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8(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새 이름'이 들려주는 놀라운 비밀(계3: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SvHXly-7plg [혹은 https://tv.naver.com/v/31818360 ]

 

1. 들어가며

  성경은 계시들의 기록이다. 그것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그렇다면 계시는 어디에서 완성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모든 계시의 마지막이자 계시의 종합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하여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까지 가야 한다. 만약 요한계시록의 바로 앞에 수록된 유다서까지만 보았지만 계시를 다 보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누군지에 관하여 요한계시록만이 전해주는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빌라데빌아 교회에서 주신 말씀을 살펴볼 것이다. 그중에서 예수께서 이기는 자에게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할 것이라는 말씀이 들려주는 놀라운 계시를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새 이름이 과연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군지를 보다 더 정확히 알아가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요한계시록 3:12의 말씀은 누가 들려주신 말씀이며, 그 말씀은 무엇인인가?

  요한계시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계1:19). 그것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에 먼저 본 것과 그리고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되어질 일로 구분할 수 있다. 이것들 중에서 '그가 본 것'은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인자같은 분이시다. 이것은 1장 9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이다. 그리고 '지금 있는 일'이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라는 것으로서,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말씀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차 될 일'이라는 요한이 환상과 계시의 말씀으로서, 요한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3:12의 말씀은 누가 들려주고 있는 말씀인가? 그것은 자신을 '거룩하사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들려주고 있는 말씀이다(계3:7). 특히 계3:12의 말씀은 그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결론적으로 주신 말씀으로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헬라어에서 바로 직역해 본단면 다음과 같다. 

계3:12  이기고 있는 자는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 안에 그를 기둥으로 [장차] 만들 것이다. 그러면 그가 결코 더이상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나의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부터(밖으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질적으로] 새[로운]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질적으로] 새[로운] 이름을 그이(그사람) 위에 [장차] 기록할 것이다.

 

3. 요한계시록의 3:12에서 1인칭 단수로서 자신을 '나'라고 소개하고 계시는 분은 대체 누구인가?

  그렇다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자신을 '거룩하사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라고 소개하고 계시는 그분은 대체 누구신가? 예수님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성령님이신가? 우리는 그분이 누군지를 요한계시록 1장에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거기에 보면 그분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분은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신데, 옷은 발에 끌리는 흰 겉옷을 입고 계셨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있었으며,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같고 눈 같았다. 그리고 그분의 눈은 불꽃같았으며, 그분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된 빛난 주석같았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오른 손에 일곱 별들(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쥐고 계셨으며, 그분의 일비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그분은 대체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빌라델비아에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신 이는 다른 분이 아니라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고 계시는 분이신 것이다. 

 

4. 자신을 가리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자신을 소개하신 분은 누구신가?

  우리는 성경에서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고 계시는 두 분을 만날 수가 있다. 한 분은 구약성경 이사야서에서 만날 수 있고 또 한 분은 요한계시록에서 만날 수가 있다. 먼저 이사야서 말씀을 보면,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소개하고 계시는 분은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이시다. 그분은 나 외에는 결코 다른 신들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자신을 무려 세 번씩이나 그렇게 소개하셨다(사41:4, 44:6, 48:12). 

사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사48:12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그런데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이다(계1:17, 2:8, 22:13). 

계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그런데 요한계시록 1:17과 2:8에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계1:18에서 자신을 자신 이제 살아있는 자이며, 자신이 전에 죽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죽었다가 살아난 적이 있는 분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8에 나오는 그분은 누구인가? 그분도 역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이기 때문에 그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13에 보면, 그분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이자,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라고 소개하신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분은 '나 예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계22:13).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하여,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자신을 말씀하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5. 요한계시록에서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시고 있는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고 계신가?

  그렇다면,구약시대에는 분명히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분명 '여호와'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떻게 말해야 옳은가? 그것은 우선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이 아니신데, 자신이 가리켜 여호와라고 사기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곧 여호와이시다. 

  셋째,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구약시대에는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자신을 예수라고 소개하신 것이다. 

  과연 이 셋 중에 어떤 것이 맞는가? 첫째는 우선 틀렸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요 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다. 사탄마귀가 거짓의 아버지인 것이지 예수께서 거짓말장이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가 정답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맞은 말일 수도 있으나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나 예수님을 둘 다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곧 여호와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와는 신성만 가지신 하나님이시고, 예수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호와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번째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말씀이나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이렇나 정의에서 적용하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원래는 자신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셨던 한 분 하나님이셨는데, 그분이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6. 예수께서 '나의 새 이름'을 이기는 자들에게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이 들려주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주신 말씀 가운데 그분이 이기는 자들에게 자신의 새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3가지 영적인 비밀을 발견할 수가 있다. 

  첫째,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신 분은 과거에 옛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새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옛 이름을 무엇이고, 새 이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분의 옛 이름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이고, 그분의 새 이름은 예수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의 옛 이름은 '여호와'이셨던 것이고, 그분의 새 이름은 '예수'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는 한 분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것이요, 신약시대에는 자신을 예수로 계시하신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옛 이름을 끝까지 사용하시지 않고 새 이름을 지으신 것인가? 그것은 당신의 이름이 새 이름으로 불려지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새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새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보통 옛 이름이 계속 사용되길 원하면서 새 이름을 짓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르기보다는 예수라는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도 같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혹은 '여호와가 구원자이시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에 구원자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예수'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있음을 본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께서 새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셨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오직 하나라고 하셨다(신6:4). 자신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하셨다(사44:6). 그리고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사도들이나 성도들 그리고 예수님도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곧 한 분 하나님께서 이제는 예수님으로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즉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언급한 '나의 새 이름'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이 예수님으로 오셨다가 당신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7. 나오며

  한 분이신 주님께서 오실 때가 다 되었는데, 아직까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20~30년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기가 어려웠다. 그때만 해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요20:28)이라고 하니, 하나님은 마치 두 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도 계시고 아들 하나님도 계시니 하나님은 두 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성령님께서도 하나님이라고 나온다. 그러니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삼위일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를 듣고 유대인들은 과연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에게 아들 같은 존재는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두 분 혹은 세 분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개신교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을 한고 있지만, 실제로는 두 분 내지는 세 분으로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세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한 분이시다. 한 분 하나님께서 다중으로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는 달리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존재하실 수 있고, 사역하실 수가 있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여 천국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삼위로 역사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 분 하나님께서 다중으로 사역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동시에 존재하실 수가 있었고, 동시에 일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홀로 한 분이신 그분께서 아들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계22:1,3).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만이 영원히 기억할 새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18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2) 왜 사도 바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행19:4~5)_2022-12-15(목)

https://youtu.be/9gaQT-a2zD8 [혹은 https://tv.naver.com/v/31818228 ]

1.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세례를 줄 때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성도들이 12명이나 있었다. 이들은 아볼로에 의해 전도된 자들이며 이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가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를 믿기로 했으니 그분이 바로 주 예수님이신 것을 알려 준 뒤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행19:5).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다. 

 

2. 사도 바울은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인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오늘날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곳은 거의 없다. 왜 오늘날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인가? 그런데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마28:18~20).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에는 오늘날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의미야 같은 것이겠지만 글자로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사도 바울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2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처음 초기 교회에서는 과연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

  사도행전에는 초기 교회가 어떻게 세례를 베풀었는지가 나온다. 그런데 교회적으로 세례를 베푼 경우는 총 4번 나오는데, 두 번은 베드로에 의해서 세례가 베풀어진 것이요, 한 번은 빌립 집사가 세례를 베푼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사도 바울이 세례를 베푼 것이다. 첫 번째는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3천 명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때 11사도들과 함께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였다(행2:38). 그리고 두 번째는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인데, 이때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행8:16). 그리고 세 번째는 다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세례를 베푼 것인데, 이때도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였다(행10:48).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세례를 준 것인데, 이때는 빌립 집사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결국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대부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다(마28:19). 그런데 A.D.100년경 거의 모든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던 교회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디다케'라는 책이다. 이 책은 '12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 불려지는데, 여기에 보면 세례를 어떻게 주는지가 나와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물로 침례를 주어야 하지만, 만일 그러한 물이 없다면 다른 물로 침례를 주되, 찬물로 세례를 줄 수 있고, 그것이 없다면 더운물로 침례를 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찬물이나 더운물도 풍성하지 않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에 세 번 물을 부으라고 하였다. 그렇다. A.D.100년경에 교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둘 다 의미는 같은 것이지만, 뉘앙스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한 것이 삼위일체적인 신관을 반영하는 표현이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한 것은 한 분 하나님의 신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요10:30에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도 말씀하셨고,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내 속에서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을 늘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성부와 성자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우리도 역시 '성모'라는 표현을 동일한 위치에 가져다 놓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천주교에서는 A.D.451년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 성모 마리아를 성부와 성자의 신격의 동일한 위치에 놓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를 '데오토코스' 즉 하나님을 낳으신,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1964년 제2바티칸 회의에서는 아예 대놓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출산하였다'고 공식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리아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낳은 것이다. 고로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인 것이지(행1:14, 요2:1,3, 막3:31),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를 빌려 쓴 것이다. 

 

5. 초기 교회는 세례를 줄 때에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대신하여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인가?

  우리는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가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대신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 아들의 이름인 '예수' 속에 아버지의 이름인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예호수아, 예수아,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고로 굳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쓰지 않아도 예수라는 이름 안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 대신에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은 아버지의 이름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5:43).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인 여호와가 누군지를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다(요17:6). 그리고 둘째, 성령의 이름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는데, 성령님께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친히 성령님을 가리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14:26). 그렇다. 성령님은 아들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고로 '예수'라는 이름 안에는 '여호와'라는 이름도 들어 있는 것이고, 성령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이름도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로 초기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특히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와 성령의 이름' 곧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었기에,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수가 있었던 것이다. 

 

 

2022년 12월 15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하나님의 이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은 무엇인가?(계3:12)

https://youtu.be/OXbu40rnlx4

 

1.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에서는 시대별로 구원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서 마28:19을 언급합니다. 여기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제자들더러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상홍증인회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지지만, 성령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는데, 성령의 이름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름을 "안상홍"이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이 주장은 옳은 것입니까?

 

2.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는 3가지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은 셋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28:19에 쓰인 "이름"이라는 명사는 복수명사("이름들")가 아니라 단수("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각각 따로 있다고 했다면, 예수께서는 "이름들"이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들(복수)로 세례를 베풀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각각 따로 있다는 안상홍증인회의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문을 그대로 보지 못해서 착각한 오류입니다. 둘째,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가서 세례를 줄 때에 사도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이라는 말 그대로 세례를 주지 않았고, 전부다 "예수의 이름으로"로 세례를 주었던 것을 그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곧 "예수"라는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와 고넬료가정에 가서 사도 베드로가 세례를 주었을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를 세례주거나 주라고 했으며(행2:38, 10:4),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교회에 세례를 줄 때(행8:16)나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세례를 줄 때(행19:5)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은 하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이라고 사도행전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 성경에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영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았는데, 그 이름을 "안상홍"이라고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였고, 신약시대 아들의 이름은 "예수"라고 성경에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3. "여호와"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신약시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이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마1:21)", "여호와가 구원자이시다(욘2:9).", "여호와가 구원하러 오셨다(딤전1:15,롬10:13)"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과 예수라는 이름은 전혀 다른 이름이 아니라, 같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이름보다는 예수라는 이름이 더 진전된 이름이요 더 확실한 이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 뜻은 원래는 "스스로 계신 자" 혹은 "나는 ~라고 하는 바로 그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자존자" 내지는 "전능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자존자이시며 전능자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더라도, 성령의 이름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은 없습니다. 만약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적어도  "예수"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이후 성도들이 다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는데, 모두가 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확실히 무엇인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는 것일까요?

 

4. 성령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란 "거룩한 영"이는 말입니다. 사실 "거룩한 영"이라는 표현은 영이신 하나님(요4:24)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거룩한 영의 이름을 또다시 지어부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의 일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출3:14~15)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이란 아버지와 별개의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하나님의 바로 그 영)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이름을 취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올 때에는 사람이며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오셨기에 어떤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포함한 "예수"란 이름이 붙혀지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여호와(구약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에서는 성령의 이름이 따로 있다고 하면서, 그 이름을 "안상홍"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서 계3:12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과연 계3:12의 말씀은 안상홍이가 성령의 이름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까?

 

5. 아닙니다. 안상홍이가 성령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성경 어디에 "안상홍"이라는 대한민국 사람의 이름이 "성령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안상홍이 성령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요14~15장에서 보혜사 성령은 모든 사람 속에 들어오신다고 했는데, 죽어서 부산에 묻혀있는 안상홍과 그의 시체가 어찌 무소부재한 상태가 되어서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온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안상홍이라는 이름이 성령 하나님의 이름인 것은 예수님의 새 이름이 안상홍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계3:12). 하지만 계3:12의 말씀은 예수님에게 새 이름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을 뿐 그 이름이 성령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새 이름이라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이름이 있을까요? 그것은 2가지가 다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구약에 계시된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였는데, 신약에 들어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라고 되어 있으니, 예수라는 이름을 하나님의 새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새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진짜로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에 당신의 새로운 이름을 공개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라는 이름이 "안상홍"이라는 이름은 아닙니다. 이 둘의 이름은 결코 단 한 부분에서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차 불려질] 예수님의 새 이름이 꼭 성령의 이름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냥 갖다 붙히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데까지 알면 됩니다. 구약에 계시된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셨고, 신약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둘은 사실상 같은 이름이며, 나중에 불려진 "예수"라는 이름은 한 분 하나님의 새 이름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여호와"라는 이름보다는 "예수"라는 이름(여호와라는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이름)을 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구원도 받고, 기도도 하고, 죄사함도 받으며, 권세도 얻고, 천국도 가기 때문입니다(참고로, 이단들 때문에 오히려 많이 알게 되고 배우는 것 같습니다.)

 

2018년 12월 11일(화)

정병진목사



  성령님의 이름이 과연 있을까? 혹 성령님의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무엇일까? 어떤 이단에서는 성령님의 이름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이름을 모르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참 말일까? 또한 어떤 분은 성령님의 이름이 "보혜사(상담자, 모사, 위로자, 가르치는 이, 도와주시는 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보혜사는 이름이 아니다(요14:26, 15:26). 성령님을 대신하는 대명사로서, 성령의 역할과 그 직임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성령님이 이름이 과연 있는지, 굳이 있다면 그 이름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한 분 하나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하며, 예수 이외에 구원자가 없음을 다시금 되새겨보도록 하자.

  한국교회의 이단에 속하는 단체들 중에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며, 아들의 이름은 '예수님'인데 왜 성령님의 이름이 없겠느냐면서,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므로 반드시 성령님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약 누구든지 그 이름을 모른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면서 책망하기까지 한다. 과연 이들의 주장은 참 말인 것인까?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거짓된 주장을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우선 마28:19에 성령님의 이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아,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이라는 문장 속에, 성령의 이름이라는 글자가 나오니까 성령의 이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만약 아버지의 이름이 따로 있고 아들의 이름도 따로 있으며, 성령의 이름이 따로 있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고 말해서는 아니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들"이라고 말해야 옳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적고 있지 않다. 성경원문에 보면, 이름이라는 단어는 단수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버지의 이름이 곧 아들의 이름이고 아들의 이름이 곧 성령의 이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어 특성상 복수접미사를 잘 쓰지 않는다는 헛점을 이용하여 성령의 이름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아니다. 성령의 이름은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의 이름이 곧 아들의 이름이요 아버지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이제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예수께서도 성령의 이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의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인용한다. 먼저 계2:17을 인용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7)."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흰 돌을 주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그 이름을 받는 자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문제는 이 새 이름이 성령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 이름 곧 성령님의 이름이 '안상홍'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받는 자만 안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그 이름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와서 진리를 듣고 배우라고 한다. 그래서 성령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믿어서 성령의 시대에 구원을 받으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문장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님께서 어떤 상을 베풀어주시는데, 구약에 감추어있던 만나처럼 흰 돌로 상징되는 어떤 상을 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상에는 그 흰 돌을 받는 자의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 흰 돌을 받는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새 이름'이 성령의 이름이라고 주장할만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계3:12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새 이름이 곧 성령의 이름인데, 그 이름이 안상홍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본문을 보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3:12)"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어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주께서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주님의 새 이름이 곧 성령님의 이름이요, 그 이름이 안상홍이라고 주장한다. 아니다. 본문은 그렇게 해석될 수가 없다.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가 된 후에는 절대 다른 소유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며,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게 하겠다는 뜻이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는 뜻이다. 이제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는 "나의 새 이름"이라는 이름이 성령님의 이름이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구약시대에 구원자의 이름은 여호와였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구원자의 이름은 예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령의 시대가 되었으니 성령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럴싸 한 말인가?

  이제 우리가 이 본문에 나오는 "나의 새 이름"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교리로 사용되고 있는 삼위일체론이나 이단시되고 있는 양태론의 이론을 가지고서는 이 문장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삼위로 보는 관점에 의하면, 성령님도 그 이름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요, 앙태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제 시대는 성령의 시대가 되었으니, 성령님의 이름을 알아서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하면 홀딱 넘어가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삼위일체론도 틀렸고 양태론도 잘못된 이론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옷을 바꿔입고 등장한 것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분의 이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같은 이단 사람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존에 저를 통해 선포된 말씀들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삼신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자들은 하나님께서는 만세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각각 따로 존재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다가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로 활동을 하셨고, 신약시대에는아들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내려와 주로 활동하셨으며,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성령하나님께서 영으로 오셔서 주로 활동하시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니다. 이 교리는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지 세 분으로 존재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이나 사도행전이나 요한계시록 같은 천상의 모습이 기록된 곳을 다 찾아보라.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하늘에는 단 한 개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단 한 분의 하나님만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가 2개 내지는 3개가 아니다. 하늘에 올라가 보면, 셋째하늘의 한 중앙에 새 예루살렘성이 있고 그 성 한 가운데에 높이 들린 단 한 개의 보좌만 있다(사6:1, 단7:9, 계4:2~3). . 거기에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신다. 삼위일체론자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한 중앙에 놓여 있고 그 우편에 아들 예수님의 보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니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또 다른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보좌는 단 한 개 뿐인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자들은 만세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이 각각 때로 계셔서 그분들이 회의를 통해 사람을 지은 것이라고 다음의 말씀을 근거로 주장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이 본문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들 만들자"라고 했으니,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회의하신 것이 맞다."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틀렸다. 왜냐하면 이사야서를 보면 세 분 하나님이 회의해서 천지창조를 하신 것이 아니라, 혼자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 그렇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홀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지만 천지창조 전후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을 만들던 여섯째날에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상의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18장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형상을 하고 두 명의 천사와 나타나셨음을 통해서도 증명이 된다. 그리고 유대랍비들의 주석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는데, 그들은 창1:26~27에 나오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천사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하지만 삼신론적인 삼위일체론자들에 의해 이 문구가 지금까지 잘못 해석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리해 보자.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홀로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때 여호와께서 예수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과 상의하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홀로 창조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능자라고 계시하셨다(출6:2). 즉 전능자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전능자가 창조주가 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정확히 가르쳐주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모세시대에 들어오면서, 모세가 하나님더러 자기를 보낸 분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질문 가운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이시며, 그 이름의 뜻은 '나는 ~라고 하는 바로 그분(I am that I am)'이라고 가르쳐주셨다(출3:14~15). 하지만 아담의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불려지고 있었다(창4:25~26). 노아도 그렇게 불렀고(창9:2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그렇게 불렀다(창12:8, 26:25, 28:21). 하지만 모세시대에 비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확실히 여호와이며,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사실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나는 네가 바라고 요구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라고 하는"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는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며, 우리가 외롭고 힘들어할 때에는 "나는 너와 함께하는 여호와 곧 임마누엘"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라는 말의 원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심으로서 여호와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그 전에는 그냥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다이)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모세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시면서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애굽사람에게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가 여호와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출6:6~7, 7:4~5). 이 말은 여호와는 곧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민10:9, 신20:4, 33:29). 이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나는 예수다" 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뜻이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혹은 "여호와가 구원자이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마1:21)" 그랬다. 아담의 시대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는 말로 가르쳐주신, 한 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출해 내시면서, 비로서 자신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구원자이신 것을 밝히 드러내신 것이다.

  그런데 구약시대 때만해도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서 구원사역을 하시겠다고 계속해서 누누이 약속을 하셨다. 그리하여 훗날 하나님께서 정상 메시야를 보내셨는데, 알고 보니 메시야는 당신자신이었다. 즉 만세전부터 한 분이신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메시야로 탄생하신 것이다(사9: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육신을 입고 태어나게될 아들의 이름을 어떤 식으로든지 가르쳐주셔야 했다. 그때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미 이스라엘백성들의 출애굽시킨 여호와가 구원자이심을 포함하는 이름을 새롭게 알려주셨으니 그 이름이 바로 "예수"라는 이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이름이요, 그 이름 자체가 구원자이심을 표현하는 이름이자, 완전한 하나님의 이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 만세전부터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실 때에 당신 자신의 이름을 "예수"라고 가르쳐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이요, 한 분이신 하나님의 새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마28:19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와 성령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곧 그 이름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인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니, 여호와라는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이름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았다. 전부 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맨 처음 탄생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2:38)"으로 세례를 주었고, 사마리아교회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행8:16)"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최초의 이방인이었던 고넬료가정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10:48)"으로 세례를 베풀었으며,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행19:5)"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전부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이름이 예수인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은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한 분 하나님의 새 이름이자, 구약에 계시된 여호와의 이름을 포함하는 새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요5:43)"고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을 드러내신 것이다. 곧 여호와가 구원자이신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신 것이다(요17:6,26).

  그러므로 사실 성령님의 이름은 없다. 한 분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실 때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여호와"라고 말씀하셨지만,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이 곧 인류를 구원하신 일인 것을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오실 때에는 아예 자신의 이름 속에 여호와가 구원자이심을 그대로 포함시며 "예수"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포함하는 이름이요, 아들 자신의 이름인 것이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새 이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이 곧 예수인 것이다. 그렇지만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당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어 여러가지 사역을 하셨다. 특별히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낸 당신의 영은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리웠으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거룩한 영(성령)'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아들로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한 다음에는 당신의 영을 보내주셨으니 그 영이 바로 성령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한 분이신 구약의 여호와의 영이요, 신약의 예수님의 영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에게 더이상 새 이름은 필요없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서 공개되었고,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인 것으로 공개되었으니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굳기 캐묻는다면, 우리는 마28:19에 따라 그 이름은 바로 "예수"라고 하면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교회가 주장했던 의문점을 속시원하게 풀어보자. 계3:12에 나오는 "나의 새 이름"은 결국 누구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곧 예수라는 이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하고 계신 분은 만세전부터 홀로 한 분이신 그분이시다. 그분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때에 사람으로 오셨다. 그때 한 분 하나님께서 다른 새 이름을 하나 부여받았으니, 그 이름은 바로 '예수'라는 새 이름이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쳐진 이름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자 어린양의 이름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14:1)"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신약시대에 육신을 입고 메시야로 오실 때에는 자신의 이름을 "예수'라고 칭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한 분 하나님의 새 이름이자 한 분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으로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아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게 된며, 그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난다. 또한 그분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치료할 수 있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기도가 다 응답된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한 분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이요, 구약에 비하면 새 이름요,  최종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예수 이름 이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은 없다. 성령님의 이름을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그 이름은 '예수'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 무슨 성령님의 이름을 안상홍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한낱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려 하는데고 가만히 있는가? 어찌 구약성경에 단 한 번도 예언된 적이 없는 사람이 어찌 참람하게 자신을 성령님이라고 주장하는가? 그는 과연 무소부재하였던가? 전지전능하였던가? 그는 스스로 계신 존재였던가? 전부 아니었다. 그는 죽어서 그 시체는 이미 흙이 되어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말씀이 아닌 흙이 육신이 되어 한국사람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되, 죄된 본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태어난 자가 어찌 자신을 성령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신성모독이 아니고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런 자의 이름은 백 번 천 번을 불러도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구원자의 이름은 오직 예수님 뿐이기 때문이다(행4:12, 요14:6).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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