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5(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왜 한 번 얻은 영생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는가?(요10:26~2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JHlTrIszdMs  [혹은 https://tv.naver.com/v/29459531 ]

 

1. 들어가며

  어떤 분들은 한 번 영생을 얻었으면 그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주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분들에게 속한다. 이는 구원에 있어서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구원의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은 백 번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는 일거수 일투족을 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해두신 후에 인간이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딤전2:4,벧후3:9).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도록 그에게 강제로 믿음을 쑤셔 집어넣거나 아니면 주리를 트시는 분이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떨어졌다면, 하나님은 결코 심판 때에 그를 심판하실 수 없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뜻대로 다 해놓고 우리더러 왜 믿지 않았느냐고 다그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믿어서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 할지라도 그 이름이 지워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을 통해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잃어버릴 수가 있다는 것이 성경말씀이다(계3:5).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한 번 얻은 영생이라도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리고 한 번 얻었던 영생을 우리가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간직하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영생'과 '생명'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어떤 분은 '영생'과 '생명'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생을 얻는 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의 줄임말로서, 생명과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영생'은 어떤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언급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영생'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성경에서는 '영생'을 '아이오니오스 조에(ionios zoe)'라고 말한다. 이 말은 보통 우리말처럼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번역은 그 말이 의역이지 정확히 번역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아이오니오스 조에'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시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식어 '아이오니오스'는 명사 '아이온'의 형용사형으로서, '아이온'은 '시대(age)' 혹은 '세대'(generation) 혹은 '세상'(world)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오니오스 조에'는 '시대의 생명'이라고 번역해야 가장 적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생명 중에서 어느 시대에 필요한 생명이 가리키는 특별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생명'이란 무엇이며 '생명'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생명(=조에)'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조에'라는 생명은 육체의 생명을 가리키지 않는다. 육체의 생명은 헬라어로 '비오스'라고 한다. 육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명은 '비오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 그런데 '조에'라는 생명은 영혼에게 필요한 생명으로서, 이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이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도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그것을 취할 수 있도록 에덴동산에 과일의 형태로 놓아두셨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불순종하게 되어 에덴동산에서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 그래서 생명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생명으로 먹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그렇다.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취하면 사람을 영생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자기자신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요5:26). 그런데 예수께서는 살아있는 인격체이므로 그분을 우리가 직접 먹을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죽음의 과정을 통하여 그 생명을 해방시켰고 그 생명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바람처럼 호흡처럼 주시기 위해 성령이 되셨다(고전15:45, 고후3:17). 이제는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그 사람 속에 생명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 이 땅에 들어오셨으며, 먼저 인간이 지은 죄를 속량하시기위해 피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해방하여 누구든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요5:2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는 죽고 부활하신 후에 생명주는 영 곧 성령이 되셨다고 언급한 바 있다(고전15:45).

 

4. '영생'이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영생이란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영생'이란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시대의 생명'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은 '영생'이라고 하니까, 영원히 사는 생명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불신자들도 죽은 후에 지옥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이라는 단어가 시간과 장소에 관련하여 어떤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영생'이란 다음 시대에 우리가 필요한 생명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영생은 이 땅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영생은 우리가 죽고 난 후 다음 시대에 과연 어디서 살 것인가를 결정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이 다음 시대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한 자들은 내세(오고 있는 시대)에서 반드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8:29~30). 왜냐하면 영생은 다음 시대에 필요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고로 영생이란 한편으로는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장애인으로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18:8~9). 왜냐하면 영생이란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우리의 영혼이 들어가는 다음 시대의 장소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그때 대신하여 들어오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우리는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5. 영생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인가?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을 주시려 오셨다는 것을 알고 그분의 피가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에, 비로소 생명을 얻어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믿음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5:24).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얻은 영생을 과연 우리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가? 어떤 분은 한 번 얻은 영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에게 들어오시는 보혜사 성령은 영원토록 믿는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말씀은 요한복음 14:16~17에 나온다. 우선 그 말씀을 우리말 성경으로 그대로 옮겨보자.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렇다. 예수께서는 부활승천하신 후에 아버지께 구하여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또한 우리 속에 계시 것이라고 하셨다. 이때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으로만 성경을 본 사람은 한 번 믿는 자들에게 들어오신 성령은 결코 우리를 영원토록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우리는 2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는 해석에 조금 어려움이 있으면 헬라어원문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살펴보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의 주장이 항상 옳은 것인지를 다른 성경본문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럼, 첫째로, 헬라어원문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요14:16의 헬라어원문은 이렇다. "그리고 나도 역시 아버지께 장차 요청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다른 보혜사를 장차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과 함께 '그 시대까지' 계속 있게 하기 위해서"(요14:16 헬라어직역). 그렇다. 먼저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까지'로 함께 있기 위해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여기서 그 시대는 '다음 시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영원토록'이라고 번역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와 영원토록(그 시대까지) 함께 있게 하기 위하여 보혜사를 보내주신다는 문장이 바로 '가정법'문장이기 때문이다. '가정법'이란 실제가 아닌 것을 추측하거나 있음직한 가능성이나 가상을 나타내어 미래적인 의미를 띠는 문장법(mood)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한 번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신 성령은 반드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가정법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내주시는데 이 성령을 보내주시는 이유는 성령이 다음 시대에서도 계속해서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 위함인 것은 분명히 맞다. 하지만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다음 시대까지 함께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로, 다른 성경본문에서는 한 번 들어오신 성령께서 떠나시지 않고 계속해서 계신다고 증거하고 있는가? 한 개의 구절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우선 에베소서 4:30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성령을 계속해서 근심하게(슬퍼하게) 하지 말고 있어라. 그분 안에서 너희가 구원(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렇다. 성령께서는 구원의 날까지 곧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날까지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해주신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다음은 우리가 성령을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다. 만약 자기 안에 들어오신 성령을 계속해서 근심하게 했다면 그는 구속의 날에 성령이 떠나가실 수도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보혜사는 우리와 이 시대 뿐만 아니라 다음 시대까지 계속해서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신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을 계속해서 근심하게 한다면, 성령께서 이 다음 시대까지 계속해서 동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이 본문의 취지인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9에서 "너희는 성령을 계속해서 소멸하지(끄지) 말고 있어라"고도 하였다. 이는 어떤 믿는 이는 자기 속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을 자꾸 꺼버린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어떤 지시를 그에게 내리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성령의 권면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그가 문득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때에도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어주시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고 심판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날 그분은 긍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때도 성령께서 우리를 어여삐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까지 몽땅 강제로 끌고 천국에 들어가시는 분이 아니시다. 더욱이 한 번 영생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절대 변동이 없는 것이라면, 한 번 기록된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계3:5). 늘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성령을 소멸시켰던 자들은 그날에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6. 왜 예수께서는 한 번 얻은 영생이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한 번 얻은 영생이라도 이렇듯 영생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것은 적어도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는 믿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구원받는 그날까지 늘 깨어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마24:42).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다가 안일한 생각 혹은 방종 가운데 있다가 그만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그만 그날 성령이 떠나가심으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리 경성하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는 그날까지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죽음의 그 순간까지 어느 누구도 구원이 완전히 보장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 깨어있을 때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맡겨주신 일에 충성함으로서, 이 땅에서 살동안에 천국에서 받을 기업을 잘 준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마24:45~47). 늘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있으면 자신이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에 주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에 순종하고, 맡겨주신 일에 충성함으로 하늘에서 받을 기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주님은 영생은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갈5:16). 우리가 영생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 성령이 우리에게서 떠나감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깨우쳐주심에 늘 민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의 그날에 버림을 받아 슬피 울며 자신에 대해 이빨을 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그날부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회개하라고 권면하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이끄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슬퍼하게 하거나 그분의 활동을 소멸시켜 버리지 말라. 그러면 그는 결국 멸망 곧 죽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사망 안으로 들어갈 것이기 말이다. 

 

7. 나오며

  고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보전할 수 있도록 2가지 방법을 제시해 주셨다(요10:27~28). 그것은 첫째, 주님의 음성을 계속 들으라고 하셨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는 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섬겨주며,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라. 둘째, 주님의 뒤를 계속해서 따라오라고 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던 일을 우리도 뒤따라서 행하라는 뜻이다. 가난하고 병든 자를 심방하고 그들을 고쳐주며 천국복음을 전파하라(마9:23). 이런 자가 다음 시대에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죽는 날 성령께서 떠나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는 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게 될 있으며, 하늘에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장만해둔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얻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그 영생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받은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고 보전할 수 있도록 날마다 깨어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하여 하늘의 기업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다음 시대에는 반드시 영생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9월 25일(주일)

정병진목사

 

요한복음에서 서문(1:1~18)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선언하는 일종의 선포문과도 같다. 서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시는 하나님으로 나온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요,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께서 죄많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땅에 자기자신의 처소를 얻으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성막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속죄의 은총과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다. 이 놀라운 신비가 오늘 말씀에 가득하다.

 

2022-06-2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6)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위대한 선언(02)(요1:1~18)_2022-06-29(수)

https://youtu.be/kn22nybEroA   [혹은 https://tv.naver.com/v/27973893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의 서문(요1:1~18)에는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까? 학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한복음의 서문은 크게 2가지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나는 예수께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분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서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짧게 줄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기록해야만 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장차 요한복음을 읽게 될 독자들이 어떤 영향으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2가지였는데, 하나는 유대인에 의한 핍박이었고 또 하나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한 미혹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총체적인 답변을 서문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요한복음 서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지난 주에는 요한복음 1:1~3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로고스)'의 선재성과 영원성 그리고 창조성을 살펴보았고,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한 본성으로서 '생명'과 '빛'에 대해 다뤄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분의 성육신이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는 축복으로서 '은혜'와 '진리(실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2가지 본성과 2가지 혜택은 요한복음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오늘도 제공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2.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에서 '말씀(로고스)'에 대해서 무엇을 선언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의 첫 문장에서 의도적으로 '말씀(로고스)'에 대한 선언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한다. 이는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선포를 통해 유대인들의 갖은 핍박에 못 이겨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자들에게 대하여 올바른 신앙관을 제시하기 위함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자신이 이름을 계시한 바로 그분 뿐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 믿는 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라는 말씀(요10:30)과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친아버지로 언급한 것(요5:18)에 대해서 예수께서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어찌 하나님이 두 분, 혹은 세 분이실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였고 또한 어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수 있겠느냐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던 이방지역에 사는 유대인 성도들은 이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출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선재하신 말씀으로 하나님과 신성을 공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려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서문의 첫 부분(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 말씀(로고스)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이신 이유를 1~3절의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말했다. 첫째, 태초에(시작 안에) 말씀이 있어 왔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혹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으로 있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1~2절). 즉 처음부터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모든 것들(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으며, 말씀이 없이는 하나도 존재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3절). 고로 말씀은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의 통로요 대리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사도 요한은 말씀이 곧 아버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다. 말씀이 아버지와는 구별되지만 하나님으로서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이렇다.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또한 이 말씀은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통로였는데, 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기 전에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다른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사도 요한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는 아들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직 육신을 입지 않았던 그분을 누구냐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그분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곧 홀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18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교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야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예수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는 어떻게 계셨는가? 그분은 말씀으로 계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계신 것이다. 

 

4. 왜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굳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왜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굳이 '로고스'('말씀')라고 표현하였던 것인가? 사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인격체로 나타나기 이전에 그분은 말씀으로 있었다. 말씀이 인격을 입은 후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비로소 아들이라는 존재로 탄생하셨다. 이러한 말씀의 성육신은 사실 서양 철학에서는 결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서양 철학에서도 우주 만물의 창조의 원리를 말한다. 그것을 그들도 '로고스(말씀)'라고 말한다. 하지만 말씀이 성육신하심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씀'이라는 개념을 서양 철학에서 빌려왔다는 표현은 사실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 요한은 선재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굳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요한이 유대인들을 생각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창1:3). 특히 시편 기자는 하늘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지은 바 되었으며, 그것들의 만상(모든 군대=천사들)은 그분의 입 기운(루아흐=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잠언 8장을 통하여, 지혜라는 것이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지셨으며, 만세 전과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지혜가 세움을 입었고, 이미 났으며 또한 지혜가 하나님의 곁에서 창조자(장인)가 되어 매일 그분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잠8:22~31)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복음의 서문에 나오는 말씀(로고스)이 곧 창조 사역을 행하셨던 하나님과 같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표현과 유사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만물의 창조의 대리인으로서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5.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 2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말씀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가? 사도 요한은 말씀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고 언급하였으며, 이 생명이 세상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사람들에게 '빛'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했다(4~5절). 즉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은 곧 '생명'이요 '빛'인 것이다. 

  우선,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생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조에'라는 것인데, 이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이라는 점에서 아버지만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가리키며(요5:26),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점에서 계속해서 지속되는 생명을 가리키고(요3:16), 이 생명은 '부활 생명'이라는 점에서 사망이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을 가리킨다(요11:25~26).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아들 되심으로 인하여 이 생명을 그에게 주어 있게 하셨다(요5:26).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는 본인이 생명 주는 영이 되심으로(고전15:45),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그 생명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심으로 사람들도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분배됨으로 인하여 사람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창조된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요14:6).

  이어 사도 요한은 이 생명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는 '빛'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때 빛으로 나타난 분을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참고로 이때 물로 나타나는 분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에 들어오는 그 빛을 가리켜 '참 빛'이라고 했다(요1:9). 그것도 불충분한 빛이 아니라 완전한 빛, 참 빛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참'(9절)이라는 헬라어 단어('알레디노스')는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알레테스')으로서의 참 빛이 아니라, 뭔가 부족한 것, 불완전한 것, 부분적인 것에 대한 완전함으로서 참을 의미하는 단어('알레디노스')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그 빛의 관계를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어 왔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 있어 왔다. 그리고 그 빛이 어둠 안에 비추고 있다. 그러나 그 어둠은 그것을 이해하지(따라잡지, 이겨보지) 못하였다(요1:4~5). 그리고 "참 빛이 있어 왔다. 이런 그 빛은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면서 지금도 각 사람을 비추고 있다"(요1:9)고 했다. 그렇다. 보이지 않는 생명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빛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어둠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둠'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이 땅의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빛으로 나아와서 빛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므로 빛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두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어찌하든지 빛으로 나아와야 한다(요3:19~21).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빛은 예수님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그 빛을 믿고 그 빛을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빛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어둠 가운데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요12:35~3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요8:12).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할 것이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어둠은 빛과 결코 서로 공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둠은 빛이 오면 그냥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둠은 결코 빛을 이겨보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또한 요한은 생명이 물로도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성령'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생수(생명의 물)"라는 표현이나(요4:14), '생수의 강'이라는 표현(요7:38)이 곧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과거 창세기 강해(172강)를 통해서도 살펴보았지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물들 안에 '빛'과 '물'은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빛도 결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지구 안으로 들어온 것이요, 물도 역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서 지구 안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것 가운데 창조되지 아니한 2가지는 '빛'과 '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긴 했어도 그분들을 결코 피조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6. 세례 요한은 누구이며 어떤 목적으로 이 땅에 파송받아 온 것인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채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는 바로 그 선지자다(6절). 그는 빛이 아니며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였다(7~8절). 그럼, 그가 이 땅에 파송받아 온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7절). 그래서 그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서 외쳤다. "이 분은 내가 말했던 바로 그분입니다. 이 분은 비록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이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보다 먼저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15절)" 그랬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는 예수님보다 앞선 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7.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런데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참 빛으로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속한 땅인 유대 땅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셨다. 하지만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더 이상 혈통과 육정과 사람(남자)의 뜻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자식들'이란 출생으로 통한 자식을 가리키는 단어 '테크논(children)'이 쓰이고 있다. 참고로 이 단어는 출생을 통한 자녀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아서 자식 삼는 단어로서 '휘오스(son)'가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서 하나님의 자식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자들이었어도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배척을 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식들을 얻는 방법으로 더 이상 혈통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셨다. 또한 육체의 뜻 곧 남여의 결합으로 자식들을 얻지도 않을 것이며, 사람(남자)의 씨를 통해서도 자식을 얻지 않겠다고 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식만을 얻겠다고 하신 것이다(12~13절).

 

8. 이천 년 전에 왜 말씀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는가?

  드디어 2천 년 전에 하나님으로 계셨던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이 땅에 생겼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분이 이 땅에 장막을 치셨다고 했다(14절). 여기서 '장막(성막)'이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를 가리킨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 자신의 거주처로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요14:9). 그리고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보내셨던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요12:44). 예수 안에 아버지가 거하시게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있는 독생자와 같은 영광을 나타내게 되신 것이다(14절).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그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2가지 은총이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육신하신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인류는 이제 새롭고 놀라운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실제)가 인간에게 제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14~18절). 여기서 '은혜'('카리스')라는 말은 값없이 제공되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진리'('알레데이아')는 거짓에 대하여 참이라는 뜻과 허상과 가짜에 대해서 진짜라는 의미의 '실제'라는 뜻, 둘 다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았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들에게 제공된다(17절).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공의'와 '모형'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공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은혜와 진리는 값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되었으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실제로 보게 해 주는 실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태초 이래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보고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18절).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이다(18절).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만 갖고 계신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영원히 볼 수 없겠지만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신 예수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직접 가까이 나아가서 그분을 뵙고 만나고 만져 볼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아니었다면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존재의 은총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분께 감사드리자. 그분만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까...

 

9. 나오며

  예수님은 누구시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가? 첫째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기 전에는 말씀으로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하여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구약 시대에 예수님은 빛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이 세상에 들어올 때 그것은 빛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온전하고 완전한 참 빛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그 빛으로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해서 빛으로 나아오지 않았으며,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 빛을 영접하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어도 된다. 부모가 사랑해서 혹은 남자의 씨가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어서 사람이 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주님은 2가지 은총을 쉼없이 부어 주신다. 하나는 은혜와 또 하나는 진리이자 실제다. 율법은 공의와 모형으로 제공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이자 실제로 제공된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문의 핵심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모든 흐름을 이끌어 간다. 

 

2022년 06월 29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6)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삼상24:1~22)_2021-12-27(월)

https://youtu.be/s8eVEkVVBVY  [혹은 https://tv.naver.com/v/24313395 ]

 

1. 어느날 동굴 안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울에게 쫓겨 동굴 안쪽에 숨어 있을 때였다.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그 굴 약간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용변을 보기 위해 그는 자신의 왕복 겉옷을 한쪽에 벗어놓고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굴 안 쪽에서는 사울을 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윗과 다윗과 함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넘긴다고 하셨는데 지금이 그때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않았다. 벗어둔 겉옷자락을 살짝 베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인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가 됨이니라(삼상24:6)" 그리고는 다윗은 자기의 사람들에게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용변을 마친 사울은 왕복을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용변을 보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른 채 말이다. 

 

2. 다윗은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는가?

  다윗은 선으로 악을 상대하였다. 사울은 자기를 그렇게 악하게 대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그렇게 대하지 아니했다. 왜 그랬을까? 다윗이 그렇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다윗은 사울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최초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자로서 아직도 하나님의 권위가 그에게 있다는 것을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엘리 제사장이 비록 타락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권위가 그에게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울이 죽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권위가 그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그를 해하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여겼다. 둘째,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심판하는 심판주가 아니며 오직 그를 심판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 뿐이심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굴에서 나온 다윗은 사울왕에게 이렇게 외치며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습니다(삼상24:12)". 그랬다. 그는 자신이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자인 것이지 하나님처럼 사람을 심판하시는 이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셋째, 다윗 자신은 사울의 왕직을 탐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사울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반대로 자신의 왕직을 내려놓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다윗이 자신의 왕직을 넘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동굴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살려준 다윗을 통하여 비로소 그는 다윗이 왕직이 탐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3. 이때 사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는가?

  그런데 이때였다. 다윗이 하는 모든 말을 들은 사울은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첫째,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다윗은 죽어야 마땅한 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다윗이 도망치는 것에 협조하는 자는 공범자로까지 취급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다윗이 자기의 원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의 선대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확 돌아선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사울은 다윗더러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라고 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잘못하고 있었음을 시인하였다. 둘째, 소리 높여 울면서 자신이 이제까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었음을 고백하였다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다윗의 마음을 몰라보았던 것이 애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다윗이 자신을 선대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그러자 그는 다윗을 축복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사울은 다윗이 반드시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도 알고 있다고 언급하였고,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의 손에 의해 견고히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부탁하기를 부디 다윗이 왕이 되더라도 자기의 이름과 자신의 후손을 멸절시키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이고 판단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사울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사울을 선대한 것으로 인하여 사울의 마음이 바뀌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선으로 악을 이긴다(갚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때 사울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다윗을 향하여 자신의 악하고 다윗은 의롭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악하게 대하였지만 너는 나를 선으로 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24:17)". 이는 사울은 다윗이 베푼 선을 악한 것으로 갚으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악한 행위를 선으로 대하려 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과 '악'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선'과 '악'은 한 마디로 '용서'와 '미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볼 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과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선'이란 어찌하든지 상대방을 용서해주고 상대방을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악'은 어찌하든지 상대방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다윗은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를 살펴볼 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서 살리려는 사람이면 선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며, 그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죽이려 한다면 그가 바로 악한 사람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5.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자기의 원수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9~21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원수를 대하는 방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그렇다. 원수는 우리가 갚아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러면 다시 원수를 낳는 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맡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자기의 원수가 주리고 있을 때에 먹여주고, 목말라 하고 있을 때에 그로 하여금 마시게 하는 자가 되는 일이다(롬12:20).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악에게 지지 않는 것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2021년 12월 27일(월)

정병진목사

 

생명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요10:10). 그렇다면 그분은 어떻게 보이지 않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었는가? 그것은 어떻게 우리 안에 분배되고 있는가? 이미 우리에게 분배된 생명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지키고 보존할 수 있는가? 누구의 말대로 한 번 받은 영생은 주의 은혜로 영원히 보존되기에 안전한 것인가? 참으로 놀라운 생명의 신비들이다. 우리도 이 땅에 살 때에 이 생명을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런 자만 생명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2020-08-09(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생명(요일5:11~12)
https://youtu.be/t7tNRaleZ40 [혹은 https://tv.naver.com/v/15193817 ]

 

 

1. 들어가며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사실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속죄가 필요하며, 또 하나는 생명의 분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죄하여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기에 그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속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일들을 수행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속죄사역을 행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생명을 나눠주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려고 했던 "생명"이란 대체 어떤 것을 뜻하는가? 그리고 이 생명을 사람들이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이 생명을 받은 자가 이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하여 다음의 세상에서도 누리려면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이러한 생명을 주시려고 한 것인가? 생명은 물건인가 아니면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가? 생명을 사실 볼 수가 없다. 어느 누구도 생명이 실체에 대해서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진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생명'과 '목숨'은 같은 개념인가?

  생명이나 목숨은 서로 비슷한 단어인 것 같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단어다. 먼저 헬라어로 볼 때, '생명'은 '조에'라는 단어이고, '목숨'이라는 것은 '프쉬케'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 개역개정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심지어 목숨(프쉬케)를 생명(조에)라고 번역함으로써, 둘을 서로 혼돈하게 만들어 놓은 것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는 요12:25이다. "자기의 생명(프쉬케)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프쉬케)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5)" 이 문장에 나오는 '생명'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쉬케(목숨)'이란 단어다. 예수께서는 사람은 자기의 목숨(혼)을 사랑해서는 안 되며, 이 세상에서 어찌하든지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자가 될 때에 그것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프쉬케'란 타락한 옛사람의 목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형제들은 죽기까지 자신의 목숨(프쉬케)를 아끼지 아니함으로 사탄마귀를 이긴 것이라고 사도요한은 증언하고 있다(계12:11).

 

2)예수께서는 왜 인류에게 '생명'을 주셔야만 했는가?

  요10:10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조에)"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생명이 없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눠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에, 생명은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은 "독생자"라고 불리었다. 왜냐하면 홀로 생명을 가진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고 계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오직 아들에게만 주었고(요5:26), 예수께서 그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 이유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생명을 나눠주시기 위함이었다(요10:10).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했던 것은 "목숨"이 아니라 "생명"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나눠주시려고 우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놓으셨다(막10:45). 예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공급하시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생명을 인류에게 공급하셨는가? 그것은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통해서 공급하는 것이었다(롬8:1,고전15:45). 생명주는 영이 되어 사람들 속에 바람처럼 호흡처럼 들어가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생명을 소유하신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심으로 생명을 공급하고 계신다. 고로 성령을 받은 자는 그분과 동시에 생명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3)생명의 속성이 영원하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생명에 대해 가장 많은 말씀을 기록한 사도는 요한이다. 그는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통하여 생명에 대한 많은 말씀들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생명'이라는 단어와 '영생(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를 상호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왜냐하면 '생명'이라는 속성이 영원하다는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떤 이들은 생명의 속성이 영원하다는 것을 사람이 영생을 받으면 영원무궁토록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크게 왜곡된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려는 생명의 속성이 "영원하다"는 것을, 사람이 받은 생명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가르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바로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여기서 "영원하다(아이오니오스)"는 단어는 생명은 결코 파괴될 수도 없고 없어질 수도 없고 계속해서 보존되는 성질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영생을 한 번 소유하게 되었다면, 아무도 그에게서 생명을 파괴하거나 없애거나 할 수가 없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4)생명이 "영원하다"는 것과 "영원히" 산다는 것을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요10:28의 말씀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많은 분들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이 한 번 영생을 받으면 영원토록 잃어버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분은 지금 2가지를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파괴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가 얻는가를 잘못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그것들)"에 준다고 하셨다. 그들(그것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 앞구절을 보면 "양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했는가? 그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셨다(요10:27). 둘째, "영원히"라는 단어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 "영원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톤 아이오나"다. 이것을 직역하면, "그 시대까지(till the age)"이다. 왜냐하면 '아이오나'의 원형은 "아이온"인데, '아이온'은 '시대(age), 세대(generation), 세상(world)'으로 번역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톤'은 정관사(the)이며, "에이스"는 영어로는 "into(~안으로)"라는 뜻으로서, 이것이 시간명사와 결합되면, "~하는 동안, ~할 때까지"라는 뜻으로 바뀐다. 고로, "에이스 톤 아이오나"는 "그 시대까지, 그 세대까지, 그 세상의 때까지"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번역자들은 "에이스 톤 아이오나"를 "영원무궁토록, 세세토록"이라는 의미로서 "forever"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헬라어로 "영원무궁토록" 혹은 "세세토록"이라는 단어는 "에이스 톤 아이오나"가 아니다. 그것은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이라는 문구로서(계4:10), 영어로 표현하자면, "till the ages of the ages"라는 것이다. 이는 "그 시대들의 시대들까지"라는  뜻이다. 고로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이야말로, "영원무궁토록, 세세토록"이라는 뜻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요10:28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 "내가 그것들(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혹은 주고 있다). 그것들은 결코 스스로 그 시대까지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것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한 번 주님께서 양들에게 주신 생명은 영원한 생명으로서 결코 파괴할 수 없고 없앨 수도 없는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그 생명이 주어진 시기는 "그 시대가 올 때까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그 생명을 잘 보존해야 한다. 만약 "에이스 톤 아이오나(그 시대까지)"를 "영원무궁토록, 세세토록"이라는 의미였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에서 제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신 경우가 있는데, 그 의미 역시 "그 시대까지"라는 의미였던 것이지, 결코 "세세토록"이라는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 요11:25~26의 말씀을 예로 보자."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에이스 톤 아이오나=그 시대까지)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만약 "에이스 톤 아이오나"가 "영원무궁토록"이라는 뜻으로 쓰였다면, 예수님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주님에게 우리에게 주시려는 생명은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고 죽일 수도 없는 영원한 생명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생명이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는 기간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까지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지만 그것을 받아서 잘 보존하고 있다가 다음 세상에서도 영생을 누릴 것인지는 우리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5)생명은 사망과 각각 어떻께 다른가? 

  생명은 예수 안에 있다고 하였다(요일5:11).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요(요14:6), 그분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11:25). 그런데 사망은 사탄마귀가 가지고 있는 세력이다.  왜냐하면 사탄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기 때문이다(히2:14).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가지만해도, 이 세상에는 사망을 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히2:15). 사실 이 세상에는 생명이 없었고 사람들은 목숨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대속제물로 내주셨다. 그리하여 사망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리고 죄없는 예수님을 불법적으로 죽인 사탄마귀를 심판하여, 음부에 가두어버리셨다. 앞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 잠깐 내놓으실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불법을 저지른 사탄마귀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빼았기고 말았다. 그러므로 지금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주님에게 주어져 있다(계1:17~18).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오지를 않았다(요5:40). 그런데 제자들이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왔고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있는 생명을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나눠주신 것이다. 

 

6)생명이란 무엇인가?

  고로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정의할 수 있다. 곧 "생명"이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더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있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오직 예수님으로 통하여 인류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영원히 파괴될 수 없고 없앨 수도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3.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과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는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과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둘 다를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과 영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얻는다고 말씀하셨다(요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어 그의 독생자를 주셨는데, 그를 믿고 있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으며 영생을 계속해서 얻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는 자기 속에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요일5:13). 그런데 더불어 예수께서는 사람이 영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마19:17).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마18:8). 고로,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과 영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영생을 얻는 곳은 이 세상에서부터이지만, 영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다음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생을 얻는 것은 우리 속으로 영생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영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영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얻은 영생은 우리 안에 하나의 원소처럼 들어왔지만, 우리가 영생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우리 자신이 영생 안에 하나의 원소처럼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천국이 바로 생명의 나라요 영생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더이상 사망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계21:4).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셔서 사망과 음부를 불못에 던져버리고,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인 마귀도 불못에 던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생명이 가장 풍성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요, 오직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계시며, 생명을 나눠주고 계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생명과 관련이 있다. 그곳에 있는 물은 "생명수"이며, 그곳에 있는 강도 "생명강"이다. 그리고 그생명강의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으며,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생명책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망을 이기고 자신의 목숨을 주님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다. 

 

4. 받은 영생을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믿음으로 받은 영생을 지켜서 다음 세상에서까지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받은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럼, 영생은 대체 언제 잃어버릴 수도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죽는 그 날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시는 이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이다(고전15:45). 그롷다면 보혜사 성령께서는 언제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구속의 날까지"다(엡4:30). 고로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사도요한은 요일5:11~12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있지만 그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다고 정확히 말했다. 인격체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생이 있는 것인데, 영생은 하나의 물건처럼 자기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는 날 성령께서 떠나가셔서 소멸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안에 영생을 가지고 들어오신 예수님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날에 성령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볼 지도 모른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그렇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신지 아니 계신지를 잘 모르는 자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아니 계실 수도 있다. 아니 이미 예수님을 모신 자였으나 실격자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령께서는 우리가 구속받는 그날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에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가실 수가 있다. 그러면 하늘에 기록된 생명의 책에서 우리의 이름도 지워질 것이다(계3:5). 고로 우리는 항상 내 안에 들어와 계시는 예수님 곧 우리를 성전삼고 거하시는 성령을 주의해야 한다. 죄를 짓고도 그분을 계속해서 근심시켜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영생하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죄를 지었으면 즉시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내야 한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내 목숨을 앗아가려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 목숨도 내어놓을 수가 있어야 결국 생명을 지켜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이 세상은 사실 사망과 생명이 공존하고 있는 장소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있을 때에만 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생명을 얻지 못한 채, 그냥 죽게 된다면 우리는 영영 이 생명을 얻을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 살아있을 때에 이 생명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생명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생명은 사실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도록 열려져 있다. 그가 믿는다면 그때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께서 속죄를 위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하지만 그 다음이 중요하다. 생명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이 생명을 지키고 보존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한 번 이 생명을 받게 되면 영원히 잃어버지 않을 것이라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성령께서 이 생명을 책임지는 날은 구속의 날까지이기 때문이다(엡4:30).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이 우리 안에서 약화되지 않게금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생명이 우리 안에서 풍성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을 소멸시켜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잘못했다가는 그날에 성령께서 우리 곁을 떠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20년 08월 09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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