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6(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9) 생명의 떡의 설교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선언(요6:35~7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gfWuP2TXsU  [혹은 https://tv.naver.com/v/30826799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된 '표적의 책'이며, 13장부터 21장까지는 예수님의 강화를 중심으로 기록된 '영광의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이 양쪽에 다 걸쳐 있다. "나는~이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은 1~12장에서 다섯 번 나오고(요6:35, 8:12, 10:7, 10:11, 11:25), 13~21장에서 두 번 더 나온다(요14:6, 15:1).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복음에서는 하나의 단락에서 예수님의 표적도 나오고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나오는 것이 딱 한 번 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이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은 네 번째 표적으로서 '오병이어의 표적'이 나옴과 동시에,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으로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도 같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표적의 역할은 어떤 것이며, 자기 선언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왜 당신 자신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주시려는 '영생'과 그리고 예수님의 성만찬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나의 것으로 취할 수가 있는가? 

 

2. 오병이어의 기적과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요6:1~13)은 예수께서 행하신 7가지의 표적들 가운데 4번째 표적에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그간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 그리고 아울러, 왕의 신하의 아들을 소생시키셨고, 베데스다의 38년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리고 이번에 네 번째 표적으로서 어린 소년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가지고서 성인 남자만 5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음식 기적을 베푸셨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라는 비유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은 어떤 관련이 있으며 또한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먼저, 둘의 관련성을 살펴보자. 먼저 이 둘은 예수께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시는 생명과 관련이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의 육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베푸신 기적에 해당하며,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은 예수께서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오셨음을 말해 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고로 둘 다 육체이든 영혼이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생명과 관계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먼저,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 사람들에게 육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공급자인 것을 말씀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은 예수께서 생명의 공급자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께서 생명 그 자체로서 자신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 행하신 일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면,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은 예수께서 '사람으로서' 인간을 위해 무엇을 행하러 오셨는가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것을 더 큰 눈으로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의 하나로서, 예수께서 왜 표적을 행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 주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은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일으키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야말로 영생하는 양식을 주시러 오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는 자기 선언은 예수님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생명 그 자체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3. 예수께서 당신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선언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갈릴리 벳새다에서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 가득 남기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실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그들은 예수님만 있으면 자기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들어 임금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피하여 산으로 가셨고 밤에 바다 위를 걸어서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까지 쫓아왔다. 그럼, 그들이 거기까지 따라온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이미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려 주셔야 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내가 생명을 주러 오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내가 곧 생명 그 자체이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에게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런데 곧바로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께서 생명이라는 것을 알기 쉽도록 비유적으로 말씀하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육체의 생명에 필요한 양식의 공급자로서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셔야 할 것을 대신 그렇게 비유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생명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떡을 계속해서 생산해 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먹이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서 내어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믿어서 영생을 얻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있으면서 그분을 믿지 않았다. 

 

4. 사람들이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께서는 당신이 생명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모를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는 것이냐면서 의아해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장차 당신자신을 내어 주실 것을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줄 양식은 곧 자신의 살과 피라고 하셨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내어 주시려고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후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해방하여 우리에게 주시려고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결코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6:53).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셔야 주님께서도 그를 마지막 날에 부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요6:54). 왜냐하면 예수님의 살만이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만이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로 인하여 생명을 받았듯이, 사람들도 인자로 인하여 생명을 받으면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식물 생명에 빗대어서 말씀하시다가 이어서 동물 생명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들은 생명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거기에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은 어렵도다고 하였다. 그래서 누가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고 서로에게 이야기하였다. 

 

5. 예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어떻게 할 때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생명이니만큼 당신을 떡처럼 먹어서 생명으로 취하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한 번 더 그것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서,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여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최종적으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발언하고 있는 말씀들이 영이요 생명입니다(요6:63)"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요, '영은 예수님께서 발언하고 있는 말씀'이니, '생명을 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고로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에게 스스로 나아온 후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6:35).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육신의 양식을 생산하여 주시는 분으로서, 기적을 행하시는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사람들이 떠나자 예수께서는 12제자들에게 어떻게 물으셨는가?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자 또한 영생을 위한 살과 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더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떠나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더 이상 그들에게 육신의 떡을 생산하여 주시지 않고 영혼에 필요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 말씀하시자 그들이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직접 선택하여 세우신 12제자들에게도 질문을 던지셨다. "여러분도 가는 것을 원하십니까?"(요6:67) 그때였다. 12명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나서서 말했다. "주여, 당신이 영생의 입말씀들(레마들)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떠나가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당신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믿은 채 있으며 아미 알아온 채 있습니다"라고 했다(요6:68~69). 그렇다. 무리들이 아닌 12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미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라는 것이 인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한 번 더 말씀하시면서, 12명 중에서도 떠나갈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12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가지 않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들 중에 한 명은 예수님을 넘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여러분 열둘을 세운 것은 맞지만, 여러분들 중에 한 명은 마귀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는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설을 달아 놓았다. 그렇다. 그렇게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 앞에 몰려들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신 것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어렵다고 하면서 떠나갔다. 하지만 12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만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7.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오늘날 많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6장 37절과 39절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실 것인데 그러면 아들은 그들을 잘 보존했다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마지막 날에 부활시키는 말씀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러한 말씀이 아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이 말씀을 개역 성경으로 살펴보자.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처럼 개역 성경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자(사람)가 있는데, 사람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이러한 자만이 예수님에게로 나아갈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결코 내쫓지도 아니할 것이고, 그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마지막 날에 다 부활시킬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 번역한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자가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채 이 본문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라. 결코 그렇게 쓰여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얻을 자를 만세 전에 정해 놓았다고 말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얻을 자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내신다는 말씀도 역시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이 본문을 번역하면서, 요한복음 6:37,39의 말씀은 만세 전 개인예정의 말씀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니다. 그렇다면 실제 헬라어 원문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요6:37[직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것(중성, 단수)은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계속] 오고 있는 자(남성, 단수)는 내가 결코 바깥쪽으로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요6:39[직역]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이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중성, 단수)을 내가 그것에서부터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지막 날에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요6:37이나 6:39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시려고 예정해 놓은 개인이 따로 있다는 말씀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중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지키고 또한 부활시키기 위해 예수님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마도 그러한 것에는 "지혜, 명철, 능력, 권세" 등이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지금도 아들에게 사람들을 보내시고 있다. 다만 자기 스스로가 아들에게 가지 않으려 하고 아들을 보고도 믿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께서는 이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것을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부활시켜 영생의 나라로 데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8. 나오며

  표적으로서 4번째 표적인 '오병이어의 기적'과 또한 예수님의 첫 번째 자기 선언으로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의 6장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당신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기 때문이요, '나는 생명의 떡이다'는 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생명 그 자체인 것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생명 수여자임과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이시다. 우리는 그것을 표적과 자기 선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생명을 취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 그분 앞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그분이야말로 생명 수여자임과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이신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생명이며, 예수님의 말씀이 또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6:63). 이러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더러, 예수께서 행하신 그 일들을 결코 잊어버리지 말라고 아예 성찬식으로 제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행하신 일은 귀중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통해 이 생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그날까지 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상황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생명을 잘 간직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죽는 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영원한 생명이 곧 영원토록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16일(수)

정병진목사

 

오늘은 성찬주일을 맞이하여 왜 이단들이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지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는 성찬식이 갖고 있는 새 언약으로서의 놀라운 능력과 그것의 효능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았다.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에 불과하지만 거기에만 그치지 않는 놀라운 능력이 들어 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왜 그러한 증상이 발생하는가? 여기 그 해답이 있다.

2021-11-21(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왜 우리는 오늘도 계속해서 성찬식을 행하는가?(눅22:19~2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hRAF9akRE1s [혹은 https://tv.naver.com/v/23695702 ]

 

1. 들어가며

  한국에서 자생한 토종 이단인 '신천지[증거장막성전]'와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증인회]'에서는 성찬식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특히 신천지는 성찬식이라는 자체가 아예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에서도 역시 성찬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성찬식을 하지 않는 대신 유월절을 지킨다. 유월절 식사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이단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상은 바로 자기들이야말로 '새 언약'을 지키는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새 언약'이라는 단어가 바로 예수님께서 성만찬 때에 약속하신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 언약'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며, 이것은 예수님의 성만찬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의 성찬 주일을 맞이하여, 성찬식이 곧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아보고, 새 언약은 어떻게 세워졌으며, 그 도구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새 언약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새 언약'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새 언약'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 가운데 처음 등장하는 단어다. 장차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체결하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새 언약'을 체결하셨다(눅22:20, 고전11:25). 

  그렇다면, 첫째, '언약'이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언약'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사실 많이 나오는 단어다(164회).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베리트'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협정, 조약, 체결, 약속'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운 협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노아와 세운 언약(무지개 언약)이 있고,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횃불 언약, 할례 언약)도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과 세운 언약(유월절 언약, 시내산 언약)도 있다. 

  둘째, '새 언약'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옛 언약을 갱신하고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옛 언약이 약하고 부족하고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과 다시 언약을 체결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과 세우는 언약을 가리켜 '새 언약'이라고 명명하신 것인가? 그것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제자들과 체결하시겠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이라는 단어에 사용된 '새(로운)'는 단어가, '이전에 없었으나 지금 새롭게 생겨난'이라는 뜻의 새로운('네오스')라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보다는 더 훌륭한' 혹은 '이전에 이미 예표되어 있었으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이라는 뜻의 새로운('카이노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신약성경에서 '카이노스'의 '새로운'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새 교훈, 새 포도주, 새 계명, 새 방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사도 바울도 이 단어를 사용했으니, '새 사람, 새 피조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와 고린도전서에 보면, '새 언약'이라는 단어가 있으며, 요한계시록에 보면 거기에는 '새 이름, 새 노,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새 언약을 체결하셨다고 하는 말은 이전에 없던 전대미문의 언약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이미 사용된 언약을 계승 발전시키고 갱신시켜,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언약을 체결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3. 옛 언약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이전에 하나님께서 체결하셨던 '옛 언약'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노아나 아브라함과 더불어 세운 언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세운 언약을 가리킨다. 이러한 언약에는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 언약'이 있고(렘31:31~32), 출애굽기 19~24장에 나오는 '시내산 언약'이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러한 언약을 체결하신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유월절 언약을 체결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어 구출하시고, 그들을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시 애굽 땅 전역에 장자 죽음의 재앙을 내릴 것인데, 이 재앙을 피하고 결국 애굽의 속박에서 탈출하려면 유월절 예식을 지키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1월 14일 해질 때에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인방과 설주에 뿌렸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알게 하려고 도덕적 계명들 그들에게 주시기 위함이었고, 그래서 죄를 범한 것을 깨우침을 받은 자로 하여금 속죄 제사법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의 핵심은 유월절 양의 죽음과 속죄양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 언약 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4. 왜 예수께서는 옛 언약을 끝내고 새 언약을 체결하시려고 하신 것인가?

  그렇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유월절은 거의 준수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 조상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구출되었는지를 그들은 곧 잊어버리게 되었다. 몇 명의 왕들(히스기야왕 요시야왕)과 포로 귀환 시대의 에스라 때에 유월절이 지켜지기도 했지만, 그때에 지켜지는 유월절은 피까지 바르는 유월절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장자 죽음의 재앙을 면제받기 위해 치러한 어린양의 값진 희생을 그들은 기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유월절을 제외하고 유월절은 오직 절기의 식사를 하는 것으로만 지켜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가는 제물의 값진 희생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장치를 고안하셨다. 그것이 바로 성막법에 나오는 속죄 제사다. 그러나 이것도 제사의 특성상 자신이 자기의 죄를 깨달아 드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은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많았고, 백성의 지도자들도 처음에는 죄없는 짐승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고 아파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그러한 마음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화되어 거의 형식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더 이상 옛 언약 하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구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이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더불어 새 언약을 체결하게 되신 것이다. 예수께서 구약 언약을 갱신하여 새롭게 새 언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체결했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요8:24~25, 28, 5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구약의 유월절 언약이나 시내산 언약보다 더 강력한 언약을 세우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제 참된 유월절 양으로 죽으시고(고전5:7), 참된 속죄 제물로 죽으셔서(요1:29), 유월절과 속죄 제사의 뜻을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언약보다 더 강력한 혜택을 믿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시기 위함이었다. 

 

5. 예수님의 몸과 예수님의 피는 왜 구약시대 언약의 제물과 피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구약의 언약을 그대로 놔두어 그것을 수정하여 사용하지 않으시고 새 언약을 체결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새 언약'이라는 말 속에 이미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체결하실 때에 사용하신 제물 및 그 피가 이전에 구약시대에 사용했던 제물 및 그 피와 비교할 수 없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첫째, 제물이 달라졌다. 구약시대에는 흠없는 양과 소 같은 짐승이 유월절 양과 속죄 제물로서 사용하였다. 그런데 새 언약에 사용되는 제물은 그러한 짐승이 아니었다. 죄 없는 예수님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제물이 된 것이다. 그것도 사람의 몸만이 제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그 몸이 제물로 사용되신 것이다. 우리는 사실 요한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요1:14). 그러므로 한 번의 죄에 한 번 사용되는 제물과 예수님의 몸은 그 효력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구약시대에 짐승의 제물은 하나의 죄에 한 번 바쳐진다면 그 제물은 두 번 사용할 수 없었다. 제물은 살아 있는 것으로만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제물의 피가 달라졌다. 구약시대 사용된 피는 다 짐승의 피였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계속해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 피를 다 쏟고 나면 짐승은 죽는다. 또한 한 번 흘려진 피는 그때 그 제사에 한 번 사용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짐승의 피를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달랐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었기에 그 피 또한 이 세상의 물질세계에 제한받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죽었지만 자신 안에 생명이 있어서 부활하실 수 있었듯이, 예수님의 피 또한 한 번 사용하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몸과 피는 이 물질세계에 제한받지 않으시고 항상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몸은 지난 2천 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제물로 한 번 드려졌지만 두 번 다시 드려질 필요가 없다. 그분은 항상 살아 있어서, 그분의 제물되심은 계속 유효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피 흘림은 한 번 흘리신 것이지만 계속해서 살아 있는 피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분을 의지하여 나아가기만 하면 그분의 피가 계속해서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의 제한이 철폐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언약의 백성들 곧 오직 할례받은 히브리 유대 민족만이 유월절을 지키고 속죄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제한을 철폐하셨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예수께로 나오면 받아 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양 뿐만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멀리 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워졌다고 언급하였다(엡2:17~18).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제물과 제물의 피의 효능이 탁월하게 향상된 것이다. 사실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도 할례받은 민족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고, 제물도 반복해서 쓸 수 없었으며, 피 또한 새로운 짐승의 피가 계속해서 흘려져야 했지만, 예수님의 몸과 예수님의 피는 한 번 드린 것이었으나 영원히 유효한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분이 이 물질세계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피 흘림은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이 된다. 또한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드리려면 꼭 성전에 나가서 제물을 드려야 했으나, 예수님 때부터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아도 어디서든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시대가 되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유월절 양과 속죄 제물로 죽으신 이후부터 모든 믿는 이들은 옛 언약보다 더 강력한 새 언약 하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6. 왜 오늘날 예수믿는 사람들은 성찬식을 행하는가?

  왜 오늘날 예수믿는 사람은 성찬식을 행하는가? 그것은 새 언약을 우리가 잊지 않기 위해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몸과 하나님의 피로 세워 놓으신 새 언약을 우리와 맺으음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분이 참 유월절 양과 참 속죄양이 되시어 죽으셨기에 우리는 죽음의 재앙을 면할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악한 사탄 마귀에게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즉시 회개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를 속죄하여 더 이상 죄의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되게 해 주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값진 희생을 높이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도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 언약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당신이 오시는 그날까지 행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도 있다(눅22:19). 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이미 예수께서 2천 년 전에 이루어 놓으신, 엄청나고 위대한 희생 언약을 계속해서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것을 기념하며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다(고전11:26). 

 

7. 왜 이단들은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가?

  이제는 왜 이단들이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말할 때가 되었다. 이단들은 겉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실은 이단의 교주가 재림 예수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고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진짜로 성찬식을 행하게 되어버리면, 그 예식을 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일이 발생하게 될 것이고, 그분의 피로서 자신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단에서는 결단코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성찬식은 모름지기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과 그분의 피를 통해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단들은 성찬식을 통해서는 자기들의 뜻을 이룰 수가 없기에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짜로 성찬식을 행하게 된다고 하면, 그들은 자신에게 더 엄청난 큰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다. 이제 고린도전서 11:27~30을 읽어 보라. 만약 누군가 성만찬을 합당하지 않게 행하게 되면 성만찬을 행한 사람들이 약하게 되고 병들게 되고 죽는 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므로 어찌 이단들이 자기의 죽음을 각오하고서 성찬식을 행하려고 하겠는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신천지는 결단코 성찬식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유월절을 지키자고만 할 뿐, 성찬식을 행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8. 나오며

  루터교를 제외한 모든 개신교에서는 사실 성찬식을 많이 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행하는 것이 이 성찬식이다. 성찬식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들어 있고 영원한 속죄를 가져다 주는 혜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을 기억하게 하고 그것을 효과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오늘도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사람되시어 죽으신 하나님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때에 예수께서도 성령을 통하여 당신이 2천 년 전에 골고다에서 행하신 일이 우리의 속죄와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더욱 깨닫게 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에서 이 땅에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언하는 것이 셋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성령'과 '물'과 '피'라고 하였다(요일5:5~8). 이것들 중에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오신 영이기 때문에 그분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믿도록 도와주신다. 그리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시다가 죽기 전에 다 쏟아 놓으신 '물'과 '피'도 역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피 흘려 죽으셨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요19:34). 왜냐하면 그분의 육신이야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에 하늘로 가지고 가지만, 그분이 이 땅 위에 남겨두신 피와 물은 여전히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들은 엄청나게 축복받은 세대다. 민족의 제한이 철폐되고 어디서든지 회개하만 하면 속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우리는 나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더욱 돌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게 되도록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꼭 회개하여서 속죄함을 받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분이 들어오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시는 천국에 꼭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분에게 영광돌리는 가장 귀하고 가장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2021년 11월 21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왜 조상숭배(제사나 추도예배)를 해서는 안 되는지를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고전11:23~26)_2019-11-19(화)

https://youtu.be/FSfMGwG4TRU

 

1. 기독교와 유대교와 유교의 제의(祭儀: 종교적인 의식이나 제사)는 무엇인가요?

  모든 종교에서 제의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의란 종교적인 의식이나 제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유교에서는 "조상제사"라는 제의가 있고, 유대교에서는 동물을 잡아서 대신 바치는 성전제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는 어떤 제의가 있을까요? 그것은 유대교의 성전제사를 계승발전시킨 "성만찬"과 "세례"입니다. 그중에서도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기독교 제의 가운데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2. 1970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한 데에는 어떤 요인이 있었나요?

  1885년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가장 많이 양적으로 부흥하던 시기는 1970년에서 1980년경입니다. 1990년부터는 주춤하다가 그 후로는 쇠퇴기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970년와 1980년에 왜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난 것일까요? 거기에는 아주 특별한 요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상제사의 문제를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해결한 데서 기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조상제사는 선교사들에 의해 우상숭배로서 금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를 "불효막심"의 종교로 비춰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불효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불신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졌던 것이죠. 그러다가 1897년 정동감리교회의 이무영 성도가 어머니의 기일(제삿날)에 제사를 추도예배를 바꾸어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를 낳은 조상도 몰라본다는 비난에 맞서 "추도예배"라는 것을 고안하여 제사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자 기독교에 대해 무조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불신자들이 대거 기독교로 전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1970년에서 1980년대의 일입니다.

 

3. 죽은 자를 기념하는데 왜 예수님은 되고 죽은 조상은 아니 되는 것인가요?

  사도들은 죽은 자를 기념하되, 성만찬을 통해 예수의 죽으심을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또한 그것을 후대에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주었던 선교사들도 우리나라 조선시대 500년동안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던 유교의 조상제사를 금지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조상제사는 우상숭배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고전10:20). 그러면 불신자들이 당연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물을 것입니다. 왜 죽은 자를 기념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되고 우리의 죽은 조상은 아니 되냐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죽은 조상들은 우리가 제사를 드려도 이곳에 올 수 없기에 우리가 드리는 제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요, 성만식에는 예수님께서 영으로 오시어 복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4. 왜 죽은 사람을 기념하거나 그에게 기도나 음식을 바치거나 절을 하게 되면 안 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왜 죽은 사람을 기념해서는 아니 되는 건가요?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죽은 자의 사진이나 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앞에다 놓고 거기에 기도를 하거나 음식을 바치거나 절을 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대체 그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사도들은 죽은 조상에게 대해 제사하지 말라고 했던 것인가요? 그것은 조상에게 제사드리는 것이 조상을 섬기는 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귀신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시공간의 지배를 받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이 죽게 되면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일어나는데, 예수님시대 이후 사람들은 죽은 즉시 그 영혼이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으로 가버리고 없습니다. 시신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상의 제삿날에 영정사진을 가져다놓고 거기에 정성껏 제사를 드린다고 할지라 그들은 제사를 받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니까, 귀신들이 죽은 조상으로 모습으로 나타나 제사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하늘에서 쫓겨난 타락한 천사로서 얼마든지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죽은 조상의 모습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100% 싱크로율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다른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엇비슷하기 때문에 진짜 죽은 조상이 온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정말 죽은 자가 저승에서 이승으로 와서 제사를 받을 수 있다면, 왜 후손들은 수도 없이 죽은 조상 전부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들은 결코 이 세상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도 죽은 조상 3~4대 사이에서 들어갔다 나왔다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3~4대 이상의 조상들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없기 때문이요, 그들 속에 있던 귀신이 나와서 지금의 세대사람들 누군가에게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위해 제사를 드리면 귀신들을 불러들이게 된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오거나 옆에 있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저주입니다. 질병에 시달리게 되고, 사건사고가 연일 터지며, 자식들 중에 정신이상자가 나오고, 자살하는 자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귀신이 하늘에서 쫓겨날 때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5. 마리아숭배와 성인숭배는 왜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인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조상숭배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귀신에게 속는 것이기 때문이요, 저주를 불러들이는 의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주를 받되 나만이 아니라 내 후손까지도 저주를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죽은 자를 기념하는 행위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행한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미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라도 결코 이 세상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천국에 들어간 신구약의 성도들이나, 그후에 천국에 들어갔던 마리아나 성인들에게 어떤 의식행위를 하면, 그것도 역시 귀신을 불러들이는 의식이 되고 맙니다. 그들도 결코 올 수 없는데 자꾸 기도하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게 되면 귀신이 또한 거기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귀신은 사람보다 능력이 있는 존재로서 지음받았기에, 사람의 꿈이나 환상 속에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고, 능력도 상당히 갖고 있어서 때로는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기도 하고 기적적으로도 역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냥 깜빡 속아넘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가 현현했다고 말이죠. 그러나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신이 아닙니다. 그녀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녀는 예수의 모친일 뿐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 죽어서 저 세상에 갔으면 그를 기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이자 동시에 하나님이셨기에 지금도 우리가 그분을 기도로 만날 수 있고 그분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기념하는 성만찬 이외에 다른 사람들 즉 죽은 조상이나 마리아나 성인들에게 기도를 바치거나 향을 피우거나 절을 해서는 절대 아니 됩니다. 저주를 받으려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2019년 11월 19일(화)

정병진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예수께서 이제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분을 맞이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특히 목요일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유월절을 하루 앞당겨 지키셨다. 그리고 유월절을 폐하신 후에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유월절과 성만찬은 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길래 주님은 이제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을까? 그리고 이제는 성만찬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지 지키라고 명하셨을까? 그리고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드리는 주일예배와 유월절은 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오늘은 이것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살펴볼 것은 유월절규례와 출애굽과의 관계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출애굽의 첫관문이었다. 유월절을 지킴으로 출애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애굽에 있어서 유월절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이를테면 오늘날 유월절을 통과하지 않는 성도가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과연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 그것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자기백성을 얻으시고 그들을 탈출시키고자 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 탈출의 첫관문이 바로 유월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월절의 핵심요체는 무엇일까? 출12장에 보면, 유월절규례가 나온다. 거기에 보면 유월절에는 반드시 해야 할 2가지 일이 있었다. 한 가지는 어린양의 피를 집문에 바르는 것이요, 또 하나는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었다. 이처럼 유월절에는 바르고 먹는 것이 핵심이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민간력으로는 7월이었던 그 달을 종교력으로 1월로 바꾸라고 명하셨다. 이는 유월절이 뭔가 시작을 알리는 것임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그달 10일에 각 가족마다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 유월절에 사용할 어린 양 한 마리를 취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14일날 해질무렵(오후3시~6시)에 그 양을 잡으라고 하셨다. 그때 집안의 가장은 그 어린양의 피를 양푼에 담아 우슬초로 찍어 자기 집문의 좌우설주와 문인방에 바른다. 그리고는 그 어린양의 고기와 내장을 깨끗히 씻어, 어린양의 피를 바른 그 집 안에 들어가서 그 밤에 그 양고기를 다 먹는다. 남기면 안 된다. 그래서 양 한 마리당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 여럿을 모으라고 한 것이다. 아마도 아들내외와 딸내외까지 합치면 한 12명 정도가 양 한 마리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양고기를 먹을 때에는 주의해야 할 것이 2가지 있었다. 하나는 먹기는 먹되 날 것이나 삶아서 먹지 말고 구워서 먹으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곁들일 음식으로는 무교병과 쓴나물을 사용하라고 하신 것이다. 혹 그 다음날 아침에 고기가 남았으면 다 그 불로 다 태워버리라고 했다. 이것이 유월절 규례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왜 그렇게 지켜야 하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그 다음날 새벽에 이르러 그들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월절이 끝나는 다음날 새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성도들도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에서 어린양의 피를 자신의 영혼에 발라야 한다. 그리고 어린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쓴나물과 아울러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

  이러한 유월절의 2가지 규례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꼭 2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렇다면 이 유월절 어린양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사도바울은 그 유월절 양이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고(고전5:7), 인류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요한도 예수님에게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2사도들의 하나였던 사도요한도 환상중에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계5:6). 그렇다.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때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는 곧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크게는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죽음의 신이 지나갈 때에 그 집을 넘어가게 하는 표시였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보호된다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죄없는 어린양이 죽을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으로 우상숭배와 같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고기를 그날밤에 전부다 남김없이 먹으라고 했을까? 그것은 그 다음날 새벽에 많은 짐을 지고 애굽을 탈출하되 바로의 군대로부터 멀리 떠나기 위함이다. 만일 충분한 고기를 섭취하지 못했더라면 그후로 줄곧 3일길을 광야로 도망쳐야 했는데, 아마도 기진맥진하다가 낙오자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했으면 추격해오는 바로의 군대에 붙들려 죽임당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 밤에 어린양의 고기를 먹되 충분히 먹어야 했다. 오늘날 성도들도 사탄의 제국인 애굽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고기 즉 예수님의 살을 충분히 먹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식인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기에(요1:14),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을 섭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린양의 고기를 먹을 때 2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었다. 하나는 구워서 먹으라는 것이었는데(출12:8~9),  이는 당시 이방종교를 섬기는 자들이 고기를 날 것으로 먹고 있었고 애굽인들은 삶아서 먹고 있었기에, 주님께서는 이방종교나 혹은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의 방식대로 고기를 먹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을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는 이방종교의 풍속을 따라서는 아니 된다. 주님께서 시키신 방법대로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는 구도자 예배는 바르게 말씀을 먹는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집에서 인터넷으로 설교듣고 구좌로 인터넷뱅킹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예배방법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는 누룩을 제한 누룩없는 빵을 먹어야 하고 쓴나물을 먹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빵에 누룩을 넣지 말라 하심은 잘못된 교리나 가르침을 따라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쓴나물을 먹으라 하심은 입에서는 쓰는 말씀이라도 뱃속에 들어가서는 양약이 되는 것이므로, 교훈과 책망의 말씀을 달게 받으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교훈(가르침)과 외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이었다(마16:6,12).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어떠한가! 잘못된 교리가 얼마나 주일날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칼빈주의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교리,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베리칩종말론, 신사도와 빈야드운동, 잘못된 거짓 예언과 환상 같은 유의 말씀들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 들어온 누룩들이다. 이것을 먹으면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출애굽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유형을 살펴보라. 위로하는 말씀으로 가득한가? 아니면 책망하여 영혼을 수술하는 말씀으로 가득한가?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고 수술하기 위해서는 쓴디쓴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달게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그날 저녁 예수께서는 그날까지 이스라엘백성들이 지켜온 유월절을 끝내시려 작정하였다. 왜냐하면 그 다음날인 유월절 당일에 당신이 직접 유월절양이 되시어 피흘려 죽으시고 당신의 살을 인류에게 공급해주시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자자손손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성만찬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그때 주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떡은 당신의 몸을, 포도주잔은 당신의 피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유월절이 그날저녁 성만찬으로 계승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성만찬은 고스란히 주일예배시간에 재현되고 있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도 주일에 모여,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 그리스도의 피로서 용서를 받고 있고, 주일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약의 성만찬은 유월절의 성취이며, 지금 우리들이 드리는 주일예배는 영적인 유월절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주일예배를 드림으로서 이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예배의 순서나 형식을 함부로 바꾸려하지 말라. 그것이 말씀을 먹는 주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일예배 순서에는 반드시 참회시간과 말씀선포의 시간이 들어가야 한다. 회개와 말씀이 빠진 예배는 더 이상 유월절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선포되는 말씀에 잘못된 교리나 가르침이 끼어 들어가게 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그리고 책망과 훈계와 교정의 말씀이 혹 선포된다하더라도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구도자예배는 확실히 예배가 아님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예배는 어린양의 피로 용서받은 자가 참여하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형식도 함부로 바꾸려하지 말라. 다시 말해 날 것이나 삶아서 먹는 이방인의 말씀섭취방식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인터넷예배가 과연 왠 말인가?

  유월절을 제정해주시던 그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하셨다. "이것은 영원히 지킬 규례로서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출12:14)" 그렇다. 우리는 오늘날 성만찬예전과 주일예배를 통해 유월절을 승화발전시켜서 계속 지켜야 한다.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회개생활과 말씀을 듣는 시간을 빼먹지 말아야 한다. 회개와 말씀듣는 시간을 최고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애굽을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 즉 천국까지 지치지 않고 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매주 선포되는 말씀을 잘 섭취하여 끝까지 자기에 당한 경주를 경주함으로 천국에 이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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