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3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성막의 분향단이 들려주는 3,500년 전의 기도의 비밀(출30:1~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_gRbQaaWBc  [혹은 https://tv.naver.com/v/28284429 ]

 

1. 들어가며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마태복음 6:9~13에 나오는 주께서 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기도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할 때에 무조건 "주여!" 혹은 "주 예수여!"라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들으신다. 그렇지만 기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지금모다는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아! 기도는 이렇게 되어서 구만리장천 떨어진 하나님께서 전달되고 이렇게 응답되는구나" 하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일평생 붙들어야 할 기도를 한 번 제대로 알고 기도해보기 위해 이번주부터 기도설교 씨리즈를 시작해 본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지금으로부터 3,500년전에 출애굽기에 나오는 기도의 비밀을 살펴보려고 한다. 거기에는 성막이 있었고, 성막 안에는 분향단이 있었으며, 거기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사르는 향이 이었다. 그래서 영적인 비밀들을 담고 있는 이러한 분향단을 통해 우리는 기도에 대한 정의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우리들의 마음자세를 올바로 정립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를 바란다. 

 

2. 왜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가 전능자라면 아마 기도는 더이상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며 우리가 못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더이상 기도를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다. 그것도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는 타락했고 연약해져여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는 참으로 불쌍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자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용서도 정말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도 기도하여 그러한 능력을 체험했던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하나같이 기도하여 기도에 성공했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독교회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 역시 기도에 열중했으며 그들 역시 기도를 통하여 놀라운 영성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진정한 영성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더 나아가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역시 기도를 배우고 기도를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기도란 무엇이며 천국에서는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기도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기도를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기도는 절대초월자되시는 신적 존재와 교통하는 소통의 한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기도는 대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도할 때에는 마음으로 기도하기도 하고 입술을 벌려 기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도가 천국에서는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까? 그러한 비밀은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사람이 드린 기도는 '향'의 형태로 저장된다는 것이다. 향이 어떤 주발 같은 대접에 담기거나 향로에 담기는 것이다. 천국에는 모든 피조물의 대표인 네 생물들과 구원받은 사람들의 대표인 24장로들이 있는데, 이들 중에서 24장로들이 하는 일은 딱 2가지다. 하나는 거문고를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며, 또 하는 기도하는 일이다. 그런데 계5:8에 말씀에 보면,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에게 경배하는 24장로들을 본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는 향이 가득담긴 금대접이 들려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사도요한의 해설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이 향이라는 것이 "성도들의 기도"라는 것이다(계5:8). 그렇다. 천국에서 기도는 향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와 같은 시편 기자는 자기의 기도가 주의 얼굴에(앞에) 분향함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시141:1~2). 그렇다. 천국에서 기도는 향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며, 기도하는 것 자체는 향을 분향단에 태우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4. 기도는 어떻게 천국의 분향단까지 올라가게며 또한 우리에게 응답으로 되돌아 오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한 말로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천국에서 향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것은 천사들의 활동 때문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태어나면서 천사가 붙여진다. 그래서 그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모든 일이 날마다 하나님께 보고가 된다. 그런데 이때 기도를 하게 되면, 천사가 그 기도를 대접에 향으로 받아 전달을 해준다. 자기보다 더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진 천사에게 말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기도담당 천사장에게 그것이 전달된다. 이때 기도담당 천사장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분향 제단 곁에서 그것을 자신의 향로에 담는다. 그리고 그것을 분향단에 쏟아붓는다. 그러면 향이 불에 타면서 향연이 피어오르는데 그 향연을 천사가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기도를 흠향하시고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이때 응답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게 되며, 이러한 응답이 지상에 내려올 때에는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계에서 일어나는 기도의 전 과정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요한계시록 8:3~5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은 분향단에 불태워지는 향의 연기와돠 같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 채 하나님의 보좌 앞의 분향단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도 없어지지나 사라지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분향단까지는 올라가는 것이다. 

 

5. 지상에 있는 성막의 분향단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천국에서는 천사가 분향단에 향을 부어서 그것을 사르는 일을 한다. 그런데 지상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가 있다. 그것은 성막의 '분향단'이다(출30:1~10).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있는 분향단과 그곳에서 향을 사르는 것을 고스란히 모세에게 보여주시고는 그 식양대로 이 땅에 분향단을 만들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거기에서 향을 사르라고 하셨다. 그곳이 바로 성막의 '분향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에 있는 성막의 분향단에 대해서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기도의 전 과정과 절차 그리고 기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존전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분향단은 성막의 기구들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 진을 쳤을 때에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하나님의 백성의 법도를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20~24장에 나오는 십계명법들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 법에 따라 죄를 지었을 때에 어떻게 용서받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성막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것이 출애굽기 25~40장에 나온다. 고로 성막법은 사람이 죄를 용서받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막에서 분향단에서 향을 사르는 과정이 거기에 들어있다. 고로 우리는 이때 제작되는 분향단의 제조과정과 또한 분향단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살펴본다면,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전달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또한 받으시는지를 알 수가 있다. 

 

6. 지상의 성막의 분향단에서는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향을 사르는가?

  그 렇다면 지상에 있는 성막의 분향단에서는 과연 누가 향을 사르게 되는가? 또한 향을 사르는 장소는 대체 어디인가? 출애굽기 30장을 읽어보면 그 답이 나온다. 과연 누가 성막에서 향을 사르는지 그리고 성막의 어디에서 향을 사르는지가 나온다. 첫째, 누가 향을 사르는가? 그것은 아론 곧 하나님께서 세우신 특별한 사람 곧 대제사장만이 향을 사를 수 있다고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인 아론에게 아침마다 금등대의 불을 끌 때에 분향단으로 가서 향을 사르고 또한 저녁에 불을 켤 때에도 분향단으로 가서 향을 사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출30:7~8). 둘째, 어디에서 향을 사르는가? 이처럼 향은 대제사장만이 사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분향단의 위에 놓인 향로에서 향을 사르라고 되어 있다. 그냥 자기의 처소에서 병풍을 쳐놓고 거기에서 향을 사르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향을 사르는 곳은 성막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 것일까?

 

7. 분향단은 실제로 성막의 어디에 위치해 있었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분향단은 성막의 성소의 둘째 휘장 앞쪽에 위치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실제 그러할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에서는 분향단이 성막의 성소에 위치해 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그렇게 알려져 왔고 그렇게 인정하고 있지만,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성막공부를 해보면 알겠지만, 모든 성막전문가들도 다들 그렇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 성경을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단 한 번도 분향단이 성막의 성소에 있다고 말씀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지성소의 증거궤에서 볼 때 분향단이 둘째휘장 뒷편에 있다고 나오지 않는다. 그런 말씀은 한 구절도 없다. 그렇다면 왜 성막전문가들까지 분향단이 지성소에 있지 않고 성소에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분향단이 위치해 있는 장소에 대해 히브리어 원문을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30:6을 우리말 개역성경으로 보면, 그것은 지성소에서 볼 때 휘장 '밖에' 있다고 번역되어 있다. "그 [분향]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출30:6)"라고 나온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분향단은 휘장 '밖에'(=후츠) 두는 것이 아니라 휘장 '앞에'(=파님) 두라고 나온다. 그래서 잠깐이지만 직역에 가까운 표준새번역을 살펴보자. "너는 분향단을 증거궤 앞, 곧 증거판을 덮고 있는 속죄판 앞(=파님), 휘장 정면에(=파님) 놓아 두어라. 거기 그 속죄판에서 내가 너를 만날 것이다"(출30:6). 그렇다. 성경 전체서 분향단을 휘장 '밖에'(=후츠) 두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성소에 있다고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지만 '떡상'(진설병상)과 '등잔대(등대)'는 분명 둘 다 휘장 '밖에' 두라고 아예 지정하고 있다. 그중에서 떡상은 휘장 밖에 있는 북쪽에 두라고 나오며, 등잔대는 휘장 밖에 있는 남쪽에(떡상 건너편)에 두라고 나온다(출40:22, 27:21). 그런데도 우리는 개역성경의 오역된 말씀(출30:6)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둘째, 역대하 26장에 나오는 웃시야왕(재위 B.C.767~739)의 분향사건을 통해서 분향단이 성소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는 것이다. 웃시야왕은 남유다의 10번째 왕으로서 상당히 센 왕이었다. 그러다보니 영토를 늘리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는데 그러자 교만해져서 그만 자신이 직접 여호와의 성전(헤칼)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을 하려고 시도한다. 그러자 깜짝 놀란 대제사장 아사랴가 용맹한 제사장들 80명을 데리고 들어가 그를 데리고 나오려고 하는데, 그래도 막무가내로 분향단의 향로를 손으로 잡고 분향을 하려 시도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게 한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그를 급히 쫓아내었고 하나님이 치셨다는 것을 알게된 그도 급히 나가게 된다. 그때 아사랴 대제사장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라 오직 분향하기 위해서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이니, 성소(미크다쉬)에서 나가소서"(대하26:18). 아마도 사람들이 여기에 나오는 단어 '성소'(미크다쉬=거룩한 장소)를 지성소가 아니라 성소로 이해했거나, 아니면 진짜 이때쯤에는 누군가 분향단을 성소에 갖다 놓았든지 했기 때문에, 분향단이 성소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성막에서 분향단은 지성소의 법궤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다윗의 명을 받아 솔로몬이 지었던 첫번째 솔로몬성전(B.C.966)에서도 분향단은 내소 곧 지성소에 있었다는 것이다(왕상6:22). 

  셋째, 성막의 전문가들이 신약성경의 하나인 히브리서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9장에 보면,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에 어떤 성물들이 놓여있는지가 나오는데, 거기를 보면 성소에는 등잔대와 떡상이 있고, 지성소에는 향단 위에 놓는 향로와 언약궤(법궤,증거궤)가 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히9:1~4). 하지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향로가 놓인 향단은 비록 성소에 있지만 지성물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히브기서 기자가 잘못 쓴 것이 아닌가 하고 주석을 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성막에서 분향단은 지성소의 법궤 앞에, 그리고 휘장 밖이 아니라 바로 휘장 앞에 있었다고 나온다는 사실이다. 훗날 누가 성소에 갖다 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8. 분향단이 지성소에 있는 지성물이었다는 것과 기도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그런데 분향단이 지성소에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첫째, 지성소는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장소이기 때문이다(출25:21~22,30:6). 하나님은 성소에 있지 아니하며, 성막뜰에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지성소의 법궤 위 속죄소의 두 그룹 사이에서 현현하신다. 그리고 바로 그 앞쪽에 놓인 분향단에서 향을 사른다. 이것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얼굴(직역) 앞에서 향을 사른다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상에서 드리는 기도는 구만리 장천을 직행하여 올라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는 분향단에 향을 가져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그것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서 향을 사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분향단에서 향을 사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구별된 자로서 대제사장만이 그곳에 들어가서 향을 사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하자.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셔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을 우리에까지 활짝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모든 자를 주님은 대제사장처럼 여기주시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십자가에서 찢으신 예수님의 육체가 둘째 휘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전의 둘째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게 된다(마27:50~51).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성소들(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을 주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열어놓으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히10:19~20).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지 기도할 때에는 대제사장이 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요, 누구든지 자신의 기도만큼은 하나님의 보좌 앞 곧 하나님의 얼굴 앞으로 올려보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고로 사도 베드로는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한 것이다(벧전2:9). 

 

9. 기도가 향으로 드려지고 향기되어 올라가며 응답이 떨어지는 장소인 분향단이 들려주는 영적인 비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 기도가 아무런 가감없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장소인 지상의 분향단으로 가보자. 그런데 성경은 분향단을 어떻게 제조하며, 또한 그곳에서 향을 사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첫째, 분향단은 조각목(아카시아나무)로 짓되 그것의 보이는 모든 부분(위면와 옆면들)을 순금을 입히라고 했다는 것이다(출30:1~3). 여기서 '조각목'은 사람의 '인성'을 상징하고, '순금'은 불순물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상징한다. 사람의 성품은 깨끗하지 않다. 더럽고 추하다. 아담의 원죄가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더러운 인성일지라도 분향단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신성한 본성으로 감싸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비록 더럽고 추하다고 할지라도 기도할 때만큼은 그분이 우리를 금으로 덮어주시어 우리더러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분향단을 만들 때에위쪽 네 모퉁이에는 뿔을 만들라고 하셨다는 것이다(출30:2~3). 이러한 뿔은 성막기구들 중에서 오직 번제단과 분향단에만 있다. 그리고 이 뿔은 영적으로 '힘'과 '권세'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지만 기도할 때만큼은 하나님의 힘과 권세가 그에게서 나타나게 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 미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는 방법은 오직 기도에 있다. 그러므로 위대한 인물들도 다 이러한 전능자의 힘과 권세를 기도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분향단에 향을 피우게 되면 어떤 죄인의 죄도 가려지고, 심지어 죄를 지은 것도 용서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레16:12~13, 민16:46~48). 대제사장이라고 해도 죄를 짓지 아니하고 사는 대제사장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할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대제사장은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향연으로 지성소를 가리는 것이다(레16:12~13). 그러면 죽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민수기 16장에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 염병으로 그들을 치실 때에, 아론이 향로를 가져다가 향을 피움으로 염병이 그쳤다는 말씀이 나온다(민16:46~48). 그렇다. 기도할 때에는 지은 죄도 속죄가 일어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시고 징계까지도 멈추시며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번제단에서만 속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향을 사를 때에도 죄를 사함받을 수가 있음을 알라. 오, 이 얼마나 큰 은혜란 말인가?

 

10. 나오며

  우리는 번제단에서 듸는 제물의 향기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분향제단에서 사르는 향의 향기도 하나님일 받으신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특별히 우리가 기도하는 그 시간만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신다는 것도 들었다. 왜냐하면 오직 향을 사를 수 있는 분향단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대제사장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각목 같은 우리 인생들이지만 기도하는 그 시간만큼은 우리를 순금으로 덮어주신다는 것도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향연이 존엄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가려주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대면하여도 죽지 않게 해 주는 것이다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었을지도 직접 향을 태우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지은 죄들도 용서해주신다는 것도 배웠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큰 죄를 지은 자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 기도는 내 몸이 비록 이 지상에 있지만 내 영혼을 순식간에 하늘의 지성소인 하나님의 보좌 곧 하나님의 얼굴 앞으로 보내는 고속도로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경험하게 해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죄를 지은 자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 얼마나 귀한 기도의 능력이며 이 얼마나 놀라운 기도의 권한인가? 기도를 하자. 우리도 기도를 드리자. 그래서 우리도 그 순간만큼은 대제사장이 되어보자. 그리고 어떠한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예외로 인정해주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체험해 보자. 기도가 바로 특권이요 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며, 기도야말로 능력과 권세이자,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이기 때문이다. 

 

2022년 07월 31일(주일)

정병진목사

 

예수께서는 누구신가? 히브리서는 예표론적성경해석방법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수님은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도 아니었다. 그리고 성전에서 죽으신 것도 아니었다. 그분은 단지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서 버려진 채 죽임을 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예수님은 나의 구주로 믿고 따르는가? 대체 그날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히브리서만이 들려주는 놀라운 속죄제사의 비밀, 우리는 지금 거기에 가보려고 한다.

2020-03-1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예수께서는 이 땅의 참 성막의 대제사장이셨다(히8:1~6)
https://youtu.be/1DivMwFk8U0

[ https://tv.naver.com/v/12877650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는 자들이다. 즉 예수께서 2천년전에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을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대속의 사건이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 의하면, 속죄일제사는 성전에서 대제사장이 집례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아뱌(요11:49)에 의해 성전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의 모형에 불과할 뿐, 진짜는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속죄사역을 한 것으로는 안 되고 죽고 부활한 후에 승천하셔서 하늘의 성소에서 제사를 다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진술이 맞는 진술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골고다언덕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사건이 과연 인류를 위한 구속사건이었으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믿는 자가 받게 되는 혜택은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인류의 구원을 위해 대속죄일 제사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구약성경 레위기 16장을 보면,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가 나온다. 거기에는 속죄제사를 드려 죄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다. 첫째는 제사드리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그곳은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하신 장소 곧 성막(성전)이 있는 곳이라야 한다. 아무데서나 제사를 드린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둘째는 제사에 사용될 속죄제물이 있어야 한다. 틀히 죄인을 대신하여 죽을 흠없는 속죄제물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제사를 드려줄 제사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속죄일 제사에는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드린 속죄제사는 과연 대제사장이 인류를 구원할 대속죄일 제사를 드린 것이었까? 그리고 오늘은 이 3가지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보도록 하자.

 

3. 예수님은 과연 성전(성막)에서 돌아가셨는가?

  우선 예수께서 인류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 죽으시려면 "장소"가 합당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한 장소에서 제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구약성경에서 대속제물을 바치는 장소는 어디였ㅈ는가? 그것은 성막이었다. 혹은 그것이 발전된 성전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과연 성막 혹은 성전에서 돌아가셨는가? 우선 확실한 것은 예수께서는 결코 성전 안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날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문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의미한 죽음이라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속죄제일 제사를 완성하기 위한 첫번째 단추부터 끼워보자. 예수께서는 과연 성막(혹은 성전)에서 돌아가신 것인가? 이부분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히9:8의 말씀이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9:8).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장막"이 무엇이며, "성소"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첫 장막"이 무엇인지는 히9:1~2에 보면 나온다. 거기에서는 첫 장막을 "성소"라고 부르며, 그것 안에는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첫 장막은 첫째성막으로서 성소를 가리킨다. 그러면 둘째장막은 둘째성막으로서 지성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히9:8의 말씀을 보면, "첫장막"과 "성소"와 충돌한다. 둘 다 똑같은 말인데,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첫장막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히9:8에 나오는 "첫장막"과 "성소"가 각각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선 "첫장막"을 지상에 있는 성전의 성소라고 가정해보자.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과연 지상의 성소가 어찌되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첫장막"이란 지상의 성소를 가리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나오는 성소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헬라어원문을 보면, 이따 "성소"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성소들"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실마리가 풀리가 시작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성소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들이라고 풀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서는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설명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히9:11~12에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일의 좋은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후에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고로 예수께서 속죄사역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의 영(부활체)는 하늘에 있는 성소 안으로 들어가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히9:8의 "첫장막"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히10:19~20에 나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들]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19~20)"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갈 장소는 다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소들(성소와 지성소들)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지상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둘째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첫장막(첫째성막=성소)은 예수님의 육체였던 것이요, 둘째장막(둘째성막=지성소)는 예수님의 영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첫째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일곱금촛대와 분향단과 떡상이 놓여있으며, 좌우에 싯딤나무로 지어진 판자들이 있고 앞쪽에는 지성소를 구분하는 둘째휘장이 있는 곳이 "첫째성막"으로서 "성소"인데, 지상의 성전의 성소는 모형이고, 이것의 실체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각도에서 성경을 보면 많은 부분이 열리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요1:14에서 사도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거하시매"라는 단어를 보면, "스케노오"라는 헬러어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천막을 치다. 장막을 치다. 성막을 짓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육신을 입은 사건이 곧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막을 치신 사건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땅에 물질적인 성막(모형) 말고 또 하나의 진짜 성막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야말로 "움직이는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그런데 사도요한은 이 성전을 가리켜 "예수님의 성전된 자기 육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요2:21).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는 성전의 첫째방으로서 성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이 성전의 성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지상의 성전에 있는 둘째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마27:51), 그리고 한 가운데(눅23:45)가 찢어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성전의 휘장은 모형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의 성소 곧 첫장막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히 예수님이야말로 걸어가는 성막(성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분의 몸은 첫째장막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그분의 영은 둘째장막에 해당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곱금촛대에 불을 밝히고 분향단에서 향을 사르고 떡상에 떡을 진설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몸안에서 행하는 사역이었고, 지성소의 법궤 위에 피를 뿌리는 것은 그분이 영 안에서 행하시는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성막(성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이같은 일들로 인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걸어다니는 성막(성전)이었기에 그분이 어디서 돌아가시든 그분은 속죄제사의 첫번째 조건인 속죄제사는 성막(성전)에서 드려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예수님의 베데스다 못가에서 돌아가시든, 벳바게 언덕에서 돌아가시든 상관없이 그분이 돌아가신 그 장소가 성막(성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왜 예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은 왜 예수께서는 여러 장소들이 많은데 굳이 "골고다언덕"에서 돌아가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번째 이유는 그것이 대속죄일 제사에서 죽임당할 속죄속죄제물에 대한 규례 때문이다(보다 더 정확히 말하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원래 바랬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의 죄를 사하는 대속죄일 제사는 레위기 16장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대속죄일 제사 때에 온 이스라엘 회중을 위한 속죄제는 2마리의 속죄양(숫양2마리)가 사용되었는데,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양으로 드려졌고 또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한 속죄양으로 드려졌다. 여호와를 위한 속죄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지성소(둘째장막)의 법궤 위와 동편 앞에 뿌려야 했다. 그리고 또 한 마리는 안수 후 산 채로 광야의 무인지경에 내다 버려야 했다. 그때 아사셀 양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버림받아 죽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죽으신 것은 이 두 마리 속죄양으로 죽으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아사셀 양처럼 버림받아 골고다언덕(당시에는 성문밖에 위치해 있었다)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그 장소가 여호와를 위한 속죄양의 피가 떨어질 자리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1988년경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가 예루살렘을 여행하던 중 천사의 지시를 받고 예수께서 돌아가신 장소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 법궤의 위치까지 알아낸다. 그곳은 골고다언덕의 바위 밑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날 지진이 일어났었는데, 그때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고여있다가 지진으로 벌어진 틈새를 따라 밑으로 스며들었으며, 지하 예레미야 동굴에 감추어둔 법궤 위와 동편에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를 위한 한 마리의 속죄양의 피가 지성소의 법궤 위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골고다언덕이야말로 성전(예수님의 몸)이 있는 장소였고, 지성소(법궤가 놓여 있음)가 놓여있는 장소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참고로 그 자리에 법궤가 있었던 이유는 남유다가 타락으로 인하여 멸망이 가깝자, 경건한 제사장들이 법궤를 당시 예레미야의 동굴로 옮겨놓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5. 예수님은 흠없는 속죄제물이셨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흠없는 속죄제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동정녀(처녀)마리아의 태를 빌려 태어나셨기에 죄된 본성을 갖지 않은 채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 분이기 때문이요, 그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요 죄를 짓지도 아니하셨기 때문이다(고후5:21, 히4:15, 요일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그래서 사도베드로는 예수님의 피를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피(벧전1:19)"라고 하였던 것이다.

 

6. 예수님은 진정 속죄제사를 드릴 자격을 갖춘 대제사장이었는가?

  이제는 마지막 단계에 왔다. 예수님은 자체가 성막이셨고 흠없는 속죄제물이셨다. 그렇다면 그분은 속죄제사를 드릴 수 있는 대제사장이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자체가 1장부터 10장까지 예수님께서 속죄제사를 드릴 대제사장으로 합당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을 내서 차근차근 히브리서를 읽어보라. 1장에는 그분이 죄를 정결케하는 일을 하셨다고 나오고(1:3), 2장부터는 계속해서 예수께서 대제사장이시라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대제사장으로서 합당하신 분인지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분은 천사보다 뛰어나고(1~2장), 모세보다 뛰어나며(3~4장), 아론보다 뛰어난 분(5~10장)이라고 증거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서, 영원무궁토록 대제사장의 신분을 갖고 계시다고 증거한다(7장). 예수께서 얼마나 뛰어나신 분인지를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볼 것이다(매일 새벽 유튜브로 방송하는 "아침묵상(홈페이지)"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7.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어떤 복을까?

  그렇다면, 골고다언덕에서 인류를 위한 속죄제사를 믿는 자들은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가? 많다. 아주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차다. 우선 예수께서는 요3장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3:15).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의 속죄제사로 인하여 죄들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 있고(히9:22,2:17,1:3), 우리들의 양심이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다고 했으며(히9:14),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며 온전하게 한다고 하였다(히10:14). 그리고 그날 예수께서 열어놓은 새롭고 산 하늘 길을 따라 하늘(셋째하늘=천국)에까지 들어갈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으며(히10:19~20), 결국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히9:25).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앉으셔서(히8:1), 중보자로서 일하시는 그분의 도우심을 받아(히2:18),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히4:16), 우리가 드린 기도가 응답되며(히7:25~26),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처인 하나님의 나라까지 상속받을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히3:14).

 

8. 나오며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드린 제사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완전한 속죄제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그분은 골고다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이 땅에 성막을 치신 것이다. 그분이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전가받은 후, 당신이 이 세상의 죄를 없이하시려고 죽으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무려 350가지 이상의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두 마리의 속죄양으로서 돌아가셨다. 그 표적이 바로 지상성전에 있던 둘째휘장이 찢어진 것이며, 예레미야동굴의 법궤 위에 피가 뿌려진 것이다. 그리고 3일동안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가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의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적인 직무를 감당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분만을 붙들고 기도하며 살기를 바란다.

 

2020년 03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히브리서 기자는 왜 성소의 분향단은 언급하지 않고 지성소에 향로가 있다고 말했을까?(히9:1~12)_2020-03-13(금)

https://youtu.be/Jo4OeRUKLSw 혹은 https://tv.naver.com/v/12842074

 

1. 성경에 나오는 비유를 영적으로 해석할 때 바르게 해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경에 나오는 비유를 영적으로 해석할 때에 가장 안전한 방법은 모형론적(예표론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형론적으로 해석하려고 할 때에는 어떤 기초작업이 필요한 것인가요? 그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문자적인 의미를 먼저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더해서도 안 되고 빼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자적인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2가지 작업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성경에 쓰이는 문법적인 부분을 정확히 분석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쓰인 단어가 명사라면 그것이 단수인지 쌍수인지 복수인지 그리고 그것이 동사라면 그것이 미완료인지 완료인지, 그것이 헬라어라면 중간태인지 능동태 혹은 수동태인지, 그리고 그것이 명령형이라면 과거명령형인지 현재명령형인지 등등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약시대의 역사적인 사실과 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표론적인 성경해석방법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건이나 인물 그리고 제도 등을 진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을 설명해주기 위한 모형이요 그림자로 보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사건과 인물 그리고 제도에 대한 지식과 아울러 문화적 정치적인 배경을 잘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성경에서 영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성막을 어떻게 해석했나요?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9:1~12에서 첫째언약 하의 성막(성소와 지성소)을 둘째언약 하의 성막(성소와 지성소)와 비교하여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모형이요 그림자는 구약의 성막을 가리키며, 실체이자 참형상은 신약의 예수님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첫째휘장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안에 있는 공간을 "성소"라 부르고, 둘째휘장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 그 안에 있는 공간을 "지성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성소는 첫째휘장과 둘째휘장 그리고 5겹의 천막지붕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리고 성소 안에는 3가지의 성물들 곧 일곱금촛대와 분향단과 진설병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첫째성막)을 예수님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몸(육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아니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의 몸이 무엇이며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잘 이해하도록 모세에게 먼저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볼 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둘째휘장을 찢은 것에 해당합니다(히10:20).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첫째성막(예수님의 몸)이 아직 있을 동안에는 [하늘의] 성소들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히9:8). 예수님 이전에는 그 누구도 하늘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로서 먼저 그곳에 들어가시고, 그 다음에 구약성도들이 한꺼번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죽은 성도들이 죽은 즉시 하늘의 성소와 지성소(하나님의 보좌 앞)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3. 히브리서 기자는 왜 첫째 성막(성소)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성물로서 "분향단"을 언급하지 않았나요?

  구약성경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히브리서 기자가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의 성물에 관하여 잘못 언급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성물로서 분향단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성소에 있는 성물로서 금향로가 있다고 언급한 것은 착각이 아니었나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는 지성소에는 언약궤만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출40:2~3).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왜 성소의 분향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없는 것처럼), 지성소에 금향로가 있다고 말했던 것인가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막은 성막자체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요 모형이요 오히려 예수께서 성막이라는 것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성막이 먼저 있고 그것을 설명하려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설명하려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 하늘의 성소와 지성소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려다보니, 구약의 성막의 예화를 가져다가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의 장면을 본 다음에 구약의 성막의 제도를 가져와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하늘에 성소에는 분향단이 없고, 지성소(하나님의 보좌 앞)에 향로가 있음을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시 하늘에서 향로를 취하시어 향을 사르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보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의 성막제도를 빌어다가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으로 사역하시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설명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하늘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사역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려고 성막의 비유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입으신 예수께서 지상에서 행하셨던 3가지 일들(일곱금촛대에 기름을 보충하고 간검함, 분향단에서 향을 사름, 진설병상에 12덩이의 떡을 진설함)을 끝내시고,그분은 이제는 하늘의 성소들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지성소에서 예수께서 당시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구약에 나오는 성막과 대제사장의 직무를 가져다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늘에 계시기에 더이상 이 땅에서 향을 사르지(기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분향단은 언급하지 않고, 하늘의 지성소에서 향을 사르는(하늘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려고, 하늘의 지성소에 금향로가 있다고 언급한 것입니다.

 

4. 구약시대 성막에서 금향로는 무엇을 가리키며 어떤 용도로 쓰였나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세더러 성막을 건축하라고 할 때에는 일곱금촛대(등잔대)와 더불어 "향로"도 같이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25:38).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그것을 금으로 된 "불똥그릇"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금향로(히브리어로, '마흐타')인 것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금향로"는 레위기10장에 처음으로 그것의 용도가 나옵니다. 그것은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금향로를 가져다가 분향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받아 그만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타서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금향로에 담을 숯불을 번제단의 불에서 취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장면은 레16장에 나오는 속죄일제사 때 분향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에 한번 향로를 들고 속죄소에 들어가서 향을 살라서 속죄소를 가리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레16:12~13). 그리고 세번째 장면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고라일당의 반역사건에 등장합니다. 거기에는 족장 250명도 등장하는데, 이들은 자신들도 아론처럼 대제사장의 일을 하고 싶다고 향로를 만들어서 하나님 앞으로 나온 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서 그들을 또한 불에 태워버리셨습니다. 금향로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사용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합당한 방법과 절차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5. 천국에서 지성소에 금향로가 있다는 것을 무엇을 뜻하나요?

  천국에서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 앞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가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물론 크게 보면 셋째하늘이 다 지성소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우주 가운데에는 오직 한 분만이 대제사장으로 사역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천국에서 금향로를 취하셔서 지금도 중보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예수께서는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기에, 항상 살아서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께서는 당신자신을 통하여 나아오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해 주십니다(히7:25).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요한계시록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있다고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께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언급하였습니다(히8:1). 이것은 예수께서 현재 천국에 계시지만 아직까지 중보기도를 쉬지 않고 계심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첫째성막이셨을 때에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하셨습니다(히5:7). 다시 말해, 지상의 분향단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속죄사역을 마치신 후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셨지만 지금도 천국의 지성소에서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의지한 채 예수님께 기도를 올려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들을 들어주실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빌고계시는 중보기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2020년 03월 13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수님의 탄생은 이 땅에 하나님이 거할 장막을 치는 것이었다(히9:9~12)_2020-03-10(화)

https://youtu.be/rYhWKLdLckY

 


1. 성경을 해석할 때 왜 모형론적(예표론적)으로 해석해야 하나요?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초기교부 오리겐(A.D.185~254)이 말한 것처럼 3가지가 있습니다. "몸적인 의미"(문자적 의미), "혼적인 의미"(도덕덕 윤리적 교훈적 의미), "영적인 의미"(알레고리적 의미, 예표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가운데 기본은 "몸적인 의미"를 먼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혼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천지나 하나님교회(안상홍증인회) 같은 경우에서는 처음부터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데 그것도 알레고리적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원래 성경의 저자가 말하려고 했던 의도를 벗어나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작자의 사상를 주입시키거나 교주를 메시야로 믿게 하는 데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반드시 1차적(문자적) 의미와 2차적(교훈적) 의미를 살펴보고 그리고 나서 3차적(영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3차적인 의미는 성경에 나오는 비유들을 해석할 때에 사용하는 방법으로서, 이때는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모형론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가장 안전하며,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해석하실 때에 사용한 방법(요5:39)이었으며, 사도바울도 사용했고(롬5:14, 고전5:7,10:4,15:45), 사도요한도 사용했으며(요2:19~21), 사도베드로도 마찬가지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벧후1:14).

 

2. 성경에서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방법을 최고로 많이 사용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성경에서 모형론적인 성경해석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사용한 사람은 역시 "히브리서 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기초를 세우셨고 사도들이 그것을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만큼 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을 많이 그리고 확실하게 적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탁월한 성경책은 역시 히브리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히브리서의 핵심은 구약의 율법이 모형과 그림자(히8:5)에 불과한 것이요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의 율법 중에서 언약들, 그리고 성막이나 대제사장이나 제물도 다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실체는 누구일까요?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리스도가 몸[통]이요 실체이며 원형인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에 실재했던 사건들과 사람들과 물건들과 제도들을 가져와서 실체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3.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장막"과 "성전"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구약시대 특히 출애굽이후 시내산 아래에 세워졌던 성막은 사실 그때 처음으로 존재하게 된 시설(물건)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늘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준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 땅에 그대로 짓게 했던 것입니다(출25:8~9,40).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25:9)". 그러자 모세는 자기가 본 그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으로 하여금 이 땅에 성막을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약500년 뒤에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로부터 시온산성을 빼앗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거기에 성전을 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그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럼 그때 솔로몬은 어떻게 성전을 지었습니까?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설계도대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설계도도 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성전을 그대로 그려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대상28:19). 그러니까 이 땅에 모세가 지은 성막이나 그것을 건물의 형태로 지었던 솔로몬의 성전이나 다 이 땅에 처음으로 존재했던 기물들이 아니라 하늘에 먼저 있었고 그것을 이 땅에 하늘의 식양대로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성막과 성전은 다 모형이며 그림자인 것이며, 성막과 성전이 실체(원형)가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4. 성막과 성전의 진짜 실체는 무엇이었나요?

  그런데 어느날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논쟁하다가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그러자 유대인들이 물었습니다. "이 성전은 46년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2:20)" 그런데 만약 예수께서 하신 이 대답을 문자적인 의미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허풍쟁이요 몰지각한 사람이요 미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46년동안 지어서 완공했던 스룹바벨성전을, 과연 3일만에 다시 지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즉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비로소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영적인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곧 "성전된 자기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요2:21). 그러므로 그때 헐라고 했던 성전은 물질적인 성전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가리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5. "성전을 헐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몸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나요?

  "성전을 헐라(요2:19)"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의 성육신을 소개하는 사도요한이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신 사건 곧 예수님의 잉태와 성탄의 사건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막을 지은 것이라고 해설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요1:14에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1:14)" 그런데 이 본문을 헬라어 원문으로 지역해보면, "그리고 그 말씀이 육체가 되었으며, 그리고 우리들 안에 장막을 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입니다. 그러니까 "거하시매"라는 말을 헬라어로는, "스케노오"라는 단어로서, "장막을 치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명사 "장막"은 "스케네"라고 부르며, 동사 "장막을 치다"는 "스케노오"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친 성막의 실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부터 존재했던 성막이나 성전은 예수님의 몸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막을 치시려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출25:8에 나온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 어딘가에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한 처소로서 이 땅위에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몸 안에 아버지가 거하셨으니(요10:38), 예수께서는 "나를 보고 있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요(요12:45),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14:9). 또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의 성막(장막,성전)이며, 그분 안에는 하나님(아버지)께서 거하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막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자신이셨던 것입니다. 고로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에 우리는 성막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게 되며, 그분을 믿음으로 하늘로 가는 열린 길을 따라 천국에까지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히10:19~20). 이것은 내일 계속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020년 03월 10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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