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04) 복음전파를 위한 성령 세례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행1:4~5)_2022-06-09(목)

https://youtu.be/GlZY0S3eg0g  [혹은 https://tv.naver.com/v/27276790 ]

 

1.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실 시각이 이르자 제자들에게 분부하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원문: '아버지의 약속')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다음 구절만(행1:5) 보면 성령 세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1장과 연결되어 있는 누가복음 24장의 말씀을 보면, 그것은 바로 '성령'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눅24:47~49). 왜냐하면 그분을 예수께서 파송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24:49).

눅24:47~49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의 말씀(행1:5)의 말씀을 통해서도 위와 같은 사실은 확인된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말을 인용하면서 성령 세례가 곧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2. '아버지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어떤 성령에 관한 약속인가?

  구약 시대에도 성령께서는 여전히 활동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선지자 곧 에스겔과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보내실 성령에 대해 2가지를 계시해 주셨다. 하나는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관한 약속이고(겔36:24~28), 또 하나는 모든 육체 위에 부어주시는 성령에 관한 약속이다(욜2:28~3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성령에 관한 약속은 어떤 예언에 대한 성취인가? 그것은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둘 다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최초의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데, 그때에는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그들 위에 부어지셨으며 동시에 그들의 속에도 내주하셨기 때문이다. 그들 위에 부어졌다는 것은 120명의 성도들 위에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청각적으로는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성령께서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서 거주하게 되신다는 것은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방언'이란 거듭난 성도의 영 속에 성령께서 들어오실 때에 나타나는 반응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죽어 있던 사람의 영이 살아남으로 인하여(죽어 있던 영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됨으로) 영이 말을 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사람의 바깥에서는 부어지는 성령으로, 사람의 안에서는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아버지의 약속은 내주하시는 성령과 부어지시는 성령 모두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베드로는 부어지는 성령을 어떻게 받았다고 언급하였는가?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2가지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약속이 동시에 성취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러한 성령을 어떻게 경험하였을까?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와 고백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당시 성령받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120명의 성도들 중의 대표는 사도 베드로였다. 오순절날 오전 9시경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내려오셨다. 그러자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당시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 와 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을 흥분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은 120명의 갈릴리 촌 사람들이 유창하게 15개국의 각국 나라 방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부어지셨다는 증거가 '방언'으로 나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에 대해 베드로가 일어나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였는데, 베드로는 이러한 현상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장차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의 육체 위에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행2:17~18). 다시 말해 당시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선물을 안겨 주신 것이다. 마가 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을 사로잡으신 성령께서 방언이라는 선물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외적인 충만함과 동시에 내적인 충만함이 동시에 일어났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성령이 부어지실 때에 내적으로도 성령이 충만케 됨으로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부어지는 성령 세례를 받을 때에 반드시 어떤 표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제일 처음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그것이 곧 '방언으로 말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고넬 가정에서도 역시 방언 말함과 더불어 방언 찬양이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부어지는 성령 세례였는데 그때에는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현상을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어떤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고 갓 세례받았던 전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자신도 안수하여 성령받게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며 베드로에게 돈을 주었기 때문이다(행8:18~20).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베소에서 성령이 부어지는 사건이 또 한 번 나오는데, 그때에도 역시 방언을 말하게 되었으며, 예언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행19:6).

 

4. 성령 세례가 외적으로 부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가?

  베드로 사도는 성령이 외적으로 부어질 때에 성령께서 어떤 선물을 주신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선물'이란 '성령의 은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계시적인 신앙 고백 직후 예수님으로부터 천국 열쇠들을 받았었다(마16:19). 그래서 그는 첫 번째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사용하였다. 오순절날 자기 나라 방언소리를 듣고 달려온 15개국의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회개하였고, 무려 3,000명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천국 열쇠를 두 번째로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고넬료 집안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때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자들에게 그대로 성령이 부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주어졌는데, 고넬료 집 모든 자들에게서 방언의 은사와 방언 찬양의 은사가 나타났다(행11:44~46). 그리고 그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할 때에 그는 이렇게 말했.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다"고 했다(행11:17). 결국 방언과 방언 찬양은 성령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로 외적으로 성령세례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성령께서 안에도 내주하시면서 그 사람의 영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심으로 인하여 방언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넬료 가정에서는 방언과 방언 찬양이 나타났고,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는 방언과 예언이 나타났다(행19:6). 

 

5.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 세례를 받게 된다면 누구든지 외적인 어떤 표시가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되는 장면이 무려 4번에 걸쳐서 나온다. 그렇게 해서 생겨났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고넬료 가정 교회 그리고 사마리아 교회와 에베소 교회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들 중에서 거의 다 방언을 말했다는 것이다(사마리아 교에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 방언은 외적으로 성령 세례가 부어질 때, 내부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 의하면, 모두가 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아닐 수도 있다(고전12:30). 그러나 성령 세례가 부어지면 성령으로부터 어떤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다. 초기 교회 가운데 나타났던 '방언'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 하나인 것이다(고전12:8~10).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 세례를 주시는가? 그것은 그렇게 해서 부어지는 성령 세례를 받게 되면 담대함이 생겨서 복음을 힘있게 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를 통한 어떤 신비적인 경험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감사함으로 받게 해 주는 놀라운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는 분들도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눅24장의 예수님의 당부처럼(눅24:47~49), 먼저 회개를 한 다음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 성령 세례를 받으면 나중에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과 성령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일평생 고통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성령 세례가 복음 전파에 필수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 전에 회개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무시하면 일평생 자신의 선택한 것에 대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2022년 06월 09일(목)

정병진목사

 

 

 

오늘 우리는 이방인최초의 성령강림사건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오순절성령강림사건은 이미 예수님이 누군지를 믿고 있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거나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자들이 간절히 열흘동안 기도하다가 일어난 성령강림사건이다. 그런데 최초의 이방인이었던 고넬료 가정에 임했던 성령강림사건은 그것과는 달랐다. 그들이 베드로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기 전까지그들 누구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었거나 세례를 받은 상태에 있지 않았다. 또한 그날 그들은 사도에게서 안수를 받은 후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씀을 듣고 있는 중에 성령께서 쇄도하듯 그들 위에 내려오신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내려보내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되, 절차와 시간을 뛰어넘어 그냥 실행해버리신 것이다. 대체 고넬료와 그의 집안에 모여있는 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길래 그들은 절차도 없이 그냥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던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떤 자들이 받게 되는지 놀라운 영적 비밀을 깨닫게 될 것이다.

2019-03-10 주일낮예배
제목: 어떻게 되어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쇄도했는가?(행10:44~48)
https://youtu.be/wF4eBQaVgJ4


1. 들어가며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임하신 성령강림사건은 지구상에서 일어난 최초의 성령강림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그날에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어느날 이방인 고넬료가정에서도 성령세례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있어서 최초의 성령강림사건이었고, 이방인에게까지 차별없이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대체 이방인 고넬료는 무엇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게 되었을까? 그것도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쇄도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되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 가정에서 일어난 성령세례을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방인 가운데 최초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던 고넬료가정에 임한 성령세례사건을 통해서, 성령세례가 어떤 자들에게 신속하게 베풀어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으로 경건성을 측량했으며, 당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대체 어떠한 사람이었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경건성은 어떻게 측량되고 있었을까? 신약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것은 크게 2가지였다. 그것은 기도생활과 구제생활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가 그리고 구제를 많이 실천했는가였다. 그것은 시간과 물질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외식의 형태로 바뀌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사람에게 자랑하려고 구제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A.D.36년 당시 유대인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로 개종하여 경건생활을 바르게 실천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가이사랴에서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대의 장교, 고넬료였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사도행전의 저자는 3가지로 요약하고 있다(행10:2). 첫째는 그가 온 집안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고 소개한다. 둘째는 그가 이스라엘의 많이 백성들을 구제하고 있었다고 했다. 셋째는 그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신 천사의 방문을 받게 된다.

 

3. 고넬료의 요청을 받고 찾아간 베드로는 그때 무슨 말씀을 들려주었는가?

  고넬료가정을 찾아온 하나님의 천사는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준다. 그것은 가이사랴로부터 약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욥바"라고 하는 항구도시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그와 그의 집안이 구원얻을 말한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마침 베드로는 그 다음날 정오쯤 기도하다가 점심을 기다리는데,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된다. 일명 "보자기 환상"을 보게 된 것이다. 보자기 안에 온갖 짐승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일어나서 잡아먹으라"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안에는 부정한 짐승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세 번 있은 후 보자기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곧바로 고넬료가 보낸 일행이 도착하였고 베드로를 청하였다. 그러자 성령께서 그에게 그들을 따라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할례받은 신자들 몇 명과 함께 고넬료를 찾아간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그 집안에 모여있는 사람들 곧 고넬료와 고넬료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께서 곧 메시야이심을 증거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부활하셨는데, 베드로는 공생애 3년반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식사까지 한 증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제 온 세상의 심판자로 정하셨는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그것은 성령께서 말씀을 듣고 있는 고넬료가정의 모든 사람에게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말씀듣고 있는 고넬료 가정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실 고넬료가정에 임한 성령강림사건은 인류 역사상 세번째의 성령강림사건이었다. 첫째는 오순절날에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셨고(행2:1~4), 두번째는 빌립집사에 의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던 자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그들에게 안수할 때에 성령에 강림하셨다(행8:14~17). 그리고 세번째의 성령강림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가정에서 일어난 성령강림사건이다. 그런데 첫번째와 두번째의 성령강림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첫번째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다 알고 있는 자들이었고 또한 그들은 성령받기를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열흘동안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의 경우는 이미 빌립집사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고 세례까지 받았지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에, 사도들이 내려가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넬료의 가정을 달랐다. 그들이 그날 기도회를 열었다는 말도 없고, 예수님을 먼저 믿고 성령세례받기를 기다렸다는 말씀도 없으며,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날 처음이었다. 그날 그들은 처음으로 베드로를 통해서 처음으로 복음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성령이 쇄도하듯이 내려왔다고 헬라어 원문은 증거하고 있다(행10:44). 무엇 때문에 성령이 고넬료가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쇄도하였던 것인가? 사실 베드로는 단지 예수님의 누구시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만을 설명했을 뿐이다. 성령의 "성"이라는 글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버렸다. 그러니 그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곧 베드로를 따라왔던 할례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돌아가 그날 고넬료가정에서 있었던 성령강림사건을 보고하게 되는데, 그들이 마가다락방에서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이 내려왔다고 증언했다(행11:15~18). 그래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지 아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5. 왜 성령은 말씀듣고 있는 중에 쇄도하듯 내려오셨는가?

  어쩌면 그날 성령께서는 절차를 뛰어넘고 그 자리에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고넬료가정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영접기도도 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세례도 아직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사도 베드로로부터 안수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성령이 쏜살같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령이 그날 쇄도하듯 그들 위에 내려온 첫번째 이유는 성령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하는 영이요, 예수님의 또 다른 자기자신인데, 그날 그들은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정확히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사실 성령 자신을 증거하는 영이 아니시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영이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영이요, 예수님에게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영이다(요15:26,14:26,16:13~14). 그런데 그날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다 이야기를 했으니, 예수님의 또 다른 자기자신이신 성령께서 그날 쏜살같이 그들 위에 내려가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가 있다. 사실 이것이 그날 성령이 절차를 무시하고 쏜살같이 임한 직접적인 이유였다.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간절히 베드로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모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선 그들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았다. 사실 고넬료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는 일은 인류역사 가운데 몇 번 없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고넬료는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엄청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의 집에 소문으로 들었던 예수님의 수제자요, 오순절날 방언을 듣고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3천명을 회개시킨 베드로와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를 맞이할 때에 하나님 대하듯 모셔들였다. 그들은 그 앞에 엎드렸고 그리고 그분 앞에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했다(행10:18).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가 가득찬 상태에 있었다. 그러자 그들이 들었던 복음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고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이 이방죄인으로서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도 시인했다(행11:18). 그러니 성령께서 그들을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말씀을 기대하여 듣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영접기도도 하지 않았고,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 안수기도도 받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내려가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 것이다.

 

6. 성령이 쇄도하듯 그들 위에 내려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실 성령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성령께서 쇄도하듯 그들 위에 내려오셨다. 그렇다면 주변의 사람들은 성령께서 쇄도하듯 내려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성령께서 오신 후에 그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의 선물 때문이었다. 그들도 사도행전에 기록된 여느 성령강림사건처럼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으니 모두가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방언이 그들의 입술에서 터져나와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두 손을 들고 높이어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 것이다. 삽시간에 고넬료가정은 오순절날 마가다락방과 같이 뜨거워졌으며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찼다. 이것이 최초로 이방인 가운데 일어난 성령강림사건이다.

 

7.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사모하는 영혼을 찾고 계신다. 시편기자는 말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사모하고 당신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그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얼마나 고넬료집안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름다웠으면 성령께서 참지 못하고 쏜살같이 내려가셨겠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고 싶지 않으셨겠는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누가 성령의 은혜를 받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하는 자다. 사모하고 사모하는 영혼을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들에게 먼저 가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3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예수께서는 원래 하나님이셨지만 속죄제물이 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하지만 그 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한계를 겪으셔야 했다. 그분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셨으며, 하루 종일 사역을 하고나면 힘이들어서 쉬셔야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길은 우리가 걷는 길보다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려운 길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모든 예표와 예언을 성취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인간으로서 견뎌내야 했을 그 무게를 우리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엄청난 무게의 짐을 예수께서는 어떻게 짊어지시고 결국 구속사역까지 완성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음 때문에이었다. 예수께서도 인간인지라 인간의 한계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분도 성령을 힘입지 않으면 안 되었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쳤으니(행10:38)"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레마)를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

  사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잉태의 순간부터 성령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삶을 사셨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그분은 남자의 도움없이 처녀의 몸을 빌어 잉태되셔야 했기 때문이다(사7:14).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사장의 나이가 되자, 부모를 받들어섬기고 동생을 뒷바라지하던 사적인 일을 끝내시고 유월절양으로서 인류의 속죄제물이 되기 위한 3년반의 공생애를 사시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성령을 힘입을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기도를 통해서다. 성령께서는 오로지 기도하는 사람들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정관사 없는 성령으로서, 성령의 어떤 것=성령의 선물)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과 답변해주셨다. 예수께서는 이미 항상 하루의 일과를 새벽미명에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시고 있었다(눅1:35). 한 마디로 예수께서 사역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곧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이었던 것이다(행10:38).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셨는데 죄된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얼마나 더 성령을 힘입어야 하는 것일까?

  그럼, 우리가 성령을 힘입기 위해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그것은 성령님이 누군신지부터 알아야 한다. 우선 성령은 말 그대로 거룩한 영으로서 악한 영과는 전혀 다른 거룩하신 분이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구약에서는 이 땅에 보내어진 여호와의 영을 가리키며, 신약에서는 이 세상에 보내어진 예수의 영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령은 한 마디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영이 곧 성령이신 것이다. 그런데 이 성령은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만질 수도 없다. 어쩌면 바람과 같은 존재다. 존재는 하나 만지거나 볼 수는 없는 것 그것이 성령이시다. 그렇지만 성령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떤 현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도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경험할 때에는 그분이 지나가면서 그분이 남기고 간 흔적이나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크게 4가지의 모습과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기름같고, 물같고, 불같고, 비둘기같은 것이라고 표현이 되는 것들이다. 성령님은 기름같아서 모든 힘의 동력이 될 수 있으며, 물과 생수와 같아서 목마른 자에게 만족을 줄 수 있으며, 불같이 뜨겁게 역사하며, 비둘기처럼 온유하고 깨끗하기 그지없는 분이시다. 우리도 이러한 성령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역이 예수님처럼 성공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령께서는 보이지 않는 분이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거나 아니면 다녀간 것에 대해 잘 모를 수가 있다. 하지만 성령께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에게 오셨다는 어떤 흔적을 남기신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의 선물 즉 성령의 은사라고 말한다. 사실 모든 신앙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거나 누림으로서 자신의 신앙이 더욱 더 신앙이 견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선물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령의 선물이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겠지만 기왕이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어와계시고 때로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오셨다 가셨다는 증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더욱 안전하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어떤 믿는 사람 위에 내려오시거나 다녀가신 흔적인 성령의 선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도바울은 고전12장에서 성령께서는 총 9가지의 선물을 주신다고 기록하고 있다(고전12:8~10).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ㅁ디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이 그것이다. 물론 당시에 바울이 경험하기에는 9가지였겠지만 딱 9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 간단한 예로, 성령이 부어지면 환상을 보고나 꿈을 꾼다고 되어있는데, 9가지 은사들 중에서는 이러한 은사가 없다.

  또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면,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가질 수 있는 성령의 선물들이 여러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것에는 방언말함, 치유가 일어남, 하나님을 찬양함, 예언함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성령의 선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신 선물들 중에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방언(글로싸)이다. 첫번째로 탄생했던 예루살렘교회를 보자. 그들에게 성령이 오실 때에 나타난 증상이 방언이었고, 두번째로 사마리아교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이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전후맥락을 살펴보면 그것은 십중팔구는 방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번째로 최초의 이방인(고넬료집안)에게 성령께서 부어졌을 때에는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사가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네번째로 에베소교회에서는 방언과 예언이 나타났었다. 그렇다. 믿는 자에게는 성령께서 선물들을 주신다. 그리고 그것의 공통분모는 방언이다.

  한편 성령의 선물로서 공통분모가 방언이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이러한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는 방법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교회는 기도할 때에 성령의 선물이 부어졌고, 사마리아교회와 에베소교회는 성령받은 사도들이 가서 안수할 때에 성령의 선물이 주어졌으며, 고넬료가정에서는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의 선물이 주어졌다. 그렇다. 기도를 하든지, 성령받은 사도들이 가서 안수를 하든, 말씀을 듣고 있든지 성령께서 오실 때에는 반드시 어떤 선물을 주신다. 방언은 성령께서 방문하신 가장 중요하고도 동일한 흔적이다.

  또한 행9장에 등장하는 바울도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선물이 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때 바울은 놀라운 성령의 치유의 경험을 하였으며, 그때 방언도 했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고전14장에 보면,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4:18). 그렇다. 성령께서 오시거나 다녀가시면 반드시 흔적을 남기신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선물(은사)이다. 그리고 그것의 공통분모는 방언이다. 당신에게도 방언의 은사가 주어져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자들은 어떤 성령의 선물이 가장 좋은 것일까? 성령의 9가지 선물들은 다 좋은 은사이다. 성도들의 복음전파를 위해서 그리고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성령께서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들 중에서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방언의 은사이다. 그것은 모든 교회들마다 다 나타났던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방언의 은사를 받아, 그것을 활용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매우 유익할 것이다. 방언은 일종의 말의 은사이자 기도의 은사이므로, 방언은 더 많이 말할수록 자신의 영혼에게 유익하다(고전14:4). 다만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방언기도만 하고 있으면 답답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교회에서 함께 모였을 때에는 방언의 통역자를 세워서 남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하고 있다. 사실 방언이란 헬라어로 '글로싸'라는 단어로서, 그것이 혀의 발성이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는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 언어는이 세상의 언어처럼 자음과 모음의 일정한 결합법칙을 따라 발성되어져서 나오는 그러한 소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오직 그것을 주신 하나님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시니 이보다 더 유익한 기도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이 어떻게 해야 방언을 모두가 다 방언으로 말할 수 있을까? 마가복음 16장에서는 단지 믿는 자에 나타나는 어떤 표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막16:17~18). 그러나 사도행전에 보면, 방언을 말하려면 첫번째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다(행2:38). 그리고 두번째로는 방언의 은사받기를 사모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자는 방언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그렇게 간절히 사모함으로 예루살렘교회가 그렇게 하여 방언을 받았고, 에베소교회가 그렇게 하여 방언을 받았다. 그러므로 먼저 믿고 있었으나 성령의 선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은 방언선물받기를 사모하면 된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이것은 말의 은사이므로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라고 말로 요청할 때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이다. 기도하라. 특히 입을 열어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라. 그렇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혀를 성령하나님께 맡기게 될 때, 성령께서 자신의 혀를 붙잡아 말을 하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방언의 은사인 것이다.

  성도들이여, 그러니 이제는 방언을 사모하라. 그리고 방언을 달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라. 그렇다고 방언을 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언을 말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영이 거듭 태어났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으니 얼마나 자신에게 유익한 은사인가? 지금 내게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지에 대한 증표로서 방언으로 말함은 매우 유익한 성령의 선물이다. 성도들이여, 이제는 누구든지 방언받기를 사모하라. 그리고 큰 소리로 기도하라. 그래서 방언을 받고 방언의 은사를 활용하여 사탄의 유혹에서 이기라.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더 긴밀한 기도를 드리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복음의 전령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복음전도자가 되라. 이것이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의 은사를 모든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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