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6) 왜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을까?(행22:1~23)_2023-01-17(화)

https://youtu.be/N7QhkUad_mM [또는 https://tv.naver.com/v/32508627]

 

1. A.D.58년경 유대인들은 왜 바울을 죽이려 했는가?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3가지를 무시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3가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것으로서 유대인 선민사상과 율법과 성전이었다.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3차 전도사역을 행하고 있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에베소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는 바울을 보고서 그렇게 고소한 것이다. 

행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바울)은 각 처에서 우리 백성(유대인)과 율법과 이 곳(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3가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유대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3가지 것을 목숨처럼 귀중하게 여긴다. 그것은 자신들(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율법과 성전에 관한 그들의 믿음이다. 첫째, 그들은 선민사상이 대단하였다.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만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언약백성이 된 것은 그가 할례를 받음으로 시작되었다고 믿고는, 할례를 받으면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요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만이 선민이라고 하는 자긍심이 아주 대단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이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세상 어떤 민족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자기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이다. 셋째, 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모신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므로 성전도 그들 나름대로 구획을 정해놓고는 그것을 철저히 지켰다. 그들은 성전을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영역(제사장의 뜰)과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이 들어가는 영역(이스라엘의 뜰)과 여인들이 들어가는 영역(여인의 뜰)으로 나눠 놓았다. 그리고 그 너머 바깥쪽을 '바깥 마당'이라고 하였다. 바깥 마당에는 이방인들도 허용해 주었다. 그러므로 성전 안에 들어오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아주 더 선명해진다. 

 

3. 바울이 나중에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자기도 처음에는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목숨처럼 여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목표에 따른 과정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그럼, 그때가 언제였는가? 그것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부터다. 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목숨처럼 생각하고는 그것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구원 곧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는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씨로서 오신 분으로서, 율법과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결국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으며, 천국에도 못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주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지상의 만민 중에서 구별하여 세우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낳아 줄 민족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메시야를 통해 자기 민족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실 아브라함의 42대손으로 예수님을 낳는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을 구별하여 세운 목적도 상실했다. 결국은 세상 모든 민족(만민)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얻도록 도와주고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 민족만 선민으로 여기고 자기 민족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왜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는가?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고서 깨달으라고 주신 법이다. 즉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 그러면 어찌할꼬?'라는 생각을 갖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메시야를 붙잡고 그분을 믿어서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으라고 주신 법이 율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그 율법을 다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법이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초등교사였던 것이다. 

  셋째, 성전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성전이란 원래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모시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목숨처럼 여기는 성전은 원래는 성막에서 시작된 것이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지음으로 건물로서의 개념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성전 건물 자체를 신성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물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게 넘겨버린다. 그리고 그때에 성전도 함께 파괴된다. 다시 포로 귀환 후 성전을 짓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법궤가 제 2성전 안에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셔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죽고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을 믿는 이들 속에 보내 주셨으니, 성령이 오신 다음부터 하나님이 계신 장소는 이제 믿는 이들 곧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껍데기에 불과한 성전을 목숨처럼 붙들고 있었다. 

 

5. 왜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바울의 호소는 간단한 것이었다. 유대인의 존재 목적을 제대로 알고, 이제는 율법과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바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도 역시 그토록 목숨처럼 여겨온 것들을 하루 아침에 포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렇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잠시 사용한 민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민족 자체를 우상시하였다. 그리고 율법이나 성전은 실체이신 예수님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실체인 것처럼 붙들었다(히10:1, 골2:16~17). 그래도 그것을 통해 자기들이 얻고 누리고 있는 특권이 매우 컸기에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종교개혁 이후의 세대인 우리들에게 '오직 믿음'은 매우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은 어느새 값싼 구원론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쉽게 구원받고 쉽게 천국가는 티켓 정도로 여기게 되어 버렸다. 아니다. 바울이 '오직 믿음'을 말한 것은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안식일 준수, 할례, 정결법 등)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얻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와전된 믿음 지상주의는 이제는 믿고 회개하는 것조차 행위 구원론을 따라가는 것이라면서 매도하고 있으며, 행함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 율법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정죄하기까지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음 지상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고 회개함으로 얻는 것이요, 우리의 충성과 헌신을 통해서는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영원한 지위(신분)와 상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17일(화)

정병진목사

예수께서는 누구신가? 히브리서는 예표론적성경해석방법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수님은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도 아니었다. 그리고 성전에서 죽으신 것도 아니었다. 그분은 단지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서 버려진 채 죽임을 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예수님은 나의 구주로 믿고 따르는가? 대체 그날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히브리서만이 들려주는 놀라운 속죄제사의 비밀, 우리는 지금 거기에 가보려고 한다.

2020-03-1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예수께서는 이 땅의 참 성막의 대제사장이셨다(히8:1~6)
https://youtu.be/1DivMwFk8U0

[ https://tv.naver.com/v/12877650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는 자들이다. 즉 예수께서 2천년전에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을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대속의 사건이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 의하면, 속죄일제사는 성전에서 대제사장이 집례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아뱌(요11:49)에 의해 성전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의 모형에 불과할 뿐, 진짜는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속죄사역을 한 것으로는 안 되고 죽고 부활한 후에 승천하셔서 하늘의 성소에서 제사를 다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진술이 맞는 진술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골고다언덕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사건이 과연 인류를 위한 구속사건이었으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믿는 자가 받게 되는 혜택은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인류의 구원을 위해 대속죄일 제사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구약성경 레위기 16장을 보면,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가 나온다. 거기에는 속죄제사를 드려 죄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다. 첫째는 제사드리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그곳은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하신 장소 곧 성막(성전)이 있는 곳이라야 한다. 아무데서나 제사를 드린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둘째는 제사에 사용될 속죄제물이 있어야 한다. 틀히 죄인을 대신하여 죽을 흠없는 속죄제물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제사를 드려줄 제사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속죄일 제사에는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드린 속죄제사는 과연 대제사장이 인류를 구원할 대속죄일 제사를 드린 것이었까? 그리고 오늘은 이 3가지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보도록 하자.

 

3. 예수님은 과연 성전(성막)에서 돌아가셨는가?

  우선 예수께서 인류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 죽으시려면 "장소"가 합당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한 장소에서 제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구약성경에서 대속제물을 바치는 장소는 어디였ㅈ는가? 그것은 성막이었다. 혹은 그것이 발전된 성전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과연 성막 혹은 성전에서 돌아가셨는가? 우선 확실한 것은 예수께서는 결코 성전 안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날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문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의미한 죽음이라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속죄제일 제사를 완성하기 위한 첫번째 단추부터 끼워보자. 예수께서는 과연 성막(혹은 성전)에서 돌아가신 것인가? 이부분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히9:8의 말씀이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9:8).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장막"이 무엇이며, "성소"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첫 장막"이 무엇인지는 히9:1~2에 보면 나온다. 거기에서는 첫 장막을 "성소"라고 부르며, 그것 안에는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첫 장막은 첫째성막으로서 성소를 가리킨다. 그러면 둘째장막은 둘째성막으로서 지성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히9:8의 말씀을 보면, "첫장막"과 "성소"와 충돌한다. 둘 다 똑같은 말인데,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첫장막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히9:8에 나오는 "첫장막"과 "성소"가 각각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선 "첫장막"을 지상에 있는 성전의 성소라고 가정해보자.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과연 지상의 성소가 어찌되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첫장막"이란 지상의 성소를 가리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나오는 성소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헬라어원문을 보면, 이따 "성소"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성소들"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실마리가 풀리가 시작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성소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들이라고 풀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서는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설명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히9:11~12에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일의 좋은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후에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고로 예수께서 속죄사역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의 영(부활체)는 하늘에 있는 성소 안으로 들어가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히9:8의 "첫장막"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히10:19~20에 나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들]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19~20)"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갈 장소는 다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소들(성소와 지성소들)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지상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둘째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첫장막(첫째성막=성소)은 예수님의 육체였던 것이요, 둘째장막(둘째성막=지성소)는 예수님의 영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첫째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일곱금촛대와 분향단과 떡상이 놓여있으며, 좌우에 싯딤나무로 지어진 판자들이 있고 앞쪽에는 지성소를 구분하는 둘째휘장이 있는 곳이 "첫째성막"으로서 "성소"인데, 지상의 성전의 성소는 모형이고, 이것의 실체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각도에서 성경을 보면 많은 부분이 열리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요1:14에서 사도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거하시매"라는 단어를 보면, "스케노오"라는 헬러어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천막을 치다. 장막을 치다. 성막을 짓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육신을 입은 사건이 곧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막을 치신 사건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땅에 물질적인 성막(모형) 말고 또 하나의 진짜 성막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야말로 "움직이는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그런데 사도요한은 이 성전을 가리켜 "예수님의 성전된 자기 육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요2:21).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는 성전의 첫째방으로서 성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이 성전의 성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지상의 성전에 있는 둘째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마27:51), 그리고 한 가운데(눅23:45)가 찢어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성전의 휘장은 모형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의 성소 곧 첫장막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히 예수님이야말로 걸어가는 성막(성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분의 몸은 첫째장막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그분의 영은 둘째장막에 해당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곱금촛대에 불을 밝히고 분향단에서 향을 사르고 떡상에 떡을 진설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몸안에서 행하는 사역이었고, 지성소의 법궤 위에 피를 뿌리는 것은 그분이 영 안에서 행하시는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성막(성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이같은 일들로 인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걸어다니는 성막(성전)이었기에 그분이 어디서 돌아가시든 그분은 속죄제사의 첫번째 조건인 속죄제사는 성막(성전)에서 드려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예수님의 베데스다 못가에서 돌아가시든, 벳바게 언덕에서 돌아가시든 상관없이 그분이 돌아가신 그 장소가 성막(성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왜 예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은 왜 예수께서는 여러 장소들이 많은데 굳이 "골고다언덕"에서 돌아가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번째 이유는 그것이 대속죄일 제사에서 죽임당할 속죄속죄제물에 대한 규례 때문이다(보다 더 정확히 말하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원래 바랬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의 죄를 사하는 대속죄일 제사는 레위기 16장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대속죄일 제사 때에 온 이스라엘 회중을 위한 속죄제는 2마리의 속죄양(숫양2마리)가 사용되었는데,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양으로 드려졌고 또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한 속죄양으로 드려졌다. 여호와를 위한 속죄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지성소(둘째장막)의 법궤 위와 동편 앞에 뿌려야 했다. 그리고 또 한 마리는 안수 후 산 채로 광야의 무인지경에 내다 버려야 했다. 그때 아사셀 양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버림받아 죽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죽으신 것은 이 두 마리 속죄양으로 죽으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아사셀 양처럼 버림받아 골고다언덕(당시에는 성문밖에 위치해 있었다)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그 장소가 여호와를 위한 속죄양의 피가 떨어질 자리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1988년경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가 예루살렘을 여행하던 중 천사의 지시를 받고 예수께서 돌아가신 장소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 법궤의 위치까지 알아낸다. 그곳은 골고다언덕의 바위 밑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날 지진이 일어났었는데, 그때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고여있다가 지진으로 벌어진 틈새를 따라 밑으로 스며들었으며, 지하 예레미야 동굴에 감추어둔 법궤 위와 동편에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를 위한 한 마리의 속죄양의 피가 지성소의 법궤 위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골고다언덕이야말로 성전(예수님의 몸)이 있는 장소였고, 지성소(법궤가 놓여 있음)가 놓여있는 장소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참고로 그 자리에 법궤가 있었던 이유는 남유다가 타락으로 인하여 멸망이 가깝자, 경건한 제사장들이 법궤를 당시 예레미야의 동굴로 옮겨놓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5. 예수님은 흠없는 속죄제물이셨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흠없는 속죄제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동정녀(처녀)마리아의 태를 빌려 태어나셨기에 죄된 본성을 갖지 않은 채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 분이기 때문이요, 그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요 죄를 짓지도 아니하셨기 때문이다(고후5:21, 히4:15, 요일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그래서 사도베드로는 예수님의 피를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피(벧전1:19)"라고 하였던 것이다.

 

6. 예수님은 진정 속죄제사를 드릴 자격을 갖춘 대제사장이었는가?

  이제는 마지막 단계에 왔다. 예수님은 자체가 성막이셨고 흠없는 속죄제물이셨다. 그렇다면 그분은 속죄제사를 드릴 수 있는 대제사장이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자체가 1장부터 10장까지 예수님께서 속죄제사를 드릴 대제사장으로 합당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을 내서 차근차근 히브리서를 읽어보라. 1장에는 그분이 죄를 정결케하는 일을 하셨다고 나오고(1:3), 2장부터는 계속해서 예수께서 대제사장이시라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대제사장으로서 합당하신 분인지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분은 천사보다 뛰어나고(1~2장), 모세보다 뛰어나며(3~4장), 아론보다 뛰어난 분(5~10장)이라고 증거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서, 영원무궁토록 대제사장의 신분을 갖고 계시다고 증거한다(7장). 예수께서 얼마나 뛰어나신 분인지를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볼 것이다(매일 새벽 유튜브로 방송하는 "아침묵상(홈페이지)"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7.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어떤 복을까?

  그렇다면, 골고다언덕에서 인류를 위한 속죄제사를 믿는 자들은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가? 많다. 아주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차다. 우선 예수께서는 요3장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3:15).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의 속죄제사로 인하여 죄들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 있고(히9:22,2:17,1:3), 우리들의 양심이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다고 했으며(히9:14),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며 온전하게 한다고 하였다(히10:14). 그리고 그날 예수께서 열어놓은 새롭고 산 하늘 길을 따라 하늘(셋째하늘=천국)에까지 들어갈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으며(히10:19~20), 결국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히9:25).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앉으셔서(히8:1), 중보자로서 일하시는 그분의 도우심을 받아(히2:18),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히4:16), 우리가 드린 기도가 응답되며(히7:25~26),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처인 하나님의 나라까지 상속받을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히3:14).

 

8. 나오며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드린 제사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완전한 속죄제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그분은 골고다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이 땅에 성막을 치신 것이다. 그분이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전가받은 후, 당신이 이 세상의 죄를 없이하시려고 죽으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무려 350가지 이상의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두 마리의 속죄양으로서 돌아가셨다. 그 표적이 바로 지상성전에 있던 둘째휘장이 찢어진 것이며, 예레미야동굴의 법궤 위에 피가 뿌려진 것이다. 그리고 3일동안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가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의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적인 직무를 감당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분만을 붙들고 기도하며 살기를 바란다.

 

2020년 03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수님의 탄생은 이 땅에 하나님이 거할 장막을 치는 것이었다(히9:9~12)_2020-03-10(화)

https://youtu.be/rYhWKLdLckY

 


1. 성경을 해석할 때 왜 모형론적(예표론적)으로 해석해야 하나요?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초기교부 오리겐(A.D.185~254)이 말한 것처럼 3가지가 있습니다. "몸적인 의미"(문자적 의미), "혼적인 의미"(도덕덕 윤리적 교훈적 의미), "영적인 의미"(알레고리적 의미, 예표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가운데 기본은 "몸적인 의미"를 먼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혼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천지나 하나님교회(안상홍증인회) 같은 경우에서는 처음부터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데 그것도 알레고리적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원래 성경의 저자가 말하려고 했던 의도를 벗어나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작자의 사상를 주입시키거나 교주를 메시야로 믿게 하는 데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반드시 1차적(문자적) 의미와 2차적(교훈적) 의미를 살펴보고 그리고 나서 3차적(영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3차적인 의미는 성경에 나오는 비유들을 해석할 때에 사용하는 방법으로서, 이때는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모형론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가장 안전하며,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해석하실 때에 사용한 방법(요5:39)이었으며, 사도바울도 사용했고(롬5:14, 고전5:7,10:4,15:45), 사도요한도 사용했으며(요2:19~21), 사도베드로도 마찬가지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벧후1:14).

 

2. 성경에서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방법을 최고로 많이 사용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성경에서 모형론적인 성경해석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사용한 사람은 역시 "히브리서 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기초를 세우셨고 사도들이 그것을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만큼 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을 많이 그리고 확실하게 적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탁월한 성경책은 역시 히브리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히브리서의 핵심은 구약의 율법이 모형과 그림자(히8:5)에 불과한 것이요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의 율법 중에서 언약들, 그리고 성막이나 대제사장이나 제물도 다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실체는 누구일까요?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리스도가 몸[통]이요 실체이며 원형인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에 실재했던 사건들과 사람들과 물건들과 제도들을 가져와서 실체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3.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장막"과 "성전"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구약시대 특히 출애굽이후 시내산 아래에 세워졌던 성막은 사실 그때 처음으로 존재하게 된 시설(물건)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늘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준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 땅에 그대로 짓게 했던 것입니다(출25:8~9,40).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25:9)". 그러자 모세는 자기가 본 그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으로 하여금 이 땅에 성막을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약500년 뒤에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로부터 시온산성을 빼앗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거기에 성전을 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그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럼 그때 솔로몬은 어떻게 성전을 지었습니까?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설계도대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설계도도 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성전을 그대로 그려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대상28:19). 그러니까 이 땅에 모세가 지은 성막이나 그것을 건물의 형태로 지었던 솔로몬의 성전이나 다 이 땅에 처음으로 존재했던 기물들이 아니라 하늘에 먼저 있었고 그것을 이 땅에 하늘의 식양대로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성막과 성전은 다 모형이며 그림자인 것이며, 성막과 성전이 실체(원형)가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4. 성막과 성전의 진짜 실체는 무엇이었나요?

  그런데 어느날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논쟁하다가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그러자 유대인들이 물었습니다. "이 성전은 46년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2:20)" 그런데 만약 예수께서 하신 이 대답을 문자적인 의미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허풍쟁이요 몰지각한 사람이요 미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46년동안 지어서 완공했던 스룹바벨성전을, 과연 3일만에 다시 지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즉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비로소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영적인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곧 "성전된 자기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요2:21). 그러므로 그때 헐라고 했던 성전은 물질적인 성전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가리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5. "성전을 헐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몸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나요?

  "성전을 헐라(요2:19)"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의 성육신을 소개하는 사도요한이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신 사건 곧 예수님의 잉태와 성탄의 사건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막을 지은 것이라고 해설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요1:14에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1:14)" 그런데 이 본문을 헬라어 원문으로 지역해보면, "그리고 그 말씀이 육체가 되었으며, 그리고 우리들 안에 장막을 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입니다. 그러니까 "거하시매"라는 말을 헬라어로는, "스케노오"라는 단어로서, "장막을 치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명사 "장막"은 "스케네"라고 부르며, 동사 "장막을 치다"는 "스케노오"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친 성막의 실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부터 존재했던 성막이나 성전은 예수님의 몸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막을 치시려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출25:8에 나온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 어딘가에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한 처소로서 이 땅위에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몸 안에 아버지가 거하셨으니(요10:38), 예수께서는 "나를 보고 있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요(요12:45),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14:9). 또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의 성막(장막,성전)이며, 그분 안에는 하나님(아버지)께서 거하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막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자신이셨던 것입니다. 고로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에 우리는 성막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게 되며, 그분을 믿음으로 하늘로 가는 열린 길을 따라 천국에까지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히10:19~20). 이것은 내일 계속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020년 03월 10일(화)

정병진목사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지 133년이 지났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때만 해도 마을마다 단골무당집들이 있었다. 그러니 해마다 운세를 보고 점을 치고 굿을 하는 것은 일상화된 삶이었다. 하지만 그결과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해 들어올 무렵 동시에 미국에서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이 나라를 살리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믿는 이들은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를 국민의례라는 의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70년동안 처절한 아픔을 겪어야 했다. 북한성도들이 당한 아픔과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아직도 시체를 가까이 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죽은 자를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에스겔43장을 보라. 여기에는 우상숭배와 시체를 가까이 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가 고스란히 나온다. 추도예배, 장례예배, 그냥 이것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그리고 덧붙혀 개척교회들이 상가에 포진해 있는 것도 많이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1. 들어가며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왕에게 잡혀간 뒤 20년이 지난 B.C.573년, 에스겔선지자는 새로 회복될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된다(겔40~48장).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어 남유다가 멸망당한지 14년이 되는 해 1월 10일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있는 에스겔을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회복되어진 성전이었다. 그때 에스겔은 동쪽으로 나있는 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뜰로 들어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다시는 과거의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성전이 파괴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남유다의 멸망을 자초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런데 남유다의 멸망이유가 성전이 더럽혀진 것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성전(솔로몬의 성전)의 파괴됨을 허락하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교회가 어떻게 되어야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지를 나누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성전에 관하여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

  에스겔은 환상 중에 예루살렘 성전을 보게 된다. 동쪽에 난 성전 문, 바깥뜰, 북쪽에 난 문, 안뜰에 있는 남쪽문과 동쪽문과 북쪽문, 안뜰 북쪽문의 부속건물들, 성전문의 현관,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골방들과 제사장의 방 그리고 성전과 성전을 벽 하나 사이에 둔 왕이 살았던 궁궐을 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왕과 왕의 궁궐이 얼마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렵혔는지를 설명해주면서, 하나님의 성전 주변은 반드시 거룩해져야(구별되고 깨끗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성전의 법이라는 것이다(겔43:12).

 

3. 남유다가 멸당할 수밖에 없었던 3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남유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더렵혀진 성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남유다의 멸망의 원인을 남유다 백성들의 계속된 악행과 불의, 우상숭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에스겔에게 보여준 것은 우상숭배는 우상숭배이긴 하지만 누가 우상을 숭배한 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했는지를 알려주며, 특히 하나님께서 성전 가까이에 절대 두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왕의 죽은 시체를 성전 가까이 매장하는 것이었다고 말해주신다.

  다시 말해 남유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3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가르쳐주신다(겔43:7). 그것은 첫째, 이스라엘 족속 곧 남유다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셨고, 둘째, 남유다의 왕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셋째, 남유다의 왕들의 죽은 시체들을 성전 가까이에 둔 것이 그 이유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이든지 왕이든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증한 일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의 대표는 2가지 정도다. 하나는 육적인 음행이요 또 하나는 영적인 음행인 우상숭배행위다. 특히 육적인 음행은 그냥 단순한 음행이 아니라 근친상간, 수간, 동성애 등의 혐오수러운 음행을 가리키며, 영적인 음행으로서 이방인의 우상들을 숭배한 것이 남유다멸망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던 것이다.

  우상숭배행위는 사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거부하는 행위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오직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신 것을 거부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십계명 중에서 1~2계명을 어기는 것에 해당한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지옥으로 던져넣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매우 중하게 보시는 것이다.

  특히 남유다의 우상숭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남유다의 왕들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을 숭배했던 남유다의 왕들이 죽었을 때, 백성들은 그들의 시체를 멀리 치우지 아니하고 성전과 벽 하나 사이에 두고 거기에 매장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첫째는 그러한 일들이 매우 가증한 일에 해당되며, 시체는 부정한 것이어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유다백성들은 이런 것들을 하나님 곁에 두었다. 둘째는 특히 왕들의 시체를 성전 벽 하나 사이에 두고 거기에 매장함으로서 하나님과 이 세상의 왕들을 비슷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는 것이다. 사실 율법에 의하면 시체 자체만으로도 부정한 것이기에 사람이 죽었으면 얼른 밖으로 내어다가 빨리 매장해야 했다. 그런데, 왕이 죽었을 때 그의 시체를 성전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 벽 하나 사이를 두고 매장했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것 때문에 진노하셨는지 모른다. 왜 하나님께서는 시체를 자기곁에 두는 것을 싫어하실까?

  우리는 시체를 가까이 두는 것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바로 사탄마귀가 자기의 것이라고 접수하게 되기 때문이다(창2:14). 더러운마귀가 하나님 뽀짝 곁에서 시체를 접수하고 진을 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언짢아 하셨겠는가? 특히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들은 자신의 가족이 죽지 않는 한 절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겔44:25, 레21:1~3). 시체 속에 귀신이 들어가기 때문에 시체와 가까이 하는 것은 사탄마귀와 친숙해지는 결과를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자기의 가족이 아니한 시체로 인하여 자신의 몸을 더렵혀서는 아니 되었다. 계속해서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한 일들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만약 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가까이 하게 되어버렸다면, 그는 일주일동안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했다. 그런 다음에도 몸을 씻고 제사를 드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과 왕들의 행태는 어떠했는가?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분노를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첫째는 백성이 가증한 일을 계속해서 저질렀기 때문이요, 둘째는 남유다의 왕들이 우상숭배를 버젓이 행했기 때문이요, 셋째는 자기들이 죽어서는 성전 가까이에 묻혔기 때문이다.

 

4. 오늘날에 교회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은 시체를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나 거룩한 사람 곁에 두어서는 절대 아니 되는 것이다. 시체는 이미 사탄마귀가 접수해 버린 물건과 같기에, 그것을 앞에 두고 향불을 피운다든지, 음식을 만들어 바친다든지, 그것에게 절한다든지, 그것 앞에서 통곡을 한다든지, 그것 앞에다가 꽃을 바친다거나 그 앞에서 묵념을 드리는 것은 우상숭배행위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탄을 경배하는 행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앞에 놓거나 마음에 생각하고 드리는 그 어떤 예배도 결코 받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례예배나 추도예배를 굳이 드리겠다면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때 누가 와서 그 경배를 받는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때는 사탄이 보낸 귀신들이 와서 그 경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코 하나님이 오셔서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사탄을 비롯한 귀신들은 천국에 있을 때부터 경배받기를 얼마나 원했던 자들이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경배드리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즉시 그 자리에 귀신들이 치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이란 어떤 존재인가? 귀신들은 타락하여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들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범죄할 때 더럽혀졌고, 하늘에서 쫓겨날 저주를 받았다. 그러므로 귀신들이 우리의 몸 혹은 삶 속에 치고 들어오게 될 때에 우리에게서 어떤 저주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럴 때면, 질병과 가난에 빠지게 되며, 죽음과 무엇인가를 빼앗기는 아픔을 고스란히 당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의 처소인 교회 안에서 절대 장례예배나 추도예배를 드리지 말라. 그것은 저주받을 일을 스스로 사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상황을 보라. 장로님이나 목회자가 죽게 되었을 때, 그들의 시체를 교회 안에까지 들려다놓고 예배드리지 아니하는가? 큰 일이다. 저주를 대놓고 불러들어오는 일을 교회가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성전 주변(가까이)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말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 가까이에 더러운 것이나 부정한 것을 두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말씀을 영적으로 풀이해본다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먼저, 사도바울을 통해 성전과 교회의 관계를 잠깐 살펴보자. 사도바울은 다메섹도상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성전)가 교회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전3:16~17). 하나님을 모시는 집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당신의 영인 보혜사 성령을 믿는 성도들 가운데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누구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어 거듭나게 되면,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오게 되므로 그 사람도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믿는 성도들이 밖으로 나가서 더러운 행위나 부정한 행위를 계속해서 저지르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가 되고 만다. 대표적인 하나의 예를 보자. 예수님을 믿는 자가 계속해서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그는 지금 우상숭배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 밖으로 나가 후에 세상사람처럼 똑같이 죄짓고 욕심부리고 게으르고 나태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그는 결국 자신의 성전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러면 그는 죽을 때에 결국 버림을 당하고 말 것이다(히6:4~8).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계속해서 더럽혀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서 예배처소를 떠나서 밖에 나가더라도 항상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밖에 나가더라고 우상숭배나 악행을 결코 저질러서는 결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들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죽을 때에 버림을 받아 구원에서 탈락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나오며

  남유다백성들의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상숭배행위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라고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반드시 죄값을 치르게 하신다. 결국 남유다는 우상숭배의 죄값을 70년동안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시체를 성전 가까이 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는 일들이다.

  이제 하나의 큰 예를 보자. 북한의 경우를 보자. 북한은 1938년 신사참배를 통해 우상숭배를 교회 안으로 들여왔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처참한 교회의 파괴였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숭배의 죄값을 70년동안 치러야 했다. 그런데 남한은 어떠한가? 아직도 시체를 교회 안으로 들여다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는 예배(추도예배,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다. 큰 일이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개척교회들의 경우 대부분 상가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가는 크게 확대해서 표현한다면 돈신을 섬기는 자들의 공간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것이 결코 바람직한 경우는 아니라고 봐야 한다. 할수만 있으면 거룩한 땅을 준비하고 거기에 교회의 건축물도 세우고 주변을 거룩하게 만들어가야 한다. 오늘 우리는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우상숭배와 시체를 성전가까이 두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분노를 가져오는지를 배웠다. 우상숭배와 시체, 정말 우리가 더욱 더 생각해보지 아니할 수 없는 주제들이다.

 

2018년 5월 11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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