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3(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0) 초막절에 행하신 생수의 강 설교와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요7:1~5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vLNOY8Bw4  [혹은 https://tv.naver.com/v/31023344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의 구조를 보면 조금 특이한 것을 한 가지 살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1~12장까지의 표적의 책을 보면, 여기에는 '7가지 표적들'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절기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즉 2장에서 가나 혼인잔치의 첫 번째 표적이 있은 후, '유월절'이 나온다(2:13,23). 그리고 4장에도 어떤 이름 모를 명절이 나오고(요4:45), 5장에서도 역시 '유대인의 명절'(아마도 '초막절'일 것으로 추정됨)과 함께 제3표적으로서 '38년 된 중풍병자의 치유'사건이 나온다(요5:1). 그리고 6장에서 또다시 '유월절'이 나오면서(요6:4) 제4표적으로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온다. 그리고 7장에서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나오고(요7:2, 10,11, 14, 37) 여기에서 '생수의 강 설교'가 나온다. 그리고 10장에 가면 '수전절'이 나오고(요10:22), 11장에서 제7표적으로서 나사로의 회생 사건이 나오고 '유대인의 유월절'이 나온다(요12:55). 그리고 이어지는 12장에서도 유월절 사건이 계속 보도된다(요12:1,12,20). 그렇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대인의 절기와 예수님의 사건을 아주 중요하게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7장에 등장하는 '초막절' 절기는 대체 예수님의 어떤 것을 소개하기 위하여 함께 등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생수의 강 설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2. 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 차에 맞이하는 초막절에 무슨 일을 하셨는가?

  예수께서 공생애 3년 차가 되었을 때에 다시 초막절을 맞이한다. 이것은 공생애 2년 차에 맞이하는 초막절(요5:1) 이후 다시 맞이하는 초막절로서, 예수께서는 2년 차에 맞이하는 초막절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번 초막절을 맞이하셨다. 그것은 일주일간 진행되는 초막절 초반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초막절 중간쯤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되 그것도 은밀히 올라가셨다. 그리고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는데, 그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포함하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2년 차 초막절 기간에 행하셨던 38년 된 중풍병자의 치유가 결코 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요7:23~24).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도 할례를 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 그 누구도 안식일에 할례를 준 것을 불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안식일날 38년 된 중풍병자의 전신을 건강하게 한 것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명절이 끝날 무렵에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생명의 강'에 관한 설교를 하셨다. 

 

3. 예수께서는 왜 초막절 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초막절 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모든 관심이 당신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요,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언제 당신이 영광을 얻으셔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 것이다(요7:39). 그때는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때인데, 그때는 앞으로 6개월이 지난 후에 유월절에 있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굳이 6개월 전부터 유대 당국자들(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절기 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 것이다. 그런데 그의 형제들은 생각이 달랐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많은 추종자와 지지 기반을 확보하려면 일찌감치 초막절 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종용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대중 앞에 나타내라고 하였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형제들이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예수께서 과연 누구신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형님인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많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만세 전에 존재하고 있던 하나님의 아들께서 왜 이 세상에 들어오셔야 했는가? 그것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동생들은 그와 같은 뜻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4. 예수께서 초막절 중반에 비로소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본래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초막절 중반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본래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절기의 시작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 이유는 사실 분명하다. 그것은 유대 당국자들(종교 지도자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굳이 절기의 중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지난 초막절 때에 안식일인데도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은 예수께서 결코 불법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요7:21~24). 왜냐하면 비록 그날이 안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제정자이자 사람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로 예수께서는 그날 초막절에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것이 결코 불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이다. 

  둘째는 그분이 누군지를 궁금해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는 이들에게 당신이 누군지를 정확하게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초막절을 지키러 왔던 모든 이들의 최대 이슈는 과연 예수께서 이번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해서는 단지 객관적인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요7:27). 그것은 그분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며, 또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정보 뿐이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맞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결코 갈릴리 나사렛에서 출생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호적 때문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다윗의 자손으로서(삼하7:12~13),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요7:42, 미5:2).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33대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이다(마1:6~16). 문제는 예수께서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이다(요7:28). 그리고 그분은 만세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요7:29). 이는 그분의 시작이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셋째는, 초막절 기간에 꼭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막절이 '물'의 축제이면서 동시에 '불'의 축제로 열리는 것인데, 그 축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들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초막절의 끝날에 '생수의 강' 설교를 하셨다(요7:37~38). 그리고 초막절을 마치고 나서는 '세상의 빛'이라는 설교도 하셨다(요8:12).  

 

5. 예수께서 초막절에 행하신 생수의 강이라는 설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초막절 끝날 곧 큰 날에 서서 크게 이렇게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이 말씀은 누구든지 생명이 없어 영적인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은 다 예수께 나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자신의 몸을 쪼개어 주시는 생명 곧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된 자는 그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살아 있는 물의 강이 계속해서 흘러나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핵심 요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요1:4). 그분만이 하나님의 생명(조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어 그 생명을 얻어야만 생명을 얻고 영생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 생명은 오직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깨뜨려 자기 속에서 나오는 성령으로 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을 때에 반석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몸을 깨뜨려 죽음에 넘김으로써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면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듯 자신의 몸에서 성령께서 나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그 성령을 생수처럼 마시는 자는 더 이상 그의 영혼이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6. 예수께서는 생수의 강 설교를 굳이 초막절 절기의 끝날에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생수의 강 설교를 굳이 초막절 절기의 맨 끝날에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성령을 통해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의식들이 초막절에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초막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행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하나는 '물'의 이미지이고 또 하나는 '불'의 이미지인데, 이번 주에는 물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초막절 절기 내내 매일 아침이 되면,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가에 가서 황금 주전자에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의 서쪽의 굴뚝에 붓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하는 제사장들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이 일은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 그 물이 강물을 만들고 그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나게 하듯이, 오직 성전이신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흘러나와 모든 사람을 살게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의식이었다. 

  둘째로, 초막절 절기 내내 사람들이 초막에 거주하고 또한 초막절 내내 제사장들을 따라다니면서 '아르바 미님'을 흔들면서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르바 미님'이란 레위기 23:40에 나오는 초막절 규정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에 흔드는 4가지 식물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째로, '아름다운 실과'를 흔들어야 했다. 이 실과는 '에트로그'라는 것으로서 그들은 이 노란색 과일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식물들의 가지들을 가리키는데, 하나는 종려나무 가지('룰라브')이고, 또 하나는 '무성한 나뭇가지('하다스')로서 도금양(은매화나무)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시내 버들'('아라바')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4가지 식물을 흔들라고 명령하신 것일까? 그것은 율법에는 그 뜻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께서 초막절에 행하신 '생수의 강'의 설교를 들어 보면, 그것은 전부 생명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이 없으면 과일을 수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머지 3가지 나뭇가지들도 역시 물의 양에 따라 좀더 '오래 사는 나무가 있고(종려나무 가지)', 또한 '조금만 사는 나무도 있으며(도금양나무 가지)', 마지막으로 꺾자마자 바로 '금방 죽어 버리는 나무도 있다(시내버드나무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이 모든 식물들은 물이 없으면 모두가 다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들을 가리킨다. 고로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르바 미님을 흔들라고 하신 것은 나도 생명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세요"라는 의미에서 그 실과와 가지들을 흔들었던 것이다. 

 

7. 초막절 설교 후에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이 보인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러자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를 들었던 무리들은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반응하였다. 첫째는 이분은 모세가 신명기에 약속한 '바로 그 선지자'라고 하였다(요7:40). 예수께서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 땅에 오신 약속된 선지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는 이분은 '그리스도'라고 하였다(요7:41).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성경이 말씀한 바로 그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판단한 것은 예수님처럼 행하실 분은 앞으로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요7:41). 셋째, 이분은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고도 하였다(요7:42). 왜냐하면 당시에 알려진 사실을 종합해 보면,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출신의 선지자로 알고 있었을 뿐 유대 땅 베들레헴 출신의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8. 유대 당국자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본 후 어떻게 대응했는가?

  그러자 유대 당국자(종교 지도자들)은 당황하였다. 사람들이 예수께 많이 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즉시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아랫사람들(성전 경비병들)을 보냈다. 그런데 잡으러 간 그들이 그만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당국자들은 왜 예수님을 잡아오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 그러자 당국자들은 아랫사람들마저 미혹된 것이라고 단정하고는 당국자들(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 중에는 그분을 믿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향하여 "율법을 알지 못하는(안식일을 지키는 않는 예수님을 따르는) 저주받은 무리"라고 말하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자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자,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그리고 그가 행한 것을 알기도 전에 판단합니까?"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너도 갈릴리에서부터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느니라" 이들은 니고데모에게 면박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갈릴리에서도 선지자들이 나온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요나 선지자, 호세아 선지자, 나훔 선지자는 갈릴리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이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9. 나오며

  예수께서는 때를 정확히 읽고 계셨다.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말과 행동에 신중을 기하셨다. 하지만 그분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필요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유대 당국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이 누구시며 무엇하러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 그분은 초막절 중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분이 1년 전 초막절에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이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막절 기간 내내 그들에 행하는 초막절 규례(풍습)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수의 강 설교를 통해 분명히 선포하셨다. 그것은 장차 자신의 몸을 깨뜨려 나눠 주실 자신의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분은 먼저 광야의 신령한 만나이셨다(요6:35). 뿐만 아니라 그분은 광야의 신령한 반석이시기도 하다(고전10:3~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물을 찾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더러 반석을 쪼개 그 쪼개진 반석으로부터 물을 마시게 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도 역시 사람들의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것을 생명의 강 설교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예수께 나아와서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예수께서 장차 죽으시고 영광을 받으신 후에 그분이 보내 주실 성령을 통해서 이뤄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동안 초막절에 제사장들이 날마다 성전에 물붓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고, 백성들 역시 제사장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일주일 내내 4가지 식물을 흔들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이 필요하니 우리에게 생명을 달라고 말이다. 그것은 마치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성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와서 자신들을 살려 달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2022년 11월 23일(수)

정병진목사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되는 것은 결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이제 천국에 이르는 노정에 첫 발을 내디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난관들을 헤쳐나간 자만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인 스승이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3가지가 있다. 어느 것 하나 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이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다만 감사할 뿐이다. 2021-12-2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성도에게는 3대 영적 스승이 있다(딤후3:14~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kay4k2J2F8 [혹은 https://tv.naver.com/v/24313203 ]

 

1. 들어가며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영적인 스승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어린이들도 학교에 가서 열심히 배워야 하는데, 어찌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쳐서 천국에 들어가야할 사람이 그 길을 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들에 대해서 어찌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특히 성경은 그것들 중에 한 가지 영적인 스승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 세상을 살다간 수 천 명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공부하다 보면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영적인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도가 성장하여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3가지 영적 스승에 대해 공부하고자 한다. 아무쪼록 이 말씀이 우리의 일평생에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훌륭한 가르침과 나침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성도에게 꼭 필요한 3대 영적 스승은 무엇인가?

  성도에게 바른 신앙생활을 가르쳐주고 천국까지 인도해주는 영적인 스승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성도의 3대 영적 스승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첫째는 '목회자'요, 둘째는 '성경'이며, 셋째는 '성령'이시다. 사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일에 있어서나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위와같이 3가지로 소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영적인 스승들은 어느 한 가지만 가지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영적인 스승은 우리 성도들에게 다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가진 한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 중에서 목회자는 목회자 자체의 자질 문제라고 하겠지만, 성경과 성령은 그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을 읽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령이 말씀하여도 성령의 계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3. 첫 번째 스승으로서 목사인 교사로서 목회자가 갖는 특징과 주의할 점은 무엇인가?

  성도의 영적인 스승으로서 첫 번째 스승은 '목회자'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5가지 직분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것은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인 교사'다(엡4:11).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직분 중에서 아직까지 교회에 남아있는 직분은 '목사'인 '교사'라는 직분 하나 뿐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직분을 '목사'와 '교사'라고 말하지 않고, '목사와 교사'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직분에 대해 정관사가 한 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회자는 '목사와 교사'가 아니라 '목사인 교사'인 것이다. 또한 '목사'라는 직분은 당시에는 '목자(포이멘)'라는 직분이었다. 다시 말해 양떼인 성도들을 목양하는 자를 가리켜 '목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도가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목사인 교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양육받기 위해서는 오늘도 성도들을 목양하고 가르치는 직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성도가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만약 목사인 교사의 도움을 받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도 바울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가르침의 풍조에 밀려 요동할 것이라고 했다(엡4:14).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기까지 목회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여서 목회자가 선포하는 메시지 곧 선포되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영혼이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만으로 성도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도 자신에게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요, 목회자가 가진 역량이 다르고, 목회자가 가진 은사와 달란트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로 성도가 되어서 내 영혼을 맡길 수 있는 합당한 목회자를 만난다는 것을 너무나 행복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목회자는 구분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말씀의 전문가가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것에 전문가가 있는 것이다. 기왕이면 말씀과 영성 모두를 갖춘 목회자를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목회자를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을 오직 목회자가 선포하는 말씀에만 맡기려 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조금 고려해보아야 할 사항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섬기는 목회자에게만 영혼의 양식을 의지했을 경우에 자칫 편식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회자의 역량을 충분히 파악하여 자신은 어떤 것을 보충해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와 말씀으로 애쓰는 자기의 목회자를 함부로 대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다. 이는 자신의 부모가 혹시 못 배웠고 온전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분을 존경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4. 두 번째 스승으로서 성경의 특징과 주의할 것은 무엇인가?

  이제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데 필요한 두 번째 스승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성도가 온전한 자가 되고 성숙한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려면 두 번째로 '성경'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중세시대는 목회자들의 타락이 극에 달하고 있었던 때였다. 왜냐하면 성경 위에 교황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생각을 가진 목회자(신부)라고 할지라도 로마카롤릭 안에 있는 한, 로마카톨릭의 한계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16세기에 루터를 기점으로 여러 종류의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자들은 저마다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오직 한 가지 측면에서는 동일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게하고 성경을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성경이 신앙과 삶의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한 가장 확실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성경을 읽고 있는 자가 성경의 내용을 다 깨달을 수만 있다면 성경만큼 인생과 신앙의 훌륭한 스승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 성경을 읽는 독자가 그것을 다 깨달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유대인이었던 이디오디피아 내시가 절기를 지키고 이제 자기의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양피지로 된 비싼 이사야서의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성령께서 빌립집사에게 환상으로 그 내시를 보여주면서 그에게 가까이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빌립집사가 그에게 다가가니 그가 이샤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빌립이 물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그러자 내시가 대답했다. "나를 지도해주는 이가 없으니 내가 어찌 깨달을 수 있겠나이까?(행8:31)" 그렇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자들이 받아서 기록한 것이므로, 성령의 감동없이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고, 이것을 통달하고 있는 영적인 스승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깨닫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야말로 영적인 스승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것이지만 이것을 읽는 독자에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는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서 영의 양식을 보충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영적인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또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성경은 읽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주어진다는 사실이다(딤후3:15).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읽기를 사모해야 한다. 목회자가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목회자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년 내내 주일 메시지를 들었는데도 한 번도 천국과 지옥설교를 하지 않는 목회자도 상당히 있으며, 회개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 목회자도 부지기수로 많기 때문이다. 

 

5. 세 번째 스승으로서 성령의 특징과 주의할 사항은 무엇인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고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세 번째 스승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세 번째 스승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는 자들이 거듭날 때 그 사람 속에 들어오 성령님이시다(요14:16~17).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모든 성도들은 거듭날 때에 모두가 다 성령을 받는다. 성령께서 믿는 자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령을 우리 주 예수께서는 "보혜사"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는 주님 자신을 대신하여 이 땅에 보내시는 영적인 스승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령의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신앙생활은 이성적인 인간의 능력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는 일이나, 그분이 우리의 영에게 지시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이것을 잘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죄들을 자백하여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만들지 않는 한,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성령은 믿는 이들의 영 안에 들어오시고, 이성적인 감각은 우리의 육체 안에 들어있다. 그런데 악한 영들은 우리의 육체 속에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귀신들을 우리의 육체 내에서 제거하지 않는 한 영의 음성을 듣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때부터 일평생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속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만약 일평생 성도가 되었지만 자신의 죄와 그리고 조상들이 지은 죄를 자백하여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영들의 장막을 뚫고 나오는 성령의 지시와 인도를 받을 수가 없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므로 사실 목회자와 성경의 가르침고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성도가 성령의 온전한 가르침을 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지도 지금도 말씀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에 나오는 '주께 받은 기름부음'이란 성령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받을 수만 있다면 다른 무엇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준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믿기만 하면 저주에서도 해방되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도 들어가며, 믿기만 하면 천국에서 다 왕노릇을 하는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다 아니다. 믿음은 기본이고 그 다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해야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회개하는 일'이다. 이것이 없으면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받기 어렵다. 그러므로 회개없는 성령사역을 하는 분들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증상은 귀신의 가르침과 귀신이 보여준 것을 성령의 가르침과 성령이 보여준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만큼 훌륭한 교사는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성령을 가장한 귀신들의 속임수에 넘어갈 가능성도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분별기준으로서 성경말씀을 주신 것이다. 성경말씀은 귀신의 속임수가 전혀 들어있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에 만약 성경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어떤 역사가 성령의 역사인지 그리고 어떤 역사가 귀신의 역사인지를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은 항상 같이 있어야 하는 영적인 스승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도 잘 모르고 성령의 역사도 잘 모르는 초신자들은 아무래도 성숙한 목회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 것이다. 

 

6. 나오며

  이 땅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기의 영의 나이를 잘 모른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함에 따라 육체의 나이를 먹듯이 영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면서 나이를 먹게 된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30년 신앙생활을 했지만 영의 나이가 1살도 먹지 못한 채 그냥 어린아이의 상태로 남아있는 분들도 있다. 영의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그는 늘 떼쓰에 바쁘고 불평하며 근심걱정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거듭났다면, 그는 이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런데 육체가 육신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먹어야 성장하듯이, 영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영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의 양식을 그대로 먹기가 힘드니까 목회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목회자는 그 말씀을 그때그때마다 성도의 수준에 맞춰 적당하게 요리하여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는 목회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목회자의 도움 없이는 영적으로 성장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자의 역량에 있다. 과연 말씀과 성령에 장성한 분량에 도달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목회자에게만 매달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영의 양식을 보충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여 깨끗한 상태에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의 성장을 기대할 수가 없다. 천국에 들어가보라. 거기에 사는 사람 모두는 다 이 세상에서 먹었던 영의 나이를 가지고 거기에서 살아간다. 천국에 사는 사람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7~8살 정도였던 성도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는 천국에서도 그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나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가서도 왕노릇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아무나 다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2021년 12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25)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이 보여준 교회의 정의와 건축재료와 사명(1)(창28:10~22)_2021-06-18(금)

https://youtu.be/4WkcIUjpKWM  [혹은 https://tv.naver.com/v/20895446  ]

 

1. 예수님과 사도바울에 의하면 야곱의 삶은 무엇의 예표인가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바울의 성경해석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에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삶은 성령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2.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사닥다리 꿈과 돌베개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얼핏 보기에 창28장의 꿈이란 정처없이 길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을 찾아가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며 지켜 주실 것이며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을 약속해주시자 그가 하나님께 감사드린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창28장의 야곱의 이야기는 성령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세우는지를 말해주는 하나의 완전한 그림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닥다리 환상과 돌베개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한 것은 신약시대이후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는 일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마16:18, 딤전3:16). 

 

3. 창28장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창28장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장차 탄생할 교회가 어떤 것이며 또한 교회의 건축재료는 어떤 것이 사용될 것이고,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데, 그중에서 첫번째로, 창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해석은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말을 통해서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교회와 비교해볼 때 창28장은 교회의 정의에 대하여 어떤 씨앗이 등장하고 있는 것인요? 그것은 총 3가지입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17절). 왜냐햐면 야곱이 꿈을 꾸었을 때에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벧엘)"이라고 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 혹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사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어떤 집을 누구의 집이라고 말하려 했을 때에 그곳에 그 사람이 살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교회라고 불리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사람 냄새만 난다면 그곳은 더 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친목단체요, 종교 사교단체이며, 취미생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교회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그곳의 주인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 그 모임의 주인이 될 때에 그곳을 비로소 "교회"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늘의 문"이라는 것입니다(17절). 야곱은 사닥다리 환상을 통하여 자기가 잠자고 있는 바로 그곳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로 들어가게 해주는 연결통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끝에는 여호와께서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시며, 유일한 길이 되시는 사닥다리(요1:51) 곧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어떤 단체나 장소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곳에 예수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속한 사람을 전부 하늘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그 사람을 천국에 데려다주지 못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되려면 한 영혼을 천국문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교회는 치열한 영적 전쟁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12절). 왜냐하면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에는 그때도 부지런히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창28:12). 그럼, 이 천사들은 무엇하는 천사들입니까? 이 천사들은 보고천사들과 수호천사들 이며 그리고 전투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지금 성도들의 기도에 따라 움직이는 천사들로서, 이 세상의 임금이자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과의 싸우고 있는 우리 성도들을 돕기 위해 이 땅에 파송되고 있는 천사들이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가 행한 일을 보고하는 천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최초로 교회라는 단어를 언급하실 때에, 참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라면 그 교회는 반드시 "음부의 문들을 이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교회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전사들로 세워주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되려면 그 교회가 사탄마귀와 귀신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에 결국 실패하게 되면 그 교회는 음부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더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4. 창28장의 야곱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건축재료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나요?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재료를 통하여 세워지는 것인가요?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돌이요, 둘째는 기름이며, 셋째는 하늘의 이상입니다. 첫째로 교회의 건축재료는 야곱이 베고 잠자던 바로 그 "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18절). 야곱은 그날 자신이 가는 길에 하나님이 계속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기가 베고 잠자던 그 돌을 가져다가 기름을 붓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께서도 수제자 베드로에게 장차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바로 "반석(페트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그러므로 훗날 베드로가 편지를 쓸 때에도 그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 잊어버리지 않고서, 유대인들에게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었던 예수께서 결국 교회를 건축하는 모통이 돌이 되셨다고 말하면서 그분이야말로 "보배로운 산(살아있는) 돌"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벧전2:4). 둘째, 교회의 건축재료는 "기름"입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반드시 성령이 강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께서 오시기 전에도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했지만 그때 베드로를 교회라고 말씀하시는 않으셨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베드로와 함께 한 무리들 위에 내려오실 때부터 그들을 "교회"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름"은 구약시대에 "성령"을 예표하는 것이므로(출30:23~25, 행10:38, 요일2:27), 교회의 건축재료로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기름같은 성령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셋째, 교회의 건축재료는 "하늘의 이상"으로서,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날 꿈을 통하여, 하늘의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사는 죄인이 사닥다리인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요14:6, 행4:12). 왜냐하면 이같은 하늘의 이상을 본 자만이 결국 교회가 되고, 교회의 성도가 되어야 음부의 문들을 이기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럼 내가 속해있는 교회는 과연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떤 부분에서 충만한 것인가요?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의 건축자료가 무엇인지에 대한씨앗들을 우리는 창세기 28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야기가 성령하나님의 역사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천국에 못 데려다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교회"라는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귀신들과의 싸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으면서도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교회들이 이러한 개념들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고 또한 가르치지 않으면서 자신을 교회라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 교회는 어느 측면에서 교회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서 그것을 보완할 수 있도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부의 권세를 못 이기는 교회가 되고, 그러면 교회는 사람들을 천국문에 데려다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021년 06월 18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74)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35)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계3:1~6)

https://youtu.be/RJ8kW-LoajU  [혹은 https://tv.naver.com/v/16036360  ]

 

 

1. 사데 교회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했나요(계3:1)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사데교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에, "하나님의 일곱 영들과 일곱 별들을 가지고 있는 이"로 소개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일곱 영들"과 "하나님의 일곱 별들"은 무엇을 가리키나요(계2:1,4:5,1:20)

  주님께서 언급하신 "하나님의 일곱 영들"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에 성령님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계1:4)"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곱개의 등불들"을 가리킵니다(계4:5). 그런데 일곱 등불들은 일곱금촛대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일곱 등불들입니다(계1:12). 그런데 예수께서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게1:20). 그렇다면, "일곱 별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의 사자들(메시지 전달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계1:20). 일곱 교회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지도자들 곧 주의 종들을 가리킵니다. 

 

3.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였나요?(계3:1~2)

  사데교회는 A.D.95년 당시 소아시아에 위치한 일곱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계1:11, 3;1). 이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시 안에 한 개의 교회만 있는 교회가 아니라, 한 도시 안에 여러 개의 작은 공동체 교회를 가지고 있는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데"라는 지역명이 다 복수로 쓰여있기 때문입니다(계3:1,4). 그런데 이 교회는 칭찬은 하나도 없고 책망만 있는 교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 교회의 행위를 보고서,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어있는 교회라고 평가하셨습니다(계3:1). 왜냐하면 이 교회의 거의 전부의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입고 있는 흰 옷이 이미 더럽혀진 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명책에 기록된 그들의 이름들이 이제는 거의 지워져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황제숭배나 우상숭배의 유혹과 명령 앞에서 이들은 거의가 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계3:4~5). 

 

4. 왜 예수께서는 거의 죽어있다시피하는 이 교회에게 자신을 가리켜, "성령을 가지고 계시고 주의 종들을 붙들고 있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요?

  지금까지 여러 교회들의 경우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주님께서 어떤 교회에 편지를 쓰라고 하실 때에는, 주님께서 당신을 소개하는 구절에서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개는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그 교회의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사데교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에, 그분은 "성령"을 가지고 계시며, "주의 종들"을 붙잡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인가요? 그것은 교회가 아무리 타락했어도, 또한 그 교회 성도들의 생명이 거의가 다 꺼져가고 있는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에게서 결코 성령을 거두어가시지 않으시며, 또한 그들을 끝까지 붙여주시어 그들의 회개하도록 돕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회개에 있어서 핵심은 주의 종들에게 있다고 보셨기에, 주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주의 종들을 붙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한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를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붙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의 종들이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더욱 더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5. 당시 보혜사 성령께서는 구약시대와는 경륜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으며, 또한 언제 떠나실 수 있나요?(요14:16~17,엡4:30)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은 성도들이 아무리 타락해도 또한 주의 종들이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성령을 끝까지 거두어가시지 않으시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불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거듭날 때에 사람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은 영영 떠나지 않으시는가 아니면 떠나실 수도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보통 성도들은 한 번 신자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결코 그 사람을 떠나지 않으신다고 들었을 것이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소개하는 말씀 속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글성경으로만 보면, 한 번 주어진 보혜사 성령은 결코 성도들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영원토록"이라는 단어가 "에이스 톤 아이오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직역하면, "그 세대까지" 혹은 "그 시대동안" 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성령께서는 성도들이 살고 있는 그 시기동안에는 성도들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 시기는 언제까지일까요? 그것은 엡4:30에 따르면, 우리의 몸이 구속받아 다음의 세계로 들어갈 때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 날에 성령께서는 떠나가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부인한다거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성령께서 떠나지 않으시나, 그가 죽는 날에는 성령께서 그를 떠나실 수도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는 날에도 성령께서 계속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좋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날에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도 지워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에 쉽게 속아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믿을 때에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는 말에 속아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만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음을 확고히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할 때에 용서받게 되기 때문입니다(요일1:9). 그러므로 우리가 죽는 날에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려면, 어떤 고난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하며, 지은 죄가 있다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0년 10월 01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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