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인 삶은 결국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를 새 예루살렘 성밖에 살게 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가 생명책에서 이미 기록된 자기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세속적인 삶에서 떠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과연 어떤 방법을 제시했을까? 여기 정말 놀라운 방법이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2022-04-27(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5) 세속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법(약4:1~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JolIrNDz5_s [혹은 https://tv.naver.com/v/26518760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교리서가 아니다. 야고보서는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일종의 윤리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산상수훈(마5~7장)과 많이 닮아 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은 천국 백성의 윤리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야고보의 윤리 지침은 사실 야고보가 익히 들어서 자신의 삶에 배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그는 대체 누구에게서 산상수훈과 같은 말씀을 들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했던 베드로에게서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전서와 야고보서는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약4:6,10, 벧전5:5~10).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로마 치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체 무엇을 편지하였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지침을 내린 것인가?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5번째 시간으로서, 야고보서 4장을 다루고자 한다. 야고보서 4장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짝하는 삶의 원인이 무엇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자녀라면 과연 어떻게 생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인지를 기록하고 있다(약4:1~12).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돈을 벌며 살기를 원하는 자의 최후가 어떠한지와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약4:13~17). 이제 야고보가 성령으로 기록한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2.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싸움과 다툼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야고보는 야고보서 3장 후반부에서 위로부터 난 지혜와 땅에 속한 지혜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위로부터 난 지혜를 사모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약3:13~18). 그리고 이제 4장에 들어와서 세상 욕망에 대한 경계와 아울러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에 대해 교훈한다(약4:1~12). 그리고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한다(1절).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 속의 내부에 있는 '정욕(헬라어, '헤도네')이라고 말한다(1절). 그것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싸움과 다툼을 하게 되는 원인은 바로 정욕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것 때문에 평생을 상대방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싸우게 될 것이다(2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이것을 그냥 놔 둔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그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야고보는 그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영적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5절). 

 

3.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순결을 지켜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죄악된 본성이 가득한 자기 자신 곧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그 욕망을 제어한 채 성령의 음성을 좇아 살아갈 수 없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야고보는 2가지를 먼저 언급한다. 첫째, 인간이 욕심을 내지만 얻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언급한다(2~3절). 그것은 2가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절하). 생각해 보라.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그 욕심을 이루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겠는가? 그러므로 욕심 자체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이므로 사람은 그것을 이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 구하되 정욕으로 쓰려고 악한 동기에서 구하기 때문에 욕심을 내지만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3절). 자신의 정욕의 필요를 따라 구하는 악한 동기를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구하는 기도인지 아니면 자신의 세상적인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인지를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몹시 바라지만 그것이 세상적인 욕망이기 때문에 구하지 않아서 받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 구한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이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그릇된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는데, 사람은 도리어 교만할 뿐만 아니라 교만을 불러 일으키는 마귀를 대적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6~8절). 야고보의 편지는 일종의 윤리 지침서와 같다고 서두에서 말씀드렸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있는 바는 산상수훈과 비슷하며, 베드로전서와도 비슷하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언급한다면 토라(율법서)와 잠언서를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윤리의 기본 강령을 율법의 십계명에서 따온다. 그리고 각각의 내용들은 잠언의 말씀을 인용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그가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6절, 잠3:34). 교만이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오직 자기 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가 최종 권위가 되고 싶어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의 권위마저 업신여기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그 마음을 주는 사탄 마귀의 지배하에 일평생 매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지 못하며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결과 서로 싸우고 다투며, 미워하며 시기하는 것이다(2절). 

 

4. 하나님을 향하여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어서 야고보는 하나님을 향하여 합당한 삶을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언급한다.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육체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며, 결국 성령의 소욕도 따라갈 수 없다고 언급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바로 9절에 나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회개'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 이러한 문제를 놓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의 웃음이 결국에는 애통으로 변할 날이 올 것이며, 우리의 즐거움은 근심으로 바뀔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9절). 그렇다.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이기고 성령의 음성을 쫓아 살아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인 것이다. 사실 이것을 깨닫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니,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깨닫지도 못한 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묶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도 그냥 세상과 짝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두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는 상태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음녀와 음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이런 자는 결국 진실한 성도들이 휴거받을 때에 들림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최종의 날까지 남겨져서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더러운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오직 회개에서 나오는 것이다. 

 

5. 사람 속에서 나오는 더러운 정욕을 이기는 회개의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람 속에서 나오는 더러운 정욕을 이기는 회개의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안을 열어서 인간의 내부에 있는 죄된 본성을 지켜보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7:15~16). 예수께서는 이때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셨다. 그것은 바로 12가지라고 하셨다(막7:20~23). 

막7: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의견들)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무분별)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렇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이 사람의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12가지 항목을 영적으로 분석해 보면, 전부다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뱀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음란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육체 속에 음란의 영이 있기 때문이요, 사람이 탐욕을 부리는 것은 자기 육체 속에 탐욕의 영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이러한 악한 영들을 내보내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죄악된 본성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훈련을 하면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날마다 영성 운동을 하거나,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틀어박혀 있지 않는 한 이러한 훈련은 지속적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 세상과 접촉하며 살지 아니할 수 없고, 또한 이 세상과 접촉하다 보면 세상의 것이 욕심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 속에 악한 영을 계속 내버려둔 채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적합한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회개하여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아예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알고 회개에 집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다 죄용서를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무슨 죄를 회개해야 하느냐며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기 엄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이러한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어난 모든 아기의 육체 속에는 이미 더러운 영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죄악된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내 육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8~20)"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 내 속에 거하는 죄된 본성이 문제인데, 바로 이것의 실체가 바로 악한 영들(뱀들)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 내가 범죄하지 않았는데도 이러한 영들이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조상들이 지은 우상 숭배의 죄 때문에 조상들의 육체 속에 악한 영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상들이 회개하지 않고 죽었을 때에 그 악한 영들이 그의 자손에게 내려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십계명에 나와 있다(출20:5). 그러므로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 조상들과 부모 속에 들어 있던 영이 내 육체 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들 때문에 거기에 내가 지은 죄가 더해져서 점점 더 악한 영들이 내 몸에 쌓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들을 내보기 위해서는 조상들의 우상 숭배의 죄들을 회개하고 내가 지은 죄를 날마다 자백함으로 회개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평생 죄된 본성을 정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회개함으로 이러한 영들을 밖에 있는 것부터 한 겹씩 떼어 내면 언젠가는 이 영들을 다 내보낼 날이 오고야 말텐데, 처음부터 아예 이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다. 회개해 보라. 직접 해 보면 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게 될 것이다. 

 

6. 왜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해서는 아니 되는가?

  이처럼 야고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를 먼저 말한다(6~10절). 그것은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이것을 추종케 하는 마귀를 버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죄된 본성을 이기기 위해서는 철저하고도 즉각적인 회개를 해야 한다고 했다(9절). 그러고 나서 야고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에 대해 언급한다(11~12절). 그것은 자신의 형제들을 함부로 비방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율법을 제정자도 아니며 율법의 심판자(재판관)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형제 모두가 율법의 준행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1절). 오직 형제의 잘못됨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사람을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12절). 그렇다. 사람이 죄된 본성 곧 자기 육체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제어할 때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내려는 마음보다는 자기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꺼내는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남의 육체 속에 들어 있는 죄된 본성은 사실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아니 된다. 그 원인은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들어온 악한 영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회개하여 내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뽑아내는 데에 중점을 두라. 그것이 바로 성도의 올바른 자세인 것이다. 
 

7. 세상의 물질을 얻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무조건 나쁜 일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의 물질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13~17절).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된 일인가 아니면 그것은 허용되는 일인가를 말한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 부분을 읽지 못한다면, 돈을 벌기 위해 시간과 장소와 목적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말하는 자들을 야고보가 책망하고 있기 때문이다(13절).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돈 벌 계획을 세우지도 말아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야고보의 권면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다. 돈을 벌려고 해도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설정해 놓고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육체의 이익만을 위하여 돈 벌 계획을 세워 놓고 일을 추진한다면 그것이 어느 날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자신이 일평생 애써서 모아 둔 모든 물질이 하루 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14절).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을 벌어들일 계획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어디에 쓸 목적으로 계획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는 것으로 판가름 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중심에 바르지 못한 것 곧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욕심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을 벌어들일 계획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부합되는 삶이라면 그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옳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직업을 다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할 것입니다(16절)"라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때가 참 많다. 다시 말해, 자기가 돈을 버는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데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행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가 언급하는 것처럼,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것이 분명히 죄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죄라는 것인 줄 우리는 알고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의 미래를 온전히 준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8. 나오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자신의 죄된 본성을 이기는 법에 대해서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사도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사람이 스스로 죄된 본성을 이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로마서 7장에 기록해 놓았다. 그것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이다. 그런데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명의 성령의 법 가운데서 사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사도 바울이 제시해 주는 방법도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 완벽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이는 많지 않다. 왜 그런가? 그렇게 훈련을 받고 있을 때는 괜찮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 처했을 때에는 금방 옛날로 다시 되돌아가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죄된 본성 곧 육체의 정욕을 이기게 도와주는 다른 방법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육체 속에 이미 들어 있는 더러움의 실체 곧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뱀들)을 회개를 통해 내보내는 것이다(출20:5, 요일1:9). 이 방법은 정말 대단한 방법이다. 한번 내보낸 영은 내 몸에서 깨끗하게 제거되기 때문에, 만약 회개하여 음란의 영을 내보내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음란의 영에 대해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실로 놀라운 영적인 발견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했다. 자신이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마귀를 따라가고 있다면 그때에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고 말이다(약4:9). 그래야 우리 속에 있는 죄된 본성들의 실체 곧 악한 영들이 우리 속에서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우리 육체 속에 들어 있는 죄된 본성에게 승리를 거두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악한 영들을 다 내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러한 회개를 지속한다면, 우리도 어느 정도 죄된 본성에서 자유롭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죄된 본성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에서 헤매이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다. 회개만이 이 모든 것의 열쇠인 것이다. 야고보는 말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 역시 죄가 된다고 말이다. 예수님께서도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또한 그분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눅12:46).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자. 주님을 다시 만날 그 영광스러운 날을 위하여...

 

 

2022년 04월 27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령의 인도를 받는 법(10) 성도들 속에 오시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경륜적인 영이라는 것을 알라(요7:37~39)_2019-04-18(목)

https://youtu.be/ynyNycR5Mf8

 

1. 예수께서는 초막절 끝날에 서서 외쳐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이에 대하여 사도요한은 해설하기를 "생수의 강"이란 믿는 자들이 받게 될 그 영을 가리킴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영이 아직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말했던 "그 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2. 사도요한이 언급한 "그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 영이 아직 제자들에게 있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성령은 창1:2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구약시대에 여러 사사들과 선지자들과 왕들에게 역사해왔으며, 예수께서 잉태되고 출생하실 때에도 역사하셨고,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는 하늘에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요한은 아직 그 영이 제자들에게 있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영이 "경륜적인 영"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을 포함하여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시는 영은 경륜적인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고 있는 관유로서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영이 아직 제자들에게 있지 않았다고 언급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순절 이후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은 제3위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의 영이시지만 동시에 경륜적으로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그대로 포함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요14:18~19)"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도 보혜사(파라클레토스)이며(요15:26), 예수님도 보혜사(파라클레토스='대언자'로 번역됨)이신 것입니다(요일2:1). 이는 예수께서 죽고 부활승천하신 뒤에 아버지로부터 보내주실 성령의 오심이 곧 그리스도 자신의 오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오셔서 보혜사이신 성령 자신을 증거하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거하실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15:26).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영인 것입니다(요14:26). 그런데 이것이 구약시대에 이미 예표론적으로 언급되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자들에게 부어졌던 "관유"였습니다. 그럼, 관유란 무엇을 가리키며 보혜사 성령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3. "관유"란 성막에서 하나님께 봉사할 자 곧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자에게 붓는 기름을 가리킵니다(출30:22~25,30).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지명하여 그들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3가지 일들을 행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제사장에 맞는 옷을 입히고, 위임식 희생제물의 피를 뿌리고, 마지막으로 그들과 그들의 옷에 관유를 붓고 바르라고 했습니다(출29장). 그래야 거룩히 구별되어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출29:1~9,20~21). 그러므로 관유야말로 세속적인 사람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사렛회당에서 설교하시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눅4:18)"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이땅에 오시어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감당케 하는 데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도 언급하기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을 기름붓듯 하셨으매...(행10:38)"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도 대제사장의 직무를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사역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믿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도 택하신 족속이 되었으니 그때부터는 왕의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벧전2:9).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은 이제 순수한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복합적인 관유로서,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합해진 성령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 믿는 자들에게 부어지는 성령은 순수한 감람유인 성령이 아니라 감람유에다가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까지 포함된, 최고급 향품이 섞여진 "관유"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표론적으로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4. 관유 속에 들어가는 4가지 향품은 사실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몰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육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창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계피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예표합니다. 고로 관유에 첨가되는 4가지 향품은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을 받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들어있는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위협을 받으시되 대신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신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벧전2:23). 복합적인 성령을 받은 자는 고난 중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십자가로 알고 기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우겨쌈 중에서도 창포와 계피와 같은 부활의 능력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 성령을 받은 자는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그리고 충성되나 담대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성령운동을 하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자기에게서 기적적인 치유가 나타나고 예언을 하게 되면 자기가 마치 대단한 성령운동가인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아닙니다. 그것도 성령께서 얼마든지 행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그것을 행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결코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은 관유로 부어지는 성령이기에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게 도와주시고, 그분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 신자들 속에 오시는 성령은 제3위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오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롬8:9~10). 다시 말해, 성령은 구약과 신약의 경륜을 거쳐 사람 속에 들어오시고 있는 경륜적인 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 속에는 그리스도의 인생의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성령충만할수록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향기가 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그리스도의 향기(몰약,육계,창포,계피)가 배어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꾸로 타락한 옛사람의 품성이 밖으로 표출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능력과 치유와 예언이 튀어나오고 있습니까? 주의해야 합니다. 고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제대로 받으려면 그리스도의 영이자 경륜적인 성령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로부터 흘러나올 때에 그는 제대로된 성령의 인도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2019년 4월 18일(목)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신앙생활이란 남편을 바꾸는 것이다. 이전에 내 남편은 죄된 본성이었다. 하지만 그런데 죄된 본성이 내 남편으로서 나를 주관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 의 규정때문이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죄된 본성이 죽음에 넘겨졌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된 본성이 죽었기에, 죄된 본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새 남편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옛남편인 죄된 본성과 함께 살았던 사람을 "옛사람"이라고 말하고, 새남편인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을 "새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옛 남편인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지 못한 사람은 결국 음녀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두 남편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히 새 남편으로 인도를 받으려면 옛 남편을 완전히 죽음에 넘겨야 한다. 좀 더 나아가서 죄된 본성과 결혼한 우리 자신 자체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겨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옛남편인 죄된 본성을 어떻게 이기고 새 남편인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람은 어떻게 죄된 본성을 남편으로 맞이하게 되었는가?

  사람이 처음 지어질 때에는 죄된 본성이 사람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 밖에 있었다. 그것을 인격화시키면 바로 사탄마귀인데, 사탄마귀는 그때에 외부에 있었다. 그렇지만 첫사람 아담이 사탄의 화신인 뱀의 말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뱀의 종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인간의 속에는 죄된 본성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때로부터 사람은 죄된 본성을 자기 남편으로 두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된 본성을 따라 살게 되었고 그것의 열매는 죄들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지옥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된 본성에 휘말리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행동을 행한다면 그것은 죄된 본성을 따르는 것이니, 그것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주는 교사가 바로 율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율법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법으로 사용되고 말았다. 사람이 약해서 다 율법말씀을 준행하고 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가 많지 않았는데 율법이 더해지므로, 사람들에게 죄목은 더 늘어났던 것이다. 율법이 오히려 죄된 본성을 더 부추겨서 죄를 짓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3. 새 남편은 어떻게 맞이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된 본성과 살지 않도록, 죄된 본성을 처리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래서 그분은 죄를 뒤집어쓴채 십자가로 죄된 본성을 가져가시어 십자가에 못박아 처리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박힌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죄된 본성을 가진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탄생하기 이전의 사람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그날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다. 이것은 죄된 본성을 따라 사는 나, 곧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렇다. 그날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없는 예수님의 진짜의 몸이 아니라 죄된 본성을 뒤집어 쓴 우리 옛사람의 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우리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다. 다시 말해 옛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죄된 본성을 따라살던 우리(옛사람)가 죽었으니 더 이상 율법도 필요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날로 율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자 뫃든 인간은 율법으로부터 다 자유롭게 되었다. 옛남편인 죄된 본성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후 인간은 새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새 남편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그것을 죽음에 넘기지 못한 자는 옛남편도 같이 살고 새 남편인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이중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간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을 확실히 정리하지 못한 자는 죽을 때까지 이중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으로 완전히 자유로울려면 빨리 옛 남편으로부터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리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로 가져가서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그래서 새 남편을 맞이하고 그 남편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4. 죄된 본성을 좇아하는 옛사람을 죽음에 넘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는 이들은 죄된 본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왜냐하면 죄된 본성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육신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된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날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삶의 적용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때에는 자기자신에게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렇다. 적용이 중요한 것이다. 믿음으로 나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계산하는 것이다. 그렇게 간주하는 것이다(그러나 죽을 때까지 죄된 본성은 다시 살아나 언제든지 나를 지배할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둘 사이에 끼어 있다. 죄된 본성을 따라살려고 하는 옛사람과 그리스도를 새 남편을 맞이한 새 사람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를 따라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성령을 따라 걸어갈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육체의 소욕이 자기 자신을 이끌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같이 죽었다"고 늘 선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죽은 시체가 더이상 나를 주관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시체가 혈기를 부리겠으며, 음란하겠느냐고 늘 반문하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죽은 시체가 무슨 혈기를 부릴 수 있지?"라고 믿어지면서, 혈기까지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5. 나오며

  우리가 오늘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하자. 내일도 죄된 본성을 죽은 채 있을까? 아니다. 내일은 또 내일이다. 또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만 죄된 본성은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우리 육신 속에서 올라와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선언해야 한다. 계산해야 한다. 아니 간주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게 그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말이다. "나는 죽었어. 나의 옛사람은 이미 2천년전에 죽었어, 그리스도와 함께 확실히 죽은거야. 죽은 시체가 어찌를 혈기를 내겠어, 음행할 수 있겠어. 그래. 이제는 더이상 죄가 나를 주관할 수 없구나. 나는 더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로구나"를 반복해서 외쳐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실제화되어 내게 적용되는 날이 찾아올 것이다. 그날부터 그 사람은 죄된 본성으로부터 해방을 받게 될 것이다(롬6:22). 그것이야말로 죄로부터의 참된 자유를 얻게 되는 일이다. 더이상 죄가 나를 주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른 것이다.

 

2018년 4월 20일(금)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