예수님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직접 예수님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는 3년동안 연구를 했는데, 3년 연구 끝에, 그는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가룟유다 속에 들어가 배신자가 되게 하고, 예수님을 넘겨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고 장로들을 충돌질하여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를 걸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사탄마귀의 도구가 되어버린 가룟유다와 종교지도자들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셩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바라던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전가받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는데, 아직 죽으시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스스로 예수님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고는 다른 이들을 출동시켜 죽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마귀에게 불법이었습니다. 죄없는 사람을 자기가 가진 사망권세(히2:14)을 이용하여 죽였기 때문입니다. 고로 그날 사탄마귀는 사망권세를 예수님에게 빼앗기도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이후로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줄곧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계1:17b~18). 고로 아무리 사망권세를 가진 마귀라 할지라도 그때 이후부터는 예수님의 허락없이는 털끝 하나도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요일5:18). 그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결코 함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그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악을 대신 뒤집어 쓰시고 죽으셔서, 죄값인 사망의 값을 지불하셨기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수명의 기한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마귀가 가지고 있는 "사망권세"는 더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사람을 참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2020년 08월 07일(금)

정병진목사

 

  왜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다른 종교를 전혀 존중할 줄 모르는 무식한 처사가 아닌가? 내가 하는 주장은 옳고 남이 하는 주장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아주 편협적이고 독선적인 생각은 아닐까? 오늘 이 시간에는 왜 예수님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불교에서 가장 큰 스님 중의 하나였던 성철스님(1912-~1933)을 알고 있는가? 그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법어로 유명하신 분으로, 한국 불교 조계종의 종정을 지내셨던 분이다. 그는 초인적 자세인 장좌불와와 극기수행을 8년간이나 행하셨고,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여 줄줄 외셨을 뿐만 아니라 언어에도 능통하여 7개국어를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인생을 한하면서 쓴 글(열반의 노래)이 여기에 있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일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구나. 산 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구나.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왜 불교에서 득도의 경지에 오르신 분이 자신은 수많은 중생을 속인 존재라고 시를 지어야 했으며, 자신은 아비지옥으로 떨어질 존재라고 말해야 했을까?

  또한 이 시대에 인류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주목할 만한 사람이 있다. 그는 전 세계에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만들어 내놓음으로 전 세계를 열광시킨 장본인으로, 애플컴퓨터를 창업한 '스티브 잡스(1955~2011)'라는 인물이다. 이 세상 사람치고 그만큼 큰 부와 명예를 가졌던 자가  또 있었을까? 그런데 그랬던 그도 췌장암으로 고생하다가 56세의 일기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그때 그가 죽기 전에 병실에서 남긴 글이 있다.

“I reached the pinnacle of success in the business world.(나는 비즈니스 세상에서 성공의 절정을 보았다.)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게 되면 내 삶에 즐거움은 많지 않다. 결국 부()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었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어둠 속 나는 생명 연장 장치의 녹색 빛과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보고 들으며 죽음의 신()의 숨결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 또한 돈도 있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도 질병과 죽음앞에서 그만 무력하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왜 그랬던 것일까? 다른 것은 다 정복 할 수 있었어도 질병과 죽음만큼은 정복할 수 없었다는 뜻인가?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느날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바로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6). 이는 곧 예수께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통로요 천국에 이르게 하는 참 진리요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필요한 생명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자신더러 구원에 이르는 바로 그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는 희대의 사깃꾼인가 아니면 참 진리를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우리가 예수님이 바로 그 길인가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은 과연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실 구원받아야 할 어떤 심각한 상황, 구조받지 아니한 채 내버려 둔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어떤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의 상태에 대해 "상한 갈대이자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진단하셨다. 인간은 이미 죄로 오염되어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대로 놔둔다면 인간은 결국 꺾일 것이요 꺼져버리게 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만일 그러한 상태로 죽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죄값으로 영원한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값은 곧 사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롬6:23). 사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은 지금까지 사망을 맛보고 있다(롬5:12,14).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할 때 모든 인류는 아담의 그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은 다 죄의 댓가를 받고 있다. 우선 육신이 죽는 죽음을 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육신이 깨지기 전에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죽더라도 둘째사망의 해는 받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둘째사망'이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된 채 마귀와 그의 천사들이 있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기전에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인류의 선각자들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촛불로 자신의 몸을 지지기도 하고, 송곳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서 자신의 몸에 고통을 가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한 가지 고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극기수행을 하기도 하고, 이어떨어지는 폭포에 자신의 몸을 내어맡기는 수행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모든 것이 다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자신의 생각을 없애기 위해 명상을 하기도 하고 도를 닦기도 한다. 하지만 성철스님을 비롯하여 이 세상을 살다간 위대한 사람들이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해결하지는 못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죄된 본성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죄된 본성과 죄의 결과로 둘째사망의 해를 받아야 할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셨다. 그 방법이 곧 '속죄'라는 방법이었다. 인간으로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죄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속죄란 무엇인가? 이것은 남이 대신 내 죄값을 지불함으로서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랬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도록 계시해 주셨는데, 구약시대 때에는 속죄제사를 드리는 방법이었다. 이는 죄인이 흠없는 희생제물에게 자신의 죄를 안수한 다음 그 제물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면 대제사장이 그 피를 받아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의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위 속죄소에 그 피를 뿌린다. 그러면 그 피가 그 사람의 죄를 덮어서 용서받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수천년동안 이스라엘서는 법궤 위 속죄소에 흠없는 희생제물의 피를 뿌려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조치였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흠없는 사람이 와서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죄된 본성이 없이 태어나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죄를 하나도 짓지 아니하고 살 사람이 있을까? 없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흠없는 인간제물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결정하셨다. 그것은 처녀잉태방법이었다. 곧 처녀의 몸을 빌려서, 말씀이 육신이 되게하는 방법이었다. 결국 이러한 예언이 주어지고 약 700년이 지난 어느날, 처녀 마리아에게 한 천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천사는 그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했으며, 그의 이름도 예수라고 지을 것을 지시했다. 처녀는 자신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자, 천사는 성령이 그녀 위에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녀를 덮게 되면 남자없이도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 그녀는 그때 그러한 아이를 즉시 임신하게 된다. 그래서 태어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분이시다.  그가 바로 둘째아담이자  죄없이 태어난 최초의 사람이신 예수님이시다.

  이처럼 죄된 본성 없이 태어난 예수님은 그의 나이 33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몸을 속죄제물로 내어놓으셨다. 결국 인류의 죄는 예수님의 흠없는 피를 통해 덮어졌고 씻겨졌다. 또한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죄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죄없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서 영원하 속죄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죽은지 삼일만에 다시 되살아나셨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에게 죄가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예수님은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죄값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다시 살아났으니 그분은 자신의 죄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러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인가? 그것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분은 인류의 속죄제물로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렇다. 골고다 언덕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곧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기 위한 속죄제사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흘린 피가 인류의 죄를 덮어버린 것이다. 당시 실제로도 십자가에서 수직으로 지하 6m 아래에 B.C.586년경 바벨론의 침략을 피해 제사장들이 숨겨둔 법궤가 있었는데, 그때 예수님의 피가 바로 속죄소 위에 떨어진 것이다.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흘러나온 흠없는 예수님의 피가 갈라진 바위틈을 통해 그리로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약 20년전에 고고학자 론와이어트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렇다. 왜 예수님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줄 아는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정한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이시기 때문이다. 그분만이 죄없는 인간으로서 속죄제물의 자격을 갖추셨기 때문이다. 왜 석가모니나 무함마드나 마리아나 이만희나 성철스님의 피는 안 되는가? 비록 그들이 뛰어난 자들이기는 하지만 다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이므로, 그들의 피로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54년을 딸 불필과 단절하며 살았던 성철스님은 어느날 딸을 위해 시를 썼다. 그런데 거기에 놀라운 문구가 나온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동안 포교한 것은 헛 것이로다.우리에게 는 구원이 없다.죄 값을 해결 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불필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시에 찾게 되었다. 필이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그렇다. 극기수련과 정진을 하신 성철스님이었지만 그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죽고나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한편 이 세상의 가장 큰 부를 쥐고 있었던 스티브잡스도 결국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스티브잡스가 과연 돈이 없어서 죽었을까? 아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에그가 단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죄를 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흠없는 제물로 하여금 대신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죄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아들을 죄없는 인간으로 보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딱 2가지다. 하나님이 정하신 속죄의 방법 곧 예수님을 통한 속죄를 믿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자신이 지은 죄를 씻음받아야 한다. 이것을 '회개'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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