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9)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셨던 한 분 하나님이시다(1)(계1:4~7)_2022-05-20(금)

https://youtu.be/MkQ-uO2JXNk  [혹은 https://tv.naver.com/v/26940566 ]

 

1.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장의 서두의 인사말(계1:4~6)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소개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사실 계시의 책이자 묵시의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예언의 책이자 또한 편지의 책이다. 그러므로 형식으로 보면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은 바로 요한계시록 1:4~6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누가 누구에게 편지하는지를 밝힌다. 그것은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요한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서로서,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때 요한은 성자 예수님이 누구시며 또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계1:4~6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2.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사도 요한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언뜻 보기에는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편지들을 쓸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사도 바울의 편지들과 다르다. 다른 이유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 첫째로, 사도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원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사용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표현도 사실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둘째, 요한이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순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성령'하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도 편지에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지만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있기만을 기원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편지의 인사말에 바울의 편지 속에는 결코 성령 하나님이 들어 있지 않는 데에 비해, 사도 요한의 편지인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3.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를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3~4에서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분의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표현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 관한 표현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 얼핏 보기에는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 관한 표현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다고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처음에 표현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것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장차 오실 이'는 분명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근거가 바로 7절에 나온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 이 말씀에 나오는 '그'는 분명 그 앞 구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표현인 것이지 성부에 대한 소개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이라는 표현도 성령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이 표현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어린양의 일곱 눈들'을 가리키며(계5:6), 구약 시대로 치자면 이 표현은 땅에 두루 돌아다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곱 눈들'을 가리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슥4:10). 다시 말해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자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모든 것들을 감찰하는 분이 곧 하나님이신을 것을 드러내 주고 있다. 

 

4. 요한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가 아니라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서로 말씀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로 말하지 않고 있다. 성자와 성령의 순서가 앞뒤가 서로 바뀐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성자에 대한 소개가 너무나 길어질 것 같으니까 먼저 간단하게 성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인 이유가 될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의 실제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시고 나타내시어 일하시는 순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홀로 창조하셨다(사44:24). 그분은 성자와 성령과 협의하거나 회의하지 않으시고, 홀로 하늘을 펼쳤으며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이 홀로 땅을 펼치셨다. 그리고 당신의 영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다시 4,000년이 지난 후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나 이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다(요16:27~28).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이지 처음부터 따로 있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다. 단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고로 요한계시록 1장의 서두 인사말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는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는데 그분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5.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3가지 신분을 가진 자이자, 3가지 활동을 하시고 계시는 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첫째, 그분은 세 가지 신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참된 증인'이자, '죽은 자들의 먼저 나신 이(첫 열매, 원형)'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시다. 둘째, 그분은 세 가지 활동가로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분'이자, '우리를 그분의 피 안에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던 이'이시다. 그리고 더불어 그분은 '우리를 왕국으로, 하나님이신 그의 아버지에게 제사장들로 만드신 이'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일은 현재의 일이며, 그분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은 실은 과거의 일이며, 더불어 우리를 왕국과 제사장들로 만들고 있는 일은 과거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것이며 그 일은 아마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을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과거에 인간이셨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만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기에, 그분이 인성을 취하실 때에 신성이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로 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예수님을 인성을 배재한 분으로 소개할 수 없으며, 또한 그분을 신성만을 가진 분으로도 소개할 수는 없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자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20일(금)

정병진목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런데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삼위일체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자리에 있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도 성부와 성자와 성자가 한 자리에서 일하시고 있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증거로 창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는 표현을 언급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해석은 바른 해석인가? 혹시 틀렸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2021-03-14(주일) 주일찬양예배 제목: 창세기강해(43) 창1:26에 나오는 "우리"가 과연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인지 경륜적으로 살펴보자(창1:26~27, 3:22, 1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gx-0yVgTNFM [혹은 https://tv.naver.com/v/19018365 ]

 

1. 들어가며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성경과 다른 부분들이 끼어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나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적인 신앙으로 굳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룬다는 것을 매우 어려운 일이며, 또한 많은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그런데 천국에 가 보았더니 하나님의 보좌에 예수께서 앉아계시다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성도들은 과연 어떤 충격에 빠지게 될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온대로 믿어야 한다. 거기에다가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가 믿는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성경대로 믿는 것이 답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신앙은 그동안 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신성한 영역처럼 여겨져왔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건드리면 그냥 이단이라고 정죄해버린다. 성경대로 믿지 않는 것이 이단이겠는가 아니면 교리대로 믿지 않을 때에 이단이라고 하는가? 이단이란 결국 그렇게 믿었더니 지옥에 떨어질 때에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성경에 증거하고 있는대로 믿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구약시대에도 과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 따로 활동하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천지창조사역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는 표현에 등장하는 1인칭 복수형이 과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성경책에 나온 말씀과 그리고 구약의 신학자의 논문을 통해서 이를 정확히 살펴보고자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계시의 영이 이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2. 창1:26에 나타난 하나님의 1인칭 복수의 표현은 과연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용어인가? 

  창1:26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는 용어를 사용하실 때에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그 말씀은 이렇다.

창1:26 하나님(엘로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 말씀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그리고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하셨을까 하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많은 초기교부부터 신학자들은 이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라고 주장해왔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공히 개입하시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구약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하는 매우 중요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것이 논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히브리어로 보면 "엘로힘"인데, 이것은 "엘, 엘로하"에 대한 복수형태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주장과 해석은 정당한 것인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엘로힘)께서 자신을 대명사로 받을 때에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4번 정도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4번 사용한 그 용례들은 과연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들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첫째로, 창1:26에 나오는 "우리"부터 살펴보자. 이 말씀은 이 말씀만을 따로 떼어서 보면 그렇게 해석할 개연성이 조금은 있어 보인다. 물론 창1:27에 가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증명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창1:26절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둘째, 창3:22의 "우리"가 있으며, 셋째, 창11:7에도 "우리"가 나오며, 넷째, 사6:8에도 "우리"가 나온다. 우선 그 사용용례의 성경구절이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창3:22 여호와 하나님(엘로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11:6-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사6:8-9 내가 또 주(아도나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위의 경우 셋 다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예들이다. 먼저 창3:22부터 살펴보자. 여기서 주어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분이 하나님(엘로힘)은 하나님인데, 여호와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구약의 "엘로힘"은 여호와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이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이것은 명칭에서만이 아니라, 창조사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조금 있다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창11:7을 보면, 여기서 주어 우리는 "하나님(엘로힘)"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도"도 아니다. 여기서 주어는 "여호와"다. 그런데 구약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여호와"는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유일하신(홀로 하나이신)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킨다(출3:14~15, 신6:4). 그러므로 창11:7에 나오는 "우리"는 결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창11:7의 "우리"는 누구인가? 그것은 한 분 하나님과 그의 옆에서 시중들고 있는 비교적 높은 계급의 천사들이라고 추정해낼 수가 있다. 그렇게 해석할만한 증거는 다양하다. 우선 사6:8~9에 나오는 "우리"가 한 분이신 여호와와 그 옆에 있는 스랍천사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맥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사6:1~9). 그리고 왕상22장에 나오는 천상회의의 장면 속에서도 그것은 증명된다. 누가 아합을 꾀어 길르앗라못에서 죽게 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하는데, 그때 여호와께서는 보좌 위에 앉아 계시고 그 주변에 있는 하늘의 만군(군대=천사들)이 그분과 함께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왕상22:19~22). 그때 거짓말장이자 거짓말의 아비(요8:44)인 사탄마귀라고 추정되는 한 영이 나와서 자기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조정하여 아합왕을 꾀이겠다고 말하였다.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욥기서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과 천상의 회의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사탄마귀가 욥을 고소하기 시작한다. 그때만 해도 사탄마귀가 아직 하늘에서 쫓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고 온 사탄마귀가 천상의 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고로 우리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신약시대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여호와이신 한 분 하나님과 그의 옆에 시중들고 있는 꽤 높은 계급의 천사들과의 회의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구약의 외경의 하나인 "야살의 책"을 보면, 창11:7에 나오는 "우리"는 언어를 혼잡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천상의 존재들인 천사들과 말씀을 나누는 것인데, 그때에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앞에 서있는 70명의 천사들이었다고 증거하고 있다(야살의 책 9:32).

  이상의 사실을 요약하면, 창1:26에 나오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 옆에 있는 천사들 중의 몇 명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창3:22의 "선과 악을 알고 있는 우리들 중의 하나"는 아마도 사탄마귀(루시엘)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선과 악의 실체를 알고 있어서 하와를  속여서 선악과를 먹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창세기 1장만을 가지고서는 천사들이 왜 인간창조 때에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창2:1을 히브리어원문으로 보면, 해답이 나오기 시작한다. 창2:1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지구) 그리고 하늘들의 군대(천사들을 지칭함)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욥38:7을 보면, 하나님께서 땅(지구)의 기초를 놓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이 기뻐 노래하였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천사들은 첫째날에 창조된 듯 보이며, 적어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에는 이미 천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두목급에 해당하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옆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창18~19장에 나오는 여호와와 그리고 두 명의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러 온 사건도 여호와 하나님과 그 옆에 있던 천사들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창1:26에 나오는 "우리"가 여호와 한 분 하나님과 그분 옆에 있는 두목급의 천사들이라는 것을 추정하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증거들이 있다. 그것은 창조사건에 대한 묘사에 들어 있으며, 신학자의 논문에도 들어 있다. 

 

3. 천지창조와 인간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인가 아니면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것인가?

  창세기 1장만을 읽고 있노라면 천지만물은 하나님(엘로힘) 곧 복수 형태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엘로힘이 그 형태는 복수형이지만 그것은 한 분 하나님(단수)이라는 것을 창세기 1장에서도 나온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누군지를 설명해주는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도 나온다. 먼저, 창세기 1장의 말씀들을 살펴보자. 창1:1에서는 태초에 엘로힘이 하늘들과 땅(지구)를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창조하다"는 동사("빠라")는 주어를 3인칭 단수로 받고 있다. 만약 엘로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면 분명히 동사도 복수형태로 받아야 하는데, 동사는 단수형태로 받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창1:26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려고 하실 때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만들자"라고 하셨지만 실제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 홀로 창조하셨다고 곧장 1:27에 나온다. 즉 창1:27을 보면, 창1:26의 논의에 따라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는데, 창조했다는 동사의 주어가 3인칭 단수이다. 이는 인간창조에 천사가 개입한 것이 아니라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창조기사를 다루는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천지만물의 창조는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께서 혼자 창조하시고 만드셨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의 구절들을 살펴보자.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엘로힘) 여호와께서 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그분의 지혜와 말씀으로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출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우리'가 아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사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들]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2:5 하늘[들]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4. 신약시대에 예수께서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실 때에 사용하신 "우리"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께서도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때가 있었다. 그때는 그분이 공생애를 3년반을 마치시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밤이었다. 마가다락방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시고는 혼자 기도하시는 장면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7장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우리"라는 용어를 3번씩이나 사용하셨다. 

요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17:21-22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여기서 우리는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기도하고 있는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 삼위일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위일체인 셈이다. 그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맞다. 이것은 정확하게 삼위일체(적어도 이위일체)의 증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때는 하나님으로서 아니라 인간으로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때는 아들과 아버지는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 "우리"라고 사용한 대명사는 성부와 성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여기서는 그렇다고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아들이 밖으로 나와서 활동하고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밖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시간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공유할 수 있으시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가지는 속성으로서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만세전에 아들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고자하는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요16:17~18). 그 전에 그분은 아버지의 품 속에 계셨다(요1:18). 아버지의 품 속에 이미 아들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들어오심으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셔서 이 땅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하늘에는 아버지가 계셨고, 이 땅에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구약시대 창조 때부터 이미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으니, 이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의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받는 모습이다. 거기를 보면, 세례받는 아들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은 비둘기같이 내려오고 있으며,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4:17)" 고로, 요17장에 나오는 "우리"라는 표현은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닌 것이다. 그때는 동시존재하신 아들이 동시존재하는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존재방식으로 계시는가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는가?

  그렇다면, 2021년 3월 지금 현재 천국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천국에서 하나님은 활동적으로 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좌에는 앉아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도 그 옆에 있으며, 보좌 앞에는 하나님의 일곱 영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삼위로서 활동하시는 것을 묘사하는 것일 뿐, 존재 자체를 셋이라고 보아서는 아니 되는 말씀들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을 실체라고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일곱 눈들과 일곱 뿔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실체라고 하면 예수님은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성령은 영이 7개나 되기 때문에 다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한 분 하나님의 활동이시며, 어린양은 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의 간증으로서 상징적인 묘사이며, 그것은 아직도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것도 상징적인 표현이다)에서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으로서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일을 하고 계시며,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우주 만물 특히 사악한 영들은 사탄의 왕국까지 통치하고 계시며, 또한 장차 재림하시어 사탄마귀의 세력을 쳐부수어 그들을 무저갱에 보내고, 성도들을 구원하여 상을 주셔야 하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나[예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21장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라(원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렇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좌에 앉아계신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증거한다(계3:21, 7:17). 그러므로 천국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존재 자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곤란하다고 할 것이다. 천국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6. 전통신학교 교수는 "우리"라는 용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정통신학교 교수는 창1:26의 "우리" 즉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1인칭 복수형태의 낱말인 "우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교수들은 그것을 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대한 묘사로 보고 있다. 그럼 그들은 왜 그렇게 보는 것일까? 그것은 대부분의 초기교부들도 그렇게 해석하였고, 종교개혁자들도 그렇게 해석하였으며, 여러 신앙고백서들(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등등)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성경만을 경전으로 믿고 있는 유대 랍비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그것은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들은 100% 다 구약성경의 다른 용례를 따라서 한 분이신 여호와와 그 옆에 있는 천사들이라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정통신학교 교수들 중에는 그렇게 해석하는 분이 없을까? 다는 조사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총신대 전 구약학교수이신 김정우박사님은 그것을 하나님과 천사들간의 천상회의로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분의 논문이 본교회 홈페이지 신학자료실에 있음).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함을 받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잘못 해석한 것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논문으로 증명했다는 데에 그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며, 하나의 해석이 정확한 해석이 되려면 성경의 다른 본문과도 위배되어서는 아니 될 터인데, 창1:26의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보면, 다른 많은 성경구절을 성경에서 지워야 하는 애로점이 발생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의 끝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이 예언의 말씀을 누군가 빼버린다면 그는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거하실 것"이라고 하셨다(계22:19). 이것은 천국에 못 들어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성경대로 믿을 것이냐 과거 유명한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그렇게 해석했으니 그대로 따라갈 것이냐를 말이다. 

 

7. 나오며

  창1:26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 없는 말씀 중의 하나다. 그동안 있어왔던 교리나 신앙고백을 따르자니 성경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고, 그렇다고 성경대로 따르자니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틀린 것은 틀린 것이라고 말해야 하고, 이제는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한 두 사람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만해도 5만명의 목회자가 있다는데, 초대교부 때부터 굳어져 있는 교리라 할지라도 잘못 해석한 것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은 삼위일체 교리가 잘못 되었다고 하면 이단 삼단 소리를 듣는다 해서, 그냥 입을 닫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아니한가? 주님 오실 때가 머지 않았다. 이제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바로 잡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런데 지금 활동하실 때에는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활동하신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동시에 존재가 가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보지 못하면 어떤 일이 계속 발생하는가? 아버지 하나님이 있고 아들 하나님이 있으니, 어머니 하나님(장길자)도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이단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머니(마리아)가 있다고 하는, 이상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곳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한 분으로 보지 못한 채 늘 삼위로 나뉘어져 있는 것만으로 보려고 하는 자들의 함정인 것이다. 이제는 한 분 하나님이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그분을 믿고 의지하자.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니까 말이다. 할렐루야!

 

2021년 03월 14일(주일)

정병진목사

 

 

천국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계시는 걸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상의하고 계실까? 그리고 천국에서도 예수님은 어린양의 모습으로 계시는걸까?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공부해보지 못하신 분들은 그렇게 오해하실 것이다. 그런데 천국에서의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예수님과 너무나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더이상 인성을 갖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고 계시며 어떤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가?

2019-12-1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계1:9~20)
https://youtu.be/MCusTYsdUQ8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어린양이신가?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천상의 예수님을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로만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천국에서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과 보좌 앞에있는 일곱등불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있으며, 천국에서까지 하나님은 각각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그러한가? 천국에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위격을 갖고 있으며, 서로 의논하시며 같이 활동하시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천국에 있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천국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분으로 칭함받으며,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승천하사 천국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천국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어떻게 존재하고 계시는가?

   천국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천국에서 "성부"는 보좌에 앉아계시고, "성자"는 어린양으로 계시며, "성령"은 보좌 앞에 일곱등불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신 분으로서 지금 천국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려주는 상징적인 묘사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일곱 뿔들과 일곱 눈들을 지니고 계시다고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계5:6). 그러므로 만얄 이러한 묘사가 실제라고 한다면, 어린양은 괴물처럼 보일 것이다. 어린양은 사실 2개의 뿔과 2개의 눈을 지니지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어린양은 일곱 개의 뿔과 일곱 개의 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상징적인 묘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한편,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거의 모든 숫자는 다 상징적인 숫자라고 알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제일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여기서 "일곱"은 이 세상(땅)에서 필요한 완전수를 가리키므로, 어린 양이 일곱 뿔을 가지셨다는 뜻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대한 완전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더불어 그분의 눈이 일곱 개라는 것은 그분이 보낸 일곱 영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완전히 감찰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좌 앞에 켠 일곱등불"이란 이 세상의 교회들 속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가리킨다(계1:4). 그리고 이 세상에 계시는 성령님이라 할지라도 그 성령님은 어린양의 불꽃같은 눈들과 동일시된다(계5:6).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눈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고로, 천국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인격을 가진 채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천국에 계시는 한 분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성자이신 어린양으로서 일하시고 계시며, 성령으로서는 보좌앞에 켠 일곱등불로 활동하고 계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고 바른 표현이라고 하겠다.

 

3. 천국에서 성령님은 따로 인격을 갖고 활동하고 계시는가?

  천국에서 성령님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금촛대의 일곱 등불로서(계4:5), 그리고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존재하고 있다(계1:4, 4:5).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금촛대는 이 세상에 있는 교회들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에는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로 표현되고 있었다(계1:20,11). 그러니까 당시 일곱금촛대는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들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금촛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저 천국에서도 이 세상에서 내려와 활동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불꽃같은 눈으로 다 지켜보고 계시고 감찰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계2:18,23). 고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또 다른 자기 자신인 셈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성령님은 이 세상의 경우처럼 과연 단독적으로 어떤 위격을 가지고 활동하시고 있는가? 천국에서 성령님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영으로서 묘사되고 있는 분으로서, 이 세상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자 "예수님의 영"이시다. 오순절 이후 이 세상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교회에게 생명을 주시고 회개케 하시는 사역을 감당하시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령님의 활동을 어린양의 일곱눈의 활동이라고 말하고 있다(계5:6). 한편 구약시대에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여호와의 일곱눈의 활동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슥4:10).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아직 아들이 밖으로 나타나서 활동하던 시기가 아니므로, 구약시대의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의 일곱 눈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이후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제3위의 위격으로 일하고 계신다.

 

4. 사도요한은 그의 편지의 서두에서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사도요한은 요한계시록의 편지의 서두에서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 방면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1:5~6에 나타나 있는데, 1:5a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소개요, 1:5b~6에서는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대한 소개의 말씀이다. 그리고 계1:5~6에 나오는 모습들은 전부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신 분으로서 그분이 누구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소개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13~15에 나오는 촛대사이를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거니시는 이는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로서, 이미 하나님의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의 예수님에게는 인성은 찾아볼 수 없으며, 신성한 영역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만 계시될 뿐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편지의 서두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소개되고 있는가? 그것은 3가지다(계1:5a). 첫째는 "충성된 증인"이시다. 신실한 증인이신 것이다. 충성한 순교자이신 것이다. 둘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이시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서 부활체를 입은 첫 번째 열매라는 뜻이다. 즉 부활의 첫열매라는 것이다(고전15;20). 그런데 참고로 식물의 첫열매는 "아파르케"라고 부르지만, 동물이나 사람의 첫것으로서 "맏배"이자 "장자"는 "프로토토코스"라고 부른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서 부활의 첫 열매이셨기에 "프로토토코스"라고 불리셨다. 셋째로 그분은 "땅의 임금들(왕들)의 머리이시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땅에 있는 모든 왕들의 머리이셨고, 죽으셨어도 지금 하늘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에 있는 땅을 기업을 받은 성도들 곧 왕들의 머리가 되신다. 그런데 어린양의 이 세 가지 속성은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33년반의 생애를 사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과연 무슨 일을 하신 것인가? 그것은 계1:5b~6에 나와 있으니, 그것도 3가지다.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는 첫째로, 우리 죄인인 인간들을 사랑하셨다. 둘째로,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셨다. 셋째로,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이자 하나님에게 우리를 나라(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께 인성을 지닌채 이 세상에 하셨던 3가지 사역을 가리킨다.

 

5. 사도요한이 천국에 올라가서 보았던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어 천국에 있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계셨는가? 우리는 이때 사도요한이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분은 이미 인류에 대한 구속사역을 마치시고 천상에 오르시어 거기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분이라고 불리며 또한 어떤 일을 하고 계신느가? 사도요한은 천상에 계신 예수그리스돌르 10가지 묘사한다.

  첫째,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시고 일급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신다(계1:13, 2:1). 이것은 예수께서 천국에서 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오직 제사장만이 성막 혹은 성전의 성소(외소)에 들어가서 일곱금촛대에 불을 밝히거나 등잔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고로 발을 끌리는 옷은 세마포옷으로 예수께서 천국에서 제사장으로서 일을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그분은 인자같은(닮은) 이이시다(계1:13). 천상에서 예수께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시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 같아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고 부활체를 입으시고 천국에 들어가신 첫번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인류의 구속사역을 다 완서하신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더이상 사람을 존재하고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이제 신성만을 지닌 분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분은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다(계1:13). 금띠는 왕의 왕복에 차는 것을 가리키므로, 예수께서 천국에서 왕노릇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천국에서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시다. 그것이 금띠를 통해 밖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넷째, 그분은 그의 머리와 머리털의 희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았다(계1:14). 이는 그분이 아주 오래되셨다는 것을 뜻한다. 시간 저멀리에서부터 계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묘사는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환상 중에 보았던 분으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와 똑같은 모습이시다(계7:9).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지금도 계시고 아직도 계시며 장차 오신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다섯째, 그의 눈은 불꽃같았다(계1:14). 왜냐하면 그의 불꽃같이 꿰뚫어보시는 눈으로 온 세상을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눈이 불꽃같았다는 말은 그분이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전능자라는 뜻임과 동시에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으로서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다 지켜보시고 섭리하기고 운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섯째, 그분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된 빛난 주석 같았다(계1:15). 이것은 예수께서 천국에서는 심판주로서 계심을 말해준다. 초림의 예수께서는 심판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자로 오셨다. 하지만 천상에 오르시어 다시오실 예수께서는 심판하시는 재림주로 오실 것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심판의 일은 이제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졌다. 고로 다시 오실 주 예수님은 심판주로서 오실 것이다.

  일곱째, 그분의 음성을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계1:16). 예수님의 음성은 어떤 음성일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쩌렁쩌렁 울리는 많은 물소리와 같다. 그런데 이러한 "많은 물소리"와 같은 예수님의 음성은 구약시대로 치자면 여호와의 음성이다. 구약시대에 에스겔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와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에 하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고 고백하였다(겔43:2). 고로 예수님의 음성이 곧 주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덟째, 그분의 오른 손에 일곱별들을 쥐고 계셨다(계1:16). 천상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분의 오른 손에 일곱별들을 쥐고 계시는 모습이다. 사도요한은 그분이 쥐고 계신 일곱별들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는데, 그것은 일곱교회의 사자라고 했다(계1:20). 여기서 일곱교회의 사자라고 함은 일곱교회에 말씀을 전달하는 말씀전달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교회의 말씀사역자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천상에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니신다는 말은 그분의 관심이 일곱교회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분의 오른 손에 일곱별들을 쥐고 계시다는 말은 그분은 교회 가운데서도 주의 종들을 붙잡고 계시다는 뜻이다. 하나의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사실은 그 교회의 말씀전달자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요소는 말씀을 전달하는 주의 종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홉째, 그분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이 선 검이 나오고 있었다(계1:17). 이것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칼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 칼은 좌우를 벨 수 있는 양날가진 칼을 가리킨다. 이 칼은 "성령의 검"으로서, 악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케하는 가장 중요한 무기다. 그리고 훗날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재림하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싸우는 것이지, 진짜 물리적인 칼을 휘두르는 것은 아니다.

  열째, 그분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다(계1;17). 마지막으로그분의 얼굴에서는 해가 비치는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분은 참 빛이요 빛을 가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빛은 모든 생명을 살아있게 만들고 모든 어둠을 몰아낸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서는 어떤 어둠의 존재도 똑바로 설 수 없다. 쫓겨나는 것이다.

 

6. 천국에 계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셨는가?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문자적인 어린양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일곱인을 떼시는 분으로서 온 우주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에 계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그분은 재림시까지 아들의 신분을 갖고 계시는 하겠지만, 천국에서 그분의 위상은 주 하나님이시다(계1:8, 21:5~6, 22:13). 사도요한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누구신 것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천상에 계시는 예수께서는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셨는지 아는가? 그 부분(계1:17~18)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계속해서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7. 나오며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는가? 요한계시록은 그분은 지금 천상에 계신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이 세상에도 계신다. 그것은 그분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보혜사 성령님은 그분의 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지금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도 계신다. 그런데 우리가 천상에 계신 그분을 부를 때에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만 불러서는 아니 된다. 그분은 한 때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 그러한 일을 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은 사탄마귀를 멸하시고 재림하실 때까지는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주 하나님으로서 속성을 가지고 일하고 계신다. 그러니까 천국에서 주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요 왕이요 중보자이시지만 동시에 주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3:21, 7:17, 21:5~6, 22:1,3). 주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은 "장차 오실 이"가 되신다(계1:8). 그분은 인자되심으로 인하여 심판하는 권한을 갖고 계신다(요5:27). 그러므로 장차 재림하실 분도 주 예수님이시요 심판하실 분도 주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이 비록 사람이신 적이 있으셨지만 지금 그분은 주 하나님이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시며, 전능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우리 눈으로 보는 분은 오직 주 예수님이시다. 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가 그 몸을 가지고 하늘로 가셨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셨다가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천상에 오르신 바로 그분,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드린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고 기대한다. 그날 그분 앞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날마다 회개하며 맡겨진 충성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19년 12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